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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람들’의 친일 기록(2)조선일보 대해부 : 부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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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4.0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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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구(李瑞求, 창씨명 牧山瑞九, 1899~1981)-‘홍도야 우지 마라’ 노랫말 쓴 극작가

1931년 희곡 <동백꽃>을 <신민> 제67호에 기고하였고, 극단 연극시장·신무대·협동신무대 등을 거치며 다수의 극본을 창작했다. 1935년 11월 동양극장이 개관하자 그곳 전무로 일하면서 <어머니의 힘>을 비롯한 다수의 대중극을 창작했다. 1930년대 중반 시에론축음기회사 문예부 주임 및 대일본레코드회사 문예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8년 12월부터 경성방송국 제2방송부에서 일하면서 방송극 대본을 창작했으며, 「홍도야 우지 마라」 등 대중가요의 작사도 했다.

1940년 12월 조선극작가동호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연예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 12월 22일 결성된 조선연극협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일제에 협력했다. 조선연극협회는 “연극의 건전한 발달과 연극인의 질적 향상을 꾀하여 문화의 새로운 건설에 공헌하자는 목적으로 경무국의 통제 아래 극인(劇人)의 행동과 사업을 단결하자”는 취지에서 결성되었다. 협회 결성 이전에 이미 일제 당국과 사전 조율이 있었는데, 매일신보 1940년 11월 18일자에는 부민관 회의실에서 조선총독부 야기(八木信雄) 경무과장과 호시데 사무관이 이서구·박진·김관수 등과 회동하여 “연극의 문화적 사명과, 또는 대중과 가장 친하기 쉬운 종합예술로서의 연극을 시국이 요구하는 신체제로 개조할 필요성을 이해하여 여러 가지 구체적인 실천방법에까지 논급”하고 “현존한 연극의 연합체가 조직되어 당국과 협조하는 기관을 만들리라는” 합의를 내어 위의 세 사람을 그 설립위원으로 선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통제’ ‘협조’ 등의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연극협회는 표면상 연극인들의 자발적 민간단체의 외양을 띠고 있으나 성격에 있어서는 일제 당국의 요구가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외곽단체였다. (…)

(…) 조선연극협회의 모든 사업은 철저히 주무 관청의 승인과 당국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사업은 연극보국주간과 이동연극대의 조직, 연극인 자격 심사 등이었다. 연극보국주간은 중앙의 주요 연극단체들의 경연을 통해 이른바 ‘국민연극’의 본보기를 보이는 행사였고, 이동연극은 생산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일제의 국책을 선전했다. 연극인 자격 심사는 연극인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의 일환으로서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심사에 통과한 회원들은 신사참배, 국방금 헌납, 부여신궁 근로봉사 등에 동원되었고, 심사에서 제외된 자는 일체의 연극활동을 할 수 없었다. 협회 회장으로서 이서구는 이 모든 협회 사업을 주관했다. (…)
조선연극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1941년 1월부터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위원을 겸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는 문화단체들을 더 효율적으로 전시체제에 동원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약 70여명의 문화부 위원이 선임되었고, 각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연락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
조선연극협회 회장과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1941년 2월에는 좌담회 「문화익찬의 반도체제-금후 문화부 활동을 중심하여」에 참석하여 이동연극을 통한 선전활동 강화를 역설하였고, 매일신보 1941년 10월 21일자 「금후의 국민극」에서는 “고도국방국가 건설을 위해 연극인이 대동단결하여 국민연극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

같은 해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했고, 12월에 조선방송협회 편성과원을 지냈다. 이어 1942년 1월에는 필승체제 하 연극인 결의 좌담회 「국민극의 제2년」에 참석하여 연극인들의 적극적인 전쟁협력을 주문했다. 이외에도 문화인 성초(聖鍬)부대의 일원으로서 부여신궁에 근로봉사하고 소감문 「사람값을 한 기쁨」을 <신시대> 1941년 3월호에 기고했다. (…) 1942년 2월 20일 일제의 싱가포르 점령을 기념하여 「감격과 축하」를 매일신보에 기고했고, 1943년 7월 조선군 보도부가 주최한 보도연습에 참가한 후 그 소감문 「‘보도연습기」를 <조광>에 기고해 지원병을 미화하고 선전했다.

