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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이전투구(1)조선일보 대해부 12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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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2.2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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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증면(增面)과 문화사업을 경쟁적으로 벌이다가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뒤부터는 치열한 ‘相爭(상쟁)’에 들어갔다. 그것은 이전투구나 다름없는 싸움이었다. (…)
이 당시 일부에서는 혁신된 조선일보를 평안도 신문, 동아일보를 전라도 신문이라 칭하여 때 아닌 지방색을 풍자한 바 있는데, 우연인지는 모르나 전혀 근거가 없는 풍자만은 아닌 듯하다. (…)
(…) 동아와 조선의 끝없는 경쟁, 김성수와 방응모의 경쟁, 전라도와 평안도의 경쟁으로 이어지는 이 접전은 민족에 봉사하는 신문, 조국해방을 앞당기는데 기여하는 신문을 만들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한말의 대지주 출신으로 중앙학교, 보성전문, 해동은행, 경성방직 등 일련의 기관을 거느린 대동아 건설의 김성수, 김연수 형제의 재벌과 1930년대의 총독부의 산금(産金)정책과 산업경제 개발정책에 발맞추어 금광과 수원의 퇴지 개간으로 일약 백만장자가 되었고 1936년에 보성고보 경영권을 인수한 방응모 재벌의 매스컴을 업은 사업경쟁의 양상이었다(<일제하 민족언론사론>, 209~211쪽).

조선일보가 지면을 통해 동아일보를 상대로 벌인 이전투구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935년 6월 7일자 2면 기사(「보전 교장 돌연 사직, 후임은 김용무 씨, 신입생 정원 이상 모  집문제로 전 교장 김성수 씨 인책」)

시외 보성전문학교장 김성수(金性洙)씨는 그간 사임하고 동교 이사장 김용무씨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당국에 인가 신청 중이던 바, 5월 말일 부로 인가되어 교장 취임을 보게 되었다. 김성수 씨가 이번 사임하게 된 이유는 지난 3월 신입생 모집 때에 정원보다 약 60여 명을 더 모집하여 그간 학무당국의 간섭으로 그중 30여 명은 수속 불비란 이유로 입학 취소를 시키고 나머지 30여 명은 그대로 수용 중이었던 바, 이에 대하여 학무당국에서는 전부터 정원 이상 모집을 엄중히 제지하여 오는 터에 금번 이와 같이 정원 이상을 수용하였다 하여 입학허가 학생을 내보내라고까지 하므로 학교당국에서는 이왕 입학시킨 학생은 내보낼 수 없는 형편이므로 모든 책임을 교장이 지기로 하고 김성수 씨가 사임하기로 하고 그 대신 김용무 씨가 취임케 된 것이라 한다. 따라서 김성수 씨는 금후 동교 이사의 일원으로서 교무에 진력할 터이라고 한다.

1935년 6월 7일자 같은 면 기사(「학교 처치[處置] 야박[野薄]을 피고생도가 풍매[諷罵], 사제 정분 운운 과보[果報]가 이 고생시킨다고-중앙고보 학생사건공판」)

‘중앙고보 현상윤 교장 이중 처신’

석간 기보(旣報)=중앙고보 학생사건 제1회 공판은 오후 1시 10분 피고 전민수의 심리로부터 계속 개정하여 임두택, 이해풍 등이 끝난 뒤에 박상진을 심리하게 되자 법정 안은 아연 긴장이 되었다. 박상진은 우선 심(沈) 선생과 현(玄) 교장에게 대하여 절대로 욕설을 안 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답변한 뒤 뺨에 점점이 남아 있는 0000의 흔적을 보이면서 이와 같이 00를 당하고 부득이 허위자백도 하였으나 검사실에서는 그 자백을 번복하였다고 진술한 뒤 “나는 결코 욕설을 한 일이 없소. 그날 오후 2시쯤에 교장선생이 와서 고려하겠다고 하기에 우리는 성의를 다하여 만족한 해결이 되기를 기다렸소. 사실 그 사건이 있던 18일에 교장선생은 우리 학교에 사제의 정분이 너무 박약하다고 한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러면 사제의 정분이 있는 교장선생의 은택은 우리를 경찰서에 보내어 102일 동안이나 모진 괴로움을 주었을까요? 고려하여 준다고 하여주고 12시간이 지나 비로소 생긴 결과는 경찰을 데려다가 문을 부수고 들어오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다지도 흥분이 되니 경관에게 대항을 하게 하여 결국은 이 결과에 이르게 한 책임이 우리에게만 있다고는 생각지 아니한다”고 책상을 치며 당시 학교당국의 처지를 비난하며 겸하여 0000을 폭로시켰다.

