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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 이양 둘러싼 박정희의 ‘번의’ 소동 (1)동아일보 대해부 3권 - 0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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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3.0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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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1961년 8월 12일, ‘혁명공약’을 통해 약속한 바 있는 민정 이양에 관한 계획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8월 13일자 조간 1면 머리에 보도된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혁명이념 계승할 정당 필요 / 박의장, 8·12 성명 1주년 맞아 언명 / 여·야에 고루 기회 제공 / 활동은 연초에 / ‘유능 민정’ 나와야 / 정당활동 금지 구 정치인 구제 서둘지 않겠다 / 최고위원 거취, 박 의장 출마 여부엔 논급 회피 /무책임 언론은 계속 엄단 방침

박정희, ‘민주질서 만들고 물러나겠다’

  (···) 동시에 박정희는 정권이양에 앞서 진정한 민주질서를 만들어내고 구악 재발 방지를 위해 최소한의 기초작업을 완수한 후 물러나겠다는 뜻을 명백히 했다. ‘8·12 성명’은 민정 이양 계획이 조속히 나오기를 바라는 대내외 여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특히 박정희는 미국을 의식했다. 박정희는 미국 방문을 통해 쿠데타에 대한 확실한 인정과 지속적인 지원 약속을 받고 싶어 했는데, 이 성명 발표 후 미국은 박정희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1961년 11월 미국에서 박정희와 케네디의 정상회담에서 박정희가 ‘8·12 성명’을 재확인하자 케네디는 크게 만족하였다.
  그러나 ‘8·12 성명’ 속에는 ‘최소한의 기초작업을 완수한 후’ 민정 이양을 하겠다는 전제가 달려 있었다. 민정 이양 로드맵과 상관없이 쉽게 정권을 내놓지 않겠다는 군사정권의 의지가 담겨 있는 표현이었다. 실제로 박정희와 김종필은 부패하고 사리사욕에 급급한 ‘구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이양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박정희는 ‘8·12 성명’ 발표를 전후해 김종필에게 민정 이양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372~373쪽).

‘8·12 성명’의 진의를 명확히 파악한 사람들이라면 박정희가 순순히 민간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물러나리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5·16 쿠데타 이후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이 초헌법적 조치들을 남발하고 ‘용공’ 또는 ‘반혁명사건’을 만들어내면서 구정치인들과 일부 군부 사람들에게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힌 사실이 박정희와 김종필이 이끄는 군사정권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

1962년 6월 4일 최고회의 공보실장이자 대변인인 이후락은 박정희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도 있다고 시사했다. 동아일보 6월 5일자 조간 1면 머리에는 이후락이 말한 내용이 크게 실렸다.

