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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이 망극하다’는 조선일보 폐간되다조선일보 대해부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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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07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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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새해가 밝았다. 1월 1일자 조선일보 석간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1937년 ‘원단(元旦)’부터 1면 머리를 장식하기 시작한 ‘천황 히로히토’ 부부에 관한 기사가 이번에는 가장 화려하게 실렸다.


‘만세일계의 황통’에 감읍하다‘

「황기(皇紀) 2600년」이라는 컷 옆에는 일장기가 자리잡고 있고, 그 아래에서는 비상(飛翔)하는 용이 금방이라도 지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꿈틀거리고 있다. 히로히토는 지난해 원단처럼 군복 차림으로 왼손에 지휘봉을 쥐고 있고 아내는 전통적 ‘황후’ 복장을 하고 있다. 부부의 사진 밑에는 ‘황기 2600년’이라는 상자기사가 실려 있다.

건곤일척 욱광(旭光)은 동천(東天)에 빛나고 서기(瑞氣)는 사해(四海)에 미만(濔滿)한 기원 2600년이요 소화 15년의 원단을 맞이하였다. 이날을 당하여 천황 폐하께옵서는 만수무강하옵심을 봉하(奉賀)하오며 황실의 유익강영(愈益强榮)하심을 봉축하는 것은 대일본제국 신민의 무상(無上)한 경행이요 지고한 영광이다.
생각건대 신무(神武) 천황께옵서 일지환서수(日之丸瑞穗) 이 국(國)을 고개(皐開)하옵신 이래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통(皇統)이 금점무결(金點無缺)로 2600년 동안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보조유영(寶祚愈榮)하고 국초익견(國礎益堅)한 것은 실로 만방무비(萬邦無比)의 경행이다. 더욱이 황위(皇威)는 세계 만국에 현양(顯揚)되고 황화(皇化)는 동아 대지에 희합(熙合)하여 가는 이때에 기원 2600년의 이날을 맞이하는 것은 대일본제국 신민의 독특한 광영이요 지대한 경행이다.
금상(今上) 폐하께옵서는 제124대의 천황이시옵고 이날로써 어천조(御踐祖) 제15의 원단을 맞이하옵시는 바 윤문윤무(允文允武) 만기(萬機)를 어총람하시옵고 옥체유건하옵시와 성덕(盛德)의 우로(雨露)가 사해에 호택(浩澤)하옵는 것은 일상 배승하옵는 바이다.
황후 폐하께옵서는 곤덕(坤德)이 숭고하옵시며 황태자 전하께서도 6회의 탄일을 지나신 지 몇 달이 아니 되어서 새해를 맞이하시었는데 어건장하신 생활은 일상 승문(承聞)되는 바이다. 황족 각궁 전하께서도 어건강하시와 원단을 맞이하심은 국민 일반의 봉축 불기(不己)하는 바이다.
회고컨대 2600년 배양하여온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황도정신은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통하여 그 실현의 단계에 도달하였다. 이날은 황국의 총력을 거(擧)하여 이 성업 완수에 매진하는 제4년의 원단이다.
일선의 황군 장병이 황위를 장(杖)하고 숭고한 사명을 달성하려고 천신만고를 감당하고 있다. 호국의 영령에 경조(敬弔)하고 존귀한 희생을 위문하는 것은 총후의 감사와 감격을 표현하는 상도(常道)다.
대일본제국 신민은 누구나 이날이 황기 2600년이요 성전 제4년의 원단임을 깊이 기억하여서 억조일심으로 시간(時艱) 극복, 성업 달성에로 매진할 결심과 각오를 모고(牟固)하게 하여야 한다. 내외 다난한 이 기원 2600년에 만사가 형통하여 소기한 목적을 달성하여야만 상으로 황은에 보답하고 하로 황국의 사명에 충실하는 소이가 될 것이다.

