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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파동과 광주대단지 사건동아일보 대해부 3권 -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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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6.1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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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7월 28일 오후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 41명 가운데 37명이 집단사표를 제출했다. 한국 사법사상 처음 벌어진 일이었다.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사법사상 최초의 판사 37명 집단사표

서울지검은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 이범렬, 판사 최공웅, 참여서기 이남영이 7월 초 제주도에 출장을 갔던 때 사건 담당 변호사 하경철한테서 뇌물과 향응을 받은 혐의로 그들을 입건하고 7월 28일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동아일보 7월 28일자 1면 기사(「검찰, 판사 2명 구속영장 신청」)는 법조계와 사건 당사자의 반응을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 현직 부장판사가 독직 사건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되기는 근래에 없던 일인데 이날 검찰이 현직 판사들에 대한 내사를 진행하는 한편 현직 부장판사를 포함한 사법부 인사 3명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등 강경한 검찰권을 발동하게 되자 재야 법조계에서는 크게 반발하고 있어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구속영장이 청구된 이범렬 부장판사는 28일 오전 사무실에 나와 정상 집무를 하면서 “내가 수양이 덜 된 탓이다. 아무 말 않겠으며 또 말하고 싶은 심경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나 하나가 희생되더라도 법관의 권위와 사법부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면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서울형사지법 모 부장판사는 “법원이 큰 소리 칠 계제까지는 못 되나 사안이 크다면 모르지만 조그만 약점을 들추는 것은 난처하다. 현 단계로서는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당시 법조계의 ‘관행’처럼 되어 있던 변호사의 법관 ‘접대’, 그것도 현금을 받은 것이 아니라 3명이 10만원 미만(항공비, 식사와 술, 수영복 등)의 대접을 받은 것을 빌미로 삼아 검찰이 구속영장까지 신청한 것은 지나친 강공책임이 분명했다. ‘도주와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는 판사들을 구속하려고 한 검찰의 처사를 보고 서울형사지법의 대다수 판사들은 박정희 정권의 압력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항의의 뜻으로 집단사표를 제출했던 것이다.

  박 정권은 6월 22일 대법원의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당시 국가배상법(제2조 1항)에는 “현역 군인이 직무 수행 중 사고로 다치거나 순직할 경우 국가는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는 규정이 있었는데, 대법원은 이 규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또 대법원은 위헌 판결을 대법원 판사 3분의 2 찬성으로 하게 되어 있는 것도 위헌이며 일반 판결처럼 과반수로 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박 정권이 불만을 느 낀 것은 이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은 당시 파월 장병 사상자가 많아 국가재정에도 부담이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6월 29일 서울지법 부장판사 양헌은 신민당 당사에서 총선 거부를 주장하며 농성을 벌여 구속 기소된 서울대생 정계성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는데, 이 판결도 박 정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위헌 판결에 찬성한 대법원 판사들을 가리켜 “나라 형편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며 분노했으며, 신민당사 농성 학생들의 무죄 판결에 대해서도 격분하여 대법원장 민복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유감을 표시했다.
  (···) <다리> 탄압사건도 7월 16일 서울지법 단독판사 목요상이 전원 무죄판결을 했는데, 이 또한 박 정권을 화나게 만들었다. 목요상은 자신의 무죄판결 결심을 눈치 챈 검찰과 중앙정보부에서 갖은 회유와 압력을 받았는데도 굴하지 않고 소신을 지킨 것이었다.
  박 정권은 이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서 법관들 전체에 대해 강한 위협을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박 정권은 그런 음모의 희생양으로 이범렬을 선택했다(<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 1권>, 150~151쪽).


동아일보, 법조계 입장을 옹호하고 검찰의 반성을 촉구

동아일보는 7월 29일자 3면에 올린 「사법부의 위기」라는  사설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한 법조계의 입장을 옹호하는 논조를 펼쳤다.

