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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비준과 조인 반대투쟁동아일보 대해부 3권 -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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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4.1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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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뒤 무기 연기되었던 한일회담은 12월 3일에 재개되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한일회담 재개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과 미군의 ‘북폭’으로 베트남전쟁이 확대되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미국의 린든 존슨 행정부는 박정희 정권이 조속히 한일회담을 다시 열고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이루라고 촉구했다.

  (···) 9월 하순부터 10월에 걸쳐 미국 국무부차관보 번디는 일본과 한국을 차례로 방문하여 양국 고위 관계자들과 연쇄회담을 개최하고 한일회담 타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64년 10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개입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특히 미국은 박정희 정권에게 계속 평화선만 고집하지 말고 회담을 타결시켜 하루빨리 경제 재건을 이룩하고 동북아시아 안보질서 강화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1964년 11월 출범한 사토 내각이 미국에 협조하여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결단하면서 제7차 한일회담이 재개될 수 있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439쪽).

박정희는 1965년 1월 9일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회담은 가부간 금년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장이 충분히 납득되고 만족할 만한 결론이 나오기 바란다”고 말했으나 ‘을사보호조약 무효화 여부 문제와 국내의 한일회담 반대 여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동아일보 1월 8일자 1면).

2월 15일 한국과 일본 정부는 ‘한일기본조약안’에 합의했다. 과거 한일 간에 맺었던 조약들의 무효시점에 관해서는 “이미 무효이다”라는 문구를 기본조약에 삽입했다.

일본 외상 시이나가 한국을 방문하기 전날인 2월 16일 민정당 대표최고위원 윤보선은 “박 정권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한일회담의 의혹적인 내용은 사실상 6·3 사태 당시와 조금도 변경된 것이 없으며 국민적 이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새로 출발하지 않은 한 그 결과를 승인할 수 없고 6·3 사태 이상의 사태에 직면할 것을 경고해 둔다”고 말했다(동아일보 2월 16일자 1면).

한국 외무부장관 이동원과 회담을 하러 2월 17일 입국한 시이나는 ‘도착 성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한 양국은 예부터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인국(隣國)으로서 사람의 교류는 물론 문화적이나 경제적으로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만 양국 간의 오랜 역사 중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로서 깊이 반성하는 바입니다.”(동아일보 2월 17일자 1면).

시이나가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를 하지 않고 “양국 간의 오랜 기간 중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로서 깊이 반성”한다고 모호한 표현을 하자 한일회담 타결을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동원과 시이나는 “2월 18일 오후 제1차 회담을 갖고 한일회담 기본조약 문제에 완전히 합의하고, 19일 김동조 주일대사와 일본 외무성 당국자 사이에 가조인(假調印)을 하기로 원칙적 합의를 보았다”(조선일보 2월 19일자).

동아일보 2월 20일자 1면 머리에는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한일 두 나라는 20일 야당의 굴욕외교 반대의 화살이 집중되는 가운데 이외무·시이나 외상의 4차에 걸친 서울회담을 마치고 전문(前文)과 전문(全文) 7조로 된 한일기본관계조약에 가조인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외교영사 관계의 설정, 구 조약의 무효성, 한국 정부의 합법성 등을 내용으로 한 기본관계조약 가조인에는 양국을 대표하여 두 나라 외상이 참석한 가운데 연하구 외무부 아주국장과 우시로쿠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장이 조약문에 각각 서명했다.
  이동원·시이나 한일 양국 외상은 20일 하오 2시 기본관계조약에 대한 가조인과 더불어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과거를 깊이 반성한다”는 시이나 일본 외상의 의사 표명을 다시 강조했다. 공동성명은 두 나라 외상이 1)한일 회담을 조속 원만히 타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2)어업 문제 해결을 위해 농상회담 개최를 희망한다. 3)무역관계 토의를 위해 회담을 열 것에 합의한다. 4)이 외무의 방일 시 제 현안을 계속 토의한다는 등 뜻을 밝혔다.

