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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대선과 무기력한 동아일보동아일보 대해부 3권 -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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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5.1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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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부터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부닥쳐 곤욕을 치르던 박정희 정권은 1965년에 한일수교와 청구권 문제 등을 마무리 한 뒤 1967년에 실시될 제6대 대통령선거를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분열된 야당의 전열 정비

1965년 7월 국회에서 한일협정이 비준된 뒤 제1야당인 민중당의 온건파가 원내로 복귀하자 강경파는 집단으로 탈당해서 1966년 3월 신한당을 만들었다.

  (···) 1966년이 다 가고 1967년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는 와중에도 야당의 분열은 여전했다. 민중당과 신한당 두 야당 내부에도 각각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 대립이 심각했고, 또 그 안에 다시 몇 개의 파벌들이 나누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야당이 지리멸렬한 가운데 1966년 서민호가 사회민주당(1967년 대중당으로 개칭)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창당발기인대회의 결의문이 문제가 되어 당직자들이 구속되는 등 정권의 탄압으로 제대로 활동할 수조차 없었다. 이리하여 야당은 박정희 정권에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66년 12월부터 민중당과 신한당의 통합 논의가 급진전되었다. 양당의 비주류 인사들을 중심으로 ‘야당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미 민중당은 유진오, 신한당은 윤보선을 대통령후보로 선출한 상황이었지만, 민중당이 신한당에 통합을 제의하였고 교섭이 시작되었다. 1967년 1월 26일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 이범석의 당시 야권의 영수 네 사람이 회담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통합의 큰 그림이 그려졌다. 1967년 2월 7일 민중당과 신한당은 신민당으로 정식 통합한 뒤 정권교체의 수임정당을 자처했다. 통합야당 신민당의 대통령후보는 윤보선이, 당수는 유진오가 맡았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493~494쪽).

민중당과 신한당이 신민당으로 통합한 이튿날인 1967년 2월 8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선명야당의 진로」라는 사설이 올랐다. 제목부터 통합된 당을 ‘선명야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민중·신한 양당을 모체로 한 통합야당 ‘신민당’이 7일 발족, 대통령후보에 윤보선 씨, 당수에 유진오 씨를 각각 선출하여 박두하는 대통령선거에 집권 여당과 1 대 1로 대결케 되었다.
  우리는 기적 아닌 기적을 이룬 통합야당의 출현에 충심으로 경하하는 바이며 이 기회에 통합야당의 진로에 몇 가지 충고를 부연하고자 한다.
  첫째로 국민의 한결같은 여망이 야당 통합을 바랐던 것은 통합야당의 출현이 건전한 양당제도 확립의 제1보가 되고 국민의 선택권 행사가 선명해질 수 있다는 데 큰 뜻이 있는 것이며, 국민 대다수가 통합야당을 전폭 지지하여 당장에 공화당 정권의 대체세력으로 선택한다는 보장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신민당 스스로 똑바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며, 국민의 지지로 정권을 인수할 수 있느냐 여부는 오히려 지금부터나마 통합야당의 노력 여하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바이다.
  따라서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단시일 내에 통합이라는 기적을 이룬 신민당은 하루속히 진정한 ‘공당’으로서의 면목을 갖추고 국민대중에 공당으로서의 방향과 이념을 선명히 제시하고, 집권여당과의 논쟁점을 뚜렷이 해서 국민에게 선택의 소재를 제공하여야 할 것이며, 이 점 정책야당으로서의 성격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정당은 집권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그 정당이 가진 국가통치에 관한 포부·주장을 구현하는 데 있어야겠고 집권은 그러한 목적에 대한 수단이어야 한다. 이런 정당을 가리켜 근대적인 공당이라고 부르며, 반대로 집권 자체 만에 혈안이 되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세력은 전근대적인 붕당 또는 도당은 될지언정, 우리가 바라는 근대적 공당은 될 수 없다. (·····)
  끝으로 요망하고 싶은 것은 집권 개연성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집권 가능성이 뚜렷한 통합야당으로서 국가에 충성스러운 반대당의 자세를 갖추어 달라는 것이다. 즉, 반대하는 입장에 처했으니, 불가불 반대하는 반대당이아니라, 반대하는 입장이 선명하니 반대당이 된다는 원칙, 그리고 설사 반대당이라 하지만 적어도 집권할 때까지는 시시비비로 집권당에 대국적으로 협조할 것은 협조하는 대범한 태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4월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대통령선거 후보자 등록을 마감한 결과, 모두 7명이 이름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신민당의 윤보선, 대중당의 서민호, 민중당의 김준연, 한독당의 전진한, 통한당의 오재영, 정의당의 이세진이었다.

