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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일 변호사 준비서면(참고서면) 재판부 제출정영일 변호사 준비서면(참고서면) 재판부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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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7.0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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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비 서 면(참고서면)

사건 : 2009가합142103호 손해배상(기)등

원고 : 고 준 환 외 132

피고 : 대 한 민 국

위 사건에 관하여 원고들 소송대리인은 다음과 같이 변론합니다.

다 음

1. 피고의 시효 관련 주장 요약

피고는, 이사건의 경우 피고가 그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한 동아일보사에 대한 광고탄압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그 사실을 은폐․조작한 사실이 없으며, 또한 광고탄압사건 이후 대통령을 역임한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가 원고들이 농성하는 장소에까지 와서 격려를 하였다면 최소한 이사건의 진상을 잘 아는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이사건과 같은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하므로 원고들의 소멸시효 배제 주장은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피고의 주장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같이 그간의 사정과 원고들의 끈질긴 진실규명 노력을 도외시한 억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동아일보사에 대한 해고무효소송 제기

가. 이사건으로 해고된 원고등 동아일보사의 기자, PD, 아나운서들(이하 “원고등”이라고만 합니다)은 해고된 직후인 1975. 6.경 해고의 직접 당사자인 동아일보사를 상대로 해고무효확인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을제3호증의 1, 2).

이 소송에서 원고등을 위해 무료변론을 해준 인권변호사들(황인철, 홍성우, 김재형 등)은 이사건 대량해고는 1974. 12.경부터 발생한 동아일보, 동아방송의 광고해약사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권력에 의한 광고탄압에 굴복하여 광고를 다시 얻기 위해 원고등을 해고하게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사건 대량해고의 과정은 배후에서 은밀하게 진행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원고등은 물론 원고측 변호인들도 심증뿐 이를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객관적 증거도 제출할 수 없었습니다.

나. 2008년의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에 의하면, 당시 “유신정권은 동아일보사의 광고주들을 중앙정보부 남산분실로 불러 광고계약을 취소케 하고, 광고를 게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및 보안각서를 쓰게 하여 광고 수주를 차단하는 방법으로 동아일보사를 탄압하였고, 중앙정보부와 문화공보부 등은 자유언론 실천을 주장하는 기자들을 해임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체적․객관적 사실과 경위는 2005년 제정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에 따라 설치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비로소 공식적으로 규명되게된 것이지, 그 이전에는 누구도 이사건의 구체적인 진상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 동아일보사를 상대로 한 위 소송에서 원고등은 당초의 예상대로 1, 2, 3심 모두 패소했습니다.

피고 소송대리인이 이사건에서 증거로 제출한 을제3호증의 1, 2는 그 소송의 항소심 및 상고심의 각 판결입니다.

그 판결을 일별해 보면, 이사건 대량해고의 원인이 된 유신정권의 광고탄압에 관하여는 아무런 심리․판단도 하지 않은채, 이사건이 마치 동아일보사 “경영주와 종업원들”간의 노사간 분쟁에 불과한듯 회사에 대한 기자들의 항의행위만을 장황하게 부각시켜 대량해고를 정당화하기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광고탄압과 관련해서는 단 한 줄, 즉 “1974. 12. 하순 피고회사 수입의 약 56%를 이루는 신문 및 방송광고의 해약과 계약중단 사태라는 천만뜻밖의 사태에 직면하여 피고회사는 그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되었으므로”라는 언급이 있을뿐, 광고해약사태의 원인 및 실상에 관하여는 일언반구의 언급조차 없습니다(을제3호증의 2 제2면 참조).

동아일보사가 “천만뜻밖의 광고해약사태”에 직면하여 경영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기자들을 해고하게 된 것이라면, 당연히 그 원인이 된 광고해약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기자들은 무엇에 대해 그토록 항거하였는지에 관하여 심리 및 판단이 선행되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소송의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1979. 1. 30. 이후 이 확정판결은 원고등에게 족쇄가 되었습니다.

정치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원고등이 동아일보사에 복직 요구를 했을 때에도 이 판결이 방패막이가 되었고, 이후 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원고등의 노력에도 이 판결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3. 원고등의 진상규명 노력

가. 동아투위 결성과 군사정권 하의 복직운동

(1) 원고등은 해고된 직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후 ‘동아투위’라고 불렀습니다)를 결성하고, 이후 수년 동안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 길거리에서 집회와 시위를 계속하면서, 소식지와 성명서를 만들어 각계에 배포하고 책자를 발간하는등 복직과 진상규명을 위해 각종 운동을 벌였습니다(참고자료 1 각 사진).

