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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의 출범과 대중조작동아일보 대해부 4권 -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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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19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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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정당과 ‘관제야당’의 짝퉁 다당제

1981년 들어 전두환의 ‘제5공화국 창건’은 민주정의당(민정당)의 창당과 대통령후보 지명으로 시작됐다. 민정당은 1월 15일 창당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열어 대통령 전두환을 초대 총재 및 제12대 대통령후보로 선출했다. 동아일보는 그 기사를 1월 15일자 1면 머리에 올리고 3면에는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요지 등 관련 기사를 실었다. 그중 특히 눈길을 끈 기사는 1면 ‘오늘의 초점’이라는 난에 실린 「‘새 정치의 장’ 다짐하는 정치제전 / 창당 1호」로서, 이미 짜여진 각본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켰다. 광주 항쟁의 붉은 피가 마르기도 전에 동아일보는 전두환의 5공 정권에 대해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동아일보의 ‘전비어천가’는 1월 16일자 3면의 통단사설로 이어졌다.

  개혁주도세력임을 자임하는 ‘새 정당’이 출범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제5공화국 헌정 아래서의 첫 정당이다. 구정치 질서가 종언을 고했던 5·17 이후 8개월, 지난해 11월 28일의 창당선언 이후 불과 48일간의 짧은 회임 기간이었지만 민주정의당의 창당대회 안팎 규모는 정당 창당사상 초유였다.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며 등장한 최초의 정당이란 점 말고도 전두환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현 정치주도 세력이 모체가 됐다는 점에서 이날 대회에 쏠린 눈은 많다. 현직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기로는 지난 71년 3월 17일 7대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구 공화당의 마지막 전당대회가 있은 지 꼭 10년만이란 사실도 이날의 ‘정치제전’에 눈길이 쏠린 또 다른 이유다.
  수많은 피켓과 9천여 명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 대통령은 수락연설을 통해 “지금까지 나 자신을 정치인이라고 여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제 싫건 좋건 나는 정치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고 밝혔다(1월 15일자 1면 상자기사).

  ‘정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이래 가장 중요한 첫 매듭으로 ‘민주정의 당’이 정식으로 창당되고 총재와 대통령후보로 전두환 현직 대통령이 추대됐다. (···)
  전두환 대통령은 그의 당 총재 및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소신을 피력했다. 무엇보다 우선 ‘정치의 근대화’를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정치의 근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반드시 뚜렷하지는 않으나 대통령이 어느 정당의 당원이 되어 그 당이 내거는 정책을 선거를 통해 지지받아 정당정치를 해나간다는 극히 상식적인 생각이 곧 정당 근대화의 한 가닥임은 분명하다. 전 대통령 스스로의 말로 “정치는 모든 것의 상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저변”이라고 했는데 이는 맨 위에 국민이 있고 그 다음에 국민의 뜻을 모으는 의회가 있고 그 안에 당이 있고 그 밑에 당의 뜻을 펴는 총재 또는 당 출신 대통령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통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
  우리의 제5공화국 헌정이 요구하는 것이 이제 민정당이 현직 대통령을 다음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마지막 정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민정당의 앞날의 과제는 정말 만만한 것이 아니다. ‘새 정치’를 앞세워 ‘역사에 신화를 남기는 정당’이 될 것을 다짐하면서 창당된 민정당의 앞날에 영광이 있기를 바라며 무엇보다 정치근대화를 솔선수범해주기 바란다(1월 16일자 사설).


5공의 출발은 짜놓은 각본에 따른 진행에 불과했다. 전두환의 민정당이 1월 15일 창당된 데 이어 이틀 뒤에는 총재 유치송의 민주한국당(민한당), 그리고 그 일주일 뒤인 1월 23일에는 총재 김종철 한국국민당(공화당 이념계승)이 창당됐다. 민한당과 국민당은 ‘관제야당’으로 불렸다, 심지어 민정당은 1대대, 민한당은 2중대, 국민당은 3소대라는 말이 정치권에서 떠돌았다. 신군부 세력은 집권정당을 위해 다당제의 모양을 갖추려고 들러리 야당들을 만들게 한 것이다. 사실 그것은 1980년 10월2 7일 공포된 개정헌법을 토대로 하고 있었는데, 그 개헌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동아일보는 민정당 창당 이틀 만인 1월 17일 창당한 민한당에 대해서도 전두환이 강조한 ‘정치 근대화’를 촉구했다.  1월 19일자 3면 통단사설(「‘민주한국당’ 창당 / ‘정치의 복권’에 솔선수범 있기를」)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얼마간 당겨진 정치일정에 맞추어 정당들의 창당이 숨 가쁘다. 대통령 선거 공고를 겨우 9일 앞두고 지난 15일 정식으로 발족한 민정당에 이어 7일 앞둔 17일에는 ‘민주한국당’이 창당대회를 열어 총재와 대통령 후보를 지명했다. (···)
  (···) 세상이 달라졌다는 소리가 안 들리는 구석이 없는데, 한국 야당만이 안 달라져서는 정치의 근대화는 가망이 없다. 물론 야당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어쩌면 그 책임이 여당의 대야 자세에 더 달렸는지도 모른다. 이 점 정치의 근대화를 남 먼저 힘주어 강조한 민정당의 응분의 대야 배려를 기대하게 되는 소이다. 그러나 올바른 야당의 길을 닦아 그 길의 연장 위에 집권의 꿈을 키우는 1차적 책임은 야당 스스로에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
  의회주의와 정당의 기능 회복을 통한 ‘정치의 복권’과 일대 ‘민족화합 운동’을 강조한 유치송 총재 겸 대통령후보의 연설에 우리는 지지를 아끼지 않으며 민한당 스스로 솔선수범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려운 속에 새로 첫 발을 내디딘 ‘민주한국당’의 앞날에 영광이 함께 하기를 빈다.

  5공 헌법은 유신헌법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간선제를 택하고 있었다. 그 대신 그 헌법은 대통령 선거인단을 선출한 뒤,  선거인단이 정당의 추천을 받은 후보들 중에서 대통령을 뽑도록 했다. 간선제지만 직선제와 같은 효과를 내도록 한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기실 대통령 직선제를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신군부는 또 그 헌법의 발효와 동시에 국회를 해산하고 국회 기능을 대신하는 입법회의를 설치해 입법 기능을 수행하도록 했다. 전두환이 임명한 입법위원들이 각종 법률을 제정하게 한 것이다. 새 헌법은 또 소급입법이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정치인들의 공민권을 제한하고  신군부의 집권에 방해가 될 정치인들 정치활동을 규제하도록 했다.

게다가 기존 정당을 해산하고 국가가 정당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할 수 있게 함으로써 민한당과 국민당의 창당을 돕고, ‘관제 야당’으로 기능하게 한 것이다. 신군부는 대통령선거법과 국회의원 선거법 및 정당법, 그리고 정치자금법 등 정치관계법을 일방적으로 재정비해 정당 다원주의 흉내를 내면서 ‘전두환 독재’를 합법화한 것이다. 이미 의도했던 대로 법과 제도의 정비를 완료하자 신군부는 새 헌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갖추어 놓은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언론의 나팔수 역할은 그것을 실감나게 했다. 전두환은 요식행위에 불과했지만 대내적으로 선거를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고, 대외적으로는 합법적 정권으로 인정받는 절차를 밟아 나갔다.