  공화당은 “틀림없다 공화당! 황소 힘이 제일이다” “박 대통령 다시 뽑아 경제건설 계속하자” “중단하면 후퇴하고 전진하면 자립한다”는 선거구호를 내세운 반면, 신민당은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갈아치자”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봄에는 갈아치자” “박정해서 못 살겠다 윤택하게 살아보자”라는 선거구호를 외쳤다. (·····)
  장준하는 4월부터 윤보선 캠프에 뛰어들어 유세 최일선에 나섰다. 그의 박정희 비판은 화끈했다.
  “박정희 씨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의 독립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누었으니 이런 인물이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있는 것은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수치입니다.” “박정희 씨는 국민을 물건으로 취급하여 우리나라 국민을 월남에 팔아먹고 있고 그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 씨는 과거 공산주의의 남로당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남한에서 지하 조직 활동을 한 사람이며 조직원 동료를 팔아 희생시키면서 자기 한 목숨을 산 사람입니다.”
  발언 강도가 너무 높아 “이런 유세를 듣는 이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과연 저러고도 무사할까 싶어 박수조차 잊은 채 찬물을 끼얹은 듯 듣고만 있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3권>, 139~140쪽).


박정희 진영의 ‘관권선거’

대통령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박정희 정권이 불법과 위법을 자행하면서 ‘관권선거’를 기도하는 데도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피상적인 보도를 하거나 아예 침묵을 지켰다.

동아일보는 선거운동이 시작된 뒤 처음으로 4월 14일자 2면에 ‘관권선거’를 온건하게 비판하는 사설(「청중 동원의 강제」)을 실었다.

  선거 유세에 보다 많은 사람의 참가를 바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호별방문 등, 후보자와 유권자의 개인적 접촉이 금지되어 있는 한, 유권자가 후보자를 직접 볼 수 있고, 후보자의 포부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선거 유세에 적극 참가하는 길밖에 없다. 따라서 유권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어느 당 주최의 유세이든 적극 참관할 필요가 있고, 시간과 기회가 허락하는 대로 참가하는 것이 참된 유권자의 태도라고 지적하고 싶다. (···)
  그러나 유권자들이 자진해서 참가하는 것과 강제성을 띤 타율적이니 강권(强勸)으로써 참가하는 것과는 의의가 전혀 다를 것이고, 효과 역시 다르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보도된 대로 일부 지역에서 일부 관청의 공무원이 근무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대거(大擧)해서 여당 주최 유세회에 참가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도의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다 같이 규탄되어야 할 일이라고 본다. 만일 그것이 근무시간 후의 시간이라면 하등 시비 거리가 될 수 없겠으나,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분명히 직무태만이나 직무유기에 해당되는 일이며, 그런 결과는 행정사무의 차질이 불가피한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집단적인 유세 참가가 그런 관청 책임자의 권유나 묵인 없이는 사실상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명백하다고 보면, 결국 과잉충성에 사로잡힌 관청 책임자의 소행이 규탄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관련해서 지적하여야 할 것은 장차관 등 중앙정부 요원들의 지방 행차가 무엇 때문에 선거기간에 빈번하느냐는 문제다. (·····)
  여당 유세에 공무원이 동원되었다는 것만 하여도 점잖지 못한 청중 동원의 사례가 된다. 예컨대 기차까지 동원해서 무료로 승차시켜 야당의 항의를 받은 일이라든가, 또는 선거법에 금지되어 있는 교통편의 공여나 음식물 제공으로 청중을 동원하는 일은 정정당당한 선거운동이 될 수 없다. (·····)
  이제 선거운동 기간도 보름 남짓하다. 이 보름 남짓한 기간에 공정하고 명랑한 분위기 속에 민주선거의 전통 확립에 여야 할 것 없이 다 같이 공헌해야 할 것이며, 이 점을 유권자들이 예의주시해야 할 것이다.


