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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파 참여기의 조선일보(1)조선일보 대해부 7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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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0.2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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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은 비판하고 큰 것은 눈 감는 논조

1931년 1월 4일자 조선일보에는 「치유법(治維法) 개정 이래 위반자 1천2백 / 개정 정신과 배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치안유지법은 국체의 변혁을 목적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대 정(大正) 14년 4월 20일에 제정하고 다시 중형으로써 위하(危嚇)하기 위하여 소화 3년 6월 29일에 긴급칙령으로 개정하여 실시한 것인데 이후 동법의 성적을 보면 개정 후의 동법 위반자 수는 개정 전의 위반자 수의 몇 배를 초과하므로 개정하던 당시의 취지에 배치되는 형국이다. (…) 조선의 동법 위반자 수는 일본 전국의 그것보다 몇 배를 초과하는 현상인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의 만주조선인 박해」(1931년 1월 13일자 2면 기사)

모처정보=지난 12월 29일 밤 8시경 간도 천보산 부근 숭례향 토문서 신정평 일대에 무장한 공산당원 수십 명이 나타나 조선동포 농민 10여 명을 학살하고 방화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사실에 대하여 모처에서 그 후 엄중히 조사한 결과, 이것은 공산당의 행동이 아니라 동지(同地)에 이주한 30여 명의 중국인 공산당을 견제할 목적으로 결성된 소위 ‘지역방위단’ 이름의 중국인 35명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그 부근에 산재한 조선인 지주 70여 호를 내쫓기 위하여 이처럼 잔인한 범행을 저지르고는 공산당원의 소행이라고 속였던 것이다. 이들은 조선인 35명이 소유한 70여 정보의 땅을 빼앗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신간회 측이 편집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만주와 몽골 일대에서 일어나는 조선인에 대한 학대 또는 범죄라면 무조건 중국인의 소행으로 보고 있었다. 당시 만몽지역에 이주한 조선인에 대하여 모든 중국인이 우호적일 수는 없었겠지만 조선일보의 편집진은 자세한 사실을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먼저 중국인의 소행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만주 침략의 명분을 쌓고 있는 일본에게는 우호적인 보도였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경계 보도(1931년 1월 30일자 2면)

[신의주] 만주 주변에 있는 조선공산당 운동은 작년 7월 이후 독립한 단체들을 해산하고 중국공산당에 합류 공작(共作)함으로써 만주 일대의 적화운동이 더욱 치열해져 감은 작년 간도사변을 비롯, 그 후 각처의 중국, 00의 관공서 00 목적의 직접운동이 이를 증명하는 바인데 동시에 그 운동은 민중 속에 깊이 꽈리 박히는 힘도 점점 심각해가는 모양이다. 반면에 중국의 공산당 박멸정책도 또한 가혹하여 공산당이란 이름 아래 무고한 조선이주민을 체포 총살하는 참혹한 일이 이곳저곳에서 뒤를 이어 일어나는데 최근 만주에 있는 조선공산당 운동을 보면 종래의 공산계통의 큰 세력을 쥐고 있던 주중청년총동맹(住中靑年總同盟)이 작년 7월 중에 중국공산당과 합작을 선언하고 해체한 후 사실상 작년 11월 중순부터 완전한 합작이 성립되어 만주를 적화하고자 잠행운동을 계속하는 등 조선공산당원들은 동만(東滿) 24군(軍), 북만(北滿) 23군을 이미 조직하고 다시 남만에 20여 군을 장차 조직, 큰 세력을 만드는 한편, 해통현에 근거를 두고 각처에 운동의 날개를 편 후 압록강 안에까지 손을 벌리어 될 수 있는 대로 동지를 규합하고 조선 내의 사정과 정계상황을 조사하여 기회를 보아 침입하고자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동, 남과 북의 각군에서는 대탐(大探), 소탐(小探)의 탐정기관을 설치하여 각처의 사정을 세밀히 조사, 탐정하는 동시에 조선이주민을 주로 한 농민협회를 조직하여 국민부(國民府)를 박멸조치하고 또 농민 속에 주의를 선전하고자 노력 중이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각처에 세포단체를 벌여놓고 운동을 리드하는 사람으로는 장재욱, 리기붕, 최창걸, 리범우, 마천복 등으로 만주 일대에 근거를 두고 운동을 중국공산당과 밀접한 연락 또는 그 지령에 의하여 더 ○○○하게 하는 중이라 한다.

