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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령 발동과 ‘국가비상사태’ 선포동아일보 대해부 3권 -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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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6.2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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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학생들은 교련철폐투쟁을 다시 적극적으로 펼치는 한편 박정희 정권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해 나갔다.

  1971년 9월 6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교련백서>를 발간하여 “반역사적, 반민족적, 비지성적 군사훈련을 단호히 고발하며, 군사훈련 축출”에 대한 결의를 밝혔다. 9월 15일에는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등 4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교련의 ‘전면 철폐’를 재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9월 28일에는 연세대생 약 8백 명이 “교련 담당 현역 군인은 즉시 학원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부정부패 규탄은 예상치 못한 사건과 맞물리며 지배권력의 본성과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10월 5일 새벽 1시 30분경 수도경비사 제5헌병대 소속 군인 20여 명이 고려대에 난입하여 학생회관에서 농성 중인 서클 ‘한맥’ 간부 5명을 수도경비사로 불법 납치하여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경사 헌병대가 고려대에 난입한 이유는 학생들이 자신들의 사령관을 대표적인 부정부패 인사로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고려대에서 9월 30일과 10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부정부패 원흉을 처단하라는 내용의 벽보가 붙었다. 특히 10월 4일 벽보에는 대상자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었고, 거론된 이름 중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육군소장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589쪽).


동아일보 ‘수경사 군인 고려대 난입과 학생 납치’에 침묵

무장한 군인들이 학원에 쳐들어가서 학생들을 납치한 사건은 일찍이 유례가 없는 일로, 뜨거운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석간신문인 동아일보 5일자에는 그날  새벽 무장군인들이 고려대에 난입해서 학생들을 납치해 간 사건에 관한 기사가 전혀 없었다.

동아일보는 뒤늦게 10월 7일자 7면에 「군인들 학원 난입 항의 / 3백여 고대생들 데모 나서 / 새벽에 단식농성 학생 5명 연행」이라는 기사를 3단으로 내보냈다. 그 중대한 사건에 관한 제1보가 없이 학생들이 항의시위를 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것이었다. 사건의 경위도 학생들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을 전달했을 뿐 깊이 있는 취재를 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대생 8백여 명은 7일 오전 11시 동교 대강당에 모여 지난 5일 새벽에 일어난 무장군인 학원 내 난입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가진 후 3백여 학생이 데모에 나섰다. 학생들에 의하면 지난 5일 새벽 1시 반경 육군장교 및 사병 40여 명의 무장군인들이 군 트럭 3대와 지프 1대에 분승, 교내에 난입, 학생회관 휴게실에서 자고 있는 윤재근(법학과 3년)·함상근(법학과 3년)·강승규(교육과 3년)·정승옥(불문과 3년)·심강일(교육과 2년) 군 등 5명을 연행한 뒤 이날 아침 6시경 김상협 총장에게 인계했다.
  연행되었다 풀려나온 5명의 학생은 지난 9월 29일에 연행된 ‘한맥회’ 회장 장신구(사회학과 3년) 군의 석방을 위해 단식농성을 벌이고 부정부패의 원흉을 처단하라는 벽보를 붙였다가 연행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성토대회를 마친 학생들은 낮 12시 5분 3백여 명이 교문을 나서 “당국은 무장군인의 학원 난입 사건의 진상을 조사 발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1백여 미터 나아가다 경찰기동대의 저지를 받아 대치했다.
  학생들은 이어 “연행된 한사회 회장 이종연 군 등 3명을 즉각 석방하라” “무장군인의 학원 난입이 민주주의냐”라고 외치며 투석으로 맞서다 경찰의 최루탄과 페퍼포그 저지를 받고 12시 반경 일단 교내로 돌아갔다.

동아일보는 뒤늦게 10월 8일자 1면에 그 사건이 정치적 쟁점이 된 사실을 5단으로 크게 보도했다.

