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소식
48년 전 오늘, 자유언론실천선언은 축적된 투쟁의 결실이었다박종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
  • 관리자
  • 승인 2022.10.27 01:58
  • 댓글 0
이글은 박종만 동아투위 위원께서 지난 10월 24일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10월 24일은 자유언론실천선언 48주년 기념식을 가진 날이기도 합니다. 1974년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이 있기 전후의 과정과 곡절이 세밀화 그리듯 유려한 글솜씨로 그려져 있어 그때를 기억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역사적 기록으로 남긴다는 의미에서 재단 홈페이지에도 옮겨 담아 놓습니다. 동아투위 위원들 가슴 속에는 누구나 이런 사연들이 실타래처럼 서려있고 48년전의 사건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그려지기도 합니다. 1975년 3월 17일 해직된 동아일보 언론인들이 결성했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113명 위원들은 이제 서른여덟 명이 작고하시고 일흔다섯 명만이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동아투위 위원들도 곧 1~2년이 지나 선언 50주년 반세기를 맞을 때면 모두가 80세를 넘기게 됩니다. 참고로 맨 하단에 동아투위 위원 명단과 74년 당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붙입니다. [편집자주]

1. 48년 전 오늘

48년 전 오늘, 1974년 10월 24일 이른 아침, 동아일보사 편집국(현 일민미술관 3층) 한가운데 기둥엔 커다란 족자가 내걸렸다.  <자유언론실천선언>. 그리고 9시 정각, 바로 사흘 전에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에 당선된 장윤환 기자가 <자유언론실천선언> 기자총회 개최를 선언했다. 곧 이어 홍종민 총무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선언문을 낭독했다.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 주는 것이 아니다----"

방송뉴스, 출판국 기자들과 일부 프로듀서들까지 함께 해 편집국을 가득 메운 기자총회 분위기는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졌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나왔다.

10월 24일은 공휴일이었다. UN에 가입하지도 못한 나라가 'UN 데이'라 하여 국제연합 창립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기념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외근 기자들도 모두 편집국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자총회를 마친 뒤 기협분회는, 그날 있었던 기자들의 결의와 선언문 전문을 1면에 보도해 줄 것을 회사 측에 요구했다. 회사 측의 반응은 냉담했다. 바른 언론인으로 존경받던 송건호 편집국장이 기자들과 경영진 사이에서 거중조정을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회사 쪽의 태도는 완강했다. 기자들은 회사의 답변이 있을 때까지 일단 제작을 거부키로 했다. 기자들과 경영진의 피말리는 대결이 그날 밤 열시가 넘도록 계속됐다. 그러다가 회사 측은 밤 11시가 가까워져서야 기자들의 요구를 수락한다고 통고했고, 기자들은 그때부터 신문 제작에 돌입했다. 그래서 10월 24일자 동아일보는 25일 새벽 1시에 이르러서야 제작되어 나왔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전문과 기자총회 관련 기사를 1면에 3단으로 보도한 신문을 받아든 기자들은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독재정권 아래에서 고질(痼疾)이 된 '권력 눈치보기'가 한 번의 선언으로 고쳐질 리가 없었다. 10월 25일자 신문도 그 다음 날자 신문도 만날 그 타령이었다. 당시 이땅의 모든 신문 방송은 정부의 보도지침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정부가 중요하게 포장해 발표하는 것이면, 그게 기사 가치가 있든 없든 그 날의 톱기사가 되었고, 정부에 조금이라도 불리한 기사는 혹시 게재가 되더라도 지면 한 구석에 처박혔다.

기자들은 자유언론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기 위해 '자유언론실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매일 오후 그날 신문을 놓고, 자유언론 실천을 주장하는 기자들의 요구가 얼마나 반영되었는지 토론을 벌여 지적사항을 유인물로 만들어 돌렸다. 그 결과 동아일보 지면과 동아방송 뉴스가 미세하게나마 변화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변화란 기자들의 요구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지면이 확연히 달라지는 데엔 또 한 차례의 큰 진통이 필요했다.

