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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 친일로 들어선 조선일보(2)조선일보 대해부 13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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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1.1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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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없는 279일의 ‘조선’

동아일보가 무기정간을 당한 지 미처 한 달도 되지 않은 1936년 9월 18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 머리에 「만주사변 5주년/ 내외의 정세 일변」이라는 사설이 실렸다.

금 18일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지 만 5주년이다. 만주사변은 이것을 신흥 민주국으로 보나 또는 전 세계로 보나 일본으로 보나 전 동양으로 보나 획시기적 역사적 의의를 가진 중대 사실이다.
우선 만주로부터 보면 그 변화를 생각할 때 실로 창상(滄桑)의 감을 불금하겠으니 관동군에 의하여 만주 제 도시가 점령되자 장학량 정권은 만주국 정권에게 구축(驅逐)되고 신정권은 강덕(康德) 황제를 추대하여 만주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만주제국은 일본의 승인을 얻고, 일본과 의정서를 교환하여 만주국의 치안과 국방에 당하고, 북철(北鐵) 매수에 성공하여 구(舊)동삼성과 열하성을 합한 만주국의 완전 통일을 보았다.
연(連)하여 행정기구와 구역을 개정하고 재정제도를 확립하여 근대적 산업, 경제의 기초를 지었으며, 철도망 건설에 의하여 만주국의 문화상, 교통상 통일의 기구를 지었다. (…)
다음 구주(歐洲) 내지 세계적으로 미친 영향을 보면 일층 더 큰 것을 발견한다. 만주국의 승인을 위하여는 초토(焦土)도 불사할 의기(意氣)를 가진 일본은 감연히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만주사변에 의한 신정세에 합하기 위하여 일본은 워싱턴, 런던 양 조약의 파기를 선언하여 결의의 견고함을 시(示)하였다. 한편 구주에 있어서는 나치스정권의 출현에 따라 독일 역시 국제연맹을 탈퇴함에 연맹기구는 일편 휴지화하고 이것은 다시 프랑스를 자극하여 소불(蘇佛)동맹을 현출하고 이 틈을 타서 이탈리아는 다시 에티오피아를 점령하는 등 구미 각 국에 군비 확장의 열이 고조되고 일본도 이에 순응코자 국방 충실의 기운을 작성하였다.

이 사설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중국 침략의 전초기지로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운 것을 ‘전 세계적으로 역사적 의의를 가진 중대 사실’이라고 미화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의 나치정권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정권에 발맞추어 일제가 군비를 확장하면서 중국 침략을 준비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1936년 9월부터 1937년 5월까지 조선일보 기사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내용은 일본 ‘천황’과 그 일가의 동정을 극존칭을 쓰면서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사례를 보기로 하자.

「천황 폐하 궁성 환행(還幸)」 (1936년 10월 13일자 1면)

천황 폐하께옵서는 육군 특별대연습 어통재(御通裁)를 위하사 지난달 24일 궁성 어발련(御發輦) 금기(錦旗)를 북해도에 진(進)하옵시사 지난 2일부터 5일까지 대본영에 혹은 야외통감부에 대연습을 어통재, 전선을 친히 어순시, (…) 각 도시에 행행(行幸) 상세히 북해도의 지방 민정을 어시찰, 또 척식(拓植) 개발상황을 어순시, 전부 여정 1700리, 19일 간에 이르는 어일정을 어종료하옵시고 12일 천기(天機) 어려(御麗)히 궁성에 환행하옵시었다. (…) 19일 동안이나 천황 폐하께옵서는 양도(良途)의 순행에도 불구하옵시고 사소한 어피로의 빛도 배승(拜承)치 못하고 용안(龍顔)이 끄시옵심을 배승되며 황공하옵게도 옥보(玉步) 어경쾌히 ‘폼’에 내리옵시사 (…) 궁성에 어환행하옵시었다.

「명치절제(明治節祭) 궁중에서 어거행(御擧行)」 (1936년 11월 4일자 1면)

헌정(憲政) 영원(永遠)의 전당으로 17년의 세월과 2700만원의 거비(巨費)와 일본 현대건축학의 정수를 경도(傾倒)하여 (…) 위용이 당당하게 준공한 신의사당은 오는 7일부터 거행할 낙성식 대축전에 앞서 5일 천황 폐하의 행행을 앙(仰)하여 헌정사상 광영의 일관(一貫)을 인(印)하였다. 당일 천황 폐하께옵서는 (…) 먼저 근위의장의 어선도로 귀족원에 옥보를 진하옵시사 (…) 재료 양식 기타에 관한 어설명을 어천청(御天聽)하옵시고 (…) 제원(諸員) 봉송리에 의사당 발 어궁성에 환행하옵시었다.