그러나 유신정권의 언론통제로 원고등의 복직운동과 진상규명 요구는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못했습니다.

1975. 3. 17. 원고등이 해고되어 축출되던 날 몇몇 일간지에 간략한 사실보도만 있었을뿐 그후 군사정권이 종식될 때까지 어느 신문․방송에도 원고등의 복직운동에 관하여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원고등은 광화문 네거리를 떠도는 유령들로서 ‘복직시켜라’, ‘진상을 밝혀라’고 아무리 외쳐도 메아리가 없었습니다.

(2) 원고등이 해고된지 약 4년만인 1979. 10.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고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았을 때 원고등은 한동안 복직의 희망에 들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전두환의 신군부는 1980. 11. 강제적인 언론통폐합 조치를 단행하여 이 과정에서 무려 900여명의 해직언론인이 새로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3) 그후 1988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져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원고등은 80년 해직언론인들 등과 연대하여 복직 및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1989. 2. 10. 원고등의 동아투위와 조선투위(75년 조선일보 해직기자들이 결성한 단체),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는 언론노동조합연맹, 한국기자협회,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등 언론단체들과 공동으로 군사정권하에서 강제해직된 1,000명이 넘는 언론인들의 원상회복과 피해배상을 위한 공동대책기구로서 ‘전국 해직언론인 원상회복쟁취협의회’(약칭 ‘원상협’)를 결성하고, 이어 1989. 2. 22. 해직언론인 원상회복 실천대회를 개최하여 75년과 80년의 언론인 대량해직은 원인무효임을 선언하는 한편 정부당국의 진상규명을 촉구했습니다(참고자료 2, 3 참조).

(4) 노태우 정권 출범후 야당의 주도로 국회에서 이른바 ‘5공청문회’가 개최되어, 1980년 전두환 정권하의 언론통폐합조치와 이에 따른 언론인 강제해직에 관하여는 그 진상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1975년 박정희의 유신정권하에서 일어난 원고등의 강제해고는 국회 청문회에서도 다루어지지 못했습니다.

80년의 언론통폐합 및 언론인 강제해직은 정권의 주도하에 공공연히 이루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진상규명도 상대적으로 용이했으나, 75년 원고등의 강제해직은 배후의 밀실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으로서 표면상 해고의 당사자는 동아일보사이기 때문에 진상규명이 쉽지 않았습니다.

설사 청문회가 열려 관련자를 불러냈다고 해도 모른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었습니다.

노태우 정권은 태생적으로 군사정권의 연장으로서 박정희의 유신정권하에서 일어난 이사건에 대해서까지 진상을 규명할 의지나 성의가 없었고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5) 한편 원고등은 그동안 직접 동아일보사에 대해 복직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동아일보사측은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내세워 철저한 무시로 일관했습니다.

직선제 개헌으로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이사건의 진상이 규명되기 전에는 달리 동아일보사에 대해 원고등의 복직을 강제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나. 김영삼․김대중 정권하의 진상규명 노력

(1) 1993. 2.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권이 출범하자 원고등은 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복직 및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한 사람의 뜻이나 심증만으로 사건의 진상이 규명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와 같이 유신정권(중앙정보부)이 동아일보사의 광고주들을 중앙정보부 남산분실로 불러 동아일보․동아방송에 광고를 내지 못하도록 강요한 일이나, 동아일보사 김상만 사장에게 광고 재개의 조건으로 문제 언론인들을 해고하고 신문 논조를 바꾸도록 압력을 가한 일은 모두 공개적으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배후의 밀실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이사건의 진상규명은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기구가 설치되어 수사에 준하는 강제적인 조사권이 발동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근거가 될 특별입법이 필요했습니다.

(2) 1993. 4.경 원고등 75년 해직언론인과 80년 해직언론인들의 원상회복, 진상규명 및 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청원이 국회에 제출되었습니다.

이 청원은 권영길 언론노동조합연맹위원장을 대표로 하고 전국의 현직 언론인 5,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되었는데, 74년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과 75년 원고등의 강제해고에 대한 진상규명 요청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참고자료 4, 5 참조).

그 무렵 오인환 공보처장관도 국회 답변에서 “해직언론인 복직문제는 해직자와 해당 언론사 간의 문제이나 정부가 조정역할을 할 수도 있다”, “곧 해직언론인 대표를 만나겠다”고 밝혔습니다(참고자료 6 참조).

