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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에 대한 결정타 ‘부마 항쟁’동아일보 대해부 3권 - 3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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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9.14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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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전반기에는 학생운동도 재야 민주화운동도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8월 11일에 일어난 ‘YH 사건’을 계기로 정국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신정권 말기 권력의 폭거 ‘YH 사건’

1979년 8월 9일 새벽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있는 YH무역의 여성노동자 187명이 마포구의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YH무역은 1966년 자본금 1백만 원, 종업원 10명으로 출발한 작은 가발제조업체였는데, 가발 경기 호황과 정부의 수출지원정책에 힘입어 1970년대 초에는 종업원이 4천여 명이나 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자 창립자인 장용호는 미국에 백화점을 열어 외화를 빼돌리는 한편 은행 빚을 얻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 1978년 제2차 석유파동 이후 가발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YH무역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장용호는 노동자를 5백여 명으로 줄이고 1979년 4월 폐업을 발표한 뒤 8월 6일 2차 폐업 공고를 했다. 7일에는 일방적으로 기숙사와 식당을 폐쇄한다고 통보했다. 졸지에 직장을 잃은 여성노동자들은 폐업의 부당함을 널리 알리고 정부가 합당한 대책을 세워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신민당사에 들어간 것이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농성장을 찾아가 노동자들을 격려하면서 정부의 성실한 대응을 촉구했다.

8월 9일부터 김영삼과 신민당 의원들은 당사 주변을 돌면서 사복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거나 따귀를 치거나 발길로 차는 등 거세게 다루기를 서슴지 않았다. 8월 11일 한밤중에 경찰은 여성노동자들을 내보내라고 신민당에 최후통첩을 했다. 그러나 신민당이 거부하자 경찰관 1천여 명이 그날 새벽 2시경 신민당사에 쳐들어가서 20분 만에 여성노동자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1978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이래 박정희 정권에 불리한 기사를 실은 적이 거의 없었던 언론이 YH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진기한 사태가 벌어졌다. 유신정권의 말기가 오고 있음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권력의 언론 통제가 약해졌기 때문일까?

동아일보 역시 뜨거운 정치적 쟁점이 된 그 사건을 8월 11일자 1면 머리기사로 내보냈다.

  경찰 농성여공 강제해산 / 새벽 2시 신민당사 진입 의원 구타 대변인 중상 / 통고와 함께 들이닥쳐 172명 연행 일부 부상

  (···) 이날 새벽 1시 55분 이순구 서울시경국장이 신민당 측에 경찰 진입을 통고한 직후 철제 방패와 방망이로 무장한 기동경찰이 당사에 돌입, 4층에서 농성 중이던 여공들을 끌어냈다.
  경찰은 의자, 책상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방어하던 신민당 사무처 직원들과 충돌, 당사 안은 수라장으로 변했다. 경찰은 이어 2층으로 올라가 총재실 문을 먼저 부순 뒤 총재실과 회의실 사이에 있는 비서실 문을 파괴, 김 총재 등이 있는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김 총재 등을 회의실 한쪽으로 몰아붙이고 방망이를 휘두르며 한 명씩 멱살 등을 잡고 끌어냈다.
  박권흠 대변인은 경찰로부터 머리와 얼굴 부분을 방망이로 강타당하여 눈과 코가 부어올라 얼굴 형태가 일그러질 정도의 피투성이가 됐고 황낙주 총무는 다리와 어깨 부분 등을 맞았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 7면 머리기사(「심야의 기습 울부짖은 여공들」)에는 “경찰은 ‘101호 작전’이라고 명명된 강제해산작전을 실시, 여공들을 연행했는데 여공 중 김경숙(21) 양이 왼쪽 팔목의 동맥 절단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라는 대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김경숙은 자살을 한 것이 아니라 경찰의 과잉 진압 과정에서 신민당사 옥상에서 추락해 숨진 것이었다. 그래서 신민당과 재야 민주화세력은 그의 죽음은 ‘타살’이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8월 14일자 4면에 「YH 사건의 반성과 과제」라는 사설을 실었다.

