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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의 대량 해직과 제작거부동아일보 대해부 3권 -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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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8.1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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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 12일 조선일보사에서는 경영진의 ‘편집권 침해’에 항의하면서 회사 안에서 농성을 벌이던 기자들을 폭력으로 쫓나내는, 한국 언론사상 일찍이 볼 수 없던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일보사의 기자 대량 해직과 추방

조선일보사 기자 대량 해직과 강제 추방의 발단은 1974년 연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2월 18일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인 조선일보사 외신부 기자 백기범과 문화부 기자 신홍범은 ‘편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했다.

두 기자는 12월 17일자 조선일보 4면에 실린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 전정구의 「허점을 보이지 말자」라는 글에 대해 편집국장에게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 글은 회사 밖의 청탁을 받아 실린 것이고, 특히 결론 부분은 현 사회를 일방적인 입장에서 보고 있으므로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경영진이 정당한 절차를 밟지도 않고 두 기자를 파면하자 조선일보사 기자들은 12월 19일 저녁부터 ‘공정 보도와 해임 철회’를 요구하면서 항의농성에 들어갔다. 그들은 경영진이 “두 기자를 3개월 안에 조건 없이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하자 20일 새벽에 농성을 풀었다.
  그러나 회사 측이 백기범·신홍범에 대한 복직 약속을 3개월이 지나도 지키지 않자 기협 조선일보사 분회는 1975년 3월 6일 긴급 임시총회를 열고 편집국장단의 인책 사퇴를 요구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자 사장 방우영은 “제작 거부를 계속하면 전원 파면하고 부차장들만으로 신문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농성 이틀째인 7일 경영진은 기협 분회장 정태기를 비롯한 분회 집행부 5명 전원을 파면했다. 기자들이 제작 거부에 들어가자 부차장들은 다른 신문 기사를 베끼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곧 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조선일보사는 기자들이 농성을 하던 편집국의 전화선을 모두 끊고 정문에 바리케이드를 쳐서 외부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급히 채용된 새 경비원들이 회사 언저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농성 엿새째인 3월 11일 간부 사원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치부 차장 이종구가 농성에 합류했다. 그는 그때까지 해임된 기자 12명은 복직되어야 하며, 신문 제작에 참여했다고 해서 논공행상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경영진은 그날 오후 1시 이종구를 비롯한 4명의 기자를 다시 파면했다. 그때까지 16 명이 파면, 37명이 무기정직을 당했다.
  조선일보사는 인사조치를 발표한 뒤 바로 경비원들을 포함한 외부 사람들을 동원해서 농성하던 기자들을 완력으로 끌어냈다. 기자들은 3월 12일 오전 회사 정문 앞에서 항의를 하려고 했지만 경찰이 그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같은 책, 236~239쪽).


동아일보사 경영진의 사원 대량 해직

1975년 3월 8일 오전 9시 동아일보사 편집국과 출판국에서는 기협 분회장 선거가 시작되었다.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강화하기 위해서 차장급 기자를 추대하자는 분회장 장윤환의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선거를 치르게 된 것이었다.

분회장 선거에 단독 출마한 사람은 문화부 차장 권영자였다. 투표가 한창 진행되던 그날 오후 동아일보사는 경비과 직원들을 갑자기 증원해서 외부 인사들의 출입을 막은 다음 2층 게시판에 공고문을 붙였다. “경영난으로 인한 기구 축소 조치로써 심의실과 편집국 기획부, 과학부 및 출판국 출판부를 없애고 소속 사원 18명을 전원 해임한다”는 내용이었다.