전두환의 미국 방문과 김대중 감형

대내적 절차가 착착 진행되는 가운데 1981년 1월ㅜ22일 전두환과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회담이 서울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됐다. 한미 정상회담 발표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우려곡절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 이후 워싱턴 방문을 위해 온갖 노력을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레이건이 당선된 뒤 교섭이 급진전되었다. 이란에 잡혀 있던 미국인 인질들도 풀려났다.

이미 1980년 12월부터 한미 간에 전두환의 미국 방문을 두고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김대중에 대한 감형 등을 조건으로 전두환의 방미가 결국 성사된 것이다.

동아일보는 그것을 국가적 경사인 듯이 대서특필했다. 1월 22일자 1면 머리에 통단기사(「2월 2일 한·미 정상회담 / 전 대통령 28일 방미」)를 싣고「불편한 관계 청산 우호 강화 / 한미 방위동맹 중요성 확인」 등의 부제를 달았다. 3면과 5면에도 관련 기사를 실었다. 「레이건과 한미 정상회담」이라는 사설은 레이건이 취임한 후 첫 번째로 전두환을 초청했음을 강조하면서 그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등 ‘레이건을 통한 전두환 띄우기’에 열심이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선서한지 불과 26시간 만에 전두환 대통령의 미국 초청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전 대통령은 오는 28일 미국을 방문하여 2월 2일 한미 정상회담을 갖는다. 
  레이건 대통령의 전 대통령 초청은 레이건 취임 이후 첫 번째로 취해진 외국원수 초청이라는 점에서 그가 한미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동시에 그동안 만만치 않게 얽혀온 현안의 조속한 해결을 서두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양국 관계 개선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레이건 대통령은 널리 알려진 철저한 반공 보수주의자로 호전적 공산집단의 위협을 받고 있는 한국의 안보에 남달리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고 있는 우리지만 “우리들의 이상과 자유를 함께하는 이웃과 우방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들의 역사적 유대를 강화하겠다”고 천명한 취임사가 있은 바로 그 다음날 한미 정상회담을 발표하여 그의 대외원칙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것은 마음 든든하다.

한미 정상회담이 발표된 후 전두환 정권은 1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김대중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이어 비상계엄을 해제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은 죽음을 면하게 됐고 비상계엄은 선포 4백56일 만인 1월 24일 24시(25일 0시)를 기해 해제됐다. 동아일보는 1월 23일자 1면 머리에 「김대중 무기로 감형 각의 의결 / 전 대통령의 형 감형 검토 지시 받고」라는 기사를 올리고, 1면 하단에 「김대중 탄원서」 내용을 상자기사로 소개했다. 김대중의 ‘탄원’에 따른 전두환의 ‘관용’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까? 동아일보는 하루 뒤1월 24일자 통단사설(「‘김대중 사건’ 단락 / 화합 위한 ‘정치’의 더욱 폭넓은 전개를」)을 통해 그 조치가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적 배려’임을 재삼 강조했다.

  정부는 23일 김대중 피고인이 지난 18일자로 전두환 대통령에게 무인이 찍힌 탄원서를 제출했다고 밝히고 그 사본을 공개했다. 탄원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각하. 본인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계엄령 포고 위반 등 사건으로 1,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현재 상고 중에 있습니다.
  본인은 앞으로 자중자숙하면서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아니할 것이며 오직 새 시대의 조국의 민주발전과 국가안보를 위하여 적극 협조할 것을 다짐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본인과 특히 본인의 사건에 연루되어 현재 수감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특별한 아량과 너그러운 선처 있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1월 23일자 1면 상자기사).

  우리정치의 일종 원죄를 느끼게 하는 ‘김대중 사건’에 하나의 중요한 단락이 지어졌다. 사법절차로는 대법원이 23일 피고들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극형과 중형이 그대로 확정됐으나 같은 날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적 배려로 국무회의가 김 피고의 형을 사형에서 무기로, 나머지 11명의 관련 피고에 대해서도 3~5년씩 감형키로 의결한 것이다.
  (···) 그동안 내외의 관심이 그토록 쏠렸고 바로 그런 짙은 관심 때문에 도리어 극형이 집행될지도 모른다는 기우가 일부 없지 않았던 만큼 대법원의 확정판결에 이어 바로 그와 같은 감형을 서둘러 결정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
  우리는 “70년대의 대립 정치상황과 10·26 이후 야기됐던 국정 혼란기의 방황을 청산하고 새 역사를 여는 지금 과거의 악몽을 가지고 5공화국의 서장을 얼룩지게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 김대중 사건 피고들의 감형을 결정했다는 정부 대변인 이 문공장관의 말에 정말 동감하면서 보도된 바 김대중 피고 자신의 “그간 국내외에 물의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국가 안보에 누를 끼친데 대해 책임을 통감하며 국민 앞에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탄원 내용을 견주어 보게 된다. (···)
  김대중 사건 피고들에 대한 감형은 비단 국내 정치에 화합의 기운을 일깨웠다는 의미보다 더 크게 국제적으로 우리의 정치적 성숙을 과시했다는 데서 좋았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많은 식자들 간에 염려의 씨가 됐던 이른바 한미 간의 ‘현안’ 그리고 직접 불붙어 튀기까지 했던 한일 간의 ‘불편한 관계’, 또 나아가 우리와의 관계가 나날이 커가는 서구 여러 나라의 반응 등이 모두 김대중 극형을 놓고 벌어졌던 일이다.
  (···) 정부는 김대중 사건 피고들에 대한 감형에 붙어 “70년대의 구 정치는 작년에 야기된 극도의 사회 혼란과 사북·광주 사태 등의 폭동 등으로 일대 국가적 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사실상 ‘파경’으로 종말을 고했으며 김대중 사건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하고 “김대중은 70년대 구 정치에서 ‘반체제’였으며 새 시대 정치와는 본질적으로 관계없는 자이며 그 일당의 범죄는 구 정치의 연장선상에서 자행되었다는 점이 새 시대의 개막에 앞서 국가원수에 의해 특별히 관용된 배경”이라고 설명했는데, 그와 꼭 같은 배려로 김대중 사건뿐 아닌 다른 구시대적인 사건들도 하루 빨리 단락을 짓도록 부탁하고 싶다(1월 14일자 사설).

전두환, 제12대 대통령 되다

전두환은 미국과의 ‘거래’를 통해 국내 사태를 정리한 다음 1981년 1월 28일부터 2월 7일까지 미국을 방문했다. 2월 2일에는 레이건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전두환은 외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레이건의 초청자가 되어 백악관을 방문하게 됐다. 레이건은 백악관에 들어서는 전두환에게 의례적 인사말을 하는 대신 친밀함을 보이려는 듯 포옹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미국의 환대를 받은 전두환으로서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한국의 모든 언론은 전두환 찬양에 몰두했고 동아일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동아일보는 전두환의 미국 방문 기간 중 더없이 전두환의 위상을 높이는 보도에 열을 올렸다.
전두환은 이어 확정된 수순에 따라 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선거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민한당의 유치송, 국민당의 김종철, 민권당의 김의택이 대통령 선거에 들러리로 나서 형식상 경선의 모습을 보여줬다. 동아일보는 그 날짜 1면 머리기사(「전두환 후보 12대 대통령 당선 / 유효표 90.2% 얻어」)를 통해 5공 헌법에 의한 첫 대통령선거 소식을 전했다. 조선일보가 사설과 특집 등을 통해 전두환과 5공에 대한 찬사에 열을 올리는 동안 동아일보는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는지 25일자에 사설 대신 1면의 ‘오늘의 초점’(「조용한 간선」)을 통해 대통령 간점선거의 현장을 소개했다. 동아일보는 이어 2월 26일자부터 「제5공화국에 바란다」라는 제목으로 외부 인사들의 기고를 싣기 시작했다. 2월 25일자 1면에 나온 「조용한 간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권’의 향방이 이미 판가름 나 있는 탓인지 제12대 대통령을 정식으로 뽑는 투표장의 분위기는 마냥 조용했다.
  지난 11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인 선거 결과 민정당 소속 후보들이 압승, 전두환 후보의 당신이 확실시돼왔다는 점에서 25일의 본선거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정치적 의미는 적지 않다. 79년의 10·26 사태 이후 ‘격변’으로 점철돼온 16개월간의 과도기적 질서에 대한 공식적 결별인 동시에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최초의 대통령 선출이며 국정 최고책임자에 대한 정통성이 부여되는 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민주’와 ‘복지’ 그리고 ‘대화합’을 바라는 국민들의 여망이 어떤 각도로 어떻게 결실되어지느냐 하는 기대와 함께 이날의 선거는 또 헌정사상 처음 실시한 제도라는 점에서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앞으로의 과제로 남겼다고 보여진다.