10.24선언이 있은 뒤 2주가 좀 더 지난 11월 11일 저녁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의 천주교회에선 일제히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기자들은 이 사건의 의의가 매우 크다고 판단하고, 이를 12일자 1면이나 사회면 톱기사로 다룰 것을 경영진에 요구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경영진은 기자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기자들과 경영진의 의견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12일 하루가 지나갔다. 동아방송도 정오부터 매시간 뉴스 방송을 중단한 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 1백80여 명이 천주교의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 기사가 제대로 보도되지 않는 한 신문과 방송 뉴스를 제작하지 않기로 했다고 방송했다. 1974년 11월 12일자 동아일보는 결국 영원히 결호가 되었다.

기자들의 제작 거부 사태는, 회사 측과 기자들에 대한 송건호 편집국장의 간절한 호소와 노력 덕분에, 천주교 인권회복 기도회 관련 기사를 사진과 함께 사회면 중간 톱으로 게재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동아일보 지면과 동아방송 뉴스는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 갔다. 유신체제 이후 금기로 되어 있던 개헌문제가 다루어지고 민주회복운동이 크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을 박정희 독재정권이 아니었다. 그 해가 다 가기 전, 12월 중순께부터 세계 언론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광고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겨울, 1975년의 새봄이 시작될 때까지 우리는 독재권력과 정말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어느 날 갑자기 동아일보의 광고면이 백지가 된 것을 본 독자들이 기자들의 투쟁을 격려하는 광고를 싣기 시작했다. 격려광고는 원조(元祖) '촛불'이었다. 많은 국민이 동아일보를 보는 재미, 격려광고를 보는 재미로 산다고 했다. 눈에 쌍심지가 난 유신정권이 그대로 놔둘 리가 없었다. 동아일보사는 결국 독재권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1975년 3월 8일 마침내 자유언론 실천에 앞장선 기자들에 대한 대량 학살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3월 17일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농성중이던 1백60여 명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을 회사 밖으로 끌어냈다.


2. <자유언론 실천 선언>은 축적된 투쟁의 결실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60년대 말 3선개헌 파동을 전후한 무렵부터 내연하기 시작한 기자들의 울분이 동아일보에서 처음으로 터져나온 것은 1971년 4월 15일의 <언론자유 수호 선언>이었다. 이날 동아의 기자들은 "외부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가해지는 부당한 압력을 일치단결하여 배격하고, 정보요원의 사내 상주 또는 출입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언제부턴가 각 언론사 편집국(또는 보도국)엔 이른바 '기관원'이라 불리는 정보부 요원이 거의 상주하다시피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면서, 이 기사는 빼라 저 기사는 키워라 강요하던 시절이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 수호 선언>이 알려지자, 한국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를 비롯한 많은 언론사 기자들도 잇달아 <언론자유 수호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71년의 <언론자유 수호 선언>은, 몇 달 후 주모자로 지목된 심재택 기자가 중앙정보부의 강요로 해고되는 상처만 남긴 채(그는 1년 뒤 복직했으나 동아노조 사건으로 또 한 차례, 그리고 75년에 세 번째로 해직되는 기록을 남겼다.), 아무 실효도 거두지 못하고 선언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해 가을,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대학가에는 시위 열풍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9월 초부터 10월 15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이른바 '학원질서 확립 특별명령'이 발표될 때까지 45일 동안 대학가엔 최루가스가 진동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당시의 신문이나 방송들은 조용했다. 민중은 전국의 대학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 무렵부터 대학가에는 "개와 기관원과 기자는 출입 금지"라는 팻말까지 나붙기 시작했다. 기자들의 울분은 날로 쌓여 갔다. 젊은 기자들 중엔 심각하게 이직을 고민하는 이들도 많았다. 돌이켜보면 그래도 그때까진 '요순시절'이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꼭 1년 뒤인 1972년 10월 17일 이후, 이땅의 모든 언론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시키고 헌법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이른바 '10월 유신'을 위한 박정희의 특별선언이 발표되자, 신문협회는 이를 "적극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그걸  각 신문의 1면에 게재토록 했다.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가운데 모든 언론은 철저한 사전 검열을 받았고, 기자들은 일상적인 취재활동마저 엄격한 제한을 받았다. 당국이 허용하지 않는 기사는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는 반면에, 계엄사령부의 발표문이나 정부가 배급하는 해설기사 등은 토씨 하나 고치지 못하고 그대로 대서특필해야 했다.