1943년 들어 조선문인보국회로 자리를 옮겼다. 조선문인보국회는 조선문인협회를 비롯한 제 문학관련 단체를 통합한 거대조직으로서 역시 조선총독부의 지휘 아래 문인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외곽단체였다. 이 단체에서 이서구는 1943년 6월 소설희곡부 상담역을, 1944년 6월 극문학부 간사장, 1945년 8월 극문학부 회장을 맡았다. 1944년 <국민문학> 5월호에 「국어극의 현상」, <신시대> 6월호에 「증산현지파견 문인 보고」, 7월호에 「새로운 농촌문화를 위하여」 등을 기고하여 일어극의 보급을 역설하고 이동연극의 강화를 주장했다.

조선연극협회와 조선문인보국회 등 조선총독부 외곽 문예단체에서 주요간부를 지내며 활발히 활동하는 동시에 다수의 희곡을 집필했다. <익모초>(1막), <결전 일족>(1막), <곡산 영감>(1막), <만월>(1막), <백제의 검>(3막4장), <대장부>(3경), <봄의 역사>(1막) 등 다수의 일어극을 창작하였는데, 이 가운데 <익모초>, <결전 일족>, <봄의 역사> 등은 이동연극 대본으로 창작한 것이었다.

창작물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무용극 <부여회상곡>이다. 총인원 200여명을 동원한 이 무용극은 모두 13곡으로 구성됐는데 무용가 조택원(趙澤元)이 주연을, 조선연예협회 회장인 이철(李哲)이 기획을, 조선연극협회 회장인 이서구가 대본을 맡았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하고 조선총독부가 후원하였으며, 공연의 순익 전액은 부여신궁 조성기금으로 쓰였다. 당시 2만2800 원이라는 큰돈이 지출된 거대 공연이었고,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직접 휘호를 쓸 만큼 지지와 후원을 받았다.


김기진(金基鎭, 창씨명 金村基鎭, 金村八峰, 1903~1985)-‘임경래 축출의 주역 맡은 문학비평가’

(…) 1922년 5월 (조각가인 형) 김복진과 함께 당시 재도쿄 조선인유학생 연극단체인 토월회(土月會)의 창립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3년 5월경 토월회 귀국공연을 위해 릿교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채 조선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개벽(開闢)>에 평론 「로므나드 상티망탈」을 발표하면서 평론가로 정식 등단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문학동인지 <백조(白潮)의 창립 동인으로 참가했다.

1924년 10월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전신 중 하나인 좌익 문예단체 파스큘라(PASKYULA)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10월 이후 매일신보 사회부 기자로 일했다. (…) 1930년 8월부터 1933년 4월까지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냈다. 1931년 9월 ‘카프 제1차 검거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10일만에 석방됐다. 1934년 9월 ‘카프 제2차 검거사건(전주 사건, 또는 신건설사 사건)’으로 전주경찰부에서 조사를 받고 70일 만에 남원경찰서에서 석방됐다. 1940년 경기도 경찰국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했다.

1938년부터 1940년 1월까지 매일신보 사회부장을 지냈다. 1938년 9월에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호남과 남해안을 시찰할 때 매일신보 사회부장으로 수행하면서 「제주도 남 총독 수행기」(9.20~9.27)와 「소록도를 보고 광주로-남총독 수행기」(9.28~9.29)를 썼다. 이 중 9월 22일자 「제주도 남 총독 수행기 3-놀라운 각고 근면, 도내의 만리장성」에서는 도내 소학교 학생들이 일본의 제2 국가(國歌)라는 「바다로 가면」을 부르고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며 황민화되어 가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1939년 10월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 이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촉탁을 지냈다. 1942년 8월호 <춘추>에 발표한 「조선영화의 새 출발」에서 현하 시국이 조선영화에 요구하는 안건으로 “국어(일본어) 보급, 내선일체 이념의 철저, 일본정신의 파악, 필승체제로의 적극적 협력, 직역봉공(職域奉公), 증산·저축·개로(皆勞)의 실천, 방공·방첩 정신의 앙양, 동양윤리 사상의 함양, 과학 지식의 보급, 시사인식의 강화 등”을 들었다.
1943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 하에 조선문인협회·조선하이쿠협회·조선센류협회·국민시가연맹 네 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문인보국회로 출범하자 평론수필부의 평의원을 맡았다. 같은 해 8월 징병제 실시 기념으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개최한 ‘연극과 낭독의 밤’에서 김기진의 시가 낭독되었다. (…)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가 주최한 결전태세즉응재선문학자총궐기대회의 준비위원, 조선문인보국회의 상무이사 겸 평론수필부 회장을 맡았다. 같은 해 8월 조선문인보국회가 주최한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문화인에 격함」이라는 연설을 하면서 “우리 일본 국민의, 동아인의 오늘날 역사적 지상명령은 미·영을 격파해서 아시아를 해방시키는 일이며, 아시아 10억의 민중을 악마의 손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하루빨리 전력을 증강하는 일이며, 1억의 전력을 급속히 증강하기 위해서는 반도 2천6백만의 혼이 불덩어리로 활활 타오르는 일”(<신시대>, 1944년 9월호)이 필요하다 하며 ‘반도인’의 혼에 불을 댕길 이는 바로 ‘반도의 문화인’이라고 역설했다. (…)