  (···) 이번 사표 파동은 무력한 법원의 행정부에 대한 오랫동안의 쌓이고 쌓인 불만이 이 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며 사법부는 이번 일을 계기로 기필코 사법부의 독립을 쟁취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법조계의 지배적 여론인 것 같다. 검찰당국은 보안법 위반 사건을 심리하기 위한 출장에 향응을 받았다는 것을 중시하는 것 같으나 사정을 알아보면 반드시 그렇게만 볼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피고인 측의 증인 심문을 위해 출장을 요청한 사건 담당 변호사 하 모 씨는 전직 판사 출신으로 이 부장판사하고는 얼마 전까지 동료 관계에 있었고 더욱이 두 사람은 대학의 동창생으로서 개인적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교통비나 숙박비, 식비 정도를 제공했다는 것은 뇌물수수 관계라기보다 우정의 표시라고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울지 모른다는 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많은 법조인들의 해석이다.
  더욱이 이 사건을 수회(收賄) 혐의로 본다 하더라도 도주의 우려가 없고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일단 영장을 기각했는데도 동일한 구속영장을 다시 신청했다는 것은 법원에 대한 검찰의 감정적 태도로 보여 검찰당국이 사건을 원만히 수습할 수 있는 이성 있는 태도를 바란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로 듣고 있다. 세상에서는 행정부 앞에 사법부의 독립이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으며 사건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압력을 받는 예가 없지 않다고 보는 것이 통념이 돼 있다. 그러나 작년 사법부에 정풍(整風)운동이 벌어진 후부터는 행정부와 맞서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
  우리는 이번 파동을 계기로 사법부가 더욱 분발하여 오욕의 지난날을 깊이 반성하고 또 청산하여 사법부의 양심과 독립을 되찾는 결정적 계기로 삼아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사법부는 행정부의 시녀가 아니며 어떠한 압력도 이를 배제하고 소신과 양식을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더욱 문제되어야 할 것은 근래 사회의 비난을 사고 있는 검찰의 형벌청구권의 남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검찰 내부에는 사건과 관련한 각종 향응은 물론 많은 잡음이 들리고 있어 검찰 내부의 정화 운동이야말로 더욱 시급한 과제로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검찰은 소뿔을 빼려다 소를 잡는 처사를 하지 말아야 하겠다. 사건의 처리에 사법부를 필요 없이 자극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확대시키지 말아야 하겠다. 사법부가 납득할 만한 선에서 수습하는 이성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이러한 이성 있는 성의를 보일 때 집단사표 제출도 수습될 것이며 평지풍파격인 이번 사건이 원만히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

동아일보는 위의 사설을 내보낸 이튿날인 7월 30일자 3면에 「검찰의 반성을」이라는 제목으로 강력한 논조의 사설을 올렸다.

  현직 부장판사를 수회했다는 혐의로 거듭 구속영장을 신청한 검찰의 태도는 사법부에 대해 도전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2탄 터뜨려 반격하자”는 검찰의 반응은 사법부의 위기 이전에 3권 분립의 위기이며 그에 못지않게 국가권력을 다루는 검찰이 양심의 위기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현직 판사의 혐의사실을 나무라기 전에 검찰 스스로의 비행부터 정화하라는 국민의 소리는 검찰의 양심이 오래 전부터 마비되어 왔다는 것을 말한다. 법무부장관은 영장신청서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을 냉정히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민주국가의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의 권위를 실추케 하였으며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얼굴이 뜨거운 야비함과 품위의 추락, 이건 분명히 국가권력의 남용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검찰은 왜 이처럼 이성과 양심이 마비된 채 흥분하고 있는가. 사법부의 독립은 3권 분립과 민주제도를 지켜나가기 위한 국가적 양심의 보루다. 사법부의 위기는 사법부의 위기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3권 분립의 위기며 민주주의의 위기다. 사법부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법관의 양심이다.
  법원 판사들이 집단사표를 낸 것은 바로 재판의 공정을 지키는 데 필요한 법관의 양심이 검찰의 마비된 양심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것으로밖에 다른 풀이는 나오지 않는다. 검찰은 양심이라는 이름의 법정에 거꾸로 피고로 서볼 필요가 있다. 현행 법조계의 관례상 혐의사실이 구속에 해당되는 것인가의 여부를 두고 말이다. 스스로의 생활을 돌이켜보라고 국민의 소리는 외친다. 구속영장 신청이 모든 판사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할 때 공정한 재판은 기대할 수 없다. (·····)
  우리가 보기에 이번 사건은 범죄보다도 법관의 직업윤리에 해당되는 측면이 더 많다고 하겠다. 지금 국민들은 사법부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는 것보다 더 크게 검찰에 대해 불신을 하고 있다. 그 원인을 법무부장관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왜 그런가. 이성과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다. 사법부에 보복이나 하는 것처럼 지나친 도전을 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검찰은 이 사건에서 손을 떼고 법원 측에 일임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거듭 주장한다.