동아일보는 2월 22일자 2면에 「가조인된 한일기본조약」이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 일본이 어떠한 딴 의도를 품고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던 것인지 아무런 보장이 없고 보면, 우리는 한일기본조약 3조가 한국 정부의 관할권을 명시하지 않았고 유엔 총회 결의 제195호를 끌어들인 점과 동 조약 2조에 ‘이미’라는 부사가 삽입되어 있는 점을 불만으로 여긴다.
  따라서 정부가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에 전적으로 만족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첫째로, 정부는 앞으로 일본이 한일기본조약 해석에서 딴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다시 말하면 조약 발효 전에 일본 측 해석을 우리 측 해석에 일치시켜 놓는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 조약 해석에 관한 각서 교환 같은 형식으로 동 조약 해석에 일본 측의 이의가 없도록 하는 길을 확실하게 마련해 놓지 않는 한 우리는 동 조약에 대한 불안감을 금치 못한다.
  둘째로, 동 조약의 일본 측 해석이 우리 측 해석에 일치하지 않는 한 동 조약의 가조인에서 일본이 양보한 것은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마치 일본이 무슨 알맹이가 있는 양보나 한 것처럼 착각하여 정부가 한일회담의 다른 현안에서 일방적인 양보를 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동 조약의 가조인에 지나치게 만족하고 있는 듯한 정부에 우리는 이렇게 두 가지 충고를 준다.


시이나의 말 뒤집기와 한국 야당의 비판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을 하고 돌아간 일본 외상 시이나는 2월 24일 서울에서와는 전혀 다른 발언을 했다. 2월 25일자 ‘동경 발 로이터-동화통신’ 기사는 그 사실을 이렇게 보도했다.

  시이나 외상은 25일 말썽 많은 평화선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일본이 어업회담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한국 측이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고 말하였다. 그는 중의원의 한 분과위원회에서 사회당 의원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답변하면서 이와 같이 말하였다. 한국이 한국전쟁 후인 1952년에 일방적으로 설정한 동 어로구획선을 폐지하는 데 공개적으로 동의하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일이었다. 시이나 외상은 일본은 평화선이 국제법상으로 불법적인 것이라는 것과 그와 같은 법률이 있는 만큼 일본 어선을 나포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어업회담에 임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계속하여 시이나 외상은 “일본이 이(李) 라인(평화선)을 인정한 바 없는 만큼 그와 같은 선이 없다는 데 대해서 어느 쪽에서건 굳이 이를  확인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본다”고 말하였다.
  그는 한국 측에서도 그러한 이해 하에 어업회담을 수락한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 측이 평화선 존재를 여전히 고집한다면 3월 초 동경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는 한일 농상회담은 실현을 볼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양국 간의 국교정상화회담은 더 이상 진전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동아일보 2월 25일자 사설(「시이나 발언의 부당성은 규명되어야 한다」)은 시이나의 ‘망언’을 강하게 공격했다.

  한일외상회담을 끝마치고 귀국한 시이나 일본 외상은 지난 24일 일본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동 회담의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한국 정부의 관할권은 38도선 이남에 국한한다고 말한 것으로 외신은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지난 20일에 가조인된 한일기본조약 3조에 대한 일본 측의 해석을 단적으로 표시한 것이라 함은 누구나 곧 인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이나 외상의 발언은 이론적으로 수긍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에도 맞지 않는 망언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외상의 이러한 국회 발언이 있자 우리의 주일대표부는 즉각, 이것을 변명이나 하려는 듯이, 동 외상의 발언은 우리의 현실적인 지배가 38도선 이북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상의 문제’에 언급하였을 뿐이라고 해명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적인 지배가 38도선 이남에 국한된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과는 절대로 부합될 수 없는 그릇된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8도선은 이미 6·25 사변을 계기로 깨어졌으며, 우리의 현실적인 지배는 특히 동부지역에서는 38도선보다 훨씬 이북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이나 일본 외상과 우리의 주일대표부는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
  한 나라의 일부 지역을 반도(叛徒)가 점거하고 있어서 실제로 합법정부의 통치가 그곳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법 이론적으로 보아, 그 나라의 주권이 그 지역에 미치지 못한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한반도 안에서는 한국 정부만이 유일한 합법정부가 된다고 인정해 놓고서도 사실상 일부 지역을 북괴가 점거하고 있다고 해서 그 지역에 대한 합법정부의 주권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후가 모순된 이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이러한 점으로 보아, 우리는 우리 정부가 한일기본조약 제3조의 기본정신과 어긋나는 해석을 일본 외상이 공적으로 내린 데 대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강력하게 일본 정부 측에 따져야 하는 것이며, 주일대표부가 한 바와 같이 사실에 맞지도 않는 해명을 하면서 우리 국민을 속이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월 26일 민정당 총재 윤보선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시이나 일본 외상 발언으로 그간 박 정권이 평화선을 양보하고 일본과 암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주장하면서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겠다고 밝혔다. 그는 “박 정권은 시초부터 한일 문제에 있어서 국민을 기만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고, 비밀외교와 암거래에 의한 매국행동이 일본 외상의 입으로 명백히 밝혀진 이상 이 시점에 있어서 한국 국민은 이를 묵묵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동아일보 2월 26일자 1면).


