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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종반기의 말기적 현상동아일보 대해부 4권 -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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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1.1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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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논의 중단시킨 전두환의 국정연설

1986년의 화두는 당연히 개헌이었다. 1988년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전제조건이 개헌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두환은 1986년 1월 16일 국정연설에서 “개헌 논의는 89년에 가서 논의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동아일보는「헌정제도 변경 논의 난국 자초/ 개헌 논의 89년 하는 게 순서」라는 제목으로 국정연설 내용을 1면 머리에 보도했다. “이 시기에 헌정제도의 변경을 위한 논의에 골몰하는 것은 국민 여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분산시켜 난국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3면 전체에 국정연설 요지를 게재했다. 이어 1월 17일자 2면에는 사설, 3면에는 해설과 기자 좌담 기사를 실었다. 그 논조는 조선일보의 ‘전두환 적극 지지’와는 달랐지만 전두환의 일방적 논리를 인정하는 애매모호한 것이었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6일의 국정연설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표정과 어조는 매우 무거웠다.
  (···) 전 대통령은 이날 앞으로 2년 남짓한 임기 후반의 정국 전망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단호한 ‘각오’를 피력했다고 할 수 있다.
  (···) 그러한 ‘우려’ ‘각오’ 속에서 전 대통령은 이날 ‘89년의 개헌 논의’를 언급했으며 언뜻 눈에 뜨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89년의 개헌 논의’는 88년 정권 교체의 완수를 대전제로 하고 현 시점에서의 개헌 공방이 난국을 자초할 수 있다는 제동의 논리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헌 논의에 수반될 수 있는 국론의 분열과 국력의 분산이란 지적이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 시점의 개헌 논의가 시기적으로 온당치 않다는 지적은 앞으로 3년간은 개헌 논의를 유보, 자제하자는 통치적 차원의 간곡한 당부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이해된다. 전 대통령은 바로 이 기간이 88년 정권 교체의 실현과 서울올림픽의 개최 등으로 국운의 갈림길임을 강조함으로써 개헌 공방의 유보 이유를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현 시점에서 개헌 논의가 더 이상 증폭돼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1월 17일자 3면 해설기사).

  전두환 대통령의 국정연설은 새해 국정 전반을 광범하게 포괄적으로 담고 있지만 핵심은 역시 현금의 최대 쟁점인 ‘헌법’ 문제다. 그러면서 소신 피력은 매우 구체적이고 단호하다.
  (···) 대통령은 연설의 거의 절반을 정치 분야에 할애하면서 대통령 선거 방법 변경문제는 평화적 정권 교체의 선례와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과제가 성취되고 난 연후인 89년에 가서 논의하는 것이 순서라고 못 박았다. (···)
대통령의 이러한 소신 피력은 어느 모로 보나 지금은 난국 극복과 국가적 대사를 위해 국력을 집중시킬 시기이지 헌법문제로 나라가 온통 시끄러워지는 일은 더 이상 용납 않겠다는 경고의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생각해보면 지난해 2월 선거 이래 끝없는 소모전으로 정국이 계속 꼬여들고 있는 직간접 원인이 바로 ‘헌법’에 있음은 분명하다. (···) 이러한 본질 문제를 그냥 고삐 풀린 대로 놔두고는 가파른 정국에 어떤 순항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도 싶다. 대통령의 이번 언급도 이 같은 현실 파악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1월 17일자 2면 사설).


개헌서명운동 탄압에 나선 공권력

전두환의 국정연설은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야당이 집권하면 올림픽을 개최할 수 없다거나, 개헌의 시기를 1989년으로 한다거나, 직선제로는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룰 수 없다는 논리가 모두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신민당과 민추협 등 야권과 재야 그리고 학생들의 개헌 요구는 당연했다. 신민당은 2월 8일 ‘개헌 추진 1천만명 서명운동’을 시작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대검찰청이 2월 10일 일체의 개헌운동에 대해 법적 제재를 가하겠다고 발표했다. 대검이 전국 검찰과 경찰에 시달한 개헌운동에 대한 처벌 지침은 어이없을 정도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헌서명을 위한 옥내집회도 집시법을 적용한다.가두서명을 받을 경우 1년 이하의 징역(도로교통법)에 처한다. 호별방문 서명 권유는 주거침입죄를 적용한다. 시민의 서명행위는 불법행위 방조죄로 처벌한다. 완장·리본·어깨띠를 달면 즉심에 회부한다.”

