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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대통령 선거와 ‘사상논쟁’동아일보 대해부 3권 - 0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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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3.1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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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제5대 대통령선거를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대선을 앞두고 야권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있었다.

  1963년 5월 13일 신민당은 제5대 대통령선거를 염두에 두고 구 신민당, 구 자유당, 구 민주당 일부와 무소속 등 4개 세력을 모아 민정당을 창당하였다. 쿠데타로 사라진 민주당의 복원을 내세운 재건 민주당은 63년 7월 16일 창당대회를 열고 박순천을 당수로 선출했지만, 대통령후보는 내지 않고 윤보선을 지지하기로 하였다. 윤보선에 대해선 “5·16에 의한 헌정 중단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야당의 대통령후보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민정당과 민주당은 윤보선의 지명도에 의지하는 길을 택하였다.
  신정당은 허정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웠는데, 한동안 야당 후보 단일화 운동 차원에서 야당을 통합하는 ‘국민의 당’ 창당 움직임이 일었다. (·····)
  9월 12일 민정당은 윤보선을, 9월 14일 ‘국민의 당’은 허정을 대통령후보로 결정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2권>, 218~219쪽).

9월 15일 대통령후보 등록이 마감되었다. 중앙선거위원회에서 추첨한 결과 장이석(신흥당), 송요찬(자유민주당), 박정희(공화당), 오재영(추풍당), 윤보선(민정당), 허정(국민의 당), 변영태(정민회)의 순으로 기호가 결정되었다.


송요찬의 ‘박 의장에게 보내는 공개장’ 파문

대통령후보 등록 마감을 앞두고 야권이 거세게 항의한 것은 군사정권에서 내각수반을 지낸 바 있는 송요찬을 육군본부고등군법회의가 9월 4일 재구속한 사건이었다. 그는 동아일보에 박정희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하는 내용의 글을 기고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송요찬의 글(「박 의장에게 보내는 공개장」)은 1963년 8월 8일자 동아일보 3면을 모조리 차지한 긴 편지였다. 이 글은 5·16 쿠데타 이래 그 어떤 신문도, 그 어떤 문필가도 군사독재자 박정희에게 하지 못한 말을 과감히 공개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박정희 자신은 물론이고 국민대중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주요한 대목을 보기로 하자.

