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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선기자대회ㆍ신간회와 조선일보 (2)- 조선일보 대해부 5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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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0.11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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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창립과 조선일보의 역할


1927년 1월 20일자 조선일보 2면에는 「획기적 회합이 될 신간회 창립 준비/ 민족적 각성 촉진과 우경사상 배척」라는 기사가 크게 실렸다.

조선민족의 정치적 각성됨을 낮추어 무슨 파가 암암리에 활동하느니 혹은 무슨 파가 단체적으로 결속하느니 하여 사회 각 방면에 여러 가지 풍설이 유행하는 것은 일반이 아는 바이어니와 이제 순민족주의단체로 신간회(新幹會)가 발기되어 목하 창립을 준비 중이라는데 그 회의 목표는 우경적(右傾的) 사상을 배척하고 민족주의 중의 좌익전선을 형성하려는 것이라는 데 조선에 있어서 어느 의미로 보든지 드물게 보는 회합이므로 각 방면의 영향이 크리라고 일반이 추측하는 바 그 회의 강령과 발기인의 씨명(氏名)은 아래와 같다 하며 창립총회는 2 월 15일에 개최하리라더라.

이 기사의 발기인 28명 명단에는 이갑성, 백관수, 신석우, 신채호, 안재홍, 조만식, 한용운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당시 누가 보더라도 ‘우경적 사상을 배척하고 민족주의 중의 좌익전선을 형성’하려는 인사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일보에 그런 기사가 나간 것은 좌파 계열에 속하는 기자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신간회 창립대회는 2월 15일 열렸는데, 조선일보 16일자는 다분히 ‘흥분한’ 필치로 그 모임을 보도했다.

회장(會場)은 숙연 중 긴장신간회 창립대회 /  회중(會衆)은 무려 천여(千餘) / 회원에 섞여 방청객도 쇄도

순민족주의단체인 조선민흥회와 신간회가 주의와 운동을 위하여 합동한 후 편의상 신간회라는 이름으로 개최한 신간회 창립대회는 예정과 같이 15일에 오후 7시에 시내 종로 기독교청년회 대강당에서 개최하였는데 신간회의 창립대회는 이야말로 조선에 있어서 획기적인 모임인 만큼 회원과 방청인을 물론하고 정각 전부터 조수 같이 밀려들어 방청석은 정각이 되기 약 한 시간 전부터 입추의 여지가 없으리 만큼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으며 정각보다 15분 후인 오후 7시 15분에 신석우 씨 사회로 개회를 선언한 후 회원을 점명(點名)하니 출석회원이 2백여인으로 방청인과 합하여 무려 천여명에 달하였으며 점명을 마치니 장내는 숙연한 중에도 매우 긴장미를 띠운 공기가 넘치어 자못 삼엄한 빛이 가득한 중에 순서를 좇아 의사를 진행하였다.

신간회 창립대회는 규약을 통과시킨 뒤 회장에 이상재를 선출했다.

(…) 회장 이상재, 부회장 권동진 등 51명의 간부 및 발기인 중 조선일보 계가 9명으로 가  장 많았고, 기독교계 7명, 조선공산당계 5명, 천도교계 3명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신석우ㆍ안 재홍 등 조선일보의 간부들은 모두 신간회의 주요 간부였고, 조선일보 기자들은 대부분 신간회 회원이었다. 조선일보가 신간회인지, 신간회 지부가 조선일보 지국인지 총독부가 판단하기 어려웠을 만큼 조선일보는 신간회 활동의 중심이었다. 지면에는 신간회 소식을 전하는 고정란을 두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신간회는 일부 지식계층이 들고 나온 자치운동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태동됐다.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자치권 획득을 주장한 자치운동은 전체 민족운동에 혼란과 분열을 초래했고, 일제에 반사 이익을 안겨주었다. 조선일보는 처음부터 자치운동을 반대함으로써 신간회의 이론적 근거를 뒷받침했다(〈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74~75쪽).