동아일보는 대검의 발표 내용을 1면 주요 기사로 보도하고 2월 12일 신민당과 민추협이 ‘개헌추진 1천만 서명운동’을 시작하자 13일자 사설(「헌법문제를 원내로」)을 통해 검찰의 조치를 비판하면서도 전형적인 양비론을 펼쳤다. 

  그토록 우려했던 최악의 사태가 바야흐로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2·12 총선 1주년을 맞아 신민당과 민추협 등 야권은 전격적으로 오랫동안 별러왔던 1천만명 개헌서명운동을 시작했고 이에 맞서 아스팔트로 나오기만 하면 구속하겠다는 엄포를 되풀이해온 당국도 예상대로 강력 저지의 칼을 뽑아 들었다. (···)
  (···) 헌법문제를 둘러싸고 양분된 국론이 여야 공동의 토론장인 국회를 벗어나 가두에서 맞부딪치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정당이나 국민이면 누구나 헌법문제에 관해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 물론 현행 헌법에는 대통령과 ‘국회 과반수 의원’만이 개헌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국민의 정치적 의사 표시의 길마저 봉쇄하고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하면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칙을 구속하거나 국민의 참정권을 도로교통법 등으로 제약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여야 정치인들은 헌법문제를 학원과 경찰 그리고 가두와 도로교통법에 맡겨 놓을게 아니라 토론과 타협의 마당인 국회로 끌어들여 진지한 논의를 시작하기 바란다. 야당도 서명운동과 정치투쟁을 앞세우지 말고 당내외의 의견을 모아 국민이 지지하고 정부·여당도 귀기울일 수 있는 개헌안을 먼저 마련한 후에 원내와 원외에서 할 일을 분별해가면서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개헌서명운동에 대한 탄압은 갈수록 강화됐다. 그러나 그 야만적인 공권력행사에 관한 언론의 비판적 논조는 보이지 않았다. 검찰과 경찰은 2월 13, 14일에 신민당사와 민추협 사무실 등을 봉쇄하는 등 탄압을 강화하고, 전국 1백11개 대학에 대한 야간 수색 등을 통해 수배학생들을 체포하는가 하면 개헌서명 유인물들을 압수했다. 그러나 개헌서명운동은 정부의 탄압이 강화될수록 더욱 치열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그렇게 정국이 뜨거워지자 전두환은 2월 24일 민정당과 신민당 등 3당 대표를 청와대에 초치해, “89년에 헌법을 개정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국회와 대통령 직속의 헌법특별위원회를 구성, 검토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그 날짜 1면 머리에 「89년에 개헌」이라는 제목으로 그 기사를 보도한 데 이어 2월 25일자 2면에 해설과 사설을, 3면에 전두환과 3당 대표들 간의 대화 내용을 실었다. 2면 해설기사는 전두환이 ‘상당한 융통성을 보인 것’으로 평가했고 사설은 전두환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헌법문제를 원내에서 대화로 풀어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국이 어려운 고비를 겪을 때마다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곤 했던 청와대의 정당대표 회동이 24일 다시 열렸다. 특히 이번 회동은 2·12 개헌서명운동을 계기로 야권과 전투경찰이 가두에서 격렬한 몸싸움까지 벌인 파국 직전의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이번 청와대회담에서 논의된 시국문제의 핵심은 역시 개헌문제였다. 지난 1월의 국정연설에서 88올림픽과 평화적 정권 교체를 치른 후인 89년까지 개헌 논의의 유보를 제의했던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회담에서 보다 구체적인 개헌 방향을 제시했다. 그 방향의 골자는 국회 안에 명칭에 구애받지 않는 헌법특위와 정부에 대통령 직속의 헌법연구특위를 각각 설치하고, 여기서 대통령직선제, 간선제, 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등 헌법 골격을 논의한 후, 국민 의사를 물어 89년에 개헌한다는 것이다.
  (···) 이제 헌법 논의에는 개헌안의 내용뿐만 아니라 ‘개헌의 시기’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회 안에 설치되는 헌법특위는 자연히 권력구조의 형태, 대통령 선출 방식과 함께 시기문제도 논의하게 될 것이다.
  (···) 여야 정치인들은 이번 청와대회담을 계기로 지금까지 국민을 실망시켜왔던 시국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대타협과 대합의로 이르는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놓아가야 할 것이다(2월 25일자 사설).