  공고문을 본 사원들은 하도 심한 충격을 받고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해임된 사원들의 명단에는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사 지부장 조학래, 총무 양한수, 자유언론실천특위 상임간사 이계익, 노조와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적극적이던 기획부 차장대우 안성열이 들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외근 기자들이 모두 회사로 들어오자 저녁 7시에 기자총회가 열렸다. 기협 분회장으로 당선된 권영자의 인사말에 이어 기자들의 경영진 성토가 벌어졌다. 회사의 대량 해직은 자유언론을 성원해준 국민들을 배신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주필 이동욱이 편집국으로 와서 이렇게 말했다. “기구 축소와 사원 해임은 경영난 때문이며, 광고탄압 이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이 과열돼 있어 광고 탄압 이전의 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총회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격분한 사원들이 그를 공격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총회에 참가한 기자들은 기구 축소가 광고 탄압으로 인한 경영난 때문이라면 분회원들의 봉급을 깎아서 해임된 동료 18명을 구제하도록 회사에 건의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그 결의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신문, 방송, 잡지를 제작은 하되 밤에는 항의 농성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기협 분회 새 집행부는 기자총회의 결의를 경영진에게 전달했으나 기구 축소와 해임 조치는 번복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동아일보사는 3월 10일 오전 전임 분회장 장윤환과 외신부 기자 박지동을 해임했다. 장윤환은 회사의 허가 없이 유인물을 제작·배포했고, 박지동은 총회에서 주필 이동욱에게 불손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 해임 사유였다(같은 책, 239~241쪽)


동아일보·동아방송 언론인들의 제작거부

그날 기협 동아일보사 분회는 총회를 열고 인사조치를 당한 사원 20명에 대한 해임을 철회하고, 그 사태의 책임자인 이동욱은 즉각 사임하라고 결의했다. 그리고 이런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신문, 방송, 잡지의 제작을 거부하기로 했다. 동아일보사는 그날 밤 11시 기협 분회와 노조 간부 및 자유언론실천운동의 핵심 멤버 17명을 무더기로 해임했다.

회사가 근로기준법과 인사규정을 어기면서 대량 해직을 자행하자 젊은 기자 23명이 2층의 공무국으로 내려가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자유언론을 지키려는 사원들이 경영진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 길은 없다고 판단한 기협 분회는 편집부 차장 안종필을 새로운 분회장으로 하는 집행부를 선출하고 제작 거부를 계속했다.

대다수 평기자들과 일부 차장급 사원들이 제작을 거부하자 신문과 잡지를 만드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경영진은 편집국 출입문들을 봉쇄하고 제작 거부에 불참한 소수 기자들만으로 별관에서 신문 제작을 강행했다. 제작에 참여한 사람은 편집국 소속 사원 118명 가운데 30여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기자들이 단식 농성을 하고 있는 공무국에 들어갈 수 없어서 12일부터 조선·한국·신아일보사로 옮겨 다니면서 4면짜리 신문을 가까스로 찍어냈다. 자유언론 진영의 사원들은 그것을 ‘해적신문’ 또는 ‘유랑신문’이라고 불렀다. 민중의 민주화 열망과 뜨거운 성원을 배신한 ‘가짜 신문’이라는 뜻이었다.

3월 12일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편집국과 출판국 기자들이 제작 거부에 들어간 뒤 방송국 뉴스부 기자 30여 명은 11시 뉴스가 방송되기 직전에 4층의 주조정실로 달려갔다. 정상적 방송이 불가능해지자 회사 측은 B스튜디오에 대기시켜 둔 아나운서에게 준비된 ‘사과방송’ 문안을 읽히려고 했으나 기자들은 A스튜디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나운서 한현수에게 다른 기사를 전달했다. “11시 뉴스 시간이지만 본사 사정으로 뉴스를 보내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은 오늘 오전 9시 자유언론실천백서를 발표하고 해임된 동료 20여 명의 복직을 요구하며 신문, 방송 뉴스와 잡지의 제작을 거부했습니다.”(<자유언론>, 51쪽)

