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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람들’의 친일 기록(1)조선일보 대해부 : 부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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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2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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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이 2005년 8월에 펴낸 <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대>에는 개인 이름으로 실려 있는 사람이 98명이다. 조선일보사에 근무했거나 글을 썼거나 그 신문을 적극적으로 도운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20명은 명백한 친일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대>에는 친일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거나, 있다고 해도 특정인 몇 명에 관한 간략한 사실들뿐이다.

이 ‘부록’에는 이 책의 본문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예종석, 조진태, 방응모를 뺀 17명의 친일 행적을 상세히 소개하겠다. 그 17명 속에는 한국현대문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들이 들어 있다. 시인 김동환, 소설가 이광수·김동인과 채만식, 시인 노천명이 바로 그들이다. 김동환과 이광수는 일제강점기에 언론인으로도 이름을 떨친 이들이라 그들이 어떻게 친일을 했는지는 젊은 세대에게 의미 있는 교훈을 주는 역사적 자료가 되리라고 본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양해를 얻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조선일보 사람들’ 17명의 친일 행적을 여기에 옮긴다. 순서는 <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대>에 나온 대로이고, 각자에 대한 제목은 그 책의 것을 인용하겠다.


홍양명(洪陽明, 1905~?)-‘4대 외국어 능통한 외신부장’

(…) 1928년 이른바 제4차 공산당사건에 연루되어 도쿄에서 검거되었다. 신의주지방법원의 1심 판결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30년 5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출감했다.

이후 1931년 3월부터 조선일보 상하이 특파원으로 활동하다가 1932년 6월 조선일보사에 편집부 기자로 입사했다. 1932년 8월 문필가들의 친목 도모, 경제적 이익 옹호, 신진작가 소개를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문필가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위원을 지냈다. 1935년부터 조선일보 외신부장, 1936년 1월부터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8월 사직했다. (…) 1937년 3월 조선일보 신의주지국 주최로 신의주부 공회당에서 열린 시국경제대강연회에 조선일보 주필인 서춘과 함께 연사로 참여했다.

1938년 만주국 수도 신경에 있던 만선일보 정치경제부장으로 옮겼다. 만선일보는 1937년 10월 일제의 지원을 받아 만몽일보와 간도일보를 통합하여 창간한 친일 어용(御用) 신문이다. 만주에서 한글로 발간한 유일한 신문으로 일제의 황민화정책과 만주국 건국이념인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재만 조선인을 상대로 선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40년 1월 만선일보 편집국장 대리를 거쳐 그해 9월 편집국장에 임명되어 만선일보 제작을 총괄했다. 그해 2월 11일부터 15일까지 ‘황기 2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도쿄에서 개최된 동아조고자간담회(동아언론인간담회)에 만주국 조선계 대표로 참석했는데, 이 간담회에서는 동아 신질서 건설에 대한 협력방책과 일본·만주국·중국 언론인의 친화연계 강화에 대해서 토의했다. 홍양명은 도쿄기행과 동아조고자간담회 보고서를 만선일보 2월 16일자부터 26일자까지에 다섯 차례 연재했다.

1940년 1월부터 만주국 협화회(協和會)의 신징 거주 조선인 분회인 수도계림분회(首都鷄林分會)에서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만주국협화회는 이범익·최남선·박석윤 등을 고문으로 두고 국무원에서 재직하고 있는 중견관료와 조선인 유지들로 구성되었으며 국방헌금 및 위문대(慰問袋) 헌납, 직업보도(職業輔導), 이민 안내 등의 사업을 벌였다. 만주국협화회 는1932년 7월 일본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 아래 ‘민족협화(民族協和)’의 기치를 내걸고 “만주국의 건국 정신을 실천할 전 만주의 유일한 사상적·교화적·정치적 실천단체”를 표방해 만들어졌다. 각지에 분회를 조직하여 만주국 지배체제 안으로 민중을 끌어들이면서 항일운동에 대한 내부교란과 파괴공작, 선전선무공작을 수행하는 한편 전시동원조직의 역할을 담당했다.