그러나 전두환의 ‘개헌 꼼수’가 공감을 받을 리 없었다. 신민당은 3월 8일 헌법개정추진위원회 서울시지부 현판식을 11일 열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장외투쟁에 나섰다. 동아일보는 3월 8일자 2면 사설(「여야 입장의 공식화」)에서 여전히 ‘원내 대타협’을 요구하는 주장을 계속했다. 3월 9일 추기경 김수환은 ‘정의와 평화를 갈구하는 9일 기도’를 마무리하는 미사에서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고 나섰다. 3월 13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1천만 개헌서명운동에 동참하겠다고 밝히는가 하면 많은 시민단체와 대학교수들도 시국선언문 등을 통해 개헌을 지지했다. 이후 개헌운동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결국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언론의 왜곡

시국이 온통 개헌문제로 시끄럽던 때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생 권인숙에 대한 경찰의 성고문 사건이 발생했다. 권인숙은 1986년 5월 20일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인 주식회사 성신에 취업했다. ‘허명숙’이라는 가명으로 ‘위장취업’을 한 것이다. 그는 학생시위와 야학 및 농활 참가를 통해 본격적으로 운동권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6월 4일 권인숙은 위장취업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는 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잡혀갔고, 형사인 경장 문귀동에게 6월 6, 7일 두 차례에 걸쳐 성고문을 당한 것이다. 권인숙의 변호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그 사건을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와 똑같이 7월3일 사회면(7면) 1단 기사로 보도했다. 그 내용 역시 매우 간단했다.

  인천지역 구속자 가족 30명이 2일 오후 2시경 경기도 부천경찰서 1층 현관에 몰려가 “부천경찰서 조사계 문 모 형사(39)가 여자 해고근로자를 신문하면서 옷을 벗기는 추행을 했다”고 주장,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문 형사가 지난 7일 밤 9시경 위장취업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K양(23·서울대 4년 제적)을 조사계 2호실에서 단독으로 취조하면서 추행한 사실을 K양이 변호사 접견 때 알려주어 뒤늦게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이후 동아일보의 권인숙 관련 기사는 검찰의 수사 발표가 있기까지 거의 사회면의 1단이나 2단 기사로 축소 편집됐다. 다른 신문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동아일보 역시 권인숙 성고문 사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7월 12일자 사회면 1단으로 나온 권인숙 관련 기사의 제목은 ‘부천사건’으로만 돼 있었다. ‘성고문’이나 ‘성폭행’이란 용어가 아예 빠진 것이다. 동아일보는 검찰이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한 7월 17일에야 사회면(7면) 머리기사로 다루었다. 그때도 여전히 ‘부천서 사건’ 수사 결과로 ‘성 고문’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그 날짜 7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검찰 “‘성적 모욕’ 없었다” 발표」/ “폭언·폭행 사실만 인정」이었다. 검찰의 발표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더구나 성 고문을 자행한 문귀동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인천=황호택·권순택·황유성 기자] 여대생 해고근로자 권 모(23·서울대 의류학과 4년제적) 양에 대한 부천경찰서 경찰관의 ‘성모욕’ 사건을 수사해온 인천지검은 16일 권 양의 고소사실 중 문귀동(39) 경장이 성적 모욕을 가했다는 부분은 인정할 수 없으나 폭언·폭행을 했다는 부분은 일부 사실이 인정된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 인천지검 김수장 특수부장은 이날 “문 경장이 권 양에게 폭언·폭행한 것은 조사에 집착한 나머지 우발적으로 저지른 과오로서 문 경장은 이로 인해 이미 파면처분을 받은 데다 10년 이상 경찰에 봉직해온 경력을 살려 기소유예 처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 검찰은 보조자료를 통해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해 “급진좌경 사상에 의한 노학연계투쟁을 전개해온 권 양이 성적 모욕을 당했다고 허위사실을 주장한 것은 운동권 세력이 상습적으로 벌이는 의식화투쟁의 일환으로서 자신의 구명과 아울러 수사기관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정부 공권력을 무력화 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규정했다.

동아일보는 이런 엉터리 수사 결과를 그대로 받아쓰는가 하면 ‘성을 의식화투쟁의 일환’으로 이용한다는 날조된 주장을 사실처럼 보도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제2사회면(6면)에 실은 기사(「공안당국 분석)로 ‘혁명을 위해서는 성도 도구화’했다는 당국의 날조를 제목으로 뽑기까지 했다. 같은 날짜 2면 사설(「부천 경찰 사건의 처리」)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끝내 ‘성고문’이라는 말을 제목에서는 제외했다. 

