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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박정희 종신집권을 위한 헌정쿠데타동아일보 대해부 3권 -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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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6.2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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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4월 16일 공화당 사무총장 길전식은 전남 장흥에서 “국회의원의 임기를 6년으로 늘려 안정되고 소신 있는 국정을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공화당의 소식통들은 17일 길 총장의 이러한 장흥 발언에 뒤이어 ‘국회의원의 임기를 연장하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입장으로서는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이 점은 야당으로서도 반대하지 않을 소지가 많은 것으로 안다’는 의견을 밝혔다. 임기 연장의 개헌을 하는 경우 그 시기에 대해 길 총장 자신은 ‘지금 개헌을 운위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소식통들은 공화당이 대선거구제선거법개정안을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연내에 처리할 방침이라면 임기 연장 문제는 적어도 이에 앞서 처리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조선일보 4월 18일자 1면).

  이 사건은 일종의 정치적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은 길전식 같은 정치가가 사전에 아무런 생각 없이 개헌 문제를 기자들과 이야기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전 국무총리 정일권이 미국대사관에 박정희의 집권을 계속 보장하는 방식으로 헌법이 수정될 것 같다는 암시를 준 직후에 길전식의 발언이 나온 것은 흥미롭다”고 국무부에 보고하였다. 이처럼 개헌 작업은 늦어도 1972년 4월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가에서도 1971년 4월 무렵부터 개헌에 대한 소문이 나돌았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55쪽).


‘10월 유신’의 전초작업 ‘7·4 남북공동성명’

1972년 7월 4일 한국사회는 물론이고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사건이 터졌다.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남북 공동성명’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날짜 동아일보 1면은 그 뉴스에 관한 기사들로 뒤덮였다. 「남북통일 자주·평화원칙 합의 / 4반세기만의 정치 대화(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북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서 타결 / 오늘 오전 10시 서울·평양서 공동성명 7개 항 동시 발표 / 남북조절위 구성, 공동위원장에 이후락·김영주 부장 / 서울·평양 간 직통전화 오늘부터 개통」이라는 1면 머리기사 제목만 보아도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핵폭탄 급 뉴스임이 분명했다. 그 기사의 주요 대목은 다음과 같다.

  (···) 남북 분단 후 4반세기만에 처음으로 있은 정부 레벨의 고위 정치회담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당 조직부장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이 부장은 평양 방문에서 김일성 수상, 김영주 부장과 각각 두 차례 회담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김영주 부장을 대신해서 서울에 왔던 박성철 제2부수상을 1차 면접했으며 이 정보부장과는 2차의 면접을 가졌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이날 오전 10시 중앙정보부에서 내외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이 3명의 보좌관을 데리고 지난 5월 2일부터 5일까지 나흘 동안 평양을 방문, 김일성 수상과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을 만나고 북한의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4명의 수행원과 함께 5월 29일 서울을 방문하여 6월 1일까지 머물면서 회담을 통해 남북공동성명을 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남북한은 이날 공동성명에서 서로 상대방을 중상·비방하지 않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고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이 정보부장과 김 조직지도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설치키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공동성명은 이밖에 남북적십자회담이 하루빨리 성사되도록 적극 협조하고 남북 사이에 인적·물적·정치적·사회적 등 다방면적인 제반 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고 덧붙였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2면과 3, 5, 6, 7면을 남북공동성명 관련 기사들로 도배했다. 주요한 제목들은 아래와 같다.

  · 2면: 「한반도 긴장 완화 징후 / 남북공동성명 해외 반향 / 자주적 협상 찬양 / 예상 외 빠른 해빙’, ‘다극화 시대의 놀라운 새 국면 / 닉슨 방중(訪中)·소련의 여파 / 대결의 무의미 인식」
  · 3면: 「나는 왜 평양에 갔었나 / 이후락 정보부장이 밝힌 남북공동성명의 배경」
  · 5면: 「와야 할 일 오고야 말았다 / 남북공동성명의 충격 발표를 분석하는 긴급좌담회」
  · 6~7면 통단: 「단절의 사슬 풀 남북의 청신호 / 그들이 오간 통일로 / 7·4 남북공동성명 발표되던 날 / 민족염원 품고 질주한 통일에의 새 길」