욱광, 서기, 만세일계, 보조유영, 국초익견, 윤문윤무, 팔굉일우, 억조일심 등 히로히토를 찬양하고 ‘대일본제국의 웅대한 포부와 단합’을 상징하는 단어들을 모조리 나열한 이 헌사(獻辭)를 쓴 뒤 7개월 10일 만인 8월 11일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를 강제로 폐간시켰다. ‘서기(瑞氣)가 사해에 가득한’ 새해 첫 날에 황은에 감읍하던 조선일보의 사장을 비롯해서 사원들은 그들의 명운이 한 해도 못 가서 다하리라는 것을 꿈속에서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참고로, 조선일보와 같은 날 폐간을 당한 동아일보가 새해 첫 날 1면에 실은 「봉축 2600년 기원절」의 앞부분을 옮겨 보겠다.

금일은 신무 천황이 어즉위하신 지 실로 2600년의 빛나는 기원가절이다. 역사가 있은 이래 세계에 국(國)을 이룬 자 무릇 불소(不少)하나 혹은 일찍이 멸망하고 혹은 역성(易姓) 혁명의 변을 거쳐 금일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직 아(我) 대일본제국은 건국 이래 2600년 다시 천조(天祖) 천조대신(天照大神)이 군웅을 데리시고 농경잠직(農耕蠶織)을 장려하신 태고로부터 하면 실로 유유원원(悠悠遠遠)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제국은 신대(神代)로부터 세계의 중방(衆邦)에 탁절(卓絶)하여 유출유대(愈出愈大), 유진유왕(愈進愈旺), 보조(寶祚)의 영(榮)은 천양(天壤)과 같이 무궁하고 국위의 성(盛)은 일월과 더불어 쟁선(爭先)함은 오직 국체의 수절(秀絶)에 원유(原由)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에 고기(古記)를 근안(謹按)컨대 천손(天孫)의 강림에 제(際)하사 천조대신은 풍위원(豊韋原)의 1500추(秋), 서수(瑞穗)의 국은 황손이 이를 통치할 것이며 보조는 무궁히 융창하리라 선(宣)하시었으니 신무 천황은 이 신칙(神勅)에 솔유(率由)하사 강원궁(壃原宮)에 즉위의 대전(大典)을 거행하신 다음 육합(六合)을 겸하여 개도(開都)하시고 팔굉일우의 대이상을 술(述)하신 것이다. 아(我) 만세일계의 국체와 세계의 평화와 진운에 공헌하는 국시는 실로 이 때에 이미 확립된 것이다. 명치성제(明治聖帝) 교육칙어에 황조황종국(皇祚皇宗國)을 조(肇)함에 굉원(宏遠), 덕을 수(樹)함에 심후(深厚)라고 하심은 이 조종(祖宗)의 위업을 추모하신 황공하온 대어심으로 만대 불역(不易)의 성업을 전하신 소이로 배찰(拜察)되는 것이다.

동아일보의 이 ‘용비어천가’는 ‘일본 황실의 직계 조상’이라는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神)의 신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서기(古書記)>에 나오는 ‘상상의 신’에 불과한 그의 자손인 진무(神武) 천황이 기원전 660년에 즉위하고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를 세워 ‘황실’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살아 있는 신)으로 보는 ‘근거’이다. ‘민족지’를 자임하던 동아일보가 자기 민족의 ‘단군신화’에 대해 이렇게 극진한 글을 쓴 적이 있었던가? 어쨌든 이런 아부와 교언영색(巧言令色)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연명시키지는 못했다.


