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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파 참여기의 조선일보(2)조선일보 대해부 7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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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0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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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일운동 무용론’ 주장

1931년 8월 18일자 조선일보 사설의 제목은 「중국의 반일운동」이다.

중국의 배일운동은 그 유래가 오래다. 가깝게는 1927년 남경사건과 1928년 제남사변은 배일운동을 충동한 대사건으로 되었거니와 그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대소의 이러한 사건은 손을 꼽기가 어려울 것이다. 만주의 조선인이 요즘 배일운동의 여파를 받아 조직적인 대압박을 받고 있다. 재만조선인으로 말미암은 조선의 불상사란 것이 또 전 중국에서의 배일운동-반일회(反日會)의 활동으로 된 것이다. (…) 중국의 배일은 만성적 영구적 경향이다. 그 장래 필경 어찌 될까? 일·중 친선의 소리가 가끔 높아진다. (…) 그러나 이것은 일본의 도국적 지위(島國的 地位)가 방금 대륙 진출을 단념할 수 없는 것과 만몽(滿蒙) 기득권익은 중국의 국민적 시의(猜疑) 및 그 적개(敵愷)를 풀 수 없는 것이요, 따라서 이해관계가 드디어 서로 합치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일본의 위정자와 특히 그 군부의 수뇌자들이 만주기득 권익의 옹호 때문에 변치 않을 결심을 가질 것을 주장하는 것은 중국의 반일운동과 마찬가지로 양편의 형세가 서로 마찬가지인 것이 명백하다. (…) 세상에는 섬나라 영국이 도버해협을 건너다 구주대륙에서 실패한 예를 드는 자 있으나 이는 오히려 낡은 감이 있거니와 일(日)측은 만선(滿鮮)의 대지 위에 걸어앉았던 조선과 중국인의 경쟁이 수십 세기 동안 격렬히 계속하였고 근대에 와서는 일·중 양국민의 충돌이 또 영원하려 함은 주목되는 역사적 사태이다. 사회의 근본적 개조라는 것이 있기 전에 서로 이어진 이런 관계가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사설이 주장하는 논지는 한 마디로 말하면 ‘중국의 배일운동은 헛수고다. 이권 때문에 서로 양보 못 한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도 배일을 해봐야 승산이 없으니 일본을 등에 업고 ‘사회의 근본적 개조’를 하루 빨리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신간회 활동 당시에는 민족적 죄파 성향을 띠던 일부 인사들이 조선일보에 참여하면서 신간회 해산 이후 서서히 친일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된다. 더구나 조선일보는 이 해 7월 16일부터 8월 5일까지 경영난에 의한 자진 정간인지, 당국에 의한 강제 정간인지 신문 발행을 못 하다가 8월 6일 복간한다. 이후 여러 기사에서 논조의 변화가 감지된다.

지식인은 정치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설득

다음은 9월 2일자 사설(「조선 지식인의 위기, 현하 정세와 그들」)이다.

(…) 조선의 지식군으로서 가장 안 된 점은 시국에 대하여 비관하는 바이다. 더욱이 봉건적인 종래의 유리한 전통적인 지위에 있는 자는 그 비관이 소마(銷磨)되는 투지와 한 가지로 무절조(無節操)한 방사적(放肆的) 과오로 흘러가게 된다. 그들은 밖으로 향하여 민족적 대립관계의 편에 희생적 진취-항쟁 약진할 정열과 투지가 거세되는 대신 차라리 영웅적 파벌주의의 한 변태(變態)인 정권 쟁탈에 그 정신을 집중하게 되며 그 때문에 대중에게 미치는 회의 불신 실망 따위의 눈살 찡그릴 실태(失態)를 부림도 가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당쟁(黨爭)의 지속에서 유전하여 받은 혈관 속의 교묘한 지견(智見)에 기대어 데마고그적인 자기변호의 책동에조차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현하 조선의 과정 그의 시운에 물어보아 실로 여간 아닌 탄식할 일이다. 조선의 지식군은 아직 본질적 특색인 고결 현명 및 (…) 우리는 조선의 이 같은 지식군이 정말 벌써 전 국면을 장악하여 전 민중을 영도할 만큼 완성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 그런데 지금까지의 계급운동 그것이 아직까지 대부분의 청년인텔리에 의하여 지도 장악되어 왔었다. 대중이 가뜩이나 상조(尙早)한 인텔리의 불신-차라리 그의 조급한 처사를 외면하려는 요즘 그 자기 자신을 무의미한 회피 이탈만을 의미하는 파벌적 정권 쟁탈의 난리에만 집중하는 것은 극히 불가한 일이다. 인텔리는 자기 청산(淸算)할 시기에 부딪혔다.