제목은 작지만 1면 하단에 실린 한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기자회견 내용을 요약한 것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알맞게 / 법·제도 면의 수정 필요 / 이 정보부장 회견, 유엔은 외세로 볼 수 없다 / 괴뢰 호칭 바꿔야 할 때 / 보수끼리의 반목 여러 모로 생각해 봐야」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제목만 보아도, 바로 어제까지 남한에서 ‘북한괴뢰’라고 부르던 집단이 통일을 위한 대화 상대로 ‘격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7월 5일자 3면 사설(「한반도의 평화를 위하여」)에서 비교적 차분한 논조로 남북공동성명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남북한의 국민에게도 남북공동성명은 놀라움이었고 충격이었겠지만 남북한 당국자들이 조국통일을 전제로 긴장상태 완화와 남북한 재접근을 결의하고 약정한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대평화의 시대가 하루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성급하지 말고 들뜨지 말고 서둘지 말고 초조하지 말고 한편 가능성을 미리 부정하는 비관의 타성을 탈피치 못한 채로 회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만을 능사로 삼지도 말고 냉철한 이성과 꾸준한 인내로 민족 대평화의 시대를 맞자고 호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온 나라가 통일이 눈앞에 다가올 듯한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특히 8·15 직후부터 한국전쟁 기간까지 북한에 친족과 집과 땅을 두고 남쪽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은 멀지 않아 고향 땅을 다시 밟게 될 수도 있다는 설렘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동성명이 나온 지 9일 뒤에 박정희 정권은 대북한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있는 조치를 취했다. ‘유럽 거점 간첩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김규남을 7월 13일에, 그리고 박노수를 7월 28일에 처형한 것이었다. 그밖에 ‘임자도 간첩 사건’의 정태홍 등 30여 명의 ‘사상범들’도 그 무렵에 사형을 당했다(김경재, <혁명과 우상:김형욱 회고록 3>, 전예원, 1991, 121~122쪽).

10월 12일 남북조절위원회 제1차 공동위원장회의가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열렸다. “4시간 25분 동안 열린 이 회의는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남북공동성명의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함으로써 남북 간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제2차 남북조절위원장회의를 10월 하순에 연다”는 합의를 공동으로 발표했다.

제2차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남과 북에서는 체제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나중에 많은 정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바로 그 ‘사건’을 일으키기 위한 ‘전초 작업’으로 남과 북이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고 주장했다.

  (···) 진정한 의미의 남북대화는 강대국들 사이의 긴장완화와 관계개선정책을 이용하면서도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들의 분단고착화 정책에 반발하는 민족주체적·평화적 통일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7·4남북공동성명에서 자주적 통일원칙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 당국은 강대국들의 ‘두 개의 한국’ 정책에 반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편승하여 ‘유신’과 ‘사회주의헌법’ 제정을 통해 각자의 통치권력을 강화했다. (·····)
  (···)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남쪽 재야세력의 집결체였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남북 사이의 긴장완화를 위한 교류의 개시는 지지하나 조국통일을 위해 민족의 실체인 민중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하며, 정권의 방편적 통일논의로 인한 민족분열의 영구화를 경계한다 하고, 국가보안법·반공법 및 기타 관계법령이 폐기되고 비상사태 선언이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쳐 쓴 한국 현대사>, 364쪽).


1972년 10월 17일의 헌정쿠데타

1972년 10월 17일 서울시내 여러 곳에 군 병력이 배치되고 광화문 부근에는 탱크가 동원되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그날 오후 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동아일보가 10월 18일자 1면 머리에 크게 보도한 기사(「헌법기능 비상국무회의서 수행 / 박 대통령 특별선언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는 다음과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17일 오후 7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 이 시각을 기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박 대통령은 이 특별선언을 통해 1)72년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2)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 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비상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 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3)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4)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 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고 밝혔다.