 
전두환은 1981년 3월 2일, 부마 항쟁, 사북 사태, 광주 항쟁 관련자 등 모두 5천여명에 대한 사면·복권·감형을 실시했다. 3월 3일 있을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을 하루 앞두고 내린 새 시대의 ‘관용’인 셈이었다. 동아일보는 3월 3일자 1면 머리기사 (「“전쟁·빈곤·탄압으로부터 해방 ”/ 전두환 12대 대통령 취임··· 5공화국 출범」)를 통해 취임식을 내용을 전했다. 취임사는 전두환과 5공의 ‘악마적 특징’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중계방송하듯이 그것을 보도하면서 3면과 7면에 취임사 요지 등 관련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3면 사설(「전두환 대통령의 취임 / -새로운 ‘대통령상’의 정립을 바란다-」을 통해 전두환 정권에 법치주의를 강조하며 ‘우정이 넘치는 충고’를 제시하기도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3일 임기 7년 단임의 제12대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 제5 공화국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내외 귀빈 9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된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통해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시련과 고뇌의 시대를 넘어서서 이제야말로 제5공화국의 출범으로 자기 완성 시대를 형성하여야 할 성장과 성숙의 시대에 들어서는 찰나에 있다“고 말하고 그동안 국민 모두가 갈망해온 ‘전쟁 위협’과 ‘빈곤’ ‘정치적 탄압과 권력 남용’ 등 세 가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다짐했다.
  (···) 전 대통령은 “정치적 탄압과 권력 남용이 이 땅에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법으로 국정을 집행하고 정부를 이끌어갈 것”임을 분명히 하고 “특정인을 위한 법의 개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있어서는 안 되며 특정 이익단체를 위한 권력 남용도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대통령은 이 같은 ‘3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확고한 우리의 것으로 함으로써 그 위에서 국민의 복지를 기약할 수 있는 유산을 후손에게 넘겨줄 수 있다고 강조하고 “한 사람의 특정인이나 소수의 지도층만으로 역사를 창조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다(3월 3일자 1면 머리기사).


  우리는 헌정사의 또 한 시대가 구획되는 분기점에 마주 섰다. 전두환 대통령의 제12대 대통령 취임은 흔히 보는 민주국가의 통상적인 정권 계승 또는 교체에 뒤따르는 단순한 의식의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정확한 시대 구분의 논의는 뒤로 미루더라도 그의 대통령 취임과 함께 닻을 올리는 ‘제5공화국’의 출범은 역사의 평가를 기대하고 또한 기다려야 하는 무거운 첫 걸음인 것이다.
  (···) 일찍이 미국의 전 대통령 트루먼은 “그 책임을 져보지 않은 사람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실제로 이해할 수 없다. 그를 얽어매는 책임의 사슬은 끝이 없으며 자신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잊는 일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물며 헌정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야 하는 우리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때문에 우리는 새 대통령의 취임을 경하하면서, 또 한편으로 그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는 ‘걱정의 동참’에도 등한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새 대통령은 그의 취임사에서 민주주의 토착화, 복지사회의 건설, 정의사회의 구현, 그리고 교육 혁신과 문화 창달을 국정의 지표로 제시했다. 그 모두가 우리의 당면과제로 파악된 지 오래이면서도 실현되지 못했던 정책의 항목들이다. 그것은 목표의 추상적 집약에는 일치했으면서도 그 구체화 과정이 부실했다는 방증에 다름 아니다.
  (···) 새 대통령은 또한 전쟁과 빈곤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역설하고 아울러 법치주의를 강조했다. 민주주의의 특징은 신이나 권력이나 사람의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에 있다는 것은 새삼 되풀이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법치주의가 제정법의 만능주의로 흐르는 것은 경계되지 않으면 안된다. ‘악법도 법’임을 역설하면서 사실상 집권의 방편이나 연장을 위해서 제정된 법의 준수를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법의 지배’일 수 없다. 비록 자연법 사상에는 이르지 않더라도 공동선 또는 순리를 바탕으로 하는 ‘법의 지배’라야만 법치주의는 명실을 갖추게 되며 또한 실현이 가능하다(3월 3일자 사설).

제11대 총선, 예정된 민정당의 승리

1981년 3월 25일에는 5공의 첫 총선인 제11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그 선거 역시 대통령 선거와 마찬가지로 민정당의 승리가 예상됐다. 이미 경쟁력 있는 정치인의 활동을 금지시킨 데다 선거제도 역시 민정당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역구를 77개에서 92개로 늘리고 한 선거구에서 2명의 의원을 선출하며, 전국구 의원은 지역구의원 수의 절반으로 했다. 한 선거구에서 2명의 의원을 선출하게 한 것은 민정당에 절대 유리한 구도였고, 전국구 의원 92명 중 제1당이 3분의 2인 61석을 차지하도록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민정당은 지역구에서 90석, 전국구에서 61석을 차지해 1백51석을 확보함으로써 전체 의원 수 2백76석 중 과반인 1백38석보다 13석 많은 1백51석을 차지했다. 민정당은 일당지배의 패권정당이 되었다. 동아일보는 11대 총선 결과를 3월 26일 1면 머리에 싣고 「총선 민정 전국서 압승」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3면의 정치부기자 긴급좌담은 “국민들이 ‘견제’보다는 ‘안정’을 택한 것”이라고 총선을 분석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3면 사설에서 민정당의 승리가 유권자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던 사정의 반영”이라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총선을 구조적이고 비판적으로 평가한 결과였다. 「국회의원 총선을 끝내고 / -표의 의미가 살아나는 정치의 앞날을-」이라는 제목의 사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치는 그중에서도 선거는 원리에 있어 선택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선택은 때와 곳 그리고 상황에 따라 폭이 거의 숙명적으로 제한되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5공화국 첫 국회 구성을 위한 1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정당세가 압승한 것은 그 자체 뚜렷한 유권자들의 선택이지만 한편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던 사정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른바 다당제 얘기가 그동안 많았던 것이 사실이고 갑자기 생겨난 다당의 경합이 있기는 했지만 유권들의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당은 스스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
  또 선거는 점의 선택 아닌 선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쪽으로도 이번 총선의 선택의 폭이 없었다. 선이 선택이라는 뜻은 단순히 선거 때라는 한 시점의 추세로 선택이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그 정당이나 후보의 지난날의 ‘한 일’과 앞으로 ‘할 일’을 선으로 이어 그 위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번 총선에서는 어느 당이나 후보가 선을 이루는 정치를 스스로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이 사정이었다 (3월 26일자 사설).

