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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 사건동아일보 대해부 3권 -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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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7.0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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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8월 9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물가 8일 선 재동결」이었다. 그런데 1면 중간에 작은 면적을 차지한 기사가 눈에 띠었다.


김대중 납치를 소홀히 다룬 동아일보

가로 3단 크기(당시 동아일보는 세로쓰기)로 편집된 기사 제목은 「동경서 김대중 씨 실종 / 끌려간 호텔방엔 마취약 흔적도 / 한국말 쓰는 괴한 5명과 사라져」이다.

  [동경-9일 신용순 특파원] 사실상 망명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신민당 전국회의원 김대중 씨는 8일 오후 호텔에 나타난 한국말을 쓰는 5명의 괴한과 만난 후 어디론지 사라져 9일 정오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8일 김대중 씨는 동경 구단에 있는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투숙 중인 통일당 양일동 당수와 김경인 의원과 함께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반쯤 2212호실에서 나오는 순간 괴한들과 함께 어디론지 사라졌다.
  괴한들은 사전에 양 씨가 묵고 있는 근처의 방 두 개 2210호와 2215호에 투숙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괴한들은 모두 35세 전후의 청년들로 한국말을 쓰고 있었다.
  김 씨는 이날 약 20분 동안 괴한들에 의해 2210호실로 갔다가 어디론지 사라졌는데 김 씨가 사라진 순간 장면은 목격자가 없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다.

이 기사에는 김대중이 괴한들에게 납치된 사실을 특파원 스스로 취재한 것인지, 아니면 일본 경찰이나 외무성의 발표를 인용한 것인지가 밝혀져 있지 않다. 기사 작성의 기본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다. 같은 날짜 조선일보 1면 기사는 ‘동경-외신종합’을 발신자로 해서 김대중이 납치된 경위를 일본 정부 관방차관 야마시다가 발표했다고 밝혔다. 그 기사 역시 부실하기는 동아일보나 마찬가지였다.

1971년 4월의 대통령선거에 제1야당인 신민당 후보로 나서서 공화당의 박정희에 맞서 민주정부 수립을 강하게 외치던 정치지도자이자 많은 국민의 신임을 받고 있던 김대중이 한국도 아닌 일본 수도 도쿄에서 벌건 대낮에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뉴스를 그렇게 소홀히 다루는 것은 언론인들은 물론이고 대중의 상식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가 ‘최대 정적’으로 여기고 있던 김대중이 실종되었다면 언론은 현지 특파원을 통해서(특파원이 없다면 기자를 급파해서)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취재한 뒤 신속히 보도했어야 마땅하다.

동아일보는 8월 10일자 1면 왼쪽 한 귀퉁이에 ‘김대중 실종’에 관한 기사를 두 건 실었다. 첫 번째 기사는 「일경(日警) 특수반 설치 / 참고인 양일동·김경인 씨 귀국 연기 요청 / 호텔방서 북한 담배공초 2개 발견」이다.