  ‘군인들 고대 난입’ 정치문제화 / 국방위, ‘우려할 사태·통수권 문란 아닌가

  무장군인 고려대학교 난입 사건은 8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정치문제로 번졌다. 신민당 소속 의원들의 요구로 열린 이날 국방위는 유재흥 국방부장관을 출석시켜 사건 경위와 사후대책 등을 중점적으로 추궁했다. 이 자리에 서 유 국방부장관은 자진보고를 통해 “현역 군인들이 상관의 명령 없이 군 병력을 동원한 것은 군기 위반이므로 육군헌병감으로 하여금 이들을 조사 조치토록 지시했으며 조사결과에 따라 응분의 조처를 하겠다”고 말하고 “다시는 이 같은 행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군인들을 철저히 단속하라고 예하부대에 지시했다”고 밝혔다.
  유 장관은 “지난 5일 새벽 1시 10분 수도경비사 제5헌병대대 소속 최동수 소령이 인솔한 22명의 군인이 고대 안의 학생회관에서 음주 잡담하고 있는 학생 5명을 경비사로 연행했다가 김상협 고대 총장에게 이들을 인계했다”고 말하고 “군인들이 학원에 들어간 것은 지난 9월 중순부터 서울대·고대·성균관대 등에서 교련 교관에 대한 화형식, 교련 반대 데모 등을 벌인 데 이어 지난달 30일부터 현역 지휘관 윤 모 씨 등의 이름을 들어 군을 모욕하는 벽보를 붙인 데 격분, 서울시경국장에게 이들 학생들을 조사, 명예훼손으로 처벌해주도록 요구했으나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기거하면서 밖 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연행하지 못해 결국 군인들이 상관 명령 없이 학원 내에 들어간 것”이라고 국방부 측 조사결과를 보고했다.


‘무장군인 고대 난입’에 관한 동아와 조선의 사설

동아일보는 10월 9일자 3면에 「군인의 학원 난입 사건」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 일부 장교들의 행동은 아무리 학생들 측에 잘못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두 번 다시 있어선 안 될 용서할 수 없는 중대한 잘못을 범했음을 맹성(猛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의 사명은 국토방위에 있으며 그들이 소지한 무기는 오로지 국토를 지키는 전투에서만 사용이 허용되고 있다. 그들의 집단행동은 상사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으며 명에 의하지 않은 집단행동은 헌법이 명시한 국가의 통수권을 문란케 한다는 중대 결과를 초래한다. (·····)
  (···) 이번 일부 군인들의 행동은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 만약 사정(私情)으로 군인이 학생을 적대시한다는 인상을 주면 김 총장이 염려한 대로 군인과 학생의 대립 나아가서는 그들의 부모형제인 국민의 감정을 자극시키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는지도 모른다.
  차제에 우리는 정부 고위층에 오늘의 심상치 않은 국민여론을 경청해 줄 것을 바라고자 한다. 지금 도처에서 국민들은 부정부패를 추방하고 또 청신하고 깨끗한 국가사회를 건설해 줄 것을 절규하고 있다. 당국은 이러한 소리를 단지 불온한 여론이라고만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부정부패를 추방해달라는 여론은 벌써 수년 전부터였고 이 소리는 지난봄 선거를 전후해 절정에 이르렀으며 박 대통령도 이 점에 대해 임기 내에 기어이 뿌리 뽑겠다고 결의를 다짐한 바 있다. 오늘날 내외 시국의 중대성에 비추어 이에 대한 국민여론은 더욱 심각해지고 더욱 초조감조차 보이고 있다. 이번 학생·군인의 충돌도 근원을 따지자면 그 원인이 ‘부정부패 추방’ 운동과 관련되어 있음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 만약 정부가 부정부패를 추방해 달라는 국민의 절규에 성의 있는 반응을 못 보인다면 정부는 국민 앞에 도의적 권위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위정자는 그 결과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온갖 파동도 근원을 따지자면 부패와 비리가 그만큼 깊고 넓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정부 고위층의 비상한 영단이 이 시점처럼 목마르게 촉구되는 상황은 없다 할 것이다.

이 사설은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벽보를 붙인 학생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제한 뒤, 결론 부분에서는 부정부패를 뿌리 뽑겠다고 공언하고도 그것을 외면하는 박정희를 비판하고 있다. 당시 신문이 쓰던 ‘정부 고위층’이라는 용어는 대통령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동아일보보다 하루 늦은 10월 10일자에 무장군인 고대 난입을 소재로 한 사설(「군기와 유 국방의 책무」)을 2면에 올렸다.

