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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민주구국선언’ 사건동아일보 대해부 3권 - 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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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8.2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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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긴급조치 9호로 온 국민의 눈과 입과 귀를 막아버렸는데도 반유신독재투쟁은 잦아들지 않았다. 9호가 발동된 지 9일 만인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학생들이 관악캠퍼스에서, 4월 11일 시국성토대회에서 할복자결한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의로운 죽음 암장이 웬 말이냐”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운 학생들은 ‘고 김상진 열사 장례식 추진위원회’ 명의로 된 ‘조시’를 읽고 ‘반독재선언문’을 낭독했다. 집회에 합류한 학생 1천여 명 가운데 5백여 명은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 밖으로 나갔으나 경찰기동대에 의해 해산당했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 총장 한심석이 사임하고 치안본부장과 서울 남부경찰서장이 보직해임을 당했다. 집회와 시위에 참가한 서울대생 3백여 명은 경찰에 연행되어 그 가운데 56명이 구속되고 24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오둘둘(5·22) 사건’은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 이래 단일 대학에서 가장 많은 학생이 구속된 반유신투쟁으로 기록되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208~209쪽).


‘암흑 속의 횃불’ 3·1 민주구국선언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 적은 전혀 없었지만,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1975년 5월 13일부터 그가 김재규에게 죽음을 당한 1979년 10월 26일까지 4년 5개월 남짓이 가장 캄캄한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5년 6월 7일 대통령령 제7645호로 학도호국단 설치를 공표하며 학원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해갔다. 각 대학의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가 자동적으로 해체되었고, 각종 서클도 함께 해체되어 자율적인 학생활동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11월 서울대 1·2학년생들이 학도호국단 사열식에서 ‘받들어 총’에 대해 야유를 보내자 청와대가 사열식을 다시 실시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시기 대학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웃지 못할 사례라 하겠다. 대학뿐만 아니라 언론도 철저한 통제를 받아 기성 언론은 사회비판 역할은커녕 사실보도라는 기본적인 역할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였다(같은 책, 210~211쪽).

그런 상황에서 모든 신문과 방송은 긴급조치 9호에 위반될 가능성이 있는 기사와 논설은 단 한 건도 실을 수 없었다. 그러니 언론매체들 간의 경쟁은 ‘장삿속’을 중심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1976년 5월 22일에 일어난 서울대의 ‘오둘둘 사건’ 이후 학생운동권은 극도의 침체 상태에 빠졌다. 몇몇 대학 학생들이 간헐적으로 지하유인물을 배포하거나 반유신투쟁을 시도하기 전에 발각되어 구속을 당하는 사건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 상태로 1975년이 저물고 1976년 봄이 왔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가 열렸다.

  (···) 2부로 나뉘어 진행된 이날 기념미사는 전국에서 올라온 20여 명의 가톨릭 사제들이 공동 집전하고, 신·구교 관계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제1부에서는 강론을 담당한 김승훈 신부가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제반 문제 즉, 유신헌법의 억압성, 사회기강 문란, 심각한 경제 문제 등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제2부에서는 신·구교 합동기도회가 개최되어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하였고, 이어 문정현 신부가 김지하 시인 구명을 호소하는 어머니의 편지를 낭독하였다. 뒤이어 서울여대 이우정 교수가 「민주구국선언서」를 낭독하였다.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등은 공동명의로 발표한 선언문에서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의 비원인 민족통일을 향해서 국내외로 민주세력을 키우고 규합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전진해야 할 이 마당에 이 나라는 1인 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 민족은 목적의식과 방향감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고 총파국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여야의 정치적 전략이나 이해를 넘어 이 나라의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재야인사들은 긴급조치 철폐, 의회정치 회복, 사법부 독립 등을 촉구하고, 성장 위주의 경제개발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고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민족통일이 시대적 당면과제임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민족통일이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임을 분명히 하였다. 끝으로 박정희 정권은 교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박정희 정권은 대외적으로 민주국가들로부터 신임을 잃고, 대내적으로 민주주의 파국과 경제 파탄을 야기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219~220쪽).