 
광주를 피로 물들게 했던 전두환 정권은 언론의 각색과 연출을 통해 ‘새 시대의 개혁세력’으로 둔갑했으나 실제로는 공포와 폭력 그 자체였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그것을 보여준 한 사례가 ‘한수산 필화 사건’이었다. 보안사령부가 중앙일보의 연재소설 <욕망의 거리> 5월 14일자와 22일자 내용을 문제 삼아 작가 한수산, 편집부국장 손기상, 문화부장 정규웅, 출판국장 권영빈, 출판국 기자 이근성 등을 연행해 무차별 구타하고 전기고문을 가한 것이다.  5월 14일자 연재소설에서 ‘정부의 고위관리’라는 표현으로 전두환을 야유했다는 것 등이 그 이유였다. 특히 시인 박정만은 한수산과 대학 동창이라는 이유로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을 도입하기도 했다. 대학에 상주하는 정보기관원들들이 문제 학생을 적발해 강제로 군에 입영시켜 녹화사업(빨간 물을 빼고 푸른 물을 들이는 순화작업)을 한 뒤 대학가의 동향을 파악하도록 하는 등 학원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것이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진행된 녹화사업의 피해자들 중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살해당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녹화사업이 정치문제화하자 1984년 9월 공식적으로 중단됐지만 그런 공작은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언론은 녹화사업의 실상을 보도하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의 입맛에 맞는 보도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놀자판 ‘국풍 81’과 88올림픽 유치

전두환 정권은 반인륜적 탄압과 함께 국민의 정치적 비판의식을 순치시키기 위한 대중 조작의 방법으로 각종 이벤트와 사업을 개발해 실시했다. ‘국풍 81’이 그 대표적 행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한 것만 보아도 그 행사의 주요 목적이 언론을 통한 여론 조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 허문도를 중심으로 추진된 것으로 알려진 ‘국풍 81’은 일본의 ‘가미카제(神風)’에서 이름을 본 딴 것이었다.
  ‘국풍 81’은 개막행사와 민속제, 전통예술제, 젊은이 가요제, 연극제, 국풍장사 씨름판, 팔도굿, 남사당놀이 등의 행사를 벌였다. 서울 여의도광장을 중심으로 열린 ‘팔도 명산물시장’은 1천만여 명의 엄청난 인파를 모았다. 그러나 ‘국풍 81’은 전두환 정권의 야심찬 기획의 하나로 실행됐지만 결국 다음해부터 사라져버린 1회성 이벤트에 불과했다. 조선일보가 그것을 ‘문화운동’이자 ‘민중의 축제’라고 추겨 세웠지만 동아일보는 부분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동아일보는  ‘국풍 81’이 끝난 후인 6월 2일자 사설(「‘국풍 81’ / -잔치의 흥 속에서 문제점들도 셈해봐야-」)을 통해 에둘러 그 행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것으로 보였다. 

  서울 여의도광장의 ‘국풍 81’ 축제가 끝났다. 지난달 28일부터 1일까지 5일간 열린 이 축제에는 여러 대학팀과 일반팀이 등장하고 연일 수십만의 구경꾼이 모였다. 출연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만들어내는 열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 그러나 모든 잔치 뒤끝에는 항상 아쉬움이 있는 법이고 이번 ‘국풍81’도 예외는 아니다. 첫째, 고유문화의 현대적인 활성화라는 구호에 가려서 참가자들이나 계획하는 사람들에게선 원형 보존 면에서 노력의 부족함을 느낀다. 문화의 계승이라는 면에서 이 축제는 좀 더 원형의 보존에 중점이 가야했다고 본다.
  다음으로 시기 선택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일손이 모자라는 바쁜 농번기에 지방에서 올라온 팀도 많았고 구경 차 올라온 사람도 많았다. 따라서 흥겨운 열기 속에서도 적지 않은 국민이 어정쩡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
  그 규모와 장소도 조금은 더 알뜰한 긴축형이었으면 싶었다. 지난 5일간의 행사기간 중 연 1천여만 명이 여의도를 찾았다. 공연 회수는 총 6백59회, 출연 팀은 일반팀 88, 대학팀 2백24 등 모두 3백32팀이었고 공연 인원이 1만5천여 명이었다는 숫자가 그 규모를 말해준다. 이 정도 잔치에는 막대한 돈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너나없이 근검절약을 강조해야 되는 어려운 마당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전두환 정권이 1981년 추진한 각종 계획 중 최대 수확 가운데 하나는 1988년 올림픽 유치였다. 1979년 서울시는 올림픽 유치 계획을 발표했으나 박정희 사망 이후 올림픽 유치 신청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1980년 11월 전두환의 지시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제출했다. 한국 측의 국가적 유치활동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경쟁지인 일본 나고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막상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치러진 88올림픽 개최지 최종 결정 투표에서 서울은 예상을 뒤엎고 52표를 얻어 27표를 얻은 일본 나고야에 압승하면서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동아일보는 그 소식을 10월 1일 1면 통단 머리기사로 다루었다. 그리고 2면부터 8면까지 사설부터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온통 88올림픽 유치 관련기사로 지면을 장식했다. 동아일보는 1981년 12월 30일 ‘올해의 인물’로 88올림픽 유치단을 선정하기까지 했다. 한국을 세계에 부각시켰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전두환으로서는 화룡점정을 찍은 셈이었다.

서울의 88년 가을 하늘에 올림픽기가 올라간다. 서독 바덴바덴의 올림픽회의는 88년 하계올림픽 장소를 서울로 결정했다. (···)
  (···) ‘서울 올림픽’은 세계 앞에 한국의 역량을 알리는 보기 드문 기회가 될 것이다. 세계는 우리를 보게 되고 따라서 ‘서울 올림픽’은 최대의 국위 선양의 축전도 될 것이다. 이 결정의 순간에 우리로서는 서울이 예전의 어느 개최지보다도 차질 없이 적확하게 훌륭하게 올림픽을 치러나갈 수 있도록 그 목표를 선정해야 한다. 올림픽이란 대역사는 국력의 바탕 없이는 또 국민의 지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서울 올림픽’이 정치적 경기가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올림픽의 정신과 헌장에 입각하여 올림픽을 준비한다. 이해·우호·평화를 다짐하는 정신에서 세계의 젊은이가 서울에 모이게 되길 원한다. 우리는 올림픽이 평화와 긴장 완화에 크게 이바지한다고 보고 있으며 남북한 관계에서도 이 ‘서울 올림픽’이 좋은 영량을 주게 되리라고 믿는다.


  37년만의 야간통행금지 해제

전두환 정권은 5공 2년째인 1982년 새해를 맞아 획기적 유화 조치들을 취했다. 새해 첫날 문교부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중고교생 교복과 두발의 자유화 방침을 발표했고 연휴를 끝낸 1월 5일 밤 12시를 기해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한 것이다. 통행금지가 해제된 것은 1945년 9월 미국의 군정 치하에서 그 제도가 실시된 지 37년만이었다. 동아일보는 1982년 1월 4일자 사설( 「두 가지 금지의 해제」)을 사설을 통해 그 두 조치를 크게 환영했다.

