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언론역사 조선동아 대해부
조선일보 폐간 뒤 방응모의 친일 행각(1)조선일보 대해부 19장(1)
  • 관리자
  • 승인 2018.03.15 14:51
  • 댓글 0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신문이 폐간되기 5개월 전인 1940년 3월 <조광> 발행인으로 취임했다. 폐간을 알리는 조선일보 「사고」에서 보았듯이 조광은 <여성>, <소년>과 함께 살아남았다.


친일단체에 열성적으로 참여

<친일인명사전>에는 조선일보 폐간 뒤 방응모의 행각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 1940년 10월에는 “국체의 본의에 기초하여 내선일체의 실(實)을 거두고 각각 그 직역에서 멸사봉공의 성(誠)을 바치며 협심육력으로 국방국가체제의 완성, 동아 신질서의 건설에 매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로 선출되었다. 1941년 1월 조선일보사의 사명을 동방흥업(東邦興業)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1941년 8월 “물질 노무·공출의 철저, 국민생활의 최저표준으로 인하, 전시봉공(戰時奉公)의 의용”을 표방한 임전대책협의회(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가 결성될 때 참여했다. 이어 9월에 일제의 전쟁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임전대책협력회가 1원짜리 애국채권을 판매하기 위해 조직한 채권가두유격대에 종로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같은 달 조선인을 전쟁에 최대한 협력하도록 하기 위해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력회를 통합하여 조선임전보국단을 결성할 때 경성지역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0월에 이사로 선출되었다. 1944년 9월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감사역을 맡았다(「인명편 2」, 174쪽).


‘문필’로도 친일하다

방응모는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 <조광>의 기구 개편에 착수했다. 사장 직속의 총무, 영업, 편집, 도서의 4부를 설치하고 지면 쇄신을 시도했다.

이후 조광의 친일 행각은 놀라운 바 있어 (…) “국책과 신문화정책에 따라 시국을 인식시키는 데 일단(一端)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에 따라 조광의 권두언은 나날이 ‘일본 제국과 천황에게 성은 속에 만폭적 희열을 느끼며(1940년 3월) 지나사변 3주년을 맞이하여서는 “만세일계의 황통을 이으옵신 세계 무비의 깨끗하옵신 역사를 가진 우리 일본 황실의 번영이 날로 점앙(漸昻)하는 것은 위로 성명(聖明)하옵신 천황 폐하를 모시옵고 아래로 국민이 일치단결 국운의 번영을 꾀한 때문일 것이다. 이때에 있어서 우리 총후국민은 더욱 노력하여 이 성전의 성과가 완수되기까지 은인자중, 멸사봉공의 희생적 정신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1940년 7월호)라고 국민들에게 친일매국을 강요했다(<일제하 민족언론사론>, 348쪽).


방응모가 직접 쓴 조광 권두언

방응모는1940년 11월 <조광> 제6권 11호에 ‘사장 방응모’라고 명기한 「권두언」을 실었다.

본지는 금 11월로 창간 만 5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5개년이란 세월도 긴 듯, 또 짧은듯하면서도 나에게는 감회가 또한 적지 아니합니다. 본지가 고고(呱呱)의 소리를 내어 세상에 나타나던 소화 10년 11월과 지금 5주년 돌맞이를 하는 소화 15년 11월과는 실로 격세의 느낌조차 없지 아니합니다. 당시 구라파에서는 이태리군의 에티오피아 진격으로 영불을 중심한 국제연맹이 물끓듯하여 대이(對伊) 경제봉쇄를 결의하던 때였고 동양에 있어서는 지나에서 화폐제도 개혁 등을 중심으로 영지(英支) 합작이 급진전을 보이는 한편 일지 관계는 날로 악화하여 마치 일지사변의 전야를 예상케 하던 때였습니다. 말하자면 동서양에 있어 그 사정과 성질에 다소의 차는 있었다 할지라도 역시 신질서의 서곡이 그윽하게 울려오던 때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 동안 세월은 흘러 에티오피아 문제 해결의 뒤를 이어 소화 12년 7월에는 동아 신질서 건설을 목표로 하는 세기적 대사건 일지분쟁이 발단되었고 작년 9월에는 독일의 구주 신질서 건설사업인 제2차 구주대전쟁이 발발되어 세계 신질서 건설은 지금 일독이 3국에 의하여 용감하게 진전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대전환기에 처하여 본지는 그때그때에 따라 오로지 본지에 허여(許與)된 직책을 다하기에 미력을 다하여 왔습니다. 우리는 본지 창간에 제하여 문화 건설 조선의 아침 햇빛[朝光]이 되기를 자기(自期)한 바 있었습니다. (…)
그런데 이제 5년 전이나 3년 전과 같이 세계의 동향은 애매한 것이 아니고 아주 확연하여 졌습니다. 제국은 독이와 손을 잡고 세계 신질서 건설에 참획(參劃)하고 있습니다. 지나에서 사변이 발발한 이래 우리는 시국 인식 철저화에도 미력을 다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시국이라고 하는 것은 3년 전과도 다르고 2년 전과도 달라졌습니다. 국민된 자로서는 누구나 실로 최후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때를 당하였습니다. 안으로는 신체제의 확립, 밖으로는 혁신외교정책을 강행하여 하루 바삐 동양 신질서 건설을 완성시켜서 세계의 신질서를 건설하고 한 걸음 나아가서 세계 영구평화를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모름지기 이 선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국가의 대이상에 따라 문화정책이 세워질 것이요 새 문화는 종래의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지양하고 일로 전체주의적인 방향으로 향하여 달음질치도록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국책과 신문화정책에 따라 시국을 인식시키고 또한 조선문화 향상에 일단의 노력을 더하려 합니다. 원컨대 독자 제위는 끝까지 본지를 지켜주시고 또 끝까지 성원을 아끼지 말아주기 바라 마지않는 바입니다.

