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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의 ‘반공지상주의’동아일보 대해부 2권 -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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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1.1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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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혁명의 가장 큰 목표는 민주화였다. 12년에 걸친 이승만의 독재와 종신집권 기도를 끝장내고 진정한 민주정부를 세우자는 열망이 학생을 비롯한 민중 사이에서 끓어올랐던 것이다.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불을 댕긴 반독재투쟁부터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던 때까지 집회와 시위에서 통일이나 남북의 화해를 주장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성을 대표하는 대학생들과 교수들이 발표한 성명서에도 통일과 분단 극복을 제창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7·29 총선 시기에 시작된 통일논의

1950년대 들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가 식민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하면서 제3세계에서는 민족주의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신생국가들은 1955년의 ‘반둥회의’를 거치면서 식민주의 배척, 내정간섭 반대, 강대국 중심의 방위조약 배격 등을 결의하며 ‘제3의 세력’으로서 국제사회에 부각되었다.

  신생 독립국가들은 유엔에 새로운 회원국으로 가입하였고, 이에 유엔의 판 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당시는 유엔총회에서 매년 한국 통일문제가 논의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유엔의 판도 변화는 한국 통일문제에 대한 토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 밖에 알제리 민족해방운동, 1958년의 쿠바 혁명 등 제3세계 국가의 민족혁명적인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북한 정권도 이 무렵 대대적인 대남 통일공세를 전개하였다. 북의 수상 김일성은 1960년 8월 14일 남북 두 정부 대표로 구성된 ‘최고민족위원회’를 만들어 남북의 경제 및 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거쳐 통일하자는 ‘과도적 연방제안’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자신들이 제공해줄 수 있는 물자와 설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면서, 남북교류를 실시할 것을 적극적으로 제안하였다. 남한 사회는 여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287쪽).

김일성의 대남 제안이 나오기 전인 7·29 총선 기간에 남한에서는 혁신정당과 보수정당 사이에 통일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4월 혁명 직후 허정 과도정부 시기에 국가보안법이 약간 개정되고 언론의 자유와 정치활동의 자유를 확대하는 법들이 제정된 것이 통일문제를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7·29 총선 기간에 활발해진 통일논의는 ‘중립화통일론’과 ‘남북협상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7월 10일자 석간 1면에 「통일방안을 정쟁 도구로 말라」라는 사설을 내보냈다(‘정쟁 도구로 악용하지 말라’의 오식[誤植])인 듯).

  통일방안이 선거의 인기전술로서 악용당하고 있는 것은 걱정스럽다. 통일 방안 같은 것은 당파를 초월해서 국민의 지혜를 총집결시켜 이에 대한 국론을 통일시켜야만 하겠거늘, 혁신세력의 일부 정객들이 통일방안을 정쟁(政爭)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고 있는 것은 통일되어야 한 통일방안을 분열로 재촉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즉, 혁신세력의 정객들 중에서는 “적당한 유엔 감시란 제네바회의 때 우리 정부가 주장한 순수한 유엔 감시와 공산 측이 내놓은 중립국 감시를 절충 합일하려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나라의 지나친 반공 성향은 공산 측 안이라면 무조건 반대 내지 기피하려는 버릇을 만들어 놓았으나 그것은 옳지 못하며 현실을 바탕으로 이성적인 해결을 요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혁신정당의 일부 인사들은 “유엔 감시에 참가할 중립국이란 참전 16개국에다 몇 나라를 보탠 것”이라고 해명하였는데, 이는 같은 정당 안에서도 통일방안에 관하여 각각 다른 의견이 있는 것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일치한 견해가 있기는 하나 그것이 용공적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는 것이니 이를 뒤덮지 않을 수 없는 고충이 숨어 있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여하튼 간에 정당들 간에 의가 갈리기 쉬운 선거 때에 통일방안을 중심으로 시비를 걸려고 하고 있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며 “공산 측 안이라면 무조건 반대 내지 기피하는 버릇” 운운하는 것은 극히 조심하여야 할 언사라고 생각한다. (·····)
  더욱이, 통일문제는 우리가 떠든다고 해서 우리가 희망하는 대로 될 일도 아니요, 국제정세의 동향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다루어질 가능성이 많은 것이니 그렇다고 해서 주체적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보다 더 현명한 주체적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국론을 통일시켜서 국제정세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현명한 노력을 거족적으로 하지 않고서는 민주적 통일을 전취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지금처럼 선거전이 한창일 때에는 통일방안처럼 국론을 귀일시켜야 할 문제에 관해서는 어느 편이든지 싸움 조(調)로 나오지 말 것을 부탁하지 않을 수 없다.

