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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5월 언론투쟁기록[13] 해직, 무법천지의 군사법정서 재판, 감옥으로- 경향신문(2) 해직된 우리 86년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 폭로
〈윤덕한 당시 경향신문 외신부 기자〉
  • 관리자
  • 승인 2016.04.0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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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천지의 군사법정, “이놈들을 위증죄로 구속시켜”

기자들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간 지 보름 정도 지난 뒤였다.
남영동 수사 요원 4명이 경향신문과 붙어 있던 당시 문화관광 호텔의 방 2개를 빌려서 편집국 기자들 10여명을 한 명씩 불러내 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미 구속한 6명으로부터 받아낸 진술을 확인하고 보충하는 작업이었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형사 한 명이 대뜸 “너, 박우정이 하고 60번 버스 타고 가면서 고려연방제가 통일의 밑거름이다 라는 말 했지”라고 다그쳤다. 아직은 기자 신분이고 회사 안이나 다름없는 장소인데 존칭도 없이 ‘너’ 였다.

신문사에 입사해서 경찰기자로 5년 이상 사건현장을 누빈 나였다. 형사들의 생리쯤은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은근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터였는데 대뜸 ‘너’라는 말을 듣고 보니 한편으로는 불쾌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찔끔’하는 위압감도 느껴졌다. 동시에 이것이 형사들의 상투적인 수사 기법이라는 것도 감지했다.

내가 반말 비슷한 어투로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자 그는 “임마, 박우정이가 그렇게 진술했는데 네가 왜 부인하는 거야. 부인해 봐야 소용없어”라고 윽박질렀다. 그는 또 “이경일이 하고 어느 술집에서 여럿이 술 마시면서 이경일이가 월남은 망한 것이 아니라 통일된 것이다 라고 하는 말을 들었지”라고 추궁했다. 역시 내가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자 그는 “이 자식, 칠성판을 져 봐야 제대로 얘기를 할 모양이군”하며 금방이라도 남영동으로 끌고 갈 듯한 자세를 보였다. 내가 계속 버티자 그들은 “원래는 너도 구속하려 했지만 사건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기로 해서 너는 봐주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구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협조하라”고 회유했다.

나는 “구속되는 한이 있더라고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이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다면 나와 대질을 시켜 달라. 아니면 그런 말을 했다고 썼다는 자술서를 보여 달라. 그렇지 않고서는 인정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몇 시간을 실랑이 하며 내가 완강하게 나오자 그들은 저희들끼리 뭐라고 수근대더니 남영동에서 이른바 ‘자술서’라는 것을 가지고와 나에게 디밀었다. 자술서는 필적으로 보아 틀림없이 본인들이 쓴 것이었고 내용도 그들이 얘기한 것과 똑 같았다. 나는 고문으로 받아낸 자술서라는 것을 알았지만 자술서를 본 마당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참고인 진술 조서’를 꾸미고 편집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7월 초순인가, 수경사 검찰관이 나와 김충용 선배를 부른다는 연락이 왔다. 제대 후 어느 지검의 공안부 부장검사를 지낸 그 검찰관은 당시 제대를 6개월 정도 남겨둔 육군 대위였다. 수경사 보통군법회의 법정 입구 맞은편의 조사실에서 조서를 훑어보던 그는 나에게 “윤덕한 씨는 왜 구속이 안됐지요”라고 오히려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의 간단한 답변에 이어 신문이 시작되었다. 역시 초점은 ‘월남 통일’과 ‘고려연방제’ 발언에 맞춰졌다. 나는 남영동 형사들이 나의 조서를 꾸밀 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당시 어쩔 수 없이 시인했으나 그런 얘기를 나눈 사실이 없다고 진술했다.

검찰관은 의외로 나의 진술에 대해 반박을 하거나 특정한 진술을 유도 또는 강요하지 않고 그저 내가 밝히는 대로 조서를 작성했다. 조사는 아주 간단히 끝났다. 또다시 없는 사실을 강요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하던 나는 아주 가벼운 기분으로 김충용 선배와 함께 회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며칠 후에 검찰관이 다시 우리를 부른다는 통지가 왔다.

