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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모 시대’의 개막(1)조선일보 대해부 9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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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2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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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에 조선일보사의 경영 상태는 최악이었다. 사원들이 월급을 받지 못하는 적이 비일비재였고, 식대가 지급되지 않아 점심을 거르는 것이 일쑤였다.

편집국장 한기악은 신문 제작은 뒷전이고, 매일 경영난 해결을 위해 이곳저곳 분주히 돌 아다니다 결국 과로로 쓰러졌다. 집과 전답마저 남의 손에 넘겼다. 이 때 사장 신석우는 부 도를 막기 위해 고리대금업자 임경래에게 사채를 빌려 쓰기 시작했다. 급할 때마다 500원, 1000원씩 빌린 돈이 7000원까지 불어나자, 1930년 가을 임경래는 빌린 돈을 전부 갚으라고 요구했다. “돈을 갚지 못하면 조선일보 판권을 저당 잡히라”는 임경래의 요구를 신석우는 결 국 받아들였고, 발행인 명의 변경 서류에 서명했다. 이로 인해 사원들은 사장이 임경래의 돈 을 쓴 것을 성토하고 퇴진을 요구했다. (…)

조선일보와 함께 민권운동에 앞장섰던 신간회가 1931년 5월, 창립 4년여 만에 자신들의 세력 약화를 우려한 사회·공산주의자들의 사주로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제는 신간회의 해산에도 불구, 신간회 간부들의 동태를 계속 감시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사장 신석우는 퇴진 요구까지 나오자 안재홍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5월 20일 상해로 탈출했다. 안재홍은 문서상으로 7월 25일 취임했다(<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90~91쪽).

안재홍이 사장을 맡은 뒤에도 경영난이 풀리지 않자 조선일보사 간부들이 1932년 초 비밀 모임을 갖고 “불요불급한 사원 20명 정도를 내보내 경영 합리화를 이룬다”는 결론을 내리고, 안재홍에게 “당장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전원 사퇴하겠다”고 통보했다. 경영진은 결국 20여명을 해고했다.

사채업자가 조선일보 발행권 장악

강제로 회사를 떠나게 된 사원 20여명 가운데 몇 사람이 총독부에 투서를 했다. “조선일보 경영진이 만주사변에서 희생된 만주 지역 동포를 돕기 위해 모금한 성금을 회사 자금으로 유용했다”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일부 지국과 지사에서 자체 모금한 성금을 신문대금과 구별하지 않고 본사로 송금해 처리되지 않았던 부분을 잡아냈다.”

일제 경찰은 그것을 문제 삼아 사장 안재홍과 영업국장 이승복을 1932년 3월 공금 횡령 혐의로 구속했다. 두 사람은 감옥 안에서 일제의 강요를 받아 사표를 냈다. 조선일보사 이사회는 안재홍의 사장직 사표를 수리하면서 발행인 자리는 유지하게 했다.

교육계 원로이자 전조선기자대회에 자금을 댔던 유진태가 조선일보사 제7대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의 재임기간은 겨우 한 달쯤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조선일보 발행권이 사채업자 임경래에게 넘어갔다. “사장과 영업국장이 구속되고 채무 변제가 지연되자 임경래는 신석우의 도장을 받아 보관만 해두겠다고 했던 발행인 변경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발행인·편집인·부사장에 취임했다. 1932년 6월 1일 조선일보의 발행권은 법적으로 채권자인 임경래에게 완전히 넘어갔다”(같은 책, 92쪽).

다수 사원들은 6월 1일 “임경래의 이름으로는 신문을 만들 수 없다”며 제작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일부 과격한 사원들은 견지동 사옥의 사장실에서 그를 강제로 끌어냈다.

견지동 사옥에서 쫓겨난 임경래는 명치정(明治町) 2정목 동순태빌딩에 별도의 조선일보 임 시사무소를 차리고 6월 15일자 석간부터 조선일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견지동 사옥 에서도 사원들이 별도의 신문을 발행해 “견지동과 명동에서 두 개의 조선일보가 각각 발행 된 때도 있었다”고 당시 사회부 기자 유광렬은 회고했다. 그러나 실제로 견지동과 명치정에 서 각각 조선일보가 나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발행인 임경래 명의의 신문은 현재 남 아 있으나 안재홍 명의의 신문은 존재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같은 책, 92~93쪽).