1937년 1월 1일자 조선일보는 1면 머리를 ‘천황 폐하’와 ‘황후 폐하’의 ‘어진영(御眞影, 전통적 예복을 입은 사진)’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원단(元旦)·궁중(宮中)의 어의(御儀)」라는 제목의 기사는 조선조의 <용비어천가>가 무색할 지경이다.

소화(昭和) 성대(聖代) 12년의 신춘을 맞아 대내산(大內山)의 경사스러운 원단. 천황 폐하께옵서는 금원(禁苑)이 아직도 밝기 전인 오전 5시30분에 벌써 어정신(御淨身)하옵시고 사방배(四方拜)의 어의를 행하옵시고 오전 6시 폐하께옵서는 현소대전(賢所大前), 황실전, 신전에 요배하옵신 후 오전 7시 반 봉황원에 출어, 조찬을 받으시옵실 터이다. (…)
또 대궁어소에 계옵신 황태후 폐하께옵서는 오늘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히로다 수상 이하 문무백관의 어후참하(御侯參賀)를 수(受)하옵실 터이다.

동아일보가 나오지 않던 279일 동안 조선일보의 사설들은 조선 민중의 참상이나 독립운동의 현황처럼 민감한 내용은 전혀 다루지 않고, 일제의 정책을 지지하거나 총독부의 시책을 홍보하는 데 집중했다.

일제는 1936년 12월 12일 사상 통제의 일환으로 제령 제16호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했다. 이 법령은 독립운동가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령에 따르면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상범이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더라도 거주와 취업, 여행의 자유가 제한되고 다른 사람과 접촉하거나 통신하는 일도 감시를 받아야 했다. 총독부는 서울, 대구, 광주, 평양, 신의주, 함흥, 청진에 사상범보호관찰소를 설치했다. 관찰소는 감옥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했다. 보호사는 주로 일본인이 맡았는데 조선인도 소수가 보호사로 선별되었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나 강요될 법한 법령을 일제가 조선에 적용하려고 조선사상법보호관찰령을 발동했는데도 조선일보는 당연하다는 듯이 12월 13일자 사설(「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발포」)을 통해 법령 운용에 대한 조언을 했다.

(…) 물론 사상범보호관찰령은 사회 개조를 목적으로 한 사상범을 대상으로 하는 법령이니 만치 사회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소화 3년 이래 동 10년까지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으로 조선 내에서 검거된 자의 총수는 1만6천명 가량 되는데 그 중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자, 또는 형의 집행유예 언도를 받은 자, 형의 집행을 종료한 자, 또는 형의 집행 중 가출옥의 허락을 받은 자의 총수가 약 6천4백에 달하여 있다는데 금번 발포된 사상범보호관찰령의 적용할 범위가 아직 알 수 없으므로 무엇이라고 논단할 수는 없으나 만약 이들 사상범 전부에 대하여 이를 적용한다면 본령의 사회적 의의를 떠나서 이에 관련된 인원의 숫자상으로 보더라도 중대사라 할 것이며 특히 본령의 주지(主旨)가 당해 각 국민의 행동 감시 내지 자유 구속에 있으니만치 그 영향은 일층 심대하다 할 것이다.
사상범보호관찰령은 이미 발포되어 실시하기로 확정된 것이므로 여기서 본령 명문(明文)에 대하여 왈가왈부함은 이미 그 시기가 늦었다고 인정하고 비평을 피하려 하거니와 본령 실시에 당하여 특별히 고려하여야 할 점은 운용 그 점이라 하겠다. 조선에 있어서의 사상운동은 소화 3년을 최고봉으로 이래 점차 침체되어 오던 바 만주사변에 의한 사회 정세의 변화로 일층 그 도를 가하여 현재에 와서는 거의 문제시되지 않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법령의 입법정신으로 보아서의 실제 가치는 미약할 것으로 추측하거니와 본령 실시에 있어서 그 운용을 그릇하는 경우에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걸어가는 사상운동에 도발적 반동기운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사유한다.


