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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선기자대회ㆍ신간회와 조선일보 (1)- 조선일보 대해부 5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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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9.27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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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1월 27일 서울의 중견 언론인 48명이 무명회(無名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무명회는 해마다 3월에 총회를, 격월로 예회(例會)를 갖기로 하고 간사 11인으로 집단지도체제를 운영했다. 무명회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투쟁을 위한 조직이라기보다는 개량주의적 단체였다. 1922년 11월 잡지 <신천지>와 <신생활>이 필화사건으로 발행금지를 당하자 언론계와 법조계가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으나 무명회는 <신천지> 주간 백대진이 회원이었는데도 아무런 의견도 발표하지 않았다.

1924년 8월 3일, 그 동안 유명무실하던 무명회 안에서 자체 반성이 일어나서 조선인 기자단을 부활시키는 발기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8월 19일에 다시 열린 부활 발기회에선 회원의 자격을 “민중의 정신과 배치되지 아니하는 신문 잡지 기자”만 입회하도록 규약을 개정하여, 매일신보 기자를 제외하고, 무명회의 성격 을 선명히 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

새 출발을 한 무명회 활동 중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8월 11일 밤에 일어난 평북 위원 주민 참살사건의 진상 조사를 위하여 회원인 조선일보 기자 이석을 풀기자로 특파하여 9월 27일자에 ‘동아’, ‘조선’ 양지에 대대적으로 보도한 일이며, 한국 초유의 전 조선 기자대회 를 1925년 4월 15~16일 이틀간 주최한 일이다(<일제하 민족언론사론>, 377쪽).

무명회가 주최한 전조선기자대회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무명회는 1925년 1월 31일 임시총회를 열고 실무책임간사로 <개벽>의 이을(李乙)을 뽑는 한편, 최원순(동아일보)의 발의로 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무명회는 여러 신문과 잡지 관계자 등 34명으로 전조선기자대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취지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언론은 권위가 그의 생명이다.

현하 우리의 언론은 과연 어떠한 언론인가? 우리는 힘껏 그 권위를 북돋우고 그 생명의 발 약(潑躍)함을 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한 번도 원만히 모여보지 못했다. 원만히 모이면 반드 시 그만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본대회의 권위가 여기에 있다. 만천하 언론계의 동지들이여! 모이자! 그리하여 언론의 권위를 신장하고 동직자의 친목을 도(圖)하자(같은 책, 377쪽)

4월 15~16일에 열린 전조선기자대회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최된 대규모 언론인 집회였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이 뜨거웠고, 총독부의 감시와 경계가 삼엄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최민지의 저서 <일제하 민족언론사론>에는 전조선기자대회를 주최한 조직이 무명회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 조선일보사의 공식 간행물들에는 조선일보가 ‘주도’하거나 ‘앞장섰다’고 나와 있다.

이상재와 신석우를 맞은 조선일보의 혁신적인 발전을 전후하여 서울에는 신문·잡지 기자를 총망라한 최초의 기자단체 ‘무명회’를 비롯해서, 소장 신문기자들만을 중심으로 한 ‘전위기 자동맹’, 사회부 기자들로 구성된 ‘철필구락부’ 등의 언론단체가 발족되고, 각 지방에 지방기 자단이 결성되어 1924년 4월 이후 31개 언론단체와 그밖의 민간단체가 모여 언론집회압박탄 핵대회를 두 번이나 열었고, 1925년 4월에는 조선일보가 앞장서 서울 천도교 기념회관에서 7백여 명의 전국 신문기자가 모인 최초의 신문인대회라 할 조선 기자대회를 열고 3일간의 회의를 가졌다(<조선일보 60년사>, 1980, 135~136쪽).

1925년에는 계속되는 일제의 언론탄압에 맞서 전국 언론인들이 모두 들고 일어난 ‘전조선 기자대회’가 최초로 열렸다. 이 언론인 ‘집단항의’를 주도한 것은 조선일보였다. (…)

(…) 이 대회는 1924년 언론압박탄핵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유진태가 2만 원이라는 큰 돈을 자금으로 마련해서 전국의 기자들을 불러 개최했다. 조선일보 임직원과 기자들은 적극 적으로 참여하며 대회를 이끌었다. 대회 의장에는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이, 부의장에는 안재 홍 조선일보 논설반원이 추대돼 사회를 맡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간부인 최선익·최 국현 등 조선일보의 본사와 지방 기자들이 111명이나 참석해 마치 조선일보기자대회 같은 인상을 대회장에 남겼다(<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70쪽).

