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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기관지 같은 ‘조선’의 ‘성전’ 보도조선일보 대해부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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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1.2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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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지나사변’이라고 부르던 중일전쟁 초기에 가장 중대한 사건은 상해와 남경이 일본군에게 함락된 것이었다. 조선일보가 그 과정에서 어떤 보도를 했는지를 살펴보기 전에 당시 중국의 정치 상황을 간단히 짚어보겠다.
일본군이 7월 7일 루거우차오사건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던 때 중국에서는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와 모택동의 홍군(紅軍)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2차 국공합작과 ‘홍교공항 사건’

1921년 7월에 탄생한 중국공산당은 그 해 열린 전국대표대회 직후 제국주의와 군벌(軍閥)을 타도하고 ‘민족혁명’을 이룬다는 목표 아래 장개석의 국민당과 합작하기로 결정했다. 국민당은 1924년 1월 제1기 전국대표대회에서 ‘연소(聯蘇), 용공(容共), 농공부조(農工扶助)’라는 3대 정책을 채택하면서 ‘국공합작’을 출범시켰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1927년 우한에 혁명정권을 세웠는데, 공산당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장개석은 1927년 4월 상해에 반공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깨버리고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큰 타격을 입은 공산당의 모택동은 토지혁명을 추진하면서 농촌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공산당은 강소성에 ‘중화소비에트’를 창설하고 장개석의 남경 정부에 맞섰다. 두 정권 사이의 내전은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장개석 군대의 ‘강소 소비에트’ 포위망을 벗어나서 대장정(大長征)에 나선 공산당은 1935년 ‘8·1선언’을 통해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제창했다.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일제가 중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공동으로 물리치자는 것이었다. 국민당이 공산당의 제의에 호응함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이 1937년 9월 22일에 성사되었다.

그 시기에 중국 최대 도시인 상해에는 일본해군 제3함대가 주둔하면서 양자강을 경비하고 있었는데, 해군 휘하에는 ‘상해특별육전대’라는 이름으로 2천5백여 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장개석의 군대가 1937년 여름에 상해에 주둔하기 시작하자 일본군은 7월 24일부터 상해 침공 명분을 쌓기 위해 ‘홍교(虹橋)공항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군 해군 쪽은 사병 한 명이 실종되었다며 24일 장개석 군대에 항의했다. 장개석 군대는 실종자를 수색해서 일본영사관에 넘겼다. 일본군은 다시 ‘공작’을 벌였다. 8월 9일 한 해군 중위가 사병 한 사람을 데리고 중국 군용비행장에 차를 몰고 들어가려 하자 장개석 군대가 발포해서 두 명이 모두 사망했다. 그것이 ‘홍교공항 사건’이었다.

일본군의 의도를 간파한 장개석은 8월 11일 국방최고회의를 구성하고 스스로 작전지휘권을 장악한 뒤 15일 전국에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중국공산군 총사령관 주덕은 장개석의 지휘 아래로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명명되었다. 이로써 장개석이 지휘권을 가진 ‘국공합작군’은 일본군에 맞설 수 있는 전투력을 갖출 수 있었다.

한편 ‘홍교공항 사건’이 동경에 전해지자 해군은 8월 10일 ‘교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2개 사단의 육전대를 증파하기로 결정했다. 2개 사단 병력은 8월 말 상해에 상륙했다. 상해전투(일본은 상해사변이라고 함)는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다.

8월 12일 중국군 2개 사단이 상해북정거장에 도착해 공동조계 밖의 사천로에서 일본군과 대치했다. 중국군은 13일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상해전투’는 육해공에서 3개월 남짓 계속되었다. 장개석은 압도적인 병력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나 제공권과 화력이 약해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없었다.

일제는 상해에서 중국군이 먼저 도발했기 때문에 응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 그리고 민중이 보기에는 ‘제국주의 군대의 침략을 선제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정의로운 전투’였을 것이다.

