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언론역사 조선동아 대해부
동아일보, 베트남 파병에 ‘신중론’동아일보 대해부 3권 - 12장
  • 관리자
  • 승인 2022.04.20 13:49
  • 댓글 0

박정희는 한일회담 타결과 더불어 베트남(1960년대에는 월남이라고 불렀음) 파병에 정권의 사활을 걸다시피 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정권의 사활을 건 베트남 파병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대통령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에서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미국 정부는 바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1962년 5월 12일자 경향신문 1면 머리에 「월남에 군사고문단 파견 / 고급장교 10여 명으로 구성 / 단장엔 육군 장성 / 건군 이래 처음 / 박창암 대령 등 어제 출발」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이는 월남 군사고문단 파견을 특종 보도한 기사였다. 박정희는 기사를 쓴 기자 김경래를 직접 불러 취재원을 밝히라고 추궁했다. 김경래는 취재원을 밝힐 수 없어 월남대사관으로 둘러대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망할 놈의 미친놈들! 그토록 극비에 붙이기로 한 것을 일방적으로 터뜨리다니. 그러니까 그 나라가 그 꼴이지”라고 욕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월남 파병에 정권의 생명을 걸고 있었다. 그래서 61년 11월 케네디를 만났을 때부터 월남 파병의 뜻을 밝혔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내심 시큰둥하게 생각했지만, (린든 존슨이 대통령이던) 64년 8월 통킹만 사건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그에 따라 한국군의 월남 파병도 착착 단계를 밟아 나가게 되었다.
  64년 9월 11일 이동외과병원(의무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이 월남으로 파견되었다. 64년 12월 19일 미국대사 브라운이 미 대통령 존슨의 추가 파병 요청을 박정희에게 전달하였다. 65년 1월 8일 각의에서 2천명의 비전투부대(공병부대 등 군수병과)를 파견하기로 의결하였다. 이비 비둘기 부대 2천여 명은 편성을 완료하고 비밀리에 경기도 일원에서 훈련 중이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3권>, 50~51쪽).