이번에는 분위기가 지난번과는 사뭇 달랐다. 아주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월남 통일’과 ‘고려연방제’ 발언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진술은 ‘위’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나와 김충용 선배는 지난번 진술을 되풀이했다. 검찰관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대로 조서를 작성했다.

그 후 7월 하순 쯤, 회사에서 해직당하고 집에 있는데 또다시 검찰관의 출두 통보가 날아왔다. 수경사 보통군법회의 법정 건물 앞에는 검은 승용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검찰관은 ‘월남 통일’과 ‘고려연방제’ 발언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내가 그럴 수 없다고 하자 그는 창 밖에 서 있는 검은 승용차를 가리키며 “인정하지 않으면 지금 저 차를 타고 남영동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바로 구속이다”라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한참을 말없이 생각했다. 남영동으로 끌려가면 죽도록 고문을 당하고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신부 동료들의 자술서를 내 눈으로 읽어보지 않았던가. 결국 나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여기서 인정을 하고 법정에서 부인을 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나는 검찰관에게 5분간만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조사실 밖으로 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김충용 선배와 상의했다. 법정에서 부인을 하기로 다짐하고 김충용 선배는 ‘월남 통일’ 발언을, 나는 ‘고려연방제’ 부분을 각각 나누어서 인정하기로 역할 분담을 했다. 내가 다시 방으로 들어온 후 조서는 신속하고 간단하게 꾸며졌다. 서로 한 가지 씩을 인정하고 조서에다 지장까지 찍었다.

그런데 조서 작성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남영동 형사들이 승용차를 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와 김충용 선배는 상당히 당황했다. 기껏 인정해주고 구속까지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들은 우리를 남영동으로 데리고 가서 오늘 진술한 내용을 법정에서도 그대로 증언하라고 요구했다. 우리가 순순히 ‘알았다’고 말하자 그들은 여러 차례 다짐을 받고서야 우리를 풀어줬다.

당시 우리 사건의 변호는 제일합동법률사무소의 이건호 변호사가 맡았었다. 원래는 이돈명 변호사에게 의뢰했었으나 이 변호사가 당시 보안사의 불법적인 압력으로 활동을 정지당한 상태여서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이건호 변호사가 맡게 된 것이다. 나와 김충용 선배는 수시로 시청 옆에 있던 법률사무소로 이돈명, 이건호 변호사를 찾아가 조사받은 결과를 알려주고 법정에서 뒤집는 방법을 상의했다. 이건호 변호사와는 변호인 반대 신문을 통해 검찰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진실을 밝힌다는 구체적인 시나리오까지 만들어서 나름대로 대비를 했다.

그런데 재판을 앞둔 8월 중순쯤이던가. 또다시 검찰관의 출두 통보가 집으로 날아왔다. 비가 몹시 오던 날 수경사 보통군법회의 법정 입구 맞은편의 조사실에 들어섰을 때 방안에는 검찰관과 법무사 그리고 사병 두어 명이 있었다.

먼저 법무사가 입을 열었다. “윤덕한 씨가 법정에 나와 동료들 앞에서 동료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려면 인간적으로 괴로울 테니 여기서 선서를 하고 증언을 하라. 검찰관과 법무사가 다 나와 있으니 여기서 하건 법정에서 하건 증언의 효과는 똑같다” 그러면서 그는 사병을 향해 나에게 선서 용지를 주라고 지시했다. 선서 용지에 기재를 한 다음 자기들 앞에서 손을 들고 선서하고 증언하라면서 검찰관과 법무사는 선서를 받을 양으로 자세를 고쳐 앉는 것이었다.