  이 실장, 박 의장 대통령 출마를 시사 / 국민 여론 지배적이면 / 건의서 쇄도, 하루에 수백 통씩 / 정부서 ‘농도’를 조사할 터

  이후락 최고회의 대변인은 4일 아침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으로 출마해 달라는 여론이 지배적인 경우에는 국민을 위하여 혁명을 일으킨 박 의장이 대통령으로 나간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함으로써 박 의장의 차기 대통령 출마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이 공보실장은 이날 아침 “구 청조회 회원들이 박 의장이 차기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일부 보도가 있은 다음 “박 의장이 대통령으로 되어 달라는 여론이 지배적인 경우 그는 대통령에 출마할 것인가”라는 기자 질문에 답하여 그의 사견임을 전제하고 이와 같이 말하였다. 작년 5·16 혁명 이후 박 의장의 측근자가 박 의장이 차기 대통령으로 출마할 것이라는 것을 시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실장은 이어 구 청조회원들이 박 의장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일부 보도에 대한 논평을 요구받고 “청조회의 이야기는 신문을 보고 처음 알았다. 박 의장으로 하여금 다음 대통령으로 꼭 나와 달라는 여론이나 또는 민정에 이양함이 없이 그대로 계속해 달라는 건의는 박 의장이나 나나 매일 수백 통씩 받고 있으며 건의한 사람의 수는 한 도시의 인구를 이룰 수 있을 정도이다. 청조회 회원 몇 사람의 건의보다 이미 나타난 수많은 사람의 여론을 더 주요한 여론으로 참고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한편 국민의 여론이 절대적인 경우에는 박 의장도 그 여론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 이 실장은 “문제는 그 ‘여론’이 지배적인 것인가 아닌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혁명정부는 냉정히 이를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심복이자 그의 ‘입’인 이후락이 ‘사견’을 말했다고 믿기보다는 ‘민간정부 대통령 박정희’를 만들기 위한 애드벌룬을 띠운 것이라고 해석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7월 28일자 석간 1면에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사설을 실었다가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동아일보사사 권3>에는 그 전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군정 하에서 본보가 겪은 수난 가운데 가장 가혹한 것이 바로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1962년 7월 28일자 사설이 몰고 온 소용돌이였다. 당 박정희의 군사정부는 제3공화국 헌법을 기초 중에 있었고, 헌법학자 한태연 등의 제의로 새 헌법안이 기초되면 이를 직접 국민투표에 붙여 확정시키려는 방향으로 군정 당국의 방침이 기울어지고 있었는데 서울대 법학 교수이며 본사 논설위원인 황산덕은 아직도 살아 있는 제2공화국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를 개정하여야만 국가의 법통이 계승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런 입장을 군정 당국은 군사혁명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94쪽).

문제의 사설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우리 헌법은 오로지 그 헌법상의 국회에 의하여서만 개정될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그리고 국민투표의 방법에 의한 개정 절차는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따라서 만일 군정 당국에서 헌법 중의 몇 조문을 고친 다음에 국민투표에 붙여서 그것에 대한 국민의 승인을 얻기로 한다면 그것은 결코 기존 헌법의 개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문 내용이 근사한 신헌법의 제정이 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투표를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아직도 극복되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하나의 사고방식이 있는데,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므로 국민은 언제든지 그리고 마음대로 국민투표의 방법으로 헌법을 ‘개정’할 수가 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의 헌법심의위원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유력한 의견인 것처럼 보도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국민투표를 이처럼 만능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심히 경솔하고도 위험한 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는 이유가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우리나라가 지금 분단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한 데서 나온 무책임한 생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아직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로서의 승인을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유엔에서 ‘정부’로서의 승인을 받고 있지만, 그것도 우리의 정부가 1948년에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로써 구성된 국회에 의하여 제정된 헌법을 모시고 있고, 그 헌법에 의하여 조직된 정부로서 존속하는 한에 있어서 그러한 정부 승인을 계속 보유할 수 있는 것이며, 만일 그 헌법을 일축하고 새로이 헌법을 만드는 경우에는, 비록 그것이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유엔의 승인은 그 효력을 상실하고 유엔과의 관련 밑에서 지금까지 이 땅에서 이루어 놓은 위대한 사업을 모두 백지로 환원한다는 무서운 이론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끝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군정 당국에서 민주헌법을 개정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것이다. 군정 당국에서 헌법을 개정한다고 하면 그 방법은 국민투표에 의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인데 국민투표의 방법에 의한 개헌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불미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면, 이것은 결국 군정 당국에서는 개헌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결론을 가져오게 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군사혁명이 구악을 일소하고 조국을 굳건한 민주토대 위에 올려놓는 것을 목적으로 할 뿐이요, 조국의 민주적 기본체제 그 자체에 손을 대는 것이 그 본의가 아니었다는 점을 반성해 본다면 당연하고도 또 당연한 결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8·12 성명에 나타난 군정 당국자의 포부나 현재 진행 중인 헌법심의위원회의 활동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군정 당국자의 포부는 앞으로 민주적인 개헌이 있을 때에 충분히 반영되어야 하며, 또한 헌법심의위원회는 외국에 흔히 있는 그런 유의 헌법연구기관으로서 충분히 그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반공국가의 국민으로서 이론상·정략상 한 가지만은 고수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헌법의 개정은 우선 제2공화국 헌법에 의한 국회를 구성하고 난 다음에라야 비로소 논의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한 뒤 ‘민정 이양’ 공약을 저버리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사설의 논지는 매우 뼈아팠을 것이다. 헌법 개정이 ‘헌법상의 국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쿠데타세력은 당연히 총선거를 통해 국회를 다시 구성해야 할 것이다. 더욱 섬뜩한 지적은 “헌법을 일축하고 새로이 헌법을 만드는 경우에는, 비록 그것이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유엔의 승인은 그 효력을 상실하고 유엔과의 관련 밑에 지금까지 이 땅에서 이루어 놓은 위대한 사업을 모두 백지로 환원한다는 무서운 이론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라는 대목이다.