  ‘이 나라는 장차 어찌 될 것인가’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 속에서도 그래도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는 일루의 희망과 신념을 가지고 이 글을 씁니다.
  자고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직언과 충고와 간지(諫止)가 부자지간에 그리고 친구지간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직언이 대부분의 경우 죽음도 마다하고 행해졌건만 용납되기는커녕 오히려 증오와 멸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
  박 장군, 내가 작년 6월 내각수반의 직에서 물러난 이래 이날 이때까지 가장 두려워하고 서글프게 여기는 것은 한때 5천 원대까지 육박한 적이 있는 쌀값, 천정부지의 물가고, 또 때 아닌 장마로 인하여 적미병에 걸린 보리를 먹고 쓰러진 절량 농민들의 참상, 늘어만 가는 도시의 실업자,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국민들, 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재야의 통합이냐, 연합이냐 저의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선거관계법의 정비, 저자세의 한일회담이나 알쏭달쏭한 세칭 의혹 사건에 대한 판결, 한심하고 걱정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자나 깨나 내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왜 오로지 국방에만 전념 봉사해야 할 국군의 신성한 군사력이 적을 위압하기 위해서라기보다도 오히려 정적을 제압하기 위해서 그릇 행사되고 있는 건가-이 ‘엄연한 현실’이 과장된 표현이라고 하면 ‘그런 인상’이라고 정정하여도 좋습니다.
  (···) 오늘의 국군은 과연 어떻습니까? 감독을 받아야 할 군대가, 지도를 받아야 할 군사력이 주객이 전도하고 본말을 뒤집어 중앙청을 점령하고 의회를 해산한 지 어언 2년이 넘었지만 무엇이 미흡하고 부족한지 또 다시 앞으로 민정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벼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구국의 길이라고까지 공언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그래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굽니까? 이 나라에 정녕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런 안하무인격인 억지가 위세를 부릴 리가 만무합니다. 혁명을 일으키지 않은 사람은 바지저고리입니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 합니까? 이게 백성이 사는 나라며 어디 자유민이 사는 나라입니까? 6·25는 뭣 때문에 치렀습니까? 분통이 터질 노릇입니다. 더욱 해괴망측한 것은 이러지 않고서는 이 나라가 아주 망할 것처럼 나팔을 불고 돌아다니는 약장수들의 그럴싸한 선전 선동입니다. (·····)
  가령 혁명주체세력이 계속 집권하지 않을 것 같으면 ‘구악’들이 부패와 정쟁을 또 다시 일삼을 것이 뻔하며, 그렇게 되면 일단 물러간 군부일지라도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을 터인즉 여기에 이른바 ‘혁명의 악순환’이 벌어져서 이 나라 정국은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이 대혼란을 극하리라는 ‘방정맞은 점괘’라든가, 또는 차라리 이럴 바에는 신의고 공약이고 뭐고 간에 차제에 눈 딱 감고 해치워야 한다는 ‘비장한 애국심들’은 따지고 보면 다 불행을 요행으로 삼으려는 억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포분위기는 이렇게 하여 조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박 장군,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염소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삼지 말지니라.” 후진사회에서 부패와 독재는 마치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붙어 다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제도화하지 않는 경미(輕微)의 부패를 묵인하는 대신 독재를 가일층 배격하겠다거나 반대로 선의의 독재를 용납하는 대신 부패를 철저히 뿌리 뽑겠다는 사회개혁은 황당무계한 잠꼬대입니다. 군정 2년이 그것을 똑똑히 말해주고 있는 산 교훈입니다.
  그리고 쓰라린 우리는 부패와 독재 그 어느 것도 참을 수 없습니다.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서 군사지배를 환영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부패도 밉지만 독재는 더욱 밉습니다. 군인지배를 거부하는 까닭이 ‘군인당’에 의해서 강요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전체주의적 권력주의적 독재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서입니다. (·····)
  또 한 가지 내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이 나라의 정치가 한 사람의 거취로 인하여 왜 이다지도 떠들썩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박 장군, 이 ‘한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당신입니다. 흥선대원군의 10년에 걸친 무소불위의 권능을 연구한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일소(一笑)에 초목이 향영(向榮)하고 그 일로(一怒)에 강산이 진탕(震蕩)하였다”고. (·····)
  박 장군,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나 할 것 없이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생각처럼 위험하고 우매한 사상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개인숭배를 자유당 치하에서 이미 뼈저리게 경험하였습니다. (·····)
  ‘5·16’이 일어나자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심지어 조지워싱턴 대학에서의 학업을 중단하면서까지, 또한 우방 친구들의 오해를 사면서까지 박 장군, 당신을 지도자로 받들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여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염원은 불과 반년이 못 되어 무참히 짓밟히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나의 고지식했던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후회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내각수반의 자리를 표연히, 아무런 미련도 없이 오직 환멸의 비애만을 가득히 안고 중앙청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장군을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조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보다 애절하게 희구했기에, 그리고 부패를 증오했기에, 또 그리고 국민을 배신할 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
  박 장군, 나는 간곡히 부탁합니다. 국민의 기아를 해방시키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장군 자신을 이른바 새 세대·새 역사·새 영웅주의의 환각과 측근자 1인 외 장막에서 해방시키십시오. 그리고 복지사회 건설을 목표로 삼는 역사의 단축을 권력정치로써 이루어보겠다고 하는 위험한 생각을 버리십시오. (·····)
  박 장군, 이번에는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 장군의 대통령후보 출마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박 의장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2·27 선서’를 지켜 물러가야만 나라가 바로잡히고 백성들이 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세평과 공론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눈을 부릅뜨고 핏대를 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권력에 빌붙어서 단단히 재미를 보려는 처세가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싶습니다. 소위 ‘인텔리’다, 정치인이다 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김매는 농군이나, 시장바닥의 뜨내기 장사꾼이나, 지게품팔이 노동자, 그 어느 누구를 붙들고 물어보아도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죽겠다는 말뿐인데, 유독 장군과 장군의 추종자들만 군복을 벗고서라도 계속 더 해봐야겠다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도무지 그 심사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박 장군, 이 전무후무한 민생고는 천재(天災)보다도, 이·장 양 정권에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을 군사정권의 무능 부패에 기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
  박 장군, 혁명정부가 이태 동안 국민에의 공약과 선서를 번복하고 식언하기를 도대체 몇 번이나 되풀이하였습니까? (·····)
  (···) 장군, 한일회담은 왜 그렇게 비밀이 많습니까? (···) 왜 미국의 원조나 대한정책에 대하여서는 그토록 비판적이면서도, 우리를 36년 동안이나 노예 상태에 얽매어 둔 일본에 대하여서는 그토록 호의 호감을 가지고 대합니까? (·····)
  (···) 이제 남은 길은 한시바삐 물러가는 것밖에는 따로 없는 줄 압니다. 혁명이념을 어기면서 혁명과업 완수를 위함이라고 아무리 변명해도 사리에 맞을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고 또 충고하고 싶은 것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망집(妄執)을 버리고 번연개오(飜然開悟), 장군 자신의 거취를 뚜렷이 밝힘이 군인으로서 취할 바 태도요, 혁명자로서의 박 장군이 영원히 사는 길이며, 군을 사랑하는 길이며 국가에 충성하는 길일 것입니다. 만일 장군이 그래도 끝끝내 그 자리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선 선거 관리가 공명하게 될지가 무엇보다도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국난을 타개하는데 최선의 방법은 장군의 ‘2·27 선서’ 준수요, 그러지 못하면 즉시 하야하는 일입니다.