유세 청중 수 보도와 동아일보의 ‘미봉책’

선거전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박정희·윤보선 진영에서는 유세를 참관한 청중의 수가 어떻게 보도되는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동아일보는 4월 26일자 2면에 「선거 유세와 청중 수」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민주정치가 궁극적으로 ‘수의 정치’이기는 하다. 그러나 덮어놓고 단순한 수 계산 만으로 이루어지는 정치가 곧 민주정치는 아니다.
  세상에는 중우(衆愚)정치라는 말도 있고, 나아가 때로는 독재정치가 도리어 시위나 투표 등에 있어 민주정치를 능가하는 수의 과시를 곧잘 하기 때문이다. (·····)
  대통령선서 유세와 관련하여 여야 할 것 없이 청중 수에 어느 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 반응들임을 보고, 우리는 우리의 선거가 그 원리를 젖혀놓고 공연히 들떠 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이대로 나아가다가는, 선거제 자체에 대한 불신을 일깨우는 결과를 가져오지나 않을까, 얼마간 성급한 기우를 갖게까지 한다. (·····)
  보도에 의하면, 유세장으로 달리던 버스의 사고로 사람이 죽기까지 했다는가 하면, ‘봉투’를 나누어주면서 청중을 모으는 사건까지 있다. 또 여야를 막론하고 자기네 유세장에 모인 청중 수 보도에 가지가지의 불만을 털어놓는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한편에서 공무원들이 집무시간인데도 여당 유세장에 몰려나가 사무실이 텅텅 비었다는 보도가 날마다 나오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선거법이 금하고 있는 퍼레이드를 했다고도 한다. 선거운동이 절정에 오르면 법도 이성도 무시해 좋은 것인가.
  우리의 분명한 생각을 밝히면, 우선 청중의 수를 놓고 광기를 드러내는 일을 말자는 것이다. 만일 우리와 같은 정치풍토에서 여당이 청중 모으기에 요즘 같은 방법으로 임한다면 야당이 모으는 청중의 몇 배는 언제든지 쉽게 모을 수 있으리라는 것쯤 누구나 알고 있다. 청중 수가 많다는 것은 오늘의 현실에서는 이미 여당의 자랑일 수 없다. 야당도 그렇다. 스스로의 연설이나 정책이 정말 국민을 납득시킬 만한 것이라면 청중 수 가지고 표수를 점치며 설레는 버릇은 버렸으면 한다. 야당도 이제는 일회적인 집회의 성황도보다 꾸준히 계속되는 성실로 대처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선거를 단순한 수 놀음으로 타락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여야 그리고 유권자의 공동 책임이다.