  새해는 첫날부터 마음 훈훈한 두 가지 ‘해제’를 주었다. 야간통행의 ‘금지’ 해제가 하나이고, 중고생의 머리모양과 교복을 획일화해오던 ‘금지’의 해제가 또 하나이다.
  (···) ‘금지’가 풀리고 보면 누구나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 당연한 것의 해제란 막상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그 두 가지는 우리의 국민생활 질서를 지키는 기본적인 것이었고 우리 교육의 발판의 하나로서 습관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깨는 데에는 적잖은 걱정이 따르기 마련이며 그러니만큼 이번의 결단은 매우 반갑다.
  (···) 오랜 세월 통금의 불편에 익어온 우리의 습관은 곧바로 금지 없는 밤에도 치안 유지에 강력한 ‘협력’으로 작용하여 평화로운 밤으로 가꾸어야 한다. (···)
  또 하나의 ‘금지’는 연전에도 분분하게 말이 오고갔던 문제이다. 획일적인 중고생의 머리모양과 교복·교모는 청소년을 하나의 ‘틀’ 속으로 몰아넣던 구 교육의 유산이며 지난날의 인습에서 무의미한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국민의 마음속에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리라고 본다.
  (···) 그런 속에 개성도 살아나고 인격도 있다. 앞으로의 교육에는 유연성의 소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하는 말이다. 두발모양이나 교복의 자유화도 그런 유연성으로 가는 길이고, 현대풍이며 국제사회에 부합되는 것이다.

 
야간통행 금지의 해제는 국민의 해방감을 자극할 수밖에 없었고 사회 풍속도를 바꾸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크리스마스와 제야의 통금 해제가 주던 자유로움을 1년 내내 가질 수 있었으니 밤의 문화가 발달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통금이 해제된 후 숙박업이나 요식업은 물론  섹스 등과 관련된 산업의 호황이 이어진 것은 당연했다. 박정희의 1970년대가 퇴폐문화 등에 대한 강력한 규제의 시대였다면 1980년대는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 완화와 퇴폐문화에 대한 선별적 해금의 시대였다. 전두환 정권은 두 조치에 대한 환영에도 불구하고 ‘3S’(섹스·스포츠·스크린)으로 불리던 퇴폐적 대중문화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전두환의 시구로 시작된 프로야구

전두환 정권이 공을 들인 프로야구의 출범도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것 중의 하나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 출발부터가 5공의 적극적인 뒷받침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프로야구 출범을 앞둔 1982년 1월 20일 청와대에서 구단주들을 불러 모아 모임을 갖고 당시 관련 장관이던 문교부장관에게 전폭적 지원을 지시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어 체육부를 신설하기로 했다. 3월 20일 신설된 체육부장관에는 5공의 제2인자 격인 노태우를, 차관에는 이영호를 임명했다.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전두환의 시구로 삼성과 MBC의 프로야구 개막전이 시작됐다. 그 뒤후 방송의 스포츠 중계 시간은 계속 늘어갔고 활자매체들도 총동원됐다. 스포츠전문지는 말할 것도 없고 종합일간지들도 스포츠면의 중요한 뉴스로 프로야구를 다루었다. ‘스포츠공화국’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3월 27일자 1면 상자기사를 통해 개막식 사진과 함께 행사 내용을 소개했고, 8면(체육면)에 상세한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축제행사 사진을 실으면서도 조선일보가 대문짝만하게 올린 전두환의 시구 모습을 게재하지 않았다. 「프로야구 원년 / 화려한 출범」이라는 8면 머리기사의 내용도 흥분한 조선일보와는 달리 차분했다.

  마침내 한국 프로야구의 서막이 올랐다. 프로야구는 27일 오후 2시 반부터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대전으로 한국 스포츠의 새로운 장을 펼쳤다.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로 플레이볼된 두 팀의 경기는 3만 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경기에 앞서 한 시간가량의 오프닝 쇼가 베풀어져 프로야구 개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날 프로야구의 개막식에는 유창순 국무총리를 비롯한 3부 요인과 시모다 일본 프로야구 커미셔너, 쇼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 등 외국 프로야구 거물급 인사들이 참석했다.

전두환 정권은 각종 대중 소비적 정책들을 통해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과 사회 비판의식을 마비시키는 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혹독한 탄압을 계속했다. 이른바 ‘녹화사업’과 대학생들에 대한 감시·연행·고문 등이 계속됐고 반공을 정권 안보에 악용하기 위해 간첩단 사건들을 조작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광주항쟁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계엄군의 만행에 대한 저항은 계속됐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대학가의 민주화운동은 계속됐고 학생들의 저항활동은 전두환 독재정권뿐 아니라 미국에 대해서도 행해졌다. 광 주유혈 진압과 전두환 독재정권 지원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겠다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의 미국문화원에 대한 방화 사건은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다. 동아일보는 그 사건을 3월 19일자 11면(사회면) 머리기사로 올리고, 불타는 건물 사진과 함께 「대낮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 / 여자 낀 3명 수배」라는 제목을 달았다. 3월 20일자 사설(「부산 미문화원의 방화 / -어떤 경우에도 테러는 용납될 수 없다-」)은 그 사건의 배후를 북한에 동조하는 지하 좌경분자로 지목했다.

  18일 오후 부산 미국문화원 건물에서 갑자기 불이 나 사상자까지 내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경찰은 이번 사건을 계획적인 방화 사건으로 보고 용의자를 수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된 바 있지만 아무튼 우방의 문화원이 백주에 그와 같은 변을 당한 데 대해 우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유감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 유인물의 내용이나 또 방화 대상물에 미국문화원을 택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번 사건의 배후는 아무래도 평양에 동조하는 지하 좌경 분자의 소행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 우선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미 간의 오랜 우호관계가 이와 같은 일부 분자들의 폭력행위로 손상되지는 않을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한미 관계뿐 아니라 어떤 경우든 테러행위는 그 목적하는 바가 무엇이든 정당화될 수 없음을 믿는 우리는 이와 같은 불상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과 또 그런 행위의 결과가 그런 짓을 저지른 자들이 노리는 바대로 될 수 없음을 기약하지 않으면 안된다. (···· 이번 사건이 한미 우의에 추호의 손상도 끼치지 않기를 바라며 아울러 당국은 또 다른 불상사의 재발을 예방하는 데 만전을 기해줄 것을 당부하고 싶다.

‘부미방(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은 3월 18일 발생했지만 1982년 내내 여파가 지속됐다. 그만큼 민감한 사건이라 언론은 더욱 과민하게 반응했다.

미국문화원 방화는 앞서 1980년 12월 9일 광주에서 일어났다. 광주 항쟁 과정에서 드러난 계엄군의 만행과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으로 광주의 청년학생들이 결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피해가 크지 않자 전두환 정권이  사건의 쟁점화를 피하기 위해 보도를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실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부미방 사건의 동기도 같은 맥락이었다. 부산 고려신학대학(고신대)에 다니던 문부식은 1981년 광주 항쟁에 관련돼 도피생활을 하던 김현장을 만나 광주 학살의 진상을 제대로 알게 됐고, 고신대 등 부산의 대학생들인 김은숙, 이미옥, 유승열, 김지희, 최인순, 박원식, 최충언 등과 함께 부미방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언론은 대대적인 보도를 통해 부미방 사건을 ‘좌경 테러리스트’의 반미테러로 규정했다. 광주 유혈 진압과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 미문화원에 불을 질렀다는 사건의 동기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사건 발생 12일 만인 3월 30일 「미문화원 방화범 4명 검거/ 주범 문부식 등 4명 수배」라는 기사를 1면 머리에 올리고 관련 기사를 11면(사회면) 등에 실었다. 3월 31일자 사설을 통해 방화범의 배후와 관련해 ‘어떤 국제적 음모나 혹은 북과 선이 닿은 배후’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또 같은 날짜부터「지하이념서클」이라는 제목으로 대학가의 실태를 시리즈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번 사건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광주 항쟁에 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으며 원 내 좌경용공 세력라는 전두환 정권의 분석을 그대로 반복하는 식이었다.