동아일보 1965년 1월 13일자 1면에는 「정부·여당 월남 파병 원칙 재확인 / 간접적인 한국의 방위 / 비전투부대임을 인식시키기로 / 조속한 동의를 / 미 소식통 희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워싱턴 12일 동화] 미국무성의 유력한 소식통들은 12일 한국의 일부 여야 국회의원들이 월남 파병 문제는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서울로부터의 보도에 ‘이해가 가는 일’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정부의 월남 파병안은 곧 승인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표명했다.
  이 소식통들은 미국이 한국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에 오랫동안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국군 50여만 대군에서 2천명을 차출해도 한국 임전태세에는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을뿐더러 미·월 양국의 전쟁 노력에 크게 공헌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파병이 중립 제국(諸國)에 미칠지도 모를 영향에 논평하면서 미국은 한국 문제가 유엔에 상정 토의될 때에는 종전보다 더욱 명확하고 더욱 더 강하게 한국 입장을 지지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와 같은 날짜 2면에 「국회와 월남 파병 문제」라는 사설을 올렸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 간에 찬반 그리고 신중론이 엇갈리고 있는 월남 파병 문제는 그 동의요청안이 임시국회가 소집되는 15일에 바로 국방위원회에 상정되고 빠르면 내주 초에 처리되리라고 한다.
  우리는 월남 파병 문제가 국회에서 그렇게  경솔하고 또 조급하게 처리해도 괜찮을 간단한 안건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 청년의 귀중한 생명이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방위와 외교적 입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 예상되는 중대한 안건인 만큼, 국회가 속결을 능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충분한 토론 끝에 처리하여 마땅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번에 월남으로 파병키로 결정한 2천명이 ‘비전투원으로 된 후방지원부대’임을 강조하고 있으나 월남의 대(對) 베트콩 전선에는 사실상 전방도 없고 후방도 없는 것이 실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수도 사이공 시내라고 해서 베트콩의 활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실질적으로 전방도 없고 후방도 없는 싸움터에 한국 청년들을 파견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며, 이렇게 한국 청년들의 귀중한 생명이 관련되어 있는 파병 문제를 국회가 충분한 질의와 충분한 토론을 거치지 않고 속결하려는 안이한 태도에 우리는 석연치 않은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앞서 본란은 월남 파병 문제에 관련하여 세 가지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첫째는 월남 파병이 우리 국방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월남 파병이 월남의 불안정한 정정(政情)과 민심 동향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미국 안에서 월남전쟁 정책에 대한 이론이 대두되어 있는 것을 참작할 때 과연 얼마만한 실효를 거둘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며, 셋째는 월남 파병이 국제적으로, 특히 대(對) A·A(아시아·아프리카-인용자) 진영 국가 외교에서 우리나라 입장을 악화시키지는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해서 아직은 정부가 이렇다 할 해명을 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국회는 충분한 질의와 충분한 토론을 통해서 월남 파병 문제의 핵심을 분명하게 밝히고 파악한 후에 가부간의 결론을 내려야 할 줄로 믿는다. 왜 꼭 월남의 싸움터에 가야 하는 것인지를 국회가 국민 앞에 분명하게 밝혀 놓지 못한 채로 국회가 2천 명의 한국 청년들에게 월남에 가라고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기한 근본적인 문제점 이외에도 월남 파병에 앞서 국민이 알고 싶은 의문점이 얼마든지 있다.
  첫째로, 정부는 월남 정부의 요청으로 파병을 결정했으나 월남 정부가 우리에게 파병을 요청하기에 이른 사정과 경위는 어떤 것인가. (···) 2천 명밖에 안 되는 ‘비전투원으로 된 후방지원부대’를 한국이 파병하기를 월남 정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둘째로, 우리에게 파병을 요청하고 있는 월남 정부는 어느 정도로 안정되어 있는 것인가. 월남 정부 자체가 변경되거나 또는 정부 방침이 변경되어 한국의 입장이 난처해질 가능성은 전연 없는 것인가.
  셋째로, 파병될 한국군의 병참을 담당키로 되어 있는 미국의 입장은 어떤 것인가. 미국은 과연 앞으로 근본적인 전환이 있을 수 없는 확고한 월남전쟁 정책을 견지하고 있는가. (···)
  넷째로, 파병될 한국 청년들은 월남에서 어떤 법적 지위를 가지게 되는 것인가. 그들에 대한 지휘권은 종국적으로 어디에 귀속되는 것인가. (···)
  다섯째로, 앞으로 월남 파병은 2천명에 그치고 다시는 없는 것인가. 필요에 따라 증파한다면 증파의 한도를 정부는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인가. (···)
  여섯째로, 파병될 병력은 어떤 기준으로 선발되는 것인가. (···)
  일곱째로, 과연 월남군은 파병된 한국군을 진심으로 환영할 것인가. 월남 국민, 특히 불교도와 학생들이 한국군을 그들의 전우로 환영하고 협력해 주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인가.

나중에 드러났듯이, 이 사설은 정당한 명분이 없는 베트남 파병의 문제점들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미국 요청 따라 전투병 파견을 강행

1965년 1월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월남파병동의안에 대한 무기명표결이 있었는데, 결과는 재석 125 명 가운데 찬성 106 표, 반대 11 표, 기권 8 표였다.
동아일보는 1월 27일자 2면 사설(「월남 파병에 대하여」)을 통해 아래와 같은 평가를 내렸다.

