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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직후 조선일보의 변신(1)- 조선일보 대해부 3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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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9.0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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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 5일 경성(京城)의 기온은 영하 6.1도까지 떨어져 쌀쌀했다. 최고 풍속 초속 7.8 미터의 매서운 바람마저 불었다. 이 겨울 같은 봄날 해질 무렵, 시내 곳곳에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인쇄기에서 막 쏟아져 나온 조선일보 창간호를 받아든 배달원 들이 신문을 배달하는 소리였다. 배달원들은 앞뒤로 방울 달린 저고리를 입고 이곳저곳을 뛰 어다녔다.

“조선일보 창간이요! 조선일보 나왔습니다.”

시내 곳곳에 울린 방울소리는 ‘언론 암흑’을 깨고 우리 신문 조선일보가 처음으로 나왔음을 온 민족에게 알리는 소리였다. (…)

1919년 3·1운동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단 신문의 창간은 당 시 조선 민중에게는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한 대사건이었다. 10년 만의 ‘민족신문’ 조선일보에 대한 호응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지령 3호에 실린 사고(社告)에 따르면 “구독 신청이 밀려들 어와 수만의 부수를 찍어내고도 부족”할 정도였다. 법정 창간 시한을 넘기지 않으려고 인쇄 시설도 갖추지 못한 채 서둘러 창간했던 조선일보는 예상을 넘어서는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 을 인쇄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어 부득이 제3호까지만 내고 일시 휴간에 들어가야 했을 정도 였다(<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13~14쪽).

‘민족신문’ 조선일보에 대한 호응이 뜨거웠다는 것은 조선일보사의 주장일 뿐 현실이 그렇 지 않았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친일단체인 대정친목회를 이끌던 예종석과 조진태의 실체를 명확히 아는 조선 민중이라면 그런 반응을 보였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창간호는 현재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1923년 6월 6일 발행한 조선일보 지령 1000호의 기념부록 ‘천호일람(千號一覽)’에는 창간 이래 1000호까지의 주요 기사들 제목이 들어 있어 창간호의 내용을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창간호 1면 머리기사는 논설 「조선일보가 탄생하다」였으며, 조선일보는 창간호 부터 「동양 고대와 해상교통」을 비롯해 조선 무역을 분석한 「‘조선무역상(朝鮮貿易狀)」과 관해생(觀海生)의 소설 <춘몽(春夢)> 등 의욕적인 연재를 시작했다.

창간호는 현재의 신문 크기와 같은 배대판(倍大版)이었으며, 총 16면을 발행했다. (…) 3월 7일자로 낸 조선일보 제2호 역시 전해지지 않으며 1920년 3월 9일 발행한 지령 3호가 현 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조선일보다. 4면을 발행한 지령 3호에는 특히 조선의 동전 그림들 을 바탕으로 깐 2단 통단 컷을 지면 상단으로 올리고 ‘창간기념호(創刊紀念號)’라고 장식했 다. 주화들은 ‘조선통보(朝鮮通寶)’, ‘동국중보(東國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모두 ‘우리나 라를 지칭했던 이름의 화폐’다(같은 책, 21~22쪽).

창간기념호의 머리기사 제목은 「실업(實業)의 (實地)」인데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

조선 5백년 실업이 미발달하였다 위(謂)하여도 현상(現狀)의 실업보다는 십분 우승(優勝)한 바이요 현상 수십년래 실업이 극발달하였다 위하여도 5백년 유래의 실업보다는 십분 쇠퇴한 바이라 하노니 하이연야(何而然也, 무슨 까닭인가)오. 5백년 유래의 실업은 실지가 유(有)하 다 함이요 현상 수십년래의 실업은 실지가 무(無)하다 위함이라.

조선일보의 창간기념호에는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 정치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1면 머리기사는 시종일관 ‘조선 5백년 시기보다 낙후된 실업’을 한탄하며 ‘실업 발달’을 위해 힘써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발행인 예종석과 사장 조진태가 이끌던 대정친목회의 원래 이름이 대정실업친목회였음에 비추어보면 친일파가 주도하는 조선일보가 창간기념호부터 그런 논조를 펼친 것은 이상할 바가 전혀 없다. 조선일보 4호는 휴간된 지 53일 뒤인 4월 28일에 나왔다. 자금난과 인쇄시설 미비 때문에 두 달 가까이나 신문을 발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민간지 최초로 압수당한 조선일보

(···) 4호에 실린 기사 때문에 총독부는 조선일보를 압수했다. 「이 왕세자(王世子) 전하와 방자(方子) 여왕의 가례(嘉禮)를 동경에서 거행하다」라는 제목의 그 기사는 조선 왕실 왕세 자 이은(李垠)과 일본 왕족 이본궁방자(梨本宮方子)의 혼례를 다룬 내용이었다. “이에 곁들 여 이은과 먼저 혼약이 있었던 명성황후 민비 문중 민 규수의 스토리를 취재해 일본의 정략 결혼 정책에 의해 강제 파혼된 사연을 보도한 것이 검열에 걸린 것이다(같은 책, 28쪽).

