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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의 조선일보(1)조선일보 대해부 8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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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0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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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사변’을 보는 조선일보의 눈

1932년 2월 22일자 사설(「상해사건 날로 확대」)

상해의 일ㆍ중 충돌은 최근에 이르러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극도로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 12일 운(韻) 중국대표가 연맹이사회에 특별총회소집을 요구하였을 때까지도 연맹의 태도가 중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총회의 개최까지는 상당한 파란이 예상되는 가운데 일본의 국제적 입장이 오히려 안전한 듯하였으나 14일에 이르러 국제연맹 상해조사위원회의 제2차 보고서란 것이 아래 내용으로 발표되자 연맹의 공기는 큰 동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보고서 요지 : 일본군의 홍구 점령으로 그 일대는 공포상태이고 공연한 전쟁상태가 계속 중이다. 공격은 일본 측이 했다. 일본군의 목적은 오송(吳淞)포대를 점령하여 중국군을 상해에서 상당히 먼 거리까지 구축함에 있다. 홍구에서 일본 이외의 거류민은 거의 전부 피난했으며 일본 영사도 일본인의 흥분을 용인하는 상태이다(이하 생략).
위의 보고에 대하여 일본대표부로서는 충돌의 원인이 중국 측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보고 그대로를 긍정할 수 없다고 이사회에 유보 통보를 하였다. 그럼에도 이사회 태도는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가 중국 측 요구대로 이사회 소집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6일에 이르러 12개국 이사회는 회의에서 선언형태로 일본의 군사행동 중지를 결정하였는데 이는 일방적 경고 성격이다. 17일 이사회는 총회 소집에 관한 일본의 이의를 심의하기 위하여 영ㆍ불ㆍ이 삼국 대표로 법률전문위원을 선임하게 되었다. 이를 전후하여 멀리 상해의 일본 측은 지난 18일에 백정(白井) 부영사가 오철성 상해시장에게 중국군의 전투행위 중지와 조계선 밖 20킬로미터 지점까지 철퇴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는데 이로 인하여 양국의 군사관계와 연맹의 공기는 한층 긴장으로 치달았다. (…)
중국 측 또한 이 최후통첩을 거절함에 따라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 연맹은 3월 3일 총회를 개최키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군사적으로 정면 직접 충돌이 계속되는 반면, 국제외교 무대에서 일·중 양국은 구미열강의 공기를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이 문제를 중심으로 전 세계의 신경도 갈수록 날카로워질 뿐이다.

이미 ‘대일본제국’의 한 언론으로 자리 잡은 조선일보는 상해사변까지도 그 근본 원인을 외면한 채 일본제국의 논리에 순응하고 있다. 상해사변이 당시에는 복잡하게 보였을지 모르나 사실 그 진상은 간단한 것이었다. 일본이 상해를 점령하려는 것은 만주국 건설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적 시선을 잠시 상해로 돌리려는 잔꾀일 따름이었다. 상해사변에 관하여 <두산백과>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1932년과 1937년의 두 차례에 걸쳐 상하이에서 발생한 중국·일본 간의 무력충돌사건. 제1차 사변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대륙에 항일 운동이 확대되었으며, 특히 상하이의 정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1932년 1월 29일 조계(租界)를 경비하던 일본 해군육전대(海軍陸戰隊)와 중국 제19로군(路軍)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자, 일본은 2월 중순에 3개 사단의 육군을 파병하여, 3월 중순 중국군을 상하이 부근에서 퇴각시켰다.
그 동안 당사국과 상하이에 이해관계를 가진 영국·미국·프랑스·이탈리아 대표들이 정전 협의를 추진하였으나 조인 예정일인 4월 29일에, 한국의 윤봉길 의사의 폭탄사건이 일어나 일본의 파견군사령관이 사망함으로써, 협상은 난항을 거듭한 끝에, 5월 5일 정전협정이 성립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이 내외(內外)의 주의를 만주국 건국공작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일부러 도발한 책략이었다. 제2차 사변은 1937년 7월 화베이(華北)에서 중국·일본 간에 동란이 발발하자 전화(戰火)는 상하이로 확대하였다.
8월 13일 일본군 육전대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국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으며, 이에 일본 육군이 파견됨으로써 전화는 난징(南京)·우한(武漢) 등 중국 전토로 확대, 중일전쟁이라는 전면전의 계기가 되었다.