  (···)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국회의 표결 결과에 대해서 그것이 잘 되었거나 또는 잘못된 것이라고 확언하기 어려운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2천 명에 달하는 한국 청년의 생명이 걸려 있고, 나아가서는 한국의 국제적 입장에 여러 모의 작용과 영향이 미칠 것이 예상되는 중대 문제가 충분한 심의와 검토 없이 조급하게 결론만 미리 내려졌다는 감이 깊기 때문이다.
  앞서 본란은 국회에 대해서 충분한 질의와 충분한 토의를 당부하면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믿어지는 기본적인 문제점을 우선 몇 가지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제시했던 몇 가지 문제점조차도 국회가 다각도로 검토했다는 기록이 없고,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 격인 형식적인 질의 응답과 대체토론을 거쳐 월남 파병이 정식 결정되어버린 데 대해서 우리는 일말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월남 파병에 찬성한 의원들이 과연 어느 정도로 파병이 가져올 반작용과 영향을 검토하였고, 과연 어느 정도로 월남전쟁의 실태를 파악하고 월남전쟁의 앞날을 전망하면서 자신 있게 찬성표를 던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우리는 월남 파병에 반대한 의원들이 과연 어느 정도로 정부의 입장을 파악하였고, 과연 어느 정도로 정부의 입장에 반대할 합리적인 논거를 가지면서 표결에서 퇴장했거나 반대표를 던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당리당략으로 파병 문제에 대한 찬부(贊否) 간의 태도가 서둘러 결정된 것이라고 논단할 근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충분한 검토와 자신 없이 주먹구구 격인 막연한 판단으로 중대 문제가 표결, 처리되었다고 본다. 국회가 두 눈을 딱 감고 표결을 강행한 파병이라는 것은 국민에게 충분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기에 국민의 눈에는 설득력이 박약한 것으로 비칠 뿐인 한편, 파병이 가져올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샅샅이 따져보지 않음으로써 앞으로 그러한 가능성에 대비할 대책을 세울 토대가 될 사태 파악의 기회를 국회 스스로가 포기한 셈이 되는 것이다.
  파병 문제가 이례적으로 무기명투표로 표결된 데 대해서도 우리는 석연할 수가 없다. 인사에 관한 문제라면 몰라도 이렇게 국민의 지대한 관심이 쏠려 있는 중대 문제는 마땅히 기명투표로써 의원 각자의 투표기록을 국민 앞에 분명히 남겨놓았어야 했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
  결국 우리는 한국 청년들을 월남의 총화(銃火) 속에 파견하게 되고 말았다. 파병에 따르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아직도 모호한 안개 속에 잠겨 있기는 하지만, 한국 청년들이 바다를 건너 싸움터에 파견된다는 한 가지 사실만은 명백한 것이며, 우리는 그들에게 생명의 안전이 전쟁의 비정(非情)이 용허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으로 보장되도록 훈련에서 장비와 근무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준비와 배려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미국의 존슨 행정부는 1965년 5월 17일부터 12일 동안 박정희를 국빈 방문으로 초청했다. 존슨과 박정희는 5월 18일(한국시간) 워싱턴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5월 19일자 1면 머리에 그 내용을 보도했다.

  [워싱턴-박권상·김영수 특파원·문명자 통신원 18일 발] (···) 박·존슨 공동성명은 1)양국이 당면한 공동 목표 달성에 계속 긴밀히 협조하며 월남 지원에 계속 협조한다. 2)한국의 안전을 위해 미국은 군사원조를 계속하며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한다. 3)한국의 경제자립을 위해 1억5천만 불의 장기차관을 제공한다. 4)한일국교가 정상화된 후에도 미국의 대한군원(對韓軍援)정책은 변동치 않는다. 5)한미행정협정 체결에 원칙적으로 합의한다는 점 등을 확인했다.

동아일보는 5월 20일자 2면에 「박·존슨 공동성명을 보고」라는 사설을 실었다.