  공안당국은 ‘부천경찰서 수사 시비 사건’에 대해 “권 양의 성모욕 주장은 이들 급진세력들이 상습적으로 벌이고 있는 소위 의식화 투쟁의 일환으로 자신의 구명은 물론 사회 일반의 반정부·반공 권력투쟁을 확산하려는 선동적 조작”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사건의 본질
권 양의 성모욕 주장은 혁명과 폭력을 속성으로 하는 급진세력의 투쟁 전략전술에서 살펴볼 때 그 진위가 더욱 분명하게 판명된다.
  (···) 혁명을 위해서는 ‘성’도 도구화=좌경 의식화된 핵심 문제학생들은 그들 스스로의 의식화 과정과 조직활동 투쟁 과정에서 상호연대의식 고취, 일체감 조성 및 조직 이탈 방지 등을 위해서 ‘성’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투쟁전술로 고문·폭행 ·행 사건 조작=권 양의 수사 과정에서의 성모욕 주장에는 인간성의 침해를 빙자하여 대중의 혁명적 투쟁을 선동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 좌경 의식화된 자들은 의식화 과정에서부터 투쟁 활동 시 수사당국에 검거되어 조사 구속 수감될 때에는 이를 또 다른 투쟁의 기회로 최대한 활용하고 자신의 석방 구명을 위하여 사실이 아닌 고문·폭행·추행을 날조하여 주장하도록 철저히 교육받고 있다(7월 17일자 6면 상자기사).


  부천경찰서의 이른바 ‘성고문’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는 일단락되었다. 검찰 발표에 따르면 여대생 해고근로자 권양 의 고소사실 중 성적 모욕을 가했다는 부분은 인정할 수 없으나 폭언과 폭행의 사실만은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수사기관의 폭행이나 가혹행위를 좀처럼 자인하지 않으려 했던 공권력이 적극적인 수사를 전개하고 부분적으로나마 잘못을 시인했다는 점은 그 나름대로 평가되어 옳을 것이다. 또한 경찰당국이 그 책임을 물어 가해자인 문귀동 경장을 파면하고 관련 책임자들을 징계한 것도 종래의 타성을 벗어나는 조치로 받아들이고 싶다.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인권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공권력의 폭력적 행사다. 공권력은 민의 인권 옹호를 으뜸가는 책무로 갖는다. 그 공권력이 인권 침해에 가세한다면, 인권을 기간으로 삼는 나라의 질서는 지탱될 수 없다. (···)
  (···) 우리는 이 사건의 외연이 갖는 미묘한 점도 이해하며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 인간이 갖는 인권의 무게는 결코 가벼울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인권 침해는 ‘지구의 무게’로 엄중하게 따져지고 또한 물어져야 한다(7월 17일자 사설).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 보고서는 조선일보의 ‘권인숙  성고문 사건’ 기사들을 대표적인 왜곡보도의 사례로 꼽기도 했으나 동아일보 또한 오십보 백보의 보도 태도를 보인 셈이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관련해 전두환 정권은 언론사에 많은 보도지침을 내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해가 바뀐 1987년 4월 권인숙은 1년 6개월의 형 확정 판결을 받았으며 6월항쟁 이후인 7월 8일 가석방됐다. 1988년 2월 9일 대법원이 변호인단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였고 1989년에는 문귀동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이 선고됐으며, 권인숙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보도지침’ 폭로와 건국대·금강산댐 사건

1986년 언론계 최대의 사건은 ‘보도지침’ 폭로였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에 대한 ‘채찍과 당근’ 정책을 함께 썼다. 이와 함께 문공부 내의 홍보조정실을 통해 언론사에 이른바 ‘보도지침’을 내려보냈다. 보도지침은 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를 통해 언론사의 보도를 통제했던 수법에서 비롯됐다. 전두환 정권은 그것을 발전시켜 신문이나 방송 제작의 세부사항에까지 개입하는 구체적 통제 형태를 만들어냈다. 보도지침의 존재에 대해서는 언론 현장의 기자들 사이에 직접·간접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보도지침의 구체적 실체가 공개되지는 않았다.