  (···) ‘무장군인의 고대 난입 사건’은 8일의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유 국방부장관이 야당 의원의 추궁에 답변하여 그 전말을 보고하고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헌병들이 저지른 소행이었음을 밝혔다. 우선 소관 장관이 국회에서 솔직히 있은 사실 그대로를 설명하고 ‘잘못했다’는 것을 시인했으므로 이 충격적인 사건이 공개되지 않은 채 쑥덕공론으로 시민들의 입과 귀를 통해 꼬리를 붙여 퍼져 나가던 5일 아침부터 며칠간의 불안했던 민심을 가라앉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행하게 생각한다. (·····)
  (···) 유 국방이 국방위원회에서 “군인의 정치테러나 부정부패가 있다면 이를 발본색원하겠다”는 요지의 강력한 언명을 한 것에서도 그 신조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듯이 국내문제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군만은 미동도 없는 자세로, 그리고 깨끗한 존재로 국민의 신뢰를 드높여 나가야만 된다는 것을 십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군에 ‘부패분자’가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이번 고대 사건의 계기가 된 ‘장성 모욕’도 알고 보면 그것이 학생들의 창작이 아니라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의원의 연설 가운데 나온 속기록의 내용 일부를 학생들이 인용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면책특권이 있는 국회의원의 원내 발언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의 처지를 분간하지 않는 허물을 면치 못하겠지만, 그러나 만약 유 국방이 언명한 대로 군기 확립을 위해 ‘발본색원’할 결의가 있다면, 엄중한 자체 감사는 말할 것도 없고 발설한 의원에게 그 자료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어쨌든 무장군인의 학원 내 난입이라는 불행한 사건이 유 국방과 윤 사령관의 솔직한 태도 표명으로, 원만한 수습의 실마리가 된 것을 우리는 안도하는 것이며, 특히 유 국방이 ‘군기 확립’이란 중차대한 과제를 걸머지고 더욱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꿋꿋한 자세로 그 책무를 다할 것을 편달해 마지않는다.

무장군인들의 고려대 난입과 학생 납치는 단순한 ‘군기 문란’이 아니라 국기(國基)를 뒤흔드는 만행이었다. 수도 서울을 ‘경비’한다는 헌병들이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는데도 조선일보의 사설은 국방부장관이 국회에서 “솔직히 사실 그대로를 설명하고 ‘잘못했다’는 것을 시인”한 사실이 ‘다행’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솔직한 태도 표명’이 ‘원만한 수습의 실마리’가 된 데 ‘안도’한다.

조선일보가 정론지(正論紙)를 자처하려면 이 사건에 관해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를 촉구했어야 마땅하다. 대통령에게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위수령 발동과 7개 대학에 군대 진주

10월 7일 서울대 문리대·법대·상대 학생들은 ‘부정부패 추방’을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특히 문리대 학생들은 교내에서 ‘부정부패 특권층 화형식’을 거행한 뒤 거리로 나섰다. 10월 12일에는 전남대 학생들이 부정부패를 규탄하며 시위를 벌였다. 12일과 14일에 전국 여러 대학에서 가두시위에 나선 학생은 1만 명을 넘었다. 그들은 부정부패자의 명단 공개, 무장군인의 고려대 난입 책임자 처벌, 중앙정보부 철폐를 요구했다.

  부정부패 문제는 양심적인 종교계 인사들에게도 민감한 사안이었다. 지학순 주교의 주도 아래 원주교구가 10월 5일부터 시작해 10월 7일까지 부정 부패 규탄시위를 전개했다. 보수적인 성향을 띤 것으로 인식되던 가톨릭교구가 농성을 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원주 문화방송의 비리 규탄에서 시작된 이 시위는 3일간 이어지며 대정부 부정부패 규탄시위로 확대되었다. 5일부터 3일째 기도회를 벌였던 천주교 원주교구 신자 3백여 명은 7일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위원회’ 결성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부정부패 추방, 정보부 해체, 반공법 폐기 등을 거듭 촉구했다.
  천주교 원주교구의 시위를 시발로 종교계의 부정부패 규탄이 이어졌다. 10월 8일 개신교와 가톨릭교회가 공동으로 결성한 ‘크리스찬 사회행동협의체’ 산하단체들이 침묵시위를 전개했다. 10월 11일에는 한국기독교학생총연맹(KSCF), 한국가톨릭학생연합회, 서울지구 교회청년연합회가 모여 ‘부정부패 규탄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를 결성했다. 같은 날 ‘가톨릭 문우회’가 부정부패 추방을 지지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같은 책, 590~591쪽).