‘민주구국선언’은 박정희는 물론이고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9호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전 대통령 윤보선과 야당 지도자 김대중, 재야를 대표하는 함석헌 등이 서명한 그 선언은 박정희뿐 아니라 유신독재체제의 핵심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야말로 긴급조치 시대의 암흑을 깨뜨리는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놀라운 사건은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긴급조치  9호 때문’이라고 이해해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민주구국선언과 관련해서 3월 1일 자정 무렵 이우정, 이튿날 문동환과 윤반웅, 3월 3일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은명기 문익환, 이해동, 이종옥(이해동의 부인), 문호근(문익환의 장남), 김석중(이문영의 부인)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3월 5일에는 이태영, 6일에는 함세웅과 김승훈, 8일에는 김대중과 이희호, 정일형이 연행되었고, 9일에는 윤보선이 면담조사를 받았다(같은 책, 221쪽). 언론에는 이런 사실이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3월 10일 서울지검은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공식 발표를 했다. 동아일보는 3월 11일자 7면에 검찰이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썼다.

  서울지검 서정각 검사장은 10일 오후 5시 35분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렸던 3·1절 기념미사 행사를 이용한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 관련자 20명을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입건, 이 중 김대중 씨, 서남동 씨, 함세웅 신부 등 11명을 구속하고 윤보선 씨, 정일형 씨, 함석헌 씨 등 9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서 검사장은 발표를 통해 이들은 3·1절 기념미사 행사장에서 ‘민주회복’이라는 명목 아래 이른바 ‘민주구국선언’을 발표, 청중을 선동하여 시위를 촉발함으로써 민중봉기로 유도 확산시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이를 이용하여 현 정부를 전복, 정권을 탈취할 것을 획책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서 검사장은 또 이들은 반정부분자들을 규합, 각 계열별로 ‘민주회복국민회의’ 또는 ‘갈릴리교회’ 등 종교단체 또는 사회단체를 만들어 ‘긴급조치 철폐’ ‘정권의 퇴진 요구’ 등 불법적 구호를 내세워 정부 전복을 선동했다고 밝히고 이 같은 선동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자 이 중 김대중 씨, 문익환 씨, 함세웅 씨 등이 주동, 윤보선 씨, 정일형 씨, 함석헌 씨 등의 동조를 받아 민중 선동에 의한 국가변란을 획책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서 검사장은 미리 준비된 발표문만 낭독한 뒤 기자들의 질문은 받지 않고 회견을 끝냈다.


‘3·1 민주구국선언’을 ‘명동사건’으로 격하

검찰이 3월 10일 민주구국선언 사건이 ‘정부 전복 선동’을 위한 것이라고 발표한 뒤 신민당과 재야세력은 그것을 ‘3·1 사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3월 16일자 1면 머리에 실린 기사에도 ‘3·1 사건’이라는 용어가 쓰였다.

  ‘3·1 사건 조사위 구성하자’ /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의 / ‘예방 못한 책임은 없나’ 질문 / 범법 사태 마땅히 규제 답변

  국회 본회의는 16일 최규하 국무총리를 비롯한 전 국무위원이 출석한 가운데 대정부질의를 벌였다. 이날 질의에 나선 이도선(유정), 김수한(신민), 박귀수(무소속) 의원은 ‘3·1 사건’을 중점 추궁하고 교수 재임명에 따른 문제점과 일본의 한국 견제품 수입 규제에 대한 강력한 대응책 및 대일 무역 역조 시정책 등을 따졌다. 답변에 나선 최 국무총리는 ‘3·1 사건’에 관해 “우리나라는 법치국가로서 헌법과 관계법에 의해 운용되기 때문에 범법 사태가 있으면 마땅히 제재를 받아야 하며 이는 사직당국의 권한 행사”라고 말했다.
  16일 본회의에서 첫 질의에 나선 이도선 의원은 3·1 사건에 언급, “비록 20여 명의 인사들이 관련된 사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국가이익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반정부 선동 사건은 전혀 우발적이 아니고 계획적이며 조직적인 사건이라고 보는데 정부 견해는 어떤가”라고 물었다. (·····)
  두 번째 질의에 나선 김수한 의원은 ‘3·1 사건’에 관해 “이 사건 관련인사들의 과거 비중이나 선언 내용 등을 분석하면 검찰에서 발표한 것과 반드시 같은 내용의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3·1 사건은 국민적 관심이 높은 만큼 국회법과 종전의 관례에 따라 설사 수사 중인 사건이더라도 여야 의원들로 독자적인 진상 조사를 위한 국회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국무총리 최규하는 그날  국회 본회의에서 “명동성당 사건은 종교의식의 기회를 이용하여 법에 금지된 사항이 나타난 것이며, 선언문 내용엔 정치적 이야기가 들어 있고 긴급조치 9호 위반이 분명하다”고 답변했다(조선일보 3월 18일자 1면). 그 이튿날부터 언론에서는 ‘3·1 사건’이라는 표현이 사라지고 ‘명동 사건’이라는 용어만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3월 25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박정희가 24일 캐나다의 <토론토스타>지 기자와 가진 인터뷰 내용이 보도되었다.