7월 31일 대한변호사협회는 검찰의 사법권 간여와 피의사실 공표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법관의 사표 제출은 대구, 청주 등으로까지 확대되어 415명의 법관 중 3분의 1이 넘는 153명의 법관이 사표를 내기에 이르렀다. 법관들은 법무장관 신직수의 인책 사퇴, 이번 사건에서 발생한 피의사실 공표에 관련된 검찰관의 의법조치, 그리고 사법권의 독립을 위협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는 등 근원적인 개선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에 대해 가장 극단적인 강경 대응을 주장한 사람은 바로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정권이 재판권을 침해한 것은 전혀 생각지 않고, 오히려 판사들이 행정부에 대해 부당한 압력을 가한다며 분노했다. 자신이 직접 기자회견을 통해 판사들의 행정권 침해를 비판하겠다고 펄펄 뛰었다. 자신의 그런 분노가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 비서관들이 박정희의 기자회견 및 담화문 발표를 막느라 땀을 뻘뻘 흘려 박정희의 적반하장은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집중연재 박정희 육성증언: 선우연 공보비서관, 8년간의 육성 비망록 여섯 권, 역사적인 대공개!>, 월간조선 1993년 3월, 141~147쪽), 박정희는 이미 이때부터 3권 분립을 인정치 않는 사실상의 유신체제 중독증을 보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같은 책, 152~153쪽).


동아일보, ‘사법부를 지키자’

동아일보는 법관들의 집단사표 제출이 전국 여러 곳으로 확산되던 8월 2일자 3면에 「사법부를 지키자」라는 사설을 실었다.

  (···) 검찰이 두 번씩이나 현직 부장판사를, 그것도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해서 구속영장을 신청한 권력의 남용이 지금까지 억제되어 왔던 판사들의 자제를 폭발시켰다는 데 이론(異論)이 개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각 지방법원에서의 항의사표, 서울고법의 동조 기세는 검찰에 억눌리고 있는 사법권을 수호하기 위한 자위(自衛) 노력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법관들이 대법원장에게 보내는 건의문에서 검찰의 압력 유형을 공개한 것은 사법권의 독립이, 그리고 3권 분립이, 민주제도가 중대한 위기에 서 있음을 국민에게 알리려는 것일 것이다.
  판사들에 대한 갖은 압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경찰국가가 아닌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행위다.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려는 비민주적인 범죄행위다. 용공분자 시(視)하거나 미행, 신원조회, 도청, 폭언, 협박 그리고 사생활의 프라이버시를 들추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검찰은 사실무근이라고 한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 엄연히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
  (···) 검찰은 공소권을 남용해 왔다. 임의로 독선적으로 행사해 왔다. 너무 정치를 의식했다. 정치적 사건에 너무 민감하고 강경했다. 그리고 이제 검찰은 반공법과 보안법 사건 같은 이른바 국사범을 내세워 애국심을 독점하려 하고 있다. (·····)
  국사범을 내세운 검찰의 애국심 독점은 자칫하면 사법부와 사상논쟁마저 일게 할 우려조차 없지 않으며 3권 분립 제도와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민주 제도의 기본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존경에 금이 가게 했다. 검사들은 애국심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나 진정한 애국심은 어느 개인이나 어느 정당이나 어느 정부에 대한 것이 아니며 민주주의라는 제도 그 자체에 대한 신뢰와 충성 바로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애국심이다.
  그러므로 검찰이 만약 헌법의 수호자이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행정부나 입법부의 있을 수 없는 침해로부터 구제하기 위한 양심의 보루인 판사에게 압력과 위협을 가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는 애국심 때문인가, 출세를 하기 위해서인가, 권력에 아부하기 위해서인가, 시키는 대로 끌려갔는가, 어느 것이건 국민들은 이에 승복할 수 없다. (·····)
  국가의 기본질서인 3권 분립이 위기에 처해 있고 헌정질서가 위기에 있는데도 국회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3권 분립 제도가, 사법부의 독립이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운데도 여당은 당리당략에 얽매어서 재판과 소추는 국회가 관여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
  국회가 헌법을 지키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할 사법부가 위기에 놓여 있는데도 여당 때문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실로 국민들에 대한 배신이요 모욕이다. 여야당 의원들은 집권당과 국민의 야당에 소속되기에 앞서 모두 국민들의 대표라는 것을 깨닫고 헌정질서의 위기에 신중히, 신속히 대처해 줄 것을 바라고 싶다.