2학기 들어 시작된 대학가의 교련철폐투쟁과 부정부패 규탄 시위가 갈수록 뜨거워지자 10월 12일 국방부장관과 문교부장관이 “교련수업을 거부하는 학생들을 강제 징집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동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종교인들이 합세한 박정희 정권 비판투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박정희는 10월 15일 9개 항으로 이루어진 ‘특별명령’을 내렸다. ‘정권 안보’를 위협하는 집회와 시위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9개 항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학원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주동 학생을 학원에서 추방 2)불법적 데모, 성토, 농성, 등교 거부, 수강 방해 등 난동행위 주동자는 제적 3)제적된 자에 대한 학생 신분상의 특권 박탈 4)학술 목적 외의 모든 대학 서클 해산 5)대학에서 정당히 인가한 것 이외의 모든 간행물 발간 중지 6)학원질서가 파괴된 대학에서는 모든 학생단체를 해산하며, 경찰은 학원 내에 들어가서라도 주동 학생을 색출 7)군은 필요한 때에 문교부, 내무부 및 지방장관의 요청에 적극 협조 8)교련은 중단될 수 없으며 교관단은 충실히 강의에 임할 것 9)각 대학은 학칙을 엄격히 보강해 질서 확립과 교권 확립을 기할 것(동아일보 10월 15일자 1면).

박정희의 ‘특별명령’은 법적 절차에 따라 국회의 동의를 받은 것이 아니라 독재자인 대통령이 내린 전체주의적 ‘명령’이었다. 그 명령은 대학의 존재이유를 부정하고 학원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파쇼적 만행 그 자체였다.

박정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서울대 문리대·법대·상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경희대, 성균관대, 한국외국어대, 전남대에 ‘무기휴업령’을 내리고 학교 문을 닫게 했다.

  육군은 15일 양택식 서울시장의 청구에 따라 이날 오전 10시 35분을 기해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양택식 시장은 이날 오전 요즘 대학가의 데모·성토 등으로 문란해진 사회질서가 경찰병력만으로는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 위수령 제12조에 의해 병력 지원을 요청하게 됐다고 밝혔다. 
  수도경비사(사령관 윤필용 소장) 당국은 이날 오전 10시 35분 서울시장의 청구에 따라 즉각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을 얻어 병력을 동원했다고 밝혔는데 육군 당국은 위수령이 지난 50년 3월 27일 대통령령 246호로 공포돼 항시 발동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동아일보 10월 15일자 1면). 

 
말이 위수령이지 그것은 학원에 대한 비상계엄령이나 마찬가지였다. 15일 고려대에서 학생들이 투석전으로 군대 진주에 맞서자 위수군은 70여 명을 연행했다. 그날 서울시내 7개 대학에서 1,889명의 학생이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위수령에 대한 동아일보의 ‘유순한’ 사설

박정희가 국회와 국민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파쇼적인 초법적 조치를 남발하면서 위수령까지 발동하는데도 동아일보는 그 부당함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한 채 유순하기 짝이 없는 사설(「학원의 정상화를 위해」)을 10월 16일자 3면에 실었다.