8월 12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들은 ‘대일본제국을 위한 국방헌금’을 모은다는 「사고」를 일제히 실었다. “북지사변 발발 이래 민간의 국방헌금과 군대위문금은 날로 답지하는 형편인데 본사에서는 일반 유지의 편의를 위하여 이를 접수 전달하려 하오니 강호 유지는 많이 분발하심을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사고는 그 뒤 신문의 고정란으로 자리를 잡았다.

동아일보는 ‘대일본제국’이 중국에서 거두고 있는 ‘승전보’를 조선일보처럼 적극적으로 전하다가 8월 20일자 신문에 「거국 일치의 요(要)」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올렸다.

북지사변은 국지적 소충돌로 시작하여 일지(日支(일본과 중국-인용자) 양군의 전면적 전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낭방광안(郎坊光安) 사건이 있은 후 황군은 드디어 화평해결의 희망을 방기하고 전단(戰端)을 개시하였다. (…) 지나 측의 태도를 정관(靜觀)컨대 일종의 자아과신에 빠져 외교 교섭의 여지를 전연 버리고 전면적 정면충돌도 불사한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태도는 필경 중지(中支) 남지(南支) 민중으로 하여금 항일 배일의 노도에 휩쓸어 들어가게 하고 중앙군의 항전을 상해에까지 파급시켰다. 국민정부가 이와 같은 방침을 계속 하는 이상 어찌 최대 비극이 일어나지 않으리오. (…) 적어도 지나의 적대행동의 개연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군사 국방에 만전의 조치를 취함은 물론이려니와 경제의 전시 편성에 있어서도 모든 경위를 상상하고서 유루 없는 통제가 필요함은 췌언을 불요하는 바이며 국민 각층은 그것을 적확명쾌한 국책으로서 깊이 인식하고서 정부의 임기응변적 방침에 신뢰할 뿐만 아니라 거국일치적으로 국난에 당할 협력을 주저하지 아니하여 각지 각 방면의 이에 대한 성과는 비상한 바 있다.
(…) 그러므로 우리의 긴장은 경(更) 일층 내구성을 보지(保持)할 각오로써 당국의 지도에 협조하고 총후 후원에 성의를 다하여 거국일치의 실적을 유루 없이 내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상해에 자리잡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7월 15일 국무회의를 열고 군무부(軍務部)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한 뒤 임시정부 <공보(公報)>를 통해 “이번의 중일전쟁으로써 독립전쟁을 개시하여 설욕보국(雪辱報國)을 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임시정부는 북아메리카에 있는 여러 독립운동단체들과 연합해서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지’라고 자칭하던 동아일보가 “국난에 당하여 거국일치적으로 협력을 아끼지 말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동아일보가 말하는 국가가 ‘대일본제국’이었음은 물론이다.

8월 23일자 석간 1면 머리에 실린 조선일보의 사설(「지나 응징과 국민의 각오/ 견인지구(堅忍持久)의 정신이 필요」)은 일본 수상 곤도(近藤)가 발표한 ‘적극적 지나 응징’ 방침을 전하면서 ‘거국일치의 강화’를 강조했다.

20일 곤도 수상은 신문기자단을 상대한 시국담에 있어서 “제국의 방침은 이 종래의 사건 불확대주의라는 소극적 방침을 일축하고 금후는 적극적으로 지나 응징의 태도로 변한 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여 제국의 대지나 방침의 질적 전환을 설명하여 일반 국민의 시국 인식을 환기했다. (…)
지나의 오만불손, 항일 불신의 도전적 태도는 북지에 있어서는 남구사변을 유치했고 중남지에 있어서는 상해사변을 유발한 결과로 7월 7일 이래의 북지사변은 벌써 지방적 국부적인 사변이 아니요 전국적 전지적 사변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
지나의 영토에 대하여는 척토(尺土)도 제국이 욕(欲)하는 바가 아니다. 요는 지나의 반성을 구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금일이라도 지나가 반성만 하면 사건은 그 즉시로 종국을 고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도전적 태도를 계속하는 그 동안까지는 제국의 응징 행위는 제국의 욕불욕에 불구하고 그것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사건의 단기 해결은 다른 무엇보다도 지나 4억의 민중을 위하여 제국이 욕하는 바이나 그들의 태도 여하에 있어서는 상당한 시일을 요할는지 모르니까 제국 영토 내의 1억 신민은 적어도 그 각오에 있어서는 최악의 사태와 장구한 시일이 걸릴 것을 예기하고 견인지구의 정신과 거국일치의 관념을 가지고 제반 산업의 개발 진전을 도(圖)하여 제국의 이 중대 사명 달성상에 만유감이 없기를 기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의 이 사설은 일본군이 중국군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사실은 묵살한 채 “지나가 상해사변을 유발한 결과로”“북지사변이 전국적 사변으로 돌변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중국 전토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군대를 보내 전쟁을 일으킨 ‘제국’이 중국의 영토에 대해서는 단 한 뼘도 차지할 욕심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중국이 반성만 하면 사건이 곧 끝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일본군이 제 발로 중국 땅에서 떠나리라는 뜻이다. 나아가서 이 사설은 “지나 4억의 민중을 위하여 제국이 사건의 단기 해결을 바란다”는, 상식에 어긋난 주장을 폈다.

