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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 이양 둘러싼 박정희의 ‘번의’ 소동 (2)동아일보 대해부 3권 - 0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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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3.1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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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2월 16일 국방부에서 각 군 수뇌회의가 열렸다. 회의 참석자들은 박정희의 민정 참여에 반대한다고 결의했다. 한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도 같은 견해를 박정희에게 전달했다.


박정희, ‘시국수습안 수락하면 민정 불참’

그러자 박정희는 2월 18일 기자회견을 열고 ‘정국 수습 9개안’을 발표했다. 민정 이양을 둘러싼 박정희의 ‘번의’ 시리즈 속편이 나온 것이었다.
동아일보 2월 18일자 1면은 그에 관한 기사들로 도배되었다. 먼저 머리기사를 보기로 하자.

  각 정당이 9개안 수락한다면 / 민정에 참여 않겠다 / 박 의장, 시국수습안을 제시 / 구 정치인은 전면 해제 / 선거도 5월 후로 연기

  대통령권한대행 박정희 의장은 18일 혼란의 극에 도달하고 있는 정국 수습을 위하여 아홉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오는 23일까지의 기한부로 국내 재야 정치지도자들이 동 제안을 완전무결하게 수락한다면 자신은 민정에 참여하지 않고 정정법(政淨法)을 거의 전면 해금하는 한편 선거를 5월 이후로 연기하겠다고 언명하였다.
  박 의장은 이날 정오에 본인이 직접 발표한 ‘중대 성명’에서 정치인들과 국민에게 5·16 혁명이념의 평화적 계승과 평화로운 민정의 탄생을 위한 방안으로서 1)군의 정치적 중립 견지 2)4·19 및 5·16 혁명정신의 계승 3)5·16혁명주체세력은 개인 의사에 따라 군에 복귀하거나 민정에 참여할 것 4)민정 이양 후 일체의 정치 보복의 금지 5)혁명 기간에 기용된 공무원들의 신분 보장 6)유능한 예비역 군인의 기용 7)모든 정당들은 정쟁을 지양하고 조속히 정책을 국민 앞에 내세울 것 8)새 헌법의 권위를 보장할 것 9)한일회담은 초당적 입장에서 협조할 것 등을 호소하였다. (·····)
  박 의장은 만일에 그가 제시한 시국수습 9개 방안이 그대로 수락된다면 “본인은 민정에 불참하겠다”고 언명하고 몇 가지 조항 해당자 이외의 정정 법 해당자 전원을 정치활동 금지로부터 해제할 것이며 선거를 5월 이후로 연기하겠다고 말하였다.

이 머리기사 옆과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관련 기사들이 실렸다.

· 「전폭적으로 환영한다 / 민정당, 박 의장 수습방안을 찬양」
· 「민주당서도 찬성」
· 「군인다운 결단 / 윤보선 씨, 인화와 단결 강조」
· 「정치가다운 조치/ 허정 씨, 국민 협조 호소」

동아일보는 2월 19일자 2면 사설(「박 의장 성명을 지지한다」)을 통해 “박 의장 성명은 역시 군인다운 의연한 결단이며, 박 의장이 2·18 성명을 관철하는 한 우리는 우리나라 역사에 새 인물을 한 사람 더 보태게 된다고 믿는 것”이라고 극구 찬양했다. 그리고 2월 20일자 사설에서는 ‘정치인과 정치활동의 체질적 개혁’을 촉구했다.