「박 의장에게 보내는 공개장」이 동아일보에 실린 지 사흘 뒤인 8월 11일 중앙정보부는 그 글과 상관 없이 송요찬을 ‘엉뚱한’ 혐의로 구속했다. 8월 12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구속영장에 담긴 ‘혐의 내용’이 이렇게 보도되었다. “1)6·25 동란이 일어나던 해인 1950년 10월 5일 당시 수도사단장이던 송 씨(당시 대령)가 부하인 제17연대 2대대장 조영구 중령을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헌병에게 지시, 경주 불국사 남쪽 2킬로미터 지점에서 총살케 했다는 혐의와 2)송 씨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있던 4·19 당시 경무대 어귀와 이기붕 씨 집 앞 데모대에게 발포 지시를 한 혐의로 알려졌다.”

송요찬을 다시 수감한 사건은 야권의 강력한 비판에 부닥쳤다. 그가 자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를 하면 박정희의 약점을 공격하면서 표를 깎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6개 야당은 9월 19일, ‘옥중 출마’를 한 자민당 대통령후보 송요찬을 석방하라고 군사정권에 요구했다. “재야 6당은 공동성명을 내어 송 씨의 구속은 ‘가장 저열한 정치적 보복’이라고 비난, ‘정치도의 공명선거 그리고 신성한 법의 이름으로’ 송 씨의 석방을 요구하고 만일 당국자가 끝까지 완미(頑迷)와 불의를 계속할 때는 한 사람의 송 씨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도살에 항거하기 위해 극한적인 투쟁을 하겠다”고 선언했다(조선일보 9월 20일자 1면).

동아일보는 9월 19일자 2면에 「송요찬 씨의 석방을 재차 권고한다」라는 사설을 실었다.

  (···) 우리가 송 씨의 석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법적으로 꼭 석방해야 한다든가 또는 송 씨의 건강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법적 문제는 사직당국에서 결정을 내릴 것이요, 건강 상태에 대한 판단은 담당의사가 취급할 사항이 되는 것이며, 우리는 다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대통령선거를 공정하고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야 하겠다고 열망하였기 때문에 송 씨의 석방을 정부당국에 권고하였던 것이다. (·····)
  지금까지 군정당국에서는 사상 그 유례가 없는 공명선거를 시행하겠노라고 누차 언명하여 왔었다. 그리고 민주국가의 선거에 있어서는 적어도 선거 시간 동안만은 정적 또는 경쟁자를 구속하지 않는 것이 정치도의로 되어 있는 것인데, 그것은 입후보자를 구속하는 것이 심각하게 공명선거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송 씨의 석방을 권고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데에 그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런데 들려오는 바에 의하면, 지난 18일 하오 5시부터 단식농성투쟁에 들어간 자유민주당 간부들은 앞으로 가두데모까지도 계획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송 씨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함이라 함은 그들이 공언하는 바와 같다. 그리고 이것이 공명선거를 다짐한 정부당국의 약속에 대하여 일반 국민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주고 또한 앞으로의 ‘평온한 선거전’에 암영을 던져 주리라 함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송 씨의 구속 문제에 관하여는 우방인 미국에서도 수차 우려의 빛을 보여왔다고 보도되고 있거니와,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거의 없는 대통령 입후보자를 계속 구속해 두는 것은 ‘정치적으로’ 지극히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고 인정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여기에 재차 송 씨의 석방을 정부당국에 권고하는 것이다.

