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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전 해직기자의 묵직한 충고 "조선일보 기자들 시대 정신 읽었으면 한다"[인터뷰] 성한표 조선투위 위원장 “조선일보, 강제해직 사과하라”
강제해직 후에도 여전히 ‘조선일보 기자’… 돌고 돌아 언론계로
  • 관리자
  • 승인 2023.03.2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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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17일 서울 중구 태평로 조선일보 본사 앞에 백발의 노인들이 모였다. 48년 전인 1975년 3월, 자유언론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해직된 전 조선일보 기자들이다. 현재 조선일보 최고참이라고 할 수 있는 홍준호 발행인(1983년)·양상훈 주필(1984년)이 입사하기 한참 전에 벌어진 일이다. 해직 당시 30~40대였던 조선일보 기자 32명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조선투위)를 결성하고 투쟁을 이어갔지만, 끝내 편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현재 조선투위 중심에는 성한표 위원장이 있다. 33세에 직장을 잃은 그는 어느새 만 80세가 되었다.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후 일반 직장에 입사했지만 그는 자신이 기자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그는 언론계로 돌아왔다. 월간 말을 시작으로 한겨레 부사장을 지냈으며 SBS 사외이사로 활동했다. 어딜 가나 ‘조선일보 해직기자’라는 타이틀이 그의 이름 앞에 붙었다. 조선일보를 떠난 지 48년이 됐지만 여전히 ‘조선일보 기자’로 살고 있다. 매년 3월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집회를 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디어오늘은 20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인근 카페에서 성한표 위원장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방상훈 사장이 조선투위에 48년 전 일을 사과하고 원상회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래는 일문일답.

▲3월17일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집회 중인 성한표 조선투위 위원장(왼쪽)과 신홍범 조선투위 위원. 사진=미디어오늘.


한순간에 직장 읽은 6년 차 기자 “옳은 결정, 후회는 없다”

-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기자 32명의 삶이 궁금하다. 다들 연락하고 지내는가.

“세월이 많이 지났다. 돌아가신 동료도 많다. 정확하게 숫자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지만 10여 명 정도는 연락하고 지낸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 해직 당시 다들 젊은 기자들이었다. 대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후회는 없다. 32명 모두의 생각이다. 조선투위 선배 한 명은 정치부 소속에 청와대를 출입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잘나가는 기자’였다. 조선일보에 계속 있었다면 편집국장 정도는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그 선배가 나에게 말했다. ‘조선일보에 계속 붙어있었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끔찍하다’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조선투위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조선일보에서 높은 자리에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선투위라는 결정은 옳은 것이었다. 나를 위해서도, 사회와 언론을 위해서도. 좋은 결심이었고, 그 생각은 변함없다.”

- 조선일보 사측의 회유도 있었나.

“강제해직 후 사측이 일부 기자들에게 ‘너는 회사로 데리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정치부장 같은 데스크들이 (조선투위 회유를 위해) 뛰어다녔다. 그런데 들어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식적인 사과는 당연히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조선투위 활동이 이어지는 것이다.”

▲1975년 조선투위 집회 모습. 사진=자유언론실천재단.

- 조선일보에 해직된 지 48년이 지났지만 계속해서 사과·원상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정확한 요구사항이 무엇인가.

“인정이다. 80살 넘어가는 사람들이 기자로 복직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투쟁하겠는가. 복직하고 다음 날 퇴직하더라도, 48년 전 벌어진 강제해직 조치를 취소해야 한다는 것이 요구사항이다. 그리고 조선일보가 ‘미안하다’고 사과하길 원한다. 원상회복이라는 주장은 철회되지 않는다.”

- 조선일보의 강제해직 조치 배경에는 박정희 정권의 압박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만의 잘못은 아닌데, 왜 사과하지 않았을까.

“우리보다 더 많은 기자들이 회사에 남아있었다. 남은 자들에 대한 배려도 있었을 거다. 조선투위에 가담하지 않고 (사측에) 충성했던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사실 조선일보의 생각은 잘 모르겠고, 그런 계산도 있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아니면 우리를 복직시켜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수 있다.”

-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조선투위를 모르는 조선일보 후배들은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후배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선일보를 비롯해 사회적으로 비판받는 중앙·동아 기자들이 내부에서 어떤 움직임을 벌이고 있는지 궁금하다. 소속된 매체의 방향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내부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났을 건데,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

너무 옛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 처음 신문사에 들어갔을 때 한 선배가 ‘기자가 지사 의식을 갖는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이야기다. 이제 기자는 직업인이다’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지사는 아니더라도, 사회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이 기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에 부합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 기자들이 가진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조선일보 기자들이 시대 정신을 읽었으면 좋겠다. 조선일보에 가해지는 비판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오죽하면 ‘폐간’ 요구가 나오겠는가. 그냥 상황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게 아니라 부당함에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내외부에서 발생하는 탄압과 압박에 대해 목소리를 내줬으면 좋겠다.”

▲방상훈 사장과 홍준호 발행인이 조선투위 기자회견장 옆을 지나가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방상훈, 언론인이라는 인식 가졌으면”

- 올해 방상훈 사장이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임명된 지 30년이 됐다. 방상훈 사장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가.