  (···) YH 사건이 남긴 과제는 앞으로 다시는 노사분규가 이렇게 극한적으로 발전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일과 이 사건으로 파생된 정국의 경화 상태를 조속히 정상화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자면 우선 겸허하고 냉정한 입장에서 이 사태에 대한 반성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시행 이후 근로자들의 쟁의를 제한한 것은 분쟁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정부가 개입하여 조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 여공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한 후에까지도 노동당국은 방관적인 태도만 취하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보도된 바로는 신민당 측에서 책임 있는 당국자가 와서 사태를 수습하라고 요청하자 관계당국자는 당국이 개입해도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하여 관계관을 현장에 보내지도 않은 것이라고 한다. (·····)
  여당 측은 신민당 측이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한다고 비난했는데 그 비난이 정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여당 측은 솔선하여 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성의있는 노력을 보이는 것이 필요했었다. 만약 보사위를 열어 여야와 관계당국이 사태를 검토했던들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신민당이 그 당사를 여공들에게 농성장소로 허용한 것은 경위야 어떻든 책임있는 공당으로서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일부 신민당원이 농성장에서 자극적인 언동을 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이 역시 무책임한 행위를 했다는 지탄을 면할 수 없다.
  보도에 의하면 여공들은 ‘결사(決死) 총회’를 열어 경찰이 오는 경우 집단 자살을 결의했다는데 아무리 젊은 탓이라고 하더라도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한 일부 인사들은 사태의 조용한 해결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했다고 들리는데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이번 YH 사건은 대단히 유감된 일임에 틀림없으나 비가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이 노사 간에 있어서나 관계당국자들 간에 있어서나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슬기로운 대화의 바람이 이는 계기가 되도록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사설은 YH무역의 여성노동자들이 삶의 벼랑 끝까지 내몰리자 어쩔 수 없이 신민당사를 찾아가 농성을 벌인 사건의 본질은 전혀 거론하지 않고 있다. 긴급조치 9호가 시퍼렇게 살아 있던 당시 그들이 기댈 곳이라고는 재야세력과 종교계, 그리고 야당인 신민당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동아일보는 방관적인 태도만 취한 관계당국, 노동자들에게 농성장소를 허용한 신민당, 극단적인 행동을 한 YH 노동자들 모두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묶어서 비판하고 있다. 

8월 17일 경찰은 도시산업선교회의를 YH 여성노동자 집단농성의 배후 조종세력으로 지목하고 목사 인명진을 구속하는 한편 재야민주화운동 진영의 목사 문동환, 고려대 해직교수 이문영, 시인 고은 등도 함께 구속했다.

  박 정권의 폭력에 항의하여 신민당은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미국 대통령) 카터가 방한한 지 불과 40여 일만에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해 미 국무부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8월 14일 미 국무부는 “경찰 측 행위의 책임자에 대해 한국 정부가 합당한 처벌을 하기 바란다”라고 논평했고, 8월 15일 박정희 정권은 “미국은 명백한 내정 간섭을 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8월 20일, 신민당은 <말기적 발악: 신민당사 피습 사건과 YH 사건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책자를 펴냈는데, 겁에 질린 인쇄소들이 모두 인쇄를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필사한 것을 복사해 세상에 내놓았다. 제1야당의 처지가 그럴 수밖에 없던 그런 세상이었다(<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 3권>, 231쪽).


부마 항쟁의 도화선 된 김영삼 의원직 제명

신민당이 YH무역 노동자들의 당사 농성을 적극 후원한 데는 총재 김영삼의 강경한 반유신체제 노선이 크게 작용했다. 김영삼은 1979년 5월 30일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중도통합론’을 내세우는 사쿠라’라는 비난을 받던 현직 총재 이철승을 누르고 새 총재가 되었다. 1차 투표에서는 이철승 292 표, 김영삼 267 표, 이기택 95표, 신도환 87 표라서 과반수를 얻은 후보가 없어 2차 투표에 들어갔다. 그 결과는 김영삼 378 표, 이철승 367 표였다. 김영삼이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데는 김대중 계열 대의원들의 지지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공민권이 없던 김대중이 유신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체제를 세우려면 김영삼을 총재로 뽑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민당 의원들이 박 정권의 폭력에 항의하는 당사 농성을 하고 있던 8월 13일, 이미 그때부터 박 정권은 이상한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 박 정권은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을 사주하여 김영삼을 비롯한 총재단 전원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도록 하였다. 그 내용인즉슨, 당원 자격과 대의원 자격이 없는 22명이 전당대회에 참석해 투표를 했기 때문에 김영삼의 당선은 무효라는 것이었다.
  9월 8일 서울민사지법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전당대회 의장 정운갑을 총재 직무대행으로 선임했다. 김영삼은 9월 10일 기자회견을 통해 ‘박 정권 타도를 위한 범국민적 항쟁’을 선언했다. (·····)
  (···) 김영삼은 이어 9월 15일 미국 뉴욕타임스와 회견을 한 자리에서 “카터 미 행정부는 소수 독재자인 박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
  그러자 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의 발언을 ‘사대주의’ ‘반국가적 언동’으로 규정하여 김영삼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징계안을 내더니 10월 4일 경호권을 발동한 가운데 김영삼 제명 결의안을 10분여 만에 변칙으로 통과시켰다. 이승만 정권 이래 31년 만에 처음으로 발동된 국회 경호권이 야당 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데에 사용된 것이다. (·····)
  박 정권의 이런 폭거에 대응하여 10월 13일 신민당 소속 의원 66명 전원도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통일당 의원 3명도 동조했다. 미국도 ‘개탄’을 표명했다(같은 책, 236~239쪽).