1940년 10월 계림분회 임원전체회의를 통해 계림분회의 진용을 전면적으로 강화할 때 평의원에 유임되었다. 같은 달 수도계림분회 주도로 동만주 일대의 항일유격대를 귀순·투항시키는 임무를 띤 특별공작 부대들을 후원하는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가 결성될 때 간사에 선임되었다.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고문에는 이범익·최남선·유홍순이 선임되었고 윤상필·박석윤·김응두가 총무를 맡았다.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는 조직의 목적을 “동남지구특별공작에 대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하여 명랑한 도의국가 완성에 공헌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공작요령’으로서 “1)귀순권고(전단·방송), 2)일만군경에 대한 위문, 3)귀순자에 대한 보도(輔導), 4)주민에 대한 안정(安靖)”을 내걸었다. 이후 11월과 12월 두 달 동안 다수의 지부 결성식에 참여하여 공작요령을 선전하고 성금 모금을 독려했다. 1940년 2월 간사장 장규원, 총부 윤상필과 함께 옌지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 위치한 소노베(園部)부대(간도특설대의 별칭)를 찾아가 1차분 성금 10만 원을 헌납했다. 이어 11월 22일 총무 김응두와 젠다오성(間島省) 차장 유홍순, 만주국 치안부 이사관 김창영과 함께 다시 소노베부대를 방문하여 2차분 성금 5만4157 원을 전달하고 만선일보 1940년 12월 24일자에 성금전달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또한 1940년 말 동남지구특별공작위원회 명의로 「김일성 등 반국가자에게 권고문, 재만동포 150만의 총의」라는 전단을 다량 제작하고 비행기로 살포해 동만주 지구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항일유격부대의 투항을 독려했다. 1941년 1월 수도계림분회의 기구 개편 시 문화부장에 선임되었다.

1941년 8월 만선일보 편집국장을 그만두고 매일신보 신징지사장 겸 특파원으로 전근했다. 1942년 3월 1일자 매일신보에 만주국 건국 10주년 건국제를 맞이하여 「북방 방위의 철벽」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만주국 건국의 계기가 된 만주사변을 “구주(歐洲)와 동아(東亞)의 불합리한 현상타파운동의 대태동(大胎動)”이라 규정하면서 소련과 국경을 맞댄 만주국이 공산주의 세력을 한걸음도 동아에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 방파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자평했다. 또한 일제가 일본인과 조선인을 만주에 대거 이주시켜 만주를 동북대륙 방공기지로 만들기 위해 추진한 만주 개척정책에 대해 “우수한 대화(大和)민족이 북방에 대거 이동되어 민족협화의 중추 역할을 해야만 비로소 동아의 영원한 평화와 안정이 확보된다”고 주장했다. 또 신시대 1944년 2월호에 「재만동포의 결전(決戰)생활」이란 글을 기고해 재만조선인에 대해 “조선 내의 반도인보다도 (…) 제국 신민된 광영을 깊이 느끼고, 따라서 일본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자질을 획득하려는 열의”가 대단하다고 자부했다. 또한 지도의 열의에 따라서 “완전한 일본인화를 위한 각종 기획, 행사”가 도처에 성행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했다.

이밖에「 「조선민중과 만주국의 개척-강밀봉(江密峯)개척훈련소를 찾아」(<삼천리>, 1940년 3월호), ‘청추(淸秋)의 송화강반-구로(舊露)의 족적과 북만의 발전상」(<삼천리>, 1940년 10월호), 「만주국경제의 발전단계 1~4」(<매일신보>, 1941.9.9.~9.11), 「재만조선인 만주국 발전에 협력」(<매일신보>, 1941.9), 「재만조선인 내선일체관념 앙양」(<매일신보>, 1941.9.21.), 「재만조선인의 현세(現勢)」(<매일신보>, 1942.3.4. 3.5) 등 주로 만주와 관련된 친일논설과 기사를 다수 기고했다.


김동환(金東煥, 창씨명 白山靑樹, 1901~?)-‘잡지 발행인 된 국경의 밤 시인’

1924년 5월 <금성>지에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로 등단했다. (…) 같은 해 10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들어가 1925년 5월까지 근무했다. 1925년 3월 첫 시집이자 우리나라 신시(新詩) 사상 최초의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간했다. 같은 해 6월 시대일보 사회부 기자로 들어가 1926년 8월까지 근무했다. (…) 재정난으로 폐간된 시대일보가 1926년 11월 중외일보로 재발행 될 때 사회부 기자로 들어갔다가 1927년 5월 조선일보로 이직한 후에 사회부 차장으로 1929년 12월까지 근무했다. (…)

(…) 1930년 6월 삼천리사를 만들어 종합월간지 <삼천리>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1930년대 중후반부터 체제순응적 잡지로 변해 내선일체와 황민화운동을 적극 선전하였다. (…)

