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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의 조선일보(2)조선일보 대해부 8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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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15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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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 의거를 폄하하는 특집

「00정부 이춘산 명령, 노국인도 간접명령-상해 폭탄사건 속문(續聞)」

1932년 5월 8일자 조선일보는 2면에 윤봉길 의사의 상해 폭탄투척사건 특집을 올렸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상해발 전통) 범인 윤봉길의 자백에 의하면 직접 흉행(兇行)을 명령한 것은 조선 00당부의 이춘산(李春山)인 것이 판명되어 당국은 전기 이춘산을 체포하려고 노력 중인데, 이춘산은 소비에트 로서아의 명령에 따라 하르빈에서 적화운동(赤化)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최근 그 곳에 들어오면서 00정부 일파의 조선인을 조종하여 당지에 파견되어 있는 로서아의 모 유 력대표자(로서아인)와 연락하여 적색테러 계획을 진행시켜 윤봉길로 하여금 이번 흉행을 하 게 한 것이다. 이로써 이 사건 배후에는 적로(赤露)의 손이 간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 이 밝혀졌다.

‘배후엔 19로군(十九路軍)도, 긴장하여 엄밀 취조’

(상해발 전통) 상해사건의 주인공 윤봉길이 현장에서 체포된 것은 이미 보도한 바 있는데 그의 배후에 조선공산당의 마수가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범인 윤을 취조한 결 과 중국 측의 반일회원(反日會員) 또는 19로군도 배후에 있는 듯하여 당국에서는 긴장하여 취조 중이다.

‘앞장이로 활동하다 천장절(天長節)에 거사’

범인 윤봉길은 불조계(佛租界) 어떤 중국인 세탁소의 외교원으로 있었는데 그 사이 공동조 계에 있는 조선00당원과 왕래하는 가운데 동파(同派)에 들어간 모양 같다. 윤은 물론 간부 급은 아니고 무명의 당원으로 간부의 앞잡이가 되어 불온행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 천장절 축하식에 일본 군부와 외교관 수뇌부가 참집(參集)하는 기회를 엿보고 이러한 행동을 하였다고 한다.

‘윤봉길 사용의 폭탄 중국군부 제조?’

조선00당의 정부를 조직한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昻) 등 일파는 미리부터 반일회 및 항일 구국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가끔 자금의 공급을 받는 외에 모 사건에 사용한 폭탄도 항일 구국회를 거쳐서 중국 측에서 얻었고, 이번 폭탄사건에 사용한 수통(水筒)과 도시락에 집어 넣은 폭탄도 항일회를 통하여 중국 군부의 전문가에게 만들게 한 것이라 한다. 지금 전문가 가 이를 분석 조사 중이다. 00당 일파의 항일회와의 제휴는 공공연한 사실로 만주사건 발생 이래 항일구국회 주최인 배일대회(排日大會)에서도 그들은 각급 ‘00동지’라는 이름으로 나와 서 일본을 타매(唾罵)한 사실이 있고, 작년 12월 남시(南市)의 공공체육장(公共體育場)에서 개회된 항일구국시민대회(항일구국회 주최)에는 조소앙 등이 변사(辯士)로서 열변을 토하였 다고 중국 신문이 보도한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 이번 폭탄사건의 배후에 십 구로군과 동향인 광동인(廣東人)에 의하여 실권을 쥐고 있는 항일구국회의 손이 뻗쳐 있는 것은 덮지 못할 사실이라 한다. 그러나 수색 상 곤란한 것은 중국 측과 연락을 취한 물적  증거를 찾지 못하여 일본 헌병대와 영사관 경찰에서는 가장 고심하고 있다 한다.

‘김구·조소앙, 중국가 남시에 피신’

이번 대불상사 사건을 낸 조선00당은 0000정부를 조직하고 여기를 본부로 하여 항상 00의 고관에 대하여 위태를 가하고 음모를 하고 있다. 그 본부는 일찍이 불조계 마랑로 보강리 4 호에 있었는데 모 사건이 발로되었을 때 수상하여 모두 어디로 옮겨 자금은 빈집으로 되어 있다. 현재 00정부는 총리격인 김구(본명은 박정성)와 부총리격인 조소앙이 모든 조종을 하 고 있는데 모 사건이 일어나기 수일 전 즉 금년 1월 23일경 중국 항일구국회의 도움으로  중국가 남시에 도망한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중국가에 숨어 있어 항일회의 보 호 아래 있는 것 같다.
이춘산: 윤봉길을 조종한 이춘산은 본명을 이유필(李裕弼)이라고 하는데 안창호의 부하 중 에서 과격파에 속하여 지금 불조계에 있는 00거류민단 정무위원장 겸 서무부장의 직에 있 다. 00당 00정부의 수령이자 모 사건 이래 수사 대상인 김구의 직계이다.
안창호의 체포된 경로: 불조계의 조선 00정부 0총리였든 안창호(安昌浩)는 29일 밤으로부 터 30일 새벽에 일본 헌병대와 총영사관 경관대와의 수사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즉시 취조 한 결과 불조계 27호가 윤(윤봉길)을 지도한 이춘산의 숨은 집인 것을 알고 당국에서는 30 일 오전 3시 불조계 경찰과 협력하여 동소에 들어갔었는데 이(李)가 없으므로 이를 기다리 면서 이를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체포하여 동일 오후 불조계 경찰로부터 일본 영사관  경찰에 인수를 받았는데 그날 이를 찾아온 안창호는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안창호는 00정 부를 좌우하고 있는 김구 조소앙 등의 대선배로 안의 체포는 폭탄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일대 광명(光明)을 찾은 것이라 한다.