  지금 우리 앞에는 새로운 역사가 바야흐로 전개되고 있다. 정치인들의 자각과 노력 여하에 따라 민족의 중흥을 기하고 민주정치의 궤도를 부설(敷設)할 수 있는 금옥(金玉) 같은 기회에 처했다.
  지난날의 욕된 역사를 깨끗이 청산하고 국민대중에게 꿈과 희망을 주어 국가 재건의 웅대한 비약을 기할 수 있는 위대한 시점에 서 있다.
  이러한 기회와 시점을 마련하기 위해 3권을 쥐고 있는 박정희 의장은 9개 항목에 걸친 수습안을 내놓았고 여기에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호응하고 있음은 국가 장래에 큰 희망이요 광명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미 국무성의 논평을 빌릴 것도 없이 “한국의 미래에 크게 도움 될 하나의 선례를 남기는 명예로운 제안”이라고 볼 수 있고 우국적 조치임을 의심할 바 없다.
  박 의장이 불출마하겠다는 결의는 정권 도득(圖得)만에 눈이 어두운 풍속의 차원에서 볼 때 일종의 패배요 후퇴일지 모르나 역사와 민족적 생명의 차원에서 평가할 때 그것은 그의 위대한 승리요 길이 축복될 결단이요 다른 정치인에 대한 고귀한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정치하겠다고 나선 대·소 정치인이 모두 이와 같은 선례와 교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소아(小我)를 버리고 국리민복을 앞세우는 각오와 추현양능(推賢讓能)하는 고래(古來)의 동양적 미덕 및 타협과 호양을 기조로 삼는 서구적 민주정신을 체득할 것을 강력히 호소하는 바이며 국민과 우방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신·구 정치인들의 대승적인 협조와 노력을 촉구하는 바이다.
  특히 앞으로 전개될 정치활동에 있어 5·16 이전의 절망적 상황에 되돌아가는 어리석음을 절대로 범하지 않아야겠고 만일 5·16 이전으로 시계바늘을 돌려놓을 때 그 다음에 무엇이 온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당 조직과 정치활동의 체질적 개혁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며, 이 문제의 혁명적 향상 없이 오늘의 광명과 희망은 한낱 하루 아침의 찬연한 이슬로 사라지고 말는지도 모른다. (·····)
  무릇 근대적 정당이 붕당·사당과 상이한 것은 어떤 주의 주장을 뚜렷이 하고 국가 통치의 경륜의 동일성에 입각해서 대동단결해서 이의 실현을 위하여 협력 결합하는 집단이다. (···)
  따라서 국가 운명을 맡을 자신과 경륜적 신념이 없는 자는 깨끗이 정계에서 물러가야 한다. 덮어놓고 권력부터 잡겠다는 무책임한 분자는 다시는 정치무대에 나타나지 않는 길만이 애국하는 길임을 깨달아야 하며 이러한 애국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앞날은 축복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동아일보는 박정희의 ‘민정 불참’ 의사 표명에 지나치게 감격하고 흥분했는지, 그를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라고 칭송했다. 이 사설에서 박정희는 “역사와 민족적 생명의 차원에서 평가할 때” ‘길이 축복될 결단’을 내림으로써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다른 정치인에 대한 고귀한 교훈’을 남기게 될 인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말에 그가 조국의 독립과 해방보다는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바치는 데 열성을 다했다는 사실, 1948년 여수·순천 반란 사건 때 ‘남로당 프락치’로서 동료들의 명단을 수사기관에 알려주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전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왜 ‘민정 불참’을 선언했는지를 한 번 더 곰곰이 따져보았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2·18 성명은 군복을 벗고 민간인의 신분으로 대통령선거에 나서기 위한 ‘공작’의 첫 걸음이었음이 드러났다.


  박정희의 ‘민정 불참’ 선언과 묘한 반전

공화당창당준비위원장 김종필은 1963년 2월 20일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 초야의 몸이 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공직 사퇴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본인은 이 나라의 강력한 정치와 새 질서 확립을 위해 거름이 되겠다고 열과 성을 다하여왔으며, 이러한 신념에서 민주공화당의 창당을 위하여 그 산파역을 맡고 나섰으나 이러한 일들이 본인의 소임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2월 25일 김종필은 외유(外遊) 길에 올랐다. 이른바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半)’의 외유였다. 미국의 압력도 작용했다. (주한) 미 대사 버거는 이미 1월 24일 미 국무성에 보낸 전문에서 박정희가 김종필을 일체의 공직에서 사임시켜 외국에 보내겠다는 연락을 해왔다고 보고했으며, 이에 국무성은 버거의 보고를 치하하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김종필이 만든 민주공화당은 건재한 만큼 그는 다시 돌아오게 돼 있었다. 그가 떠난 다음날인 2월 26일 민주공화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총재엔 법조계의 원로인 정구영이 선출되었고, 당의장엔 김정렬이 지명되었다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2권>, 176~177쪽).

