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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소야대 13대 총선부터 언론청문회까지동아일보 대해부 4권 -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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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2.14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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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임기 첫 해의 첫 번째 대규모 공식 정치일정은 1988년 4월 26일에 치러진 제13대 총선이었다. 그 결과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했다. 여소야대 정국은 결국 김영삼의 배신에 의한 ‘3당 합당’으로 귀결돼 한국의 민주개혁진영에 궤멸적인 타격을 가하는 참극으로 끝났지만, 일단 노태우 정권 첫 해  5공 청산의 범위와 속도 면에서 가공할 위력을 과시하면서 민주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소선거구제’의 최대 수혜자는 평민당

야권은 분열로 인해 대선에서 참패했는데 4개월여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도 하나로 합치지 못했다. 야권이 대선에서 패배할 때는 지역주의가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했지만 총선에서는 그것이 결정적 승인으로 작용했다. 그 최대 수혜자는 김대중이 이끄는 평민당이었다. 총선은 17년 만에 부활된 소선거구제로 치러졌는데 득표율은 민정 34%, 야권 66%, 의석수는 민정 125석, 야권 174석이었다. 정당 별 의석은 민정당 125석, 평민당 70석, 민주당 59석, 공화당 35석으로 평민당이 제1야당으로 올라섰다.

평민당은 광주와 전남북의 37개 선거구에서 36명이 당선됐고 민주당은 부산의 15개 선거구 중 14개, 민정당은 대구 8개 선거구 모두와 경북 21개 중 17개 지역을 차지했다. 공화당도 충남의 18개 선거구에서 13명의 당선자를 냈다. 득표율에서는 민주당이 평민당을 23.8% 대 19.3%로 앞섰지만 의석수에선 11석이나 뒤져 이후 정국 주도권은 김대중에게 넘어가게 됐다.

동아일보는 4월 27일자 1면에「민정 참패 과반 크게 미달」이란 통단 제목으로 총선 결과를 보도했다. 부제는「평민 제1야당으로/ 3김 모두 원내 복귀…야 주도 관심 / 6공화국 의정 운영에 파란 예상」이었는데 장성만·최영철·이철승·유치송·이만섭·임방현·강경식·고건·유흥수·이상재·김상현·송원영·예춘호·허삼수 등 주요 낙선자들의 명단도 제목으로 뽑았다. 제목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평민당의 이해찬·이철용·문동환·박영숙, 민주당의 노무현·장석화· 김광일 등 재야 신인들이 대거 등장한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2면에는 야 3당 수뇌의 표정을 실었는데「지방색 재현되는 일 없도록 노력해야」(김대중), 「부산에서 발 묶여 서울에서 참패했다」(김영삼), 「원내 발판 마련 4년 후에 대비하겠다」(김종필) 등의 제목이 각 당의 분위기를 전했다.

같은 날짜 사설 제목은「총선 결과 놀랍다」였다. 사설은 “여당이 안정선을 넘어 공룡처럼 비대해져서 스스로의 체중을 감당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터라 여당의 이 같은 참패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라고 전제하면서도 그런 결과를 빚은 지역주의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있다.

  (…) 이제 여당은 다수의 힘만을 믿고 밀어 붙이거나 법대로의 논리를 앞세워 강공정치를 펴나가기는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여당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순리로써 야당의 협조와 국민의 이해를 구해가면서 정국을 끌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스스로 국민 앞에 약속한 민주화의 길을 묵묵히 개척해 나간다면 아무리 까다로운 야당이라고 하더라도 (…)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가장 가슴 아픈 현상은 전국이 4대 권역으로 분열된 지역적 편차가 아닐 수 없다. (…) 지난 번 대선에 이어 이번에도 쏟아져 나온, 원한에 사무친 듯한 이 같은 몰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앞으로 이 문제는 지역의 균형발전이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인재의 고른 등용 등 원천적인 해결 방안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 이제 제13대 국회는 과반수 미달의 (…) 집권당에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정계는 이번 총선거의 결과를 바탕으로 개편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특히 여야의 중진들이 대거 탈락하고 그 대신 정치신인들이 크게 등장함에 따라 정국의 판도는 그들을 중심으로 거센 개편의 바람이 불 것이다. (…)


여소야대 바람 타고 이루어진 5공청문회

‘여소야대’ 국회의 위력은 대단했다. 청문회 등을 신설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국민적 요구에 따라 전두환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청문회를 통해 다루어질 의제는 ‘광주 사태’ 진상 규명, 군부 책임자 처벌,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조작 규명, 전두환 친인척 비리 척결, 정경유착 규명, 1980년 언론통폐합 및 기자 강제해직 규명 등이었다. 6월 27일 국회 내에 7개 특위가 구성되었는데 그중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비리조사특위’가 중요했다.