동아방송 자유언론실행위원회는 기자들이 신문 제작 거부에 들어간 3월 12일 오전 내내 사태를 관망하면서 방송 제작을 계속하고 있었다. 방송의 특수성 때문에 제작 거부라는 극한적 수단을 선택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차장들은 오류동 송신소 출입증을 발급받고 나서 <정오 뉴스>를 송신소에서 변칙적으로 방송했다. 동아방송 12년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방송국 사원들이 임시총회를 열고 있던 중 오후 1시 뉴스 이후에는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임시로 편성된 음악이 나가기 시작했다. 회사 쪽이 그들의 제작권을 일방적으로 박탈한 것이었다.
  기협 분회는 신문과 방송 제작이 모두 중단되자 “동아일보의 위대한 전통이 11일자 지령 16,443호로 끝나고, 동아방송 또한 11일자 것에서 정통성은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동아일보사 3층 편집국과 2층 공무국에서 농성을 하던 신문·방송·잡지 기자는 110여 명, 4층 방송국의 농성에 참여한 프로듀서·아나운서·엔지니어는 50여 명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유신독재의 언론 탄압을 비판하고 민주 회복을 외치는 민중의 광장이었던 동아일보사 본관 건물은 민주인사들 이 침통한 얼굴로 줄을 지어 찾아오는 위기의 현장으로 바뀌어버렸다.
  윤보선, 김대중, 김영삼, 함석헌, 천관우를 비롯한 재야 민주인사 22명(7명 참석, 15명은 위임)이 3월 14일 저녁 편집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회사측은 이제까지의 무더기 해임을 백지화 하고 사원들은 제작을 정상화 하라”고 촉구했으나 동아일보는 기자들을 복직시키라고 호소하는 부분은 빼버리고 사원들에게 정상 제작을 촉구하는 내용만을 보도했다.
  제작 거부 나흘째인 3월 15일,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편집국장 송건호가 해임된 사원들을 모두 복직시켜 사태를 수습하라고 촉구하면서 사장 김상만에게 사표를 냈다. 그는 그 이후 영원히 동아일보사로 돌아가지 않았다(<폭력의 자유>, 242~243쪽).


3월 17일 새벽 폭도들의 난입

제작을 거부하는 농성이 시작된 지 엿새째인 3월 17일, 자정이 넘은 시간에 3층 편집국 창밖을 내다본 기자 몇 명이 긴급하게 외쳤다. 수상한 남자들이 동아일보사 건물을 에워싼 가운데 무교동 쪽 큰 길에 누군가가 대형 탐조등을 설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편집국과 4층 방송국에서 바닥에 담요를 깔고 누워 눈을 붙이려던 농성 사원들에게 비상한 상황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달려갔다(이하 당시 상황 설명은 <폭력의 자유>, 243~246쪽에서 인용).

새벽 3시 15분쯤 편집국 남쪽 길 건너편에서 탐조등 불빛이 켜지는 것을 신호 삼아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든 200여 명의 폭도들이 ‘와’ 하는 함성과 함께 2층 공무국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겨우 5분도 되지 않아 망치로 2층 공무국의 철문과 벽을 부수고 안으로 몰려갔다.

물만 마시면서 닷새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던 23명의 기자들 가운데 최연장자가 “소란을 피우면 활자판이 쏟아질 테니 우리 스스로 조용히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술 냄새를 풍기면서 기자 한 명에 3,4 명씩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주먹질을 해댔다. 기진맥진한 기자들은 양쪽 겨드랑이를 폭도들에게 잡힌 채 회사 차고로 끌려갔다. 그 과정에서 정연주의 안경이 두 동강이 나고 임채정, 심재택, 성유보가 다쳤다. 기진맥진한 기자 23 명을 태운 동아일보사 업무용 지프 다섯 대는 통행금지로 인적이 끊긴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혜화동 우석병원으로 달려갔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폭도들의 일부는 동아일보사의 영업직 사원과 가판원이었고 나머지는 정체불명의 무술 유단자들이었다.

괴한들이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농성장을 기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재야인사들이 회사 정문 앞으로 달려와 분노의 함성을 지르자 사복경찰관들이 그들을 광화문 지하도 쪽으로 밀어붙였다.

새벽 3시 50분쯤 농성 중인 사원들이 쇠줄로 굳게 걸어 잠근 편집국 남쪽 출입문을 망치와 도끼로 부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고막을 뚫을 듯이 소름 끼치는 그 굉음은 자유언론을 난도질하는 ‘망나니들’의 칼춤 소리 같았다.

