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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직후 조선일보의 변신(2)- 조선일보 대해부 3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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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9.06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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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민족지’로 탈바꿈하다

발행인 예종석과 두 기자가 강제로 퇴사당한 뒤에도 조선일보는 ‘항일기사’와 논설을 계속 씀으로써 총독부의 경고를 받고 압수 처분을 당했다. 그런데도 1920년 7월 27일자 3면에는 「조선인이 독립을 하고자 함은 무리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강한 논조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조선독립운동은 합병된 결과로 일어난 문제로서 이것은 조선만 그런 것이 아니라 파란(波蘭, 폴란드)이나 체코나 애란(愛蘭, 아일랜드) 같은 데는 1백년 내지 8백년이 지난 데인 데도 오히려 독립을 주창하는 터이거든 아직 10년쯤 지난 조선이 독립을 주창함은 당연한 것”이라면서 독립을 요구했다.

조선일보는 8월 15일자로 지령 제100호를 맞았으나 특집호를 내지 못하고 겨우 4면을 발행했다. 바로 전날 사장 조진태가 총독부의 압력 때문에 사임한 데다 재정 형편이 나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사는 사고(社告)를 통해 “100호 당일 발행할 예정이던 100호 기념호는 부득이한 사세(事勢)가 있어 연기하여 24일에 발행함”이라고 독자들에게 알렸다.

100호가 발행된 날인 8월 15일 사장 조진태가 회사를 떠나고 2대 사장으로 유문환이 취임했다.

새로 조선일보사 사장이 된 유문환은 경성교풍회(京城橋風會, 약칭 교풍회)의 부회장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 조직은 1919년 7월 20일 경성부윤 가네야가 조선인 유력자 100명을 경성호텔에 초청해서 “상호융화친목, 인우상조(隣佑相助), 질서유지, 풍속개량” 등을 표방하면서 창립한 것이었다. 회장은 윤치호, 고문은 가네야, 민영기, 민원식, 조진태였다. 조선총독 사이토는 1919년 8월에 부임한 직후 경성교풍회를 조선교풍회로 개명한 뒤 지방행정기관의 지원 아래 13도 곳곳으로 확산시키면서 정책 선전과 독립사상 파괴에 ‘활용’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교풍회」 항목에서).

유문환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친일행적이 두드러졌던 것 같지는 않다.

조선일보가 「사고」를 통해 예고한 대로 8월 24일자로 펴낸 ‘100호 기념호’는 8면으로 발행되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기사는 미국 의원단 입경(入京)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민주선진국가인 미국의 의원들이 입국할 때부터 동정을 상세히 알리는 한편 그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민중을 일제가 가혹하게 탄압하던 상황을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8월 25일자 조선일보에는 「미의원단 입성과 시내의 경계 엄중」 「남대문역두(南大門驛頭)에 만세성(萬聲聲)이 돌발」 등 제목 아래 장문의 기사가 실렸다.

24일 오후 8시 40분에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한 열차로 입경(入京)한 미국의원단을 기회삼 아 총독부와 다른 중요한 건물에 폭탄을 던져서 큰 소요를 일으키려고 계획하던 조선독립당 의 계획이 발각되어 굳게 결사를 조직한 광복단의 영문으로부터 파견한 결사단(決死團)은 20일 밤부터 22일까지 단장 김영철 이하 다수 인원이 관헌에게 체포되었고 동시에 폭발탄 총과 독립에 관한 문서를 압수하고 그 연루자를 오히려 속속 검거중인데 그 후에 경성시민 의 형편을 보면 반일사상을 가진 조선인들이 시민을 선동하며 (…) 종로를 중심 삼고 각 상점에 대한중흥단휘보와 경고문을 22일 밤부터 배포하였고 인천에서도 경성과 같이 인쇄 물을 배포하였는데 (…).

조선일보는 8월 27일자 신문에 실은 「자연의 화(化)」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일제 경찰을 호되게 비판했다. 그 사설의 주요한 부분은 아래와 같다.

덕(德)의 유행은 인력(人力)으로써 방어할 수 없음과 같이 자연의 유행도 또한 인력으로써 방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가능한 일을 방어하려 함은 무리무지(無理無知)의 막 심함이요 방어할 수 없는 것에 고심노력(苦心努力)하는 자 역시 무지한 우거(愚擧)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희희(噫噫), 세상에 우매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있을까. 만일 자연의 화(化) 와 천리(天理)의 순(循)을 강박압력으로써 하면 장래 여하한 경우에 처하게 되는 것일까. 작 으면 일신을 망치고 크면 나라를 망칠 뿐이로다. 이러하니 회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근일 미국의원단 일행의 내선(來鮮)은 여하한 사상과 여하한 안목으로써 시찰할 것인가.