이 사설이 나간 이튿날 중앙정보부는 필자 황산덕을 연행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8월 2일 서울지법 부장판사 유태흥이 발부한 영장에 따라 동아일보사 부사장 겸 주필 고재욱과 논설위원 황산덕이 구속되어 마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반공법 제4조와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례법 제3조 3항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동아일보사는 8월 6일자 조간 1면에 이 사건에 관한 「해명서」를 ‘사고(社告)’로 내보냈다.

  지난 7월 28일자 본보 사설(「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하여 우선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문제화된 동 사설은 새 헌법 심의에 전 국민이 성의 있게 또 솔직하게 참여하는 중대한 마당에서 그에 대한 하나의 건설적인 의견 내지는 여론을 반영시키려는 뜻에서 집필 보도된 것임을 여기에 재천명하는 바입니다만 다만 동 사설 중 ‘유엔 관계’ 구절에 있어서 그것이 어디까지나 “국제관계나 국제적 반응에 대해서도 신중하고도 합당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건설적인 주장을 하려는 본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에 일부 오해를 초래할 염려가 있었다는 점에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개헌 절차에 있어서는 국내·국외적 영항도 신중히 고려하여야 한다”는 동 사설의 취지와 진의를 여기에 다시 한 번 해명하여 독자 여러분의 오해 없기를 간절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동아일보 사장 최두선은 8월 8일 박정희를 방문하고 구속된 두 명에 대한 ‘선처’를 ‘요망’했다.

동아일보, ‘헌법개정안 국민투표로 확정’을 ‘경하’

박정희는 ‘8·12 성명’ 발표 1주년을 맞은 1962년 8월 12일 “혁명이념을 강력히 계승·실천할 수 있는 새 정당의 출현을 희망한다”고 말하고 “내년에 세워질 민간정부가 과거와 같은 잘못된 모습을 탈피치 못한다면 민족의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여당과 야당을 균등히  지원할 것이며, 8·12 성명 구상은 변경할 계획이 없고, 유능한 민정을 위해 국민의 협조를 바란다고 말했다(동아일보, 8월 13일자 조간 1면).

10월 8일에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박정희의 ‘대변자’로 나섰다. 그는 3명의 외신기자와 회견한 자리에서 “내년 3월로 예상되는 다음 대통령선거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출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 의장 자신은 민정 이양 후 정치와 완전히 손을 끊을 것을 원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혁명과업 수행 도상에 있는 한국의 현실적인 여러 여건으로 보아 그는 다음 대통령선거에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조선일보, 10월 11일자 조간 1면).

군사정권은 1962년 10월 8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개정하고, 10월 12일 ‘국민투표법’을 제정·공포함으로써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제도를 도입했다. 11월 3일 작성된 헌법개정안은 5일 최고회의에 상정되어 재적 25명 가운데 출석자 23명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대통령권한대행 박정희는 그날 개헌안을 공고했다.

  (···) 새 헌법의 핵심 내용은 “1)대의정치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건전하고 민주적인 복수정당제 2)4년 임기의 단원제 국회와 당적 이탈·변경, 정당 해산 시 의원직 상실 3)4년 임기의 대통령이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는 대통령중심제 4)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제” 등이었다. 이렇게 마련된 헌법 개정안은 곧 국민투표에 회부되었다. 11월 5일부터 30일 간의 공고기간이 지난 12월 6일 새벽 0시를 기해 군사정권은 쿠데타 이후 내려졌던 계엄령을 해제했다. 같은 날 최고회의는 재적 25명 중 출석위원 22명 전원의 찬성으로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최고회의를 통과한 헌법개정안은 12월 17일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85.28%에 78.7%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군사정권은 이를 자신들에 대한 신임으로 간주한 반면, 야당은 조속한 민정 복귀의 열망으로 해석하였다(<한국민주화운동사>, 374쪽).