윤보선, ‘여수 반란 사건 관계자 현 정부에 있다’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은 “새 일꾼 바로 뽑아 황소 같이 부려보자”, 윤보선의 민정당은 “군정으로 병든 나라 민정으로 바로 잡자”라는 선거구호를 내세웠다. 그러나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정책 대결보다는 ‘사상 논쟁’이 큰 흐름을 이루었다. 폭발성이 강한 사상 문제의 핵심은 박정희의 좌익 경력이었다. 그 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한 후보는 윤보선이었다. 동아일보 9월 25일자 1면 머리에 크게 실린 기사는 ‘사상 논쟁’의 시발점이 된 윤보선의 발언 내용을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윤보선 씨 발언으로 선거전에 새 양상 / 여·야, ‘이념 대결’ 격화될 듯 / 박 의장의 ‘민주 신봉’ 의심 / 윤 씨, 이리서도 재공언 / 허정 후보도 박 의장 이념에 공개 질문

  “박정희 공화당 후보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봉 여부를 의심한다”는 윤보선 민정당 후보의 24일 하오 전주 발언은 크게 정치문제화 하여 중반에 들어선 대통령선거전을 ’이념 대결‘로 번지게 하여 앞으로 10월 15일 투표일까지 더욱 격렬한 논쟁이 벌어져 선거전을 새로운 양상으로 물들일 것 같다.
  24일 최고회의가 윤 씨 발언을 ‘국가안보에 관한 문제’라고 비상한 반응을 보이고 공화당이 윤 씨를 사직(司直)에 고발키로 결의한 데 뒤이어 윤보선 씨는 25일 아침 이리에서 열린 그의 여섯 번째 유세에서 1만여 청중을 앞에 하여 다시 박 의장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봉을 의심한다고 공언함으로써 혁명정부 측에 재차 도전했다.
  또한 공화당은 윤 씨의 24일 전주 발언에 이어 25일 허정 국민의 당 후보가 “합헌정부를 전복하고 쿠데타를 감행한 그의 사상적 근저가 자유민주주의냐”고 공개 추궁한 데 대해 허 씨 발언도 고발할 기세를 보이고 있으므로 앞으로 선거운동 기간 동안 여·야 이념 대결의 불꽃은 ‘5·16 혁명’의 시발점에까지 번져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정계는 내다보고 있다. (·····)
  · 국민의당 송원영 대변인 담: 여수·순천 반란 사건 관련자가 정부 내에 있는 것 같다는 윤보선 씨의 발설은 중대 문제이다. 정부는 “없다”고 가볍게 부인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발설이 나오게 된 원인과 보다 근본적인 해명을 하여 국민의 불안을 일소해야 할 것이다. 윤 씨는 5·16 혁명을 합리화시킨 당시와 그 후 군정 하 1년여 대통령직에 있을 당시 그런 설을 알고 있었는 지 밝혀 주기 바란다.
  · 민주당 김대중 대변인 담: 윤보선 씨의 “정부 안에 여순 사건 관련자가 있다” “박 의장의 사상을 의심한다”는 발언 내용은 중대 문제로서 선거를 앞두고 우리는 그 진상이 국민 앞에서 철저히 가려져야 한다고 확신한다. 사실과 이론으로써 시비를 가릴 성질의 것이지 위협이나 법적 추궁으로 다룰 성질의 것은 아니다. 만일 이러한 경향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권력층에 의한 진상의 은폐 조작을 국민은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이 기사를 보면 본문에는 윤보선이 “박 의장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봉 여부를 의심한다”고 한 근거가 무엇인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야당 대변인들의 논평에서 그것이 ‘여순 반란 사건’ 관련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기사 옆과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실려 있다.