2월 27일 재야 정치지도자들과 정당 대표, 그리고 군 대표들이 서울 시민회관에서 박정희의 시국수습안을 수락하는 선서식을 가졌다. 동아일보는 그 날짜 신문 1면 머리기사(「정당 대표·정치지도자·각군 총장 / 정국 수습에 역사적 선서 / 박 의장 민정 불참을 공식 천명 / 정정법 해당자 27일자로 전면 해금」)로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 선서식 절차에 이어 박 의장은 식사(式辭)를 통해 “세대의 교체라는 당초의 목표가 완전 실패에 돌아갔음을 자인한다”고 말하면서 “정치인들이 일대 각성으로 정국 안정과 새 기풍 조성에 노력할 것”과 “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을 목멘 소리로 당부하였다.
  짤막한 이 식사가 계속되는 동안 박 의장은 식장을 메운 3천여 방청객들로부터 여러 차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정치지도자들과 3군 참모총장, 그리고 해병대사령관까지 참석한 선서식에서 박정희가 ‘민정 불참’ 의사를 명확히 하는 성명서를 낭독한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야당인 민정당과 민주당은 “사실상 군정이 종식되었다”면서 기뻐했다. 주요 일간지들의 기사도 흥분 일색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8일밖에 지나지 않은 3월 7일, 박정희는 강원도 원주의 1군사령부를 시찰하는 자리에서 장병들에 대한 ‘훈시’를 통해 묘한 발언을 했다. 동아일보 그 날짜 1면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5단으로 실렸다.

  정치인은 군 간섭 말라 / 박 의장, 혼란 재현이면 방관 않을 태도 / 양심적인 젊은이에 맡기도록

  [원주-이만섭 특파원 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7일 낮 12시 30분 제1군사령부를 시찰하고 동 사령부 장병들에게 “혁명정부는 앞으로 남은 짧은 기간 동안 새로운 정치질서를 확립하여 민간인에게 정권을 넘길 만반의 준비를 갖출 것이다”라고 언명하였다. (·····)
  그는 구 정치인들도 국민에게 “새로운 정치 질서를 확립하겠다고 약속한 이상 그들도 구악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을 것으로 믿으며 국민에게 선서한 바 그대로 지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전에 어떤 인사로부터 자기에게 “만약 이 나라가 다시 5·16 혁명 이전 사태와 같이 정치 질서가 극도로 문한해질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인사에게 “또 다시 정치 부패가 되풀이되고 나라에 위기가 오는 경우 당신은 그것을 방관하는 것이 애국적인 것으로 생각하느냐? 또는 방관하지 않는 것이 애국적인 것으로 생각하느 냐?”라고 반문했을 뿐 그 이상 답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었다고 시사성짙은 인용으로 그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박 의장의 이러한 말은 나라가 또 다시 위기에 처했을 때는 그것을 그대로 방관하지 않겠다는 그의 신념의 일단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3월 8일자 1면 머리기사(「국민에 해독 끼치고 질서 문란케 한 / 기성정치인은 일선에서 물러나야 / 정국이 다시 혼란해진다면 / 방임하는 것이 애국이냐 / 방관 않는 것이 애국이냐 / 나는 모 외국인 질문에 이렇게 반문했다」)는 박정희가 원주에서 “정치인도 군에 간섭 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되어 있다. 2월 27일의 선서식에 참석해서 정치지도자들과 각 군 최고지휘관들 앞에서 ‘민정 불참’과 ‘정치활동 금지 전면 해제’를 공약한 박정희가 원주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고 야당과 국민들은 경악했을 것이다.


군인들의 ‘군정 연장’ 요구 데모와 박정희의 ‘번의’

박정희의 ‘원주 발언’이 나온 지 사흘 만인 3월 11일 오전 중앙정보부장 김재춘은 ‘혁명주체’였던 김동하 등이 쿠데타를 음모한 사실에 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 이 쿠데타 음모 사건으로 인해 김동하는 물론 건설부장관 박임항, 혁명검찰부장 박창암, 전 치안국 정보과장 방원철 등이 일거에 숙청되었다. (···) 구속·수배된 21 명 중 육군 전투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병력으로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것인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재판도 ‘웃기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재판부는 ‘사건 아닌 사건’을 처리하면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결국 이 사건은 피의자들이 기소 사실을 시인하는 대신 곧 이어 보석, 사면, 복권시킨다는 ‘협상 재판’을 거쳐 정식으로 처리됐다.
  쿠데타 음모 사건 발표 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3월 13일 ‘국민자유연맹’이라는 유령단체가 “쿠데타 음모를 처벌하라!” “구 정치인 몰아내라!” “매국노 송요찬을 엄중히 처벌하라!”는 삐라를 살포하면서 데모를 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2권>, 180~181쪽).