박정희는 ‘특별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나는 국민적 정당성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나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부득이 정상적 방법이 아닌 비상조치로써 남북대화의 적극적인 전개와 주변정세의 급변하는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 실정에 가장 알맞는 체제개혁을 단행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나 개인은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 지 오래입니다.
  나는 지금 이 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오직 민주제도의 건전한 발전과 조국통일의 영광된 그날만을 기원하고 있으며 나의 이 기원이 곧 우리 국민 모두의 기원일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이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전진을 계속합시다.
  그리하여 조국통일의 영광 속에서 민주와 번영의 꽃을 영원토록 가꾸어 나아갑시다(동아일보 10월 18일자 2면).

박정희가 ‘특별선언’을 발표하던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 권한이 없었다. 국회에서 헌법을 개정하지도 않고 대의민주제도의 주체인 국회를 해산하는 것은 헌정에 대한 명백한 쿠데타였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국민적 정당성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나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부득이 정상적 방법이 아닌 비상조치”로 헌법의 기능 일부를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했다고 주장했다. 그 명분은 “국권을 수호하고 영광스러운 통일과 중흥을 이룩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명분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헌법의 기능을 일개 ‘특별선언’으로 정지시키기 전에 국민투표를 통해 미리 주권자들의 의사를 묻거나 국회에서 ‘비상조치’에 대한 동의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나치 독일의 히틀러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보다 무지막지하게 특별선언이라는 문서 하나만으로 헌정쿠데타를 자행했던 것이다. 이승만 독재정권 시기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


동아일보 ‘10월 유신’을 소극적으로 지지

박정희 정권은 스스로 저지른 헌정쿠데타에 ‘10월 유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특별선언에서는 ‘유신’을 뒷받침하는 단어로 ‘민족(22번)’, ‘남북(20번)’, ‘통일(19번)’, ‘평화(18번)’, ‘조국(14번)’, ‘개혁(9번)’, ‘비상조치(9번)’, ‘번영(7번)’ 등이 동원되었다. “유신(維新)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을 고쳐 새롭게 함, 묵은 제도를 아주 새롭게 고침’이라는 뜻이다. 일본의 ‘명치유신’을 흉내낸 거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서울대 철학과 교수 출신으로 박정희의 특별보좌관을 맡은 박종홍과 또 다른 특별보좌관 임방현이 중국의 <시경>과 <서경>에 나와 있는 ‘유신’을 빌려 와 ‘10월 유신’으로 부르자고 박정희에게 건의했고, 이게 받아들여졌다는 증언도 있다.”(<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 1권>, 223~224쪽).

동아일보는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화장을 한 헌정쿠데타를 지지하는 짤막한 사설(「비상계엄 선포의 의의」)을 10월 18일자 3면에 올렸다.

  (···) 평화통일을 위한 새로운 국가체제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될는지 궁금하지만 비상국무회의는 12월 27일까지 헌법개정안을 공고하기로  되어 있으니 만큼 멀지 않아 새 국가체제의 설계도도 국민 앞에 제시되는 셈이다. 그것이 국민 앞에 밝혀진 후로 국민투표가 실시될 때까지 국민은 개헌안의 제안 설명을 듣는 한편으로 그것을 검토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헌안의 내용이 공고되기도 전에 개헌안이 지니는 성격은 두 가지 점에서는 뚜렷한 것이라고 본다.
  첫째는 그것이 두말 할 것도 없이 ‘평화’ 지향적이라는 점이다. 대통령 특별선언이 거듭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총성이 들리지 않게 해야 하겠고 남북대화는 계속되어야 하겠고 조국은 기어코 평화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우리는 새 체제의 성격이 ‘평화’ 지향적인 것임을 확신하면서 이 점에 관해 국내외에 추호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둘째는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대통령 특별선언은 “자유민주주의를 더욱 건전하고 알차게 그리고 능률적인 것으로 육성 발전시켜야 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피력하고 있다.

이 사설은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통과’한 것이었다. 박정희와 ‘10월 유신’ 추진세력이 보기에 그 내용은 매우 못마땅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날짜 조선일보 2면에 실린 사설(「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에 비하면 마지못해 쓴 글처럼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조간인 조선일보가 석간인 동아일보보다 먼저 나왔다). 참고로 조선일보 사설을 보기로 하자.