‘중국 괴뢰정권 수립’을 높이 평가하다

조선일보는 1940년 1월 28일자 조간 1면에 「지나 중앙정권의 수립」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오래 전부터 전하여 오던 지나의 중앙정권 수립 문제는 작년 말경에 왕조명(汪兆銘) 씨를 중심으로 하여서 구체적 안의 성립을 보았고 계속하여 왕 씨의 초청에 응하여 유신정부 수반 양홍지(梁鴻志) 씨와 임시정부 수석 왕극민(王克民) 씨가 다 청도에 회집하여 3일 간의 물샐 틈 없는 회담을 한 결과 회의는 원만 종료를 보았고 중앙정치회의라는 중앙정부의 모체가 발생할 단계에 도달하였으므로 지나의 중앙정부는 불원 성립이 확실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진전은 지나 4억 민중에게 일대 복음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원래 왕 씨는 손문 휘하 3걸의 일(一)로 일찍부터 항일용공전선에 반대하는 저의를 품고 지나를 구하고 4억을 도탄의 고(苦)에서 구출하는 유일 방법은 오직 친일반공의 일도(一途)가 있는 것을 신조로 알고 있던 사람이다. 지나사변이 발발된 후에 항일용공의 그릇된 분위기 가운데서 국민당 부총재의 요직에 있으면서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는 장(蔣) 일파와 은인자중, 행동을 같이 하여 중경으로 갔다가 고노에(近衛-일본 수상) 성명을 보자 의연 결의하고 중경을 탈출하여 그 소신인 친일반공의 기치를 높이 달고 천신만고로 화평운동을 건설하여 오늘날 드디어 현 단계의 정치운동까지 유도하여 화평 구국의 신념을 기조로 한 신중앙정부 수립에 위훈(偉勳)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일지전쟁은 형제 상관으로 동아에서의 일 불행사다. 이것을 절실히 느낀 왕 씨는 선린우호, 협동방공, 경제제휴의 3원칙 하에 화평공작을 일으켰고 또 동아 신질서 건설의 기본이념도 팔굉일우, 만방협화라는 아 제국 이상에 있는 것을 심각히 이해하여서 백절불굴의 용기로 건투 매진하였다. 그러므로 제국 정부는 이와 같은 취지와 이와 같은 목적으로 진행되는 화평 운동과 중앙정부 수립에 대하여 만폭(滿幅)의 지원을 하여 줄 것을 중언할 필요가 없다.

왕조명은 자가 정위(精衛)라 흔히 왕정위라고 불렸다. 1883년 5월 광동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 중국 국민당의 일원으로 손문과 친밀한 관계였다. 왕조명은 1910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아버지인 순친왕을 암살하려다 폭탄 불발로 실패하고 투옥되었다. 1911년 무창 봉기 때 풀려난 그는 중국 민중의 영웅이 되었으나 1925년 손문이 사망한 뒤 장개석의 세력에 밀렸다가 1927년 장개석에 맞서 무한에 국민당 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군벌에 쫓기다 결국 장개석의 남경정부에 합류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장개석은 항일전을 계속했는데 왕조명은 극우파를 조직해서 유럽 파시스트와 연합을 꾀했다. 왕조명은 독일, 이탈리아 정권과 관계를 맺으면서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투항하자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1938년 왕조명은 중경을 탈출해서 운남성 곤명을 거쳐 베트남의 하노이로 갔다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상해로 들어갔다. 조선일보가 위의 사설을 올린 날부터 한 달 남짓 지난 뒤인 1940년 3월 왕조명은 상해에서 ‘국민당 정권’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괴뢰정권을 세웠다. 중국 민중이 보기에는 배신자이자 투항주의자인 그를 조선일보의 사설은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일본·미국 전쟁 불가피론은 불쾌’

1940년 4월 25일자 조간 1면 사설 제목은 「일미 전쟁 불가피론」이다.