이 두 건의 기사는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와 관련된 사건을 다룬 것이다. 보성전문도 김성수가 투자하고 인수한 것이고 중앙고보도 그가 투자하고 인수한 것이다. 호남 굴지의 지주 아들인 그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두 학교를 각각 인수하여 운영 중이었다. 이런 활동과 관련, 역사는 그를 교육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의 교육관에 먹칠을 한 사건이 여기 실려 있다. 학생을 정원 초과 입학시켰고, 교내에서 독립운동 관련 유인물을 돌린 학생을 그의 친구인 현상윤 교장이 비겁하게 처리함으로써 구속학생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사실은 경쟁지인 조선일보가 보도하여 역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도 김성수의 과오에 대하여는 글쓰기를 주저한다. 동아일보로부터 매도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특히 현상윤은 민족문제연구소 발행 <친일인명사전> 「인명편 3」(917~919쪽)에 수록된 친일지식인으로 중앙학교 교장 시절 제자를 고발한 사실이 밝혀져 있다.

동아일보를 사설로 공격

조선일보 1935년 6월 8일자 사설(「학교당국의 반성을 촉[促]함-보전중앙[普專中央]의 처사    에 대하여」’)

피교육자인 학생생도에게 대하여 다만 지식기능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교육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 다 교장이 못되는 것도 이 때문이요, 누구나 다 교수 혹은 교원이 못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금일, 어떠한 나라에서나 대개, 적어도 중등교육 이하의 교원에 대하여는 학무당국이 그 자격을 인정한 자에 한하여 교육자가 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놓은 것도 역시 그 이유의 반은 교장 이하 일반 직원에 대하여는 지식기능 이외에 고귀한 어떤 자격의 구비를 요구하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고귀한 어떤 자격이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피교육자를 감화시킬 만한 인격’이다. 피교육자를 감화시킬 만한 인격, 이것이 없이 교장 또는 교원의 자리에 앉게 되면 그러한 학교에서는 학생, 생도는 지식 기능을 사는 사람, 선생은 지식기능을 소매(小賣)하는 사람, 교장교주는 그것을 도매하는 사람의 삼각관계쯤으로 되어 가지고, 다시 그 관계는 교육계의 불미사(不美事)를 연출하는 근간적(根幹的) 원인이 되는 것이다. 금번, 중앙고보의 생도사건에 대한 검사의 구형 논지에 “최근 학계의 불상사가 빈번히 발생됨은 그 원인에 있어서 하나는 학교당국, 하나는 생도 자신의 책임이다”라 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이 이치를 사실로 증명하는 것이다.
먼저 중앙고보생 사건에 대하여 엄정한 비판을 내린다면 첫째 교장교원 대 생도 간에 욕설 또는 구타의 사실 유무를 서로 변명하게 된 것 자체가 이러한 사제의 사이에는 평일, 지식 기능에 대한 매매관계 이외에 하등의 도덕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거니와, 법정에 선 형사피고인 생도로부터 방청석에 있는 교장을 향하여 “평일에 사제의 정분이 박한 것을 개탄하던 선생으로서 우리를 이러한 경우에 몰아넣어야 옳소”를 반문할 지경이라 하면 이는 실로 언어도단, 다시 말할 바를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사건 발생 이전에 있어서 교장의 지위에 앉은 사람으로서 생도들에게 대하여 “12시간 이내에 생도 측에 대한 학교당국 측의 결정적 의사를 회답하겠다” 운운의 설은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이것은 마치 저 공장주가 노동자에게 대한 쟁의 해결 방법 그 물건(物件)이요, 학교에서의 교장 대 생도 간에 있을 일로는 결단코 볼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또한 저 보전(普專)의 입시합격자 무단출교(無斷黜校)의 사건을 볼지라도, 미리 학무당국에 대하여 양해를 얻는 준비공작이 없이 먼저 합격자를 발표하였다가 중도에 와서 사태가 불리하게 전개되는 것을 보고 아연(俄然)히 창황막조(蒼惶莫措)하여 그 합격자가 개학식 시간 전에 오지 않은 것을 이유로 하여 입학을 취소한 학교당국의 행동은 실로 1)기미(期米-일명 米豆) 주식계(株式界)의 투기사들 모양으로 요행을 바라는 행동이 아니면 2)대사(大事)를 대사로 알지 못하는 00경솔자의 하는 행동이요, 결단코 학교당국으로서는 할 일이 아니다. 더구나 무단출교를 당하는 학생일 법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이 학교는 엄격제일주의이기 때문에 입학수속을 태만케 한 자에게 대하여는 ‘단불용서(斷不容恕)다’라고 답한 일은 자기의 과실에 대한 불개종문(不改從文)의 분식적(粉飾的) 기만적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랴? 자기는 입학되었거니 하고 보전의 제복 제모를 사서 입고, 쓰고, 교문에 들어섰다가 헛방을 집고 돌아서는 그들의 정경(情景), 문제의 핵심은 여기 있다.
물론, 학생생도 자신에 대하여는 과오가 전연 없다는 것이 아니다. 욕설 유무를 변명해야 되도록 한 것도 생도의 잘못이요, 신입생의 처지로 개학식에 맞추지 못한 것도 학생의 태만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기의 과오에 대하여 응분의 0과를 받았다. 이제 나머지, 교육계의 불미사를 근절하기 위하여는 이러한 사이비적 교육자를 직접은 물론, 간접으로도 학원으로부터 격리시키는 하등의 방도가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김성수는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동아일보의 정간조치 문제로 수시로 조선총독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가 운영하던 중앙고등보통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그는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당했다. 1935년부터는 공직에서 은퇴한 후, 국내 고미술품의 밀반출을 막기 위해 고미술품 수집에 힘을 기울였고, 태평양 전쟁기간 중 창씨개명과 협력 강요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위키백과>, 김성수 편).