3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인 데모’가 벌어졌다. 수도방위사령부 장교 45명이 30여 명의 사병들을 거느리고 최고회의 건물 앞에서 박정희의 민정 불참 선언 철회와 군정 연장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선 것이었다.
동아일보 3월 16일자 1면에는 수도방위사령관의 ‘대응’이 보도되었다.

  데모 장교 45명 전원 구속 / ‘특위’ 조사 거쳐 군재에 회부 / 호위사병은 처벌 않는다 / 김 사령관 언명

  김진위 수도방위사령관은 16일 아침 “지난 15일 최고회의에서 데모를 한 45명의 장교는 현재 수도방위사령부 구치소에 구속되어 있으며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은 다음 군법회의에 회부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
  그는 이어 데모에 가담한 45명의 장교들에 적용될 죄명은 “군기문란죄와 항명죄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혈기 왕성한 그들의 심경은 동정할 바도 있으나 도대체 군인이 정치에 간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그는 이번 데모는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장교들의 데모를 호위한 약 30명의 사병들은 직접 데모에 나섰던 것도 아니며 또한 장교들의 명령에 따라서 맹목적으로 나온 것이므로 처벌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군인 데모 사건에 관해서는 조선일보가 동아일보보다 훨씬 상세한 기사와 강한 논조의 사설을 내보냈다.
조선일보 3월 16일자 1면은 마치 ‘비상사태’를 맞은 듯이 1면 머리에 사설(「일부 군인들의 탈선행동에 경고한다」)을 올리고 그 옆에 관련기사(「장병 약 80명을 체포 / 어제 최고회의 앞서 건군 이래 처음인 군인데모 / 정치에 관여했기 때문 / 수도방위사령관이 체포 명령」)를 내보냈다. 이 기사는 군인들의 데모 경위를 이렇게 보도했다.

  (···) 몇 사람의 육군소령을 포함한 위관급 육군장교 약 50명이 30여명의 하사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15일 낮 12시 10분부터 최고회의 앞마당에서 쿠데타 음모 사건을 규탄, 박병권 국방부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며 계엄령의 선포를 주장, 군정을 연장하든지 박정희 의장이 직접 민정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데모를 감행, 두 시간 만에 전원 수도방위사령부에 연행돼 갔다. 이들 현역 장병은 여섯 가지 요구사항을 내세워 큰 제지를 받지 않은 채 데모를 계속했다. 김진위 수도방위사령관이 현장에 나와 해산을 명령했으나 그들은 “박 의장이 이 자리에 나올 때까지는 죽어도 물러갈 수 없다”고 버티었다.

  조선일보 1면 머리의 사설은 격앙된 어조로 시작된다.

  현역군인 수십 명이 최고회의로 몰려들어 데모를 했다 한다. 동기나 이유를 따질 겨를도 없이 명색 민주공화국에서 이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국방장관을 위시해서 3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이 국민 앞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선서한 것이 바로 16일 전의 일이다. 그런 선서가 없었다고 한들, 군인이 정치에 관여를 해서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가는 고금의 역사가 소연(昭然)히 가르쳐주고 있는 바다. 하물며 5·16 혁명으로 군이 통치를 하고 있는 이 마당에 그 혁명정부의 예하에 있는 젊은 장교들이 떼를 지어 통수계통을 문란하고 정치적 구호를 내걸어 행동한다는 것은 하극상의 기풍, 그 극에 달했다 해도 잘못이 아니요, 군율을 무시함이 이에 더할 바 없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에 가담한 수효가 기십 명에 불과하거나, 사려가 미숙한 혈기에서 온 소치라 할지라도 군인 된 본령을 망각한 이들의 사고 기저가 벌써 국가의 화근이니 국민 된 자 추호의 동정이 있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 정치에 눈을 떴거든 군복을 벗고 정치운동으로 나서라. 왜 비겁하게도 신성한 군복을 걸치고 무기를 지닌 특권을 향유하며 군율을 어기고, 국법을 짓밟고, 국민의 이름을 함부로 남용하는가. (···) 우리는 정녕코 이런 소아병적 혈기야말로 국가를 백척간두의 위기로 몰아넣는 반민주적 군국주의의 남상(濫觴)임을 개탄하면서 군법의 추상 같은 발동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강력히 요구한다. 당국은 이들의 엄단을 발표한 바 있지만 만에 일이라도 이런 사태에, 같은 군대의 부하라 하여 조금이라도 온정이나 무마가 가해진다면 일파만파로 연쇄반응은 그칠 줄을 모를 것을 우리는 심우(深憂)한다. ‘울며 마속(馬謖)을 참(斬)한’ 제갈공명의 비장한 공심(公心)이 절실히 요청되며 민주주의 만년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하여서 차제에 군의 강철 같은 단결과 함께 군 책임자들의 단호한 결의가 있어야 할 줄 안다.