(3) 그러나 국회에 제출된 청원은 국회의원들의 무성의와 동아일보 등 보수언론의 집요한 방해로 인해 접수만 된채 아무런 성과없이 방치되었습니다(원상회복을 위한 특별법안은 결국 회기를 넘겨 자동폐지 되었습니다).

김영삼 정부도 점차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발을 빼기 시작했습니다.

해직언론인의 복직을 정부가 중재하겠다고 국회에서 답변했던 오인환 공보처장관은, 그후 ‘원상협’ 대표가 방문하여 75년 및 80년 해직언론인의 원상회복과 진상규명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요청하자, “당시 해직언론인들의 언론민주화 투쟁이 문민정부 수립에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김대통령도 생각을 같이 하고 있으나, ‘진상규명’의 문제는 결과적으로 언론사 내부의 가해자를 밝히게 돼 갈등과 반목의 악순환을 되풀이할 우려가 있다”고 하면서, “대승적 차원에서 진상규명은 역사에 맡기자”고 말했습니다(참고자료 7 참조).

정부도 동아일보등 보수언론의 저항을 받고 그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참고자료 8 참조).

(4) 정치민주화로 정부의 언론통제력은 약화된 반면, 동아일보․조선일보등 보수언론의 힘은 어느 때보다도 강화되고 권력화 되었습니다.

오인환 장관이 언론인 해직사건의 진상이 규명되면 해직 당시 언론사 내부에서 정부(중앙정보부)와 통모하고 협력한 ‘내부 가해자’가 밝혀져 갈등과 반목의 악순환이 되풀이될 우려가 있으니 진상규명은 역사에 맡기자고 한 것은 바로 동아일보등 보수언론이 정부를 설득하기 위한 설득 논리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75년 언론인 강제해고의 진상규명 문제는 정치인들의 이해타산과 보수언론의 저항 및 방해로 인해 김영삼 정권 내내 한발짝도 진전되지 못하였고, 이러한 사정은 다음에 오는 김대중 정권 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 1998. 2.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자 원고등은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복직 및 진상규명을 위한 조치를 촉구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본인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여러 참모들도 오랜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원고등의 강제해고 경위 및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집권 초기의 장담과는 달리 정권이 끝날 때까지 원고등의 복직 및 진상규명을 위해 반복된 립 서비스 빼고는 어떠한 실효성 있는 조치도 취해 주지 못했습니다.

(6) 김대중 정부의 첫 문공부장관이었던 박지원 장관(현 민주당 원내대표)은 원고등을 만날 때마다 자기들이 책임지고 75년 동아일보사태의 진상을 밝혀 원고등을 명예회복시켜 주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밤이면 동아․조선․중앙 3대 신문의 편집국장과 기자들을 찾아 술자리를 전전하기에 바빴습니다.

조․중․동의 보수언론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언론권력을 구축하여, 순탄하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의 협조를 구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 과거사정리기본법 제정과 진상규명

(1) 2003. 2.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게 되자 원고등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대통령이 취임하기도 전인 2003. 2. 10.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언론개혁제안서’를 제출하여 75년 동아일보사태의 진상규명을 촉구했습니다(참고자료 9 참조).

원고등은 김영삼․김대중 집권 10년 동안 정치인들의 립 서비스만을 믿고 허송세월하다가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하였음을 반성하고, 이번에는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시안도 마련했습니다(참고자료 10 참조).

(2) 그러나 정권 초기 보수언론을 필두로 한 보수세력의 저항으로 대통령 탄핵사태가 벌어지면서 특별법 시안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가, 2004. 4. 헌법재판소의 탄핵사건 결정이 있은후 11. 1. 열린우리당 김재홍 의원등 국회의원 17명의 서명을 받아 그들의 발의로 ‘해방이후 언론탄압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및 배상에관한 특별법안’이 국회에 제출되게 되었습니다(참고자료 11 참조).

그 무렵인 2004. 10. 재야인사 101명은 ‘유신치하 언론탄압 진상규명 및 피해보상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참고자료 12 참조).

(3) 이러한 여론과 노무현 정권의 과거사 정리에 대한 적극적 의지가 한데 어울려 특별법 제정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끝에 2005. 5. 3. 국회에서 여․야 합의에 따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어 2005. 12. 1. 공포․시행되고, 이에 근거하여 2006년부터 진실화해위원회의 본격적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과거사정리기본법에 의하면 진실화해위원회는 국회가 선출하는 8인, 대통령이 지명하는 4인,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 등 15인으로 구성되고(제4조), 위원의 직무상 독립과 신분이 보장되며(제8조), 진실규명 조사방법으로 형사소송법상의 수사에 준하는 절차․방법이 적용되고(제23조), 결정적 증거자료를 보유하거나 정보를 가진 자가 정당한 이유없이 3회 이상 출석요구에 응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위원회의 의결로 동행명령장을 발부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제24조).