<위키백과>는 김성수가 사재로 취득한 중앙학교나 보성전문을 운영하다가 위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을 ‘공직 은퇴‘라 표현했는데, 사립학교는 공직이 아니다. 이는 다분히 동아일보를 의식한 김성수 봐주기 측면이 강한 묘사이다. <위키백과>는 네티즌이 참가하여 작성하는 사전으로 네티즌이 동아일보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동아일보를 광태난무(狂態亂舞)하다고 공격

조선일보 1935년 6월 21일자 사설(「동아일보의 광태난무」)

최근, 약 1주일 간에 걸친 동아일보의 광태난무는 하도 괴상다단(怪常多端)하여 일일이 거론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현명하신 독자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에서는 그 괴태(怪態)를 숙지(宿知)하고 계심을 행(幸)으로 안다. 요컨대 동아일보의 천태만상의 기괴망측한 난무는 이를 한 마디로 자르면 혁신 이래 3년의 단기간에 욱일승천의 세로 팽창 발전해 가는 우리 회사에 대한 질투와 시기와 증오의 울적(鬱積)이 우리 회사의 위풍당당 압인색기(壓人塞氣) 느낌을 주는 신사옥으로의 이전을 계기로 하여 일시에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촬이맹랑(撮爾孟浪)한 동아일보의 발악쯤은 사람에 비하면 명실공히 대인의 풍도(風度)를 지닌 우리 회사의 관심할 바는 절대로 없다. 그러나 혹 일부에서 동아일보의 우리 회사에 대한 허구날조의 기사에 의하여 오해를 살까 두려워하여 이에 우리는 그의 정체를 폭로하여 우리의 옳음을 밝히고자 하는 바이다.
우리 회사가 아직 구 사옥에 들어 있을 때는 저 동아일보는 아직도 환각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환각이란 사실에 없는 것을 있는 듯이 보는 것이다. 저들의 우월감이 왜 환각적 우월감이냐 하면 첫째 자본금으로 보아도 저들은 토지 가옥 집기류를 과대평가하여 근근 50만원이다. 인물, 경영방침 그밖에 대해서도 스스로 변명하기는 약간 거북하여 거론하지 않거니와 스스로의 변명이 없다 한들 현명하신 독자 제위는 몰라줄 리 있으랴. 원래가 이러했기에 저들의 우리 회사에 대한 종래의 우월감은 실로 포말적 환각적 우월감 이외에 아무 물건도 아니었다.
그래도 환각적 우월감이나마 가졌을 때에는 저들은 삼동(三冬)의 뱀 모양으로 가면상태(假眠狀態)에 있어서 꾸물꾸물하는 정도의 증오를 표현하더니, 지난 12일 우리 회사 신사옥 이전의 자극을 받자 졸연(猝然)히 꿈으로부터 깨어나서 우리 회사의 위압적 사옥을 2정(二町) 미만의 거리에서 바라보고, 비로소 공포심을 느끼게 되었다. 저들의 공포심을 전 요소(全 要素)로 한 증오질시는 극도에 달했다. 저들은 우리 회사를 지금 거꾸러뜨릴 방법을 생각하며 재료를 모색했다. 때마침 우리 회사 신사옥 이전보다 약 1주 전에 우리 회사가 보전(普專) 당국의 중대 과실을 지적한 사실이 있음을 포착하여 이것을 재료로 하여 우리 회사에 대한 단말마적 발악을 시작하였다. 이 재료는 그들에게는 대단히 유리한 재료다. 