한일협정 조인 반대투쟁

야당과 재야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범국민투위’가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격렬하게 벌였지만 한국과 일본 정부는 1965년 4월 3일 ‘어업’ ‘청구권’ ‘재일한인의 법적 지위’ 등 3개 현안을 일괄 타결하고 각각의 협정에 가조인했다.

  가장 큰 쟁점이었던 평화선 문제도 결말을 보았다. 평화선 문제와 직결된 어업협정의 주요 내용을 보면, 한국 어민만이 배타적으로 어업을 할 수 있는 어업수역(전관수역)을 공해 부분을 포함하여 12해리까지 설정하고, 40해리까지는 한국과 일본 어민만이 같이 조업하는 공동규제수역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평화선은 어업협정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기본조약과 마찬가지로 모호한 방식에 의한 쟁점 봉합이었다. 한국 정부는 어업협정이 일본 이외에 다른 나라에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제3국에 대해서는 평화선이 엄존하고 있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한국이 전관수역 12해리, 공동규제수역 40해리를 확보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평화선 선포의 목적을 충분히 반영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어업협정으로 평화선이 소멸되었다고 보았다. 일본 정부의 주장이 진실이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442~443쪽).

동아일보는 4월 3일자 2면에 「한일 문제의 타결에 임하는 정부 측 태도」라는 사설을 실었다.

  (···) 특히 한일관계는 수천년래의 국민감정이 서려 있는 문제인 만큼 일반 국민의 여론을 무시하고 정상화되리라고는 기대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지금에 와서야 한일문제의 타결을 일본 측도 서두르게 된 것은 팽창할 대로 팽창한 일본의 국력과 관련하여 모종의 계획이 그들의 배후에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므로, 정식 조인에 이르는 최후 순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국가적 이익을 망각하지 않는 꿋꿋한 주체성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지금까지 한일문제를 중심으로 정부 측이 국민을 대해온 태도에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과거에 정부가 한일문제를 중심으로 일본 측과 교섭을 진행해옴에 있어서, 야당 측 지도자들과 충분한 협의가 없었다는 것을 여기에 새삼스럽게 들추어낼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만을 보더라도, 막중한 민족적 대문제에 관하여 공정한 국민여론을 알아보려는 집권층의 성의는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보도된 바에 의하면, 정부와 여당이 주동이 된 금번의 유세에는 관청을 텅 비우다시피 하면서까지 공무원들을 끌어내고, 그리고 학생들까지도 동원하게 되리하고 하지만, 동일한 문제를 중심으로 한 반대투위의 강연회장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음성적인 방해를 하는 동시에, 많은 야당 인사들을 연행해 갔고, 그리고 데모에 나선 일부 학생에 대하여는 학교에서 제적까지 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물론 연행된 야당 인사와 제적된 대학생들이 법이나 학칙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한다면 더 할 말이 없을 것이겠지만, 그러나 문제가 문제인 만큼 정부가 이와 같이 무자비하게 일방적으로 규칙만을 앞에 내세우는 태도에 우리 국민은 충분한 납득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재언(再言)하거니와 한일문제는 수천년래의 민족감정이 서려 있는 문제인 것이며, 특히 36년 동안의 일제 침략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므로, 한일관계를 정상화함에 있어서는 찬반 간에 충분한 국민 의사의 반영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정부에서는 정부와 여당 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여론의 조성에만 급급한 나머지, 비판적 입장에 서는 여론의 형성에 대하여는 악착같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것을 억압하려고 하는 것인데, 이러한 정부 측 태도는 ‘진정으로’ 한일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는 태도라고는 우리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한일협정 조인을 앞둔 박정희 정권이 보기에 동아일보의 이런 ‘시비’는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동아일보는 극단적인 탄압과 더불어 테러까지 당하게 된다.


한일협정 조인부터 비준까지

4월 3일 한일협정이 가조인되자 야권과 학생들은 격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4월 7일 전남대에서 시작된 ‘한일협정 가조인 무효와 평화선 사수’ 운동은 4월 10일 전국의 여러 대학으로 번졌다.

4월 13일에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두개골을 크게 다친 동국대 학생 김중배가 15일 밤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죽음은 4월 혁명에 불씨를 댕긴 김주열의 희생에 버금가는 반응을 일으켰다.

박정희 정권은 4월 혁명 5주년을 계기로 학생 시위가 격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4월 16일 각 학교에 4월 말까지 휴교령을 내렸다. 그러나 학교 문이 닫힌 상황에서도 한일협정 조인 반대 투쟁은 계속되었다.