(4) 그리하여 진실화해위원회가 위 법에 따라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개시하여 약 2년간에 걸친 조사 끝에 이사건의 구체적인 진상을 규명하여 2008. 11. 4. 원고등에게 조사결정 통지를 했습니다.

이로써 33년만에 비로소 이사건의 진상이 대강이나마 공식적으로 규명되게 된 것입니다.

라. 미국 정부 기밀문서에서 찾아낸 단서

(1) 한편 원고등은 미국 정부 쪽에 있을지도 모르는 기밀 문서자료에도 주목했습니다.

1974. 12.부터의 광고탄압과 1975. 3.의 강제해고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과 미국 문화원(USIS), CIA 한국지부 등이 당시의 한국 정치상황에 관하여 본국 정부에 보고한 비밀 정보보고 중에 이사건의 진상에 관한 단서가 있으리라고 보고 30년간인 기밀해제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하여 1975년 이후 30년이 경과한 2006년경부터 미국 정부문서기록보관청(NARA)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정부 기밀해제 문서들을 뒤진 끝에 2009. 1.경 몇 조각의 관련 문서를 찾아냈습니다(이 작업은 미국에 거주하는 원고 30. 서권석이 담당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갑제42호증의 2, 3, 4로 제출된 각 보고문(Message Text)입니다.

(2) 그 자료중 1975. 2. 28.(원고등이 해고되기 전입니다) 스나이더 미국대사가 미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보고문을 보면, “김종필 총리는 본 대사와 면담에서, 동아일보는 정부의 판단으로 볼 때 너무 멀리 갔지만,...... 현재 동아일보는 자체 영향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으며, 신문 제작 정책을 완화하기 위한 이니셔티브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 김총리는 동아일보 김상만 발행인이 신문을 개혁하기 위한 자체 계획을 발전시켜 왔으며, 그 계획이 곧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총리는 그 개혁이 3월 중순까지 완료될 것이며, 동아일보는 정부에 대해 배타적으로 비판적이기 보다는 좀 더 중립적인 정책을 채택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 결과는 광고의 복귀일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원고등이 강제 축출된 1975. 3. 17. 그날 미국대사관(아마 CIA 직원인듯)이 미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보고문을 보면, “신문 보도들은 파업 분쇄자들이 동아일보 판매자들과 보급소 직원들이라고 주장했으나, 군사 소식통들은 이들이 매우 잘 훈련돼 있었다고 보고했고, 그들중 최소한 일부는 실제로 사복 경찰인 것으로 믿어진다,” “한국정부 관리는 중앙정보부 소식통을 인용하여 본 대사관 직원에게, 김종필 총리가 중개인을 통해 동아일보 김상만 발행인에게 말을 전했는데, 정부가 주요 말썽꾸러기들로 간주하고 있는 기자노조 지도자들을 김상만 발행인이 제거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정부도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거부(탄압)를 철회하고 보도와 논설 등 동아일보의 논조에 간섭하는 것을 삼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비밀 보고문에 의하더라도 동아일보 광고탄압의 배후세력은 정부(중앙정보부)이고, 동아일보사(김상만 사장)는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정부가 지목하는 원고등을 강제해고하고 신문․방송의 논조를 순화함으로써 끊어진 광고를 다시 얻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종필 총리가 말했다는 “3월 중순까지 완료될 동아일보의 개혁”이란 바로 75년 3월에 단행된 원고등의 해고 및 축출을 의미함이 명백하고, 김종필 총리는 이를 75년 2월 중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3) 또한 그 자료중 1975. 7. 16. 스나이더 미국대사가 미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보고문을 보면 “미국공보원(USIS) 소식통에 의하면 동아일보에 대한 유료 광고가 이번 주말이나 내주 초에 재개될 것이다,” “동아일보사 공무국 직원들은 이번 달에 150%의 보너스를 받을 것이라는 통고를 받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1975. 9. 17. 미국대사관이 워싱턴 미국공보원에 보낸 보고문을 보면, 동아일보 김상만 사장은 4색도 윤전기를 구매하기 위해 10. 1.부터 10. 24.까지 미국을 방문할 계획인데, 자신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고 싶은 열망을 강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동아일보사가 광고탄압이 해제된 바로 그달 직원들에게 150%의 보너스를 지급하고, 그해 10월경에 김상만 사장이 4색도 윤전기(윤전기는 신문사의 재산목록 제1호입니다)를 구매하러 미국에 간데다 자신의 언론 노출을 극력 회피했다는 것은 당연히 의혹을 불러일으킵니다.