1939년 3월 ‘북지황군(北支皇軍) 위문 문단사절’ 행사에서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문단사절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최종심에서 탈락했다. 당시 최종 선정자는 김동인·박영희·임학수·였다. 같은 해 5월 아서원에서 열린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 귀환 위로환영회에 참가했고, 6월에는 조선총독부 도서과가 주도한 문인·출판업자 간담회에 참가했다.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 10월 출범할 때 간사를 맡았다. 같은 해 11월 조선문인협회 이사로 ‘전선 병사 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2월 조선문인협회가 개최한 사업계획 협의 간담회에 참가하여 문인회관 건설, 문예상 설정, 조선 전 지역과 도쿄에서 순회 문예의 밤이나 좌담회 개최 등을 협의했다. (…)

1940년 5월 여러 사람의 친일연설모음집인 <애국대연설집>을 편집·발간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오늘날 우리들 전 국민이 할 일은, 진실로 지나사변에 승전하여야 하겠고, 그러고 나서는 전후(戰後)의 신아세아 건설운동에 전력을 다하여서 참가하여 우리가 사는 이 아세아로 하여금 유사 이래에 처음 보는 부(富)와 문화가 퇴적하는 큰 황금시대를 재래(齎來)하여야 하겠다”면서 이에 발맞추어 시대의 선구자들의 ‘애국의 지정(至情)’을 기울인 ‘경세(經世)의 탁론(卓論)’을 묶어 조선 민중을 울리겠다는 취지로 발간 의도를 밝혔다. (…)

1940년 8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주최로 일본 작가 기쿠치 칸(菊池寬),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나카노 미노루(中野實) 등이 중심이 돼 반도호텔에서 열린 문예좌담회에 참가하여 ‘내선문학’의 교류를 꾀했다. 10월 12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문사(文士)부대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 행사에 참가했다. <삼천리> 1940년 12월호에 발표한 소감기 「상무정신의 고조」에서 “여기에 뽑혀온 장정 수가 1000명이지만, 지원병이 되려고 지원했던 청년 남아의 수가 전 조선에 8만4000명을 헤아렸다 하니 이것으로써 문약에 흘러버렸던 이 땅 사회의 기풍이 부국강병의 일로(一路)로 약진하는 것인 줄 알고 마음이 든든하여지기 한이 없습니다. (…) ‘펜과 탄환은 같은 철’로 되었다는 말이 있거니와 불행히 청년기를 아무 군사적 훈련 받을 기회 없이 지낸 우리들은 총후에서 붓이나 들고 시와 소설로 이 지원병 사상을 고취하기에 전력을 다할 것임을 절실히 느꼈습니다”라고 썼다. 그리고 그 소감을 다듬어 같은 잡지에 발표한 시 「1천 병사의 수풀」에서 “사랑하는 병사여! / 맥추(麥秋) 익어가는 4백여 주(州) 넓은 벌엔 그대의 선배들이 / 우리의 명예와 신뢰를 짊어지고 지금 싸우고 있잖은가 / 그 중에 두 분은 벌써 ‘호국의 충혼’이 되어서 / 정국(靖國)신사 신전 속에 고요히 누워 계시잖은가 / 아직도 4년에 미치는 동아의 전화(戰火)는 그칠 줄 몰라서 / 백만의 요우(僚友)가 포첩(砲疊) 속에 분전하고 있거늘 / 어서 그대도 조련(操練)을 마쳐 나아가 군고(軍鼓)를 치라, 나아가 나팔을 불라”고 노래했다. 12월 8일부터 13일까지 조선문인협회 시국강연부대의 일원으로 경상도 지역과 충남 공주를 순회하며 ‘애국정신과 지원병’이라는 연제로 강연했다. 12월 내선일체와 조선인의 황민화를 위해 결성한 황도학회(皇道學會)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
(…) 1941년 2월 부여신궁 건설을 위한 ‘문화인 성초(聖鍬)부대’에 참가했으며, 부민관에서 열린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제1회 간담회에 참석했다. 5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출판부문 연락계를 맡았다. 같은 달에 여러 사람의 기행문 모음집인 <반도산하>를 편찬하여 발행했다. (…)