그것은 유문환이 사장이 된지 12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에 대해 1주간 발행정지처분(정간)을 내렸다. 총독부가 ‘민간지’ 발행을 허가한 이래 최초의 정간조치였다. 조선일보는 정간이 풀린 지 사흘만인 9월 5일자 신문에 「우열(愚劣)한 총독부 당국은 하고(何故)로 우리 일보(日報)를 정간시켰나뇨」라는 제목의 강경한 사설을 실었다.

우리 조선일보는 창간한 이래 거의 백수십여일 동안에 총 113호를 냈고, 그동안 총독부 당국자는 지면을 압수하기 전후 23회, 발행자를 계책(戒責)하기 10여회에 달하여 압박에 압 박을 가하기 날을 거듭하여 자심하였고, 8월 27일에 이르러서 당국자는 돌연 1주간의 발행 정지 명령장을 발포(發布)했다.

이에 우리는 당국의 조치에 대하여 가장 냉정히 우리 사의 반성을 했노라. 즉 우리 일보는 조선인의 불평을 창도(唱導)하여 총독정치를 얼마만큼 공격했던가. 조선 독립운동의 사실을 선전하여 조선인의 정신을 얼마만큼 고취(鼓吹)했던가. 과연 우리가 이 의식을 포지(抱持)하 여 계속적으로 이 때문에 노력했음은 사실이다. 당국자가 우리에게 과(課)함에 소위 배일신 문이라는 죄명으로써 함은 우리의 실범(實犯)으로서, 원죄(怨罪)가 아님을 기탄없이 자백하 노라. 그렇다면 즉 우리의 죄과는 당국자로부터 볼 때에는 실로 촌호(寸毫)의 가차(假借)도 있을 수 없는 바로, 적어도 삼천리의 강토를 점거하고 2천만 민중의 생살(生殺)을 임의로 행하는 조선 총독은 일거에 우리사의 발행권을 취소하고 기계 재산을 압탈(押奪)하고 종업 원을 주륙(誅戮)해야 할 것이거늘, 당국자는 하고로 1주간의 정간명령에 그쳤는가. (…)

우리는 불행히도 당국자가 비방함과 같이 무문곡필(舞文曲筆)의 기능에 부족하고 또한 조 선일보라는 간판 아래서 민족적 양심이 민멸(泯滅)하지 않는 한 이를 감히 할 수 없는 바 철두철미 배일신문다운 소질을 발휘하지 아니치 못하노라. (…) 당초 당국이 조선인의 신문 을 허하며 언론을 용인한 본의는 조선인에게 자유를 줌이 아니고 압박을 가하기 위함이었 고, 민의의 창달을 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아유(阿諛)를 구하려 한 것인가. 그렇다면 당국 의 소위 문화정치는 또한 극히 기괴한 것이 아니겠는가.

온건한 친일파로 여겨지던 유문환이 사장을 맡고 있는 조선일보가 해정(解停)된 지 며칠도 되지 않아서 그렇게 ‘독한’ 내용의 사설로 총독부를 공격했으니 총독 사이토를 비롯한 관료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조선일보는 그 사설 때문에 무기정간을 당했다.

일제강점기의 ‘민족언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최민지는 이런 현상을 아래와 같이 해석했다.

그 당시 동아일보는 시골 구석까지 가지 않는 곳이 없었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확고한 기반을 가졌으므로 조일동화주의(朝日同化主義)를 표방하는 조선일보는 이들에게 대 항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고심참담한 결과 과격한 불온 기사를 게재하여 민중 들에게는 민족지임을 자임하는 동아일보보다 선명한 민족지로 보이며, 총독부 당국에는 또 배일기자를 해고함으로써 타협하는 양면 작전을 썼던 것이다. 정간처분이 있기 전까지 조선 일보는 발매금지, 압수처분을 30여 회나 받았고, 동아일보는 19회나 받았다. (…)

초창기의 세 신문(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인용자)이 이같이 일제에 큰 위협이 될 진 용이 아니었으며, 총독부 당국도 명백히 독립의식을 고취하거나 총독정치에 정면으로 도전 한 글 외에는 대체로 가혹한 탄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3 · 1 운동의 열기가 차차 식어감에 따라 일제는 한글신문에 대한 탄압의 기준을 가혹하게 다루게 된다(최민지, 「한말-일제하 민족과 언론」,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다섯수레, 2007, 48~49쪽).

