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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의 ‘장면 정권 죽이기’동아일보 대해부 2권 - 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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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1.05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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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3일 오전 11시 45분 제2공화국의 초대 내각이 구성되었다. 절대다수를 민주당 신파가 차지한 내각 명단은 다음과 같다.

  외무부장관 정일형, 내무부장관 홍익표, 재무부장관 김영선, 법무부장관 조재천, 국방부장관 현석호, 문교부장관 오천석, 부흥부장관 주요한, 농림부장관 박제환, 상공부장관 이태용, 보건사회부장관 신현돈, 교통부장관 정헌주, 체신부장관 이상철, 국무원사무처장 오위영, 무임소장관 김선태

이 가운데 민주당 구파는 교통부장관 정헌주뿐이고 무소속 2명, 원외 1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신파였다. 국무총리 장면은 구파를 내각에 기용하려고 했지만 구파가 자신들이 추천한 인사를 쓰고 소환권도 구파 의원총회에 맡겨달라고 요구하자 “독자적인 원내교섭단체를 가진 구파와 연립내각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동아일보는 8월 24일자 석간 1면 머리에 「내우외환의 장면 내각 / 구파·무소속 공세 필지[必至] / 예산 심의를 기점으로 / 원내 안정세력 확보는 지난[至難] / 소장파서도 반발 / 새 교섭단체 구성 고려」라는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 장면 내각의 미래를 ‘비관’

그 기사 옆에는 「장면 내각의 사명 완수를 위하여」라는 사설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부드러운 제목과는 달리 그 내각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내용이다.

  장 총리는, 제2공화국의 초대 내각을 조직하고 그 각원 명단을 발표하였다. 그 얼굴들을 보니 신파가 11명, 구파가 1명, 무소속이 1명, 그리고 원외서 1명으로 되어 있으므로 거국적 인재내각이 아니라, 신파의 단독내각이라고 평해서 무방할 것 같다. 국회의 세력 분포에 비례한 세력균형 내각을 만들 바에야 차라리 신파의 단독내각을 만든 것이 책임정치를 확립하는 데도움이 된다는 점을 간과하는 바 아니나 좀 더 좋은 인재를 모을 수 있는 노력을 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씻을 수 없는 것은 섭섭한 일이다. (·····)
  장 총리가 거국적 인재내각이란 당초의 구상을 내동댕이치고서 신파 단독 내각을 택하는 데 과감한 디딤발을 내딛은 것은 장래에 대한 자신 있는 전망에 기인해 있는 것인지 모르나, 그 진용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가자면 무엇보다도 국회 안의 안정세력을 조성하여야 할 터인데 무소속과 구파의 일부를 떼어다가 신파에 붙인다는 것은 장 총리의 인준 표수를 보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내다보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
  물론, 장 총리의 측근자들로써 조직된 내각인지라 팀워크에 있어서는 여하한 조각보다도 출중한 것이 있을 것이니 하나의 힘을 가진 자가 열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팀워크 플레이를 기대할 수 있다는 데는 마음 든든한 바도 없지 않으나 장 박사가 지도하는 신파가 국민의 불인기를 사고 있었다는 것은, 바로 그 진용의 팀워크 플레이의 그 작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그 팀워크 플레이가 과거에 구파를 치던 그 모습 그대로 만에 일이라도 국민을 상대로 하는 정치에 나타나는 일이 없을까 적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장 박사를 주석(主席) 사공으로 한 ‘장면호’의 사공들은 그 점에 대해서 허심탄회 반성하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요, ‘장면호’의 출범과 함께 새로운 결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에 있어서는 정책에 못지않게 인기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옅은 인기책에 몰두하라는 말은 아니다. 구국·제민할 정책을 끈질기게 탐구하고 이를 성실하게 집행하면서 국민들을 겸허한 태도로써 대한다고 하면 인기는 오르게 마련이다. 민주당에서의 신·구파의 싸움이 어떤 보스 대 보스의 싸움에 기인하였다기보다도 관존(官尊)의식을 가진 집단의 천민적 작풍이 초래한 반발에 더 큰 쟁인(爭因)을 두고 있다고 하는 일면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신파 자체 안에서의 대동단결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일 것이다. 신파가 앞으로 커간다고 하면 그러한 씨앗이 있는 한 그러한 열매를 거두어들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만일에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이는 신파 그 자체의 성쇠뿐만 아니라, 장 내각의 명운뿐만 아니라, 국가적 이익에 대해서도 중대한 지장을 초치할 것이다. 장 내각의 발족에 즈음해서 그의 사명 완수를 비는 나머지 몇 마디를 붙이는 것이다.