박정희는 ‘군인 데모’에 관한 보고를 받은 뒤 “군인이 데모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크게 화를 내면서 “데모를 한 장교들을 엄격히 군법으로 다스리라”고 지시했다(조선일보 같은 날짜  1면).
조갑제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5: 김종필의 풍운>(조선일보사, 1998) 250쪽에는 군인 데모 사건은 박정희의 경호실이 조직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정희, ‘군정 4년 연장’ 전격 제의

민정 이양을 둘러싼 박정희의 ‘번의’ 시리즈는 1963년 3월 16일 막바지로 치달았다. 군인 데모 이튿날인 바로 그날 박정희가 군정을 4년 연장하는 방안을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그 날짜로 발행한 ‘호외’를 통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4년 간 군정 연장’ 가부 국민투표를 실시 / 모든 정치활동 일단 중지 / 완전한 민정 위한 바탕 마련하기 위해 / 통과되면 지역·직능 대표로 최고위 구성 / 정계 중진들로 자문기관을 설치

  대통령권한대행 박정희 의장은 16일 하오 4시 5분에 군정을 앞으로 4년간 더 연장할 것인가의 여부를 국민투표에 회부하여 직접 국민의 의사를 묻겠다고 선언하였다.
  박 의장은 국민투표는 가능한 한 단시일 내에 실시하겠다고 언명하였다. 박 의장은 이 선언과 함께 국민투표까지 모든 정치활동을 중단한다고 언명하였다.
  박 의장은 이 국민투표에서 국민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면 즉시 정치활동을 재개하고 혁명정부는 일절 민정에 참여하지 않고 ‘2·18’ 성명, ‘2·27 선서’대로 정권을 정치인에게 넘기겠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군정 연장의 이유로 다시는 혁명이 없는 안전한 민정 이양의 기초를 닦기 위하여 정치적·사회적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비상적인 조치와 함께 박 의장은 국민투표에서 신임을 얻게 될 때는 1)앞으로 혁명정부는 광범위하게 민간 인재를 등용한다 2)직능대표와 지역대표를 참여케 하는 방향으로 최고회의를 개편한다 3)초당적인 정계 중진으로 자문기구를 구성한다 4)초당적으로 민정 이양을 위한 연구기관을 설치한다 5)양당제도의 확립을 위한 정치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노력한다고 그의 방침을 밝혔다.


박정희가 ‘민정 불참’을 명백히 공약한 ‘2·27 성명’을 철석 같이 믿고 민간정부 수립을 위한 절차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야당 정치인들과 언론은 그가 ‘군정 4년 연장’을 제의하자 충격과 분노를 삭일 수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군정 4년 연장’ 제의를 주요 내용으로 담은 ‘3·16 성명’을 발표한 지 이틀 뒤인 3월 18일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길재호는 언론에 대한 계엄령이나 다름없는 조치를 발표했다. 조선일보 3월 19일자 1면에 실린 기사(「찬·부 사설 게재할 수 없다 / 사견도 선동적 내용이면 저촉 / 벽보 첨부나 비라 살포 안 된다」)는 다음과 같다.

  최고회의 길재호 법사위원은 18일 “군정 연장의 개헌안에 관해 개인 의 사 표시라 할지라도 일체의 선동적인 내용은 그 찬부를 막론하고 법에 저촉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길 위원은 “그러나 이 같은 의사를 여러 사람(예를 들어 서너 명) 앞에서 밝히는 행위는 선동을 위한 것으로 간주하며 벽보나 삐라를 뿌리는 것도 선동행위로 간주되어 법에 저촉될 것”이라고 밝혔다.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이하 임시조치법)의 해설을 위한 기자회견에서 그 같이 밝힌 길 위원은 “신문사도 동법 제3조(언론 출판의 제한)에 명시된 기타의 단체로 간주한다”고 밝히고 “개헌안에 관한 찬부의 사설을 게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이 “신문의 일체 기능 정지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그렇게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 공정한 판단에 장해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찬부의 선동적인 언사를 금지시키도록 비상사태를 위한 임시조치법이 마련된 것이라고 밝힌 길 위원은 “이 법의 폐기 여부는 국민투표가 끝난 다음에 가서 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이 법을 어기는 이는 동법 벌칙뿐만 아니라 비중에 따라 다른 법을 적용하여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3월 17일자부터 열흘이 넘도록 사설 없는 신문을 펴냈다. 임시조치법에 ‘저촉’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군사정권의 언론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서인지 명백히 밝히지는 않았다.