1941년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경기도연맹·경성부연맹 3단체가 조직한 지원병 격려연설의 파견위원으로 선출돼 경성부내에서 순회연설을 했다. 같은 달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아서원에서 열린 내선(內鮮)작가 간담회에 참석하여 ‘국민문학’ 건설에 대해 논의했다. 12월 조선문인협회 주최, 매일신보사·경성일보사 학예부 후원의 결전문화대강연회에서 ‘태평양 문화 건설의 추(秋)’라는 제목으로 연설했으며, 조선임전보국단 전선(全鮮)대회의 일환으로 열린 미영타도연설회에서 강연했다. (…)

(…) 1942년 5월부터 <삼천리>를 <대동아>로 제호를 바꿔 발행했다. 김동환은 개제호에 실은 「내외동포에 호소한다-본지 대동아로 개제, 재출발에 즈음하여’에서 영미를 동아에서 완전 추방할 때까지 전진하기 위해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야마토(大和)정신’ 속으로 뛰어들어 최대의 양식과 희생을 바치자고 호소했다. (…)

1943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 하에 조선문인협회·조선하이쿠(俳句)협회·조선센류(川柳)협회·국민시가연맹 4단체가 통합하여 출범한 조선문인보국회의 심사부장을 맡았다. 일본인 남방종군작가 이노우에 고분(井上康文)과 우에다 히로시(上田廣)를 맞이하여 4월 29일 조선문인보국회가 반도호텔에서 마련한 내선작가교환회(內鮮作家交驩會)에 참석하여 문학의 ‘내선 우의(友誼)’를 논했다. (…) 1944년 들어 태평양전쟁 개전 3년째를 맞아 조선의 각 읍면 총력연맹에서는 2월 8일의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 태평양전쟁 개전일인 1941년 12월 8일을 기려 제정된 매월 8일의 기념일)로부터 약 한 달 동안 ‘국민총궐기대회’를 열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4년 2월 보도특별정신대를 결성하여 조선 각지의 대회에 보냈는데, 김동환은 경상북도로 배정받았다. 7월 일본어 논문 모음집 <조선동포에게 고함>을 편찬하여 발간했다. 이 저서는 징병제·대동아전쟁·내선일체·전시 식량증산·징병제 하의 조선부인의 역할 문제 등을 주로 다루었으며, 필자는 언론사 사장·일본문학보국회원·귀족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는 일본인들이었다. 9월 조선인의 노동력 동원을 독려하기 위해 결성된 국민동원총진회 상무이사를 맡았다. 10월 국민동원총진회 주최, 경성일보사 후원의 국민동원대강연회에서 ‘부산 부두 유감’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 1945년 2월 대화동맹(大和同盟) 심의원, 6월 대화동맹의 자매당인 대의당(大義黨)의 위원을 맡았다.

문필활동에서 김동환은 1938년 5월 <삼천리>에 「시평-권문세가의 반성을 촉구함」을 발표하면서부터 일제에 협력하였다. 1938년 4월 2일 육군지원병제가 실시된 후에 끈 이 글에서 “오늘날의 이 전시 하에 신민 된 자 밟을 길이란 생명을 국가에 바침이 그 상(上)이요, 그 다음은 재화를 바침이 중(中)이요, 그리고 온갖 노동력과 성력(誠力)을 다 바쳐 국책의 선(線)에 따를 것이다. // 이제 조선의 민중 앞에는 병역에 참가할 길이 열려진다. 즉 지원병으로서, 조선인 청년들도 조선군 사령관 휘하에 참치(參馳)하여 19, 20의 양 사단 영문(營門) 안으로 들어갈 길이 열리었다”라고 했다. 「우리들은 7인」(<대동아>, 1942년 5월호)은 “우리들은 겨우 일곱 / 수는 적으나 바위라도 치리라 / 하고 수저운 듯 손 들며 일어서는 7인의 청년 / 어찌 일곱이 적다 하리 / 7백에서 줄고 줄어 오늘의 일곱 됨이 아니고 / 그대들 이제 7천으로 7만으로 썩썩 늘어갈 / 그 일곱이 아니던가 // (…) //임금님을 위해 싸움마당에 나아가 / 목숨 버릴 것을 이미 각오하고 나서는 그 양 미간 / 나는 거시서 불을 보았다. 큰 해를 보았다”라고 노래했다. 조선인 최초의 지원병으로 1939년 6월 하순에 전사한 이인석(李仁錫)을 찬양한 노래인 「권군(勸君) 취천명(就天命)」(조선일보, 1943.11.7.)에서는 “이인석 군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 그도 병(兵) 되어 생사를 나라에 바치지 않았던들 / 지금쯤 충청도 두메의 이름 없는 농군이 되어 / 베옷에 조밥에 한평생 묻혀 지내었겠지 / 웬걸 지사, 군수가 그 무덤에 절하겠나 / 웬걸 폐백과 훈장이 그 제상에 내렸겠나”라고 선동했다. 평범한 농민은 전사(戰死)를 통해서만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이인석들 본받아 이 땅의 젊은이들은 하루바삐 ’영광스러운 죽음의 길‘로 뛰어들라고 독려한 것이다. (…)