이 기사는 신간회 출신 신석우가 발행인으로 있었던 조선일보 기사라고 믿기 어렵다. 오히려 친일언론인으로 악명 높았던 편집인 유광열 정도가 일제의 시각에서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좌파도 신간회에 참여했지만 좌우를 떠나 모두 조선독립을 바랐고, 마침내는 노선다툼으로 신간회가 해체된 뒤 중국으로 들어가 공산주의운동을 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이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조국 땅으로 들어오는 것이 어찌 ‘침략’인가. 당시 일제의 조선 강탈에 격분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민족해방을 위한 용기와 지혜를 찾기 위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 중에는 나중에 중국공산당에 합류하거나 조선공산당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참으로 많았다.
더구나 이 기사는 조선독립보다는 공산주의 퇴치를 더 바라는 조선일보의 반공노선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마치 오늘의 조선일보를 보는 듯하다.

공산당의 ‘폭동회수’를 크게 부각

1931년 3월 17일자 2면 기사

총독부 경무부에서 간도 일본 총영사관에 의뢰하여 조사한 바에 의지하면 작년 1년간 간도 용정을 중심으로 연길 등 각처에서 일본관헌에게만 발견된 공산당원의 폭동 습격 등 건 수는 2천여 건에 달하여 이를 월 평균으로 보면 한 달에 약 170여 건에 달하고 그들 공산당원들의 동원 총수는 실로 2만여 인의 다수에 달하며 그리고 살인 상해 등 건수만 백여 건에 달하고 그들이 가진 바 금품압수도 막대한 수자에 달한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이 무렵 만주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고 있던 공산당의 독립운동을 ‘반일폭동행위’로 취급한 것이다. 만주에는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기에 독립운동가들은 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그들의 독립운동 가운데는 친일파에 대한 응징도 포함되었다. 이 기사에서는 독립운동이 산적들의 약탈행위 정도로 격하되고 있다.

  「독립군의 괴롭힘으로 만주에서 고국으로 귀환」(1931년 2월 6일자 7면[이 날자 신문은 7·8면만 보관 중] 기사)

  (신의주) 조선정국이 변동된 후로 닥쳐오는 경제의 압박과 생활전선의 무서운 고통은 조선보다 좀 나은 곳을 찾아서 만주로 만주로 가게 하여 한참동안 그 수가 증가되더니 요즘에는 만주에 있는 중국관헌의 압박과 중국지주들의 가혹한 간섭으로 하는 수 없이 도로 먹을 것 없는 조선에 돌아오는 경향이 늘어가는 형편이다. 평안북도 관내의 작년 1년 동안 이주자와 귀환자의 통계의 수를 보면 이주자: 호수 328, 인구 931명(남 541, 여 390), 귀환자: 호수 836, 인구 3,320명(남 1859, 여 1461)이다. 이주자보다 귀환자가 3배 반이나 된다. 이처럼 최근에 돌아오는 자의 수가 갑자기 늘어난 것은 대부분이 중국관헌의 몹쓸 압박 때문이요, 또 독립군이 괴롭게 하는 것도 한 원인이라 한다.