그때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로 자부하던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울분은 극에 달했다. 특히 젊은 기자들은 틈만 나면 삼삼오오 모여앉아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데에 뜻을 같이했다. 동아일보사엔 입사한 지 3년에서 6~7년 된 젊은 기자들이 타사에 비해서 유난히 많았는데(동아일보사는 어떤 이유에선지 3년여 동안은 수습기자를 뽑지 않았다), 그들이 사내 여론을 이끌어갔다. 젊은 기자들의 응집된 울분은 결국 경영진에게 보내는 연판장 형태로 표출되었다. 연판장은 얼핏 보면 인사나 처우개선과 관련된 사내 불만을 드러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서명운동의 핵심적 요구는 맨 첫머리의 '독자적인 편집권 행사와 신문 지면의 쇄신'에 있었다. 다시말해서 10월 유신 이후 위축될 대로 위축된 지면을 하루속히 쇄신하자는 것이었다. 전체 기자의 70% 가까이 서명한 73년 3월의 이 연판장 사건은 회사 측의 몰이해와 모략으로 약간의 부작용을 빚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기자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유신' 1주년이 가까워진 73년 10월로 접어들면서 대학가에선 다시 민주회복을 부르짖는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를 보도하는 신문이나 방송은 한 곳도 없었다. 동아일보의 경우 시위가 잇따르자 사회면 한구석에 1단짜리 짤막한 기사를 실으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조판과정까지 살아 있던 기사가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인쇄과정에서 송두리째 깎여버리고 말았다. 젊은 기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수습기자 각 기별로 의논이 모아졌다. 꼭 보도해야할 가치가 있는 기사를 누락시킬 경우 그에 항의하는 뜻으로 편집국 안에서 철야농성을 벌이기로 했다. 그 가을, 우리 젊은 기자들은 사흘이 멀다 하고 편집국에서 철야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제2차, 제3차 <언론자유 수호 선언>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럼에도 신문 지면이나 방송 뉴스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기자들은 좀 더 강고한 조직적 투쟁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러던 차에 회사 측에서 74년 3월에 일부 부당한 인사를 단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젊은 기자들은 이를 계기로 노조를 결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노조(당시는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지부)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외형은 노조이지만 사실은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기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젊은 기자들 33명이 발기하여 설립한 노조는 무슨 작전이라도 펴듯 비밀리에 서울시청에 설립신고를 마쳤다. 당시도 노조 설립은 신고제였기 때문에, 노조 측은 서울시청에 서류를 접수시키고 접수증만 받으면 노조 설립이 성공하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노조 설립 소식이 전해지자, 회사 측은 다음날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집행부를 비롯한 13명을 전격 해고했고, 서울시는 "노조 임원 전원이 현재 동아일보사에 재직하지 않고 있으므로 신고증을 내줄 수 없다"는 어이없는 이유를 붙여 노조 설립 신고증을 반려했다.

회사 측이 그렇게 노조 설립에 무리한 강공책을 쓴 이유는 인사위원회 회의록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과거 2, 3년 이래에 여러 차례에 걸쳐 발생했으며, 최근 다시 새로이 태동하기 시작한 하급 기자들을 중심으로 한 집단 소요행동에 관하여 논의하고 이를 근절하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로서 상습적인 주동, 가담자들에 대하여 이제까지 보류해온  처벌 조치를 금회에 단행키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회사 측과 정부 당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져서 단행된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회사 측은 1차 해고로 끝나지 않고 며칠 뒤 또다시 22명을 해고, 정직, 감봉처분했다. 이러한 회사 측의 강공에도 불구하고 노조 설립신고 2~3일 만에 노조원 수는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를 포함하여 180명에 이르렀다.