조선인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전쟁 상대국인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일이 중요했다. 1942년 2월 <반도의 빛>에 발표한 산문 「미국의 백 가지 죄」에서 “서울에 들어와 몇 천냥인가 주고 전차 부설권을 사낸 것도 미국인이요, 경성 인천 간 철로 부설권을 사낸 것도 미국인이요, 더구나 부산 세관까지 속여 사낸 것이 미국인이다. (…) 태평양 상의 상춘(常春)의 낙원이란 포왜(布哇: 하와이) 왕국도 군함을 끌고 가서 대포로 정복하여 얻은 땅이요, 비율빈(比律賓: 필리핀)도 서반아 손에서 찾아준다고 속여 제가 영유(領有)한 전리품들이다. 그네가 비도(比島) 민중에게 무엇을 주었던고? 영국인이 인도인에게 아편주사를 주듯이 미국인은 비도 청년에게 댄스와 여송연 피우는 재주밖에 주지 않았다”라고 하여 미국과 영국의 침략성을 상기시켰다. 따라서 이에 대립하는 일본의 전쟁은 ‘침략’이 아닌 ‘해방’전쟁으로 묘사된다. (…)

전쟁에서 문학의 역할을 강조한 대표적인 글로는 「전쟁과 애국시인」(매일신보, 1941. 11.21)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조선 시인들을 향해 “대동아전쟁 찬미의 시를 쓸 것이고, 내선일체의 숭고한 정신과 이상을 시가화하자”라고 주장했다. 1943년 3월 <녹기>에 발표한 「민심 고무에 동원하라」에서 “이와 같은 이른 봄을 맞이하여, 적어도 약 1천 명(한 군에 2,3명 정도)의 반도 사상계의 요인들이, 필설로써 일제히 일어나서, 전선 각지를 순회하면서 민심고무에 궐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칫하면 만성화되기 쉬운 분위기를 불식하고, 전승한 뒤의 ‘우리 국민의 행복과 번영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려줌을 통하여, 전의를 재(再) 고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그것은 바보스러운 사람의 망언이라고 해도, 미국 쪽 언론인이 ‘전후의 행복조건’ 같은 것을 만들어내서 광란하는 선전전을 감안하여, 우리도 역시 이러한 시기에 새로운 결정적인 사상운동적인 ‘손’을 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라면서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제시하기도 했다.

침략전쟁을 지원할 ‘총후(銃後)’의 자세에 대해서도 썼다. 「군복 깁는 각시네」(<대동아>, 1942년 5월호)는 이른 봄 조선임전보국단 본부에 장안 각시들이 모여 조선군사령부에서 가져온 해진 군복을 정성스레 깁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임금님 부르심이 내리자, 이내 일어나 / 만리 전장에 내달아 이렇게 옷이 다 해질 철까지 싸운 것을, 싸우신 것을. // 군복 입은 남편이 어떻게 빛나 보일까 / 사내 된 이 살아서 군복을 입고, 죽어 국기에 말려 묻힐 것을 // 조선의 여인도 인제는 전장에 달리는 젊은이에 꽃다발 드리노라, 치마폭에 한 아름 안아 드리노라”라고 노래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전황이 점차 불리해지고, 총동원체제 하 총후의 인력동원과 물자동원이 더욱 중대해지는 즈음에는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길만이 우리 민족이 지도민족이 되는 길이라고 궤변을 늘어놓기에 이르렀다. (…)

(…) 1949년 2월 28일 반민특위 제3부에 자수했다. 당일 종로서에 유치되었다가 3월 2일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고, 22일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다. 특별검찰부는 4월 13일 특별재판부에 기소하였으며 6월 제2공판에서 반민법 제4조 1항 위반으로 지역 3년이 구형되었다. 8월 반민법 위반으로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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