조선일보에 대한 무기정간 처분은 1920년 11월 24일 해제되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가 2차 무기정간으로 신문을 내지 못하고 있던 기간에 사장 유문환에게 압력을 가해 발행인과 편집인을 교체하라고 요구했다. “유 사장은 압력에 굴하지 않으려 애쓰며 3개월을 버텼으나 결국 12월 2일 발행인과 편집인, 그리고 편집국장까지 겸하고 있던 조선일보의 실력자 최강은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37쪽). 조선일보는 최강이 사퇴한 바로 그날 속간호를 낼 수 있었다.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는 조선일보가 재정난으로 1921년 4월 6일 휴간에 들어가자 “일제는 대표적인 친일 인사인 송병준으로 하여금 조선일보에 접근하게 했다”고 기록했다(37~38쪽).

1920년 3월 5일에 창간된 이래 잦은 압수와 두 번에 걸친 정간, 그리고 경영난 때문에 12월까지 111일이나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던 조선일보의 판권은 1921년 4월 8일 송병준에게 넘어갔다.

이완용에 버금가는 ‘매국노’ 송병준이 조선일보 인수

1858년 8월 함경남도 장진에서 태어난 송병준은 1895년 개성 인삼을 다량 밀매해서 일본으로 건너가 노다 헤이지로로 행세하면서 일본 정치인과 명사들을 만나면서 인맥을 넓힌 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병참감 육군 소장 오타니 기쿠조를 따라 귀국해서 경성군사령부에서 고등 통역으로 일하다가 일본군과 함께 청국까지 종군했다. 그는 1907년 2월 일본으로 가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만났고, 5월에 박제순 내각이 사직하자 “황제의 의사에 반하고 통감의 지도를 좇아 제정(諸政)을 개혁할 자”라면서 이완용을 이토에게 천거했다. 이완용 내각이 성립되자 송병준은 이토의 추천으로 농상공부대신에 임명되어 광산국 총재를 겸했다. 그는 헤이그특사사건과 관련해서 고종에게 일본에 사죄하라고 강요하는 한편 어전회의에서 이완용과 함께 양위(讓位)를 주장하면서 강제 퇴위에 앞장섰다. 송병준은 이완용(총리대신) 등과 함께 정미조약(한일신협약) 체결에 동조해서 ‘정미7적’으로 지탄받았다. 1908년 내부대신에 임명되었고, 1909년 2월에는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에게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는 대가로 1억 엔을 요구했다. 이런 송병준을 당시 독립운동가들과 뜻있는 백성들은 ‘매국노’라고 불렀다.

송병준은 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고, 같은 달 7일에는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9년 3 · 1운동 뒤 그는 정무총감이 되려고 도쿄 중앙 정계에서 운동을 벌이는 한편, 수상 하라 다카시에게 식민통치에 협력한 공로로 일본 홋카이도에 막대한 토지를 불하해 달라고 요구했다. 1920년 11월에는 ‘팽배하는 불온사상의 타파’를 목적으로 전국에 총상협회(總商協會)를 조직해서 총재를 맡았다. 같은 해 12월에는 백작으로 특별 승작했는데, 수작자로서 승작한 인물은 백작에서 후작이 된 이완용과 함께 두 명밖에 없었다. 송병준은 1921년 4월 중추원 관제가 개정되면서 중추원의 친임관 대우 고문에 임명되어 1925년 2월 사망할 때까지 한 차례 연임하면서 매년 3천 원의 수당을 받았다(〈친일인명사전〉 「인명편 2」, 335~337쪽).

송병준은 일제가 보기에는 이완용 다음 가는 친일파로서 ‘천황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조선일보의 판권을 인수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사주(社主)인 송병준은 아들 종헌에게 신문사 경영을 맡기고 남궁훈을 사장으로 내세운 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일했던 선우일을 편집국장 자리에 앉혔다. 〈조선일보 50년사〉(조선일보 사사편찬위원회, 1970)에는 당시 상황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1921년 4월 8일에 송병준이 경영을 맡게 되자 전 〈황성신문〉의 간부요 민족운동 지도자인 남궁훈을 사장으로 하고 송병준 계열의 인물인 선우일을 편집국장으로 임명하였으나 남궁훈 사장의 적극적인 제작 참여로 사장과 국장 사이에 사상적인 알력이 생겼고 이에 선우일을 해임, 청년 문사(文士)이던 염상섭을 후임 편집국장으로 기용했다.

남궁훈 사장은 〈조선일보〉의 발전을 꾀해 1921년 11월 2일 윤전기를 구입, 평판(平板)인 쇄에서 탈피했고, 1922년 4월 20일자 창간 2주년 기념호로 그 약진상을 보였으며, 그해 5 월 16일부터는 선명한 신활자를 사용했다. 또 9월 21일부터는 연중 무휴간제(無休刊制)를 채택했다.

남궁훈 사장은 사옥 바로 뒤 한옥을 사저로 하여 그곳에 기거하면서 낱낱이 신문 대장(臺 帳)을 요 위에 앉아 점검하는 열성을 보였다(277~278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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