철문이 휑하니 뚫리자 대형 손전등을 든 폭도 몇 명의 뒤를 따라 100명이 넘는 괴한들이 편집국으로 밀려들었다. 젊은 기자들이 맨 주먹으로 달려가서  앞을 막아서자 그들은 소화기로 가스를 뿜어대면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폭도들 사이에는 동아일보사 판매부와 통신과 직원, 그리고 임시로 고용된 경비원들이 섞여 있었다.

폭도들은 농성하는 사원들에게 “당장 나가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기협 임시분회장 안종필을 비롯한 기자 몇 사람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으니 잠간 자리를 비켜달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안종필의 사회로 마지막 기자총회가 열렸다. ‘자유언론실천선언’ 낭독에 이어 당시 민주화운동권에서 많이 부르던 「우리 승리하리라」를 합창했다. 이어서 “자유언론 만세” “민주 회복 만세”와 애국가를 부른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오전부터 편집국 한가운데 기둥에 걸려 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떼어냈다.

기자들은 침통한 얼굴로 각자 책상에 든 물건들을 챙겼다. 사물함을 정리한 뒤 편집국을 나서는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3층부터 회사 정문까지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데 폭도들이 “빨리 나가라”고 등을 밀었다. 경찰관들에게 밀려 광화문 지하도로 피해 가 있던 재야인사들이 다시 정문 앞으로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새벽에 내리는 부슬비를 맞으면서 동아일보사를 나서는 기자들을 함석헌, 이희호, 천관우, 정일형, 이태형 등이 얼싸안으면서 함께 눈물을 흘렸다.

2층 공무국 단식농성팀과 3층 편집국의 기자들이 폭력에 밀려났다는 소식을 들은 4층의 방송국팀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자행되고 있는 추악한 ‘배신극’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도 날이 밝기까지 지연작전을 펴기로 했다. 특히 방송국은 시설의 특수성 때문에 보안장치가 되어 있어서, 4층 셔터를 내리고 문을 잠근 뒤 책걸상을 비롯한 집기로 출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방송국 사원들은 공무국과 편집국이 폭도들에게 점거 당한 뒤 1시간 40분이나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아침 6시께 각목과 소화기, 소방호스로 무장한 폭도들이 방송국 셔터를 부수고 밀려들어왔다. 무술유단자로 보이는 자가 폭도들을 꾸짖던 프로듀서 김학천의 옆구리를 발길로 차서 실신시킨 뒤 병원으로 보내는가 하면 여성 아나운서의 머리채를 잡아채기도 했다. 폭도들은 4층부터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 사원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남자 사원들에게 폭행을 가했다. 먼저 회사 밖으로 쫓겨난 기자들은 마지막으로 정문을 걸어 나온 방송국 사원들을 부둥켜안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바로 그때 동아일보사 남쪽 길 건너편의 중부소방서 앞에 모여 있던 사복 경찰관 150여 명이 동아일보사 정문 앞으로 달려와서 농성사원들과 민주인사들을 광화문 지하도로 내몰기 시작했다. 그때가 1975년 3월 17일 아침 6시 30분께였다. 당시 쫓겨난 사원 160여 명 가운데 113 명(고인이 된 18명 포함)은 그 이후 40년이 가까워지도록 동아일보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쫒겨난 농성사원들은 오전 10시께 신문회관(현재 프레스센터 자리)에 모여 「폭력에 밀려 동아일보를 떠나며」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자유언론의 마지막 보루 ‘동아’를 지키기 위해 신명을 바쳐온 우리는 17일 새벽 동아일보사 사원 아닌, 산소용접기와 각목을 휘두르는 폭도들에 끌려 밤거리에 내동댕이쳐졌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뜨거운 국민적 성원과 온 세계 양심의 격려에 힘입어 빈사의 상태에서 기적처럼 회생한 ‘동아’는 이제 권력의 강압과 경영주의 마비된 이성으로 끝내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 비극적 파국 앞에 우리는 국민적 열망을 배반한 괴로움에 비통해 할 겨를마저 없다.
  이제 ‘동아’는 어제의 ‘동아’가 아니다. 폭력을 서슴지 않는 언론이 어찌 민족의 소리를 대변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몸은 비록 ‘동아’의 사옥을 떠나지만 ‘동아’의 정통성은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의 영원한 기본권인 자유언론은 산소용접기와 각목으로 말살될 수 없다. ‘동아’의 정통성은 폭도를 고용한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언론을 사수하는 우리들에게 있다.(<자유언론>, 36쪽)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결성과 활동

동아일보사에서 제작을 거부하던 사원들은 3월 16일 저녁 땅거미가 질 무 렵부터 회사 부근에서 수상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긴급총회를 열었다. 그들은 ‘각자의 해임 여부에 관계없이 전원이 당초의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투쟁을 한층 확대하기로’ 결의한 바 있었다.