복간 이후 조선일보가 보인 논조가 이랬다. 잔뜩 주눅 든 글이다. 민중을 영도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으니 은인자중하라는 뜻일 것이다.

‘개탄만이 능사가 아니다’

다음은 9월 22일 자 사설(「조선인과 단결난[團結難]」)이다.

우리는 지난번에도 본란에서 조선인의 사상통제(思想統制) 문제를 논한 바 있었다. 평시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비상시에 닥친다면 더욱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을 사이에 놓은 극동의 정국은 바야흐로 그 변동발전의 도정을 걸어가고 있다. 평시에 있어서도 그 정치적 사회적 생장 발전의 기축이 되어야 하고 비상시에 있어서는 민중적 또 민족적 의사의 통제(統制) 및 그 행동의 절제를 파악 또 구현하는 기능을 가져야 하는 것이니 그 문화와 생활의 전통을 달리하는 집단으로서 이만큼의 통제적인 단결기관이 있어야 할 것은 그 자체에서 필요하고 또 그 인민과 유기적으로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일국가(一國家)의 견지로서도 매우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인의 견지에 의한 아전인수의 이론은 아니요, 사리의 필연 또 당연한 문제이다.
조선인은 그 객관적 정세에서 종결(終結)이 매우 불리하니 그 첫째는 전 조선인의 민중적 또 민족적 구체적인 이상(理想)이 만중(萬衆)을 귀일(歸一)케 할 만한 굳센 힘으로 성립되기 어려운 까닭이다. 조선인은 그 세련된 의식과 채택된 정견(政見)으로 기획적인 당적 결속(黨的結束)을 대중 사이에 수립하기에는 아직 이르고 귀의적(歸依的) 숭앙적(崇仰的)인 영웅중심적인 단결을 이루기에는 조금 늦었다. 조선인은 새로운 당적 결성을 만드는 과학적인 현명(賢明)을 가져올 준비가 없이 먼저 우상부터 깨려고 한다. 이러한 것이 이미 과정적 필연의 슬퍼할 현실이겠는데 그 주의(主義)와 정강(政綱)의 수립에서조차 각인각색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무참한 국제적 정세의 파문(波紋)의 일편으로밖에 아니 되고 대다수 민중으로 이에 추향(趨向) 집중하기에는 매우 미약한 감이 있다. 아니 작은 분석과 복잡한 이론은 모처럼 생장하는 어설픈 결성체도 문득 선백(鮮白)한 해소(解消)의 길로 몰리고 만다. (…)
우리는 단결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이것이 무참한 현실의 사회에서는 오직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의 소리 만큼밖에 그 실천적 진도에서는 아주 막연함을 깨닫는다. 건양(建陽) 광무(光武)시절 ‘독립협회’란 것이 34년의 왕성한 운동을 했으나 안으로 관계(官界)의 요인이 실권을 행사함이 있었고, 밖으로는 오히려 인도정의를 표방하는 국가와의 국제적 관계가 있었다. ‘자강협회’와 ‘대한협회’라는 것도 있었으나 그도 또한 정권의 장악이 가능한 인물이 있을 경우에만 사람이 따르는 것이다. 적나라한 평지에서 그 민족적 결합을 꾀한 일이 최근에 있었으니 신간회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간회는 결국 발육 다난한 중에 해소되었다. 그 이유는 민족적 결합으로 일정한 주의정강(主義政綱)을 세워 생장의 길로 나가기가 워낙 어려운 정세인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니 전 민족적 결성체도 없이 또는 그를 통하여 수립 구현하는 민족적 총의(總意)를 가짐이 없이 일정한 역(力)적 생장과 시국의 00통과를 바랄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일이요, 무절제한 비통제적인 각개 자발적인 행동이 많은 실책 과오와 함께 민족의 운명을 갈수록 불리하게 하고 또 무가치한 희생으로 인도하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개탄(慨嘆)이 또한 무슨 성과를 가져올 것이냐?