노조는 즉각 '해고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했다. 아무리 유신 치하라 하지만, 노조를 설립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더기 해고한 처사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회사 측도 알아챘다. 회사 측은 한 달 만에 모든 부당인사를 철회했다. 노조는 서울시로부터 설립 신고증을 반려받았으므로 법외노조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상의 노조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갔다.

노조 핵심세력을 중심으로 한 젊은 기자들은 더욱 가열한 언론자유 투쟁에 나설 채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첫 단계로, 이미 언론자유를 수호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어 있는 단체인 기자협회를 활용하기로 뜻을 모았다. 당시 기자협회나 각사 분회는 전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분회는 유명무실해서 분회장이 누구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동아의 젊은 기자들은 우선 기자협회와 분회를 혁신하는 방안을 모색해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천우신조랄까, 뜻하지 않게 기자협회와 분회 자체의 문제로 논란이 벌어져 기자협회와 기협 동아일보분회의 개편 작업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기협 동아일보분회장에 문화부의 장윤환 기자가 선출되고, 기협 회장에 역시 문화부의 김병익 기자가 선출되었다.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이 있기 며칠 전의 일이다.
 

3. 지금 이땅에 진정한 '자유언론'은 존재하는가?

언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70년대 초반 수년에 걸쳐 여러 형태로 투쟁을 벌인 동아의 젊은 기자들은 두 가지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첫째는, 언론자유를 수호하겠다고 백 번을 선언해 봐야 반드시 보도할 가치가 있는 기사를 지면에 한 줄도 반영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고,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깨달음이었다. 둘째는, 정치권력의 간섭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뿐 아니라 자본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자유언론, 독립언론이 되지 않고서는 언론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기협 동아일보분회는 종래 익숙하게 써 오던 '언론자유 수호' 대신에 '자유언론 실천'을 선언하고, 그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사람들은 모진 탄압에 맞서 독재권력과 싸우기도 하고, 새 언론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면서 이땅에 진정한 자유언론이 구현되기를 갈망해 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외적 얽매임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고, 진실을 외면하거나 거부함으로써 겪게 되는 내적갈등(양심의 소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라야 비로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다시말해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의 간섭이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언론'을 구현할 수 없고, 언론인 스스로가 진실 위에 굳게 섬으로써 모든 내적갈등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때라야 진정한 의미의 자유언론을 실천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오늘날 역사상 일찍이 누려보지 못했던 언론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정치권력의 직접적인 간섭이나 억압이 사라졌다는 의미에서 그렇다.(윤석열 정부로 들어서서 갈수록 몹시 수상한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지금 우리 사회의 전통언론 가운데 '자유언론'이 얼마나 실천되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아니, '진정한 의미의 자유언론'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지금 이땅의 레거시 미디어들은 한두 곳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다수가 자본권력에 예속되어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모두 자본권력의 지시와 규제를 받고 있다.자본권력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 어떤 언론도 '자유언론'이라고 말할 수 없다. 조중동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이땅의 레거시 미디어들 거의 모두가 그것을 웅변해 주고 있다.

지금 전통언론에 종사하는 언론인 가운데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민감한 기사를 쓰면서 "나는 항상 내적갈등(양심의 소리)에서 자유롭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언론인들이 많다면, 그리고 그들이 모두 진실로 "나는 언제나 진실에 바탕을 둔 기사만을 쓰고 있으며, 다른 요인이 개입할 여지가 있을 때는 그에 과감히 맞서 싸우고 있으므로, 내적갈등을 느낄 까닭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우리 국민의 삶에 영향을 끼칠 대소사를 다루면서 언제나 힘있는 자와 가진 자의 카르텔 편에 서서 진실을 왜곡하기를 식은 죽 먹듯이 하는 조중동 따위와 그 아류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해 버둥대는 한두 '진보언론'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자신만만한 언론인들이 많다면, 그들은 대부분 두 부류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참과 거짓을 식별할 능력이 없는 장님이나 귀머거리이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혁명에 성공하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이 나라에서 진정한 자유언론의 실현은 아직도 요원한 꿈일 뿐일까?