조선일보 다수 사원들과 임경래가 맞서고 있을 때 조병옥과 주요한이 임경래와 접촉해서 발행권을 3만원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두 사람은 선불로 2500원을 내고 잔금을 모두 치를 때까지 임경래의 부사장직은 유지시키기로 합의한 뒤 먼저 운영권만 받아냈다. 조선일보는 11월 23일자로 ‘통합 속간호’를 내고 민족운동 지도자 조만식을 제8대 사장으로 영입했다.

방응모의 ‘조선’, ‘동아’의 강력한 경쟁지 되다

사장 조만식은 재력 있는 사람을 물색하다가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방응모에게 조선일보 발행권을 인수하라고 간곡히 권유했다. ‘광산 갑부’ 방응모는 금광을 처분해서 총자본금 50만원을 불입한 뒤 1933년 3월 22일 조선일보 경영권 전체를 정식으로 인수했다.

소위 ‘만주 교포 구제금 횡류(橫流)사건’ 이래 가장 큰 경영상의 수난기를 겪은 조선일보는 휴간을 거듭한 끝에 방응모가 경영을 전담하여, 1933년 4월 26일에 한국 신문사상 최고 부 수인 100만 부의 혁신기념호를 발간함으로써, 조선일보 재건과 대약진의 출범을 보게 되었 다.

조만식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방응모가 부사장·발행인·편집인을 겸한 새 진용으로 발행된 이 혁신호는 전 12면으로, 전면(前面)에 철쭉꽃으로 테를 두른 장식 속에 ‘혁신의 사(辭)’와 ‘취임에 임하여’란 표제의 조만식 사장과 방응모 부사장의 취임사, 이도영 화백의 축화(祝 花), 그리고 송진우·여운형·유억겸·권동진·최린·신흥우·김활란 등의 혁신 축사가 게재되었다 (<조선일보 60년사>, 447쪽).

조선일보 4월 26일자 1면에는 통상 사설을 싣는 자리에 ‘혁신의 사(辭)’라는 글과 사장 조만식, 부사장 방응모 이름으로 된 ‘취임에 임하여’라는 취임사가 올랐다. 이런 경우 사장 한 사람의 인사말이면 충분할 텐데 부사장 이름까지 병기한 것은 이채롭다.

만물이 생장을 합주(合奏)하는 성춘(盛春)-이때를 맞아 조선일보는 혁신기념호를 독자에게 보낸다. 조선일보의 사명은 항구불변이며 또 하루하루 새로워진다. 조선의 민중을 벗하며 2 천만의 이익을 대표하여 간난을 무릅쓰고 곧은 붓 굳센 말로 숭고한 지도정신을 수립하여 온 조선일보는 앞으로도 그 전통을 계승하여 민중으로 더불어 성패를 같이 하려 하니 본보 사명이 항구불변한 까닭이다. 신문의 신문됨은 시시각각 전변하는 역사의 대세를 정확신속 하게 보도함에 있으니 생활양식의 격변과 과학문명의 비약에 걸음을 맞춰 본보는 나날이 새 방식 새 기술을 개척하여 사회의 안목에 부응코자 한다. (…)

우리의 소신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오, 혼연히 통일된 조선민중의 열의 그것을 체득 하고 표현함이 우리의 본령이니 우리를 이해하는 민중은 과언리(寡言裏)에 도리어 한층 명 백히 우리의 심정을 양찰하리라. 이제 한 번 더 이를 기억하고 한층 깊이 인식하는 것으로 혁신의 의의를 삼을 뿐이다. 붓을 다시 잡음에 임하여 우리의 전도가 피어나는 이 봄과 같 기를 비는 바이나 다시 생각건대 돌파하여야 할 험산준령이 중첩하다. 본보다운 사명을 완 수함은 독자대중의 묵계와 지지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세계와 조선이 한층 다단한 앞날을 맞이하려는 이때 차라리 비장한 결의가 우리와 함께 한다. 원컨대 우리로 하여금 용기 있게 소임을 감행하게 하라.