보도지침의 실체가 알려진 것은 9월 9일이었다. 1984년에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돼 구성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의 기관지로 1985년 6월 창간된 <말>지(誌) 1986년 9월 특집호가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의 자료를 받아 보도지침의 실체를 폭로한 것이다. 그 특집호는 1985년 10월 19일부터 1986년 8월 8일까지 약 10개월 간의 보도지침 내용을 공개해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보도지침 공개 기자회견은 1986년 9월 9일 오전 10시 명동성당 소강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민언협 공동으로 열렸다. 그 자리에서 발표된 성명은  보도지침 자료집이 “현 정권의 언론정책은 물론 현 정권의 도덕성을 가늠해 주는 귀중한 현대사의 자료로서 그리고 자유언론 쟁취를 위한 획기적인 기원으로서 기억되고 평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그날 전두환 정권이 내린 보도지침은 ‘보도지침 공개 기자회견 보도 불가’였다. 동아일보 역시 ‘보도 지침’에 관한 기자회견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1986년 10월 28일 오후 건국대 민주광장에 전국 29개대 학생 1천5백여 명이 모여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발족식’을 열었다. 그들이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1천5백여 명의 경찰이 최루탄을 난사하며 밀려들었다. 학생들은 경찰에 쫓겨 본관 등 건물들로 피신헤 농성에 들어갔다.

학교 측은 학생들이 “안전한 귀가를 보장하면 자진 해산하겠다”는 입장이라며 경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경찰은 그것을 묵살했다. 검찰은 10월 29일 그 사건을 서울지검에서 직접 수사할 방침이며 농성학생 전원을 연행,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그날 사태를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하는 등 검·경 중심으로 관련 기사와 속보를 계속하면서 학생들을 ‘북괴의 동조세력’으로 몰아간 유인물 분석 내용을 ‘유령’기자‘의 기사로 보도했다. 

학생들이 단수와 단전 그리고 한파를 버티며 농성을 시작한지 4일째인 10월 31일 오전 경찰의 대규모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동원된 경찰병력은 8천5백여 명이었다. 학생들이 농성을 벌이던 건물들은 헬기와 고가사다리에서 쏘아대는 최루탄과 최루액, 그리고 육상의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검찰과 경찰은 1천5백25명의 학생들을 연행했고, 1천2백74명을 구속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경찰의 학생 연행 작전을 사회면(7면) 머리기사로 보도하고 11월 1일자에는 「폭력 친공은 안 된다」라는 사설을 통해 학생들의 좌경화와 경찰의 과잉 진압을 동시에 비판했다.

  소방차의 물 세례로 온몸이 젖은 채 그을린 얼굴을 푹 숙이고 경찰의 손에 끌려 나오는 농성학생들의 모습은 참혹하고 측은하기까지 하다. 마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아프다.
  (···) 정부 일각에는 문제학생에 대한 관용과 온건조치가 오히려 좌경극렬화를 촉진시켰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다면 강경 대응이 무엇을 가져왔는지도 아울러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부의 좌경학생이나 폭력 주동자는 따로 떼어 다스리되 선도의 여지가 있는 학생에 대해 서는 결코 그들의 창창한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 어떤 경우에도 이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갈 젊은이들인 학생과 경찰이 정면으로 맞붙어 서로 증오의 대상으로 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일부 학생들의 친공좌경 성향이다. 북한의 생경한 선전 문구를 그대로 옮긴 구호와 대자보가 나붙고 6·25를 ‘민족해방전쟁’으로 보고 ‘반공이데올로기 분쇄투쟁’을 선언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더 많이 확보하고 굳혀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학생이 극렬화한다고 거기서 정치적 폭력의 구실을 찾아서도 안 될 것이다.