동아일보는 12월 18일자 2면 머리에 「제5차 개정헌법의 확정」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17일 실시된 국민투표에 의하여 제5차 헌법개정안은 이 나라의 새 헌법으로서 확정되었다. 이 헌법은 헌법에 의한 국회가 처음으로 집회하는 날로부터 발효, 시행되는 것이지만 국민투표의 개표가 완료되는 대로 대통령권한 대행에 의하여 공포될 예정이다.
  이번의 국민투표는 새 헌법을 확정시키기 위한 투표인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실시된 국민투표였을 뿐만 아니라 5·16 군사혁명 후에 최초로 실시된 전국적인 투표였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주목을 끈 바 있다. 국내외가 주시하던 국민투표가 이렇다 할 사고나 말썽도 없이 무사히 끝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행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고 경하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
  (···) 제5차 개정헌법의 확정을 보고 우선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가 있다고 믿는다.
  첫째로 내년 여름으로 예정되어 있는 민정 이양을 위한 준비 과정에서 새 헌법 문제는 이로써 완전히 종지부가 찍혔다. 새 헌법 문제에서 남는 문제가 있다면 대통령권한대행에 의한 공포와 그리고 국회의 최초 집회일과 때를 같이하는 발효밖에는 없다. (···)
  둘째로 우리는 국민투표가 자유당 정권 하의 선거에서 보던 바와 같은 협잡이 없이 실시되었다는 점에 만족하는 바이다. 국부적으로도 불미한 일이 전연 없었다고 말할 자신은 우리에게 없다. 그러나 투표나 개표에서 큰 사고 또는 협잡이 발생하지 않았던 전국적인 투표로서 이번의 국민투표는 특기할 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셋째로 우리는 85% 선을 넘는 높은 투표율에 유의하게 되고 또한 높은 찬성률을 주목하게 된다. 높은 투표율이 과연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의 높은 정치적 관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높은 찬성률도 그것이 곧 군사혁명정부에 대한 국민의 높은 지지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문제일 것이며, 새 헌법에 대한 찬성률과 군사혁명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서로 내부적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혼동될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러한 점을 명심하여 정부는 새 헌법의 확정을 출발점으로 삼아 민정 이양 계획을 원만하게 하나하나 실천에 옮김으로써 국민의 보다 더한 신뢰와 지지를 얻도록 노력할 것을 우리는 바라마지 않는다.

「국민투표는 만능인가」라는 사설로 혹독한 필화사건을 겪은 동아일보가 이 사설에서는 “국민투표가 이렇다 할 사고나 말썽도 없이 무사히 끝났다는 사실”을 ‘경하’하고 있다. 무력을 앞세운 군사정권 앞에서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언론의 모습을 여기서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박정희 번의 소동 제1막

12월 22일 최고회의는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를 통해 가결되었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1962년 민정 이양에 대한 박정희의 ‘번의(翻意) 소동’ 제1막이 시작되었다. 1961년 ‘8·12 성명’을 통해 “정권 이양에 앞서 진정한 민주질서를 만들어내고 구악 재발 방지를 위해 최소한의 기초 작업을 완수한 후 물러나겠다”고 한 ‘공약’을 박정희가 뒤집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아일보 12월 27일자 1면 머리를 요란하게 장식한 기사의 제목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대통령선거 4월 초순 / 국회의원선거 5월 하순 / 정권 이양 8월 중순 / 박 의장, 민정 이양 스케줄 전모를 발표 / 당서 공천하면 대통령 출마 / 최고위원 참정(參政)은 군복 벗고 / 연내로 구 정치인 170명 내외 구제 / 정치활동 1월 1일부터 허용 / 출마군인 예편·개각은 2월 중에 단행 / ‘다소 불만 있더라도 한일 국교를 성취 / 필화사건은 윤리위서 처리 구상