88올림픽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인 11월 4일 일해재단 비리 청문회를 시작으로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의 광주 항쟁 청문회가 이듬해 2월까지 17차례, ‘5공화국 정치권력형비리조사특위’의 5공 비리 청문회는 9차례 이뤄졌다. 1980년의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을 다룬 언론청문회는 별도의 특위 대신 문공위원회 차원에서 진행됐다.

사회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동아일보는 10월 26일자에 」다큐멘터리 5공의 언론 수난」이란 대형 시리즈를 시작했다. 첫 회에는「‘대숙청’의 시발 ‘5·17 검거 선풍 / 심야의 연행 수갑 채워 ’남영동‘으로 / 온갖 협박 끝 50일 만에 풀려나기도」라는 긴박한 느낌의 제목을 달았다.

동아일보는 또 11월 15일자부터 「추적 전 씨 일가 비리」시리즈도 함께 내보내기 시작했다. 3면에 실린 첫 회분의 제목은「친인척이 짓밟은 ‘정의사회 깃발’ / 대통령 물러나자 드러난 부정부패 / 형 동생 사촌 처족까지 줄줄이 구속」이었다. 이 시리즈 바로 옆에는 5공 비리 청문회 관련 해설기사가「청와대·민정당·연희동 ‘전 씨 문제’ 숨 가쁜 발걸음 / ‘노·전 면담문제’ ‘재산 헌납 범위’ 싸고 진통 / 연희동 “민정당에 월 25억 댔다” / 노 대통령 비공식 접촉할지도」라는 제목 아래 큼지막하게 실렸다.

  노태우 대통령은 14일 저녁 아태 4국 순방을 마치고 청와대에 돌아오자마자 최병렬 정무수석비서관과 국내에 남아 있던 수석비서관들을 불러 약 2시간 동안 그간의 국내 정치상황 및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의 반응에 대한 보고를 청취. (…)
  여권의 한 소식통은 15일 “전 전 대통령이 5공비리 청문회 등이 완전히 TV로 생중계되고 자신의 친인척들이 속속 구속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자 불같이 화를 내며 ”이제는 다 털어 놓겠다“고 하는 등 불편한 심기를 극면하게 노출했었다”면서 “그러나 그럴 경우 5공 비리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되며 나라 전체가 흔들릴 위험이 있다는 당정 간의 간곡한 충고에 따라 심경 변화를 일으켰을 것으로 안다”고 귀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노 대통령 주재의 잇따른 회의에서는 일단 전 전 대통령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연희동 집 등 재산 헌납 의사를 표명한 뒤 노 대통령이 나서 국민들에게 더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고 수습하자는 방안을 제시, 전 전 대통령 부부는 보호해주는 선으로 낙착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유력.

   
막다른 골목에 처한 전두환은 결국 청문회가 한참 열리고 있는 11월 23일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란 사과성명을 내고 백담사로 향했다. 전두환의 백담사행을 전후로 11월 21일, 22일, 12월 12일, 13일, 31일 언론청문회가 열렸다.

동아일보는 11월 21일자 1면 머리에「80년 해직기자 명단 이상재 씨 제출 지시 / 문공위 어제 비공개 간담회 보안사 요원 증언서 밝혀 / 7월 말 명단 작성 상부 보고 / 언론청문회 이상재 씨 증언 언론계 동향도 수시로」라는 기사를 실었다. 주요 기사는「전 씨 ‘해명·사과’ 23일로 연기 / 담화 발표 직후 ‘은둔할 듯’」이었으며 3번째 기사는「내란음모 합수부 조작 / 김상현 씨 증언」이란 광주특위 청문회 소식이었다. 