새로 사장이 된 조만식(曺晩植, 1883년 2월 1일~1950년 10월 15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교육자·종교인·언론인·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22세에 개신교에 귀의한 이후 상업과 종교 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과 중국 출국 실패 등으로 투옥당하기도 했다.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교육 활동과 물산장려운동, 국내 민간자본으로 대학 설립을 추진하는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 등을 주도했다. 1945년 8월 15일 민중의 지지와 호응을 받아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역 위원장에 참여했고, 11월에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를 지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다가 1946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한국전쟁 중 김일성 측근세력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전해졌다.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인 그는 일찍이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방응모와 가깝게 지낸 인연으로 그와 함께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사재도 출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의 새 사주가 된 방응모는 4월 27일자 신문 1면에 「드리는 말씀」이라는 글을 실었다.

응모(應謨)는 원래 재품(才禀)이 총혜(聰慧)치 못할뿐더러 겸하여 학식이 천박하여 일찍이 사회에 대하여 하등의 공헌함이 없음은 자괴(自愧)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금번에 조선일보가 경영 곤란에 빠지게 됨을 제(際)하여 2,3 동지로부터 계속 경영 의 권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원래 신문에 대하여는 평일부터 다소 취미를 가지고 있던 바외 다. 비록 경력으로 보면 유소시(幼少時)부터 금일까지 빈한과 싸웠고 미약(微弱)에 울어 형 언할 수 없는 고초와 간난을 겪었으니 무슨 일에든지 다소 신산(辛酸)을 감거(堪去)할만한 인내력과 난국을 돌파하려는 모험심의 준비가 전연히 결핍하다고도 생각지 않는 바이나 신 문 경영이 어떻게 곤란하고 또한 그 책임이 어떻게 중대한 것을 생각할 때에, 자연히 주저 하고 고사(固辭)함을 마지아니하였습니다. (…)

지금 조선에서 어떤 사업이 가장 필요하고 또한 급무(急務)냐? 이것을 생각할 때에 ‘교육’ 이라는 자답(自答)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신문은 과연 가장 보편적이요 현실적이요 사회적인 점에서 가장 큰 교육의 기관이외다. 이밖에도 물론 신문에는 여러 가지의 사명이 있습니다. 혹은 사실의 보도로, 혹은 정책의 주장 등 그 방면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외다. 그러나 그 중에도 고귀한 사명의 한 가지는 신문이 특히 조선민중의 이목을 대신하며 심장을 표현 하는 일사(一事)외다. 즉 조선인 전체의 생존에 대하여 안으로 밖으로 들리는 소리와 비쳐 오는 빛을 통일적으로 듣고 보는 것이 신문이요, 또한 우리 전체의 고통 피고(疲苦)와 환희 경사를 통일적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이 신문이외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응모는 조선일 보가 휴폐간되는 것이 우리 전체의 대암영(大暗影)이요 대손실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계속 경영할 생각이 나고 드디어 이것을 인수하기로 작정이 되었습니다.

엄청난 재력을 가진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함으로써, 호남의 대지주로서 일제강점기에 경성방직 설립 등을 통해 산업자본가로 급성장한 김성수의 동아일보는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진 경쟁지와 맞서게 되었다.

조선일보사와 ‘숭배자들’이 보는 방응모

1933년 4월 27일에 조선일보를 실질적으로 ‘재창간’한 방응모는 조선일보를 주축으로 하는 ‘조선미디어’에서 ‘신성불가침’의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이 2005년에 펴낸 <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대>(랜덤하우스중앙)에는 방응모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방응모는 경성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신문과의 관계라곤 1922년부터 5년간 동아일보 (평북) 정주 지국을 운영한 경력이 전부였다. 맨손으로 광산에 뛰어들어 일확천금 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졌을 뿐이다.

방응모는 마흔 살에 접어든 1924년 삭주 교동(다릿골)의 폐광을 뚫기 시작했다. 좁쌀로 연 명하는 등 고생한 끝에 3년 만에 금맥을 발견했다. 그의 광산은 성장을 거듭해 1930년대 초반에는 종업원 1000여 명을 거느린 국내 굴지의 광산이 되었다.

