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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를 앞지른 조선일보의 ‘혁신’(1)- 조선일보 대해부 4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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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9.1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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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훈이 취임 당시 3천부이던 발행부수를 1만5천부까지 끌어올리자 조선일보는 경영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얼마쯤 숨통을 틀 수가 있었다.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파’인 송병준이 사주로 있는 조선일보사에서 남궁훈의 ‘혁신 작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원로 언론인으로 조선일보의 기개를 유지하고 회사를 혁신했기 때문에 1938년 조선일보 지령 6000호 기념호는 제1대, 제2대 사장인 조진태와 유문환을 무시한 채 남궁훈을 ‘조선일보 초대 사장’이라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조선일보 사원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았다”(〈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39쪽).

남궁훈이 사장에 취임한 뒤 13 번째로 만든 1921년 4월 23일자 조선일보에는 나라 밖에서 벌어지는 독립투쟁을 상세히 알리는 기사(「연해주와 만주에 있는 독립단 등의 정황」)가 실렸다. “노령 방면에는 추풍을 중심으로 하고 최명록, 홍명도, 김좌진 등 일파의 대한총합부가 문창범과 연락하여 과격파로부터 무기를 얻고자 노력하며 30여명으로 조사대를 편성하여 간도에 파견하여 친일하는 조선 사람과 조선독립단으로 귀순한 자의 동정을 내사하는 중이라.”

총독부가 가장 경계하고 ‘혐오’하는 독립군의 현황을 조선일보가 적극적으로 보도한 것은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조선일보는 같은 해 8월부터 11월까지 상해 임시정부 요원들과 시베리아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전하는 한편 동경에 유학 중인 조선 학생들의 동맹휴학 등을 보도했다.

‘혁신 조선일보’의 좌파 기자들

송병준이 사주로 있던 1922~1923년에 조선일보는 해외에서 불어닥친 ‘사회주의 이론’을 활발하게 소개하면서 ‘민족지’를 자임하는 동아일보에 맞서 혁신적 노선을 지향했다. 보수적인 사주나 다수 편집간부들보다 훨씬 진보적인, 사회주의나 유물사관을 신봉하던 젊은 기자들의 적극적 문필활동이 반영된 결과였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심각한 의문이 고개를 들 것이다. ‘정미 7적’의 한 사람으로서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던 송병준이 사주로 있던 조선일보사에서, 일제가 적대시하면서 탄압하던 사회주의자들이나 지하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던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간부나 기자로 일할 수 있었을까? 먼저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921년 5월 4일부터 17일까지 중국 상해에서 열린 한인공산주의자대회에서는 이동휘의 상 해파 고려공산당과 대립하는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세칭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이었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이르쿠츠크파의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등은 1922년 4 월 단둥(安東)에서 국내로 잠입하려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4년 1월 19일 평양형 무소에서 석방된 박헌영은 4월에 동아일보사 판매부 서기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4월 21~23일에 열린 조선청년동맹 창립대회에서 5명으로 구성된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되었다. 박헌영은 8월 11일 서울 관수동에서 열린 ‘신흥청년사’ 창립총회에서 김단야, 김찬, 홍증식, 민태흥, 임규호, 임원근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뽑혔다. 홍증식은 조선일보사 영업국 장이었고, 김단야와 임원근은 기자였다. 신흥청년사는 잡지 〈신흥청년〉을 발간하기 위해 설 립된 회사로서, 그 잡지는 공개단체인 신흥청년동맹의 기관지로 알려져 있었지만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은 자신의 기관지로 간주하고 있었다(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 기〉, 역사비평사, 2004, 85~88쪽).

박헌영은 1924년 12월 12일자로 동아일보사 ‘지방부 기자’로 발령을 받았다. 일제 경찰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전국을 돌아다닐 수 있는 합법적 신분을 획득했던 것이다. 1925년 4 월 21일에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제1회 중앙간부회에서 박헌영은 홍증식, 김단야, 권오설, 김찬, 조봉암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 뒤 책임비서를 맡았다. 그는 5월 24일 동아 일보사에서 해임당했다. 당시 그 회사에서 동맹파업이 일어나서 7,8명의 동료기자가 퇴사하 게 되었는데 ‘파업의 조직자’라는 혐의로 해고되었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그로부터 석 달 뒤 인 8월 조선일보사에 기자로 들어갔다. 그리고 뒤에서 소개하겠지만, 1925년 9월 조선일보사 가 세 번째로 정간을 당하던 때 총독부가 요구한 ‘반일기자 17명 해임’ 조건에 해당되어 회 사를 쫓겨났다(같은 책, 90~102쪽).