4월 24일 ‘민중당’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기로 합의한 민정당과 민주당 등 야당은 4월 28일 한일회담 비준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 의원직을 총사퇴하기로 결의했다. 5월 3일 민정·민주당의 통합으로 정식 발족한 민중당은 범국민투위를 중심으로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한일회담 조인을 저지하기 위한 궐기대회를 열었다.

박정희는 5월 2일 진해에서 시국에 대해 격한 감정으로 즉흥연설을 했다. 동아일보는 5월 3일자 1면 기사(「 ‘학생 데모 애국 아니다’ / ‘언론은 무책임·지식인은 옹졸’」)로 그 내용을 보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2일 오후 한일회담 반대 등으로 격동을 거듭하고 있는 현 정국에 언급, 학생들의 데모와 언론의 태도, 그리고 야당 정치인의 행동 및 일부 지식인들의 사고방식이 그릇된 것이라고 격렬한 비난을 가했다. 진해 제4비료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미리 준비했던 치사(致辭)를 젖혀 놓고 즉석연설을 통해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처음으로 전반적인 문제를 들추어 학생들의 데모가 “절대로 애국적이 아니라고 단언한다”고 말하면서 언론은 무책임하고, 지식인은 용기 없고 옹졸하다고 최근의 심경 일단을 밝혔다.
  격한 어조로 연설을 계속한 그는 “일제 때와 같이 항거만 하는 정치인과 언론인들의 근본적 사고방식과 자세는 버려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오늘날 정부는 여러분의 정부이고, 대통령은 여러분이 뽑은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무조건적인 대정부 비판 태도를 비난하면서 “우리나라 인텔리들은 정부가 하는 일은 무조건 반대해야만 지식인이고 인텔리라는 사고방식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째서 정부가 잘하는 일은 잘 됐다고 칭찬하지 못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이것은 “용기가 없고 옹졸한 인텔리이다”라고 비난하고 “무책임한 언론기관에서 무책임한 소리를 하는데 국민은 부화뇌동하지 말라”고 말했다.
  비료공장 기공식에 참가한 학생들을 앞에 놓고 박 대통령은 요즘의 한일회담 반대 학생 데모에 언급,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새 학생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라는 철없는 짓들을 하고 있다. 이 나라는 10년, 20년 후에는 제군의 세대이다. 오늘의 모든 일은 기성세대가 맡고 있다.
  여러분은 아직 배워야 한다. 정치에 낱낱이 간섭하고 참여할 시기도 아니며 책임도 없다. 요새 한일회담에 대해 야당 인사들은 최후 일각까지 반대투쟁을 한다고 한다. 여기에 철부지한 학생들이 매국외교니 굴욕외교니 하고 비난한다. 지금까지는 정부의 고충도 모르고 했기 때문에 가만 있었다.”
  이렇게 학생들의  현실 참여를 비난한 박 대통령은 학생들이 내용도 모르며 한일회담을 반대한다고 하면서 “확실히 말해 두지만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서 떠든다고 절대로 애국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그런 행동은 정치인의 앞잡이밖에 안 된다. 무엇을 알고 떠들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박정희 정권이 민족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포기한 채 강행하는 한일회담을 굴욕적이라고 비판해온 학생들과 야당에 대한 모독이었다. 박정희는 학생들과 야당이 왜 한일회담을 ‘굴욕적’이고 ‘매국적’이라고 비판하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학생들은 ‘철이 없고’ 언론은 무책임하고 인텔리들은 용기가 없고 옹졸하다고 일방적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학생들과 야권의 한일회담 조인 저지투쟁은 5월 내내, 그리고 6월 들어서도 격렬하게 펼쳐졌다. 6월 18일 고려대생들이 “타도 왜국, 대일 선전포고” “한일회담 조인 즉시 중지”를 외치면서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21일 밤까지 전국의 13개 대학에서 8백여 명이 거기에 동참했다. 한일협정 조인을 하루 앞둔 6월 21일에는 서울 시내 12개 대학과 3개 고등학교 학생 1만여 명이 교문을 나서 시위를 벌였고, 22일에도 서울에서만 14개 대학 학생 1만여 명이 교내에서 집회를 열고 가두 진출을 시도했으나 경찰에 가로막혔다.