김영삼이 의원직을 박탈당한 10월 4일 이후 신민당 의원들이 박 정권을 상대로 강경한 투쟁을 벌이자 동아일보는 여러 날 동안 침묵하다가 10월 13일자 3면에 「정국의 추이를 주시한다」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 이번 사태의 직접 원인은 한마디로 가깝게는 김 총재의 제명이고, 멀리는 YH 여공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김 총재의 제명은 한마디로 여당의 정치역량의 빈곤이 가져온 불행한 사건이다. 김 총재의 제명은 아직 며칠이 되지 않았으나 지내놓고 보면 어째서 여당 측이 그때 그렇게도 여유가 없었는지 더욱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김 총재에 대한 징계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을 때만 해도 우리는 그것이 그에 대한 여당 측의 정치공세의 일환이라는 정도로 해석했었다. 그러나 징계동의안이 국회에서 전격적으로, 그리고 변칙적으로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을 때 국민이 받은 실망과 충격은 그만큼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태 이후 국민의 여론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보다 여당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일찍이 전례 없는 야당의 의원직 사퇴서 제출이라는 불행한 사태를 맞이하여 앞으로 여당이 어떻게 대처할지는 알 수 없으나 최대한의 성의로 임하기를 바란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하물며 사실상의 단일야당의 당수가 의회에서 추방당한 사태로 빚어진 것이 이번 사태라고 할 때, 구구한 국면 호도책으로 나올 일은 아니라고 본다. (···)
  신민당이 자기 당의 당수에 대한 의원직 박탈 사태에 대항하여 의원직 총사퇴서를 제출한 데 대해 우리는 그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의원직 사퇴서 제출 자체가 하나의 투쟁방안일지언정 목표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여 앞으로의 사후대책에 국가적 입장에서 또 정국의 정상화를 위해서 신축성 있는 자세로 임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여협상의 창구는 항상 열어놓고 있어야 할 줄 안다. (·····)
  오늘 우려할 사태를 맞아 여야 정치인들은 사심 없는 입장에서 조속히 여야 대화로 국면 타개책을 강구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 사설은 늦게나마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이라는 공화당의 폭거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 논조는 안일하기 짝이 없다. 그런 짓은 박정희의 지시나 묵인 없이는 공화당의 그 누구도 저지를 수 없는 것이었다.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는 박정희의 ‘광란적 행태’를 거론하지 않은 채 “여야 대화로 국면 타개책을 강구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한가한 주문이었다.


부산 항쟁과 비상계엄 선포

10월 16일 오전 10시경 부산대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독재 타도”를 외치던 학생 2천여 명은 정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전투경찰의 진압대가 철문을 부수고 교내로 들어가 최루가스를 내뿜자 학생들은 운동장 쪽으로 밀려갔다가 구 정문 쪽을 돌파하고 교외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 부산대 시위학생은 5천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세 갈래로 나누어진 학생들은 경찰과 공방전을 펼치며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면서 시민들을 향해  “2시 부산역 집결” “2시 시청 앞 집결”이라고 외쳤다.

오후 2시경 부영극장 앞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자 경찰기동대가 그들의 머리 위로 최루탄을 쏘아대며 방망이로 구타했다. 시내에서 그렇게 터진 시위는 퇴근길의 노동자들과 직장인들이 합세하면서 중심가 전역으로 번졌다. 오후 7시경 도심의 대로는 시위 인파로 가득 찼다. 경찰이 최루탄과 방망이로 무차별 공격을 가하자 군중은 게릴라처럼 파출소들을 습격했다. 1960년 4월 19일 서울의 시위를 연상시킨 부산 민중항쟁의 첫날이 지난 뒤 전국의 모든 언론은 하나 같이 입을 다물었다.

부산의 학생과 시민들은 이튿날인 10월 17일에도 전날보다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18일 새벽 1시 30분까지 계속된 시위로 파출소 21곳이 불에 타거나 파손되는가 하면 경찰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다.