“보통 방상훈 사장을 ‘사주’라고 부른다. 조선일보가 방상훈 사장의 재산이라는 뜻이다. 그는 기업인이기도 하다. 다만, 방상훈 사장이 언론인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스스로가 언론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조선일보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수 있다. 언론인으로 볼 때, 현재 조선일보 논조가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조선일보가 옳고 그름의 기준을 명확히 가질 필요가 있고, 이는 방 사장에게 달려있다.

예컨대 노동조합과 기업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조선일보는 보통 기업 편을 든다. 기업가들은 조선일보를 두고 ‘용기 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노동조합은 ‘나쁜 놈들’이라고 여길 것이다. 노동조합이 상대적 약자라고 무조건 편들 필요는 없다. 다만 신문사가 노동조합에 힘을 실어줘야 할지, 기업에 힘을 실어줘야 할지 상황판단을 못한다면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을 억누르면서 기업을 살리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 기자 성한표는 어떤 사람이었나.

“글쎄, 조선일보에서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선택에 대한 기준은 명확했다. 신문 기자로 어떤 선택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항상 했었다. 서울대 취재가 생각난다. 사회부에서 동대문경찰서 출입을 맡았고 서울대학교도 출입했다. 서울대학교 교무위원회에서 시국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썼다. 그런데 교무위원회에서 봉투를 주더라. 촌지였다. 그때 기자 사회에서 촌지는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봉투를 받지 않으려고 책상 위에 던져놓고 와버렸다. 기자 생활을 그렇게 했다.”

- 조선일보 기자이기 이전에 직장인이었다. 생계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젊은 나이었고, 당시 사람들은 현실 생활에 대한 인식이 약했다. 월급을 못 받고 쫓겨나는 상황이 생계에 어떤 어려움으로 닥칠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었다. 열정만 가지고 조선투위에 뛰어든 거다. 조선일보에서 나오고 나니 언론계로 재취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블랙리스트가 있었을 것이다. 손 놓고 있을 순 없으니 여러 직장을 오가고, 대학원도 갔다. 10년 정도 언론계 현장을 떠났다.”

▲서울 중구에 위치한 조선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돌고 돌아 언론계 복귀 “기자라는 생각 버린 적 없어”

- 언론계 현장에선 벗어나 있었지만,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자 합류해 부국장,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언론을 잊지 못한 것 같다.

“조선일보에 재직한 기간보다 떠난 기간이 훨씬 길었다. 하지만 ‘난 기자다’라는 생각을 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 뿐 아니라 조선투위 대부분이 그랬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주언론시민연합)에 관여하면서 언론 문제에 대해 계속 주시하기도 했다.”

- 회사에 남은 동기들은 자주 만나는가.

“조선일보 12기였는데, 조선투위 결성 당시 동기가 6명이다. 이 중 3명이 조선투위에 참여했고, 나머지 3명은 회사로 돌아갔다. 이후 정기적으로 만났다. 같이 밥도 먹고. 하지만 어느 순간 흐지부지됐다.”

- 동기라서 각별했을 건데, 왜 흐지부지됐을까.

“어느 순간이라고 짚긴 힘들지만, 기본적으로 가는 길이 달랐다. 가령 동기인 서청원(우리공화당 상임고문)은 기자를 하다가 정치인이 됐다. 그러다 보니 동기에 대한 관심도가 옅어진 게 아닐까. 조선투위에 참여한 동기들 나름대로 세계관이 생겼고. 또 그 중 한 사람은 조금 빨리 죽었다. 일련의 상황들로 인해 왕래가 없어졌다.”

- 서청원 고문도 조선투위 활동에 동의하고 동참했는가.

“조선일보는 조선투위 32명뿐 아니라 100명이 넘는 기자를 무더기 해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복직됐지만. 서청원도 여기에 해당됐다. 서청원을 포함해 조선일보로 다시 복직한 기자들, 생각의 강도는 서로 달랐는지 모르지만 방향은 같았다. 자유언론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 말이다.”

- 끝으로, 조선투위는 언제까지 활동할 수 있을까.

“다들 나이가 많다. 그래도 힘이 닿는 그 순간까지는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내후년에 조선투위 결성 50주년 행사를 크게 할 생각이다.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을 때까지 가야 할 것 같다. 노력하겠다.”

성한표 위원장.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그는 건축업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는 걸 깨닫자 1969년 8월 조선일보 12기 기자로 입사했다. 동기로는 서청원 우리공화당 고문, 도준호 전 논설위원, 이영덕 전 워싱턴특파원 등이 있다. 조선일보 재직 중에는 사회부·정치부 등 주요 부서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74년 12월 친정부 논조를 비판하다가 해임된 신홍범·백기범 선배를 복직시키라고 회사에 요구했고, 3개월 뒤 강제 해직됐다. 이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농촌경제연구원 등에서 근무했다. 그는 80년대 중반 ‘월간 말’ 제작을 시작으로 한겨레 정치경제부장·부사장, SBS 사외이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조선투위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이글은 2023년 05월 25일(토) 미디어오늘 윤수현 기자의 기사 전문입니다. 기사원문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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