  · 「국가보안에 관한 문제로 보고 / 진상을 철저 규명 / 최고의, 윤보선 씨 발언에 결론」
  · 「위협적인 처사 / 민정당서 반발」
  · 「윤 씨를 정식 고발 / 공화당 허정 씨 발언도 검토」


‘여순 사건 관련 왜 떳떳이 해명 못 하는가’

윤보선의 ‘전주 발언’을 계기로 불붙기 시작한 사상 논쟁은 야권이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총공격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국민의 당 대통령후보 허정이 먼저 박정희를 향해 여러 가지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9월 27일자 1면 머리기사에 구체적인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일본 잡지에 보도된 수표 문제 밝히라 / 허정 씨, 박 의장 출마 포기 등 요구 / ‘간첩 황 모’ 사건 해명도 / 해명 없다면 대공전(對共戰) 영도할 능력 없는 것 / 민정 이양 중지한다는 정보 있다

  국민의 당 대통령후보자 허정 씨는 27일 아침 1)공화당 사전 조직 문제와 관련해서 세간의 의혹을 사고 있는 간첩 황 모 사건을 정부가 석연하게 밝힐 것 2)박 의장이 다액의 수표 4장을 일본의 모 회사로부터 받았다는 일본 잡지 보도는 국치적(國恥的) 사실이므로 이에 대해서 해명할 것 등을 요구했다. 신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그는 박 의장의 과거 행적을 논의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로서 당연히 규명되어야 한다고 주장, 그에 대한 해명이 없다면 “그는 공산주의와 대항할 국민과 특히 국군을 영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허 씨는 현 정국을 폭발 직전의 위급한 파국이라고 단정하면서 “이를 구할 유일한 길은 박정희 씨가 즉각 대통령후보를 포기하고 공명선거를 실시, 정권의 평화적 이양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허정은 기자회견에서 특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했다. “공산 위협 하에 놓여 있는 현 실정으로 보아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은 반공에 의심을 받아선 안 된다. 그런데 박 씨는 과거 경력과 또 그 측근에 공산주의와 관련된 사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단 이런 문제가 야기된 이상 박 씨 자신은 국민 앞에 자기의 지난 일을 샅샅이 발표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윤보선은 9월 28일 박정희가 여순 반란 사건에 관련된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를 대구 유세에서 밝혔다. 동아일보 1면에 그 내용이 4단 기사로 실렸다.

  여순 사건에 박정희 씨 관련 / 외지(外紙)에 보도된 것 듣고 알았다 / 박 씨는 자유민주주의자 아니다

  [대구 최영철 특파원 28일 발] 민정당 대통령후보 윤보선 씨는 28일 “여순반란 사건에 공화당 후보 박정희 씨가 관련했다고 볼 수 있다”고 못 박음으로써 그가 전주 발언에서 밝힌 “정부 안에 여순 반란 사건 관련자가 있는 것 같다”고 한 말이 바로 박정희 씨를 가리킨 것임을 공언했다.
  대구에 유세차 내려온 윤보선 씨는 이날 상오 대명동 임시 숙소에서 기자들과 회견하고 그가 “전주 발언에서 어떤 자연인을 지적한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고회의와 공화당이 박 의장을 비방했다고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고소까지 했음은 나보다도 그들이 박정희 씨의 관련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었음을 시인한 것으로서 하나의 방증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고 이런 박정희 씨의 관련 사실은 “모 씨로부터 금년 초여름에 외지에 뚜렷이 보도되었다는 말을 듣고 알았다”고 덧붙였다. (·····)
  박 의장의 이질적 사상을 언제 알았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그는 “처음에는 의심이 없었으나 차차 행정 운영이 공산당 식으로 되어간다는 말이 세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상 논쟁’에 불을 댕긴 것은 윤보선의 ‘전주 발언’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박정희가 9월 23일 아침 서울중앙방송국에서 10분 동안 내보낸 첫 번째 ‘정견 방송’이었다. 그는 “이번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사상의 대결”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윤보선이 전주 유세에서 그의 사상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사태를 일으킨 것이었다. 한국민주당에 뿌리를 둔 민주당 구파 출신으로서 동아일보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던 윤보선, 자유민주주의자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라고 공언해온 그를 박정희가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짜 자유민주주의자’라고 공격한 것은 야권에서 선두를 달리는 대통령후보에 대해 국민이 정치적 사형선고를 내려달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격앙된 야권 정치지도자들이 윤보선의 ‘전주 발언’에 대해 진실 여부를 밝히라고 요구했는데도 박정희와 최고회의는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하지 않고 윤보선 등에 대한 구속 위협으로 대처했다.

박정희는 야당 측이 제기한 그의 ‘좌익 경력’에 대해 10월 3일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 날짜 동아일보 1면에 그의 발언 내용이 5단으로 보도되었다.