금광 개발로 거부가 된 사람은 그 외에 최창학, 김태원 등이 있었다. 이들의 성공은 금광 열풍을 가져와 당시를 ‘황금광 시대’라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민간사업에는 한 푼도 기부 한 적이 없다”는 최창학처럼 금광왕들은 개인적인 이익에 관심을 쏟았다. 반면 방응모는 정 주에 소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장학회를 운영하는 등 공익사업을 펼쳤다.

당시 신문사 경영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자선사업으로 인식됐다. 언론사업이란 수익은 없고 골치만 아픈 사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를 잡지 <삼천 리>(1933년 10월)는 ‘부호의 의무를 다할 줄 아는 인격자’라면서 “금후의 금광왕들은 모두 방응모 씨를 본받아 사회와 고락을 같이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263~265쪽).

여기까지는 사실 여부에 관한 시비를 가릴 일이 못 된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대목은 조선일보 사주 또는 사장으로서 방응모가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저지른 ‘친일·반민족행위’를 극도로 축소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로 평가하고 있다.

방응모는 일제의 요구로 시국강연에 불려다니거나 임전대책협력회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 다. 이 단체에는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홍명희, 정인보, 허헌, 김병로, 이인, 여운형, 김성 수 등 조선의 지도급 인사들이 참여했다(<삼천리> 1941년 11월) (<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 대>, 268쪽).

방응모는 금광을 뚫기 시작하던 무렵인 1924년 8월 친형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들였다. 방재윤은 의주농업학교와 일본 중앙대를 졸업하고 평북 박천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36년 8월 조선일보 서무부원으로 입사했다. 그는 1937년 5월 초대 사업부장이 되어 1940년 4월 방응모가 함남 영흥에서 벌인 조림사업의 총책임을 맡아 일하다가 1940년 4월 식중독으로 입원해 주사를 맞다가 사망했다. 방응모가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진 뒤 북한군에 납치되어 생사불명이 된 상태에서 조선일보를 이끌어 온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재윤의 아들들이다. 방응모의 양자인 방재윤의 두 아들이 조선일보사를 상속한 사실 때문에 나중에 ‘친자’라고 주장하는 방재선이 오랜 기간에 걸쳐 ‘두 조카’와 상속권 다툼을 벌이게 된다.

방일영문화재단은 1996년 11월 <계초 방응모>라는 이름으로 전기를 발간했다. 저자는 이동욱이다. 이동욱은 1998년 11월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라는 책(도서출판 지구촌)을 펴냈는데, 이 책에는 그의 직업이 <월간조선> 기자로 되어 있다. 저자 약력에는 그가 조선일보에 연재된 <박정희 전기-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취재를 전담했다고 적혀 있다.

이동욱은 <계초 방응모>의 ‘프롤로그’에 이렇게 썼다.

(…) 그는 당대 최초, 최대의 육영 사업, 조림 사업과 간척 사업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그 의 삶을 추적하면 조만식, 홍명희, 한용운, 안창호 등 사상가 반열에 들었던 우국지사들의 뒤를 사려 깊게 봐 주었던 흔적들이 깊이 새겨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민족의 암울했던 시절에 방응모라는 사람은 광복이라는 또 다른 금맥을 캐기 위해 자신 의 전 생애를 투척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가지 결점을 갖고 있었던 서북 출신의 촌로(村老)였다. 한 번 결심하면 세상없어도 바꾸지 않던 옹고집은 말년의 운신을 스 스로 옭죄었고, 이로 인해 불행한 생의 마감을 자초했던 것이 대표적인 결점이었다.

이 인물. 개인으로 보면 고집투성이의 강단 있는 노인, 그러나 1930년대 조선일보를 통해 민족의 각성을 촉구했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신을 받치는 초석을 마련했던 한 인물에 대 해 후세는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다(21~22쪽).

<계초 방응모)보다 2년 뒤에 나온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 ‘프롤로그’에서 이동욱은 방응모를 훨씬 더 위대한 인물로 승격시킨다.

구한말-일제 식민 시대-대한민국, 이런 민족 변동기를 살다 간 인물 가운데 말보다 실천으 로써 우리 민족 전체에 그만큼 크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도 드물다. (…)

독립지사, 언론인, 선각자…그 어떤 언어로도 이 한 사람의 일생을 다 감쌀 수 없음은 필 자의 무능보다 그의 거대한 인격에서 비롯된다고 본다(10~11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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