  ‘명동 사건’은 학생 데모 촉발 의도 / ‘범법 방치면 폭력사태’ / ‘북괴가 공격을 감행한다면 / 그 충격파는 월남보다 크다’

  [워싱턴 24일 동양] 박정희 대통령은 24일 캐나다의 <토론토스타>지와의 회견에서 북괴의 김일성은 무력적화통일의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만일 북괴가 공격을 감행할 경우 그 충격파는 월남의 몰락 때보다 훨씬 더 강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이 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명동성당 사건에 언급, 구 정치인과 성직자 및 일부 교수 등 소수의 사람들이 정부 전복을 꾀하기 위해 학생들을 선동하는 도박을 벌였다고 비난했다.
  박 대통령은 명동 사건 관련자들은 “법을 어겼기 때문에 조사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박 대통령은 “소수의 사람들이 정부를 전복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도박은 학생 데모를 촉발시키려는 것이었다”고 지적, “1960년에 학생 데모로 당시 자유당 정부가 전복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만일 이러한 범법자들을 방치한다면 데모와 폭력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3·1 사건’ 피고인들의 법정 진술을 묵살한 동아일보

1976년 5월 4일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렸다. 동아일보는 공판에 관한 기사(「김대중 씨 등 10 피고 출정 / ‘명동 사건’ 첫 공판」)를 그 날짜 신문 7면에 2단으로 조그맣게 보도했다. “(···) 공판은 김대중 피고인에 대한 인정심문으로 시작, 두 번째로 문익환 피고인에 대한 인정심문에서 가족들의 방청 문제와 관련, 문 피고인과  변호인단의 요청으로 오전 10시 34분 10분 간 휴정하는 등 두 번 휴정 끝에 폐정, 2회 공판을 오는 15일 오전 10시에 열기로 했다.”

그 기사에는 가족들의 방청 문제 때문에 피고인 문익환과 변호인단이 왜 휴정을 요청했는지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그리고 특히 전직 대통령으로서 불구속 기소된 윤보선을 ‘무직’이라고 표기하는가 하면 김대중도 ‘무직’이었다. 이문영, 서남동, 안병무는 1976년 박정희 정권이 강제 해직한 교수들이었는데 그들도 역시 ‘무직’으로 나왔다.

한국민주화운동사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된 ‘3·1 사건’의 공판들에 대해 모든 언론매체는 극도로 축소된 보도를 계속했다. 동아일보가 어떤 크기로 보도했는지를 날짜별로 보기로 하자(아래 기사들은 모두 7면에 2단으로 보도되었음).

· 「명동 사건 2회 공판 / 김대중 씨 등 18 피고 출정」(5월 15일자)
· 「명동 사건 3회 공판 / 16 피고 직접심문」(5월 29일자)
· 「목사 등 5 피고 / 직접심문 계속 / 명동 사건 4회 공판」(6월 5일자)
· 「공판조서 문제 싸고 / 한때 휴정했다 개정 / 명동 사건 5회 공판」(6월 12일자)
· 「김대중 피고인 등 / 변호인 반대심문 / 명동 사건 6회 공판」(6월 19일자)
· 「문익환 피고인 / 반대심문 계속 / 명동 사건 7회 공판」(6월 26일자)
· 「징역 10~3년 / 명동 사건 15명에 구형」(8월 3일자)
· 「김대중·윤보선 피고 / 징역·자격정지 8년 / 명동 사건 실형 선고」(8월 28일자)
· 「명동 사건 항소심 / 변호인 심문 / 이틀째 계속」(12월 13일자)
· 「김대중·윤보선·함석헌·문익환 / 10년씩 구형 / 명동 사건 항소심」(12월 14일자)
· 「명동 사건 항소심 선고 / 김대중·윤보선·함석헌·문익환 피고 / 징역·자격정지 5년」(12월 29일자)