  미국문화원 방화범이 잡혔다. 지난 3월 18일 대낮 부산의 미국문화원에 들어가 불을 지르고 혹은 그 일대에 불온전단을 살포했던 일당 중 5명이 12일 만에 잡혔다. 주범 문부식 등 나머지 관련자들도 곧 검거될 것으로 믿는다.
  (···) 그간 6·25를 모르는 세대를 중심으로 순수하지 않은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고 지하서클과 독서회 등에서 공산주의 관계 서적이나 이론이 무분별하게 수용되어온 현상을 보면서 크게 염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염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 이번 미문화원 사건이었다.
  불순세력의 폭주 경향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가를 이번 사건은 일깨워 주었다. 주범 문부식을 중심으로 한 사건 관련 학생들은 지난해부터 불온서적을 탐독, 이른바 ‘의식화’니 ‘현상 개혁’이나 하면서 방화테러, 불온전단 살포 등 북한의 김일성 집단이 바라는 바에 좇아 계획적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주범 문부식은 얼마 전 캐나다에서 적발된 대통령 위해음모 관련자 문지식의 사촌이라고 한다. 과연 어떤 국제적 음모나 혹은 북과 선이 닿은 배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새삼 우리 주위를 유심히 눈여겨 봐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자기 주변을 눈여겨 보다가 두 사람의 시민은 안개 속에서 범인들을 정확하게 꼬집어내는 수훈을 세웠다(3월 31일자 사설).

  (···) ‘언더’로 불리는 지하이념서클이 특별히 문제시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80년 12월 11일 서울대 구내에서 ‘내용이나 술어가 학생의 한계를 넘어 선 것’으로 보이는 유인물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 학교와 정부당국은 이 같은 유인물을 제작 살포, 대학 내 반정부 학생운동을 좌경운동으로 선회시키려고 기도하는 지하서클과 구성원에 대한 집중 분석에 나섰다.
  분석 결과는 대체로 구성원은 비교적 소수이며, 특정서적을 집중적으로 읽고 토론하며, 학내 소요의 배후에서 반정부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구성원조차 서클 규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점조직을 고수한다는 특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 이들 지하이념서클 구성원들이 작성, 학내소요 때 외치는 격렬한 구호는 바로 의식화 작업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당국은 분석하고 있다. 관계자들은 용공적 술어가 나타나는 것도 자유민주주의 같은 이념이나 우리나라가 처한 국가 현실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특정 서적으로부터 얻은 지식을 바탕 삼은 의식화 작업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인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4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충격 외에도 지금까지 대학가 유인물에만 모습을 드러냈던 반미 구호가 의식화를 거쳐 행동으로까지 번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관계자들은 긴장하고 있다(3월 31일자 3면 시리즈 「지하이념서클」‘상’).


경찰은 1982년 4월 1일 ‘부미방’의 주동자인 문부식과 김은숙이 자수해 검거했으며 4월 2일에는 배후 인물인 김현장과 김영애도 검거했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그 내용을 4월 2, 3일자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또 각종 분석 및 해설기사와 시리즈를 3면과 10, 11면 등 종합면과 사회면에 게재했다. 해설과 분석기사들의 내용은 정부 당국의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들이었다. 동아일보는 다만 4월 3일자 사설(「대학서클과 사회」)에서 대학 이념서클의 생성이 “기성세대의 불성실한 작태와 현실 사회의 비합리·부도덕성 등에 대한 불만의 결과”라며 극서을 극복하기 위한 최우선의 방법은 “대학의 자유를 통한 학문적 분위기 조성”라고 주장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이 문부식·김은숙 등 남녀 대학생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데 온 국민은 큰 충격을 받았다. 좌경화한 몇몇 젊은 대학생들의 편협한 맹신이 무고한 학생 등 4명의 사상자를 내고 사회 전체를 잠시나마 불안에 싸이게 한 것은 용서받지 못할 폭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러면서 한편 우리는 대학 내서 계속 생성되고 있는 이념서클에 대해 좀 더 냉정히 숙고해봐야 한다. 이념서클 가담 학생들은 비록 극소수지만 이들은 항상 학교 교육과 ‘현실사회’사이에서 커다란 갈등과 격심한 모순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냉혹하게 인정해야 한다.
  (···) 기성세대의 불성실한 작태와 현실 사회의 비합리·부도덕성 등에 대한 불만의 결과가 학생서클 운동으로 나타났다고 한 번 너그럽게 봐주는 아량도 필요하다. 이런 점을 감안, 문제 해결에 임해야 할 줄 안다. ‘현실 문제’가 엄존하고 있는 한 교과과정의 이데올로기 교육만으로 안이한 해결은 어려울 것 같다.
  (···· 우리 헌법에는 양심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가 명시돼 있지만 오늘날  대학에서 이것이 어느 정도 꽃피고 있는가는 대학인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 것이다. 대학의 자유를 통해 젊은 학생들의 불같은 지식 탐구욕과 사고의 배출구를 열어주는 학문적 분위기가 최우선적으로 마련돼야 한다.
  우리 기성세대는 순수한 학생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무조건 나쁘다고 억압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소리 중 정당한 것은 폭 넓게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도 보여줘야 할 것이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그 자체로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 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 우방으로만 알고 있던 미국에 대해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가톨릭 원주교구의 최기식(신부)과 연관되면서 더욱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최기식은 원주교구 교육원으로 피신한 문부식과 김은숙의 자수를 함세웅( 신부)과 논의했다. 함세웅이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자수 문제를 협의하자 자수할 경우 고문하지 않고 법률적 지원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김현장과 김영애의 자수도 이루어졌으나 경찰은 김현장을 문부식의 문화원 방화 교사범으로 조작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하고 최기식은 범인 은닉 혐의로 구속했다.(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 <암흑 속의 횃불- 증언 제5권>, 가톨릭출판사, 162~171쪽).

언론은 경찰의 일방적 수사 발표 내용을 근거로 엄청난 양의 기사를 쏟아냈다. 동아일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동아일보의 보도나 논평 방향은 천주교의 고민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국가의 실정법과 교회 계율의 충돌 등에 관한 기사가 많은 것도, 당시 원주교구장이었던 주교 지학순 등 성직자들과의 인터뷰 기사를 많이 다루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최기식이 범인 은닉과 자금 제공 혐의로 구속된 4월 8일자 11면(사회면) 머리에  추기경 김수환의 명동성당 미사강론 내용을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김수환은 그날 강론에서 이 사건이 “광주 사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그 많은 언론이 금기처럼 말하지 못한 부분을 직접 거론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2면 사설(「최기식 신부 등의 구속/ 교회와 더불어 비극의 뿌리를 극복해야」)에서도 작심한 듯 ‘광주 사태’를 부미방 사건의 한 배경으로 거론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사제직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으며 사제직의 원천은 예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사제직의 수행과 완성도 이 사랑의 실현에 있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8일 오전 10시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성유축성미사에서 강론을 통해 원주교구 최 신부의 구속 사실과 관련, “사제는 때때로 희생과 박해와 같은 시련을 겪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랑의 길을 가야 한다”며 “최 신부는 양심대로 살아가려다 법의 문책을 받게 됐고 다른 다수의 사제도 같은 위험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또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정치현실과 아울러 뼈아픈 광주사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며 “이 사건은 이 시대 우리겨레의 아픔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여론의 오도로 결국 누가 피해를 보고 누가 이익을 받게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김 추기경은 “최 신부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예수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묻고 “최 신부의 행위는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와 자신을 일체화시키려 했던 예수의 행위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4월 8일자 11면 기사).