이 사설은 여당인 공화당과 야당인 신민당이 선거 유세의 청중 수에 과민하게 신경을 쓰는 것을 나무라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관권을 동원해서 청중 수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쪽은 공화당과 권력자들이었다. <동아일보사사 권3>에는 유세 청중 수에 관한 보도에서 동아일보사 간부사원들이 편의적인 방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5·3 대통령 선거전에서 박·윤 두 후보 간의 유세전의 성패는 1963년의 대통령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두 후보의 인기를 가늠하는 것으로 평가되어 양측 모두 청중 동원에 안간힘을 다하였다. 공화당의 경우 시·군·면·동·리·반의 장을 기본으로 하는 행정조직 및 지역 말단까지 침투된 선거조직이 있었고, 이 조직이 물 쓰듯한 선거자금으로 순조롭게 가동하였다. 그러나 신민당의 경우 거꾸로 행정조직에 눌렸고 관권의 음성적인 탄압을 받아야 했으며, 또한 서로 앙숙의 사이였던 민중·신한당이 선거 3개월 전에 인위적으로 급조 통합하였으므로 하부까지 효율적인 단일조직이 되지 못하였다. 이른바 선전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흔히 ‘야당지’로 불리는 본보는 초연한 독립적 입장을 취하려 노력했다. 또한 야당과 야당후보는 적절한 이슈를 제기하여 여당후보를 궁지로 몰아넣어야 했는데, 순전한 정책 대결의 차원에서 설득력 있는 대안 제시에 만족할 만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 박은 부산·대구·대전·광주·인천 등 대도시에서 윤보다 많은 청중을 동원할 수 있었고, 서울 유세에서도 박과 윤이 약 25만씩 비슷한 청중을 끌어 모았다. 청중 수의 보도는 신문마다 모두 다르고 특히 정부계 신문은 황당무계한 숫자를 보도하였는데 본보의 경우, ‘선거보도 지침’에 따라 청중 수는 가능한 한 정확을 기하고 다시 장소의 넓이와 밀집의 정도를 추정 인원수와 더불어 보도했다. (·····)
  서울의 경우 윤보선은 4월 22일 남산공원에서 유세를 가졌다. 본보는 김성열 국장대리 및 이동수 방송뉴스 담당 부국장 이하 다수 기자가 유세를 관찰하였고, 본보가 정한 요령에 따라 청중 수 25만이라는 숫자를 추정하여 이를 방송과 신문에 보도하였다. 주최 측은 남산공원 일대를 뒤덮은 인파를 향하여 “백만 시민 여러분” 하면서 흥분하고 있었으므로 본보 보도에 크게 불만이었다.
  1주일 후 박정희의 유세가 장충단공원에서 실시되었다. 장소가 언덕과 운동장 및 야산으로 한없이 뻗어 있고 야당 집회와는 달리 조직적으로 동원된 청중이 널리 산재되어 있어 본보의 ‘지침’대로 계산하기 쉽지 않았다. 김성열 이하 20여 명이 현장에서 청중 수 계산에 진땀을 뺐는데, 당초 개산(槪算)은 고작 12,3만으로 나왔다. 그런데 유세 취재에 나선 대부분 혈기방장한 젊은 기자들은 반권력 성향이 같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여 측 청중 수는 적게 보고, 야 측 청중 수는 크게 보는 성향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없었다. (···) 여당 측 신문은 ‘1백만 청중’으로 보도한다는 정보가 흘러 들어왔다.
  진두지휘한 김성열은 현장에서 고심 끝에 현장 취재 중인 간부사원과 중견기자들의 관찰 결과를 종합하다가, 윤보선의 남산 집회와 대동소이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따라서 장충동에 모인 공화당 유세 인파도 ‘약 25만’으로 추산하였으며, 그대로 보도하였다.
  다음날 이른 아침 방송국장 직을 맡고 있던 김상기 상무, 김성열 국장대리 및 이동수 방송담당 부국장이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 특정 후보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허위사실(청중 수 허위조작)을 유도했다는 선거법 위반 혐의를 따진 것이다. 조사 결과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중론을 모으는 데 최선을 다한 사실이 분명해지자 그날 오후 그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중앙정보부가 선거에 직접 간여, 권력의 힘으로 본보의 보도에 심리적 압박을 가한 뚜렷한 사례의 하나이다(306~307쪽).


박정희 압승과 영남지역주의

1967년 5월의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영남지역주의’가 강화된 것이었다.

  박정희는 63년 대선 시와 마찬가지로 지역별 차별화 전략을 구사해, 영남 이외의 지역에선 경제발전의 성과를 강조한 반면 영남지역에선 영남의 지역성을 동원하고자 하였다.
  개표 결과 박정희는 568만8천666 표(51.5%)를 얻은 반면, 윤보선은 452만6천541 표(40.9%)에 그쳤다. 통한당 오재영은 26만4천 표, 민중당 김준연은 24만8천 표, 한독당 전진한은 23만2천 표, 정의당 이세진은 9만8천 표였다(대중당 후보 서민호는 4월 28일 사퇴). (···)
  승패는 영남에서 결정됐다. 윤보선은 다른 모든 지역에서 박정희를 앞섰지만, 영남에서 박정희는 226만6천 표를 얻은 데 비해 윤보선은 89만3천 표밖에 얻지 못했다. 5대 때에는 영남에서의 표차가 66만 표였던 것이 6대 때는 137만 표로 두 배나 벌어진 것이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3권), 141쪽).