  비상한 경우에는 비상한 조치를 필요로 한다. 어제 17일 19시를 기하여 이 나라는 비상조치를 선포하였다. (···) 우리는 이 사태에 직면하여 오늘 우리에게 부닥친 안팎의 모든 정세를 살펴보며 조국의 앞날의 걸어가는 길을 내다볼 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치로서 이를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 오늘 이 나라와 이 겨레가 처해 있는 간난과 인고는 민족사의 도정에서 바야흐로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 중흥을 이룩하느냐 못하느냐의 냉엄한 관두에 서 있으며 자칫 한 발자국을 그르치면 민족의 앞날에 커다란 위난(危難)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의 특별선언에서 명확히 소시(昭示)된 바와 같이 “결코 한갓 정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국권을 수호하고 영광스러운 통일과 중흥을 이룩하려는 이 민족의 운명과 직결되는 조치”로 받아들이기에 조금도 주저치 않는 것이다. 기존의 헌정질서만을 고집하거나 그것만이 오직 자유민주의 길이 아니요 오히려 이대로 방임하면 우리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에 가시덤불을 걸쳐놓을 뿐만 아니라 모처럼 역사적인 남북대화의 길을 마련한 그것마저도 일부 몰지각한 정상배들의 철없는 언동으로 말미암아 찬물을 끼얹는듯한 사례가 없지 않았음을 볼 때 우리는 소위 정치가도의 일각에서 국민들의 이목을 어지럽히며 사리(私利)에만 탐닉한 무리들이 그대로 존립하는 한 우리의 정계는 그야말로 백년하청 격임을 뜻있는 이 누구나 통감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짧은 시일의 기한을 정하여 헌법기능의 일부 정지와 아울러 이에 따르는 몇 가지 조치가 선포된 것은 새로운 헌정질서의 정립을 위하여 만부득이한 조치였음은 말할 것 없고 특히 박 대통령은 이러한 사태의 선포와 함께 여섯 가지 항목에 걸쳐 모든 국민이 알 수 있도록 정책의 지표를 밝힌 것을 재삼 음미해 볼 때 우리는 오늘의 이 사태를 내 자신의 앞으로의 보다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 위하여 진정 알맞은 조치임을 기쁘게 생각하며 따라서 이러한 비상사태는 민주제도의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하나의 탈각(脫殼)이요 시련이요 진보의 표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오늘 이 시점이야말로 촌각(寸刻)의 지체나 방황이나 퇴축(退縮)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상한 결의와 비상한 발분(發奮), 그리고 비상한 의지와 역량의 총집결로써 잠시 동안의 시련을 넘겨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멀지 않아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개헌안이 공고되면 우리들 모두의 의지를 한 곳으로 모아 눈부신 자유민주의 명일을 향해 매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것이다. (·····)
  (···) 끝으로 이번 비상조치에 의하여 많은 국민들은 충격도 없지 않았을 것이지만, 정부가 국민의 명랑한 생활과 경제활동의 자유 보장, 사회질서 확립을 다짐하고 있는 만큼, 이것을 굳게 믿고 각자의 직책에 더욱 충실하면 민족적 대의에 기여하기를 권고해 마지않는다.

이 사설은 박정희가 발표한 특별선언이 헌정쿠데타의 명백한 표현이라는 것을 지적하기는커녕 그 ‘정당성’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데 갖은 찬사를 동원하고 있다. 그리고 “모처럼 남북대화의 그 길을 마련한 그것마저도 일부 몰지각한 정상배들의 철없는 언동으로 말미암아 찬물을 끼얹는” 듯이 되었다고 비난한다. 이 표현은 박정희가 해산해버린 국회의 야당 의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위의 사설을 쓴 논설위원 또는 이 글을 감수(監修)한 주필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개헌안이 공고되면 우리들 모두의 의지를 한 곳으로 모아 눈부신 자유민주의 명일을 향해 매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것”이라고 장밋빛 전망을 제시한다. ‘10월 유신’이 나라와 민족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의 종신집권을 위한 폭거라는 사실은 웬만한 고등학생들도 능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이었다.