중화민국 남경에 국민정부가 환도(還都)의 준비를 마치고 아베 특파대사 일행이 일중 양국 민중의 열광적 환영리에 남경에 안착하여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위업 행진보(行進譜)가 우렁차게 진행되어서 명랑한 동아 천지가 지일가대(脂日可待)로 기약되는 차제에 극히 불유쾌하고 무기미(無氣味)한 뉴스가 태평양을 접한 피안으로부터 전하여 왔으니 그것은 곧 미국의 해군 제5구 사령관 타우시크 소장이 22일 상원 해군위원회에 임하여 필리핀과 괌도의 방비 보강과 대주력함 건조의 필요를 주장한 일미전쟁 불가피론이다. 이 논(論)이 비록 해군성 당국에 의하여 타우시크 소장의 개인적 의견이라고 부정 성명이 발표되었다 할지라도 미국의 종래의 동향을 보아 심상 간과치 못할 의의를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타 소장의 소론(所論) 요지는 극동에서의 사태 발전은 일미전쟁의 불가피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은 필리핀과 괌도에 대하여 난공불락의 제휴지 건설과 대주력함 건조를 계속치 아니하면 안 된다. 일본이 지나를 정복한 후는 경(更)히 석유 고무 석(錫) 등 원료품을 구하려고 반드시 난령(蘭領-네덜란드령) 인도(동인도 제도)와 필리핀 제도에 촉수를 뻗칠 것이다. 그리고 동아의 사변은 현실적으로 미국의 권익을 협위(脅威)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나의 안정과 독립을 확보치 아니하면 안 된다. 우리가 종국에 있어서 극동전쟁으로부터도 피할 수 는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영불화란과 결탁하여 그 태평양 상의 해군기지를 활용할 수 있도록 원조협력 체결을 각국과 체결치 아니하면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 타 소장의 전쟁론을 검토하여 보면 그 소론의 대부분이 오해와 위산(違算)에 입각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곧 동아 신질서의 건설을 지나 정복으로 보았고 또 제국과 국민정부가 누차 제3국의 권익을 존중한다는 성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동아 권익이 지나사변으로 인하여 협위된다고 곡해하였으며 네덜란드령 인도에 대한 아리타(有田) 성명과 필리핀 이민 제한에 대한 수마(須磨) 정보부장의 성명을 마치 제국이 네덜란드령 인도와 필리핀에 대하여 영토적 또는 정치적 야심이 있는 것처럼 해석하여서 이와 같은 폭론(暴論)을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 같은 견해는 단지 타 소장 일인에만 그칠 것이 아니요 아무리 미국의 해군 당국이 부정적 성명을 하였다고 하여도 일부의 여론적 배경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므로 극히 주목을 끄는 바이다. (…)
(…) 이와 같은 오해와 곡설(曲說)을 일소하기 위하여서는 외교의 활동과 선전공작에 기대되는 바가 크다. 미국의 여론으로 하여금 동아 신사태를 정상(正常)하게 인식케 하고 신질서 건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생기도록 민활한 외교와 용의주도한 선전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사설 바로 밑에는 「베 대사, 국민정부로/ 왕(汪) 주석대리를 정식 방문/ 역사적 감격리에 일지(日支) 교환(交驩)」이라는 기사가 자리잡고 있다. 국민정부는 왕조명이 주도하는 일제의 괴뢰정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정권이 남경으로 수도를 옮길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천황의 특사’ 아베가 그 도시를 방문한 것이 ‘명랑한 동아 천지’를 기약하고 있는데 미국의 해군 소장이 ‘일미 전쟁 불가피론’을 주장한 것이 불쾌하기 짝이 없다고 조선일보는 불만을 터뜨렸다.

그것은 정확하게 일제의 위기의식을 반영하는 표현이었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세계 제일의 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이 막강한 태평양함대와 육군, 공군을 동원해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면 일본이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를 ‘정복’하는 ‘성전’은 실패로 끝날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천황 폐하께 바친 마지막 어탄신 축하’

1940년 4월 29일은 히로히토의 생일이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이날이 오면 최고의 극존칭으로 그에게 ‘어탄신 축하’의 글을 바치곤 하던 조선일보는 결국 마지막이 되고 만 「봉축 천장절」 사설을 30일자 석간 1면 머리에 실었다.