1945년 2월 이후 일본의 신태양사가 주관한 제6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6월 언론인의 ‘문필보국’을 목적으로 발족한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를 맡았으며, 7월 일본 내 파쇼단체인 대일본흥아회의 조선지부 총무위원을 맡았다. 같은 달에 조선언론보국회와 각 지방신문사가 주최한 ‘본토 결전과 국민의용대 대강연회’에서 경북 평의원으로, 8일에는 상무이사로 위촉되어 해방될 때까지 활동했다. (…)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적성국인 미국과 영국을 비난하는 한편 일본의 승리를 노래하면서 ‘대동아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1941년 12월 13일자와 12월 16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아세아의 피」에서 “마침내 선전포고다! / 영·미의 두상(頭上)에 폭탄의 피를 퍼부어라! (…) / 태평양 동쪽의 언덕 언덕을 구석구석을 / 기만! 통갈(恫喝)! 회유! 사취! 살육! 강탈! / 끝없는 탐욕의 사나운 발톱으로 유린하여 오던 / 오! 저 악마의 사도를 몰아낼 때가 왔다 // 극동의 해가 찬란한 해가 뚜렷한 일장기가 / 아침 하늘에 빛난다 이글이글 탄다 / 황공하옵게도 조서(詔書)가 내렸다! ‘선전포고’다! / 1억의 국민이 한꺼번에 일어섰다 기약하지 않고 일치해 버렸다”고 노래했다. (…)

1942년 2월 15일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2월 20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신세계사의 첫 장(章)-황군의 싱가폴 점령의 첩보를 듣고」에서는 “일본의 심장을 어제까지 겨누고 노리던 귀축! / 동아에 있어서의 영국의 무장한 척골(脊骨)! / 오오, 저 싱가폴의 시가에서 기미가요의 합창이 들리누나 / 홍콩을 빼앗고 싱가폴마저 떨어뜨렸으니 / 다음은 포트 다윈이다! 시드니다! / 캘커타다! 봄베이다! / 만주와 인도를 아세아를 돌리라! // (…) / 문화의 고향! 민족의 창고! / 세력의 발원지! 역사의 진원체! / 오오, 우리의 아시아를 일억의 손으로 다시 세우자! / ‘싱가폴’의 하늘 높이, 당속 깊이 일장기를 세우고서 / 신세계사의 첫 장을 쓰자! 십억의 민족의 피로써 쓰자!”고 노래했다. (…)

1944년 10월 19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의기충천」에서 “(…) 일찍이 우리가 바친 놋쇠그릇들이 모조리 어뢰 되어 / 지금 서남태평양에서 악의 무리를 쳐부수는구나 / 일찍이 공장에 들어간 아우가 누이가 정성을 다해서 / 못 한 개 나사 한 개 소홀히 하지 않은 우리의 비행기가 / 지금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놓치지 않고 뒤쫓아가네 / 아아 주먹에 담을 쥐고 이를 갈면서 우리도 따르자”고 하여 침략전쟁에서의 희생과 그를 뒷받침하는 총후봉공을 주장했다. (…)
「국민문학의 출발-연두의 각서를 대신하여 3」(매일신보, 1942.1.12.)에서는 “신출발을 한 조선문학은 애국문학이다. (…) ‘황국정신의 숭고한 기초 위에 입각하는 것이 먼저 필요한 일의 하나다.’ 황실 중심의 정신, 만민보익(萬民補益)의 정신, 팔굉일우의 정신,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정신 등은 일본 국민의 황도정신의 기본”이라고 주장했다. (…)