‘학생의 좌경사상은 형사정책상 유의할 필요 있다’

1932년 4월 14일자 사설(「‘학생의 사상문제」)

조선에 있어서 현하 일반 학생들은 점차 사상적으로 좌경화해가는 경향이 농후하다. 올봄 이후만 하더라도 시내 동대문경찰서 사건에 관련된 시내 78 남녀학교 생도들의 독서회사건을 비롯하여 지방으로 대구사범, 평양 광성고보 생도들의 모종 운동은 현하 조선학생들이 일반적으로 좌경화의 경향을 가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학생들이 사상적으로 이와 같이 좌경화하기까지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이후부터의 일이지만 3년 전 광주학생사건 발발 이후 일반 학생들의 좌경적 경향은 농후해졌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것은 물론 외적으로 세계를 무대로 부딪치는 좌익사상의 물결이 조선의 ‘안벽(岸壁)’을 쓸어 넘어온 것에 기인된 것과 내적으로 현하 조선에 있어서 모든 정세가 그것에 대한 흥미를 많이 갖게 하는 내적 조건도 다분히 포함된 까닭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렇게 매년 학생들의 좌익사상이 농후하여 가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또 학생의 질적 평가는 어떠한가?
학생의 사상적 좌경화는 세계적 사실일 뿐 아니라 가까이 일본에서만 보더라도 세칭 경도 학생사건이라고 하는 대정 14년 10월 17일 창립된 경도제국 대학 사회과학연구회의 ‘프로컬’운동이라든지 동경제대의 ‘신인회’ 사건이라든지 기타 학생의 좌경사상운동은 일본 안에서도 상당히 맹렬하여 문부성에서는 사상을 선도한다는 의미에서 최근에는 초(超)마르크시즘이라 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오류를 지적하여 마르크시즘의 우경화문제까지 일으킨 모양이지만 ‘구주를 배회하던 도깨비’가 이 같이 세계적으로 배회하는 오늘날 이 사상의 근절이란 가장 어려운 일이요, 나아가 문제는 사상의 행동화에 대한 대책문제일 것이라 본다. 사상이란 한 개의 관념형태로서 그 사상 자체에는 선과 악이 없을 것이다. 갈릴리 해변으로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자기의 교를 유세한 예수, 수명의 제자를 데리고 중국의 전토를 추답(追踏)하며 유세한 공자, 간지스 호반 보리수 아래서 법열(法悅)을 부르짖던 석가모니, 진리를 위해서는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는 소크라테스, 자본론을 써 계급사회를 분석하며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던 마르크스 등등, 모든 종교가, 철인, 사상가들의 사상은 사상으로서는 각기 독특한 진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여 행동화할 때 비로소 그것의 선악은 분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세계를 풍미하는 마르크스사상의 사상으로서의 선악 판단은 각자의 견해 여하에 있는 것이다.
사상의 연구는 자유요 그 사상의 행동화는 그 국가법률이 제정한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누구나 인식하는 바이지만(원문에는 여기서부터 10여 행이 삭제됨) 어떤 사상이든 그것을 연구함에 일정한 자유를 갖게 하여 그 사상에 대한 자기의 상응한 비판이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좌익적 서적의 열람 등을 경찰이 주목하고 또 만일의 경우에는 검거까지 한다면 벌써 독자는 그에 대한 비판을 갖지 못하고 선입견적으로 좌익서적에 있는 모든 것은 진리요 신조로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신성시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학생사상문제 대한 형사정책은 좀 더 당국이 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사설은 반공을 사시(社是)처럼 절대시하는 요즘의 조선일보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물론 필자가 이 사설을 흔쾌히 썼다고는 보지 않는다. 당시 조선사회는 치안유지법(지금의 국가보안법 전신)에 따라 의식 있는 많은 청년 학생들이 감옥으로 가야 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도 붙잡히면 다른 법이 없으니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조선일보가 비록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한 상황이지만 치유법 위반자가 속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슴 아픈 현실을 외면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치유법 위반 사례나 그들의 재판 상황을 자주 보도했던 것 같다. 이때의 조선일보 선배 언론인들의 정신을 지금의 후배들이 조금이라도 본받았으면 좋겠다.