대법원장 민복기가 8월 3일 소집한 전체 판사회의는 “대법원장의 대통령 면담이 늦어짐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논의한 끝에 ‘사법부 독립은 법관 스스로가 수호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회의 직후 민복기는 “법관들의 건의사항은 본인이 책임을 지고 시정토록 노력하겠으니 법관들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국민의 권익 보호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의 지시공한을 각급 법원장 앞으로 발송했다(동아일보 8월 4일자 1면).

동아일보는 사법부 파동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성의 있는 대응을 하지 않자 8월 10일자 3면 사설(「사법부 파동을 더 끌게 말라」)에서 “이번 파동에 법률적 책임을 질 인사는 법률적 책임을, 행정적 책임을 질 인사는 행정적 책임을 지는 것은 민주정치체제 하에서 당연한 상식이며 성의 표시도 아무것도 아니다. 이와 같은 명백한 사리를 외면하고 사태 수습을 지연시켜 사법부뿐 아니라 입법부의 기능까지 마비에까지 번지게 한 행정부의 우유부단이 한없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사법부의 일방적 패배로 끝난 파동

서울민·형사지법 판사 85명 전원은 사법 파동이 일어난 지 한 달만인 8월 27일 오후 그동안 제출된 사표를 철회했다.

  이로써 사법권 수호투쟁이 벌어지면서 제기됐던 법관들의 사퇴 논의는 일단락 됐으나 법관들은 이날 법원별 판사회의를 거쳐 “정상집무를 통해 사법권 독립을 수호할 것”을 다짐하는 성명을 발표, “앞으로 사법권이 침해되는 일이 있을 경우 과감한 투쟁으로 이를 물리칠 결의”를 새로이 했다. 이 날 민복기 대법원장의 소집으로 열린 재경 전체 법관회의가 끝난 직후 서울민·형사지법 판사들은 오전 11시부터 각각 원장실에서 회의에 들어가 약 2시간에 걸쳐 찬반 양론의 격론을 벌인 끝에 낮 1시경 사표를 반려받기로 결정, 반려되어 온 사표를 각자 되찾아 갔다(동아일보 8월 27일자 7면).