마침내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은 일본 도쿄에서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한국 외무부장관 이동원과 일본 외상 시이나가 서명한 한일협정은 ‘한일기본조약’ ‘한일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한일어업협정’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한일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등 1 조약, 4 협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아일보는 6월 22일자 2면 사설(「조인과 국민의 심정」)을 통해 한일협정 조인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국제정세로 보아서나 양국의 입장으로 보아서도 한일 간의 수교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또 우리의 국민감정으로 미루어 보아 어떤 정권이 대일교섭을 맡더라도 순탄하게만 끝나기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고, 더욱이 자유당 정권의 호언(豪言)에 반한 무책(無策)이 불리한 시간의 천연(遷延)만을 우리에게 불려준 것이 사실이다. 지난 1년 반 동안에 야당 역시 회담 반대를 정권 타도와 직결시키는 지나친 태도를 가져온 것도 사태를 더욱 복잡,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5·16 이후의 군정과 그 계승자인 현 정권이 지금 바로 조인되려는 조건으로밖에 회담을 이끌어오지 못한 데 대해서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불만과 울분을 안 가지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5·16 직후에 군정이 어떤 이유에서이든 일본과의 수교를 서둘렀던 것이 사실이며 그런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과대(過大)한 양보가 김·오히라 메모는 형태로 이루어져 버렸다.
  5·16 직전까지 그나마 조리와 근거를 따지면서 진행되던 회담 과정이 정치적 타결이라는 무더기 양보로 대체되어 이것을 토대로 그 후의 교섭이, 그것도 국민의 비판이 봉쇄된 가운데 계속되었다는 것은 불행 중의 불행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에 가하여 교섭에 임하는 우리 정부의 자세가 이해하기 곤란할 정도로 낮았다는 것 역시 국민의 큰 불만을 사 왔다. 일본 측의 정정(政情)에 맞도록 회담이 개폐되고 외교 관례에 어긋나는 무리한 교섭을 우리 대표는 강행해 왔다.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키면서까지 서두는 교섭 자세가 국민의 빈축을 사고 일본 측의 태도를 경화시키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졸속이 우리 교섭 담당자들까지 혼혹(混惑)케 만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정부 내에서의 회담 방침에 관한 책임의 명확치 못한 소재는 더욱 우리 측의 주장을 일관성 없게 만들어 버렸다. (·····)
  불행한 시초와 불만스러운 교섭을 거쳐 이루어진 합의사항들은 미리 예상되었던 바와 같이 우리 측의 거의 일방적인 양보를 반영하고 있다. 평화선은 기국주의(旗國主義)로 바뀌어지고 교포의 법적 지위는 일본 정부의 그때 그때의 온정에 의존하게 되고 청구권은 그 이름조차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국교 타결 후의 사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희망하던 동북아 군사동맹은 일본이 꿈도 안 꾸고 있다는 것이 이미 명백해졌으며 기국주의나 원조의 운영 과정에서는 일본 측의 발언권이 절대적이 될 것이 우려되고 있는 형편에 있는 것이다.
  거의 어느 누구도 조인 내용에 만족할 사람은 없는 가운데 역사적인,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의 살림에 비극적인 영향을 미칠 역사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려 하고 있다. 야당의 극한적인 반대와 교문이 닫혀지고 학생들의 단식과 데모가 계속되는 가운데 삼엄한 경계를 펴면서 조인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민족적인 비극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통탄할 사태에 정부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우리는 가슴 아픈 심정으로 주시하고자 한다.
  조인은 되어도 비준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으며 또 협정 발효 후의 사태의 발전에 관하여 우리는 정부가 어떤 관망과 대책을 가지고 있는지를 또 한번 물어보면서 국가와 민족에 대한 진정한 책임감을 다 같이 가질 것을 정부와 모든 국민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한일회담의 과정과 한일협정의 내용을 완전히 부정적으로 평가한 이 사설에 대해 박정희가 절치부심했으리라는 것은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한일협정비준동의안 날치기 통과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된 뒤에도 학생들은 비준 반대 시위를 계속했다. 4·19와 6·3 당시 거의 움직이지 않았던 이화여대 학생 1천5백여 명이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23일 가두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조인 반대투쟁은 ‘정치방학’으로 교문이 닫힌 6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7월 12일 한일협정 비준을 위한 임시국회가 열리자 서울시내 18개 대학 교수 354명이 서울대에 모여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선언을 했다. 그들은 “한일협정의 내용을 신중히 분석 검토한 끝에 우리의 민족적 자주성과 국가적 이익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뿐더러 장차 심히 우려할 사태가 전개될 것이 예견되므로 이에 그 비준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7월 14일 김홍일(전 외무부장관), 김재춘(정 중앙정보부장), 박병권(전 국방부장관), 박원빈(전 무임소장관), 백선진(전 재무부장관), 송요찬(전 내각수반), 손원일(전 국방부장관), 이호(전 법무부장관), 장덕창(전 공군참모총장), 조흥만(전 치안국장), 최경록(전 육군참모총장)이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한일 국교 정상화의 조기 타결을 내세운 최근 수년 간의 대일교섭 과정이 비정상적인 경로에 의해서 독선적으로 강행되어 왔을 뿐 아니라 조인된 조약과 협정의 내용이 거의 일본 측 안을 그대로 추종한 것 같은 비민주적인 것이고 국가적 위신과 이익을 상실케 한 성격의 것이라는 결론에 우리의 분석과 평가가 이르게 되었음을 국민 제위와 함께 깊이 비탄하여 마지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이어서 그 성명서는 박정희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8월 11일 한일조약비준안 예비심의를 맡은 국회특별위원회가 열렸다. 한밤에 열린 회의에서 공화당 의원들은 야당 의원들의 저지를 완력으로 누르고 안건이 동의된 지 1분 만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그러자 민중당 의원들은 8월 12일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을 통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면서 사퇴서가 수리되지 않더라도 국회에 출석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공화당은 8월 13일 국회 본회의를 단독으로 열고 한일조약안과 함께 당시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던 ‘베트남 파병안’을 재석 104명 가운데 찬성 101명, 반대 1명, 기권 2명으로 통과시켰다.