조선일보의 그 사설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37년 8월 18일자 사설(「국면 확대와 국민의 각오」)과 얼마나 비슷한지를 비교해 보면 ‘민족지’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북지사변에 가(加)하는 상해 방면의 정세 악화에 의하여 일지(日支)관계는 마침내 선전포고에 의하지 아니한 개전(開戰)상태로 화료(化了)하였다. 제국으로서는 어디까지든지 은인자중하여 국면 불확대에 예의(銳意)한 바이나 당방이 은인하면 은인할수록 피(彼)는 더욱 오만을 증장(增長)하고 당방이 자중하면 할수록 피는 더욱 도전을 집요히 하여 마침내 금일의 사태를 고출(故出)하게 된 바이어서 금(今)에 지(至)하여는 당방의 호(好)하고 불호함에 불구하고 실력 발동에 의한 해결을 기할 외에 타도(他道)가 무(無)하게 된 것이다. (…)
(…) 국가가 유(有)한 후의 국민이요 국방의 안정을 기한 후의 국민의 번영이요 발전일 것이다. 국가 위급존망의 중대 관두(關頭)에 처하여 곤란의 대소와 희생의 다과를 논할 여지가 하(何)에 재(在하다 할 바일 것이냐. (…)
그러나 금일에 제일선에 입(立)한 용사는 차(此)를 시(視)함이 우모(羽毛)보다 경(輕)하고 차를 국가에 헌(獻)함에 대하여 무상(無上)한 광영과 만족을 감(感)하는 바이다. 총후에 재한 자 구구(苟苟) 재산을 애착하고 부담경중을 운운할 여지가 존(存)한다 할지라도 안거낙업(安居樂業)을 가기(可期)하게 될 바이며 여하히 전시 부담이 증대된다 할지라도 생명을 박탈함에 지(至)치 아니할 바일 것이다.

일본군이 상해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또는 총독부의 ‘보도지침’에 따른 것인지 조선일보는 8월 24일자 조간 1면 머리에 「학생 생도 제군에게」라는 사설을 실었다.

(…) 물론 극동의 안정세력인 제국의 육해공군이 건재하는 한, 최악의 상태가 도래할 날은 결코 없을 것으로 확신하는 바다. 그러나 그 용의(用意)와 준비에 있어서는 앞으로 곤란한 사태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그런 예상 하에 거국일치로 국난에 당하는 각오가 가장 필요한 것이다. 한 나라가 전시체제에 들어갈 때에 물질보다 국민의 정신적 단결력에 치중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고로 이때는 정(正)히 제국 내의 1억 신민은 남녀노유, 현우((賢愚) 귀천을 물을 것이 없이 마음을 하나로 하며 힘을 같이하여 용왕매진의 의기와 견인지구의 정신을 가지고 이 곤란을 타개할 시기다. 차제에 학생 생도 된 자는 누구나 이러한 시국을 철저히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 하에 총후의 성의를 다하면서도 면학은 면학대로 배전 가중할 시기다. 제군의 임무는 이렇듯 크며, 이렇듯 대(大)함을 알라.