이 기사를 보면 사법 파동이 자체 수습 형식으로 끝난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법부의 일방적 패배로 결말이 난 것이었다. 대법원장 민복기는 국회에서 행정부를 대표한 사람들이 한 발언을 이유로 법관들에게 사표를 철회해 달라고 말했는데, 대통령인 박정희 말고 당시에 사법권을 보장할 사람은 따로 없었다.
동아일보는 8월 28일자 3면에 「사법 파동에 대한 책임」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한 달 간이나 계속된 ‘사법 파동’이 그간 이렇다 할 해결도 없이 지연되어 오다가 다만 법관들이 이미 낸 사표를 철회함으로써 일단 가라앉았다. 파동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가라앉은 것은 다행한 일이기는 하나 한편 사법부의 독립, 존엄성 문제 등에 사실상 아무런 개선도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법관들의 성명 그대로 깊은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
  이번 파동은 우리 사법부사상 초유의 일에 속할 뿐 아니라 사법부의 독립이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는 어떤 민주국가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으로서 국제적으로 더 할 수 없이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이러한 중대한 사건인데도 행정부당국에서 구체적으로 이렇다 할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문제점을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것은 앞으로 또 언제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를 불식할 수 없으며 이러한 점에서 행정부에 국민으로서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많은 법관들이 사법부의 독립이 그간 얼마나 침해되어 왔고 이 독립의 수호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확인하고 성명에서 표명한 바와 같이 앞으로 사법권의 독립이 침해될 경우 더욱 과감한 투쟁으로 이를 물리칠 것이라고 국민 앞에 다짐한 것은 실망 가운데서도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크게 고무적이며 또한 마음 든든한 결의 표명이라고 아니 볼 수 없다. (·····)
  (···) 이번 파동에는 행정부나 사법부로서 누군가가 책임을 지는 인사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이번 파동에 불씨를 일으킨 검찰당국은 가부 간에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의 기본질서가 뒤흔들리는 파동을 유발하고 국제적으로는 민주국민으로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수치를 겪게 하고서도 납득할 만한 이렇다 할 수습이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한 무성의 무책임이 사법부에 눌려서 되겠느냐는 일종의 오기와 같은 옹졸한 심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검찰은 보여주어야 한다. 특히 지난 한 달 동안의 이 엄청난 사법부 파동에 그간 쭉 검찰총장직에 있었던 검찰책임자로서 신 법무의 답변을 듣고 싶다. (·····)
  누가 책임져라 지지 말라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자기의 양식에 비추어 국가와 국민 앞에 죄송하다고 생각된다면 자리를 스스로 물러섬으로써 책임 행정의 전통을 세울 줄 알아야 한다. (···)
  똑같은 말이 민 대법원장에도 해당될 것이다. 이 파동이 일어나기 전 민 대법원장은 자기 입으로 사법부에 일부 부패가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했으면서도 이를 시정하지 못했고 마침내는 이번과 같은 파동을 방지하지 못했으며 파동이 일어난 후에도 사법부의 장으로서 전체 법관들이나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수습을 못한 채 전대미문의 파동을 한 달 이상 끌게 했고 법관들로 하여금 사법부 독립을 위한 건의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깊은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는 자탄을 하게 만든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사법 파동을 일으킨 진원지인 검찰을 지휘·감독하는 법무부장관 신직수가 그런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은 것과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 민복기가 사법권 수호를 위해 합당한 대처를 하지 못한 것을 질책한 동아일보 사설의 논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정작 사법 파동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가 대통령 박정희라는 점을 이 사설은 언급하지 않고, 아니 못하고 있다. 당시 ‘3선 대통령’으로서 종신집권으로 치닫고 있던 박정희가 사법부를 길들이기 위해 검찰이 일으킨 ‘폭거’를 문책하기는커녕 암묵적으로 조장했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법무부장관이 그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낸다고 해서 받아들일 리도 없고, 자신이 임명한 ‘충복’인 대법원장이 사법권 독립에 앞장서라고 ‘권장’할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그 이후 전개된 역사를 보면 법관들의 투쟁만으로 사법권 독립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여실히 입증되었다.

  (···) 부장판사 이범렬은 사직하였으며, 파동 당시 사법권 수호운동의 주역을 맡았던 서울형사지법 원장 송명관은 대전지법원장으로 좌천된 후 사표를 제출했다. 사법권 독립과 검찰 측 인책 요구에 앞장섰던 판사 홍성우와 김공식도 사표를 냈다. 부장판사 양헌과 판사 목요상은 유신 이후 법원에서 쫓겨났다. 두 사람은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도 못한 채 대전, 대구에서 객지 생활을 해야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법관들로부터 인책 요구의 대상이 되었던 검찰 관계자들은 인책은커녕 오히려 대부분이 출세 가도를 달렸다.
  사법 파동이 있은 지 1년이 좀 지나서 선포된 유신체제는 아예 명시적 로 사법부를 정권의 하부기관으로 종속시켰다. 대법원장 민복기는 1973년 신년사에서 “사법권도 필경은 국가 정치권력의 한 부문에 속하는 만큼 사법권의 존재 양식도 여기에 발 맞춰 나가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다”라고 말했다(같은 책, 153~154쪽).