이 기사는 통계를 근거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귀환의 근거로 중국관헌의 압박, 중국지주의 간섭 그리고 독립군의 괴롭힘을 들고 있는데, 독립군 관련 대목은 액면대로 믿기가 어렵다. 독립군도 조선 사람이고 이주자도 조선 사람일진대 독립군이 이주자를 괴롭힌다는 표현은 과장이거나 왜곡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선공산당과 중국군 충돌 / ‘간도 조선인 공산당 중국군대와 대접전’」(1931년 3월 9일자 2면 기사)

‘간도발로 된 이 기사는 “간도 각지에서 각종 폭동을 계속하던 조선인 공산당원들은 최근 돈화, 왕 단장, 궁정렴, 남대관 등의 맹렬한 추격으로 인하여 라자구 방면으로 총집중되었는데 (…) 공산당은 교묘히 도주하여 도리어 세력을 집중한 후 포위전을 계속하는 등 (…) 지난 21~2일경 라자구 속칭 한인촌(韓人村)에서 영안군, 연길생 경찰대와 연합군과 교전한 결과 공산당 3명이 피살되고 군경측은 거의 20명이 살해되었다는 바 (…)”라고 되어 있다.

이 기사에 바로 이어 조선일보는 1931년 3월 11일자 「재만(在滿)조선인의 문제」’라는 사설에서 조선공산당원 문제를 다루었다.

간도의 조선인들은 (…) 겹겹의 수난 속에 다시 중국관헌의 조선인 억압, 추방이 있다는 것은 더욱 주목할 일이다. 재만동포의 문제는 원체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중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제까지 조선인이 만주에서 들볶이고 또 추방되는 일대 원인은 조선인이 현실에 있어서 어떠한 강대한 국가적 세력의 연장 또는 그 전위(前衛)로서 간주되는 것이어서 그것이 출발로서 일정한 수난의 이유가 되는 것인데 공산당원의 행동으로 인하여 한층 더 증오 시기와 억압 추방의 이유 또는 구실로 된 것이니 전(全) 만주 백여 만에 달하는 조선인의 운명이 참으로 나무에도 돌에도 닿지 못할 기구한 골목에 다닥뜨린 것이 명백하다. 조선인으로서 어떠한 국가의 연장 또는 혹은 전위로 보이는 바 전혀 무리한 것은 아니나 그러나 조선인의 대부분의 의사는 오직 산업적 활로를 찾아서 인접한 토지에 벌이하러 나갔다는 외에 별다른 의사가 없는 것이요, 또는 그들의 자못 저급한 생활수준, 또 단순한 빈농으로서의 생활의식은 오직 시민적 안전을 자작(自作)의 생활에서 찾으려는 외에 별다른 야망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  니 (…)

이 글은 당시 일제가 식민지 조선백성을 만주로 이주시켜 만주 침략의 거점 또는 첨병화 하려고 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하지 않은 꼼수를 부리는 내용이다. 당시 만주에는 일본 거주인은 적고 거주 지역 또한 제한적이었던 비해 조선인은 만주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일제는 이들 조선인들을 침략세력 확장에 이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조선인도 일본 신민(臣民)이라며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영사재판권을 주장했다. 따라서 중국 당국이나 만주인들은 조선인의 이주를 의혹 어린 눈초리로 경계했고 조금만 이상해도 귀찮게 했을 것이다. 올바른 민족언론이라면 그 이면을 추궁해서 밝혔어야 마땅한 일이다.
이 사설은 후반에서 공산당을 거론한다. “우리는 재만조선인의 대다수가 이미 공산주의자화 하고 말았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들 간에 빈곤생활자는 많지만 그렇다고 여러 가지 현실의 사태가 그 자신으로 공산주의화 하였다고 볼 이유는 확실히 없다. (…) 그래서 중국관헌 및 토호지주들이 덮어놓고 전 조선인을 공산당원시 하는 것은 고의의 계획이 아니면 우리에게 매우 반갑지 않은 중대한 신경과민일 것이다.” 이것은 일제가 재만조선인의 ‘공산화’를 염려하고 있다는 배경을 의식한 글이다. 조선인이 공산화가 되면 중국관민이 괴롭힐 것이니 공산주의를 멀리하라는 경고적 의미를 가진 글이다. 공산주의도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법이라 조선인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 상황을 ‘비상시기’로 표현

1931년 2월 21일자 조선일보는 「후진사회 청년」’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은 고등교육을 마치고 졸업하는 젊은이들을 향하여 쓴 것으로 이때의 조선을 후진사회로 단정하고 다음과 같이 ‘권유’했다.