동아일보는 12월 28일자 2면 사설(「박 의장의 기자회견담을 읽고」)을 통해 박정희가 민정 이양 약속을 ‘번의’한 데 대해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의 민정 참여는 널리 예상되어 왔으며 어느덧 공지(公知)의 사실처럼 된 지도 이미 오래이나, 이번에 혁명주체세력의 대표자라고 볼 수 있는 박 의장의 답변을 통하여 그것이 공식으로 확인되어 분명해졌다는 점에 우리는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박 의장이 최고위원들의 민정 참여를 공식으로 확인한 데 대하여 일부 국민들은 혁명공약 위배가 아니냐 하는 반향을 보이고 있다. 공약을 한 사람이 공약 위배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공약을 받은 국민 가운데서 일부는 그것이 공약 위배가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사태가 결코 명랑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결국 이것은 혁명공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야기된 혼선이지만 최고위원들의 민정 참여가 이미 결정된 마당에 현실적으로 어떠한 정치적 실익이 있는 논쟁일 것인지 우리는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최고위원들은 일부 국민들에 의하여 혁명공약을 위배했다는 끈덕진 비난을 면치 못하리라고 예상된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이 국정을 정상화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데 얼마만한 도움이 될 것인지 우리는 회의하는 바이다.
  공약 위배냐, 아니냐 하는 것은 결말 없는 추상적 논쟁이라고 우리는 본다. 최고위원들이 국민의 자격으로 공무담임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한 이상 현실적으로는 주권자인 국민이 과연 선거에서 누구를 뽑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다시 말하면 공약 위배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는 주권자인 국민이 무엇을 원하고 누구를 뽑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의 범위는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는 것이 원칙이다. 최고위원들의 민정 참여를 혁명공약 위배라고 비난하는 일부 정치인의 동기가 만약 명분의 규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쟁자의 입후보를 봉쇄하려는 데 있다면 그것은 떳떳한 정치인답지 않은 옹졸한 정신적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를 우두머리로 한 쿠데타세력이 민정 이양 공약을 어긴 것을 합리화하려는 이 사설의 ‘논리’는 참으로 궁색하기 짝이 없다.

쿠데타세력은 1960년 5월 16일 새벽에 발표한 이른바 ‘혁명공약’ 제6항에서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고 밝힌 바 있었다. 박정희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추종자들이 민정 이양을 백지화하고 정치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명백한 공약 위배였다. 그런데도 동아일보 사설은 “공약을 한 사람이 공약 위배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공약을 받은 국민 가운데서 일부는 공약 위배가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사태는 결코 명랑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궤변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공약은 공적인 약속인데 공약을 한 당사자가 그것을 어긴 뒤 ‘공약 위배’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공약을 받은 국민들은 ‘그런가’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나아가서 이 사설은 최고위원들이 군복을 벗고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라고 미화하고 있다. 총칼로 헌정을 뒤엎은 군인들 수십 명이 참여한다고 해서 유권자들이 기성 정치인들보다 더 훌륭하고 민주적인 후보를 선택할 여지가 커질 수 있을까?

공화당 사전조직과 쿠데타세력 안의 갈등

1963년 1월 18일 민주공화당(이하 공화당) ‘발기 선언대회’가 열렸다. 김종필을 비롯한 발기위원 78명은 “자유민주주의의 새로운 기치를 들고 민족중흥의 의기(義氣)를 품고 오직 구국을 위한 선구적 정신으로 일어섰다”고 선언했다. 발기인들은 공화당 위원장으로 김종필을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동아일보는 1월 19일자 2면에 「민주공화당의 발기에 부친다」라는 사설을 올렸다.