정부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주범과 배후 조종자를 은닉해준 가톨릭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 등에 대해 정식 구속을 집행함으로써 범인 은닉이 비록 교회법에 따라야 하는 사제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국법에 따라 이에 형벌권을 발동하겠다는 뜻을 명백히 했다.
  (···) 어쨌든 이번 사건은 어떤 신부의 ‘행동’이 문제이지 교회 전체 ‘교리’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하며 정부와 교회가 자칫 맞서는 경우 국가적으로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은 분명하다.
  한편 우리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의 배후 조종자 김현장이 광주 사태 가담자로서 그동안 수배를 받아왔고 광주 사태의 다른 가담자들도 최근까지 수사당국의 수배를 받아 더러는 체포되기도 해 광주 사태의 비극적인 뿌리가 의외로 깊고 크다는 데 새삼 놀라게 된다.
  (···) 최 신부의 경우뿐 아니라 가톨릭의 많은 신부들이, 그동안 우리 교회가 국사범을 숨겨준 다른 예를 알지 못하는데도 이번에 광주 사태 관련자들을 그토록 숨기고 있었던 사실이 바로 광주 사태의 비극성을 일러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이번 경우 최 신부 등의 실정법 위반을 옹호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피신을 요구하는 자는 누구나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가톨릭의 계율에 대한 배려와 이번 사건의 뿌리에 자리하는 광주 사태 등의 참다운 마무리를 위해 슬기로워야겠다는 생각이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4월 8일자 사설).

천주교회는 경찰의 수사 내용과 언론의 왜곡보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재판부의 사실심리에서 김현장은 방화 사건과 관련이 없고, 최기식과 그것을 상의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문부식은 방화 동기와 관련해 12·12 사태와 광주사태, 그리고 광주 사태에 대한 미국의 묵인 등을 경고하고 국민의 자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는 물고문 등 갖은 고문과 구타 때문에 영웅심으로 방화하고, 사회주의자이며, 북한 방송을 들었다는 자백을 강요당했다. 수사관들은 김현장이 배후 인물임을 자백하고 최기식의 여자관계를 대라며 고문했다(같은 책, 168쪽).

최기식은 법정진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 나의 가슴은 떨림과 울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 어린 학생들과 같이 묶여 이곳저곳, 그리고 이 재판정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내 마음은 언제나 이들과 같이 있고 싶었다. (···) 그들은 군사독재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군사정권에 아무런 저항이나 반응 없이 순응한 것은 우리 기성인들이었다. 광주 살육을 자행한 장본인은 책임을 시민에게 전가하고 그 이전에 하극상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 나는 오직 학생들에게 부끄러울 뿐이며, 학생들이 저항할 때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1982년 12월 13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김현장과 문부식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최기식은 징역 3년에 자격정지 2년, 나머지 기소자 13명은 무기징역부터 기소유예까지의 선고를 받았.


전두환의 느닷없는 의식개혁 운동

전두환은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이 최기식 등의 구속으로 매듭지어진 후인 1982년 4월 10일 느닷없이 ‘의식개혁 운동’이라는 구호를 들고 나섰다. ‘나를 포함한 모든 공직자와 지도층’을 대상으로 ‘뼈를 깎는 고통을 각오하는 솔선을’ 다짐하는 등 심상치 않은 조짐이었다. 동아일보는 4월 10일자 1면 머리기사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10일 금년도 제1차 사정협의회 전체회의에서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부정의식의 잔재를 과감히 추방하고 정직·질서· 창조의 새로운 가치관을 국민 속에 뿌리 내리게 하는 의식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 기사는 전두환이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공직자와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뼈를 깎는 고통을 각오, 용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의식 개혁에 솔선하여 앞장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사정협의회가 정직, 질서, 창조, 책임, 본분, 분수, 주인의식, 국민화합, 가정교육 등 ‘9대 실천요강’을 결의했다고 덧붙였다. 동아일보는 4월 12일자와 17일자  두 번에 걸쳐 2면에 ‘의식개혁 운동’을 지지하는 사설을 내보냈다. 사설에 막스 베버를 인용한 것조차 조선일보와 똑같았다.

  (···) 이 사회는 모든 면에서 “새로운···”이 요구되고 있다. 사회조직은 새롭게 되었다. 특권의식과 부정부패 없는 새로운 정치풍토와 깨끗한 정부의 실천을 위한 개혁 작업이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새로운 부대는 생겼으나 그 속에 담겨있는 국민 의식은 과연 새로워졌는가.
  (···) 지난  적지 않은 이 나라의 권세가와 지도층은 깨끗한 말, 훌륭한 말을 얼마든지 했지만 뒤에 돌아섰을 땐 어이없게도 거짓말쟁이, 지저분한 사람들이었다. 말 다르고 행동이 달랐던 것이다.
  (···) 올해의 제1차 사정협의회가 10일 의식개혁 운동을 시작하면서 공직자와 관계 지도층의 의식 개혁을 우선시킨 까닭도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부정적 의식을 몰아내고 정직·질서·창조의 새로운 가치관을 심는 의식개혁 운동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꼭 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정치는 단단한 벽을 강력한 힘으로 서서히 뚫어가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막스 베버이다. 이 민족의 습성의 벽은 오래되고 단단하다. 이번의 의식개혁 운동은 강력한 힘으로 그 단단한 벽을 서서히 뚫어갈 것으로 기대한다(4월 12일자 사설).

  우리의 정치사에서 정치인에 대한 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거짓말이 예사롭고 파벌을 조성하고 안중에는 일신의 영달과 사복을 채우는 것밖에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것이 우리 사회의 정치인 상이었다.
  (···) 그런 면에서 민정당이 이번에 ‘당직자 청렴생활 및 봉사활동 실천계획’을 만든 것은 평가할 만하다. 그 계획은 청탁행위, 선물의 수수를 금지하고 품위 유지를 의무화했다. 사행적인 투기행위와 지나친 향응이나 낭비성 행사도 금지했다. 기념품과 위문품의 대량 살포나 호화스러운 생활을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어느 하나도 틀리는 항목은 없다.
  정부가 단호한 결의로 벌이기 시작한 국민의식의 개혁 운동이 결실하도록 민정당은 앞장서서 정치인의 의식 개혁에 나선 것이다. 민정당은 이 반부패 규정과 아울러, 한편에선 소속 의원과 중앙당 국장급 이상에 대해 재산등록을 하도록 제도를 마련하여 9월 1일부터 실시할 계획이라고도 한다. 우리의 정치사에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이다.
  (···) 오랜 습성은 하루아침에 일변하기는 어렵다. 그 습성의 벽은 오래되고 단단하다. 그것을 뚫어가는 힘도 정치요,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자면 먼저 정치인의 의식부터 개혁되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4월 17일자 사설).