오늘날의 조선은 비상한 시기에 걸쳐 있다. 진지하게 민중을 생각하는 선구적인 청년들은 강대한 권력을 향해서와 같이 일반 민중에 대하여도 자기의 소신 때문에 침용(沈勇)으로서의 견고한 파악(把握)을 요한다. (…) 조선이 동양에 있어서 선진한 문명국의 하나이었거나 세계에 있어서도 역시 선진한 고대문화의 소유자였거나를 불문하고 현대에 있어 하나의 낙오된 후진사회의 인민으로 된 것을 잘 알아야 한다. (…) 우리는 유능한 청년 제군이 양지로만 매진하지 말고 응달의 인민에게로 그 의식적인 진출을 하기를 권유한다.

이 시기 조선일보가 조선의 상황을 ‘비상시기’라고 표현한 데 주목해야 한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체제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듯 마는 듯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신간회 팀이 조선일보의 편집을 장악한 가운데 나온 이런 표현은 그들이 조선일보에서 손을 떼는 날까지 지속된다.

일제의 조중(朝中) 이간책에 놀아난 ‘만보산사건’ 보도

1931년 7월 3일자 기사

[장춘 김 특파원 전화] 삼성보(三聖堡)의 중국 관민 400여 명은 동지에서 문제 중인 조선 농민 관개(灌漑)공사의 수호(水濠)를 전부 파괴, 매립하여 문제는 더욱 악화하는 중이다.
총독부 측에 도달한 정보에 의지하면 문제는 중국 장춘현 만보산(萬寶山) 삼성보 부근에 산재한 조선농민 200여 호는 중국 관헌의 갖은 탄압을 무릅쓰고 전지 약 500천지(天地-1천 지는 약 8단보)를 개척하기 위하여 양국 관헌의 엄중한 경계 아래 이통하(伊通河)를 끊어 막는 공사에 착수하고 지난 6월 27~28일경까지 거의 완료하고 농작물 파종에 종사하려던 중 이날 아침 8시경부터 또다시 중국농민 400여 명이 돌연 대거 습격하여 거의 완성된 절    착(切鑿)공사를 전부 파괴하여 전지경작을 못하게 방해하는 등 문제는 다시 악화되어 가는 중이다.
이 급보를 접한 일본영사관 전대(田代) 총영사는 즉시 항의하는 일방, 장작상(張作相) 씨를 방문하고 얼마 전에 체결한 계약 무시와 무리한 행동에 대하여 항의를 하려 하였으나 장작상 씨는 방금 금주(錦州)에 여행 중이므로 그 교섭은 다시 정체되어 있고, 조선농민은 이로 말미암아 금년 농사는 폐농상태로 다시 진퇴유곡의 난관에 처하여 그 향할 바를 알지 못하고 거듭하는 불행에 남녀노유가 서로 붙들고 비통하는 중이라 한다.

조선일보는 7월 2일과 3일 이틀에 걸쳐 이 사건을 보도했다. 이 사건에 관하여는 여러 학자들의 연구논문이 있지만 여기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만보산 사건 박영식, 황선익 집필)에 실린 글을 소개한다.