‘광주대단지 사건’을 처음에는 ‘난동’으로 보도

사법 파동이 한창이던 1971년 8월 10일 오전 11시경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서 ‘철거 이주민들’의 대대적 투쟁이 시작되었다. 동아일보는 8월 10일자 1면에 그 사건을 5단으로 크게 보도했다.

광주단지 대규모 난동 / 불하땅값 인하 요구 / 서울시 위약에 격분 방화

  [광주] 10일 오전 10시경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은 성남출장소 뒷산에 모여 각종 세금 면제와 실업자 구제, 토지 불하가격 인하 등 세 가지 조건을 내걸고 서울시장을 만날 것을 요구하다가 약속시간인 오전 11시가 지나도록 양 시장이 나타나지 않자 격분, 오전 11시 45분 이 중 3백여 명이 성남출장소에 방화, 본관 건물을 전소케 하고 광주대단지 사업소장의 승용지프차 및 서울 관 7492호 신진에이스를 불태우는가 하면 몽둥이를 휘두르며 지나가는 차량들을 빼앗아 타고 거리를 질주하는 난동을 부렸다.
  이날 모인 주민들의 대부분은 서울 시내에서 전매입주한 사람들로서 지난 달 14일 광주대단지 사업소장 명의로 분양토지 20평을 평당 8천~1만6천 원에 불하한다는 고지서가 발부되자 그동안 수차에 걸쳐 토지 불하가격을 내려달라고 서울시 당국에 건의했으나 그때마다 묵살당해 오다가 9일 오후 시 당국으로부터 “서울시장이 10일 오전 11시까지 광주대단지에 나와 대책을 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이날 오전 성남출장소에 모였다.
  주민들은 비가 오는데도 시장을 기다렸으나 약속시간이 지나도 양 시장이 나타나지 않자 45분 간 더 기다렸다가 11시 45분부터 일부 주민들이 난동을 부린 것이다.
  흥분한 일부 주민들은 성남출장소에 들어가 기물을 부수고 출장소 본관 150여 평 단층건물에 불을 질러 모두 태우고 1백여 미터 떨어진 서울시단지사업소에 몽둥이를 들고 몰려가 사업소 안의 기물들을 마구 때려부수고 불을 지르려 했으나 비가 내려 실패, 앞에 놓여 있던 사업소장 승용차를 불태워 탄리천에 집어던졌다. 또한 주민들은 (···) 삼륜차와 시영버스 1대를 빼앗아 타고 “1백 원 주고 산 땅을 1만 원에 팔지 말라”는 등 플래카드 등을 차에 붙이고 고함을 지르며 거리를 달리는 등 오후 3시 반경까지 난동을 계속하고 있다.

광주대단지 주민들은 왜 ‘난동’이라고 매도당해야 하는 ‘봉기’에 나섰을까? 

  광주로 이주하면 살 곳을 마련해주겠다는 서울시의 말만 믿고 실려 온 이들 철거민은 24인 용 천막 하나에서 네댓 가구가 장롱, 찬장 등으로 칸막이를 한 채 생활해야 했다. 또 상하수도나 전기시설이 없어 냇물을 길어다 쌀을 씻고 뒷산의 생나무를 베어 밥을 짓고 호롱불로 불을 밝혀야 했다. 또한 수천 가구에 공동화장실이 12개에 불과해서 인근 야산은 순식간에 온통 인분으로 뒤덮였다. 그 결과 이질, 설사, 콜레라 등의 전염병이 창궐했고, 특히 수인성전염병이 심했던 1970년 초여름에는 하루에 3~4구의 시신이 실려 나오기도 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639쪽).