경쟁지 없는 조선일보의 사세 확장

1937년 1월 1일자 1면에 「조선일보의 신년 3대 계획」이라는 사고가 실렸다.

소년잡지 발행
본사는 언론기관으로서 입체적 완비를 도(圖)하는 동시에 그 기능을 일층 확충하고자 재작년 11월 출판부를 창설하고 대중잡지 <조광>과 여성잡지 <여성>을 발간한 이래 도도한 그 인기는 우리 독서계를 석권하였고 찬연한 그 성세(聲勢)는 아연 잡지계의 왕좌를 정복하여 출판계에 있어서 그 대배를 찾지 못할 신기록을 지었다.
대중적 지식 급양의 병참부를 자임하는 아사(我社) 출판부는 기간된 양대 잡지로써만은 만족을 가질 수 없는 동시에 우리사회의 열렬한 기대는 출판 진용의 재비약을 강요케 되어 금춘 4월부터 <조광>과 <여성>의 자매지로 소년잡지 <소년>을 발간케 되었으니 이는 우리 2세 대중에게 드리는 봉사의 일단이요 ‘어린이 조선’의 실력 함양에 무이(無二)한 보재(補材)가 될 것을 자기(自期)하는 바이다.

  소년조선일보
본사는 창립 이래 보도 사업 이외에 우리사회의 문화개발에 비익(裨益)이 되는 한 다종다 양의 문화사업을 위하여 주최 혹은 후원 등으로 형식에 구애 없이 노력을 해온 터이다.
개중에도 유치원연합 원유회(園遊會), 어린이날, 학생작품전람회, 초등교연합학예회 등 소년소녀를 중심한 문화사업에 있어서는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미래조선의 주인공들인 그들을 위하여 심대한 관심을 가지고 온 것이다. (…)
우리 어린이들의 동심에서 우러나오는 귀여운 온정을 만일이라도 보답하는 뜻으로 본사로서는 과중한 희생을 돌보지 않고 금월 10일부터 <소년조선일보>를 발간하게 되었다. (…)
소년신문! 이는 아직 조선 신문계에 있어서는 손을 내밀어보지 못한 처녀지역으로 본지의 금번의 쾌거는 사회적 불우를 받아온 우리 어린이들에게 복음이 될 동시에 신문기관의 보도 사명 외에 의의가 깊은 문화운동인 것을 기약하는 바다.


본사공장 증축
본사는 혁신 이후 해를 거듭할수록 지면의 확장과 내용의 쇄신을 계속적으로 단행하여 ‘보기 좋은 신문’ ‘읽기 좋은 신문’ ‘유익한 신문’을 만들기에 가속도적 노력을 해왔다. (…)
본사공장의 인쇄설비는 현대 기계문명의 수(粹)를 다하여 이미 대위관(大偉觀)을 보이고 있는 터인 바 금반 본사 신년 3대 사업의 하나로 공장을 증축하게 된 것은 본사의 발전과 융창을 단적으로 표시하는 증좌가 될 터이니 이는 본사뿐만 아니라 평소 혜고(惠顧)를 잊지 않으신 독자들과 함께 이 성운(盛運)을 동경(同慶)하는 바이다.

「조선일보사의 신년 3대 계획」이라는 큼지막한 사고 바로 위에는, 앞에 적은 바 있는 ‘천황  폐하와 황후 폐하의 새해 동정’과 사진이 실려 있다. 그리고 왼편 위쪽에는 「미나미 총독의 연두사」, 오른편에는 총독부 정무국장과 경무국장의 연두사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 민중을 노예로 만들고 마치 신처럼 군림하는 절대군주 부부를 새해 신문 1면 머리에 모시고,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총독과 고위 관리들의 위압적인 연두사에 에워싸인 조선일보의 사고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잡지계의 왕좌를 정복’하고. ‘미래조선의 주인공들’인 어린이들을 위해 ‘과중한 희생을 돌보지 않고’ <소년조선일보>를 창간하고, ‘이미 대위관을 보이고 있는’ 인쇄공장을 증축하면서 조선일보는 어디로 가면서 무엇을 이루겠다는 것인지가 그 사고에는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민족지’를 표방하면서 창간되어 ‘친일신문’으로 변질해 간 동아일보가 무기정간을 당한 시기에 조선일보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말고는 유일한 대형 일간지로서 ‘천황 폐하’를 하늘 같이 모시면서 상업주의적 팽창의 길로 치달았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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