전시 ‘천황 폐하’에게 바친 ‘용비어천가’

상해를 침략한 일본군이 고전을 거듭하고 있던 1937년 9월 7일 동아일보는 「애국일」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황군의 노고’를 치하하고 ‘전조선적인 애국’을 부르짖었다.

(…) 이때에 있어서 황군의 노(勞)도 노려니와 총후의 성의도 여기에 세세히 매거할 것 없이 열렬하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직업을 구별할 것 없이 전조선적으로 타오르는 애국의 열성은 이 국가 중대의 추(秋)에 당연한 발로라 하겠지만 그래도 보고 듣는 자로 하여금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바 있다. 그러나 시국이 갈수록 중대화하고 있음을 재인식 할 때에 열성에 열성을 가하여 이 난국의 하루라도 빠른 극복을 염원하지 않으면 아니 될지니 이에 애국일을 당하여 전조선적으로 팽배하는 애국의 지정(至情)을 축복하는 동시에 다시금 시국 재인식의 기회를 삼아 경일층 격앙발분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9월 12일자 조선일보는 조간 1면 머리에 「어성려(御聖慮) 봉안(奉安)의 길」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천황 폐하의 거룩하신 뜻을 받들어 모시는 길’이라는 뜻이다.

천황 폐하께옵서는 지나사변을 깊이 어진념(御軫念)하시와 지난 4일 임시의회 개원식에 어친림하사 우열(優涅)하옵신 칙어(勅語)를 하사하옵신 바 이 제 칙어를 배(拜)하옵건대, “제국과 중화민국과의 제휴 협력에 의하여 동아의 안정을 확보하여 공영(共榮)의 실(實)을 거(擧)함은 짐이 (…) 진념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중화민국은 깊이 제국의 진의를 해(解)치 못하고 (…) 드디어 금추의 사변을 보기에 지(至)하였다. 짐 이를 감(憾)한다. (…)”
중앙정부는 이 칙어를 봉체(奉體)하여 거국일치, 시간(時艱) 극복으로 어성려를 봉안하기 위하여 9일 총리대신으로부터 성지(聖旨)를 일반에 철저하도록 고유(告諭)를 발하여 동시에 일반 관리에 대하여도 같은 주지(主旨)의 훈령을 발하였다. (…)
생각건대 황모(皇謨)를 익찬하며 성지를 봉체하여 동아의 평화를 확보함은 국민으로서 대어심(大御心)을 봉안하는 소이다. (…)
곤도 수상의 “진충보국의 정신을 국민 일상의 업무생활의 간(間)에 실천하라”는 고유(告諭)와 미나미 총독의 생업보국이라는 유고는 이의동어다. 요는 견인지구(堅忍持久)로 각자 그 본분에 의하여 시난(時難) 극복에 매진하는 것이 어성려 봉안의 최대 유일의 길인 것을 일반 국민은 명심할 것이다.

조선일보의 이 사설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일제의 중국 침략을 ‘동아의 안정’과 ‘공영의 실’을 위한 처사라고 미화한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조선의 ‘국민’은 “천황 폐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라”고 명령조로 말하고 있다. 일본의 제국주의자들과 전체주의자들이 ‘살아 있는 신[現人神]’으로 모시던 ‘천황’을 ‘민족지’를 자처하던 조선일보가 극구 찬양한 전형적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상해 함락’을 중계방송 하듯 보도한 조선일보

상해를 사수하려는 중국군과 어떻게 해서든지 그 도시를 장악하고 중국 전토를 점령하려는 일본군 사이의 전투는 3개월 가량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공군력과 해군력에서 압도적 우세를 확보한 일본군은 1937년 11월 초순부터 상해를 향해 일방적인 대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전투가 교착 상태일 때는 조선 민중을 향해 ‘유언비어 경계’와 ‘거국일치의 필요’를 강조하던 조선일보는 전황이 일본군의 ‘절대 우세’로 드러나자 중계방송 하듯이 숨 가쁘게 ‘아군의 승전보’를 전했다. 그 경로를 추적해 보겠다.