동아일보도 언론사이기 때문에 언론청문회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아는 특위 이틀째인 22일자에도 1면 머리에「“권정달 씨 200명 해직 명단 줬다” / 언론청문회서 밝혀 ‘언론계획’ 7월 문공위서 논의 / 허문도·이상재 씨는 직통 관계 / 정비 촉구 조간지 사장 있었다」, 3면에「“문제기자에 체제 비판자 포함” / 각 기관 정보 취합 처음엔 90명 명단 작성」이라는 제목의 청문회 ‘1문1답’,「80년 언론인 학살은 보안사 작품 / 검열 저항 체제 도전 등이 주 대상 / 일부 언론사 협조 ‘자율’로 위장」이라는 해설기사를 전면에 깔았다.

언론청문회의 하이라이트는 12월 13일과 31일에 열린 4개 신문사 사주들을 상대로 한 청문회였다. 동아일보는 13일 밤에 열린 김상만(동아), 방우영(조선), 이종기(중앙), 장강재(한국) 등 4개 신문사 사주들을 대상으로 한 청문회 소식을 14일자 1면 머리에「“해직 줄이려 최선 다 했다” / 명단에 자체 추가 없었다」라는 기사를 올렸다. 4면 전체를 차지하다시피 한 기사(「“강제 해직 지금도 가슴 아프게 생각” / 제작은 편집인에 맡겨 간섭 않는다; 김상만 씨 / 언론사 정비 촉구설 상상도 못할 일; 방우영 씨 / 해직 명단 2~3차례 걸쳐 통보받아; 이종기 씨 / 문공장관이 부른 뒤 ‘지침 위반’ 경고; 장강재 씨」에서는 온통 사주들의 주장만 크게 부각시켰다. 청문회 진행 과정에서 의원 이철이 폭로했듯이  933명의 언론인 ‘정화 대상자’ 중 298명만이 보안사 자체 ‘정화조치자’이고 635명은 언론사 자체 인사 ‘정화자’, 즉 언론사에서 끼워 넣은 것이라는 것이 1980년 해직기자들의 주장이었기 때문에 그 문제가 언론청문회의 핵심 사항들 중 하나였는데, 동아일보는 거기 대한 질문은 소홀히 다루고 답변만 상세히 보도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3면에 올린 「언론인 해직 진상 얼마나 밝혔나」라는 제목의 별도 심층기사를 통해 한 걸음 더 들어가려는 시늉을 보이기는 했으나 이 기사 역시 심층은커녕 KBS· MBC 등 방송사의 경우에만 일부 ‘끼워 넣기’가 있었다는 암시만 하고 있을 뿐 신문사에 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오히려 그 심층기사에 물려 있는 기자 김창희의 ‘기자수첩’(「언론사 사주들의 증언」)이 더 솔직하게 속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 아무리 타율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자기 생살을 베어내게 만든 군사정권의 강압에 항변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오욕의 역사를 다시금 반추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 (…) 이날 언론사주들은 (…) 강제해 직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던 것을 국민에게 사과했고 언기법 통과에 항의 못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자인하기도 했다. (…) 이 같은 자성과 다짐의 분위기에서도 끝내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은 강제해직자 명단에 회사가 자의적으로 추가한 부분은 없느냐는 것이 (…)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큰 의문으로 남았다는 것이 의원들의 평가였다.
  이렇게 보면 이날의 언론청문회는 확실히 하나의 시발점에 불과한 것이었다. 여러 가지 본질적인 문제들에서 의문부호가 계속 떨어지지 않고 있으며 언론문제에 대한 시각 차이는 더욱 확연해진 셈이다. 편집권 독립과 해직자 원상회복문제도 그 중의 하나였다. (…)
  ‘이제 비로소 시작’이라는 것이 ‘객관적 관찰자’인 동시에 ‘해당 언론사의 말단사원’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입장을 동시에 안고 있던 기자가 가까스로 찾아 낸 결론이었다.

   
5공청문회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끌었고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5공 비리를 속속들이 밝혀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막강한 신문사 사주들을 상대로 한 언론청문회가 그러했다. 12월 31일 다시 한 번 사주들을 상대로 한 청문회가 열렸지만 다음 날짜 신문에서는 그 소식을 단 한 줄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모든 기사들이 희망찬 새해에 관한 것뿐이었지 이미 ‘지난해’에 벌어진 사건을 친절하게 소개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일까? 12월 31일에 청문회를 하자고 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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