선서 용지를 받아들고 나는 순간적으로 몹시 당황했지만 ‘내가 여기서 선서하고 증언한다면 나는 인간적으로 끝장난다’는 생각만은 분명하게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법무사에게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동료들 앞에서 증언한다는 것이 괴로운 일이지만 떳떳하게 남자답게 증언을 하겠다. 나를 믿어 달라”

그들은 몇 차례 더 그러지 말고 여기서 증언하라고 요구했지만 나의 간절한 호소가 먹혀들어갔던지 아니면 내가 법정에서 하겠다고 우기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느냐는 판단에서 그랬는지 “그러면 법정에서 잘 해주기 바란다”는 다짐과 함께 나를 내보내줬다. 나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만일 내가 그 때 순간적인 판단 잘못으로 그 자리에서 증언을 했더라면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동료와 주변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을 생각을 하면 그저 아찔할 뿐이다.

시골로 몸 피하기로 하고 장소까지 물색

80년 9월 하순, 마침내 내가 법정에서 증언하는 날이 되었다. 나는 자세를 가다듬고 결의를 다지는 뜻으로 평소 잘 지니고 다니지 않던 약혼반지를 찾아 끼고 수경사로 향했다. 나는 증언을 마치는 대로 법정을 빠져나와 시골로 몸을 피하기로 하고 장소까지 물색해두었었다. 증인 신문 순서가 되자 검찰관이 먼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선서를 마친 다음 검찰관의 신문이 있었으나 검찰관의 신문은 너무나 간단했다.

“증인은 박우정 피고인이 고려연방제가 통일의 밑거름이다 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검찰관 앞에서 진술하고 서명 날인했지요”
내가 “예” 라고 대답하자 그는 신문용 서류를 탁 덮으며 재판장을 향해 “이상 신문을 마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다른 얘기를 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은 것이다.
이어서 이건호 변호사의 반대 신문이 뒤따랐다.
“고려연방제가 통일의 밑거름이다는 말을 들은 사실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검찰에서는 왜 그런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습니까”
“당시 그런 진술을 하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구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속을 모면하고 법정에서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 순간 재판 기간 내내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재판장석에 앉아서 눈을 감은 채 졸고 있던 재판장이 눈을 번쩍 뜨고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검찰관이 협박을 했다는 겁니까. 검찰관이 협박을 하던가요”
“고려연방제가 통일의 밑거름이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구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사실 밖에는 남영동에서 온 차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왜 남자가 이랬다저랬다 하나. 당신은 여기 서 있는 피고들보다도 더 나쁜 사람이야”

그 때 검찰관은 허탈한 표정으로 법정의 천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재판장이 법정 출입문 안쪽에 총을 들고 마주보고 서 있던 현병을 향해 “정병”하고 불렀다. 재판장이 뭔가 쪽지를 아래쪽으로 건네줬고 나는 곧바로 헌병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법정 밖으로 끌려나와 조사실에 처박혀졌다. 헌병에게 끌려나올 때 법정 밖에서 초조한 빛으로 담배를 피우며 서있던 김충용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 다음 차례로 증언대에 섰던 김 선배도 역시 잠시 후 헌병들에게 팔을 붙잡힌 채 끌려왔다.

재판은 엉망이 되었다. 그날 재판은 그것으로 끝났다. 재판장과 배석했던 중령 소령 검찰관 법무사가 우르르 우리가 처박혀 있던 조사실로 몰려왔다.
“이놈들은 피고들보다도 더 나쁜 놈들이야. 이놈들을 위증죄로 구속시켜....”
재판장을 맡고 있던 육군 대령이 김충용 선배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핏대를 세우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때 법정을 나서며 “무법천지군, 무법천지야”라고 내뱉는 변호인들의 탄식 소리가 방청객들의 웅성거림 속에 섞여 열린 방문 사이로 들려왔다.
“법무참모 불러” 재판장이 누군가를 향해 지시를 했다. 퇴근을 했다던 법무참모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재판장은 법무참모에게 “이놈들 위증죄로 구속시켜”라고 지시를 하고 방을 나가버렸다. 법무참모가 다시 전화로 헌병대장을 찾았다. 그는 헌병대장에게 “민간인 두 명을 구속할 테니 지금 즉시 신병을 인수해가”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나와 김충용 선배는 헌병 중위에게 이끌려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대로 옮겨졌다.