당시 일제는 중국에 대한 두 개의 외교 노선이 대립하고 있었다. 불간섭주의 원칙을 고수하자는 시데하라(幣原喜重郎)와, 무력간섭주의로 중국 본토는 장개석(蔣介石)이 만주는 장쭤린(張作霖)이 나누어 갖도록 하려는 다나카(田中義一)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28년 다나카의 강경 외교는 관동군의 장쭤린 폭사 사건으로 후퇴하면서 시데하라의 불간섭주의 외교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
한편 1928년 12월 말에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동삼성(東三省) 총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조직적으로 배일 정책을 추진, 중국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 그 결과 중·일 간의 현안 문제인 만철병행선·호로도 축항 문제 및 재만 한인의 토지 상조권(相租權 )문제 등이 분쟁의 씨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적극적인 대륙 침략 정책이 어려움에 처하자, 중국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자신들이 생명선이라고 부르던 이곳 만주에서 철수해야 하느냐,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을 행사해야 하느냐의 기로에 봉착하였다.
이때 관동군 특보 기관이 일본 중앙 정부의 의견을 무시하고 재만 한국 농민을 이용하여 대륙 침략을 위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바로 만보산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일제는 중국인 학영덕(學永德)을 비밀리에 매수하여 일제의 자금으로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게 하고, 지배인으로 삼았다. 이에 1931년 4월 16일 학영덕은 이통하 동쪽 삼성번 일대 소한림(蕭翰林) 등 12호의 황지 500샹(晌: 약 15만평)을 조지계약(租地契約)하였다.
그런데 계약 조항 중에는 “조지 계약은 장촌현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만약에 현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하게 되면 무효”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영덕은 현 정부의 허가를  받기 전에 한국인 이승훈(李昇薰) 등에게 전조 계약(轉租契約)을 함으로써 위약으로 분쟁의  소지를 마련하였다.
이승훈 등이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재만 한국 농민을 만보산 농장으로 불러들이자 180여 명이나 모여들었다. 그때 학영덕은 순수한 한인농민에게 이통하를 절단하게 하고 불법으로 계약한 토지와 이통하 사이에 수로를 개착하게 하였다.
중국인 지주들과의 분쟁이 야기되었지만, 한국 농민들의 수로 개착은 일본 장춘 영사관 경찰의 보호 아래 강행되어 6월 말에는 거의 완성될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름이 닥쳐오면서 이통하의 범람을 우려하던 중국인 지주와 현지 주민 약 400명은 7월 2일 수로공사 현지로 달려와 개착한 수로를 매몰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마침내 현장에 있던 한인 농민, 일본 영사관 경찰과 중국인 지주, 주민 사이에 일대 충돌이 일어났다. 그 후 점차 중·일 양국 경찰이 서로 증원되고 약간의 총격전도 벌어지게 되면서 분쟁도 격화되어 갔다.
그러나 다행히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은 채 중국인 지주와 주민들이 일단 철수하면서 진정되었다. 그런데 일본 관동군은 장춘 영사관 측을 이용하여 조선일보 장춘지국장 김이삼(金利三)을 유인, 만보산사건에 대한 과장된 허위 특보를 제공하여 본사로 지급 통전하게 하였다.

조선일보는 7월 2일자 석간과 3일자 조간 두 차례에 걸쳐 발행한 호외에 「중국 관민 800여명과 200 동포 충돌 부상, 주재 경관대 급보로 장춘 주둔군 출동 준비, 삼성보에 풍운 점급」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로 인해 한국 내에서는 중국인 배척 사건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조선일보 호외와 동아일보·시대일보·중외일보 등의 과장된 허위 보도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 측이 재만 한인을 일제 대륙 침략의 앞잡이로 간주하고 미쓰야 협정에 근거하여 이들을 압박한 데서 빚어진 한·중 양 민족의 감정 대립도 간접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중국인 습격·살상 등이 한국·일본 등지에서 행해졌으며, 일제 측의 선동과 은밀한 이면공작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
첫 보도 일주일이 지나자 조선일보는 7월 10일자 사설 「심심한 유감을 표함」을 통해 ‘중국민에 대한 불상사’에 대해 사과하는 글을 썼다. 이 기사의 제1보가 처음 크게 실리게 된 사실을 발행인도 알았던 것인지 편집인인 친일언론인 유광렬만이 알았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또 이 기사를 송고한 김 기자는 얼마 후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다. 지금의 조선일보와 비교할 때 그래도 당시의 신간회 사람들은 ‘사과 사설’을 쓸 정도로 양심적이었다는 판단을 내려도 틀림이 없겠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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