‘10월 유신’과 언론인들의 고난 

박정희 주재로 10월 23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국무회의법’과 ‘국민투표에 관한 특례법’, 그리고 특례법에 관한 시행령을 의결했다. 비상국무회의가 비상국무회의법을 정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었다.

박정희는 ‘유엔의 날’인 10월 24일 ‘치사’를 통해 “이번 유신적 개혁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를 토착화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며 우리 민족의 활로를 우리의 힘으로 개혁해 나감으로써 우리 민족사에 일대 전환점을 이룩하려는 자주성의 표시”라면서, “국민을 선도해야 할 지식인과 사회 각 계층의 지도자들은 마땅히 국민 모두의 자주적인 노력에 앞장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0월 27일 오전 비상국무회의는 ‘전문(前文)’과 본문 12장 128조로 이루어진 헌법개정안을 의결한 뒤 공포했다.

  이 개헌안은 전문 및 본문에서 조국의 평화통일 지향 의사를 명백히 했으며 국민의 주권적 수임기관으로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신설하고 이 회의에서 대통령을 간접선출토록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되는 대통령의 임기는 6년이다. 대통령은 1)긴급조치권 2)국회해산권 3)국회의원 3분의 1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대한 추천권 4)중요정책의 국민투표회부권 등을 갖는다.
  국회의원의 임기는 6년이며 회기는 정기회와 임시회를 합하여 연 150일을 초과하지 못하고 국정감사권은 감사원에 두었다.
  이 개헌안은 법원 조직에 있어서 각급 법관을 대법원장의 제청에 의해 대통령이 임명토록 했으며 위헌 여부, 탄핵 및 정당의 해산 문제를 다룰 헌법위원회를 신설토록 했다(조선일보 10월 28일자 1면).

이 개헌안은 대통령의 임기를 종전보다 2년 많은 6년으로 정하고 연임 제한 조항을 두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특정인의 종신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위한 ‘거수기 집단’이 분명해질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이 추천하는 국회 의석 3분의 1을 선출하는 형식적 절차를 밟도록 했으므로 집권당이 원내 의석 과반수 또는 3분의 2를 차지하는 일이 용이해졌다. 그리고 국회가 활동할 기간을 크게 단축하는 한편 국정감사권을 박탈함으로써 국회를 ‘식물화’하려고 했다.

박정희가 ‘10월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헌정쿠데타를 자행하고 있던 시기에, 언론인들은 질식할 듯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가 펴낸 <자유언론>(해담솔, 2005)에 그때의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비상계엄으로 언론은 엄중한 사전검열을 받게 되고, 기자들은 일상적인 취재활동마저 엄격히 제한을 받았으며, 정부 일부 부처 및 국회 기자실과 경찰기자실은 폐쇄됐다. 이 바람에 기자들은 아침부터 극장이나 고궁을 찾아다니거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울분을 달래곤 했다. 모든 언론이 보도할 자유는 물론 보도하지 않을 자유마저 완전히 박탈당해, 당국이 허용하지 않는 기사는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는 반면에 계엄사령부의 발표문이나 정부당국이 배급하는 해설기사 등은 토씨 하나 고치지 못하고 그대로 대서특필 해야 했다. 방송의 경우는 신문보다도 더욱 통제가 심해서 뉴스만이 아니라 오락프로그램에까지도 당국의 무자비한 손길이 뻗쳤다. 저항적인 색채를 띤 가요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금지곡이 되어 있었지만, 10월 17일 유신 이후엔 그 기준이 더욱 강화되어 심지어 찬송가까지도 비위에 거슬리면 금지곡 딱지가 붙었다. 특히 유신헌법을 채택하기 위해 10월 23일 비상국무회의에서 확정, 공포한 ‘국민투표에 의한 특례법’은 언론활동을 더욱 위축시켰다. “찬반토론을 금지한다”는 특례법의 조항 때문에 언론은 ‘계몽’이라는 미명 아래 유신헌법을 찬성하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10월 27일 개헌안이 공고된 뒤 11월 21일 국민투표가 실시될 때까지 신문의 많은 지면과 방송의 많은 시간이 정부당국이 배급하는 새 헌법에 관한 해설기사로 메워졌다. 그리고 10월 27일부터 12월 말까지 모든 신문의 1면과 7면엔 “통일을 위한 구국영단 너도나도 지지하자” “새 시대에 새 헌법, 새 역사를 창조하자” “뭉쳐서 헌정 유신, 힘 모아 평화통일” 등의 문공부 제정 표어가 매일 6단 크기로 게재됐다. 언론은 이제 권력의 무한폭력 앞에 전면 굴복하고 권력의 홍보 역할까지도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76~77쪽).