  (···) 이 공동성명은 박 대통령의 이른바 방미 성과를 집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집약된 방미 성과에 대한 평가는 논자에 따라 구구할 것이며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계의 반향을 보더라도 여당 측에서는 ‘극히 고무적인 성과’라고 평가하고 있는 데 반하여 야당 측에서는 한미행정협정에 대한 명확한 보장이 없는 것을 이유로 유감을 표명하고 있다.
  우리는 한미 양국 간에 개재되는 어떤 사소한 사항에 관한 절충이 어떻게 귀결되었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이 공동성명의 의의를 논평하려는 생각은 없다. 그것보다도 우리가 중시하는 것은 이 공동성명이 마련된 분위기이며, 한미 양국은 5·16 군사혁명 이후로 일찍이 보지 못한 최고의 우호관계를 발전시켜 놓았다고 관찰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이렇게 강화된 우호관계의 배경에는 한국군의 월남 파병과 한일회담의 촉진이라는 2대 지주(支柱)가 있다. 박·존슨 공동성명에 담긴 이른바 박 대통령 방미 성과는 그것을 크게 평가하거나 작게 평가하거나 전기한 2대 지주와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미국 방문이 예정되어 있던 파키스탄 대통령이나 인도 수상이 미국의 월남전쟁 정책을 비판한 직후에 존슨 미국 대통령에 의하여 대(對) 국회 정무 다망(多忙)을 이유로 방미가 연기되었고 오직 한국 대통령만이 대조적으로 방미가 초청되어 환대를 받았다는 데 우리는 유의하게 된다. 미국은 어떤 국가든지 그 대미협력의 도합(都合)이 바로 미국이 제공하는 반대급부의 척도가 된다는 논리를 각국에 의문이 없도록 명확하게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
  (···) 한층 더 공고해진 양국 간의 유대는 존슨 미국 행정부의 대극동정책이 역점을 더욱 중공봉쇄정책에 두고 있는 추세를 방증해 준다. 이제 미국의 대극동정책의 핵심은 중공봉쇄정책이며, 한국이 반공의 거점으로, 그리고 중공봉쇄망의 일환으로 미국에 의하여 새로이 재인식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
  박·존슨 공동성명은 미국이 한국을 동부아시아대륙의 일각에서 유지하려는 결의를 재확인한 것이라고 논평할 수가 있다. 5·16 군사혁명 이후로 양국 정부 간에 한동안 벌어진 상호 불신의 단계에는 이로써 종지부가 찍히고, 이제 양국관계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고 볼 수가 있다.

이 사설은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을 파견하는 문제에 관해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도 않은 채 국회에서 파병안에 대한 표결을 밀어붙인 것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파병의 결과로 청년들이 희생되는 데 대해 정부가 만전의 대비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한다.

동아일보는 박 정권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 시종일관 신중론을 제기했으나, 그 나라의 전쟁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추악한 전쟁’이 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을 소개하지는 않았다. ‘반공’을 절대적 신조로 삼던 동아일보는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내전에서 어떤 쪽이 민족 자주와 독립의 차원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지, 그런 남의 민족 간 전쟁에 한국군이 개입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1965년 7월 2일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지난 21일자로 접수된 월남공화국 정부로부터의 전투부대 파병 요청을 수락하고 ‘국군 1개 사단 및 필요한 지원부대’를 월남에 파견하기로 의결했다. (·····) 정부 대변인 홍종철 공보부장관은 자유월남에 대한 공산주의의 위협은 한국의 안전보장에도 직접 간접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과 아시아에 있어서의 반공 보루의 구축, 그리고 6·25 당시 한국을 지원했던 자유진영의 집단방위 노력에 보답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월남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파병 이유를 설명했다.”(동아일보 7월 2일자 1면).

파병동의안은 8월 13일 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에서 찬성 101표, 반대 1표, 기권 2표로 통과되었다. 월남에 보낼 전투부대로는 해병 청룡부대를 모체로 해서 창설된 해병 제2여단과 육군 수도사단이 맹호부대라는 이름으로 선정되었다.

  10월 12일 여의도에서 30만 군중 환송대회가 열렸다. 아직 마포대교가 부설되기 전이었는데, 정부는 이 행사를 위해 급히 마포와 여의도를 잇는 가교를 설치했다. 3백 마리의 비둘기와 3만여 개의 풍선이 하늘을 수놓았다. 여의도 행사장 주변 30리는 5색의 플래카드와 애드벌룬으로 장식되었다.
  당시 박 정권이 내세운 명분은 6·25 때 입은 은혜에 대한 보은론과 더불어 ‘도미노 이론’이었다. 박정희는 환송연설에서 “우리가 자유월남에서 공산 침략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는 멀지 않은 장래에 동남아시아 전체를 상실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우리 대한민국의 안전보장도 기약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여기에 ‘대한 남아론’이 가세했다. 박정희는 파월 장병들을 ‘화랑의 후예’라고 부르면서 ‘대한 남아의 기대’를 만방에 떨치라고 말했다. (·····)
  65년 12월 22일 한국군이 퀴년에서 12세 이하 어린이 22명, 여성 22명, 임산부 3명, 70세 이상 노인 6명 등 민간인 50명을 사살한 사건이 일어났지만, 이는 국내엔 알려지지 않았다. 언론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3권>, 53~55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