굶어 죽는 주민이 잇달아 나오던 그 무렵, 서울시는 개발 붐을 일으키려고 광주대단지가 ‘신천지’가 될 것처럼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다. 그러자 투기자본이 몰려들어 이주민들이 팔고 떠나는 택지분양증을 사들이려고 경쟁을 벌였다. 애초에 서울시가 평당 4백 원에 사들인 땅의 값이 서울 도심지 일부보다 높은 2만~6만 원에 거래되었다.

분양증을 팔고 서울로 돌아간 이주민들은 그래도 나았으나 대단지에 남은 나머지 3분의 2쯤 되는 사람들은 언저리의 싼 땅을 사서 판잣집을 지어야 했다. 서울의 판자촌이 광주대단지로 옮겨진 셈이었다.

투기자본이 잽싸게 빠져나가자 땅값은 폭락했다. 개발비용 환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서울시는 1971년 7월 택지를 높은 분양가격으로 강제 매각하려고 했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바로 그 무렵에 터졌다.

사태가 그렇게 심각해질 때까지, 거의 모든 신문은 그런 비극이 박정희 정권의 무모하고도 비인간적인 개발정책의 결과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동아일보와 몇 신문이 광주대단지의 참상을 전하는 기사를 더러 실었을 뿐이다.

동아일보, ‘무분별한 개발정책’을 비판

광주대단지는 애초부터 철거민을 중심으로 한 신도시로 계획되었다. 그래서 그 지역은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가 없었고,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주민들은 기아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대단지 안에 있는 단순조립공장이나 섬유업체들에는 여성만 취업할 수 있어서 청·장년 남자들은 외지로 나가지 않으면 만성 실업에 시달려야 했다. 대단지 안에서 버티려고 남은 철거이주민들 가운데는 노점상이나 행상, 날품팔이로 생계를 꾸리는 이들이 다수였다. 분양증(속칭 ‘딱지’)을 사서 들어온 전매(轉買)입주자들은 주로 농촌에서 서울로 온 빈민들이거나 셋방살이를 하던 사람들 아니면 기지촌 출신이어서 고정적인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1971년 5월부터는 굶어 죽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이처럼 처참한 상황에서도 개발 비용의 회수가 시급했던 서울시는 대단지 내 개발용지 처분을 서둘렀다. 당시에 일반택지는 철거이주민에게 개발 원가에 가까운 염가로 분양하곤 했기 때문에, 투자 재원의 조속한 환수는 단지 내 중심가 및 가로변에 위치한 유보지(留保地)의 매각 가격 및 시기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서울시는 개발 붐을 조성할 목적으로 광주대단지가 ‘신천지’나 되는 양 각종 언론매체를 동원해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나섰다. 그러자 부동산 투기 이득을 노린 유휴자본들이 대거 쇄도하는 한편, 이농민 및 무주택 서민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철거이주민들이 팔고 떠나는 택지분양증을 매입했다. 이처럼 분양증 전매가 활발해지자, 부동산 업자들이 대거 몰려와 1969년부터 복덕방촌이 형성되어 천막 복덕방이 대단지 입구 도로변을 하얗게 뒤덮었다. (·····)
  그러나 초기 이주한 철거민의 3분의 1 가량은 택지분양증을 전매하고 서울로 돌아갔고, 남은 철거민의 약 3분의 2도 택지분양증을 전매한 후 단지 주변 하급지를 매입해서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 생활했다. 따라서 철거민 이주를 통해 판자촌을 해체하고 서울의 과밀을 해소한다는 애초의 정책 의도는 실현될 수 없었다. 여기에 대해 선거 직후의 유휴자본이 바닥나고 이미 들어온 투기자본도 빠져나가자, 땅값은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개발비용 환수가 어려우리라고 판단한 서울시가 1971년 7월 높은 분양가격으로 택지를 서둘러 강제 매각하고자 했다. 이는 이미 생계가 막막한 대단지 주민들에게 생존을 위협하는 결정타로 여겨졌고, 이들은 조직적인 대응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같은 책, 640~641쪽).