이 사설은 조선일보가 얼마나 빨리 친일화해 가는 지를 보여준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단결할 줄 모르는 조선인’이 독립을 해서는 무엇 하겠느냐고 꾸짖는 투의 주장이다. 멀리 독립협회까지 언급하고 시대를 내려와서는 작금의 조직체였던 신간회의 역할마저 과소평가하고 있다. 물론 이 시기는 신간회가 해소된 다음이다. 참고로 독립협회의 활동과 해산 경위를 알아본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서재필의 주도 아래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정교 등이 참여하여 열강에 의한 국권침탈이 자행되는 가운데 자주국권운동, 자유민권운동, 자강개혁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독립신문, 독립협회회보를 발간하고, 토론회, 강연회 등을 개최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그들의 지지를 받아가며 독립협회를 민중단체로 발전시켰다. 초기에는 독립문, 독립공원, 독립관 등을 건립하여 자주독립의 의지를 표명하였으며 1897년을 전후해서 토론회, 강연회 등을 수시로 열어 국민, 민권, 애국 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민중계몽에 주력하였다.
1898년 2월 21일의 구국선언을 기점으로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를 통해 민중의 정치활동을 행동화하며 외세의 이권침탈과 내정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 고 민권의 신장을 위해 의회 설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독립협회는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권수호와 민권보장 및 정치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고종의 재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은 황국 협회를 비롯한 보수파들의 반발을 받게 되었으며 그 결과 황국협회 회원들과 무력충돌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보수파들의 모함으로 고종에 의해 해산명령을 받고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독립협회의 사상은 대한자강협회, 대한협회 등으로 이어져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다음백과> ‘독립협회’ 항목에서).

일제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게재

1931년 11월 2일자 조선일보 석간 1면에는 통상의 사설 위치에 「‘연맹결의와 일·중 관계」라는 세계주사(世界週史)가 실렸 다. 이 기사는 일제 당국이 배포한 자료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1) 지난 24일의 연맹이사회(국제연맹)에서 일본에 대한 기한부 철병결의안이 13대 1의 다수로 통과된 것은 비록 전수가결이 못되어 법적 효과는 발생치 못한다 하더라도 일본의 국제적 입장을 퍽 괴롭게 만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정부는 긴급책을 강구하고자 25일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임시각의를 열고 아래 줄거리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시, 어디까지든지 기존방침대로 매진할 것을 결정하였다.
(성명의 줄거리: 만주사변은 재만일본 거류민의 생명 재산 및 조약상의 기득권리를 중국이 부당하게 침해한 데 기인하며 일본의 군사행동은 자위수단에 그친 것이요, 사변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측에 있다).
2) 일본군의 기한부 철퇴에 관한 연맹의 결의안은 만장일치가 못되어 성립되지 못한 바 기한부철병이란 사실 불가능으로 다수 이사국이 일본의 희망을 무시하고 이런 결의안을 지지한 것은 유감이다. 그러나 연맹의 충실한 지지자인 일본은 9월 30일에 결의한 평화적 해결을 충심으로 희망한다.
3) 일본의 철도부속지 외 주병(駐兵)은 결코 보장점령이 아니요, 중국패잔병에 대한 자위수단일 뿐 일본에 전혀 다른 뜻은 없다.
4) 일본군이 철퇴하기 전에 중국 내 일본 거류민의 생명 재산 및 기득권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아래의 기본원칙을 확인하여 주기를 요구함.
(가)적대행위의 포기 (나)배일화(排日貨), 배일교육의 절대 폐지 (다)영토보전을 존중 (라)만주에 있어 일본인의 거주 여행 영업 토지이용에 관한 권리 확인 (마)21개조를 포함한 기존 조약의 존중
5) 일본은 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주로 남경정부와 직접 개시키를 희망함
여기에 육군당국으로서는 24일의 연맹결의를 일청전쟁 후 요동반도에 대한 3국 간섭이나 마찬가지라고 극히 강경론을 주장하는 동시 관동군사령부에서는 “화평이 보장될 때까지는 단연 철병할 수 없다”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이상의 일본의 처지에 비하여 중국 측은 연맹의 결의로 퍽이나 유리하게 된 것이 사실인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국민정부 외교특별위원회는 25일의 회의 결과로 “이 참에 이사회 결의를 한층 유효케 하는 동시 일본에 압박을 가할 수단으로 대일경제봉쇄를 요구하는 제안”을 하도록 시0기 대표에게 명하였다는 설까지 전하게 되었으며 안으로는 이번 이사회를 치루는 통에 국민정부와 영, 미, 불 등과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게 되고 그 중에도 영국의 원조가 새삼스럽게 늘어나게 되니 장개석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국민정부가 뜻밖의 뱃심을 얻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 영향으로 장개석의 하야 중지로 되었으며 다시 굴러 중앙 측의 강경으로 광동파의 타협문제가 흐지부지 없어지고 또다시 굴러 장학량의 하야설까지도 자취를 감추었다.