명성황후 문중 사람인 민 규수는 1904년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이은과 혼약을 맺었으나 일제의 정략결혼 정책 때문에 파혼을 당한 여성이었다. 조선일보가 속간되던 날인 4월 28일이 이은과 이본궁방자의 혼례일이었기 때문에 총독부는 강압적 결혼에 대한 조선 민중 의 반발을 우려해서 조선일보를 압수했을 것이다. 압수당한 뒤 휴간했던 조선일보는 5월 9 일에 5 를 내면서 정상 발간에 들어갔다. 그러나 5월 17일자(13호)에 실린 논설 「감옥과 유 치장제도 개선의 급무(急務)」 때문에 다시 압수를 당했다. 이 논설은 “일본 경찰들이 죄 없 는 백성들까지 마구 체포해 무자비하고 가혹하게 다룬다며, 백성을 죽이려는 감옥과 유치장 을 때려부수라”라고 주장하면서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러시아의 감옥과 인도(人道)를 갈파 한 사실 등을 인용하는 등 해박한 문학적·인문학적 지식을 동원하며 “인도와 정의는 영원무 궁하고, 민족정신은 혈액 속에 간단없이 흘러넘침을 생각하라”고 결론 맺고 있다. 이 논설 은 ‘총 독부 당국을 경악시키는 신문’으로 조선일보의 인상을 부각시켰다”(같은 책, 29 쪽).

조선일보는 창간 이후 5월 30일까지 26호를 내면서 5번 압수를 겪었다.

조선일보사는 1920년 6월 초순 창간 이래 가장 큰 시련에 부닥쳤다. 6월 1일부터 10일까지 연재된 기획물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등」 때문이었다. 지금 보존되어 있는 6월 8일자에 실린 기획물 8회는 제목부터 거창했다.

조선민족의 민족적 불평! / 골수에 심각(深刻)된 대혈한(大血恨)의 진수 /하고(何故)로 철 저하게 죽이려고만 / 그것이 조선통치의 정신이냐 /조선통치의 대각성을 촉(促)함

조선민족이 스스로 눈물을 흘리며 지내온 역사를 돌아볼 때에 심장에 뛰노는 더운 피가 슬 픔의 노래를 부르짖지 아니치 못하며 뼈가 저리지 아니치 못한다. 더욱이 분하고 원통한 것은 일본사람의 야비한 발라맞춤이다. 그들은 머리에 동화(同化)라는 탈바가지를 쓰고 손 목에 부드럽고 따뜻한 동정의 피를 발라 교묘한 수단으로 조선 사람들을 후리어다가 악마 의 굴에 잡아놓고 만다. 마치 교묘한 매춘부가 거짓 눈물을 흘리며 “영감, 살려주시오” 하듯이 그들은 꼭 그와 같은 야비한 수단을 쓰나니 그 실체의 증거를 알고자 하는 일본사 람들이여. 참으로 알고자 하거든 질문하기를 꺼리지 말아라. (…) 2천만 조선민족이 한꺼번 에 부르짖는 것은 철저하게 하라 함이다. 살살 발라맞추지만 말고 아주 끝에 끝까지 참말 로 하여 달라 함이다. (…) 경찰제도의 개혁이 있고부터 민중은 괴로운 부르짖음을 부르짖 기 시작하였으며 태형(笞刑)이 폐지되고부터 일반죄수의 학대가 더 심하여진 것은 사실이 능히 증명하는 바이라.

6월 9일자에 실린 연재 기획물 9회(「일본 군국주의와 조선족」)는 ‘왜놈’이라는 용어를 쓰면 서 “총과 칼로써 조선민족을 죽이려 한다”고 일제를 비판했다.

이 시리즈 기사로 총독부는 발칵 뒤집혔다. 연재는 6월 10일, 10회 만에 중지됐다. 총독 부는 이 기사의 책임을 물어 조선일보의 사장, 부사장 등 경영진의 경질과 그들이 지목하 는 항일 기자의 퇴사를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이틀 후인 6월 12일 부사장 겸 발행인 예 종석이 취임 3개월 7일 만에 총독부의 압력을 받아 퇴임하기로 결정했다. 기사 문제로 총 독부의 압력을 받아 민간지 간부가 퇴사한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같은 책, 31쪽).

그 연재 기획물을 쓴 기자 최국현과 방한민도 총독부의 압력 때문에 조선일보사를 떠났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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