  [동경-10일 신용순 특파원] 김대중 씨 실종 사건을 수사 중인 일본 경찰은 9일 정식으로 특별수사반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이날 오후 김대중 씨가 실종되기 직전까지 같이 있었던 민주통일당 양일동 당수, 동당 김경인 의원에 대해 제2차 참고인 조사를 했다.
  한편 사건현장에 있던 대형 룩색은 지난 6일 동경시내 간다의 등산용품점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 2명이 사간 사실이 판명됐다.
  일본 경찰은 11일 귀국 예정인 양일동·김경인 씨에 대해 “김대중 씨 납치 현장의 유일한 참고인인 만큼 귀국을 연기, 경찰 수사에 협조토록 해달라”고 9일 외무성을 통해 한국대사관에 요청했다.
  한편 김 씨가 끌려갔던 호텔방에서는 담배꽁초 두 개가 발견됐는데 조사 결과 북한 담배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기사 밑에는 「김 씨 신원 보호 만전 요청 / 이 주일대사, 일에 진상 규명 요구 / 한국 정부는 아는 바 없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동아일보의 ‘김대중 납치 사건’ 보도는 8월 11일자 1면에서도 왼쪽 귀퉁이로 몰렸다. 다섯 건이나 되는 기사들이 칸막이 안에 답답하게 갇혀 있다. 기사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 「김대중 씨 실종 사건 조속 수사 지시 / 다나카, 의원 요청 받고 언명 / 백주의 사건, 일본 정부 권위와 관련 / 일본 내 있는 것으로 보고 수사」
  · 「일경, 일제 담배꽁초 23개 또 발견 / 북한 담배 김 씨 실종 관련 여부 결정 못해」
  · 「방에 물건 남긴 건 주의 딴 데 돌리려 / 병속 약 다 마셔도 잠들 정도 안 돼 / 일경 밝혀」
  · 「신민당, 세 의원 파일(派日)키로 / 당직자회의서 결정」
  · 「양일동 씨 오늘 낮 귀국 / 김경인 씨 당분간 체일(滯日)」

8월 13일자 동아일보 1면 왼쪽 귀퉁이에도 ‘김대중 실종’에 관한 기사가 두 건 실렸는데, 모두 3단으로 편집되어 있다. 「양일동 씨 귀국 회견 / 지난 29일에도 김대중 씨 만나」와 「일경, 호텔방 예약자 신원 수사 / 사건 직후 잠적한 자동차」가 제목이다. 동아일보는 납치 사건이 명백해진 것을 계속 ‘실종’이라고 불렀다.

‘납치 뒤 강제 귀가’를 ‘서울 자택에 데려다 놔’로

김대중 납치 사건은 발생 엿새만인 8월 14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동아일보 1면 머리에 올랐다. 기사 제목은 「김대중 씨 서울 자택에 데려다 놔 / 동경서 납치한 자칭 구국대원, 어젯밤 집 앞서 석방 / 해상서 사흘 육지서 이틀 / 온몸 결박, 큰 배로 11일 한국에」이다.

  지난 71년 7대 대통령선거 때 신민당 대통령후보였으며 전 국회의원인 김대중 씨가 지난 8일 오후 일본 동경시내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피랍된 지 만 5일 9시간만인 13일 밤 10시 20분쯤 서울 마포구 동교동 187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오른쪽 아랫입술과 왼쪽 눈썹 위가 터져 피가 맺혔고 오른쪽 발목에 두 줄의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연한 하늘색 셔츠에 고동색 바지를 입고 집에 돌아온 김 씨는 먼저 온 기자들과 뒤늦게 달려온 기자들 그리고 외신기자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차례로 그동안 실종된 경위를 차근차근하게 설명했다.
  김 씨는 이날 “8일 오후 5,6명의 건장한 청년들에게 납치, 온몸이 묶인 채로 자동차로 5,6 시간 달려 오사카(?) 부근에서 모터보트에 실려 큰 배에 옮겨진 다음 10여 시간 해상으로 끌려갔다가 천사(千死)일생으로 한국 해안에 회항(回航), 11일 오후 7,8시께 한국에 상륙, 초가와 양옥에 감금돼 있던 끝에 13일 밤 10시 20분쯤 붕대로 눈을 가린 채 집 근방에 내려주어 돌아왔다”고 그동안의 경위를 밝히고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죽음 직전에서도 예수님께 꾸준히 기도하고 국내의 동포들과 일본을 비롯한 우방의 인사들이 걱정해준 덕택”이라고 말했다.
  수염이 텁수룩하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김 씨는 경위 설명 도중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울음을 삼키다가 말을 계속,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반공단체인 구국동맹 행동대원이라고 자칭하는 청년들은 13일에야 상부 지시로 석방한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날 밤 10시 20분쯤 집 근처인 동교동사무소 앞에서 크라운 같은 차에 실려 눈을 가린 채 내려 청년들의 지시대로 3분 동안 뒤로 돌아서 있다가 걸어서 집에 당도, 세 번 벨을 누르고 집안에 들어섰다고 말하면서 웃는 얼굴로 “나는 하도 겁나는 일을 많이 당해서 아무렇지 않다”고 놀란 가족들을 위로했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이 날짜 1면은 온통 김대중 납치 사건에 관한 기사로 덮여 있다. 「김대중 씨가 말하는 피랍 닷새」 「일경, 한국에  김 씨 방일 요청키로」 「소식통 견해, 김대중 씨 신병 인도 의무 없어」 등이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