부언하자면 이 자료는 일제당국이 작성한 뒤 조선어 신문사들로 보내 게재를 요구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가 비록 재정적으로 취약했다 하더라도 이런 기사를 자발적으로 실었다고 믿기는 어렵다. 다만 저항했다는 기록이나 근거는 전혀 없다. 이 기사는 신간회 측 인사들의 ‘낙관주의’가 하릴없이 무너져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 군부의 장단에 춤추는 조선일보

11월 23일자 사설(「헐떡이는 국제연맹」)은 국제연맹을 비웃고 있다.

일본군 토벌을 연호하고 장학량 장개석 및 기타 중앙정치부의 옹호 하에 만인 환시의 초점에서 뛰던 흑룡강성의 마점산군은 17일 저녁부터 일본군 총공격을 개시, 18일 미명부터 대흥둔 소흥둔 삼간벽 일대에서 보병 1만5천과 야포 박격포 고사포 등 30여 문을 가지고 3천 5백의 일본군을 향하여 우세한 입장에서 포위작전을 행하였으나 18일 오전 9시부터 일본의 정예군은 삼간벽대를 향한 중앙돌파로써 중국군이 서로 연락치 못하게 하는 등 작전을 쓰며 그대로 돌파를 진행하여 앞의 진지를 모두 점령하고 드디어 제제합이시까지 돌진하여 동일 8시께는 전 시가지를 장악하게 되었다. 마점산은 극산 방면으로 퇴각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교전 6시간 만에 마점산군이 대패한 것은 양군의 전투력이 자못 차이가 있었던 때문인데 이 같은 상황에서 파리의 국련이사회는 20일 오후 일·중 양국 휴전을 원칙적으로 승인한다는 논의를 했다. 그러나 일본 측이 절대 반대하자 일본 측 제안인 중국 측 조사위원 파견안을 붙들고 21일 이사회에서 한바탕 토론을 벌여 어떻게든 체면 유지의 핑계를 장만하기에 발버둥을 치고 있다.
연맹은 그 창립 10수년래의 허울 좋은 도금(鍍金) 장식이 잘못하면 무자비하게 다 벗겨지려는 순간이다. 연맹은 헐떡이고 있다.

이 글은 일본의 중국 침략을 비난하는 국제연맹의 처사를 비웃으며 일본의 승승장구를 축하하는 요지의 내용이다. 조선일보는 이미 일본제국체제에 편입되어 일본군부의 나팔수 노릇을 즐겁게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 없는 조선어신문 조선일보의 송년사

1931년 12월 30일 자 사설(「1931년을 보내면서」)