이런 기록에 비추어 보면, 조선일보사에서 일하던 좌파 기자들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나 서울의 고려공산청년회에서 ‘동지’로 맺어져 있던 박헌영과 더불어 조선일보의 논설이나 기사를 통해 사회주의와 유물사관을 적극적으로 소개했음을 알 수 있다.

‘총독 퇴진’ 요구한 조선일보

1921년 한 해 동안 총독부가 압수한 조선일보 기사는 모두 42건인 데 비해 동아일보는 16건이었다. 이런 수치로 미루어 보면 조선일보가 동아일보다 ‘배일신문’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1922년에 조선일보는 총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논설을 싣기에 이르렀다.

(…) 조선일보 6월 18일자 논설은 “조선총독 사이토 씨에게 사직을 권고”한다고 썼다. 총 독을 겨냥한 이 논설은 당연히 압수당했다. 이 논설은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있던 사이토 총 독이 무단정치시대의 일본 고관을 다시 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중용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논설은 “무명의 소졸과 같은 자를 2천만의 민족을 좌지우지하는 지위에 앉힘은 이 과연 정 치상 합당한 처치라고 할 것인가”라고 따지면서 “사이토의 문화정치 표방이 사기라는 것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논설은 “어찌 무거운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부끄러움이 없음을 말 할 수 있으랴. 이에 우리는 사이토 씨를 위해서 사직퇴위를 권고하는 바이노라”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제목부터 작심하고 총독직함도 생략한 채 「조선총독 사이토 씨에게 사직을 권고 함」이라고 했고 본문에서도 줄곧 ‘사이토 씨’라고 불렀다(〈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40~41 쪽).

1923년 들어 조선일보는 독립군 의용대원들이 일제를 상대로 교전(交戰)한 사실을 크게 보도함으로써 압수를 당했다. 5월 17일자 3면에 실린 기사가 대표적이었다. 「위경(危境)을 탈출한 의용대원-탄환이 비 같이 쏟아지는 속에서 돌격을 하고 빠져나서 살아났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의 앞머리는 다음과 같다.

독립군 의용대원 김종호 이하 박제환, 김창군, 김용현, 김상주 등 제씨는 어떠한 사명을 맡 아가지고 위원군 하창면 내동 최 모의 집에 은신하였던 바 동군(同郡)에 있는 일본경찰 20 여명이 이것을 알고 에워싸고 공격함으로 수시간 동안을 교전하다가 일본경관이 드디어 그 집에 불을 놓아 위경에 빠진 의용대는 돌격하여 충천하는 불꽃을 벗어나서 탄환이 비 같이 쏟아지는 속에 몸을 피하여 동군 봉산면 향양동에 이르러 독로강을 건너려 할 때 배는 건너 강안에 대어 어찌 할 수 없는 고로 박제환 씨는 우장을 벗고 소뿔에 매달려 소를 몰고 강을 건너서 전 대원이 무사히 산속 험한 길을 걸어서 돌아왔는데 일본경관의 탄환이 발을 맞혀 부상하였으나 또한 무사히 돌아왔다더라(상해).

1923년 7월 8일자 조선일보 3면에는 「의열단의 비밀총회」라는 기사가 크게 실렸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지린(吉林)성에서 조직된 비밀결사로서 온건한 독립운동을 비판하면서 폭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상해 발’로 된 이 기사는 당시의 독립운동 조직 가운데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인 의열단의 면모와 행동강령을 상세히 전하는 것이었다. 길지만 전문을 옮겨보겠다.

단도, 단총, 폭발탄 등으로 암살, 방화 등을 기도하는 비밀한 단체로 유명한 의열단은 지난 (6월) 29일 모처에서 비밀히 총회를 열고 단장 김원봉 이하 단원 일동이 회집하여 태극기를 높이 단 아래에서 일제히 경례한 후 생명을 희생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기로 선서식을 행하 고 중국령, 노국령, 일본과 본국 각처에 배치한 각 기관의 경과 상황과 모국 정부에 교섭한 전말의 보고가 있었고 또한 재정 보고가 끝난 뒤에 계속하여 그 단체에서 이제부터 행할 바 의 방략을 협의 약속하였는데 가장 비밀한 사항은 간부에서만 결의하기로 하고 일반 단원들 이 결의 실행하는 요령은 대략 아래와 같다더라.