정부의 광고탄압으로 7개월 동안 광고료 수입(동아일보사 총수입의 56%를 차지하였습니다)을 잃은 동아일보사가 광고탄압이 끝나자마자 무슨 자금으로 직원들에게 150%의 보너스를 지급하고 거액의 윤전기를 구입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광고탄압 해제 당시 언론가에서는 동아일보사가 원고등을 해고 축출하고 신문의 논조를 순화하는 대신, 정부는 그동안의 광고탄압으로 동아일보사가 상실한 광고수입을 보상하기 위해 거액의 자금지원을 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진실일 가능성이 크지만 진실화해위원회도 이에 대해서는 규명하지 못했습니다.

3. 결론

가. 피고는 원고등이 최소한 ‘김영삼 정부 및 김대중 정부 등 민주화 정권이 들어선 시점’에서는 이미 이사건과 같은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사건의 진상은 2005년에 제정된 과거사정리기본법에 따른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의해 비로소 공식적으로 규명되게 된 것이며, 그 이전에는 누구도 이사건의 구체적인 진상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 원고등은 이사건 광고탄압 당시 그것이 유신정권(중앙정보부)에 의해 배후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다는데 대한 심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원고등에 대한 강제해고도 동아일보사(김상만 사장)가 유신정권의 압력에 굴복하여 광고를 다시 얻기 위해서 하는 행위라고 짐작하였지만, 이러한 심증이나 짐작을 뒷받침할만한 객관적 증거를 도저히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김종필 국무총리는 1975. 2. 6. 외신기자 회견에서 ‘동아사태는 확실히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면서 혐의를 적극 부인했고,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고위급 인사나 중앙정보부(현재의 국가정보원)가 이사건에 개입하였음을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시인한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한편 동아일보사는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사건 대량해고는 정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회사의 경영난과 기자 등 언론인의 해사행위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배후세력에 대해 줄곧 부인해오고 있습니다.

다. 이와같이 정부(중앙정보부)와 동아일보사(김상만 사장)가 모두 진상을 은폐하고 혐의를 적극 부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밀실에서 은밀하게 진행된 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기구가 설치되어 수사에 준하는 강제적인 조사권이 발동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지, 그러기 전에는 진상규명이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 그와같은 조사권 발동을 위해서는 특별 입법이 긴요했습니다.

그리하여 원고등은 위에서 자세히 본대로 지난 30여년 동안 정권이 바뀔때마다 정부에 대해 이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또 국회에 거듭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입법청원을 하는등 끈질긴 진상규명 노력 끝에 2008년에 이르러서야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얻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30년을 기다린 끝에 2009. 1. 기밀해제된 미국 정부문서 속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고등은 이러한 증거를 확보하자마자 지체없이 이사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라. 끝으로 한 가지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원고등이 1974. 3.에 설립한 ‘기자노조’란 노동법상의 노동조합이 아니라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언론자유운동을 벌이기 위한 하나의 언론운동 단체에 불과하였다는 점입니다.

노조설립후 관할 서울시에 설립신고를 했지만 서울시는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설립신고서를 반려함으로써 노동법상의 노동조합으로 성립되지도 못했고, 그후 원고등이 해고되기까지 노동조합 본연의 활동을 한 바도 전혀 없었습니다.

참 고 자 료

1. 각 사진

2. 기자협회보 (1989. 2. 10)

3. 〃 (1989. 2. 17)

4. 〃 (1993. 4. 29)

5. 청원서 (1993. 4)

6. 기자협회보 (1993. 5. 7)

7. 〃 (1993. 5. 27)

8. 언론노보 (1993. 10. 30)

9. 미디어오늘 (2003. 2. 15)

10. 프레시안 (2004. 7. 27)

11. 해방이후언론탄압에대한진상규명과 피해자명예회복 및 배상에 관한

특별법안(2004. 11. 1)

12. 특별법 제정 촉구 성명서(2004. 10)

2010. 11. .

원고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새시대

담당변호사 정 영 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6민사부 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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