만화가 방창하고 춘광이 무르녹는 이 29일은 천장가절이다.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이날에 제39회의 어탄신을 맞이하옵시사 옥체가 유건하시옵고 보조(寶祚)가 유강하옵신 바 금년의 금일은 특히 황기 2600년인 조국식년(肇國式年)의 날로 1억 신자(臣子)의 충심으로 흥아성업도 황위 하에 일단은 진척을 보아 선린의 신지나 국민정부가 환도의 경축을 하는 이때에 이 가신(佳辰)을 맞이한 것은 더욱 광휘있고 경축에 불감할 바이다.
이 가신에 천황 폐하께옵서는 어숙모궁(御叔母宮)이신 죽전궁창자(竹田宮昌子) 내친왕(內親王) 전하의 어상(御喪)에 복(服)하시는 중으로 봉축의 어의(御儀)는 행치 아니 하옵신다고 승문(承聞)되옵는 바 따라서 하연(賀宴), 참하(參賀), 관병식 등은 행치 아니 하옵시고 황후 폐하를 봉시(奉始)하와 황태자 전하께서도 함께 모이시사 조용하게 지내옵신다고 배승되는 바 민서(民庶) 일반이 황공무지할 바이오며 더욱이 사변 발발 이래 폐하께옵서는 만기를 총람하옵시사 숙야신금(夙夜宸襟)을 어뇌(御惱)하옵심은 물론이요 황군 장병의 고뇌를 어진념하옵시고 누차 정국신사에 어친배(御親拜)를 사(賜)하옵시는 대어심은 1억 민서의 감읍, 감히 말씀할 바를 알지 못하는 바이다.
이날 가신을 당하여 성수무강을 봉축하고 죽원(竹園)의 장영(張榮)을 봉축하며 국운이 유익(愈益) 융창하고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여 동아에서의 신질서가 속히 건설하도록 국민적 결심을 굳게 하여서 성은의 만일이라도 보답하고 성려(聖慮)를 봉안케 하는 것은 1억 국민이 깊이 각오치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황군 백전백승, 지나는 거의 황군 수중에’

1940년 7월 7일은 일본군이 중국 침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만 3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날짜 조선일보 조간 1면에는 「사변 3주년」이라는 사설이 실렸는데 사설 오른쪽에는 일장기 아래 ‘사변기념일’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제국이 동아의 맹주로서 세기적 위업인 그 신질서 건설을 위하여 지나 대륙에 황군 장병을 파(派)하기 3여년, 금 7일로서 그 의의 깊은 3주년을 맞이한다. 그 동안 황군이 향하는 곳에 대적(對敵)이 없이 황군은 문자 그대로 백전백승, 지나 4백여 주는 거의 전부가 황군의 수중에 들게 되었는데 특히 최근 남지 작전에 의하여 영불의 원장(援蔣) 루트가 단절될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용공항일 항전의 본거, 중경의 궤멸이 또한 불원(不願)하였음에 이제 장 정권은 빈사의 처지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찬란한 전과가 본시부터 어능위의 소치이며 충용 무비한 황군의 분전분투의 결과임은 말할 것도 없는 바로서 이제 이 의의 깊은 사변 3주년을 맞이함에 당하여 성전 중에 희생된 전몰장병의 영령에 대하여 삼가 경조(敬弔)의 의(意)를 표함과 동시에 현재 제일선에서 용약(勇躍)하고 있는 장병의 고로(苦勞)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는 바이다.
사변의 의의는 이미 천명된 바와 같이 동아 제 민족의 상휴상조(相携相助) 즉 동아에 있어서의 신질서 건설이 그 구극 목적이거니와 사변 제3주년을 더욱 의의 깊게 맞이하는 이유는 이제 이 구극 목적을 완성시킬 최종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
그런데 신질서 건설에 있어 최대의 장애는 역시 장 정권의 존재이고 장 정권의 존재는 오로지 원장(援蔣)국가에 의존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신질서 건설의 최후 단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원장 국가의 격퇴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때마침 구주에는 전화(戰火)가 확대되어 제국으로서는 지나 남방에 있어 그 원장 수혈로(輸血路)의 차단을 단행하기에 절호의 기회가 왔다. 이때를 넘기고는 다시 이런 기회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 제국 정부로서도 여기에 대한 견고한 결의를 가지고 있다. 이리하여 사변 제3주년을 사변의 신단계, 사변 목표의 완성기라는 점에서 더욱 의의 깊게 맞이하는 바이거니와 그와 동시에 그 기념일을 당하여 국민은 이 중대 시기에 처하여 금후 더욱 더 긴장 일억 일심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적극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사설은 중국에서 ‘황군이 백전백승’했고 중국의 400여 주 거의 전부를 수중에 넣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상해와 남경에서 일본군은 국부군의 저항에 막혀 여러 달이나 발이 묶여 있었다. 그리고 국부군과 중국 공산당 군대는 중경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일본군의 중국 ‘정복’에 완강히 맞서 싸웠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이렇게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고 ‘동아 신질서 건설’이 최종 단계에 들어섰다고 허황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최후의 날’