동아일보는 5월 5일자 2면에 「박 대통령의 재선에 붙여」라는 사설을 실었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재선을 충심으로 축하한다. 우리는 또한 앞으로 4년 간, 이른바 민족중흥의 귀중한 기간으로 비약시키도록, 박 대통령의 선정을 절실히 당부한다. 이 점, 우리는 그의 정직성과 과단성 및 젊고 패기있는 지도력에 크게 기대하는 바이며, 이런 기대 속에 국민은 다시 한 번 대권을 위임한 것으로 본다.
  무엇보다, 그간 내건 갖가지 선거공약이 정직하고 과단성 있게 실천되어, 복되고 번영된 70년대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겠다는 소망 간절할 뿐이며, ‘국민의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63년 선거 때의 신승에 비해 이번 5·3 대통령선거에는 훨씬 많은 득표 차가 있었다. 그가 투표자 총수의 과반수의 지지를 받은 것은 그것이 그의 정치적 실적과 당면한 정책에 대한 승인이고 또한 그 개인에게 보낸 신임이며 영광인 동시에, 보다 박력 있게 일해 달라는 국민의 기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다.
  그러나 근 반수(半數)의 투표자들이 그의 반대당 후보들에게 투표했거나 또는 기권했다는 사실도 간과돼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일단 다수표로 당선된 이상, 박 대통령은 그를 지지한 국민만의 대통령일 수 없고 그를 반대했던 사람을 포함하는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반대 투표했던 국민의 의사 역시, 앞으로 4년 간의 정치에서 충분히 반영시킬 의무가 그에게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즉,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야당의 공세에 박수를 보내고 호응했던 수많은 국민의 소망 역시 단연코 이룩되어야겠다는 것이며, 비록 허점이 많은 야당의 선거공약이었지만, 부의 축적에 못지않게 부의 균배를 바라는 국민의 의사가 야당에 대한 지지표로 나타났다는 것을 박 대통령은 직시해야 할 것이고, 역시 그의 정치방향에 적절히 참작되어야 할 줄 믿는다.
  승리는 영광인 동시에 부채이며 패배는 굴욕인 동시에 자산이다. 승자가 교만하지 말고 더욱 겸허하게 국민 여망에 보답하고 특히 반대당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박 대통령은 건전한 정치풍토의 확립에 영광스러운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믿어지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내건 농공병진에 의한 조국의 근대화 작업 역시 훨씬 부드럽게 진행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사설은 박정희의 대통령 재선을 ‘충심으로’ 축하하고 있다. 그보다 2년 전인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 당시 야당과 학생들을 적극 지지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동아일보의 기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박정희의 ‘친위부대’인 권력과 공화당이 갖은 불법과 위법을 자행한 사실에 대해 이 사설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박정희가 영남지역주의를 부추김으로써 민족공동체를 대립과 분열로 몰아넣기 시작한 데 대한 비판도 전혀 없다. 동아일보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언론인 송건호가 쓴 글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1967년에 들어서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언론계는 박 정권의 철저한 언론 탄압에 의해 정부에 대한 정면에서의 공격을 일절 하지 못했다. 그러나 국민들 사이에 높아가는 야당 붐으로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요구가 점차 높아졌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언론기관에 상주하는 기관원들에 대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1967년 4월 7일 제11회 ‘신문의 날’을 맞아 언론계에서는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자”는 표어와 함께 전국적인 기념행사를 가졌으나 이날 정부 당국은 7개 언론단체와 5명의 언론인 유공자에게 대통령·국무총리 및 공보부 장관의 표창을 수여하여 언론계의 회유에 힘썼다. 그러나 신민당은 권력 당국의 언론 탄압에 대한 근본 대책을 마련, I.P.I와 ‘국제연합 한국통일위원단(UNCURK)’ 등에 대해 언론 탄압 실태에 관한 소명서(疏明書)를 발송키로 결정하고, 언론계에 대해서는 ‘발협(發協)’·‘편협(編協)’·‘기협(記協)’ 등을 통해 관권 탄압에 굴하지 말고 언론의 정도를 지켜 달라는 격려문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보도되자 각 신문사에서는 의외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언론 탄압을 받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해 신민당에서 관권에 굴하지 말고 싸우라는 격려문을 보낸다는 보도에 언론계가 이를 감사히 생각하기는 고사하고 그러한 신민당의 결정을 정면에서 비난·반박하고 나섰다. 1967년 4월의 신민당 소명서 사건을 통해 벌어진 일련의 언론계 현상은 한국 언론이 이미 권력 앞에 완전 굴복하고 독립이고 자유고 다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산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불철저하기는 했으나 1964년의 ‘신문윤리위법’ 파동 당시 언론계가 보여 준 그 기개는 이미 자취를 감추어 볼 수 없었다(송건호,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 송건호 외 지음,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도서출판 다섯수레, 2007, 294~295쪽).

1967년 대통령선거 이전부터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수사기관의 직원(속칭 ‘기관원’)들이 언론사에 상주하면서 편집과 제작에 간섭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동아일보사 역시 그런 언론 탄압에 저항하지 못했던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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