7·29 총선은 4월 혁명의 산물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민주화와 함께 민족의 지상과제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 활발한 토론을 펼치는 마당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이 사설은 혁신세력이 활발히 제기하고 있던 통일론이 ‘정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혁신세력이 비록 소수파이고 선거전에서 열세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유권자들이 그들의 통일론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논의의 마당을 마련하는 것은 언론의 책무이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통일문제는 우리가 떠든다고 해서 우리가 희망하는 대로 될 일도 아니요, 국제정세의 동향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다루어질 가능성이 많은 것”이라고 단정한 뒤 “더 현명한 주체적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통일론을 정쟁의 도구로 악용하지 말라고 한 뒤 통일을 위해 주체적으로 노력하자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학생운동권의 통일운동

사회대중당이 내세운 ‘유엔 감시 하 총선거론’ 말고도 일부 혁신계 인사들은 ‘중립화통일론’을 주장했다. 중립화통일론자들은 한반도를 분단시킨 미국과 소련을 비롯해서 주변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영토 보존’ 협정을 맺으면 한국은 외국과 군사동맹을 맺지 않고 군사원조도 받지 않는 방식으로 영세중립화 함으로써 통일의 길을 열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위의 두 가지 큰 흐름 말고도 ‘남북협상론’이 있었다. 남북협상론자들은 한반도의 분단 원인은 동서 양 진영의 대립 때문이 아니라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 다시 말하면 남북 대립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통일은 외세의 간섭과 개입을 배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7·29 총선을 계기로 민간 차원의 논의가 활발해지자 4월 혁명의 주역인 학생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 1960년 9월 24일과 25일 고려대 정경대 학생회 주최로 ‘전국학생 통일문제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 참석한 학생 대부분이 민족의 자주성에 입각한 중립적 통일, 또는 영세중립화 통일을 주장했으며, 한 학생은 ‘남북총선거준비위원단의 구성을 위한 남북정상회담’까지 언급하기도 했다. 1960년 11월 2일에는 서울대 법대 극동문제연구소가 주최한 기성 정치인, 학자와 학생 대표들의 통일문제토론회도 개최되었다. (·····)
  1960년 9~10월경 학생들 사이에서 통일논의가 고조되면서 학생 통일운동 단체를 만들어 조직적인 통일운동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이러한 활동은 결국 학생운동의 큰 흐름이 계몽운동에서 통일운동으로 전환되어감을 의미했다. 이러한 전환은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학생 집단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같은 책, 289~290쪽).

학생들이 통일논의를 적극적로 추진하자 법무부장관 조재천은 10월 31일 “극히 일부 학생 중에 남북한의 연립정부를 주장하면서 그들이 북한에 가서 북한 학생과 통일문제를 협의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있다”고 말하고 이들을 “공산 측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후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의 한국이 국내적으로 국제적으로 결코 낙관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배후에서 이를 이용하는 세력이 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1월 1일자 석간 3면에는 「31일 새벽 상대생 데모 때 / 불온한 일을 내사 / 몇몇이 북괴 주장 구호도 외쳐」라는 기사가 4단으로 실렸다.