이틀 동안의 시위에서 군중이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언론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였다.

부산 항쟁에 관해 단 한 줄의 기사도 쓰지 않던 언론은 10월 18일에야 비로소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비상계엄 선포가 먼저이고 시위는 부수적이었다.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 제목만 보아도 그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부산에 비상계엄 / 대학생들 소란으로  18일 0시 기해 / 불순분자 경거망동 발본 / 박 대통령 담화 / 부산 사태 기본질서 위협」

나중에 ‘부산 항쟁’이라고 불리게 된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사는 정작 1면 중간에 5단 기사로 나와 있었다. 치안본부의 발표문을 그대로 옮긴 기사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부산·동아대생 3천여 명 / 16·17 연이틀 도심서 시위 / 경찰 56명·학생·일반시민 등 다수 부상 / 파출소 21곳·경찰차량 18대 방화 / 정권 타도 주장-도청·방송국 등 침입

  지난 16일 부산대학과 동아대학 학생 3천여 명이 교내에서 정권 타도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제지로 오후 5시경 해산되었다가 부산시내 중심지 번화가 일원에 다시 집결, 2백~5백 명씩 6개 방면으로 진출해 해산을 종용하는 경찰과 대치하던 중 날이 어두워진 것을 틈타 합세한 일부 불순분자들과 경찰관서에 투석, 경찰차량을 불태우고 도청, 세무서와 방송국, 신문사 등에 침입했다는 것이다.
  치안본부는 이들이 침입한 관공서와 언론기관에서 기물을 부수는 등의 우발적 행동이 아닌 조직적 폭거로써 민심 교란·선동과 사회혼란을 조성하는 폭도들로 돌변하여 방화·폭행·기물파괴·투석 등으로 부산지역의 치안질서를 극도로 마비시키고 시민들을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고 밝혔다.
  치안본부는 이 사건으로 경찰관 56명을 비롯, 학생·일반인 등 수많은 사람이 부상했으며 순찰차 등 경찰차량 64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됐을 뿐 아니라 21개 경찰관 파출소가 파손 또는 방화되고 이밖의 주요 공공건물이 습격·파괴됐다고 밝혔다. 

부산지국에 적지 않은 기자들을 두고 있던 동아일보가 직접 취재를 지시하지 않고 사건이 터진 지 이틀이 지나 치안본부의 발표문을 그대로 보도한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였다.
당시 부산 항쟁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각 대학과 관공서에 일제히 배치되었다. 부산대와 동아대 등의 운동장엔 군인들이 캠프를 치고, 정문은 착검한 무장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학교는 온통 군인들 세상이었다. 무장한 계엄군을 가득 실은 군 트럭들은 장갑차를 앞세운 채 부산대와 동아대 사이를 하루종일 오가며 시민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엄군의 ‘작전’이 심리전으로만 그치지는 않았다. 여단장 박희도 준장이 이끌고 온 한 공수부대는 얼굴에 시커먼 위장 크림을 칠한 채 참나무로 깎아 만든 몽둥이로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하였다. (·····)
  이후 부산시내는 다시금 강요된 침묵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연 사흘에 걸친 시위로 부산에서만 모두 1,058명이 연행되었고, 6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부산지역 항쟁은 이렇게 사그라져 갔다. 그러나 그 불길은 마산으로 번져 또 한 번 맹렬히 타오르게 된다(같은 책, 335~336쪽).

박정희는 10월 18일 오전 부산시 일원에 선포한 비상계엄령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이번 계엄은 악랄한 선동과 폭력으로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국리민복을 해치며 헌정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불순분자들의 경거망동과 불법행위를 발본색원 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밝히고, 정부는 안정과 번영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들의 사회활동과 공사(公私) 생활에는 추호의 불편이나 위축을 주지 않게 할 것이며, 모든 국민이 안심하고 생업에 열중하여 국력배양에 계속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청와대 대변인 임방현을 통해 발표한 특별담화에서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세계경제의 가중하는 어려움, 그리고 북한 공산집단의 군비 증강과 최근의 무장간첩 침투 등 우리를 둘러싼 내외 현실은 잠시의 방심도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작금 부산에서 지각없는 일부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불순분자들이 국가현실을 망각 외면하고 공공질서를 파괴하는 난폭한 행동으로 사회혼란을 조성, 시민들을 불안케 하고 있음은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 10월 19일자 1면).