  (···) 우리는 얼마 전부터 오늘과 같은 사태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염려하고 학생들에 자중 자애를, 당국에 반성을 촉구한 바 있으나 아무런 반응도 없이 마침내 오늘과 같은 사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이 마당에 지난날을 탓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며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학원이 하루속히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먼저 학생들에 당부하고 싶은 점은 대학생으로서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무방하다 하더라도 학업을 가능케 하는 질서 있는 참여가 결국은 국가를 위하고 학원을 위하고 학생을 위하는 길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잘 판단하여 행동이 상궤에서 일탈하는 일이 없도록 자중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시국은 우리 학생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의 학생의 몇 배의 면학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학생들의 잘못은 나무랄 만하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를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청년들이고 보니 그들을 선도하여 후일 좋은 국민으로 양성해야 할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 국민총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청되는 이 마당에 만약 조금이라도 군과 학생 간의 대결과 같은 인상을 주게 되는 일은 엄계(嚴戒)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일시적으로 흥분할 수 있다. 하지만 책임이 무거운 위치의 인사일수록 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흥분에서 저지르기 쉬운 실수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 모두가 반성할 것을 바라 마지않는다. (·····)
  우리의 조국은 지금 전체 국민에 깊은 반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우려할 상황에 있다. 오늘날처럼 국민에게 대결 아닌 총화가, 힘 아닌 대화가, 불신 아닌 상호 이해가 촉구되는 때는 없다 할 것이다. 정부와 학생과 국민에 거듭 자성과 인내를 바라 마지않는다.
  과연 이번 사태가 위수령을 선포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는지 이론(異論)을 말하는 편도 있다. 여하간 위수령은 하루속히 해제하도록 부탁하는 바이다.

느닷없이 선포된 ‘국가비상사태’

10월 23일 위수군이 학원에서 철수할 때까지 전국의 23개 대학에서 학생 174명이 제적되고, 35개 대학에서 교련 미수강자 6,322명을 포함한 1만3,505명이 ‘학적 이동자’로 병무청에 신고되었다. 한 야당 의원은 “그렇게 많은 학생이 제적된 것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시기에도 없었던 일로 전체주의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강요에 의한 침묵’ 상태에 들어갔는데도 박정희 정권은 새로운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 11월 13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하고, 위수령으로 제적된 서울대생 4명(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과 사법연수원생(조영래) 1명을 검거했음을 밝혔다. 검찰은 이들이 폭력시위를 통해 정부기관을 습격, 전복한 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및 학생 대표들과 ‘혁명위원회’를 구성한다는 등 ‘9단계 국가전복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공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조작된 사건임을 밝히고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검찰은 이들에게 10년 형을 구형했지만, 1972년 12월 항소심 최종판결에서 이들은 가벼운 처벌만을 받았다. 최종판결의 결과는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거창한 이름을 걸고 발표했던 중대한 사건이 국가비상사태 선포에 앞서 민주화운동세력을 미리 탄압하고 족쇄를 채우려는 의도 하에 만들어진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같은 책, 597쪽).

1972년 12월 6일 박정희는 느닷없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동아일보 1면 머리에 실린 기사는 아래와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6일 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박 대통령은 한국이 “안전보장 상 중대한 차원의 시점에 처해 있다”고 단정, “정부와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비상사태를 극복할 결의를 새로이 할 필요를 절감하여” 비상사태 선언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날 아침 9시에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윤주영 정부대변인이 발표한 이 선언은 1)정부가 안보태세를 확립할 것과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을 것”을 밝히고 2)언론이 “무책임한 안보논의를 삼가”도록 요구하는 한편 3)모든 국민은 안보 상 책무 수행에 자진 성실하고 안보 위주의 새 가치관을 확립하여 최악의 경우에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갖도록 요구하고 있다. 중공의 유엔 가입과 북괴의 남침 준비 등을 이유로 안보에 대한 관심은 지난 10월 위수령 선포를 전후로 크게 논란돼 왔으며 정부 당국은 안보태세의 확립, 수도권 방위 강화 등을 주장하면서 현재가 ‘준전시 이상의 사태’임을 강조해 왔다.


동아일보, ‘국가비상사태 선언’의 논리를 지지

동아일보는 12월 7일자 3면 사설(「국가안보와 자유민주주의」)에서 박정희의 초헌법적인 ‘국가비상사태 선언’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하지 못하고 그 선언을 합리화하는 논조를 펼쳤다.