조선일보 11월 11일자 석간 1면에는 「‘상해 적군 총퇴각/ 중요 각 기관에 방화」라는 기사가 커다랗게 실렸다.

총퇴각의 적은 오전 7시를 기하여 경비사령부, 병영, 시정부 등 중요 기관에 방화하여 남시서남부로부터 지역 수개소에 발화되어 염염(炎炎)히 연소 중이다.
소주하 남안의 적은 아(我)맹폭격에 견디지 못하고 금조(今朝) 이래 서방으로 향하여 총퇴각을 개시하였다.
수일래의 강우가 개인 8일 아(我) 야마우치포병부대는 오전 9시부터 항공부대의 폭격과 호응하여 적 전선의 중심지 강교진에 대하여 맹렬한 폭격을 개시하였는데 적의 토치카는 일발마다 폭발하여 적은 아 맹격에 견디지 못하고 진지를 포기하고 퇴각을 개시하였다.

조선일보는 11월 11일 <호외> 발행했다. 「남조선으로 향한 적기 3대 격추」라는 굵직한 제목 아래 간략한 기사가 나와 있었다.

(용산사단사령부 11일 오후 3시 35분 발표) 새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조선남부에 향한 적기  3대는 아군이 이를 격추하였고 후속기(後續機)는 이를 격퇴하였다.

조선일보는 11월 14일자 석간 1면 머리에 「상해 공략전은 종료/ 남경 공방전투 개시」라는 기사를 올렸다. 그리고 17일자 조간 1면의 「국부(國府) 천도 결정/ 중경을 임시수도로」라는 기사를 통해 “국민정부 최고 수뇌부가 협의한 결과, 국민정부는 군사관계를 제하고 기타의 행정부를 모두 남경으로부터 오지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보도했다.

11월 20일 일본 정부는 이른바 ‘대동아전쟁’을 총괄하는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조선일보는 21일자 조간 1면에 「대본영 드디어 설치/ 최고 통수진용 정비」라는 기사로 그 ‘역사적 결정’을 알렸다.

[동경 전화 동맹] 육군에서는 금회 사변에 대한 통수상의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지난 17일에 제정된 대본영령에 기(基)하여 18일 참모총장 군령부총장 양궁(兩宮) 전하께서 대본영 설치에 대하여 주청(奏請)하시었던 바 어재가하압시었으므로 이래 편제 중 20일 완료를 보아 동일 오후 4시 육군성으로부터 아래와 같이 발표하였다. (…)
금반 지나사변에 대처하기 위하여 (…) 대본영을 설치하였다. 이는 금차 사변의 추이에 감(鑑)하여 장기작전 각오로써 본격적으로 무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통수부를 전시체제에 옮김이 적당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전쟁을 ‘총괄’하는 최고사령부가 궁중에 설치됨으로써 일제의 침략전쟁은 중국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로 확산되어 간다.


‘남경 대학살’을 외면한 조선일보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은 장개석 국민정부의 수도이던 남경 함락에 총력을 쏟았다.
조선일보 12월 8일자 조간 1면 머리에는 「남경 총공격전 드디어 개막!」이라는 기사가 올랐  다. 조선일보가 10일 발행한 <호외>는 「남경성 각 성문 일제히 점거 / 장렬한 시가전 계속」이라는 제목으로 ‘아군’이 남경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알렸다.
12월 13일자 조선일보 사설 「남경 함락」은 흥분과 감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지나의 수도 남경은 이에 함락되었다. 진강, 구용, 심수의 소위 ‘제1크트’ 국방선에 의하여 난공불락을 자랑하고 수도 사수를 맹서한 국민정부도 황군 정예 앞에는 함락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면적 총공격을 개시한 이래 4개월 만에 수도 남경을 함락하였다는 것은 세계 역사상에 희유(稀有)한 일이다. 남경성은 방공 기타의 방위에 있어서 세계 제일이라는 칭(稱)이 있다. 지나 군대의 전투력은 근대국가의 육군으로서 손색이 없다. 함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신속적 스피드로 성과를 수(收)하였다는 것은 지나군의 열세에 의한 것보다 충용한 황군 장병의 우월한 데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군사상 여러 가지 ‘핸디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단시일에 적국 수도를 함락하였다는 것은 일본군의 실력이 여하히 정예한 지를 좌증하는 것으로 다 같이 축하할 바이다.