1) 의열단원은 단체에 들어오는 날부터 생명, 명예, 재산, 부모, 처자, 형제를 일체 희생에 공(供)하고 오직 단체의 주의 목적인 조선 독립을 위하여 결사(決死)모험으로써 활동할 일.

2) 단원은 각자 특장(特長)에 의하여 아래 기록한 기술 중에 한 가지나 두 어 가지를 실지 로 연습하고 연구하는 의무가 있을 일.

3) 단원은 간부의 명령에 대하여 절대 복종할 일.

4) 암살, 파괴, 방화, 폭동 등에 대한 기밀과 계획은 간부에서 운주 지휘할 일.

5) 단원이 불행히 피착(被捉)되는 때에 의열단은 반드시 그 불행한 단원을 위하여 복수적 수단을 취하되 단원을 포착한 자나 단원에게 형벌을 선고하는 자는 반드시 암살할 일.

6) 암살할 인물과 파괴할 건물 등은 의열단 선언에 의지하여 실행하되 다만 소위 조선귀족 으로서 나라를 망하고 백성에 앙화(殃禍)를 준 보수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민족을 위하여 공공사업에 의연(義捐)하지 않는 자는 기어이 금년 안으로 OO할 일.

7) 단원이 아닌 자로서 의열단의 명칭을 빙자하고 부자에게 금전을 강청하여 단체의 명의를 더럽히는 자를 조사하여 이러한 협잡배를 반드시 엄벌할 일.

8) 중요한 기밀사항은 간부에서 협의한 후 이것을 단원에게 공포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밀접 관계가 있는 단원에게만 필요에 의하여 출동을 명령할 일(상해).

의열단이 ‘암살, 파괴, 방화, 폭동’을 통해 일제에 맞서면서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응징하고 있다는 내용의 이 기사를 총독부가 압수했음은 물론이다.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의 실상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지방에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당시에는 그것을 ‘관동 대지진’이라고 불렀다. 5분 간격으로 일어난 세 차례의 지진으로 10만~14만여 명이 사망하고, 3만7천여 명이 실종되었다. 일본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경찰서에 이런 내용을 하달했다.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 이것은 정부 조직이 마비된 상태에서 극도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계책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일본의 다수 언론은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와 약탈과 강간, 살인을 저지르거나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사실인 듯이 보도했다.

그런 유언비어를 듣고 공포와 흥분에 사로잡힌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해서 불심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죽창, 낫, 일본도 등으로 가차없이 학살했다. ‘관동 대지진’ 직후 살해당한 조선인은 4천~6천명으로 추산되었다.

(…) 조선일보는 9월 3일부터 지진 참상과 교포에 대한 부당한 학살과 관련된 기사와 논설 을 상세히 보도했다가 수난을 당했다. 지진사건 보도와 관련해 압수되거나 발매금지 처분을 받은 신문은 9월 3, 5, 8, 23, 24일자와 10월 4일자이다. (…)

이때의 압수기사들을 보면 「‘조선총독에게로 경계(警戒)」라는 제목의 호외 기사는 국내의 항일 폭동을 두려워하는 일본 정부의 비밀지령을 폭로했으며, 같은 날짜 지면에 해외발 기 사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자행된 학살사건을 보도했다. 이후에도 조선일보는 9월 하순까지 관동 대지진 현장의 위험한 상황, 일본군 출동, 흉흉한 민심 등 학살 현장의 속보를 계속 내보내고 현장에서 귀국한 유학생을 취재해 생생한 학살 목격담을 전했다. 또 일본 경시청 이 자체 조사를 통해 “대지진 중에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의 폭행이나 방화 등의 사실은 전 혀 없었다”고 파악했음을 확인해주는 비밀보고 내용을 입수, 재일 조선인들이 원통하게 죽 어갔다는 것을 알리려 했으나 이 신문은 압수당했다(〈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46~47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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