11월 21일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투표자 1,140만여 명(투표율 91.8%) 가운데 찬성이 1,317만여 표(투표자의 91.48%)로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1월 24일 오전에 발표했다.

당시 국민투표는 계엄령 아래서 치러졌다. 5·17 쿠데타 뒤인 1962년 국민투표는 직전에 계엄령이 해제된 상태에서 실시되었다. 1969년의 3선 개헌 때는 계엄령이 발동되지 않았다. 그런데 1972년 11월에는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개헌안에 대한 찬반토론이 봉쇄된 상황에서 국민투표가 강행되었다. 투표와 개표 감시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중앙선관위의 개표 결과 발표를 신뢰할 수 있는지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매체도 정치인도 전혀 없었다.


동아일보가 ‘유신대통령’ 박정희에게 보낸 ‘축사’

11월 25일 비상국무회의는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법과 시행령을 공포했다. 대의원은 전국 1,630개 선거구에서 1구당 5명씩 모두 2,359명을 뽑기로 했다.

박정희는 12월 13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해제한 뒤 “유신과업을 더욱 과감히 수행하겠다”면서 “국민은 이념 구현에 협조해 달라”는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박정희는 12월 22일 오전 10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곽상훈 등 515명의 추천으로 제8대 대통령선거에 단독으로 출마했다.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유신헌법에 따른 대통령선거를 실시했다. 재적 대의원 2,359명 전원이 참가한 투표에서 박정희는 찬성 2,357표, 무효 2표라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다. 그는 ‘당선소감’에서 “오늘 유신헌법의 절차에 따라 이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통일주체국민회의 결정을 역사와 민족의 엄숙한 명령으로 믿고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고 말한 뒤 “이 중대한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먼저 구국의 활로를 찾는 유신과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국민과 대의원 여러분의 헌신적인 노고에 대해 진심으로 치하와 격려의 뜻을 보낸다”고 했다(동아일보 12월 23일자 1면).

박정희는 12월 27일 재8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비상계엄이 해제된 뒤였는데도 동아일보는 12월 28일자 3면 사설(「제4공화국의 출범」)을 통해 ‘유신대통령’ 박정희에게 ‘축사’를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이 27일 8대 대통령의 취임식을 갖고 한편 유신과업의 이념을 담은 새 헌법이 공포됨으로써 제4공화국이 정식 출범을 보았다. 내년 봄에 있을 국회의원선거를 남겨놓고는 이로써 유신과업의 체제상 정비는 일단락 지은 셈이다. 제4공화국의 출범은 여러 가지 뜻에서 의의가 크다고 해야 하겠다. 안으로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터전이 확립되었고 밖으로는 긴장 완화와 남북교류 증대를 다짐하며 국정 전반에 걸친 유신적인 개혁이 예상되고 있으므로 이번 박 대통령의 취임은 특히 그 정치적 의의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 박 대통령이 “유신과업은 일차적으로 공직을 맡은 사람들의 자세와 태도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강조하고 “모든 공직자들이 막중한 책임과 숭고한 사명을 더욱 절감하고 유신대열에 앞장서서 솔선수범할 것을 다짐한다”고 한 것은 박 대통령을 비롯한 전체 공무원들의 비상한 결의 표명이며 국민으로서 흐뭇함을 금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과업 수행에는 사람에 따라 경중(輕重)이 달라야겠지만 모든 국민들이 믿는 바 자리와 직무를 통해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할 수 있는 기회균등이 더욱 존중되어야겠다. 유신사업을 위해 나라를 사랑하며 걱정할 수 있는 참여의 기회가 균등으로 주어질 때 국민 간에는 소외 대신 일체감이 형성될 것이다.
  박 대통령이 앞으로의 남북관계에 언급, “하나의 민족으로서 평화와 번영을 추구해 나갈 수 있도록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대화를 계속하고 이를 더욱 넓혀 갈 것”이라고 말한 것은 민족의 염원을 그대로 반영한 정책으로서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며 이와 관련하여 농공병진정책, 일터의 보장, 복지체제 확립, 지도층의 검약 등을 다짐한 것은 전 국민이 크게 기대해 마지않는 공약으로서 국민은 이러한 공약의 이행을 단지 바라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적극 협조를 함으로써 공약이 조속히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27일은 대통령 취임식과 더불어 유신헌법이 공포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헌법 공포와 더불어 정치활동도 허용되었고 그만큼 헌정 정상화를 위한 진전을 보았다. 지금까지의 헌정이 제대로의 구실을 못한 데 대해서는 모든 국민이 크게 반성하는 바 있어야겠으나 특히 정치인들의 맹성이 요청된다.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입장은 다르나 다 같이 반성하는 바 있어야 하며 제4공화국 하에서는 일보 전진한 활동을 보여주어야겠다.