부산시 일원에 선포된 계엄령은 박정희가 1961년 5·16 쿠데타 이래 정치적 위기에 부닥칠 때마다 남발한 계엄령 가운데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가 바로 8일 뒤에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마산 항쟁과 위수령 발동

10월 18일 자정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발동되었지만, 그로부터 불과 15시간도 지나지 않은 그날 오후 2시경 마산의 경남대에서 시위가 터졌다. 학생 1천여 명이 “유신헌법 철폐하라” “군사독재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날 오후 5시경 마산시내 ‘3·15 의거탑’ 주위와 문화방송국 앞에 모여들기 시작한 학생과 시민 1천여 명은 큰길을 완전히 메우고 유신독재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쳤다. 군중은 남성동파출소를 비롯한 공공건물들을 공격하는가 하면 마산경찰서와 세무서로 쳐들어갔다. 부산에서 벌어진 봉기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시위는 이튿날 새벽 3시경까지 계속되었다.

10월 20일 정오 마산시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동아일보는 이번에도 부산 항쟁의 경우처럼 공권력이 발표한 내용 위주의 기사를 내보냈다. 10월 21일자 1면에 실린 기사(「마산·창원에 위수령 / 학생 등 소요 사태로 오늘 정오 기해 발동 / 구경꾼도 시위군중으로 연행 경고 / 군, 공공건물 경비 돌입」)가 바로 그것이었다.

  군 당국은 지방장관의 요청에 의해 국방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발동한 위수령의 담화문을 통해 마산시 일원의 일부 학생과 불순분자들의 난동 소요로 군이 마산시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위수령을 발동했다고 밝혔다.
  군은 위수령 발동과 함께 일반시민들이 시위 군중에 휩쓸려 구경할 경우라도 시위 군중으로 판단하고 전원 연행하겠다고 경고했다.
  또 군은 통행금지 시간을 엄수하도록 당부했다.
  위수사령관 담화문: 친애하는 마산시민 여러분, 마산시 일원의 일부 학생과 불순분자들의 난동 소요로 우리 군은 마산시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마산시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습니다.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필요 없이 시위 군중에 휩쓸려 구경함으로써 주동자 체포와 질서 확립에 지장을 초래케 하고 데모 군중으로 오인돼 체포되는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군은 데모대 주위의 모든 군중을 시위 군중으로 판단하고 전원 연행하겠습니다.
  위수령 발동과 함께 마산지역 작전사령부는 마산시 일원 시민들께서는 특히 통행금지 시간을 엄수해주시기 바라며 마산시의 질서가 하루속히 회복되고 시에 군을 진주시켜 시청·경찰서 등 정부기관과 언론기관의 안정한 생활이 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현지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려면 경찰서장이 발표한 내용이 진실인지를 확인하는 한편 시위 군중이 박 정권 타도를 외친 원인이 무엇인지를 취재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그렇게 하지 않고 경찰의 일방적 발표를 앵무새처럼 옮김으로써 언론의 책무를 저버렸다.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항쟁은 박정희의 죽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는 마산의 항쟁이 잦아든 10월 19일부터 정확히 한 주 뒤인 26일 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김재규가 일으킨 10·26 정변의 공과를 판단하는 데는 아직 논쟁적인 부분이 남아 있으나 다음 두 가지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첫째, 김재규의 10·26 정변이 박정희의 절명과 함께 사실상 유신정권을 붕괴시켰으며, 체제의 종말을 조금이나마 앞당겼다는 점이다. 김재규의 진의나 그가 가진 평소의 생각, 그리고 유신정권 말기를 지탱한 정보기관 수장으로서의 행적을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이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된 것이다. 그 철옹성 같던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짧았으나 ‘서울의 봄’을 가져오게 된 것도 엄연히 10·26 정변의 결과라는 점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둘째, 10·26 정변에 의한 박정희의 절명과 유신체제의 붕괴가 부마 항쟁 과정의 연행자를 포함한 당시 시민과 운동 진영의 과도한 희생을 질적·양적으로 줄여주었다는 점이다. 모든 공안사건은 어떻게든 부풀리어 민중을 겁박할 제물로 삼던 당시 정권의 습성으로 보나, 김재규가 그의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밝혔듯, 10·26 정변 당시 만찬장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이 주고 받은 그 끔찍한 대화로 보나,  또한 항쟁 과정에서 연행된 구속자들을 북한 ‘남민전’ 등과 실제로 연계시키려 하였던 당시 고문수사의 각본으로 미루어보나, 10·26 정변이 발생하지 않은 가운데 부산과 마산 지역의 시위가 계속되었다면 피해는 훨씬 더 대규모로 확산될 상황이었다. 김재규의 거사는 그러한 흐름을 일단 끊어준 것이다(같은 책, 351~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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