왜냐하면 첫째 경영자가 동일인이라는 맥락을 통하여 학교당국자를 임의로 조종할 수 있고, 둘째 지면은 제 지면이니까 비록 사회민족에 대하여 더 할 수 없는 죄악이라 할지라도 우선 당장은 함부로 더럽힐 자유가 있고, 셋째 우리 회사의 조선교육계를 위한 진심으로 나온 보전당국자(단순히 당국자)에의 호의적 충고를 마치 과거의 졸업생으로 된 교우회(校友會), 또는 현재 학생들에게까지 무슨 불명예가 되는 것처럼 캄풀라지 할 수가 있고, 넷째로 시키긴 교우회를 시켜서 없는 일을 있는 듯이 만들어놓고 자기(동아)는 제3자의 태도로 보도하는 듯이 캄풀라지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저 동아일보는 이 4대 유리점을 예의도 염치도 도덕도 불고하고 함부로 이용하여 우리 회사를 박해하는 재료를 남조(濫造)하여 이것을 사회에 제공함으로써 선량하신 독자의 이목을 현혹하는 죄악을 감범(敢犯)하고 있다. 믿지 못하겠으면 이번 제2차 보전교우회의 결의문의 형식으로 보도된 것을 보라. 그 결의 제1항인 조선일보에 대한 비매동맹결의(非買同盟決議)는 “조선일보가 한 사람의 독자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동아일보의 제일 희망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며, 그 결의 제2항인 ‘조선일보와의 일체 관계의 단절’ 또는 그 부대결의의 소위, 팜플렛, 성토문 및 성토강연 운운은 저들의 제1희망 보강적 표현인 동시에 조선일보에 대한 극도의 시기질투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일까? 또한 그 결의 제3항의 “조선일보 간부를 광고 강요자라 하여 공갈미수죄로 고소” 운운에 이르러는 전혀 동아일보 및 그 경영자의 허구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억지로 이런 결의(보전교우회의 제1차 결의를 연상하라)를 하도록 하여 이것으로써 저들이 그 지면을 더럽히는 이유는 어디 있느냐 하면, 거기는 이러한 악의가 있다. 첫째 이것으로써 현재 모집 중에 있는 우리 회사 신축 축하광고의 모집을 악을 쓰고 방해하려는 데 있고, 둘째는 지난번 저 보전 초과생(超過生) 28명의 학업 안수(安受)를 위하여 인책 사직하는 식의 전례를 모방하여 후일에 가서 고소할 수는 있으나 자기의 체면을 보아 안 한다는 식의 기만을 감행하려는 허식재료(虛飾材料)에 쓰기 위함일 것이다. 동아일보의 사회에 대한 죄악적 광태난무에 대해서 우리는 이 이상을 말하고 싶지 않다. 나머지는 현명하신 독자 제위의 비판에 일임할 뿐이다.

위 두 건의 사설이 나온 것은 조선일보가 김성수 관련 비리를 보도한 데 대하여 동아일보가 강하게 역공함에 따라 이를 방어하고 동아일보 창업자인 김성수 개인을 매도할 목적임이 분명하다.
두 신문사는 8·15 해방 이후까지도 기회만 있으면 이렇듯 상호비방 또는 공격을 해오다 박정희 쿠데타 이후 비교적 느슨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조선•동아일보가 이전투구 식 갈등관계를 유지하던 시기에 조선에서는 일제 식민체제가 굳어지면서 국내외적으로 민중 차원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신문은 민족의 독립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밥그릇 싸움에만 몰입했다는 비판을 받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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