야권과 학생들의 필사적 반대를 무릅쓰고 공화당은 8월 14일 저녁 야당 의원들이 불참한 국회 본회의에서 한일협정비준안을 재석 111명 가운데 찬성 110명, 기권 1명으로 통과시켰다. 이로써 14년간 끌어오던 말썽 많은 한일관계 교섭은 비준안의 일본 국회 통과와 비준서 교환으로 완전히 끝났으며, 정국은 앞으로 비준 파동에서 생겨난 엄청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적지 않은 진통을 겪어야 하게 되었다.

동아일보는 8월 16일자 2면에 「강자가 먼저 최대의 성의를」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사람도 나이가 만으로 스물이면 어엿한 성인이다. 해방 20년을 기념했던 민주공화국도 이제는 성인이 되어 있는 것일까. 해방된 지 20년이 되는 국민이 이제는 충분히 자치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인가. (·····)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과제는 정치질서, 나아가서는 국가질서를 정상화하는 것이다. 논쟁적인 한일협정이 비준되거나 또는 안 되거나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갑자기 흥하거나 또는 망하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의 흥망을 좌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역량일 것이며, 우리 자신의 역량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질서를 스스로의 손으로 파괴하지 않는 인내와 자제일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한일협정비준동의안을 국회 특별위원회가 변칙적으로 처리했으며 이윽고 야당 의원이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은 이른바 ‘1당 국회’에서 통과시킨 정부 및 집권당의 처사를 개탄해 마지않는다. 그 동안의 경위나 곡절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의회민주주의는 이제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한일협정비준동의안이 국회 특별위원회에서 ‘날치기 통과’로 처리되었고 이윽고 ‘1당 국회’에 의하여 일사천리로 통과된 사실을 극히 중시하면서도 굳이 이곳에서 책임론을 전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정치위기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이 정치위기를 어떻게 조속히 수습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보다 더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강자인 정부 및 집권당이 먼저 최대의 성의를 베풀어 정치위기 타개의 이니시어티브를 취하라고 호소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정부 및 집권당은 내각 개조로써 국민의 정치적 관심의 방향을 돌리려고 한다고 한다. 대통령이 개각의 필요성을 느끼느냐 않느냐 하는 데 따라 언제든지 대통령이 알아서 개각을 하고 안 하는 것이겠지만, 정부 및 집권당이 정치위기 타개책으로 구상하는 것이 고작해야 개각이라면 그것은 너무나 고식적이고 인색한 태도라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 개각으로 정국이 조속히 정상화되리라고는 꿈에도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 이 시점에 우리가 경계하는 것은 정치위기의 만성화이며, 만성화된 정치위기는 한 걸음 한 걸음 완전 파국 상태를 재촉할 위험성을 지닌다. 이제 정부 및 집권당이 가져야 할 태도는 정복자의 교만한 태도가 아니라 야당의 두 손을 잡고 정국의 조속한 수습을 상의하는 태도다.
  정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완화하고,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구를 모색하는 기운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며, 정부 및 집권당이 옹졸한 태도를 버리고 대범하게 이니시어티브를 취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는 정부와 집권당이 한일협정비준동의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것은 의회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린 것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사실상 그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면서 정치위기를 조속히 수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강자’인 박정희 정권이 야당을 향해 대범하게 이니시어티브를 취하라고 권유했다. 이런 주장이 아무리 현실적이라 하더라도 굴욕적 한일회담을 필사적으로 반대해온 야당과 학생들이 거기에 선뜻 동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8월 14일 오후 조국수호국민협의회가 주최하는 강연회가 을지로 2가에 있는 대성빌딩에서 개최되었다. 오후 5시경 강연회를 마친 시민과 학생 3백여 명은 “한일협정의 국회 비준은 완전 무효”를 선언하고 을지로 입구를 통해 국회 앞으로 행진하였다. 이 시위대의 선두에 선 인물은 함석헌, 전 외무부 장관 김홍일, 그리고 김재춘 등이었다.
  8월 중순 각급 학교가 개학하면서 반대시위는 다시 격화되었으며, 8월 23일부터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박 정권은 8월 20일 조국수호국민협의회가 작성한 팸플릿 <위헌·매국의 한일협정> 4만 부를 압수하였지만, 11명의 전직 장성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8월 25일 아침 “한일협정비준안을 여당 국회의원들만이 참석하여 기습 통과시킨 것은 당연히 무효화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8월 26일 박 정권은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시켜 전방 6사단 병력을 서울 각 대학에 진주시켰다. 위수령 발동 전날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통해 ‘학교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기회에 “데모 만능의 뿌리를 뽑겠다”고 위협했다. 이 특별담화 후 수백 명의 무장군인이 고려대에 난입해 여학생들까지 구타하고 도서관에 최루탄을 발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3권 31쪽).