  검찰정보부는 31일 새벽 서울시내 파고다공원에서 약 3백명의 서울대학교 상과대 학생들이 거행한 정객들의 각성 촉구 데모에 모종 불온한 점이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진상 검토를 진행 중이라 한다.
  이날 하오 검찰 수뇌자들은 정태섭 서울시 경찰국장을 불러 동 데모의 상황에 대한 보고를 청취하였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이날 정 국장은 동 데모대원 중 몇몇 사람은 붉은 깃발을 들고 있었으며 “미군과 소련군은 한반도에서 동시에 철퇴하라”는 등 괴뢰 측의 주장과 동일한 구호를 외쳤다는 것이다.
  이 보고에 접한 검찰 수뇌들은 아연 긴장한 속에서 사후 처리를 논의 중에 있으며 경찰에는 철저한 내사를 지시한 것으로 보이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동 데모는 현 정계의 정객들이 4·19 혁명정신을 몰각하고 파쟁만 일삼고 있는 데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거행되었으며 학생들은 만약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4·19 때처럼 다시 거리로 나서겠다는 결의를 발표한 바 있다.


조재천이 통일논의를 하는 학생들이 ‘공산 측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 바로 이튿날인 11월 1일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 발기대회가 열렸다. 서울대 안의 여러 사회과학서클 회원들이 참여한 그 대회를 주도한 학생들은 조직의 이름을 ‘민족통일전선’으로 할 예정이었으나 학교 측이 너무 과격한 명칭이라고 지적하자 민족통일연맹(약칭 민통련)으로 이름을 고쳤다.
민통련 발기대회에서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대정부 건의문’을 발표했다.

  1)기성세대는 남북분단의 비극을 야기케 한 도의적 책임을 통탄하고 통일에 대한 새 세대의 정당한 발언을 묵살 내지 억압할 자격이 없음을 시인하라.
  2)남한의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는 패배의식을 철저히 불식하고 남북한 총선거에 대비하여 공산당과 대항하기 위하여 연합할 기틀을 마련하라.
  3)정부는 조국통일문제에 대하여 현실에 입각한 적극외교로 전환하라. 장 국무총리는 여사한 외교의 일환으로 한국 통일문제만을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과 소련을 특별 방문하고 미·소 지도자와 회담하라.
  4)세계인권선언에 의하여 보장된 인간의 기본권인 통신의 자유를 남북한에 하루바삐 시행하라(같은 책, 292~293쪽).

서울대 민통련은 본격적 통일운동단체로는 처음 결성된 것이었다. 민통련이 국무총리 장면에게 “한국 통일문제만을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과 소련을 특별 방문하고 미·소 지도자와 회담하라”고 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철저한 친미주의자로 알려진 장면이 냉전시대 미국의 적대국인 소련을 찾아가서 한반도 통일에 관한 회담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면은 11월 2일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날 저녁 열린 긴급각료회의에서는 중립화통일론과 남북교류론을 주장하는 학생단체들을 제재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날 밤 국회는 긴급회의를 열어 “남북통일은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의하여 유엔 감시 하에 인구 비례에 따라 자유선거를 실시함으로써 실현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보수언론은 서울대 민통련 발기와 그 단체의 ‘통일론’에 대해 장면 정권보다 훨씬 더 극렬한 반응을 보였다. 동아일보가 11월 3일자 석간 1면에 올린 사설(「너무도 천진난만한 통일론」)이 대표적인 보기이다.