그리고 다수의 글을 통해 징병과 학병을 선전·선동했다. 1943년 8월 1일부터 징병제가 시행되자 같은 날 화가 고희동의 호랑이 그림과 함께 매일신보에 발표된 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에서 “반도의 아우야, 아들아 나오라! / 님께서 부르신다, 동아의 백만의 천 배의 /용감한 전위의 한 부대로 너를 부르신다 / (…) /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영광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 죽음 속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의 문이 열리었구나”라며 천황을 위한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조했다. (…)
1945년 3월 13일에 발표한 산문 「근감단편(近感短片) 2」에서는 전후방이 따로 없는 전장에서의 태도에 대해 역설했다. “대적해서 서로 칼을 겨누고 적수(敵手)에게 먹히느냐 먹느냐 하는 생사를 걸고 싸우는 싸움을 하고 있는 그 순간의 병사에게는 낙관도 없고 우리도 없다. 이 지경까지 모든 국민의 심경이 도달한다면 물론 세간만사에 있어서 희로애락을 초월할 것이요 따라서 마누라와 남편이 싸움도 안 할 것이요 어른이 아이를 때리지도 않을 것이요 배가 부르게 밥을 지어 먹지 못한대도 시장한 것을 모를 것이요 윗사람에게 불평도 아랫사람에게 노여움도 다 없을 것이요 다만 증산에 명랑감투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하며 총력전의 정신을 강조했다. (…)

해방 후, 1945년 9월 애지사(愛智社)를 창립하여 인쇄출판업을 시작했다. 1949년 8월 반민특위가 공개한 미체포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자수를 권유받았으나 자수하거나 체포된 사실 없이 공소시효인 8월 30일을 넘겼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7월 2일 서울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즉결처분을 받았지만 닷새 뒤인 7월 6일에 살아났다.


주요한(朱耀翰, 창씨명 松村紘一·松村耀翰, 1900~1979)-‘동경제1고보 출신의 번뜩이는 아이디어’

(…) 1925년 7월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했으나 1926년 9월 퇴사했다. 1927년 7월 동아일보에 재입사해 학예부장, 평양지국장, 편집국장 대리, 편집국장, 논설반 기자(학예부 겸무), 편집국 촉탁 등을 역임한 뒤 1932년 11월 퇴사했다. (…)

1932년 9월 조선일보에 입사해 편집국장과 전무취체역을 지낸 뒤 1933년 9월 무렵 퇴사했다. 1933년 11월 동아일보에 재입사해 1934년 8월까지 잡지부장을 지냈다. 1934년 2월경 주식회사 화신(和信: 사장 박흥식)에서 조사선전부장으로 일했으며, 1937년경에는 화신사 취체역(이사)으로 재직하는 한편 박흥식이 사장으로 있는 대동흥업주식회사의 중역으로 활동했다.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화신의 취체역을 지냈다. 1934년 6월 수양동우회 이사장을 맡았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됐다. 1938년 11월 수양동우회사건 예심 보석 출소 기간 중에 전향을 선언하고 조선신궁을 참배했다. 같은 해 12월 경성 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인 시국유지원탁회의(時局有志圓卓會議)에 참석해 “이 비상시에 있어서는 우리는 일본이 승리를 얻어야 하겠다는 입장에서 황군의 필승을 위한 총후의 적성(赤誠)에 전력을 바쳐야 할 것”(<삼천리>, 1939년 1월호)이라고 발언했다. 같은 달 수양동우회를 대표해 종로서에 국방헌금으로 4000원을 헌납했다. (…)
(…) 1940년 10월경 내선일체 운동단체인 국민훈련후원회가 벌인 일본어보급운동에 참여했다. 같은 해 12월 ‘황도사상’ 전파를 위한 단체인 황도학회의 결성식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8월 전쟁협력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 결성식에 참여해 상설기관화를 위한 준비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됐다. 이 자리에서 “금일의 시국에 대하여는 말보다 실행이라고 하는 것을 통감하고 있는 금일의 전쟁은 사상, 경제, 무력 등으로 하는 이른바 총력전이다. 이 전쟁은 목전에 전개되고 있다. 의용봉공(義勇奉公)은 논의보다도 실행에 있고, 또 본 기관을 상설기관으로 함으로써 전시봉공의 의용화 운동에로 매진해야 할 오늘 저녁, 임전대책협의회를 개최하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삼천리>, 1941년 11월호)고 발언했다. (…)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41년 12월 14일에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부민관에서 전선(全鮮)국민대회가 열렸을 때 저녁행사의 하나로 마련된 미영타도대연설회에서 ‘루스벨트여 답하라’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을 방화범, 해적, 어릿광대 등에 빗대면서 “그대들의 악운은 이미 다 되었”고, “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해방성전의 용사 되기를 맹서하고 있다”(<신시대>, 1942년 1월호)라고 했다. (…)