위의 인용문에서 ‘일부 지식계층이 들고 나온 자치운동’을 대표하는 집단이 동아일보사 경영진과 다수 편집간부들이었고, 동아일보가 연속 사설 「민족적 경륜」으로 자치론을 펼치는 데 앞장섰음은 앞에 상세히 적은 바 있다.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한국 현대사상 처음으로 결합한 ‘좌우 합작 독립운동단체’로서 “민족적ㆍ정치적ㆍ경제적 예속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나며 타협주의를 배격한다”고 밝히면서 언론ㆍ집회ㆍ결사ㆍ출판 등의 자유를 쟁취하고 청소년과 부인을 위한 형평운동을 지원하는 것을 투쟁의 목표로 삼았다.

1927년 7월에 설치된 서울 지회를 시작으로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가 만들어지고 회원이 3만여명에 이르렀다. 신간회의 조직이 그렇게 커지자 일제는 신간회를 탄압하면서 대규모의 전체 대회를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신간회는 1929년 6월 ‘복(複)대표회의’를 열어 새 임원진을 뽑고 새 규약을 채택했는데, 임원진의 절반 가까이가 사회주의자였다. 집행위원장이 된 허헌 역시 사회주의 계열이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진상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해서 학생운동 탄압을 엄중히 항의했다. 신간회가 12월 13일에 광주학생운동 탄압의 실상을 보고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기로 하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조병옥, 이관용, 허헌 등 간부 44명 등 90여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중대회 사건’을 계기로 신간회는 회원 수가 느는 등 조직이 확대되어 나갔으나 지도부에 갈등이 일어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허헌에 이어 집행위원장이 된 보수파의 김병로가 최린, 송진우 등 자치론자들과 함께 신간회를 자치운동의 매개체로 삼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들어 구성된 신간회 집행부가 타협적 운동 노선으로 기울어 가면서 일제의 탄압에 미온적으로 대처하자 좌파 진영에서 신간회 ‘해체론’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결국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창립대회 이후 처음으로 전체 대회를 열고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으로 해소안을 가결했다.

1927년 2월 중순 신간회가 창립된 뒤 한 달쯤 지나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가 노환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가 3월 25일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자 부사장 신석우가 5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조선일보는 1928년 5월 9일자 사설 ‘제남사변(濟南事變)의 벽상관(壁上觀)-다나카 내각의 대모험’이 문제가 되어 네 번째 정간을 당했다. ‘제남사변’은 일본이 중국 장개석의 국민군을 견제하려고 군대를 보내 산동성 제남에서 벌인 전투였다. ‘벽상관’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말로 ‘형세를 중립적으로 관망한다’는 뜻이다.

그 사설은 일본이 일으킨 제남사변은 인본 다나카 내각의 ‘모험’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 일본 정부가 발표한 것처럼 남경 정부의 약탈행위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산동 지방에 일본군을 파병한 것은 ‘침략행위’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그 사설은 발행인 겸 주필 안재홍이 쓴 것이었다.

총독부가 이 사설을 문제 삼은 것은 겉으로 내세운 이유였고, 그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신간회에 타격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사실은 정간 해제의 조건으로 신석우 사장에게 신석우 자신은 물론 조선일보 사원들의 신간회 탈퇴를 강력히 요구한 것에서도 드러났다. 이런 총독부 전력의 밑바닥에는 민족단일전선인 신간회의 배일ㆍ비타협 운동이 전국적으로 그 세력을 형성해 나가는 데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조선일보와 신간회의 밀착된 관계를 끊어 놓으려는 의도가 있었다(같은 책, 87쪽).

이 사건으로 조선일보는 무기정간을 받아 133일 동안 신문을 낼 수 없었다. 정간이 해제되면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안재홍이 풀려나고 그가 겸임했던 발행인을 사장 신석우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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