미국 국무부는 3월 25일 군정을 연장하려는 한국 최고회의의 의도는 “안정되고 효율적인 정치에 대한 위협”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군사정권에 대해 미국 행정부가 보기 드물게 강경한 ‘경고’를 보낸 셈이었다.
동아일보는 3월 30일자 2면에 다시 사설을 싣기 시작했다. 제목은 「민족적 시련과 우리의 염원」이다.

  충격적인 3·16 성명과 그 후 오늘에 이르는 비상사태의 불연속선을 관찰할 때, 신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가혹한 시련의 기회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숙연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자유와 민주주의에 가는 길이 이렇듯 험하고 먼 것인가를 우선 가슴 아프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련은 곧 극복되어야 한다. 조국의 발전은 한때도 멈출 수는 없 다. 그리고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스스로의 민주적 자주역량임을 다 같이 다짐하여야겠다.
  본란은 지난 두 주일 동안 신중한 침묵을 고수했거니와 그것은 단순히 법제상 물리적 제약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 주장과 판단의 성급한 표시가 이 민족적 진통을 가시게 하는 데 과연 긍정적 효능을 거둘 것인가에 충분한 자신을 갖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상 사태를 방관하는 것이 우리의 본무(本務)가 아니겠고 또한 그러기에는 너무도 위급한 상황임을 깨닫고 이에 지난 2주 간의 격동을 냉정히 성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혁명당국과 정치인의 지향할 바 우리의 관견(管見)을 밝혀 두고자 한다.
  우리는 먼저 이 민족적 시련을 극복하는 데 집권당국과 재야 정치인에게 이성과 관용 및 정치력의 적극적인 발휘를 간절히 호소한다. 우리는 지도자와 정치인에 있어 뚜렷한 신념 및 이를 관철해내는 용기와 기백 등을 결코 적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같이 가치개념이 상극되고 위급한 상황에서 자칫하면 맹목적이 되기 쉬운 과신과 사명감을 심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
  생각건대 지금처럼 조야(朝野) 지도자의 이성과 아량 및 예지가 요구된 때가 일찍이 드물었고 지금처럼 국민의 단합과 침착이 초래할 분극화 경향은 단호히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 우리의 염원이다. (·····)
  지금 우리 조야 정치가들에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 사물을 조정하는 비범한 정치력이며, 이 정치능력이 오늘처럼 비상하게 요구되던 때가 일찍이 드물었다고 본다. 흔히 민주주의는 타협과 호양의 정치요 생활양식이라 하거니와 여기서 타협이란 비단 상치(相値)된 의견과 주장의 절충만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은 또한 실질적으로 대립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상호 조정하는 것을 뜻하며 사물을 조정하여 착잡한 문제를 풀어가는 능력이야말로 정치가에 있어 필요 불가결한 최대의 요소요, 가장 귀중한 정치력이라고 본다. (·····)
  (···) 오늘의 이 비상사태를 수습하려면 우리는 먼저 3·16 제안을 철회하는 데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본다.
  따라서 타협과 협상도 어디까지나 순조로운 민정 이양을 전제로 한다는 원칙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명백히 지적해 두고자 한다. 다만 정국을 5·16 전의 절망적 상황으로 환원하는 일이 없도록 어떻게 안전판을 구축하느냐, 또는 어떻게 해서 2·27 선서에서 서약한 바와 같이 무분별한 파쟁을 지양하고, 어떻게 새로운 정치 풍토를 형성하느냐, 또는 어떻게 해서 정치 보복 등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시킬 수 있느냐, 또는 어떻게 해서 군의 중립화를 담보하느냐, 또는 3·16 성명에서 우려된 바 어떻게 해서 민정 후의 재혁명 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하느냐 등에 진지한 상호 협상의 본질이 있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이러한 상호 협상을 통해서 2·27의 기본 정신에 돌아가 정국이 원만히 수습되기를 희망한다. (·····)
  지금은 군정 연장을 피하기 위해 모두가 최대의 애국심과 최소의 이기심을 택해야 할 때다. 이러한 용의와 각오 없이 이 난국 타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정찰(正察)하여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 앞엔 숙적인 공산주의가 이 순간에도 우리의 허점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자유우방이 우리의 자치능력을 응시하고 있지 않은가. 경제 파탄을 목전에 두고 국민대중이 아우성치고 있지 않은가. 이 시련을 올바르게 극복하느냐에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지 않은가.