<개벽> 1925년 5월호 60~61쪽에 실린 「조선기자대회 잡관(雜觀)」이라는 글은 전조선기자대회의 주최집단에 대해 이런 ‘판정’을 내린 바 있다.

(…) 이 전조선기자대회는 조선일보 사원이 전 출석자의 약 반수를 점하였고 그 의장, 부의 장이 조선일보의 사장과 이사인 이상재, 안재홍이 됨으로써, 조선일보사가 주축이 된 것처 럼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 발의 자체가 동아일보 정치부장인 최원순의 발의였으며 사장 송진 우와 간부기자들 중에서도 김동진, 한기악, 한위건, 설의식 등이 준비위원으로서 기자대회의 준비과정을 맡기도 한 전 언론계의 성사로서, 당시 동아일보도 ‘전조선기자대회’ 제목의 사 설로 시의에 적합한 대회로서 기대와 그 의의가 큼을 강조하였다. 또 평양지국장 김성업은 의안작성위원으로, 사장 송진우는 제종(諸種)안건 기초위원으로서 의장후보로까지 추천되었 다가 “그의 솜씨 없는 말은 장내 소란을 진정하려다가 반(反)히 소란을 야기해 일반의 민망 이 적지 않은” 사태를 빚기도 하는 등 기자대회 준비과정에서부터 참여하였던 것이다(<일제 하 민족언론사론>, 380쪽에서 재인용).

기자대회의 주류를 이룬 조선일보

어쨌든 조선일보는 경영진부터 편집간부와 기자들까지 가장 많은 인원이 전조선기자대회에 참석했을 뿐 아니라 논설과 기사도 가장 적극적으로 실었다.

전조선기자대회는 4월 16일, 앞으로 대회 소집권을 무명회에 위임하기로 합의하고 ‘결의문’을 채택한 뒤 막을 내렸다.

1) 우리는 친목과 협동을 공고히 하여 언론의 권위를 신장 발휘하기를 기(期)함.

2) 신문 및 출판물에 관한 현행 법규의 근본적 개신(改新)을 촉(促)함.

3) 언론 집회 및 결사 자유를 구속하는 일체 법규의 철폐를 기함.

4) 동척을 위시하여 현하 조선인 생활의 근저를 침식하는 각 방면의 죄상을 적발하여 대중 의 각성을 촉함.

5) 대중운동의 적극적 발전을 촉성하기를 도(圖)함.

이 대회를 계기로 조선민중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리고 독립에 이바지하는 언론의 길로 정진하기로 다짐한 기자들은 1927년 2월에 결성된 좌우 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조선일보는 1925년 9월 8일자에 「조선과 노국(露國)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을 실었다는 이유로 세 번째 정간을 당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4월 17일 창당된 조선공산당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사설을 쓴 신일용은 사회주의 계열의 기자였다. 사설의 요지는 서울 정동에 소련영사관이 개설된 사실에 주목해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다. “적로(赤露-붉은 러시아)국가는 일계급의 국가가 아니고 전 인민의 국가”이므로 “(조선의 현상 타개는) 반드시 적로의 세계혁신운동과 그 보조가 일치되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문제 삼아 총독부는 조선일보에 무기한 정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사설 집필자인 신일용을 구속하는 한편 보름 전에 구입한 윤전기를 압류했다. 그의 재판은 무기 연기되었으나 발행인 겸 편집인 김동성과 인쇄인 김형원은 1심에서 징역 4개월과 3개월, 2심에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 및 금고 4개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1심에서 몰수 선고를 받았던 윤전기는 2심에서 풀려났다.

총독부는 3차 정간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반일적 언론인 17명 축출’을 요구했다. 조선일보사 간부진은 여러 차례 논의를 거듭한 끝에 ‘화요회’와 ‘북풍회’, 그리고 상해파와 이상협계를 포함한 17명의 기자를 해고했다. 화요회에는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북풍회에는 서범석, 손영극, 상해파에는 신일용, 이상협계에는 김형원과 유광열이 들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이상협, 신구범, 장두현도 퇴사했다. 총독부는 그런 ‘인사조치’가 내려지자 10월 15일 발행정치 처분을 풀었다.

일제강점기에 민간지들이 정간을 당한 경우, 신문사의 경영진이 신문을 빨리 내도록 해달라고 총독부에 간청하거나 은밀한 교섭을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총독부는 당연히 ‘문제를 일으킨’ 기자들을 해고하라는 조건을 앞세우기 일쑤였다. 조선일보 3차 정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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