  (···) 구속인사들은 법정에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단호히 반대하기에 재판도 거부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정당성과 양심을 밝히기 위해 재판에 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이들은 최후진술에서, 무죄가 아니면 학생들보다 중형을 선고하라고 요구하는 결연한 자세를 보였다. 12월 29일 2심 재판부는 관련자들에게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하였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이해동, 안병무, 김승훈, 장덕필 등 4인은 12월 29일 풀려나왔다. 그리고 재판은 상고심으로 이어졌다. 1977년 3월 22일 대법원은 모든 피고인들의 유죄를 인정하고 항소심의 판결을 확정지었다. 고령인 윤보선, 함석헌, 정일형과 여성인 이태영, 이우정에 대하여는 형 집행을 정지하였다. 문익환, 김대중, 문동환, 이문영, 함세웅, 신현봉, 문정현, 서남동 등 9명은 계속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222~223쪽).

김대중은 6월 19일에 열린 1심 6차 공판에서 “정부 타도라는 목표를 설정했다”는 공소장의 내용에 대한 변호인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이번에 민중 폭동을 선동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하려고 했다면 어째서 검찰이, 정부가 우리를 내란죄라든지 혹은 내란예비죄 혹은 음모죄로 기소하지를 않고 긴급조치 9호로 기소를 했느냐? 나는 또 우리가 적어도 이러한 정권을, 지금과 같이 막강한 정권을 뒤집어엎으려고 했다면 성명서를 내고 길거리에 나가서 만세를 부르고 하면서 데모라도 하라고 했을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성명서를 한 장 낸 것밖에 없습니다. 그 성명서를 내보았자 국내에서는 보도도 안 되었습니다. (···) 예컨대 길거리에 식칼을 가진 사람을 무기불법소지죄로 구속을 했는데, 그것을 가지고는 안 되니까 살인을 하려고 했다 그렇게 모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이번에 성명에 참가한 분들이 대부분 종교계나 교육계에 계셨던 분들이고 현재 계신 분들인데, 이러한 분들에게 어떤 누를 끼치는 것은 안 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가지고, 말하자면 극히 온건한 표현으로 성명을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 것입니다. (···) 대통령 3선 하셔도 그것은 헌법 절차에 의해서 선거를 했기 때문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여하튼 인정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에 대해서 승복을 했습니다. 우리가 승복하지 않은 것은 법적 절차에 의하지 않은 유신체제를 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분들도 여기에 대해서 담을 쌓았던 분들이 쇠고랑을 차면서도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 그래가지고는 우리의 건국이념이 없어지고 젊은이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 없어지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나선 것입니다(3·1 민주구국선언 관련자 지음, <새롭게 타오르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계절, 1998, 38쪽).

3·1 민주구국선언에 대한 사법부의 새로운 판결이 2013년 7월 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나왔다.

  1백여 석의 방청석은 함세웅·문정현 신부,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 등 생존한 피고인을 비롯해 이희호 여사, 문성근 전 민주당 상임고문,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 등 고인이 된 피고인의 유족들로 가득 찼다.
  재판이 시작되자 검사는 작은 목소리로 무죄를 구형했다. (·····)
  함세웅 신부는 ‘최후진술’을 통해 “통치권자와 행정·사법부의 모든 분들이 진솔하고 정직하게 사죄해야 한다”며 “재판장께서 사법부를 대신해 속죄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재판장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8부 이규진 부장판사는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보상과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라며 “깊은 사죄와 존경의 뜻이 판결에 진실되게 담겨 있음을 알아달라”고 고개를 숙였다(연합뉴스, 7월 3일자).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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