해직됐지만 우리의 언론민주화 의지는 안 꺾여

참으로 기가 막혔다. 아무리 무법과 불법이 판치는 전두환 군부 시절이라 하더라도 자기들이 증인으로 신청해서 채택한 증인이 자기들 뜻대로 증언을 해주지 않았다고 ‘위증죄’로 구속을 하려한다니. 도대체 위증죄가 무엇이며 우리에게 위증죄가 성립이나 될 수 있단 말인가. 나와 김충용 선배는 불안과 분노를 삭이며 수경사 헌병대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인가. 이틀 밤을 지센 것 같은 착각이들 정도로 무척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오후 4시쯤 되었을까, 검찰관이 우리를 불렀다.
“두 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방금 두 분을 석방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저도 제대가 6개월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제대하고 임관되면 한번 놀러오십시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은 노태우에 이어 박세직이 맡고 있었다.

1심 판결은 나와 김충용 선배의 부인 증언에도 불구하고 반공법 위반을 유죄로 인정해서 이경일 부장에게 징역 5년, 박우정 기자에게 징역 4년이 선고되었다. 원래 억지로 조작해낸 이 사건에서 물증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사건 초기 경향신문 편집국 내에서는 경찰이 이들의 ‘불온한’ 발언을 모두 녹음해두었다는 등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지만 사실 증거라는 게 있을 수가 없었다.

오직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검찰 측이 증인으로 내세운 나와 김충용 선배로 부터 사실을 인정하는 증언을 얻어내는 길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부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심 판결은 유죄를 인정한 것이다. 막무가내 식 군사재판의 무법성과 불법성을 보여주는 생생한 본보기다. 서동구 국장은 ‘불온’서적 3권을 소지했다 하여 반공법 위반죄로 징역 6년에 자격정지 6년을 선고받았다. 홍수원, 고영재, 표완수 박성득 기자에게는 계엄 포고령 위반죄로 각각 징역 2년이 선고되었다.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서는 반대로 변호인단이 김충용 선배와 나를 변호인 측 증인으로 신청했다. 재판부는 “윤덕한 증인과 김충용 증인은 1심에서 충분히 증언을 했으므로 더 이상 증언을 들을 필요가 없다”며 증인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등군법회의는 81년 2월 10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1심에서 유죄로 인정한 반공법 위반 부분을 무죄로 선고하고 이경일 부장과 박우정 기자에게 계엄포고령 위반죄만을 적용해 각각 징역 3년과 1년을 선고했다. 아무리 군사재판이라고 하더라도 물증이 전혀 없는 가운데 자기들이 내세운 증인마저 사실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유죄를 선고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동구 국장도 반공법 위반 부분은 무죄, 계엄포고령의 유언비어유포죄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계엄령 하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무죄를 선고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홍수원, 고영재, 박성득 기자도 계엄포고령 위반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역시 집행유예를 받은 박우정 기자와 함께 풀려났다. 그러나 이경일 부장과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표완수 기자는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다가 그해 5월 11일 석탄일 특사로 풀려났다.

우리는 이제 언론 현장에서 쫓겨난 해직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언론민주화를 향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1986년 7월의 무더웠던 여름, 홍수원, 박우정 기자는 감시의 눈을 피해 바람도 통하지 않는 서대문의 좁은 골방에서 한 달간의 작업 끝에 688건의 보도지침을 항목별로 분류하고 해설을 붙이는 편집 작업을 해냈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언론통제 실상을 만천하에 폭로하여 정권을 뿌리부터 흔들리게 한 1986년 9월《말》지의 보도지침 폭로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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