8월 24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문공부, 일본 요미우리 지국 폐쇄 / 세 특파원엔 퇴거를 명령 / 김대중 씨 사건 보도 취소 불응으로」라는 기사가 4단으로 실렸다.

정부는 24일 오전 김대중 씨 사건 보도와 관련,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서울지국을 폐쇄하고 서울주재 특파원들의 퇴거 명령을 내리는 한편 동지의 국내 배포를 중지시켰다. 문공부 손석주 보도국장은 24일 오전 기자회견을 갖고 “문공부는 23일자 동지 조간에 대해 김대중 씨 사건 보도에 있어 한국 정부기관이 관련된 사실을 한국 정부 소식통이 처음으로 인정했다고 보도한 것은 사실무근이라고 지적, 24일 조간까지 전면 취소할 것을 요구했으나 동지가 성의 있는 자세로 이에 응하지 않아 부득이 이 같은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이 기사 바로 밑에는 「기사 취소 못해 / 요미우리 편집국장 성명」’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동경-24일 신용순 특파원] 요미우리신문의 하세가와 편집국장은 23일 “한국 정부에서 취소 요구한 23일자 조간 1면 톱기사의 김대중 씨 사건 관계 기사는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게재한 것이다”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또 하세가와 국장은 “이 기사의 뉴스원은 한국 정부의 신뢰할 수 있고 책임 있는 소식통에서 취재한 것”이라고 취재 경위를 밝히고 “한국 정부가 요구하고 있는 보도 취소에 대해서는 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요미우리신문사는 한국 문화공보부장관의 공식적인 취소 요구에 이 같은 신문사 태도를 밝히고 “그동안 신문사는 이 기사의 취재경위를 조사한 결과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기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한편 요미우리신문사는 24일 서울지국을 통해 “자신을 갖고 보도한 만큼 취소는 응할 수 없다”고 정식으로 한국 정부에 통보했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기 초인 1993년 7월 16일 ‘김대중 선생 살해미수 납치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이하 진상조사위’)가 야당 인사들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진상조사위는 2년 가까이 조사활동을 한 뒤 1995년 8월 11일 <하늘이 김대중을 살리기까지>(책이있는풍경 발간)라는 책을 펴냈다. 조사위원장 김영배는 이 책 앞머리의 「인사말」에 다음과 같이 썼다(이 글에 대해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 간부들이나 박정희의 유족이 ‘허위사실 유포’라는 이유로 소송을 냈다는 보도는 없었다).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동경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김대중 선생님이 괴한들에 의해서 납치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유신독재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서 이후락이 이끄는 중앙정보부 공작원들에 의해서 살해를 목적으로 한 납치사건으로서,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를 경악케 한 현대정치사에서 가장 추악한 정치 테러 사건이었다.
  이 납치사건은 본질적으로 한국의 공공기관에 의해서 일본의 주권이 침해되었던 사건이요, 일본 정부는 김대중의 신변을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김대중을 일본으로 원상회복시키고 그 납치 사건의 진상을 밝힐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납치 현장에서 주일 한국대사관의 1등서기관인 김동운의 지문이 증거로 채취되고, 납치된 지 5일 만인 13일에 KCIA에 의하여 자택으로 귀환조치 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정부 간에 진상을 밝혀내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정치 결착으로 사건을 적당히 덮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
  우리가 20년 만에 조사위를 구성하게 된 이유는, 한국의 경우 문민정부라 자처하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고, 또한 일본의 경우에는 40여 년 간 집권했던 자민당 정권이 물러나고 사회당을 비롯하여 새로운 호소카와 연합정권이 수립되어 개혁을 주창하였던 까닭에, 이제는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있는 때가 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 우리는 사건 당시 미국의 CIA 한국 책임자였었고, 뒤에는 주한미대사를 지냈었던 도널드 그레그 씨의 증언,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공작선인 ‘용금호’의 승무원 조시환 씨 등의 증언에 의해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서 살해할 것을 목적으로 납치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우리 조사위원들은 사건 현장을 답사하고 이후락을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을 각 방면으로 찾아다녔고, 일본 정부를 방문하고 미국 국무성에도 찾아가 조사활동을 벌였다.
  우리 조사위원회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은 모두 동원이 됐다. 이제 20개월 동안 조사한 내용을 담아 이 백서를 발간하는 바이다.