경찰의 건국대 진압작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0월 30일 정부는 국민에게 수공(水攻)의 공포를 자아낸 ‘금강산 댐’ 사건을 발표했다. 건설부장관 이규효가 10월 30일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이 휴전선 북방 금강산 부근에 건설 중인 댐으로 인해 한강 하류지역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며 금강산댐 건설계획을 즉각 중지하라고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그 배후는 북한정보를 독점하고 있던 안기부였다. 동아일보는 10월 31일자 1면 머리에 그  성명 내용을, 2, 3면에 관련기사를 싣는 등 법석을 떨었다. 2면의 사설( 「금강산댐의 잠재 위협」)은 정부의 논리를 그대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지난 21일 착공한 북한의 금강산 수전댐은 한마디로 이(理)를 거스르고 도(道)를 외면한 공사다. 굳이 그 발상의 저변에 ‘숨겨진’ 목적이 있을 가능성을 상상하기에 앞서, 그 하류 수역의 동족과 주민을 안중에 두었다면 그만한 규모의 댐을 구상할 수 있었을 것인지 되묻고 싶어진다.
  (···) 이 댐의 높이는 2백m나 되고 댐의 길이가 1천1백m로 만수위로 물을 가둘 경우 약 2백억t의 물을 담게 되리라는 추계다. 북한강 골짜기로 9억t의 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릴 경우 서울 전역과 강원도 1시 3개 군, 경기도 1시 7개 군이 84년 9월 대홍수 때의 10배에 해당하는 수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고 보면 2백억t의 물이 담수되어 있는 상태에서 큰 홍수라도 날 경우 수위 조절을 위한 평상의 방류만으로도 하류 수역의 피해는 가공할만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을 북한 측에 제의한다. 북한강 수계뿐 아니라 임진강 수계까지를 포함하여 수자원의 합리적인 이용을 위한 공동협의체를 구성해야 하며 북한 측은 마땅히 그 협의에 응해야 한다.

언론은 금강산댐의 ‘공포스런’ 결과를 예측하는 내용들을 쏟아냈다. 국방장관은 이기백은 “2백억t의 물이 일시에 방류된다면 등고선 50m까지 물에 잠기는 등 중부 일원이 황폐화 된다”고 주장했다. 언론은 ‘공포 부추기기 경쟁’에 나섰다. “2백억t의 물이 덮치면 63빌딩 절반정도가 물에 잠긴다” “남산 기슭까지 물바다가 되며 원폭 투하 이상의 피해” “한강변 아파트는 완전히 물에 잠긴다”는 등의 보도가 난무했다. 지역별로 금강산댐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들이 계속됐고, 서울에서는 10만여 명이 모인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그 대안이 홍 수조절을 위한 ‘평화의 댐’이었다. 이번에는 각 언론사가 댐을 건설하기 위한 모금운동에 나섰다. 교도소의  재소자들까지 참가한 성금은 6개월 만에 약 7백억원에 이르렀다. 그렇게 착공된 ‘평화의 댐’은 1988년 5월에 1단계 공사를 마쳤다. 그러나 1993년 6월 감사원의 감사 결과 ‘평화의 댐’은 조작된 정보에 따른 것임이 드러났다. 전두환 정권의 ‘안보’를 위한 범죄적 행위와 언론의 나팔수 역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세계적 오보 ‘김일성 사망’