  ‘낡은 매키시즘’의 수법 / 박정희 씨 야측 ‘사상’ 공세에 반박 / 광주 유세, 범법자는 선거 후에 처단

  [광주-김영수 특파원 3일 발] 민주공화당 대통령후보 박정희 씨는 3일 광주에서 첫 지방유세 강연을 벌였다.
  ‘역사는 역행시킬 수 없다’는 연제로 정견을 밝힌 박 후보는 야당 후보들 이 집중공세를 벌이고 있는 이른바 ‘사상 논쟁’을 ‘낡은 매카시즘의 찌꺼기’라고 힐난하면서 새 민정은 그와 같은 폭로나 비난보다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의 지도체계 아래 정국이 우선 안정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
  박 후보는 또한 “과거의 선거는 여당이 야당을 구박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무책임하게 폭로전술과 허위사실로 인신공격을 하는 것이 법에 저촉되지만 잡아 가두면 선거 방해라고 떠들려는 심사를 알기 때문에 선거 기간 동안은 처벌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범법자는 반드시 법에 의해 엄단할 방침이다”라고 말했다.


기록에 나타난 박정희의 ‘좌익 경력’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을 시작으로 야권이 박정희에 대한 총공격의 소재로 삼은 ‘여순반란 사건 관련’ 주장은 사실이었을까? 김재홍(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언론인)이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책보세, 2012)에 쓴 글을 통해 진실 여부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참고로 말하면 이 글에 대한 박정희 유족의 공식적 반론은 아직 나온 적이 없다).

  박정희의 세 번째 변신은 광복군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조선경비사관학교를 거쳐 국군 장교가 된 후 극좌 공산주의 세력인 남로당의 군사부 프락치가 된 일이다. (·····)
  1946년 10월 당시만 해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이어 중앙인민공화국 등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계가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좌익세력의 집권이 유력시되는 상황이었다. 박정희는 국군 장교였지만 주저하지 않고 집권 가능성이 큰 남로당에 가입했다. 그렇게 군내 남로당 프락치가 된 것이다.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은 변신의 차원이 아닌 명백한 ‘반란행위’였다. 당시 남한은 단독정부 수립의 하나로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발족시켰으며 우파 민족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그 지도이념이었다. 조선경비대의 주요 임무는 좌익계열이 사주한 폭동이나 파업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런 조선경비대의 장교가 공산주의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반란행위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당시 조선경비대에 침투한 남로당 조직은 1948년 한 해에만 4·3 제주 폭동, 10·19 여순 반란, 11·2 대구 반란 등 일련의 소요 사태를 일으켰다. 박정희는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난 후 군내 남로당 프락치 검거와 숙군 선풍 과정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때 검거된 피고인들의 공통된 죄목은 “1946년 7월경부터 1948년 11월경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 서울 기타 등지에서 각각 남로당에 가입하고 군내에 비밀세포를 조직하여 무력으로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반대하는 반란을 기도”하였다는 것이었고, 이들 가운데 박정희의 죄과는 ‘군 병력 제공자’로 적시되었다. 반란 기도 혐의로 기소된 박정희는 1948년 12월 30일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무기형을 언도받았으나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도 예의 눈부신 변신술을 발휘하여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남로당 비밀조직원의 명단을 몽땅 넘기고 그 대가로 혼자만 풀려난 것이다. 그 후 조선경비대는 1천여 명의 장교와 하사관을 투옥하거나 처형하는 등 대대적인 숙군 조치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리스트’가 요긴하게 사용되어 남로당 비밀조직을 일망타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박정희는 이렇듯 출세를 위해서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조국이든 동료든 배신을 밥먹듯이 했다(310~311쪽).