유신체제 반대투쟁 고개를 들다

‘10월 유신’이 선포된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에 대한 공개적 비판이나 저항은 불가능해졌다. 설령 그런 움직임이 있다 하더라도 신문과 방송에는 보도될 수 없었다. 언론 통제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혹심했기 때문이다.

대학가에서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72년 12월 초였다. 전남대 학생 이강(법학과 2)과 김남주(영문학과 4, 휴학 중) 등이 최초의 반유신 지하신문인 <함성> 4백부를 제작해서 12월 10일 아침 전남대를 비롯한 광주시내 대학과 고등학교에 뿌렸다. 그들은 이듬해인 1973년 3월 다시 <고발>이라는 제목의 지하 유인물 1백여 부를 만들어 뿌렸다. 그 유인물은 유신체제를 ‘극히 불안한 수탈과 억압의 체제’로 규정한 뒤, “제4공화국의 운명의 날은 멀지 않았다”고 단언하며 젊은 학생들에게 4월 혁명을 기억하라고 호소했다.

  유신 정권은 이 사건을 대규모 변란사건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973년 3월 30일 사건 주모자인 이강과 김남주 이외에도 전남대 졸업생 박석무와 전남대생 이정호(물리학과 2), 김정길(경영학과 2) 등을 구속하였고, 4월에는 김용래(법학과 2), 이평의(경제학과4), 윤영훈(수학교육과 2) 등을 구속하였다. (·····)
  광주지검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적용하여 박석무, 이강, 김남주에게 모두 징역 10년씩을, 이정호, 김정길, 김용래, 이평의, 윤영훈에게는 징역 5년씩을 구형하였다. 하지만 ‘내란음모단체’는 근거 없는 조작임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반공법 관련 부분은 모두 무죄로 선고하였다. 이어 2심 재판부도 박석무가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무죄를 선고하였고, 나머지 이강과 김남주에게는 모두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였다.
  이 사건의 재판은 유신정권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우선 공판 과정에서 홍남순 변호사, 함석헌 등 유명 재야인사들이 관여하였고, 서울의 학생들이 많이 내려와 공판을 방청하는 바람에 묻혀버리고 있던 <함성>이나 <고발>의 내용이 더 주목받게 되었다. (···) 이강과 김정길 등 <함성>지 사건 관련자들은 석방되자 1973년 12월부터 다른 지역 학생들과 연계하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투쟁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이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97~98쪽).