‘금강산 댐 사건’ 못지않게 황당한 사건이 ‘김일성 사망’ 오보였다. 조선일보가 ‘세계적 특종’이라고 자랑했던 그 보도는 1986년 11월 16일자에 첫 보도가 나간 지 48시간 만에 ‘세계적 특종’이 아닌 ‘세계적 오보’로 확인됐다. 더욱 큰 웃음거리는 그 보도로 인해 정부와 한국 언론 모두가 망신을 당하게 됐다는 점이다. 동아일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아일보는 ‘김일성 사망’ 기사를 조선일보 보다 하루 늦은 11월 17일자에 국방부 대변인의 말을 인용해 1면 통단으로 보도했다. “북괴는 16일 전방지역에서 대남확성기 방송을 통해 ‘김일성이가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방송을 실시했다”는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관련 기사를 3면과 11면에 싣는 등 그야말로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김일성 총격으로 사망”」이라는 통단제목을 뽑은 지 하룻 만인 11월 18일자 1면 머리에 「김일성 평양공항에 나타나」라는 제목으로 오보를 정정해야 했다. 동아일보는 11월 19일자 2면 사설(「이상한 집단의 이상한 작태」)에서 북한을 비난했으나 언론의 섣부른 판단 역시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 피격설을 거듭 전파한 북한 군대의 휴전선 대남방송은 ‘이상한 집단의 이상한 작태’를 새삼 실감케 한다. 그 김일성이 살아서 몽고 국가주석 잠빈 바트문흐를 영접했음이 확인된 이후에도 여전히 피격설을 외쳐대는 대남방송은 며칠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일성 미스터리’를 더욱 미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 그러나 우리는 오늘, 그 어느 쪽이 옳다고 판단할 만한 정보나 근거를 확연하게 갖지 못한다. 그 마당에서 속단은 금물이다. 오로지 우리의 할 일은 흔들림 없는 ‘중심’을 바탕으로 정보 수집 체계를 강화하고, 또한 모든 가능성에 의연히 대응하는 길일 뿐이다. (···)
  그러자면 온 국민의 흔들림 없는 ‘중심’의 확립이 요청되는 것이지만, 그보다 앞서 관계당국이나 언론의 ‘중심’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며칠 동안의 경과를 보더라도 저들의 대남방송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최선이었다고 자부할 수는 없다.
  이미 국회에서 지적된 대로 정보 이전의 첩보를 너무 성급히 공표하지는 않았던가. 그 첩보를 굳이 국방부 대변인이 공식 발표해야만 했던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언론은 언론대로 과연 객관적 사실에 충실한 보도만을 이어 왔던가. 혹시라도 냉정과 의연성을 잃지는 않았던가. 꼬리를 무는 물음들 앞에서 우리는 겸허하게 자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각제 개헌 ‘이민우 구상’의 종말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국내 정치의 최대의 관심사는 개헌이었고, 그 핵심 중의 하나가 대통령직선제였다. 이미 신민당은 1천만 개헌서명운동과 개헌현판식을 위해 지방도시를 순회했고, 신민당 총재 이민우는 국민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얼굴마담’으로 신민당을 이끌었으나 인기는 갈수록 높아졌다. 그러나 이민우가 실세 행세를 하자 양김 측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1986년 12월 24일 이민우는 송년 기자회견을 갖고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그 구상은 ‘선 민주화 후 내각책임제 협상’을 핵심으로 하는 매우 민감한 내용이었다. 구속자 석방과 사면복권,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 등 민주화 7개항을 전두환 정권이 받아들인다면 내각책임제 개헌 협상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12월 24일자 1면 머리에 「내각제 개헌 협상 긍정 검토」라는 제목으로 이민우의 발언에 관한 기사를 올리고 3면에 「‘직선제 관철’ 후퇴···정가 큰 파문」이라는 해설기사와 이민우와의 일문일답을 실었다. 이어 12월 25일 사설을 통해 ‘이민우 구상’의 선행조건 충족이 관건임을 강조했다.

  개헌정국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거듭하고 있는 터에 이민우 신민당 총재의 중대 발언이 튀어나와 정가에 파문을 던지고 있다.
  발언의 골자인즉 지방자치제 실시, 언론자유 보장, 공정선거 등 7개의 민주화 선행조건에 대해 정부·여당이 결단을 내린다면 내각제 개헌 협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직선제만이 민주화라던 지금까지의 외곬 주장에 비기면 커다란 방향 선회가 아닐 수 없다.
  (···) 그러나 그의 선민주화론이 성립되자면 정부·여당이 민주화를 향한 중대 결단을 내려야 하고 신민당도 뼈를 깎는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화의 기반이 조성되지 않고는 내각제든 대통령제든 무의미하며 반대로 민주화의 여건만 갖추어지면 어떤 제도도 상관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 따라서 여당이 야당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려면, 합의개헌을 하려면 민주화 조건에 대한 실천의지를 확고히 보여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총재의 주장은 야당진영에 격렬한 진통을 불러올 것 같다. (···) 하나 야당은 이 고비를 슬기롭게 넘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야당도 평화적 민주화의 ‘한 과정’으로서 개헌이 필요하다는 원론을 되새겨야 한다. 결코 ‘야합’으로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먼 장래를 내다보는 애국적 판단으로 개헌정국의 험난한 앞길을 헤쳐가야 하리라고 본다.

‘이민우 구상’이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당론 변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드러나자 사태는 심각해졌다. 김대중과 김영삼에 대한 ‘쿠데타적 성격’을 띤 것으로 보고 양김이 나서 극서을 견제하기에 나선 것이다. 결국 양김의 반대로 ‘이민우 구상’은 백지화됐으나 이후에도 이민우는 ‘선민주화론’을 주장하며 갈등을 키워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이철승 등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제기하는 등 신민당의 당내 분란이 계속되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1987년 4월 6일 민추협 사무실에사 신민당 탈당과 신당 창당을 결정했다. 4월 8일 김영삼이 창당을 공식 선언했고 신민당 의원 90명 중 74명이 탈당해 신당에 참여하자 결국 이민우는 정계를 은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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