1940년 8월 11일, 조선일보는 석간 1면 한가운데에 「20년의 역사 남기고 금 10일로써 폐간」이라는 사고(社告)를 내보냈다.

방금 세계는 정(正)히 대변개(大變改)의 시기에 제회(際會)했습니다. 구주에서는 독이를 중심한 전체주의 국가와 영국을 패자(覇者)로 하는 민주주의국가 군(群)과의 일대 쟁탈전이 시작되었고, 동양에서는 제국을 맹주로 한 신동아 신질서 건설 운동이 착착 진행됩니다. 아(我) 조선일보는 과거 20년간 조선 민중의 대변자로서 민중의 의사를 반영하고 조선 통치의 비판자가 되어 조선 문화 발전에 미소하나마 공헌한 바가 있다 생각합니다. 더욱 지나사변 발발 이후는 일층 국가의 중대 시기임을 자각하고 민중으로 하여금 국가 정책에 순응할 것을 역설하여 신동아 질서 건설에 적지 않은 공헌이 있었을 것으로 자인(自認)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최근 정세로 오(吾) 조선일보는 신문 통제의 국책에 의하여 금 10일로서 폐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 조선일보의 폐간이 조선 문화 상, 경제 상 중대한 영향이 있는 줄은 알지요만, 국책상 부득이한 사정이오니 이 점은 만천하 독자 제위의 고량(高諒)을 바랄 뿐이외다. 만 20년 간 강호 제씨로부터 받은 무한한 애호와 동정에 보답하기 위하여 간단히 사의(謝意)를 표합니다.
끝으로 본사 발행의 조광, 여성, 소년 등은 종래와 같이 조광사에서 계속 발행할 터이오며 본사에서 주최 혹은 후원하던 사업으로 조광사에서 인계받을 것은 될수록 계속하여 하려 하오니 버리지 마시고 애호를 바라나이다.
소화 15년 8월 10일
조선일보사

이 사고는 폐간 이유를 ‘신문 통제의 국책’에 따르는 것이라고 간단히 밝히고 있다.
같은 날짜 1면 머리에는 사설로 「폐간사」’가 실렸다.

조선일보는 신문 통제의 국책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 방침에 순응하여 금일로써 폐간한다. 우(吁)라 물건은 본(本)과 말(末)이 있고 일은 시(始)와 종(終)이 있다. 유가 있으면 무가 있고 생이 있으면 사가 있는 것은 일정불변의 원칙이다. 본보는 말과 종이 왔다. 금일로써 본보는 무(無)와 사(死)의 막이 내리었다.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체의 감회는 주관과 객관의 가치 판  단에 있거니와 뚜렷한 사실은 이 조선일보가 영영 조선사회에서 없어진 것이다. (…)
지나사변 발발 이래 본보는 보도보국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고 더욱이 동아 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夙夜奮勵)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작년 9월에 발발한 구주대전과 독이의 대승을 계기로 하여 서  세계 정세는 큰 전환을 보게 되고 국내 정세가 또한 이에 대응하여서 신체제가 건설되려고 하는 이때에 신문 통제가 국책으로 수행되는 이상 우리는 이에 순응하는 이외에 다른 사정(私情)을 운위할 바가 아니다. 본보의 폐간도 이 점에 근거가 있다. 끝으로 본보를 애독 지지하여 준 사회 대중에게 감사와 미안의 말씀 이외에 다른 말이 없는 것을 심량(深諒)하여 주기 바란다.