‘학생들의 사상 개선 문제는 사회의 개선으로 풀어야 한다’

1932년 5월 5일자 사설(「사상 개선과 사회의 개선-학생사상조사위원회 구체안에 대하여」)

문부성에서는 학생사상의 좌경화에 대한 그 원인과 대책을 근본적으로 강구하기 위하여 교육가, 관허(官許)사상가 기타 관계당국의 전문가를 망라하여 학생사상조사회 특별위원회를 임명하고 자금 조사연구 중에 있다. 아직 구체안은 확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알려진 대체항목(大體項目)을 보면, 학생의 좌경화 원인은 1)사회의 상세(狀勢) 2)사상계 학계의 경향 3)교육의 결함 4)마르크시즘의 성질 5)좌경운동 6)청년의 심리 7)경우 및 소질 등을 열거    하였고, 그 대책으로는 1)사회 상세의 개선 2)사상계 학계의 교정(矯正) 3)교육의 개선 4)좌경운동의 방지 등을 열거하였다. (…) 결국 학생사상의 좌경화에 대한 원인 및 대책이란 사회 상세의 개선이 사상 개선의 전제라는 명제에 요약된다는 것을 문부성 학생사상조사회 특별위원회는 제시하였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당국은 학생 취체(取締)를 주밀(周密)하게 하라는 것이다.
(…) 사상이란 어떠한 것임을 물론하고 그것이 한 개의 행동체계의 고리인 것이다. 사상 그 자체는 한 개의 물질도 또는 구체적 물상(物象)이 아닌 한에서 어떠한 규제로 묶고 또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사상하는 사람 자신의 인간적 활동의 자유를 한정함으로써 그것을 방지하는 방법이 적극적인 듯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무형(無形)한 사상 그 자체의 무한한 확대성이라는 공간적 성질로 인하여 소극적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종국적으로 일정한 사상이란 결국 그 사상의 물질적 기초 즉 그 사상이 발산하는 근거인 사회 상세라는 조건의 변경이 사상 변경의 객관적 조건이 되는 것이요, 그 외에는 그보다 고급(高級)한 사상의 발견이 그 주관적 조건이 되는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
요컨대 현재의 학생사상문제라는 것은 ‘학(學)으로서의 마르크시즘’ ‘행동으로서의 마르크시즘’에 있어서 후자가 국가의 치안을 방해한다는 데서 자연 ‘학으로서의 마르크시즘’까지를 문제 삼게 된 것인데, 그것은 학과 행동의 전체적 통일성에서 볼 때 오늘날 ‘연구의 자유’란 전연 구속당할 성질도 못된 것은 사실이다.

이 사설은 일제가 학생사상을 너무 포괄적이고 무차별적으로 ‘취체’하는 것을 자제하라고 충고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회의 상세를 개선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시대의 사회 상세의 가장 큰 문제는 곧 조선의 일제식민체제 편입이었다.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는 무장독립투쟁이 펼쳐지고 있는데 조선 안에서는 말 한 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 상세(상황)에서 학생들이 마르크시즘에 몰입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설은 ‘사회 상세의 변경’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썼을 뿐 구체적 언급이 없는데 이는 조선일보의 한계였을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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