  4월 혁명 이래의 학생층의 동향은 여러 모로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하고 있다. 특히 서울대 학생들의 일부가 민족통일연맹이라는 단체까지 결성하였다고 하는 데 들어서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학생이 정치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마다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학생이 그 본무(本務)인 학업을 집어치우고 정치에 행동으로써 참여한다는 데 찬성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학생이 이승만을 쫓아버린 그 정치적 행위가 옳다고 한다면 민족통일을 위해서 나서는 정치적 행위도 옳다고 함이 옳지 않으냐”고 반박할 자도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이승만을 몰아낸 것이 정치적 행위건 무엇이건 옳다고 하는데 이론(異論)을 가질 자는 없다. 그러나 민족통일이 무조건 지지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그 민족통일운동이 민주통일을 확보할 수 있는 동시에 공산통일을 완전히 배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고로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일부가 결성한 그 민족통일연맹의 민족통일운동이 4월 혁명과 같은 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받기를 원한다고 하면 4월 혁명이 민주 건설을 기필하려는 것이었던 것처럼 그 운동이 민주통일을 확보할 수 있는 동시에 공산통일을 배척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전 국민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연맹의 대정부 및 사회 건의문을 검토하여 보면 그 연맹의 민족통일운동이란 것이 민주통일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고 공산통일을 배격하는 것이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이 안 되는 것은 딱한 일이다.
  그 건의문은 “기성세대는 남북 분단의 비극을 야기케 한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고 민족통일에 대한 새 세대의 정당한 발언을 묵살 내지 억압할 자격이 없음을 시인하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야말로 지나치게 순진한 견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성세대가 일하고 있을 적에 남북이 분단되었으니까 기성세대는 남북을 분단케 한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한 것은 제2차 대전 종결 이래의 내외정세에 깜깜한 소치인 것을 자백한 것에 불외(不外)한 것이기 때문이다.
  (···) 새 세대의 발언이건 누구의 발언이건 간에 그것이 민주통일의 확보와 공산통일의 배격을 내용으로 한 발언이 아니라면 그것이 누구의 발언이건 간에 이는 묵살당하여야만 할 것이고 억압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억압을 면할 수도 없는 것이다. (·····)
  (···) 새 세대의 깨끗한 감성과 새로운 지성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기성세대가 비판받을 만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 않으려는 것도 아니다. 남한의 정당들이 자유선거에 아무 때라도 나서서 이길 수 있는 태세를 만드는 데 서로 협력하여야 한다는 것도 명간(銘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 세대가 남북이 왜 분단되었느냐 하는 것을 철저히 파악하는 데모든 지성과 감성을 총동원해서 알 것을 안 다음에 통일방안을 말한다고 하면 묵살도 당하지 않고 억압도 당하지 않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사설은 “민족통일운동이 무조건 지지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민주통일을 확보할 수 있는 동시에 공산통일을 완전히 배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절대적 선’ 또는 ‘유일무이한 통일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8·15 이래 미군정이 점령한 남한과 소군정이 점령한 북한이 자주적인 자세로 통일을 위해 대화를 하거나 회담을 할 수 없던 시기와 달리 4월 혁명 이후에 적어도 남한에서는 통일 논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마땅했다. 서울대 학생들은 바로 그런 상황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동아일보 사설이 주장하는 대로 공산통일을 배격하는 민주통일을 이루려면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하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대책도 없이 외쳤듯이 ‘북진통일’이나 ‘멸공통일’ 말고는 ‘민주통일’의 방법이 없을 텐데, 그것은 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아일보가 학생들이 열린 마음으로 제시한 통일론을 ‘천진난만’하다고 몰아붙인 것은 자기 성찰이 모자란 독선의 결과였음이 분명하다.

  민통련에서 활동했던 학생들은 통일문제를 남북의 민족적 통합 같은 좁은 차원에서만 사고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내건 구호와 발표한 취지문에는 ‘경제적 비극’ ‘냉전의 제물’ ‘미국 정부의 종속 정책’ 등의 표현이 자주 등장하였다. 이들은 분단 극복 문제를 경제문제,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종속·예속 문제와 긴밀한 관련 속에서 사고하였다. 그런 만큼 이들의 통일운동은 남북통합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강조하고, 그 방법론을 모색하는 차원만이 아니라, ‘한미경제원조협정반대투쟁’과 ‘2대악법반대투쟁’ 등 다양한 정치·외교·경제적 쟁점을 포괄하면서 전개되었다. 민통련이 여타의 학생운동세력과 구분되는 특징은 단지 통일을 소리 높여 외쳤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보다 구조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서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통일운동은 대중적인 관심과 호응을 끌 수 있으면서도, 다양한 현실의 구조적인 문제를 종합적으로 논의하고 제기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같은 책, 296~297쪽).

  서울대 민통련은 1960년 11월 18일 3백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정식 결성대회를 열고 “학생과 일반인들의 통일의식을 고취하고 통일문제에 관련된 다양한 견해와 방법론을 연구 비판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라고 밝혔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인 1961년 5월 초까지 전국의 18개 대학과 경북고등학교에 학생 민통련 조직이 결성되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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