광주대단지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무리하게 주먹구구식으로 추진한 ‘개발정책’의 산물이었다. 개발의 주체는 서울시였지만 그것을 지시한 장본인은 박정희 자신이었다. 도시빈민들이 박 정권의 사후 대책 없는 ‘불도저 식 개발’에 희생되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일으킨 저항이 폭력에 기댄 것은 비판받을 소지가 컸지만, 적어도 그들의 참상을 따뜻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참된 언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동아일보 8월 12일자 3면 사설(「광주단지 난동 사건의 예」)은 광주대단지 주민들의 항거를 ‘난동’이라고 표현하면서도 극한적 투쟁에 나선 주민들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정부의 무분별한 개발정책을 비판했다.

  (···) 광주대단지 난동 사건은 사건 그 자체 못지않게 그것을 일어나게끔 했던 여러 문제들이 더 중요한 것인 것을 다툴 수 없다. 난동으로 치닫게 된 심리 상태, 그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불모의 황야야말로 국내정치의 치명적인 허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수도의 언저리에 15만 명의 영세민이 이주된 채 구호대책마저 없었다는 것은 행정 부재에 앞서 정치 부재의 인상마저 풍긴다.
  난동으로 치닫게 한 지방행정의 자세도 문제 삼아져야 할 것이다. 주민들과의 의사소통이 없는 행정, 지방주민들에게 봉사하는 행정이 없었기에 극히 유감된 난동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이 그릇된 행정자세는 원천적으로 도시정책의 빈곤과 주택 및 택지정책의 잘못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이러한 무책임한 행정이 계속된다면 이번 광주 난동 사건은 명예롭지 못한 아주 불건전한 사회적 선례가 되지 않을까 크게 염려스럽다. 전매입주자에 대한 차등불하가격의 시정, 가옥취득세의 면제, 구호양곡의 지급 등은 사실 영세민을 위해서는 그들의 요구를 사전에 서울시가 합리적으로 해결했어야 했을 일이다. 난동이 일어난 뒤에 약속할 수 있는 시정책이라면 그러한 난동이 있기 전에는 왜 약속을 못했었을까. 지방행정의 관료성을 나무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점 특히 도시정책 면에서 철저한 반성이 아울러 이루어져야 하겠다. 불합리한 도시정책이야말로 이번 난동 사건의 원인(遠因)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시정책이 잘못된 것은 무허가건축물에 들어 있는 영세민들을 이주 정착시키는 것보다 판잣집의 철거라는 목표 달성을 너무 성급하게 서두른 데 있을 것이다.
  이제 토지투기를 조장하여 무주택자나 영세민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택지조성정책이나 단지개발사업은 철저히 재검토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진정 판잣집을 해소하려고 한다면 철거민들이 경제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기회부터 먼저 마련해야 할 것이다. 영세민들의 주택난을 해결하자면 택지는 불하가 아니라 임대료를 받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무릇 도시정책도 도시미관에 너무 취하지 말아야 하겠다. 도시에서 판잣집이 철거된다고 해서 가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세민의 생활을 고려하지 않는 무허가주택의 강제 철거, 도시미관에 대한 얽매임, 대화나 봉사나 책임이 없는 행정, 그리고 토지투기적인 대단지 개발사업은 이번 난동을 계기로 철저히 재검토되어야 하겠다는 것을 거듭 지적한다.

내무부는 8월 11일 광주대단지를 광주군에서 분리해서 성남시로 승격시키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첫 단계로 성남출장소를 도(道) 관장으로 하여 소장직을 현 서기관에서 부이사관으로 직급을 올려 이석봉 양주군수를 승진 발령하고 우선 지서 인원을 1백 명 선으로 증원, 절차를 밟아 경찰서를 두기로 했다. 손수익 내무부 지방국장은 이 지역은 인구가 16만 명으로 급증하고 이동률이 높아 작년 말 서울시와 협의, 독립된 자치단체로 만들기로 합의했으며 도시행정 조직 작업을 이미 마쳤다고 밝혔다(조선일보 8월 12일자 7면).

광주대단지에서 살 길이 막막해진 이주철거민들에게, 대단지가 성남시로 승격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그 이후에도 그곳은 생존의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국사회의 ‘생지옥’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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