방응모는 조선일보 사주이자 사장으로서, 7년 동안 그 신문이 일제의 중국 침략을 합리화하면서 ‘동아 신질서 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살육을 자행하는 것을 ‘성전’으로 미화하도록 했다. 그러던 그가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 똑같은 논조를 <조광>에서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응모는 이 「권두언」에서 “종래의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지양하고 일로 전체주의적인 방향으로 향하여 달음질치도록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단언한다.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제국주의 일본이 세계 평화를 깨뜨리고 정복전쟁을 벌이는 것이 절대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경술국치’를 찬양한 조광의 사설

<조광> 1940년 10월호 사설은 방응모의 창간 5주년 기념 권두언이 나오기 한 달 전에 일제의 조선 병탄(경술 국치) 30주년을 찬양했다.

광고무비(曠古無比)의 시국 하 광휘 있는 황기 2600년과 함께 금 10월 1일로써 시정(施政)  3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였다. 회고하건대 지금부터 만 30년 전 동아의 정국은 실로 난마와 같이 흩어져 구한국의 운명이 위급존망의 추(秋)에 당하였던 명치 43년 8월 22일 일한 양국은 드디어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양국 병합의 조약을 체결하고 그 달 29일부터 이 것을 공포 실시하였다. (…) 데라우치(寺內) 총독은 조선통치의 대본(大本)을 정하여 창업의 토대를 쌓은 위대한 공적을 남겼거니와 이래 만 30년 간 현 미나미 총독에 이르기까지 7대 총독을 맞이하였는데 각각 그 시대 그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혹은 제도 개혁에 혹은 치안 확립에 혹은 경제기구와 산업시설에 혹은 교육시설에 주력하는 등 모두 특색 있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 결과는 오늘날과 같은 문화조선 건설을 결실시켰다. (…) 내선 문제에 있어서는 그 통치의 근본정신이 본래부터 서양류의 식민지정책과 그 범주를 달리하고 있는 것인데 특히 미나미 총독의 내선일체 정책의 강화는 이 원리를 완전히 구현시켜 민족 융합의 이상적 경지로 매진하고 있다. 모두 어능위의 소치이거니와 이것은 또한 팔굉일우의 건국정신의 발로이며 그 표현이다.
생각건대 제국은 현하 전고미문(前古未聞)의 대역사적 전환기에 당면하고 있다. 동아의 신질서 건설은 곧 제국의 백년대계인 동시에 전 동아의 백년대책이요, 또 그 공존공여의 최선책이다. 그러나 완미(頑迷)한 장 정권은 사변 4주년인 금일에 이르러도 오히려 그 비(非)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 국내체제 정비의 안목(眼目)은 결국 이 전변기에 처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일억일심으로써 이 역사적 사명을 다하게 하는 길은 오지 만민익찬(萬民翼贊)의 실을 거(擧)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데 있을 것이다. (…) 중대 시기인 이때를 당하여 2천3백만의 반도 민중은 한결같이 내선일체의 실을 거하여 황국 신민 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의의 깊은 시정 30주년을 맞이하여 각각 자기의 시국 인식을 반성하고 시국의 장래를 투찰(透察)하여 일층 각오를 굳게 하고 또 일단의 노력을 더하여 그 영예를 선양받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조광> 1941년 4월호 「극동위기설과 국민의 각오」는 “이때를 당하여 국민은 일억일심, 더욱 더 각오를 새로이 하여 만일의 경우라도 만유감이 없도록 물심양면에 있어 십전(十全)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1943년 9월호에 실린 「1억 국민의 총궐기」는 ‘성전’에 거족적으로 참여하라고 ‘권유’했다.

반도 청년의 황군에의 편입은 말할 것 없고, 노무원으로 , 군속으로, 아직껏 펴보지 못한 웅지를 남북으로 떨칠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고, 양곡 공출에 힘쓰는 농민의 성한(聖汗), 광물 비상 증산운동에 주야 정신(挺身)하는 광산종업원, 기타 산업전사의 결전적 기개에 맞추어 가정생활에서는 저축 강화, 최저생활 감수의 도도한 결전생활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 모두가 다 풍부한 인적자원의 유효적절한 활용에 부(負)함이 큰데 우리는 여기서 일보 전진하여 더욱 더 협력하여 최후의 승리를 하루 바삐 획득토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