이 기사는 일제 군 당국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조선일보가 친일언론이었다 하더라도 조선일보 기자가 직접 쓴 기사라면 이처럼 취재가 부실하고 악의적인 기사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조선일보가 이런 엄청난 오보(誤報)를 쓰고도 추후 전혀 정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시 조선일보답다는 생각이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관한 연구로는 많은 학자들의 논문이 있지만 참고로 인터넷 상에 늘 떠 있는 기사를 여기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기사에 대한 평가를 맡기려 한다.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에서 작성한 것이다.

드디어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 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 하 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의사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靑島) 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 니다.”
의사에게 있어 그 사랑은 곧 민족애였다. 근대적 사고와 혁명가적 열정을 함께 갖춘 사람 이 바로 의사였다. 월진회원들이 마련해준 여비를 갚기 위해 중국 청도의 세탁소에서 1년여 간을 일한 것만 보아도 그 인격의 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1931년 의사는 중국 상해에 도 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 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소 원하던 조국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백범 선생과 의사는 의열투쟁의 구체적 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 문>의 보도에 접하게 된다. 얼마나 기다리던 기회였던가. 오로지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천리 먼 길을 달려온 의사였다. 의사와 백범 선생은 드디어 그 기회를 맞은 것이다.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의사는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 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 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의사는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 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상해 병공창(兵工廠)의 주임이었던 김홍일 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거사 장소는 눈이 시리도록 익혀두었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백범 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도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하였다.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 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 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 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의 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뺀 다음 앞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폭 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와 시게미쓰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 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쓰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해 하고,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 로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피체된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 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 았는데,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의사는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라고 말할 만큼 선각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 공식 승인을 지지
- 내선일체 조선어 신문의 표상

1932년 6월 17일자 사설(「일본의 만주국 승인과 국제정국」)

지난 14일 일본 의회 본회의는 만주국 즉시 승인안을 긴급 상정하여 만장일치로 가결하였 다고 전한다. 그리고 군부와 태도를 같이 하여 만주국 즉시 승인안을 고조(高調)하던 내전 (內田) 만철(滿鐵) 총재의 외상 취임이 거의 확정적이 되고 또 전국 여론의 대세가 즉시 승 인을 절규하는 현하의 대세로 보아 만주국 승인은 벌써 이론기를 지나 실현기에 들어갔다고 단언하여도 결코 속단이 아닐 것이다. (…)
일본이 1921년 9개국 회의에서 만몽(滿蒙)을 완전한 중국의 영토로 승인하는 동시에 문제 의 21개조에 의하여 획득한 권리의 일부와 소위 특수지위의 자발적 포기를 성명한 것은 주 지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 따라서 만주국 승인 후 만주국과의 조약 체결에 의한 일본 의 행동은 하등의 구속이나 압력의 침입을 불허하고 철두철미 독자적 능동적이 될 것은 명 백한 결론이다.
그리하여 만주에서 일본이 사실상 패권자로서 군림하게 된다면 이로 말미암아 직접 위협을 느낄 나라는 미국(米國)과 로서아이다. 그러나 로서아는 자국의 입국정신(立國精神) 즉 공산 주의 이론으로 보아 일본과의 정면 대결을 어디까지든지 회피하기 위하여 참을 데까지 참을 것이니 결국의 문제는 미국과의 문제다. 미국은 아메리카대륙의 맹주로서 만족하기에는 야 심이 너무나 용솟음치고 있는데다 방대한 경제기구가 스스로 아세아대륙에의 진출을 강요하 고 있다. 이것이 미국의 욕망이요, 또 고민이다. (…) 후진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의 유일한  기생지대(寄生地帶)인 중국시장을 미국의 농단에 맡기고 퇴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 는 일이다. 일·미의 대립은 필연적으로 심각하게 된다. 정면충돌의 위기는 불가피적으로 첨 예화하여 지는 것이다. (…)
일본과 국련(國聯)의 관계가 분규(紛糾)된다는 것도 결국은 미국과 일본과의 변형적 충돌이 므로 긍정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만 문제 되는 것은 미국과 마찬가 지로 황금의 홍수에서 허덕거리는 불란서만이 일본의 추파에 쏠려 만주로 진출하기 위하여 미국의 책동에 맹종하지 않는 것만이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만주국의 장래는 일본의 운명에 중대한 관계를 가진 것이요, 일본의 만주국 승인 후의 세계정국은 세계의 운 명을 움직이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만주국은 일본제국이 청 왕조 최후 황제인 부의에게 맡긴 괴뢰국가였다. 그래서 국련은 이를 독립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일본은 만주국이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게 해서 기득권을 지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런 일본이 미국과의 일전불사 각오로 만주국을 정식 승인하게 된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을 통해 일본의 ‘만주국 승인’을 불가피한 선택으로 판단하고 지지하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또 미국과의 충돌도 예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신문이 ‘민족지’ 또는 ‘민중지’라고 자칭하는 태도를 지지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게 불러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내선일체’의 한 언론임을 만천하에 공개한 글이다.