이 책에는 ‘공권력이 저지른 범행이라는 증거’로 아래와 같은 사실들이 제시되어 있다.

· 범행 현장인 호텔 2210호실에서 주일 외교관 김동운의 지문이 채취되었고, 호텔 주차장에 근무하는 직원이 김동운이 범행에 이용된 승용차 조수석에 타고 가던 장면을 직접 보았다. 또 그 승용차는 요코하마 한국영사관 부영사 유영복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김경인 전 의원이 범인들이 “서울에서 왔다”는 유창한 한국말을 쓴 사람들이라고 한 사실은 명백한 증거이다.
· 1993년 9월 9일, 사건 당시 용금호의 조리장으로 승선하여 일했던 조시 환 씨는, 국회 민주당 원내총무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분명하고 생생한 폭로를 하였다. 즉 용금호는 KCIA가 운영하는 공작선이었고 용금호에 김대중을 싣고 부산항으로 입항하였다.

김대중 자신은 1995년 2월 28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진상조사위원회 위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이후락 KCIA 부장이 총지휘를 하고 김치열 차장과 이철희 차장보가 한국 내에서 지휘·감독에 임했으나, 실질적 지휘는 이철희 차장보였다.
  2)일본과 국내에서의 총지휘는 김기완 주일공사가 담당하고, 행동대장은 본국으로부터 파견된 윤진원 KCIA 공작 제1단장이었다.
  3)일본의 수사당국이 범인의 한 사람이라고 단정한 김동운을 호텔 복도에서 목격하였다.
  4)이후락 전 KCIA 부장은 친구인 최영근 전 의원에게 “김대중이를 납치한 것도 나지만 살려준 것도 나다”라고 말하고 있다(같은 책, 109쪽).


김대중 납치사건 정면으로 다룬 조선일보 사설

동아일보는 나라 안팎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던 김대중 납치 사건에 관해 단 한 번도 사설을 내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1973년 8월 8일 김대중이 도쿄에서 ‘실종’된 뒤부터 8월 12일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동교동 자택으로 끌려오기까지 그 사건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로 보도하던 조선일보에 뜻밖의 사설이 실렸다. 9월 7일자 2면에 통단으로 나간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 /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가 바로 그것이다.