  (···) 오늘의 국내외 정세 판단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지만 집권당의 (···) 시국관에 의거, 6개 항을 골자로 한 비상사태가 선언된 것이라면 하여간  앞으로의 국민생활이 이 선언을 계기로 크게 규제받을 것이라 함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동북아를 둘러싼 정세가 해빙 무드를 보이고 있기는 하되 북괴의 무력 증강과 침략성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음이 현실이라고 볼 때 국민의 대공 경각심은 더욱 고양되어야 하고 이러한 점에서 박 대통령의 비상사태 선언이 발하게 된 동기도 짐작할 수 있다. (·····)
  첫째, 공고한 안보태세를 갖추는 데 있어 가장 취약점이 되고 있는 것이 사회불안에 있다고 한 박 대통령의 지적에 우리는 전적으로 의견을 같이한다. 담화가 사회불안이 어떤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사회불안의 근원적 요인이 부정부패에 있다고 보며 따라서 사회불안을 일소하는 길은 바로 이 부정부패를 철저히 정화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
  둘째, 언론이 무책임한 안보논의를 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연 안보라 함은 국가 존망에 관련된 문제이므로 안보논의를 함부로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경솔이며 따라서 박 대통령의 경고는 언론계가 명심해 들어야 할 충고라 할 수 있다. (···)
  (···) 박 대통령이 안보논의에 신중을 기해 달라고 요망한 이상 무책임한 논의를 하지 않기 위해서 건실한 안보논의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관해 언론계에 참고가 될 만한 설명 같은 것이 있었으면 한다.
  셋째, 담화는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악의 경우’가 가령 전쟁 상태 같은 것을 의미한다면 국민은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필요하다면 자유의 일부는 고사하고 그 전부라 할지라도 기꺼이 내놓을 용의가 있다. 다만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최악의 경우’가 어떠한 경우인지 좀 더 구체적 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박정희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주장한 주요 원인은 ‘국제정세의 급변’과 ‘북괴의 남침 준비 양상’이었다. 그런데 당시 국제정세는 ‘데탕트(화해)’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196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은 미국을 수렁에 빠뜨린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을 조속히 철수시키겠다고 공약했다. 그렇게 하려면 북베트남을 지원하던 소련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다. 닉슨은 강경한 ‘반공주의자’였지만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데탕트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1971년 12월에는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다. 10월 25일 중국이 유엔에 가입해서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된 바 있고, 중국을 향한 미국의 화해정책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런 국제정세를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해서 한국이 “안전보장 상 중대한 차원의 시점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와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 비상사태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 사설은 박정희의 아전인수 식 국제정세 ‘분석’에 동의하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도 않은 ‘북괴의 남침 위협’을 가시적인 것이라고 단정했다.

공화당은 12월 27일 새벽 3시 국회 제4별관에서 법사위와 본회의를 잇달아 열고 공화당 의원 111명과 무소속 의원 2명이 참석한 가운데 야당이 격렬히 반대하던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국가보위법)안’을 3분 만에 통과시켰다. 박정희는 그날 오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그 법을 공포했다.

법적 근거가 없는 박정희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사후에 합법화하기 위해 공화당이 발의하고 국회에서 일방적으로 가결한 국가보위법은 대통령에게 국가비상사태 선포권을 부여하고, 국회의 비상사태 해제 건의권을 인정했다. 이 법에 따라 대통령은 국방상의 목적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의 효율적 동원이나 통제·운영을 위해 국가동원령을 발동하고, 동원 대상 지역의 토지, 시설의 수용·사용에 대한 특별조치를 취하고, 옥외집회· 시위 언론 및 출판과 근로자의 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규제할 수 있게 되었다. 가뜩이나 독재를 일삼던 박정희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 1971년 학생 및 재야 민주인사들의 시도는 박정희 정권의 강압적인 조치 앞에서 좌절되었다. 교련철폐투쟁과 공명선거 쟁취를 통해 폭압정치를 종식시키고 탈냉전과 남북대화의 새로운 흐름을 확대하여 평화적 통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바람을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고, 반민주적 법안을 비정상적 방식으로 통과시켜 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 역사의 전개의 흐름은 민주주의가 완전히 말살되는 유신체제의 등장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세력이 비록 유신체제로 이어지는 반동화의 흐름을 당장 막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1971년의 민주화운동은 유신체제 하 민주화운동의 인적, 조직적 자원을 확보하고 나아가 운동의 방향을 설정하는 과정이었다는 측면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같은 책, 5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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