  18일 발기인 78명으로써 민주공화당이 발기되었다. 동당(同黨)은 연초에 정치활동이 재개된 후로 처음 정식으로 발기된 정당일 뿐 아니라 5·16 혁명과업을 이어 나갈 것을 표방하고 있는 정당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
  솔직히 말해서 국민의 일부에는 동당에 대하여 회의를 표명하고 있는 경향도 전혀 없지는 않다. 우리는 동당이 국민의 신임을 토대로 삼고 발전하여 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고, 국민의 일부에 있는 회의를 동당이 실증에 의하여 해소하여 줄 것을 바란다.
  첫째로 동당은 관제당이 되어서도 안 되며, 관제당이라는 오해를 추호도 국민에게 받지 않도록 최대의 노력을 다 하여야 한다고 우리는 본다. 동당의 발기인 가운데는 현 최고위원도 있을 뿐 아니라 최근까지 관직에 있었던 사람도 적지 않은 까닭에, 자칫 잘못하면 국민이 관제당이라는 인상을 받기 쉽다는 점을 동당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
  둘째로 동당은 군인당이 되어서도 안 되며, 군인당이라는 오해를 추호도 국민에게 받지 않도록 최대의 노력을 다 하여야 한다고 우리는 본다. 동당 발기인 명단을 보면 상당수의 예비역장교들의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우선 군인당이라는 인상을 씻는 데 성공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젊은 사람 치고 예비역장병이 아닌 사람도 드물 것이나, 최근에 예비역으로 편입된 장교들로써만 당 요직을 채우게 한다면 국민으로부터 군인당이라는 비판을 들어도 할 수 없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
  셋째로 우리는 동당이 타당과 공존 공영할 아량을 배울 것을 당부하는 바이다. 우리는 일찍이 본란을 통하여 앞으로 우리나라의 여당이나 야당이 가져야 할 정신적 자세에 대하여 우리의 소견을 제시한 바 있다. 우리는 동당이 앞으로 여당이 될 것인지 야당이 될 것인지 예언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동당이 타당과 공존 공영할 수 있는 아량을 배우고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발전에서 소중한 일익을 이루어 줄 것을 바라면서, 동당의 앞날에 기대를 걸고자 하는 바이다.

이 사설은 민주공화당 ‘발기 선언대회’를 보고 극진한 덕담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당시 공화당은 사전조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의혹에 휩싸여 있었고, 박정희의 민정 참여와 대통령 출마를 위한 ‘관제 조직’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김종필을 비롯한 육사 8기가 장악한 중앙정보부는 1962년 5월 공화당의 사전조직인 재건동지회를 중앙과 지방에 결성하였다. 재건동지회는 교수 출신 윤천주, 김성희, 황성모, 이호범, 박동윤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다. 윤천주는 재건동지회의 훈련원장을 맡아 혁명이념의 계승 의의, 정당조직의 원리 등에 관한 강의를 담당하였다. 윤천주 외에도 한태연, 문흥주, 이종국 같은 교수들이 재건동지회 사무국 요원의 합숙훈련 강사로 참여하였다. 이미 이때에 창안한 말이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이었다.
  김종필은 지방 대의원과 사무국 요원 등 1천3백여 명을 확보하여 훈련을 종료하자 1962년 12월 23일 워커힐에서 5·16 주체세력들에게 공화당 조직 계획의 브리핑을 하였다. 비밀 창당 작업을 지휘해 온 정보부 차장 이영근으로부터 브리핑을 들은 5·16 주체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무엇보다도 그 중요한 일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뤄졌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과 소외감 때문이었다.
  최고위원들과 쿠데타 주체들을 흥분시킨 건 자기들이 소외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사무국이 대의기구를 통제한다는 이원조직이었다. 최고위원들이 정당에 가입할 경우 그건 곧 김종필 밑으로 들어간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떨이가 날아가고 접시가 허공을 가르는 등 일대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 난장판 속에서도 제기된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김동하, 김재춘, 오정근, 강상욱 등은 재건동지회를 최고회의와 상의 없이 조직한 점, 중앙정보부의 김종필계가 중심이 된 점, 조직체계를 2원화시킨 점, 자금 염출과 관련된 4대 의혹 사건이 파급된 점 등에 강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1962년 12월 27일 박정희는 대통령 출마 의사를 밝혔으며, 김종필은 1963년 1월 5일 육군준장으로 전역한 뒤 9일 중앙정보부장직을 사임하고 공화당 창당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제2대 중앙정보부장엔 최고위원인 소장 김용순이 임명되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2권>, 172~173쪽).