8월 27일 공보부장관 홍종철은 “정부는 모든 수사기관을 총동원하여 학생 데모를 선동 책동하는 배후 인물 및 배후 조종 학생을 철저히 색출하여 뿌리 뽑기로 했다”고 밝혔다.

바로 그날 오전 11명의 예비역 장성들은 「국군 장병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군인은 애국하는 시민이나 학생에게 총을 겨누기를 거부하고 민족적 양심에서 군의 빛나는 조국 수호의 전통을 지켜 달라” “군은 애국적 시위운동을 진압하는 데 이용되지 말고 조국 수호라는 본연의 임무로 돌아 가라”고 호소했다.
  이 성명이 문제가 돼 8월 28일 밤 예비역 장성들은 서울지검 공안부에 소환돼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29일 새벽 2시 20분경 4명 구속, 4명 불구속 입건, 3명은 무혐의 처리되었다. 구속자는 김홍일, 박병권, 김재춘, 불구속 입건은 손원일, 최경록, 백선진, 조흥만 등이었다. (·····)
  9월 4일 정부는 고려대, 연세대에 무기휴업령을 내렸다. 64~65년에 걸쳐 일어난 한일회담 반대 시위운동의 마지막은 9월 6일이었다. 이날 서울대 상대에선 최루탄과 군화 화형식이 열렸다. 이 화형식에 대해 집권당 일각에서는 서울대 상대 폐교 조치까지 거론하였다. 박 정권은 시위에 대해 ‘사전 처벌’이라고 하는 발본색원 작전으로 들어갔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운동의 본거지라 할 민족주의비교연구회는 해체되었고 김중태 등 14명은 구속 기소되었다. 서울대 법대 교수 황산덕, 김기선은 파면되었다. 그 이전 고려대에선 김성식, 이항녕, 김경탁 등이 정치교수로 몰려 쫓겨났다(같은 책, 32~33쪽).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에 대한 테러

동아일보 9월 8일자 7면에는 편집국장대리 변영권의 집 대문을 누군가가 폭파하고, 경찰관을 자칭하는 자들이 동아방송 제작과장 조동화를 납치해 뭇매를 가했다는 기사가 크게 나왔다.

  8일 자정을 전후해서 동아일보 편집국장대리 변영권(45) 씨 집에서 폭발물이 터져 요란한 폭음과 함께 대문 등을 부수었고 거의 같은 시간에 동아방송 제작과장 조동화 씨 집에 경찰관을 자칭하는 괴한들이 나타나 지프에 납치해 가다 뭇매를 가한 심야의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
  조 씨를 태운 이 지프는 성동서 옆을 끼고 돌아 마장동 미군 PX 창고 옆에 이르자 차가 고장이 났다고 정차, 조 씨만 남기고 4명이 모두 하차, 무슨 밀담을 주고받았다. 그 후 다시 달려 이문동 외국어대학을 좀 지나자 또 “고장났다”고 정차 모두 내려 밀담한 후 다시 달려 7백 미터쯤 간 후 정차하는 등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정차, 밀담한 뒤에 전기 장위동까지 와서 (···) “왜 협조 안 하느냐”고 주먹으로 양쪽 턱을 때리기 시작했다. “최루탄이 어떻게 되었어?” 등 한두 마디 폭언을 한 후 가슴·옆구리·허리·무릎 등을 손과 발로 무수히 구타, “내일 떠들었다간 가만 안 두겠다. 영장 가지고 와 정식 구속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기네끼리만 지프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9월 9일자 2면에 「테러의 뿌리는 어떻게 되나」라는 사설을 냅냈다.