속간사(續刊辭)에는 또 거짓말이 나타난다

1932년 11월 23일자 사설(「속간사-본보의 사명을 재인식하자」)

조선일보가 오늘 소생한다. 돌아보건대 본보는 10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조선의 모든 특수적 정세 아래 특수적 사명을 다함으로 허다한 업적을 남겨 민간언론계 일방의 중진으로 자타가 공인하여 온 바다. 무슨 액운인지 지난봄부터 안팎으로 적지 아니한 파란이 중첩하여 마침내 여러 달의 휴간을 막지 못하였다. 이제 새로이 진용을 갖추어 부흥의 제일보 를 밟게 되니 일방으로 기쁨을 금할 수 없는 동시에 일방으로 그 책무의 중차대함을 느끼는 바 적지 아니하다. (…)
본보의 사명이란 무엇인가. 2천만 민중의 공기로서 조선인의 이익을 대언(代言)하고 옹호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본보의 주의주장으로 보아 그러하고 본보의 지면을 통하여 대 중 앞에 증명되어 온 바다. 오늘 본보가 속간됨에 따라 지면의 쇄신, 내용의 확충 등 독자 제현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는 나날이 새로운 계획과 방침을 수립하여 갈 것이지만 본보가  언론기관으로서 엄연히 지켜온 주의와 사명에 이르러서는 그 전통을 계승하여 끝까지 이를 관철할 것을 기약한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다시금 우리의 특수한 사명을 재인식하는 것이 쓸데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보의 특수한 사명이란 무엇인가. 본보는 정의의 주창 자요 정의의 옹호자가 되어 왔다. 민족적 정의를 주창하여 온 바며 경제적 정의를 주창하여 온 바며 사회적 정의를 주창하여 온 바다.(…)
세계는 바야흐로 다단한 국면을 당하여 경제적 공황은 나날이 심각화하고 정치적 시국은  나날이 격화된다. 이때를 당하여 본보의 전도도 더욱 다난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우리는 오 직 본보의 사명을 재인식하여 모든 고난과 장애를 무릅쓰고 용왕매진할 결심을 가졌을 뿐이 다. 죽어도 2천만 민중과 같이하고 살아도 2천만 민중과 같이 할 것을 맹약한다.

언론도 기업이다. 기업인 만큼 이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권력당국의 언론정책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언론이라는 특수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은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다. 창업할 때의 초심을 지켜내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지켜내면 역사의 존경을 받고 평가를 받는다. 조선일보는 친일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출연으로 창간되었지만 이들이 손을 떼자 신간회의 신석우가 인수하였다가 1930년부터 경영난에 봉착하게 된다.
조선일보는 그해 8월 1일부터 11월 21일까지 결간하게 된다. ‘반일적 기사’ 때문에 정간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경영난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결간 얼마 전부터 신간회 출신의 안재홍은 사장직에서 물러났고 임경래(林景來)가 사장직을 수행하여 오던 중 결간 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복간과 더불어 임경래가 발행인 자격으로 다시 등장하였다. 임경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 아니다.
아무튼 조선일보는 110여 일의 결간 끝에 복간하면서 ‘속간사’를 통해 ‘조선인의 이익’을 대언하고 민족적 정의, 경제적 정의 그리고 사회적 정의를 주창하고 옹호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이것은 조선일보의 전통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 당시 조선인의 이익은 무엇이었던가. 조선이 일제의 총칼 앞에서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해서 온갖 고통과 수탈을 당하고 있는데도 이를 방관하거나 침묵하거나 또는 일제정책에 순응하는 것이 조선인의 이익이었다는 말인가. 백보를 양보하여 ‘후진 조선’이 일제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고 필요하다면 독자에게 이를 설득하는 것이 참된 언론의 자세일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마음속으로는 혹시 일제에 항거했는지 몰라도 날마다 나타나는 지면에서는 독립운동을 00운동, 독립군을 병비(兵匪) 또는 마적이라는 등의 비속어로 써서 독자를 속이고 역사의 사초를 왜곡 기술하는 일을 다반사로 했다. 이것은 결코 조선인의 이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거짓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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