국제정국에 있어서도 다사한 현상을 보았다. 1929~1930년에 걸쳐 반영(反英)불복종운동으로 크게 항전했던 인도의 국민회의파는 1월 25일 간디 씨 이하 각 지도자와 기타 수만의 입옥자(入獄者)의 석방을 보아 약소민족운동사상 희유(稀有)한 상황을 나타냈다. 3월에는 어윈 인도 총독과 간디와의 사이에 소위 ‘어윈·간디 타협’이 성립되어 국민회의파는 절대적 완전독립의 목표를 일단 포기하고 제2원탁회의로써 영·인 절충할 것을 규정하였으나 9월 14일 이후의 동 원탁회의가 완전히 실패함에 따라 인도인으로서는 아무 소득도 없었다. 인도인은 요즘은 (11월 28일) 민족을 구한다는 목적으로 전시를 준비할 것을 부르짖고 있다. 영·인 관계는 그 본질에서 그렇게 점잖게 해결되기 어려운 터이고 쇠퇴의 비탈에서 헤매는 영제국 자신도 그 정치적 경제적 위기와 함께 손쉽게 인도인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세계의 불안은 의연(依然)하였고 금년에 더욱 농후하였다. 그의 구급(救急)의 제1책은 3월 하순 독·오관세협정으로써 발로(發露)된 바 있었으나 불란서를 주로 하는 대립 측의 반대 저해(沮害)로써 필경 불성립에 그쳤고 7월 10일께는 독일이 위기를 맞아 국립은행의 지불정지를 필두로 일대 파탄을 일으킬 뻔하였다. 6월 하순 이래 미국의 후버 대통령의 지도에 의한 스팀슨 국무장관의 구주 방문과 미·불협정에 의한 전채지불유예(戰債支拂猶豫)로써 일시 미봉하였던 국면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고 역시 미·불 양국의 원조로써 당면은 수습하였으나 8월에는 공산시위를 보게까지 되며 그로 인하여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중심으로 독재정권 구성을 보게 되었으며 더욱 좌익의 탄압보다는 히틀러 일파의 우익 견제에 한층 고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에 깊은 연쇄관계를 가진 영제국은 그의 실업구제에서 미끄러지기 시작하여 8월 하순에는 중대한 적자위기에서 보수 자유 양당 수령을 끌어넣은 협력내각을 만들기에 이르렀으나 그 공효(功效)가 없었고 9월 하순에 이르러서는 대서양함대 맹파(盟罷) 소동의 뒤를 이어 금본위제 정지와 미·불 양국의 신용 설정으로 간신히 그 국면 타개를 보았으나 이로 인하여 필경 국회 해산과 총선거를 치러 보수당이 470여 석으로 압도적 승리를 얻게 되었다. 이제 영제국은 여전히 헐떡이고 있어 일·중 충돌을 기회로 극동에서 무엇이고 수확을 거두려 한다. 2월 이후 정정이 지극히 불안한 스페인은 4월 중순으로 알판조 황제의 퇴위와 공화정치의 성립을 보게 되어 1931년의 한 사건이 되었는데 이는 동요하는 세계사의 한낱 방계(傍系)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의 화평통일운동도 잘하면 다소의 서광(曙光)도 바라볼 듯하였었는데 치외법권 철폐를 비롯한 국권회수운동에 전력할 듯 보이던 국면이 3월 1일 장개석 씨의 호한민 감금으로 드디어 5월 상순 광동파의 정권 분립(分立)을 자아냈고 얼마쯤 기대되던 5월의 국민회의에도 큰 수확이 없이 드디어 거대한 외환(外患)을 당하게 되어 중국으로서는 일·중조약을 맺던 1815년 이래의 최대 난관에 부딪혔다. 그것은 7월 상순 만보산사건을 단서로 필경 폭발된 조선의 평양사건으로 인한 중국의 반일운동의 도정(途程)에서 싹튼 9월 18일의 만주사변이란 것을 발단으로 드디어 거대한 일·중 충돌의 서막을 만들었고 이것이 다시 극동을 중심으로 국제연맹의 지지자인 영·불 양국과 부전조약(不戰條約)의 발명자인 미국을 아울러 국제 풍운(風雲)이 급한 눈 녹듯 천하의 시선(視線)을 집중시켰다. 일본에 있어 4월 중순 민간내각을 재조직하게 되었는데 이는 만주사변이 발단이었다. 그러나 국가적 중대 방침에는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또 12월 상순의 견양내각 출현은 금수(金輸) 재금지의 단행과 함께 재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대외은(對外銀)에서는 아직 다대한 변화가 없었다. 1931년이 중대한 단서를 연 것만은 확실하다.

송년사 전문을 인용한 것은 1년에 딱 한 번만 쓰는 송년사인 만큼 조선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보고자 함이었다. 이 신문은 ‘조선’에서의 ‘조선 문제’를 털끝만큼도 다루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만주 중국 등지의 독립운동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조선일보가 이미 일제의 홍보수단으로 전락했음을 입증하는 구체적 사례라 할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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