건국 이래 최대의 금융사기 사건

전두환 정권의 의식개혁 운동은 곧 드러날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금융사기 사건’이자 대표적 권력형 금융 비리인 장영자·이철희 사기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 이전부터 그런 조짐이 드러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친인척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장영자의 형부 이규광은 전두환의 아내 이순자의 숙부였다. 전두환의 장인이자 이순자의 아버지인 이규동(대한노인회 회장)이 이규광의 형이라는 얘기다. 장영자의 남편 이철희는 육사 2기로 유정회 의원과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냈다. 그 정도면  사기 사건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그러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1982년 5월 5일 장영자와 이철희 부부를 엉뚱하게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그 사건을 5월 7일자 사회면(11면) 머리에 올리고 두 사람의 경력과 행적, 그리고 그들의 주요 사업인 사채업 등을 자세히 소개했으나 장영자의 고위층 인척 관계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 사건이 증권가에 알려진 것은 4월 말이이라고 보도했다. 전두환의 ‘의식개혁 운동’이 일어난 배경을 시사해주는 듯하다. 동아일보는 연일 그 사건 보도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5월 8일자 사설(「어느 사채업자의 구속」)에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등 그 배후에 짙은 의구심을 보였다.

  (···) 사채업자 이 모, 장 모 부부의 거액 어음사취 사건이 가져온 충격은 너무나 크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줄을 이어 부도를 면치 못하고 있고 그러지 않아도 내리막길의 증시는 이번 사건의 소문이 전해진 지난 4월 말부터 일대 붕락의 회오리를 겪었다. (···)
  검찰의 발표는 이들 부부가 사채를 주고받은 어음의 사취 여부에 대해서는 증거를 잡지 못한 채 80만 달러의 외화를 은닉했거나 해외 유출시킴으로써 외환관리법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한 것으로 요약된다. (···) 이들 부부로부터 사채를 빌려 쓰고 담보로 어음을 제공했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건설회사를 중심으로 한 유수한 기업들의 진정에 대한 검찰의 철저한 조사가 그 업자의 재산 형성 과정과 함께 밝혀주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이번 사건에 접한 소시민의 1차적인 반응은 어떻게 하여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느냐에 대한 의구심으로 우선 들린다. 자세한 경위는 검찰의 수사로 밝혀지리라 믿지만 대기업들이 어떻게 1개 사채업자의 장난에 놀아날 수가 있으며 자본시장이 이렇게 춤추고서야 어떻게 건전한 투자가를 보호하고 산업자본을 동원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뒤따른다.

그 사건의 전말은 장영자의 어음사기 행각이었다. 장영자는 자금 압박에 시달리는 건설업체들을 찾아다니면서 남편 이철희의 경력은 물론 형부 이규광 (광업진흥공사 사장)의 이름을 팔아 현금을 빌려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2~10 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냈다. 부부는 그렇게 해서 받아낸 어음을 할인해 또 다른 회사에 빌려주었다. 대검 중수부는 5월 11일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 발표에 따르면 그들 부부가 받은 어음은 공영토건 등 6개업체로부터 모두 2천6백24억원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것만으로도 천문학적 액수였. 그러나 검찰의 최종 발표에 따르면 그들이 받은 어음 총액이 7천1백11억원, 그 가운데 할인해 사용한 어음사기 액수는 6천4백4억원에 이르렀다.

동아일보는 검찰의 중간수사 발표를 1면에 보도하면서 비로소 장영자가이 자신의 형부이자 이순자의 삼촌인 이규광을 배후로 내비쳤다고 전했다. 거기에 이르러서야 일반 독자들은 사건의 배후를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동아일보는 검찰의 최종 수사 결고 발표가 있을 때까지 거의 매일 7~8개의 지면에 그 사건에 관한 기사들을 쏟아냈지만 결국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검찰은 5월 20일 종합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사건에 배후세력이 관련되지 않았으며 장 여인이 취득한 자금 중 정치자금으로 유입된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권력형 비리 사건의 전형적인 수사 결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지면에 검찰의 최종 수사발표 내용을 그대로 전하고 2면 사설(「검찰과 믿음의 회복」)에서 검찰의 수사 과정과 내용을 강하게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또 다음 날인 5월 21일자 2면 사설(「어느 할머니의 눈물)」을 통해 그 사건의 다수 피해자인 서민의 고통을 전하기도 전했다. 

  장 여인 사건은 대사건 중의 대사건이었다. 그 규모부터가 충격적이었다. 경제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이 생기고 나라 안을 일종 공황 상태에 빠뜨렸다. (···)
  이번 사건이 이 사회의 양심을 되살리고 국가 기강을 일으켜 세우는 반성의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건에 얽힌 의혹의 안개가 걷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찰의 수사 결과가 일차적으로 그 몫을 옳게 해주어야 한다.
  (···) 사건 수사는 20일로 사실상 단락을 보았다고 하고 토막토막 관련보도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보도만으로는 국민의 소박한 의문을 풀어줄 만큼 충분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느낌이다. (···)
  보도들이 전하는 사건 수사 결과에 의하면 이규광 씨는 이번 사건의 배후라고는 할 수 없고, 은행장이나 기업체 간부에 압력을 넣거나 청탁을 하는 등 배후 역할을 한 사실도 없는 것 같다. 단지 어떤 합작은행 설립을 성사시켜달라고 1억원을 건네받은 것만이 범죄사실로 잡혔을 뿐이다. 그 돈을 받고서도 관계 요로에 청탁한 일도 없다는 것이다.
  (···) 사건의 규모와 경위에 비추어 배후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은 검찰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상식인데 수사 결과 이규광 씨는 어음사기하곤 전혀 무관한양 알려지고 있다면 다른 배후가 있다는 것인가. 그렇게 정력적인 수사가 달포나 계속되었으나 아직 배후 관계는 오리무중이라는 것인가 (5월 20일자 사설).

 
  (···) 장 여인의 어음사기 사건에서 사채시장의 농간은 기막힌 것이었다. 장 여인의 어음을 할인해주고 이자로 몇 억씩 벌어들인 사채업자들이 있다. 숱한 사람들이 그 어음을 잘못 샀다가 하루아침에 망했다. 돈을 벌려고 하다가 손해 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무튼 ‘더러운 손’의 억울한 피해자들은 딱하다.
  수십년 근무한 직장을 떠나면서 받은 퇴직금을 어음에 투자했다가 날린 가장이 있고,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저축한 돈을 앗긴 주부가 있다. 그러나 식모살이 등 손톱 발톱에 피가 나도록 고생하며 모은 돈 9백만원을 날린 서경단 할머니의 경우는 더욱 뭉클하다. (···)
  이·장 부부가 1년 2개월 동안에 49억원을 소비한 호화롭고 사치스런 생활은 이런 딱한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더러운 손의 피해자가 4천명 선은 되리라고 한다. 평생을 금욕적인 미덕을 신조로 알고 꼬기꼬기 쌓아올린 보물을 하루아침에 잃었다 (5월 21일자 사설).

장영자·이철희 사건은 건국 이래 최대 금융사기 사건답게 그 영향도 엄청나게 컸다. 정치·경제계에 미친 충격은 이루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사건으로 법정에 선 사람만 31명에 이르렀다. 그들 중엔 은행장 두 사람을 포함해, 기업체 간부, 전직 기관원, 그리고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 등 다양했다. 대한노인회 회장이던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도 동생이 일으킨 물의를 사과하고 물러났다. 굴지의 회사였던 일신제강과 공영토건은 부도가 났다. 청와대와 권력 구조에도 변화가 일었다. 대통령의 친인척에 대한 조치를 주장했던 인물들이 물러나거나 권력에서 밀려났다. 민정당 사무총장 권정달과, 안기부장이 사표를 냈다. 수사 과정에서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사임하는가 하면 청와대 정무수석 허화평과 사정수석 허삼수도 전두환 부부의 미움을 사 권력에서 멀어졌다. 장영자·이철희 부부는 각각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10년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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