1943년 6월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加藤武雄) 일행의 ‘전선(全鮮)시찰종합좌담회’에 조선문인보국회 측 인사로 출석했다. 7월 조선문인보국회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가 공동 주최해 경성 체신사업회관에서 일본 저명 잡지사 편집장으로 구성된 조선시찰단과 조선지역 문화인들이 간담회를 열 때 ‘싸우는 반도의 실태’를 두루 시찰하는 일행에게 조선의 문학·음악·영화·아동문화·잡지·미술 등 각종 문화 부문의 실정을 소개하는 데 참여했다. 7월 일본의 신극배우 마루야마 사다오(丸山定夫)가 경성방송을 통해 조선지역 시인들의 시를 낭독할 때, 조선인 지원병 최초의 전사자인 이인석 상등병을 기린 주요한의 시 「첫 피」도 낭독됐다. 같은 달 일본어 시집 <손에 손을>을 발간했다. (…)

1944년경 주식회사 화신이 안양에 비행기공장을 짓는 데 관여해 이후 해방될 때까지 이 공장의 운영을 책임졌다. 같은 해 2월 경성부 종로경찰서가 주도한 황민화운동 단체에 참여해 ‘총후보국’에 앞장섰다. (…) 3월 시집 <손에 손을>로 도쿄 신태양사가 주관한 제5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상을 수상한 뒤, 4월 명치정(明治町) 자운장에서 시집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

1940년 9월호 <조광>에 시조 「여객기」를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통해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 시조에서 “동경서 오신 벗과 북경서 오신 벗님 / 동아의 너른 터를 한 집인 듯 여기도다 / 오대주  한뜰 될 날을 머지않아 보오리”라며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었다. ‘대동아공영권’과 침략전쟁 찬양은 「동방해방」(<삼천리>, 1940년 12월호에서도 계속됐다. “쇠는 쇠로써 / 화약은 화약으로써 / 엔진은 엔진으로써 / 이윽고 터다짐이 시작된다. /이윽고 골라진 터 위에/ 불과 피로써 다진 터 위에 / 새로운 질서가 선다”라며 결의를 다졌다. 1942년 1월호 <삼천리>에 발표한 시 「하와이의 섬들아」는 “12월 여드렛날 네 위에 피와 불이 비오듯 나릴 때 / 동아 해방의 깃발은 날리고 정의의 칼은 번듯거림을 네 보았으리라 / 이날 적국의 군함, 침몰된 자 기함(旗艦) ‘아리조나’를 위시해서 / ‘오클라호마’와 ‘웨스트 버지니아’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 깨어져 다시 못 쓰게 된 자도 네 척, 이름 좋은 진주만은 비참한 시체가 되고 / 횡포한 아메리카 나라의 아세아 함대는 앉은 자리에서 / 반신불수의 병신이 됨을 네 보았으리라”며 일본군의 진주만 습격을 찬양했다. (…) 1942년 2월 일제가 말레이반도의 요충지인 싱가포르를 점령하자마자 2월 18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싱가폴 함락가」에서 “깨어졌다 싱가폴 물러서라 영국아 / 어젯날 가증하던 원수의 소굴 / 오늘부터 아세아의 미쁜 문지기 / 이름조차 장하도다 사자항구(獅子港口: 싱가포르)여 // 깨어졌다 싱가폴 물러서라 영국아 / 거만한 동양함대 단숨에 깨고 / 장난삼던 향항성(香港省: 홍콩)도 겨우 18일 / 마래(馬來: 말레이시아) 전선 천 킬로가 두 달도 못 가 // 깨어졌다 싱가폴 물러서라 영국아”라고 했다. (…)
침략전쟁 찬미는 자연스레 전쟁의 주요 상대국인 영국과 미국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42년 2월호 <신세대>에 발표한 산문 「영미의 동아 침략」에서 “대동아 천지에 있어서 영국이 제해권을 잡게 됨으로부터 그의 침략의 마수는 세 가지의 모양으로 나타났으니, 첫째, 영토를 빼앗아 원주민을 노예로 만든 것 (…) 둘째, 영토를 빼앗아서 원주민을 쫓아버리고 미국처럼 백인의 나라를 건설한 것 (…) 셋째, 경제적 침략에 의하여 반식민지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또 1944년 10월호 <신세대>에 발표한 산문 「적, 미국의 사상모략」에서 “동아를 사상적으로 분열하여 그 수호자인 일본을 말살하고 영원히 동아인을 그들의 ‘번영’의 희생을 만들고자 함이 그들의 말 아니 하는 전쟁목표다”라며 미국을 비난했다. (…)