이 사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박정희가 3월 17일에 발표한 ‘군정 4년 연장’ 방안을 철회하고 ‘2·27 선언’으로 돌아가서 ‘민정 불참’ 서약을 지키라는 것이다. 이런 요점을 말하려고 이 사설은 궁색하게도 ‘집권당국과 재야 정치의 이성과 관용’ ‘정치력의 적극적인 발휘’를 호소하면서 ‘조야 정치가들’에게 ‘사물을 조정하는 비범한 정치력’을 요구한다. 박정희가 일방적으로 ‘2·27 서약’을 파기하고 군정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독단적 제안을 한 마당에 재야 정치인들이 어떻게 이성과 관용으로 비범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박정희의 ‘번의’ 시리즈 막을 내리다

4월 1일 박정희는 야당인 민정당 청년당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2·27 선서는 정권을 꼭 넘겨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기성정치인들에게 반성할 기회를 주려고 한 것”이라고 말하고 “3·16 성명을 지키기 위해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걸기라도 하겠다”고 강조했다(조선일보 4월 2일자 1면, 이하 모두 조선일보 기사 인용).

박정희는 4월 8일, ‘군정 4년 연장’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던 3·16 성명의 핵심 내용을 뒤집어 “9월 말까지 국민투표를 보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국민투표냐 총선거냐’에 관해서는 9월에 각 정당과 협의해서 결정하고, 임시조치법을 폐지하고 정치활동을 재개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4월 9일자 1면).

4월 30일 내각수반 김현철은 중앙청에서 각의가 끝난 다음 비밀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박정희 의장은 다음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기로 결심하였으며 그에 따라 연내에 민정 이양을 할 것도 곧 공식으로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5월 1일자 1면).

5월 5일 오후 윤보선, 박순천 등 7명의 재야정치지도자들은 서울 교동국민학교에서 3만여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군정 연장 반대 대연설회’를 열고 박정희의 대통령선거 출마에 반대하면서 “피난할 길 없는 국난 극복에 총궐기하자”고 호소했다(5월 7일자 2면).

5월 27일 민주공화당은 제2차 전당대회에서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박정희는 “절차상의 시간을 달라”면서 후보 수락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5월 28일자 1면).

6월 1일 박정희는 AP통신 기자와 인터뷰를 한 자리에서 “대통령으로 출마하는 경우 군복을 벗을 것”이며 “야당의 불평을 들어 선거법을 개정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 재건의 기초는 이미  달성했으며 혁명정부 내내 부패를 은폐하지 않겠다”고 밝혔다(6월 2일자 1면).

박정희는 7월 27일 최고회의 공보실장 이후락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10월 중순에 대통령선거를, 11월 중순에 국회의원 총선거를 치르도록 하겠으며 국회는 12월 중순에 소집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7월 28일자 1면).
마침내 1963년 8월 30일 오전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제5군단 비행장 안에서 박정희의 전역식(轉役式)이 열렸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 1면 머리에 오른 기사는 아래와 같다.

  [철원 지포리-이만섭·유혁인 특파원 30일 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30일 현역 육군대장직을 물러났다. 군사정부의 총수로서 오는 10월의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기 위해 군직을 떠나는 그를 위해 건군사상 최대 규모의 전역식이 이날 상오 11시 제5군단 관하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서 거행됐다. 박 의장은 이날 전역식에서 인사를 겸한 연설을 통해 “군사혁명을 일으킨 한 책임자로서, 2년에 걸친 군사혁명에 진정 종지부를 찍고, 혁명의 악순환이 없는 조국 재건을 위하여 항구적 국민혁명의 대오, 제3공화국의 민정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였다”고 군직을 물러나는 연유를 밝혔다.

‘민간인 박정희’는 8월 31일 오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공화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 지명 수락 연설을 한 뒤 총재로 선출되었다.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던 그의 ‘정치적 쇼’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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