중앙정보부의 ‘간첩 황태성 사건 진상’ 공개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둘러싼 사상 논쟁이 한창이던 1963년 9월 27일 중앙정보부는 ‘간첩 황태성 사건 진상’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9월 28일자 1면 기사(「10·1 영남 폭동 주동자 / 한때 북괴 무역성 부상(副相) / 중앙정보부, 황태성 사건 진상 공개」)는 중앙정보부의 발표문을 그대로 옮겼다. “황태성 사건은 27일 아침 국민의 당 대통령 후보 허정 씨가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함으로써 클로즈업되었으며 25일 공명선거투쟁위원회 강연회장에 뿌려진 삐라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었다. 중앙정보부 발표문에는 “간첩 황태성이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형수 조 여사를 포섭하려다 실패한 뒤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대법원에 재판이 계류 중”이라고 되어 있었다.
김재홍은 이 사건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5·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 8월 말경, 북한은 상업성 부상까지 지낸 거물 황태성을 남한으로 밀파했다. 그는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경북도당 조직부장 출신으로 1946년 10월 대구 민중봉기를 주동하다가 월북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박정희의 형이며 김종필의 장인인 박상희에게 중매까지 성사시킨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이었다. 박정희의 형수이며 김종필의 장모인 조 모 씨 쪽과도 물론 잘 아는 사이였다.
  박정희는 10년 연상으로 일제 때부터 사상운동을 해온 인텔리 황태성에게 수시로 인생 상담을 받았다. 황태성도 어렸을 적부터 다부지고 영리한 박정희를 친구 동생 이상으로 아끼고 정답게 대했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국가수반에 오르자 북한의 대남공작부서와 황태성이 뭔가 ‘대협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오판했을 가능성은 그만큼 충분했다. (·····)
  중앙정보부의 발표는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정치 목적과 공작적인 냄새를 많이 풍긴 것이 사실이다. 황태성은 남한에 도착한 1961년 8월 말 이후 체포 시점인 10월 20일까지 사이에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만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황태성은 당시 다른 재소자들에 의해 신분이 알려졌다. 그리고 그들이 출소한 후 황태성 사건을 야당 인사들과 주한미군 측에 제보했다. (·····)
  민간 정치인들의 야당은 공명선거투쟁위원회 집회를 연달아 열어 “간첩 황태성이 공화당 사전조직 요원의 밀봉교육을 담당했다”며 공화당을 좌경 집단으로 모는 전단을 대거 살포했다.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가 진화에 나섰다.
  “황태성은 반미운동을 지령 받고 남하해 고위층과 접촉하려다 실패한 자다. 간첩 황이 박 의장과 만났다거나 친면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일 뿐이다.”(<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310~322쪽).

어린 시절 박정희에게 ‘정신적 스승’이나 다름없던 황태성은 북한 주석 김일성이 보낸 ‘밀사’였다. 야권의 사상 공세에 시달리던 박정희에게 ‘황태성 간첩 사건’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황태성에 대한 사형 집행 서류에 서명했다. 황태성은 대통령취임식 사흘 전인 1963년 12월 14일 인천 근교의 한 육군부대 안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황태성 사건에 대해 중앙정보부나 정부 기관의 발표만을 보도했을 뿐, 그 사건의 내막과 배경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박정희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었다.


박정희, 15만여 표 차이로 윤보선에 승리

대통령선거가 중반전을 넘어선 10월 2일 국민의 당 후보 허정이 “협상으로는 단일화가 어려우므로 후보를 사퇴한다”고 발표하면서 “오직 군정 종식의 일념뿐”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사퇴로 박정희, 윤보선, 허정의 3파전은 군사정권을 대표하는 박정희와 실질적인 재야 단일후보 윤보선의 양자 대결로 압축되었다.

10월 5일 대전에서 유세에 나선 박정희는 “이번 선거는 사대(事大)와 신진세력의 대결이지만 이념의 본질에는 다를 바 없다”면서 사상 논쟁이 부적절한 것이라고 공격했다. 대전에서 강연회를 연 윤보선은 “반혁명자는 박정희 씨 자신”이라고 몰아붙이면서 “공화당 외곽단체인 YTP의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했다(조선일보 10월 6일자 1면).

10월 6일 윤보선은 강원 춘천 유세에서 “박정희 씨가 일제 시대의 군인으로서 충성을 다한 것은 묵인한다 하더라도 왜 해방 후 공산당을 하고 남로당의 군사책임자를 지냈느냐”고 따지면서 “그러고서도 어떻게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서느냐”고 반문했다(동아일보 10월 6일자 ‘호외’).