전남대 학생들이 처음으로 시작한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과 고발이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최초의 ‘유신 반대’ 시위-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박정희가 ‘10월 유신’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한 뒤 반년이 지나도록 재야 민주화운동권에서는 박정희 종신집권체제를 거부하거나 비판하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73년 4월 22일 기독교의 젊은 성직자들과 학생들이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유신독재정권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유인물을 뿌리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해 부활절을 앞두고 서울제일교회 전도사 권호경은 많은 기독교인이 한자리에 모이는 부활절 연합예배 자리에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 생각을 박형규 목사에게 밝혀 동의를 얻은 권호경 전도사는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민주주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이다” “회개하라 이후락 부장” “꿀 먹은 동아일보, 아부하는 한국일보” 등의 내용으로 현수막 10개를 만드는 한편, 반석교회 김동완 전도사에게 전단 제작을 부탁하였다. 김동완 전도사는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나상기 회장에게 전단을 전달하여 부활절 새벽예배 때 학생들이 뿌리도록 하였다(같은 책, 98~99쪽).


마침내 부활절 날이 되었다.

  4월 22일 새벽 5시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6만여 명의 신도가 모인 가운데 부활절예배가 시작되었다. 진보적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보수적인 대한기독교연합(DCC)이 17년 만에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였다. 동이 틀 무렵 예배를 마친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남산 길을 내려가고 있을 때 회현동 쪽으로 가던 군중 사이에서 청년 몇 사람이 짤막한 글이 실린 전단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현수막은 펼치지 못했다.
  이 사건은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언론은 그 사실을 알고도 보도할 수가 없었고, 기독교 내부에서도 아는 사람들 몇이 ‘쉬쉬’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지 3개월 가까이 지난 1973년 7월 7일 신문과 방송이 그 일을 크게 보도했다. 서울지검 공안부가 박형규와 권호경을 포함한 15 명을 ‘검거’했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이렇게 발표했다. “피의자들은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 추종세력의 지지를 받아 정부를 타도하고 임시 통치기구를 구성하려고 했다.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군중을 네 방향으로 유도해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면서 방송국과 중앙청을 점거할 계획이었다.”
  검찰은 ‘거사자금’ 10만 원을 제공한 박형규, ‘거사를 지휘한’ 권호경, 그리고 ‘청년행동대원’ 2명을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했다.
  중앙정보부를 통해 그 사건에 관한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격분했다고 한다. 특히 “윤필용 장군을 위해 기도합시다”라는 내용을 플래카드에 썼다는 사실 때문에 그랬다.
  박형규와 권호경은 그해 9월 25일 1심 판결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이틀 뒤 보석으로 풀려났다. ‘내란예비음모’라는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법원은 가벼운 징벌을 내리고 풀어주기까지 했다(<폭력의 자유>, 179쪽).

동아일보는 ‘10월 유신’ 이후 최초의 ‘유신체제 반대’ 운동인 남산부활절연합예배 사건에 관해 독자적인 취재를 하지 않고 검찰의 발표문을 그대로 보도했다. 1973년 7월 6일자 7면에 3단으로 실린 기사(「내란음모 기도 15명 검거 / 지검 발표 / 목사 등 넷 구속 11명 즉심」)는 다음과 같다.

  서울지검 공안부(정명래 부장검사)는 6일 현 정부 전복을 기도한 서울제일교회 목사 박형규(50) 씨와 전 신민당 조직국 제2부 차장 남삼우(35) 씨 등 15명을 지난 3일부터 5일 사이에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지난 4월 22일 부활절 연합예배날을 거사일로 결의, 남산야외음악당 부활절 예배장소에 모인 10만여 군중 속에 “민주주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이다”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등의 내용이 적힌 전단을 뿌렸으며 플래카드를 들고 행동대원이 4개의 방향으로 군중을 유도, 이를 저지하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면서 중앙방송국을 점거, 중앙청을 비롯한 관서들을 점령할 계획 등 내란음모를 기도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 음모에 가담한 15명 가운데 전 신민당 K 모 국회의원 비서 진산전 씨 등 11명은 검거 후 즉심에 돌렸으며 음모책임자 박형규 씨 등 4명은 내란예비음모죄를 적용, 구속했다고 밝혔다.

이 기사에 나오는 ‘내란예비음모’는 나중에 재판에서 밝혀졌듯이 수사기관이 조작한 것이었다. 겨우 전단 4백여 장을 군중에게 뿌린 사람들과 제작자들에게 그렇게 엄청난 혐의를 씌운 것이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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