작가의 총후봉공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학병, 지원병, 징병, 징용 등을 선전·선동하는 일이었다. 중일전쟁 개전 4주년을 맞아 1941년 9월호 <신세대>에 발표한 산문 「임전조선(臨戰朝鮮)」에서 “우리 일본제국의 자유는 우리 일본국민의 피로써야 살 것이다. (…) 오늘날 그때가 왔다. 언제, 어떠한 모양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지 그것은 알 필요가 없다. (…) 오직 우리는 부르실 때 바칠 뿐이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요 감사요 자랑이요 물려줄 것이다”라며 지원병 응모를 선동했다. 1941년 3월호 <신세대>에 발표한 시 「첫 피-지원병 이인석에게 줌」에서 1939년 6월 22일에 전사한 이인석의 입을 빌려 “나는 간다, / 만세를 부르고 / 천황 폐하 만세를 / 목껏 부르고 / 대륙의 풀밭에 / 피를 뿌리고 / 너보다 앞서서 / 나는 간다 // 피다. // (…) // 형아 아우야, / 나는 간다. / 너보다 앞서 / 피를 뿌린다. / 앞으로 너들의 피가 / 백으로 천으로 / 만으로 십만으로 / 뿌려질 줄을 / 나는 안다. / 대륙에서 / 대양에서 / 넘쳐흐르게 될 줄을 / 나는 안다”고 하면서, 천황을 위해 조선 청년들이 지원병이 되어 죽어갈 것을 선동했다. (…) 1942년 5월 일본 각의가 1944년부터 조선인 징병제도 실시를 결정하자 1942년 <신시대>에 발표한 산문 「징병령 실시와 조선청년」에서 “이제사 우리도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게 됐다. 우리의 두 어깨에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영광의 책임이 메어졌다.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에 있어서 우리들의 적혈(赤血)로써 그 기초를 다질 수 있게 됐다”며 자랑스러워 했다. 1943년 5월에는 해군특별지원병제도 실시가 결정되자 「아침햇발-해군지원병제 실시 발표된 날에」(매일신보, 1943.5.13.)에서 “산에 가면 무덤에 꽃도 피건만 바다에 흩는 용사 표적도 없어 / 6대양 험한 물결 나의 집이요 표적 없는 무덤이 내 고향이라 // (…) // 살아옴을 바라리 특별공격대 시방 떠납니다 다만 한마디”라고 읊으면서 ‘가미카제(神風)’로 출전하는 조선 청년을 숭고하게 묘사했다. (…)

이와 같이 지원병, 징병, 학병 등을 선전·선동하면서 천황과 대동아전쟁을 위해 조선 청년들이 목숨을 바치길 요구했다. 1944년 5월호 <방송지우>에 발표한 산문 「구단(九段)의 꽃」에서 조선의 지원병, 학병, 여자정신대 등을 ‘구단’에 만발한 ‘젊은 사쿠라꽃’에 비유했는데, 이들 모두가 ‘천황 폐하’를 위해 죽어 도쿄 구단에 있는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신(神)’으로 모셔지도록 하자는 의미를 지녔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45년 1월 30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피갑폭뢰(被甲爆雷)-박촌(朴村) 상등병에게 드림」에서도 폭뢰를 가지고 자살공격을 감행한 조선인 병사 박촌 상등병을 기리며 이를 따르자고 선동했으며, 1945년 5월 25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전 국민이 육탄으로」에서는 이른바 ‘본토결전’ 준비에 발맞추어 조선에서도 조직하려는 ‘국민의용대’를 선전하며 조선인들의 무조건적 희생을 요구했다. (…)

해방 후, 1945년 10월 무역회사 흥한(興韓)회사, 1946년 상호(相互)무역, 1947년 영풍(永豊)기업사를 설립하고 1946년 한국무역협회와 대한상공회의소 창설에 관여하는 한편, 한국무역협회 초대 부회장에 취임했다. 1946년 10월 초순 이광수·김대우·계광순·최린 등과 함께 ‘흥사단 국내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1948년 국민신문의 편집국장을 맡았다. 1949년 4월 28일 반민법 제4조 제10, 11항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 산하 특경대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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