  요즘 우리의 심정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몹시 우울하고 답답하다. 무엇이 그토록 알고 싶고, 무엇을 그토록 말하고 싶은가 하고 물으면 그것은 한마디로 김대중 사건이 라고 하겠는데 지금은 사건을 수사 중이니 수사결과가 밝혀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면 더 이상 다그칠 수도 없으니 더욱 답답하다.
  우리는 김대중 씨가 실종 후 야반 자기 집 앞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뜻밖의 출현이어서 아연(啞然)하는 동시에 최악의 경우 씨의 죽음마저 추리할 수 있었던 만큼 씨의 생환을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씨가 살해되었을 경우의 음산한 내외의 반응에 비길 때 한 줄기 인간 구제의 밝은 빛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들려오는 일본의 여론 동향에는 우리로서 어딘지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점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그 말부터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어느 나라가 그런 종류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개의치 않을 것이며 어느 국민이 대범하게 그것을 웃어넘길 수 있겠는가.
  그런 불쾌한 반응을 탓하기보다 서둘러야 할 것은 실로 석연한 사건의 해결이다.
  모멸적이어서 불쾌한 반응에 대하여 섭섭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건 해결 연후에라도 조금도 늦을 것이 없다. (···)
  (···) 일본과 일본인을 고깝게 생각하기에는 그 사건이 일본과 일본인에게 뒤집어씌운 오욕의 굴레는 우리에게 비길 것이 아니다. 감정으로서 감정에 대하기에는 김대중 사건은 무리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닌 만큼, 누가 저질렀던 간에 우리에게는 명예롭지 못하며 또한 그런 대립감정은, 일본인에게 한국인인 우리가 너무나 큰 핸디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김대중 사건 못지않게 얼굴이 붉어지는 일이란 말이다. (·····)
  사건의 전모가 밝혀짐으로써 그 관련 범위에 따라 혹시 어떠한 지위에 있는 소수 또는 상당수가 법의 심판을 받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도 범법자나 과격행동파는 있는 법이어서 그들이 법에 따라 조리 있고 엄정히만 다루어진다면 그것으로써 그 사회는 내외의 신뢰를 거두게 되는 것이며 그런 범법이나 사건을 앞으로 교훈으로 삼는다면 그 국민은 불행을 헤치고 도의적으로 구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넘어간다면 바빌론의 궁전도 무의미하며, 사회는 정신적인 퇴폐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 점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
  그러므로 중대한 이 시점에서 간절히 바라고 싶은 것은 위정당국 고위층의 단호한 결단이다.

이 사설이 조선일보에 실린 9월 7일은 한국 정부가 일본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을 폐쇄하고 기자 3명을 추방한 8월 24일로부터 2주가 지난 날이었다. 그동안 일본과 미국에서는 “한국의 정보기관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동했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퍼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 정부는 한국의 중앙정보부 공작원들과 주일한국대사관 간부들이 납치사건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들어 “한국이 일본의 주권을 침해했다”면서 박정희 정권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의 그런 요구에 대해 “정보기관의 김대중 납치 개입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하던 박정희 정권을 향해 조선일보 사설이 일본의 주장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논조를 폈으니 박정희 자신이 노발대발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정권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조선일보가 그런 사설을 실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에는 거기 대한 배경 설명이 이렇게 나와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까지 큰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수사가 지연되면서 국민의 의혹은 커져갔고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불편해졌으며 무엇보다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가 실추했다.
  사건 발생 한 달이 넘도록 진상 규명을 위한 수사가 겉돌고 있던 9월 7일, 주필 선우휘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최고위층의 결단을 촉구하는 사설을 써서 발행인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한밤에 집어넣는 일이 발생했다. 9월 6일 자정을 넘어 편집국에 나타난 선우휘는 야근담당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어떤 위협에도 개의치 않고 주필로서의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고 선언한 후 윤전기를 세우고 사설을 갈아 끼울 것을 요청했다. (·····)
  이 사설이 실린 신문이 배포되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중앙정보부가 총동원돼 조선일보 회수에 착수했으나 이미 신문은 독자들 손에 다 들어간 후였다. 선우휘는 “일생일대의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국가의 체면과 조선일보의 명예를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독단전횡(獨斷專橫)한 소생을 용서해주십시오”라는 간결한 글귀와 함께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고 몸을 피했다. 결국 10여 일 간에 걸친 중앙정보부와의 교섭 끝에 방 사장 명의의 편지가 이후락에게 전달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251~253쪽).

1973년 11월 1일 한국 정부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주일한국대사관 직원들이 관여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의를 표명’하겠다고 일본 정부에 통보했다. 그 이튿날 국무총리 김종필이 일본으로 가서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를 만나 ‘납치 사건과 주권 침해’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하는 ‘진사(陳謝)’의 뜻을 밝혔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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