마흔여덟 번째 맞는 '자유언론 실천선언의 날' 아침, 지난 날 일류신문 기자라고 우쭐대던 동아의 젊은 기자들이 각성하고 참회하는 심정으로 자유언론 실천을 선언했던 것처럼 하루속히 이땅의 모든 후배 언론인들이 대오각성하고 자유언론 실천의 대도로 돌아와 주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촉구해 본다.

박종만 동아투위 위원

[필자주] 동아투위는 1975년 동아일보 동아방송에서 해직된 113명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이 결성한 단체이다. 지금까지 38명이 세상을 뜨고, 75명이 남아 있는데, 이들도 모두 80안팎에서 80대 중후반에 이르는 고령자들이다. 그럼에도 동아투위는 지금도 뜻있는 후배언론인들과 함께  <자유언론실천재단>을 만들어 자유언론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113인 명단

강정문    권근술    김덕렴    김두식    김성균    권도홍    김욱한    김유주    김인한    김재관   
김진홍    김창수    박노성    배동순    성유보    송재원    신양휴    신정자    신태성    심재택   
안병섭    안상규    안성열    안종필    오정환    우승용    윤활식    이계익    이병주    이의직   
이인철    조민기    조성숙    조양진    홍선주    홍종민    홍휘자    황명걸   
(이상 고인 38분)

강운구    고준환    국흥주    권영자    김기경    김대은    김동현    김명걸    김민남    김병익
김순경    김양래    김언호    김영환    김종철    김창선    김태진    김학천    남기재    맹경순   
문영희    박경희    박순철    박종만    박지동    서권석    서창식    송경선    송관률    송준오   
신영관    신해명    심정섭    양한수    오봉환    유영숙    윤석봉    윤성옥    이경자    이규만   
이기중    이길범    이동운    이명순    이문양    이부영    이영록    이재민    이종대    이종덕   
이종욱    李宗郁    이지선    이태호    이해성    임부섭    임수진    임응숙    임채정    임학권   
장윤환    정동익    정연주    정영일    정흥렬    조강래    조영호    조학래    최남경    최학래   
한현수    허  육    홍명진    황윤미    황의방   
(이상 75명)   

명예위원 13인

고 천관우 위원( 전 동아일보 주필)
고 송건호 위원(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고 제임스 시노트 신부(한국명 진필세)
고 백기완 선생
이해동 목사
함세웅 신부
홍건표(AP통신),
정호상(아사히 신문),
다메다 에이이찌로(아사히 신문),
오구리 게이따로(아사히 신문),
에자와 고지(교도 통신),
오노다 아끼히로(교도 통신) ,
후루노 요시마사(마이니찌 신문) 
(이상 13명)

자유언론실천선언
自由言論實踐宣言

우리는 오늘날 우리사회가 처한 미증유(未曾有)의 난국(難局)을 극복(克服)할 수 있는 길이 언론(言論)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宣言)한다.

민주사회(民主社會)를 유지하고 자유국가(自由國家)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기능(社會機能)인 자유언론(自由言論)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抑壓)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宣言)한다.

우리는 교회(敎會)와 대학(大學)등 언론계(言論界) 밖에서 언론의 자유회복(回復)이 주장되고 언론인의 각성(覺醒)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自由言論)은 바로 우리 언론종사자들 자신의 실천(實踐)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許容)하거나 국민대중(國民大衆)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自由言論)에 역행(逆行)하는 어떠한 압력(壓力)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自由民主社會) 존립(存立)의 기본요건(要件)인 자유언론(自由言論) 실천(實踐)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宣言)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決議)한다.

1. 신문(新聞), 방송(放送), 잡지(雜誌)에 대한 어떠한 외부간섭도 우리의 일치(一致)된 단결(團結)로 강력히 배제(排除)한다.
1. 기관원(機關員)의 출입(出入)을 엄격히 거부(拒否)한다.
1. 언론인(言論人)의 불법연행(不法連行)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연행(不法連行)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歸社)할 때 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