1963년 1월 1일 정치활동이 허용되면서 ‘정치활동정화법’에서 풀려난 구 민주당 구파 중심의 인사들은 1월 24일 민정당 발기 선언문을 발표했고, 2월 1일에는 구 민주당 신파 중심으로 민주당 창당준비대회가 열렸다.

야당이 분열 상태로 정치활동을 재개하는 동안 쿠데타세력은 창당을 둘러싸고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김종필의 독주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최고회의는 1963년 1월 21일과 23일에 잇달아 회의를 열고, 김종필의 당직 사퇴와 중앙정보부의 당 관여 금지, 당 발기위원회 전면 개편을 박정희에게 요구했다.

쿠데타세력 안에서 극심한 내분과 갈등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1월 23일자 2면에 「민주공화당 내부의 혼선」이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혁명주체세력 중심의 민주공화당이 발기한 지 나흘 만에 매우 심상치 않은 내부 동요가 드러났고, 유력한 김동하 장군이 21일 민주공화당 발기준비위원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직을 탈퇴한다고 성명하였다. 김 장군은 “민정에 적극 참여하기 위하여 공화당에 참여하였으나 지금까지 생각했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여지가 없음을 발견하여 국민을 배신할 수 없다는 결론에서” 이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
  참된 근대적 정당의 출현을 바랐던 국민의 입장에서 우리는 민주공화당의 건전한 발전을 충심으로 기원했고 새로운 정당정치의 질서가 조속히 이 땅에 확립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국민적 기대가 무너져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금할 수 없다. 박 의장이 단언한 대로 혁명주체세력 안엔 일절 파벌이 없다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부정되고 있음을 외면할 수 없다. 그들이 표명한 바 국민과 유리된 사리사욕의 정치인이 아니라 진실로 국민대중의 이해(利害)를 같이하는 정치대열이라고 믿을 근거가 분명히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구 정치인들이 정치활동 재개 후에 보여준 종파주의적 난맥상에 개탄하는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거니와 생사를 같이한 혁명주체 인물들 간에도 별다른 명분이나 이념적 차이 없이 서로 비난하고 싸움하는 현실, 당 주도권을 에워싸고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언동을 볼 때, 새삼 우리 민족의 정치적 후진성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여·야 간에 이러한 경향을 규탄하고 경계한다. 야당이 건전하게 발전하지 못하고 분열 현상을 나타낼 때 그와 대립된 입장에 있는 여당이 목전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이를 환영한다든가, 또는 그와 정반대의 경우 야당 인사가 이를 환영하는 태도 역시 대국적으로 보아 찬성할 수 없다. 대통령 선거까지 어느 당이 여당이고 어느 당이 야당이라고 미리 규정짓기 어렵지만, 국민 된 입장에서 건전한 여당과 아울러 건전한 야당의 출현을 바라지 않을 수 없고, 지금 태동 중인 몇몇 정당이 빠른 시일 안에 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굳은 기초를 세우기 바라며, 이러한 차원에서 민주공화당 내부의 혼선 역시 원만한 수습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사설은 쿠데타세력의 내분과 구 정치인들의 ‘종파주의적 난맥상’을 ‘양비론적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발기대회를 연 지 얼마 안 되는 민주공화당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은 김종필이 주도한 ‘사전 조직’과 ‘당 체계 이원화’, 그리고 4대 의혹 사건 때문이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위법과 탈법으로 얼룩진 문제였다. 그에 반해 구 정치인들은 5·16 쿠데타 이래 1년 반이 넘도록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가 1963년 들어 겨우 풀려났다. 쿠데타 이전에도 민주당 신파와 구파를 비롯한 다양한 정파로 갈라져 있던 정치인들이 강요당한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단합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정상적 사고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쿠데타세력의 내분과 구 정치인들의 혼란을 동일시한 동아일보 사설은 심각한 논리적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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