  정부가 ‘법질서 확립의 달’로 정한 9월에 접어들고 열흘을 채 넘기지 못하여 수도 서울에서는 심야에 테러 사건이 접종(接踵)하고 있다. 법질서의 확립이기는커녕 백골단과 ‘땃벌떼’가 날뛰던 부산 정치 파동 당시를 방불케 하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보도된 바와 같이 7일 밤 11시 45분경 동아일보 편집국장대리 변영권 씨 자택 대문이 폭파되었다. 8일 새벽 0시 40분경에는 동아방송 제작과장 조동화 씨가 자택에서 괴한 4명에게 납치되어 집단구타를 당했다. 9일 새벽 0시 5분경에는 민중당 당무위원장 유옥우 씨 자택이, 근처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바람에 손상을 입었다. 그밖에도 생명을 위협하는 협박전화가 언론·보도에 종사하는 인사의 자택에 걸려오는 사례가 보고되어 있다.
  이러한 괴변은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 슬프기는 하지만 사실일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시끄러워지면 으레 ‘정체 불명’의 괴한이니 또는 ‘성명 미상자’가 날뛰는 것이 상례였었고, 경찰이 그러한 범인들을 잡아내지 못하는 것이 또한 상례였었고, 따라서 경찰이 못 잡는 것이냐 안 잡는 것이냐 하는 시비를 듣는 것이 또한 상례였었다.
  과연 이번에 발생한 테러 사건들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상례적인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부산 정치 파동 당시의 백골단 및 ‘땃벌떼’는 행동이 폭력적이었을망정 데모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결코 직접적인 테러 수단에 호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의 테러 사건들은 그렇게도 악명 높던 백골단 및 ‘땃벌떼’보다 한층 더 악질적이라는 점에 정부의 주의를 환기하고 싶다. (·····)
  박 대통령의 8·25 담화가 “나는 대통령으로서 사회 안녕과 공공질서의 유지라는 나의 첫째 직무를 결코 소홀히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한 것은 통치의 제일보가 치안이라는 것을 다짐한 말이라고 해석될 수가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정부가 데모를 뿌리 뽑겠다고 나선 거지만, 이 악질적인 테러 사건들에 대해서는 과연 어느 정도로 뿌리 뽑겠다고 나설 것인지를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
  문제는 국립경찰에 테러 사건의 뿌리를 뽑아낼 능력 또는 성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데모의 뿌리를 뽑는다고 발휘되는 기민하고 철저한 솜씨로 보아서는 악질적인 테러 사건의 뿌리를 뽑는 것도 손쉬운 일이라고 기대되기는 한다. (·····)
  경찰이 추리하는 네 가지 경우 가운데 하나는 간첩이 사회불안을 기도하는 행위라고 되어 있다. 만약 간첩이 사회불안을 기도하여 심야에 언론인 및 정치인의 자택을 폭파하고 안하무인으로 사람을 납치하여 집단구타를 가하는데도 경찰이 범인을 체포하지 못한다면, 수도 서울의 치안은 베트콩의 테러분자들이 도량(跳梁)하는 사이공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테러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범인을 빨리 잡아야 한다. 데모의 뿌리는 뽑지만 악질적인 테러의 뿌리는 뽑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립경찰의 명예가 못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국민의 신체·생명·재산의 안전을 위해서 정부가 테러의 뿌리를 뽑고 재발이 없도록 보장할 의무와 책임을 지고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설이 정부를 향해 테러의 뿌리를 뽑으라고 강하게 촉구했는데도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에 대한 테러는 그치지 않았다.

  9월 8일 오후에는 동아방송 부국장 최창봉의 집에 “가족들을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또 동아일보 기자 이채주의 집엔 북한에서 보낸 것처럼 된 불온문서 1장이 투입되었다. 군 특수부대의 소행임이 분명했지만 진상 규명을 할 수는 없었다. 야당은 이 사건을 정치 테러로 단정하고 9월 18일 국회 차원의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진상 규명에 나섰지만 ‘특수기관원의 소행’이라는 결론만 내리는 걸로 그쳤다(같은 책, 34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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