3월 17일 새벽 폭력에 밀려 회사에서 쫓겨난 사원들은 그날 오후 신문회관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하고, 권영자(전 기협 분회장, 문화부 차장)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동아투위는 산하에 기협 동아일보 분회(분회장 안종필)와 동아방송 자유언론실행총회(위원장 김창수)를 두었다. 편집국·출판국과 방송국을 한데 아우르기 위해서였다.

동아투위는 그날 「투쟁의 수위를 한 단계 높이면서」라는 제목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야도적(夜盜的) 수법을 아낌없이 발휘한 회사 측의 횡포로 한밤중에 술 취한 폭도들에 의해 짐승 취급을 받으며 문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우리들은 그러나 분노에만 사로잡히기에는 우리의 사명이 너무나 중대함을 깨닫는다.(·····)
  우리의 투쟁은 농성, 단식의 단계를 벗어나 동아 및 조선의 사태에서 속속 드러난 오늘날의 고질적 언론 현실의 비리와 반자유, 반민주적 독소를 과감히 고발, 제거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여태껏 회사 측이 우리를 ‘민족의 적’이니 ‘난동분자’로 단정하는 광란에 가까운 폭언에 접하면서도 우리 자신은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회사 측의 비리를 가급적 숨기는 것이 애사심인양 판단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판단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던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경영주의 아집은 은밀한 충고 정도로는 추호도 흔들릴 수 없는 병적인 상태로 악화됐다. 무더기 해임을 발단으로 한 동아 사태를 보고 이 시대의 양식을 대표하는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때로는 직접 면담으로, 때로는 서신을 통해 해임 철회만이 사태 해결의 첩경임을 그토록 간청하고 촉구했음에도 사측의 아집은 끝내 이를 외면하고 말았다. 사표까지 제출한 편집국장의 호소도 회사 고위층의 무딘 판단력 앞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늘날 굳어질 대로 굳어져버린 지도층 언론인 스스로의 아집과 권위주의와 반민주적 비리는 그것을 깨부수려는 범국민적인 압력이 파도처럼 밀려 닥칠 때만 비로소 청산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 파도를 몰고 올 대대적인 작업에 첫 발을 내딛는다. 이 파도가 밀려닥치면 이미 그들은 자각의 시기를 놓친 셈이 되고 만다. 민주 회복, 인간 회복과 함께 고문의 철폐를 입술로만 외쳐왔다는 증거를 부인하려면, 동아의 경영진은 먼저 스스로가 자행한 기자에 대한 폭행을 사죄하라.
  그리고 회사 측은
  1)기자 및 사원에 대한 부당해임을 즉각 철회하고
  2) 사태의 책임자인 이동욱 관선주필을 파면하라(<자유언론>, 184~185쪽).

3월 18일 아침부터 동아일보사 정문 좌우에 도열해서 침묵시위를 벌이기 시작한 동아투위 위원들은 악천후가 계속되는 날이나 휴일을 빼고 꼬박 6개월 동안 그런 항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침묵시위가 끝나면 2열 종대로 신문회관까지 행진을 하고 3층 복도에서 총회를 열었다.