「폐간사」는 「사고」와 마찬가지로 ‘신문 통제’라는 ‘국책에 순응’해서 조선일보를 폐간한다고 밝혔다. 다만 ‘감사와 미안의 말씀 이외에 다른 말이 없는 것’을 깊이 양해해 달라는 말로 여운을 풍기고 있을 뿐이다.

  일제 말기에 이들(조선·동아일보)이 저항다운 저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너무도 허무하게 굴종하면서도 여전히 민중의 신문을 내세우면서 황국 신민을 강요하고 대일본제국을 위한 순국을 찬양, 독려한 것은 너무도 크나큰 언론 범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제하의 우리 언론은 하나의 기업으로서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민족의 희생 위에 선 성공이었지 민족의 해방 독립을 향한 앞길을 밝히는 지도자로서 사회를 광정하는 고발자로서의 책무를 가진 민족언론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 시기에 언론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비극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민중은 붓대가 꺾일지언정 휘지 말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최민지, 「한말-일제하 민족과 언론」, <한국언론 바로보기>, 106쪽).


조선일보사가 주장하는 폐간 경위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는 총독부의 강제 폐간 압력이 어떻게 가해졌는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국 속에서 일제는 연초부터 조선일보의 숨통을 조여왔다. 1940년 1월 15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바시(三橋)는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를 불렀다. 이 만남에서 총독부 경무국장은 “정세가 언론통제를 불가피하게 만들도록 돌아가고 있으며, 또 신문용지의 사정도 어려워지고 있어서 (…) 언론보국의 기관을 하나로 묶을 방침을 세웠다”는 말을 전했다. 미쓰바시 경무국장은 일본의 기원절(紀元節-일본의 건국기념일)인 2월 11일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통합하는 것이 어떠냐고 날짜까지 못 박아 자진 폐간을 종용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는 이를 즉석에서 거부했다(125쪽)

일제의 자진 폐간 압력을 받은 뒤에도 두 신문은 “서로 결속해 자진폐간 반대투쟁에 합심협력할 것을 약속한 뒤 신문을 계속 발행하며 일제의 압력을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창간 이래 20년 동안 치열한 경쟁을 벌여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그때만은 그렇게 단단하게 ‘합심협력’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21세기의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일제강점기 신문사의 사주나 사장은 엄청난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 위에는 오로지 ‘대일본제국’의 지배세력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천황에게 적성(赤誠)을 다하는 황국 신민’으로서 온갖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신문사를 본부 삼아 다양한 ‘문화사업’이나 수익사업을 했다. 그런데 하 아침에 총독부가 그 기득권을 버리라고 하니 그들은 고분고분하게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의 기록을 보기로 하자.

폐간 당일인 1940년 8월 10일 토요일 조선일보 태평로 사옥 2층 편집국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편집국에 모인 50여명의 기자는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마지막 신문 제작은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기사를 쓰다 눈물을 떨구는 기자도 있었다.
지령 6923호. 마지막 신문의 편집을 마쳐놓고 10일 낮 조선일보 편집국 직원들은 한데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부 기자 최희연은 ‘가장 슬픈 사진’을 찍었다. 당시 무거웠던 편집국의 풍경은 지금도 남아 있는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자들의 얼굴로 확인할 수 있다. 간부진과 공무국 직원들은 야속하게도 폐간호를 빠르게 찍으며 돌아가는 윤전기를 부여잡고 통곡했다. 정든 직장을 떠나야 하는 안타까움보다, 앞으로의 생계에 대한 불안함보다 스무 살 청년으로 자란 우리 신문이 일제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 더욱 가슴 아팠다(127~128쪽)

조선일보 사원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버젓한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던 그 시절에 생계를 꾸릴 만한 일터를 찾기는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라면 그들의 정신적 고통과 절망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날마다 ‘천황 폐하의 성은’에 감읍하고 ‘황군의 연전연승’을 찬양하며 ‘대일본제국 1억 신민의 충성’을 강조하던 기사와 논설을 다시는 쓰지 못하게 된 것이 ‘슬픔’의 원인이라면 그것을 선의로 받아들일 양식 있는 사람이 그때 과연 몇 명이나 있었을까?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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