같은 날짜 조선일보 기사는 ‘만세’ 소리로 진동했다.

만세의 노도(怒濤) 국기(國旗)의 물결 / 남경 함락을 축승(祝勝) / 전시(全市)는 환호 일색 / 봉고제(奉告祭), 기(旗) 행렬, 군대 행진 / 금일 시내의 장관!

남경 함락 축하식은 총독부의 지령에 따라 12일 전 조선 13도에서 일제히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날 낮과 밤을 통하여 곳을 따라 전승(全勝) 봉고제 또는 축하제, 기 행렬 , 제등 행렬 등 각종의 축하식을 거행하였는데 곳곳마다 우렁찬 만세 소리는 도회나 농촌을 물론하고 조선 전폭에 뻗쳐서 축하 기분이 창일하였다.
이날 경성에서도 오전 11시 조선신궁에서 엄숙한 봉고제를 비롯하여, 이어서 신궁 앞 광장에서 관민 2천여명이 모여 성대한 축하회가 있는 한편으로 용산부내에서는 보병·포병·공병·기병대가 장갑차대를 선두로 오전 9시 반 병영을 떠나 시내 주요 도로 연선(沿線)에 도열한 시민들의 열성 넘친 환호 속에 위의장엄하게 행진하였으며 한편으로 오후 1시반부터 총독부 광장을 비롯하여 시내 6개소에서 회집한 시내의 각 학교 아동생도, 학생, 청년단, 방호단, 재향군인 등 각 단체원 17만명의 기 행렬은 전 시내를 편납하여 국기의 물결과 만세의 환호 속에 전 시는 축승 일색으로 물들이고 말았다.

일제가 남경을 함락시킨 것을 대대적으로 축하하는 그날의 서울은 마치 민족이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된 날로 착각할 정도로 요란했음을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사람들이 자의든 타의든 13도 전역에서 ‘황군의 남경 함락’을 열광적으로 축하하는 만세 소리가 미처 가시기도 전에 남경 현지에서는 일제의 민중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중경으로 옮겨간 뒤 남경에는 전쟁을 피해 중국 각지에서 피란을 온 이들과 주민들이 무방비 상태로 남아 있었다.

5만여명의 일본군이 장악한 남경에서는 이때부터 약 2개월 동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잔인한 학살과 강간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스러운 온갖 잔학행위가 일본군에 의해 자행되었다. 일본인의 만행은 거기에 가담했던 일본군인, 그것을 목격한 일본인 종군기자, 외국인 기자들에 의해 생생한 증언으로 밝혀졌다. 그것은 차마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할 수 없는 잔혹한 짓이었다. 안정애가 지은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2)에는 죽음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중국인의 증언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부두에 도착하자 날이 어두워졌다. 일본군은 우리를 20명씩 한데 묶었다. 묶고 나면 바로 기관총으로 쏴 갈겼다. 나는 앞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따라 강으로 뛰어들었다. 총소리가 계속 귀를 때렸다. 기관총 소리가 멈추고 일본군은 한 사람씩 총검으로 찔렀다. 죽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총검질이 끝나자 시체들을 불로 태웠다.” (…)
수십 년이 지난 뒤 이 학살에 가담했던 일본군인의 일기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그 일기에는 “요즘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죄 없는 중국인들을 산 채로 매장하거나 장작불에 밀어 넣어 몽둥이로 때리거나 혹은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라고 쓰여져 있다. 전쟁터에 강제로 내몰려져 이미 인간성이 파탄된 상처받은 민초의 모습이다.

일본 정부는 2013년 현재까지도 ‘남경 대학살’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1937년 12월에 그 끔찍한 만행에 대해 단 한 줄의 기사도 싣지 않았던 조선일보는 오늘날에는 일본의 그런 자세를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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