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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눈물, 〈겨울여행〉[클래식 비타민]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ㆍ전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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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1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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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얼어붙은 시절이 있었다. ‘갑’들의 막말, 구조화된 폭력 속에 세상은 분노와 증오와 원망으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폭발의 임계점에 얼어붙은 채 가까스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다. 탄핵과 파면, 새 정부 출범…. 그리고 다시 추위가 왔다.

차디찬 겨울밤, 슈베르트는 홀로 여행을 떠난다. “홀로 왔던 길을 이제 홀로 떠나네. 꽃 만발한 5월 그녀와 사랑을 다짐했지만 이젠 캄캄한 세상, 눈 덮인 길 뿐…. 잘자요, 그녀 유리창에 써 놓고 꿈 깨지 말라고 조용히 떠나네.” 슈베르트(1797~1828)가 죽음을 1년 앞두고 작곡한 〈겨울여행〉은 사랑하는 그녀와의 작별로 시작한다.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유리창에 ‘잘 자요’(Gute Nacht), 인사를 써 놓고 조용히 떠난다. 첫 곡, ‘밤인사’다.



흔히 〈겨울나그네〉로 번역돼 온 〈겨울여행〉(Winterreise)은 빌헬름 뮐러(1794~1827)가 쓴 24편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이다. 이 겨울에 아예 세상을 떠나려는 걸까? 자신도 알 수 없다. 여리고 섬세한 그의 감성은 험악한 세상을 견디기가 어렵다. 가난한 그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돌아올 계획도 없고 목적지도 없다. 눈 덮인 길을 가는데, 눈물이 자꾸 흘러서 얼어붙는다. 3번째 곡 ‘얼어붙은 눈물’이다(링크 08:23).

▲ 슈베르트 〈겨울여행〉 유튜브 검색어 Winterreise Bostridge 노래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 피아노 줄리어스 드레이크

아무리 추워도 봄을 꿈꾸는 게 인간인가. 〈겨울여행〉 중 5번째 곡 ‘보리수’다(링크 13:53). “마을 입구 우물가의 보리수, 그늘 아래서 단꿈을 꾸었지. 나무줄기에 사랑의 말을 새겼었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이 나무 아래….” 그러나 꿈 깨어 둘러보니 세상은 어둡다. “지금은 깊은 밤의 고요 속에 그 곁을 지나야 하지, 캄캄한 어둠 속에 두 눈을 감네….”

6번째 곡 ‘홍수’(링크 22:47)가 이어진다. 보리수 아래서 잠시 꿈을 꾸고 나니 더 슬퍼진 걸까. 눈물이 다시 흐르더니 마침내 홍수가 된다. 의식이 혼미해진다. 그녀와의 사랑을 회상하고, 깊은 골짜기에서 춤추는 도깨비불의 환상을 본다. 평정을 되찾고 다시 봄을 꿈꾼다. 11번째 곡 ‘봄의 꿈’이다(링크 33:59). “꿈속에서 아름다운 5월의 꽃을 보았네. 닭소리에 잠을 깨니 어두운 지붕위에 까마귀가 울고 있네. 눈을 감으니 아직도 가슴이 뛰고 있네. 내 잎새 언제 다시 푸르러져 그녀를 껴안을 수 있을까.”

정처 없는 〈겨울여행〉의 막바지, 슈베르트는 마을 변두리에서 ‘거리의 악사’를 발견한다(링크 1:08:51). “곱은 손으로 손풍금을 타는 늙은 악사, 듣는 이 보는 이 아무도 없고 개들만 늙은 악사를 쫓아다니네.” 슈베르트는 이 마지막 곡에서 늙은 ‘거리의 악사’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슈베르트가 이 곡을 작곡한 1827년, 작사자 뮐러는 33살로 세상을 떠났고, 슈베르트 자신도 이듬해 31살로 세상을 떠났다. 슈베르트는 뮐러의 시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겨울여행〉은 슈베르트의 ‘방랑자 의식’이 가장 짙게 드러난 그의 자화상이다. 

1964년 태어난 영국의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가 뮤직비디오로 만든 〈겨울여행〉은 아름다운 목소리, 섬세한 표현력, 지적인 호소력이 있다. 그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라는 역저를 내놓았다. 30년 동안 100차례가 넘게 이 곡을 부르며 연구해 온 보스트리지의 내공이 가득 담긴 책이다. ‘노래하는 인문학자’로 불리는 그는 음악에 대한 설명과 함께 슈베르트 당시의 역사, 사회, 문화를 통해 〈겨울여행〉의 의미와 예술성을 풀어놓았다.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가 피아니스트 안스네스와 함께 녹음한 슈베르트 〈겨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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