10월 9일 윤보선은 경북 안동 유세에서 공화당은 “공산당 돈을 가지고 공산당 간첩이 와서 공산당 식으로 조직한 사이비 민주정당”이라고 단정하면서 “공화당은 보수정당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당도 아닌 불법조직”이라고 비난했다. 같은 날 부산에서 연설회를 가진 박정희는 “구정치인들이 지금 와서 5·16 혁명을 부인하려는 것은 물에 빠진 자를 건져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과 같은 꼴”이라고 비난한 뒤 “야당들이 나를 빨갱이로 몰고 있으나 나는 육군소위로부터 구 정권 때 육군소장으로 있을 때까지 군 요직을 맡아 보았다”고 말하고 “내 사상과 신분이 의심스럽다면 과도정부나 민주당 정부는 왜 나를 그대로 두었으며 윤보선 씨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그는 왜 나를 그대로 두었느냐”고 반문했다(조선일보 10월 10일자 1면).

10월 15일 저녁 제5대 대통령 선거 개표가 시작되었다. 개표 초반에 박정희보다 앞서 나가던 윤보선은 한때 23만여 표 차이의 우세를 보였고 16일 새벽 3시까지도 2만여 표를 앞서 있었으나 16일 오후부터 역전당하기 시작했다. 17일 오후에 끝난 개표 결과 박정희는 유효투표의 46.6%인 472만여 표를, 윤보선은 45.1%인 454만여 표를 얻었다. 차이는 겨우 15만여 표였다.

  선거 막바지에 이르러 야당이 여순 사건 공판 기록 공개를 요구하기도 했으나 사상 논쟁은 점차 그 힘을 잃었다. 한마디로 윤보선과 야당의 공세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사상 논쟁 과정에서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부각된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지식층의 큰 관심을 끌었다. 또한 박정희와 공화당은 이러한 민족주의 공세를 ‘세대론’과 연결시켜 큰 효과를 보았다.  사상 공세가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하자, 윤보선과 야당은 선거 막판 이슈를 사상 논쟁에서 정책 대결로 이동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
  박정희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군정의 실정(失政)과 비민주적 정권욕에 따른 여론 악화, 그리고 선거 막판 야당의 후보 단일화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기본적으로 군정과 공화당의 막강한 조직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빙의 접전에서 한민당 이래 야당의 텃밭이었던 호남에서 거둔 약 30만 표 차 대승과, 해방 직후 좌익세력이 강했고 1956년 대통령선거 당시 조봉암 표가 많이 나왔던 지역에서의 승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호남에서의 승리는 1963년 수해와 흉작으로 시달리던 호남지역에 선거 직전 미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밀가루가 대량 살포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반면 해방 직후 좌익세력이 강했고 1956년 대통령선거 당시 조봉암 표가 많이 나왔던 지역에서의 승리는 사상 논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385~386쪽).

동아일보는 10월 17일자 2면에 「대통령 당선자에게 바란다」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 우리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한 박정희 후보에게 축의를 표하는 한편 비록 근소한 득표차로 낙선했을망정 시종 선투(善鬪)한 민정당 후보에게 경의를 표한다.
  (···) 이제 대통령 당선자는 박정희 후보로 결정되었으니 우리는 박 후보에게 승자의 관용을 촉구하면서 승리가 무거운 정신적 부담임을 강조하려고 한다.
  특히 이번의 경우처럼 당선자와 차점자의 득표차가 극히 근소하다는 것은 승자라고 해서 교만할 수 없고 겸허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정국 안정과 민심 수습에 있어서 박 후보가 이 점을 명심하여 주기를 우리는 바라지 않을 수 없다. (·····)
  (···) 17일 박 후보가 휴양 중인 불국사에서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며, 김 내각수반 또한 선거사범에 대한 관대한 처리 방침을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환영하면서 그 귀추를 주시하려고 한다. (·····)
  우리는 박 후보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이번의 선거를 통하여 박 후보가 민심의 소재를 바로 파악할 것을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한마디로 이번 선거의 결과는 군사정부로 하여금 심각하게 반성하게 하는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군인 출신인 박 후보에게 우리는 군인다운 정직과 과단을 기대하면서 한편 군인 출신자가 가지기 어려운 민주주의적인 관용과 인내와 포용력을 요망하려고 한다. 불원(不遠) 우리의 대통령으로 취임할 박 후보에게 우리는 민주주의의 감각을 지닌 대통령을 원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자애(自愛)와 가찬(加餐)을 비는 바이다.

동아일보가 ‘군인 출신’인 박정희에게 대통령으로서 ‘민주주의적인 관용과 인내와 포용력’을 ‘요망’한 것과는 달리 그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독재의 길로 치닫게 된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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