‘아침 행사’를 마친 투위원들은 각 특위별로 맡은 일을 시작했다. 70여 명의 섭외위원들은 간밤에 제작된 2,500 부 가량의 유인물을 나누어 가지고 종교, 언론, 정치, 문화계와 사회단체들에 배포했다. 그러나 국내의 모든 신문과 방송은 수도 서울의 한복판인 광화문 네거리 한 편에서 벌어지는 동아투위의 활동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당장 생계가 막연해진 동아투위 사람들을 위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교회여성연합회 등 종교단체들, 이화여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의 학생들, 구속자 가족들과 민주인사들, 그리고 언론계 동료들이 성금을 보냈다. 그러나 대다수가 가장인 동아투위 위원들은 날이 갈수록 생존의 벼랑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동아투위 집행부는 회사 앞 ‘침묵시위’가 6개월을 채운 1975년 9월 17일 생계를 위해 그 정규행사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몰락의 길로 들어선 동아일보

1975년 3월 17일 새벽, 폭력배들을 동원해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들인 기자, 피디, 아나운서, 엔지니어들을 거리로 몰아낸 동아일보사는 3월 18일자 1면 하단에 ‘편집국 일동’의 이름으로 5단 짜리 광고를 내보냈다.

  1)지난 1주일 동안 동아일보를 보시고 자유언론을 실천하는 저희들의 자세에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셨겠지요? 저희들은 민주주의와 지유언론을 생명처럼 소중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2)언론탄압으로 동아일보를 궁지에 몰아넣고 지금도 딴전을 피고 있는 당국자들의 속셈이 동아의 약화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3)일부 재야 및 종교계 인사들도 남의 집안 사정을 자세히 알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 급박한 시기에 소(小)만 보고 대(大)를 보지 못하고 동아를 파국으로 이끌면 암흑시대가 올 뿐입니다.

박정희 정권과 야합해서 사원 113명을 대량 해직한 뒤 여러 신문사의 인쇄시설을 빌려 ‘해적신문’을 만들고 있던 동아일보 편집국 ‘잔류 기자들’의 이름으로 그런 공고가 나온 것이었다.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민중의 지지와 성원을 배신하고 얼마나 야만적인 행위를 저질렀는지를 그때까지도 모르던 독자들은 그 광고 내용을 참으로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

동아일보 편집국과 출판국의 기자, 동아방송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엔지니어의 3분의 2 이상이 회사에서 추방됨으로써 동아일보와 월간 신동아, 여성동아, 동아연감, 그리고 동아방송은 제작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되었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던 언론인들의 자리를 신속하게 메울 수 없는 동아일보사는 몰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사 경영진과 구성원들은 민주화운동을 배신한 데 대해 독자들에게 사죄하기는커녕 교묘한 기만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정신적, 도덕적으로 파탄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논조의 변질: 자유언론 실천의 주역들을 폭력으로 내쫓고 난 뒤에도 동아일보는 한동안 ‘자유언론이란 위장상표’ 뒤에 숨어 정보에 어두운 독자들을 기만했다. 동아일보는 대학가의 움직임 등 이른바 ‘문제성 있는 기사’를 다른 신문에 비해 여전히 크게 다뤘고, 따라서 얼핏 보기엔 지면의 변화를 별로 느낄 수 없게 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지면을 살펴보는 독자라면 논조의 변화를 뚜렷이 감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른바 ‘문제성 있는 시국 사건’ 기사들이 여전히 비중 있게 다뤄지긴 했지만, 제목만 클 뿐 내용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대학생들의 시위, 연행, 구속, 제적 관련 기사들의 경우 학생들이 왜 시위를 하고 무엇을 주장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고, 오히려 정부의 주장이나 엄포만 크게 다뤘다. 이러한 보도 태도는 민주회복을 외치면서 자결한 서울대 농대 학생 김상진 관련 기사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그가 자결 직전에 낭독한 양심선언이나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에 대해선 그 내용은 고사하고 그런 양심선언이나 공개장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예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 사건과 관련해 발표한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성명 역시 핵심적 내용은 모두 빼고 지극히 형식적인 보도만 했다.
  마찬가지로 인혁당 관련 기사나 목요기도회 및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인권회복 기도회 관련 기사도 핵심적인 내용은 모두 빠진 채 보도됐다. 주필 이동욱이 취임하자마자 제일성으로 터뜨린 “광고탄압이 본격화한 12월 25일 이전으로 논조를 돌려야 한다”는 말이 현실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이 같은 시국 관련 기사는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다가 4월 30일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이후엔 지면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같은 책, 209~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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