8월 31일 민주당 구파는 ‘구파동지회’라는 이름으로 민의원에 원내교섭단체 등록을 했다. 거기 가입한 의원은 86명이었다. 같은 날 무소속 의원 48명으로 구성된 ‘민정구락부’도 등록을 마쳤다. 국무총리 장면은 9월 2일 “구파의 교섭단체 등록은 사실상 분당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장관 다섯 자리를 줄 테니 수락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구파는 아무런 응답도 없이 9월 3일 원내총무에 유진산, 부총무에 이민우와 김영삼을 선출했다.
구파가 독자적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함으로써 민주당이 두 동강이 난 지 이틀 뒤인 9월 2일자 동아일보 석간 1면에는 국회와 장면 정권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사설(「여론을 존중치 않은 민주당 국회와 그 정부」)이 올랐다.

(···) 4월 혁명은 반민주적인 국회를 타파하고 국민의 여론을 존중하는 민주국회를 새로 창건하려는 데 그 목적의 하나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현 제5대 국회는 그러한 의미에서 4월 혁명의 한 결실인 ‘혁명국회’로서의 성격이 요구되고 또한 기대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들은, 지난달 8일에 처음으로 집회하여 지난 말일까지 3주일 동안 행동한 현 국회의 실태를 보고 참으로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윤 대통령의 말씀대로 거국적인 정치자세와 거족적인 협동체제로서 노력한다 하더라도 이 난국을 타개할 역량이 의문시되는 현 국회는 백 참의원의장의 말씀과 같이 자유당 국회의 폐습을 조금도 버리지 못하고 구태의연하다. 의원의 출석률이나 출석시간을 보더라도 옛날 자유당국회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고 의안을 심의하는 태도나 의원 상호간의 협동관계를 보더라도 혁명 전의 자유당 국회의원보다 별로 낫다고 할 점이 없다. (·····)
  또 한편 민주당의 장면 정부는 어떠한가?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장면정부는 민주당국회의 산물이다. 우리들 국민은 앞서 민주당국회를 선출했고 이 민주당국회는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장면 정부를 산출한 터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국회가 ‘혁명국회’일 것이 요구됨과 똑같은 이유로 민주당의 장면 정부도 ‘혁명정부’일 것이 당연히 요청되는 바이다.
  성립된 지 불과 며칠 안 되는 장면 정부에 대하여 우리들은 지금 그 성과나 치적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이제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혁명정부’로서의 현 국무원은 과연 과거 이승만 내지 자유당 정부의 못된 버릇을 탈기(脫棄)하고 여론을 존중하는 참다운 민주적 정부로서 새 출발을 하고 있느냐 함이다. 이 정부에 관해서도 우리는 민주당국회에 대해서와 마찬가지의 비민주적 경향을 현저히 간취할 수 있음을 유감으로 한다.
  첫째로 장면 정부는 우리가 누차 지적한 바와 같이, ‘4월 혁명의 완수’란 민주당의 선거공약을 실천할 진의가 있는지를 의심케 할 정도로 무성의한 것 같다. 3·15 부정선거의 원흉들 처벌에 관하여 이렇다 할 확고한 방침을 세우지 못하고 있음을 필두로, 탈세자와 부정축재자 등에 대해서도 허정 과도정부 이상의 시책을 못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
  둘째로 장면 정부는 재정경비를 절약하여 국민 부담을 되도록 경감함으로 써 민생고를 덜어주는 방향으로 재정경제정책에 일대 부월(斧鉞)을 가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이와 반대로 행정기구를 확장한다든가 관영사업의 요금을 올린다든가 하는 등, 일반 여론과는 배치되는 시책을 쓰려 하고 있으니, 총리비서실의 정원을 33명으로 늘리고 전기요금을 100% 인상하려 하는 따위는 그 하나의 예이다. (···)
  셋째로 장면 정부의 인사행정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우리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여전한 정실 인사와 논공행상 식의 비민주적 인사가 시행되고 있을 것이라 함은 고관들의 저택이 문전성시 하고 그 정권 하의 반민주적 부패 공무원들을 그대로 주저앉히고 있다는 사실로써도 가히 규지(窺知)할 수 있다. 이 역시 장면 정부와 이승만 정부의 거리가 얼마나 먼가에 의문을 품을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일보의 사설은 ‘민주당국회’를 혹독하게 비판하면서도 민주당 구파가 독자적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 데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민주당이 ‘혁명의회’를 주도하려면 단합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구파는 장면 내각 구성에서 소외된 뒤  곧바로 분당이나 다름없는 길을 선택해버린 것이었다. 동아일보와 달리 조선일보는 9월 7일자 석간 1면에 내보낸 사설(「민주당은 신·구파 싸움을 조속히 종결하라」)에서 “우리의 정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 민주당의 신·구파 분쟁이며 이것이 민주당의 우환일 뿐 아니라 제2공화국의 전도를 위태롭게 하는 것임은 국민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 사설은 또 “신·구파는 정정당당하게 현 정국과 의원(議院)정치의 상도(常道)를 통하여 솔직한 의견을 토로하고 또 상대편의 의견을 들어줄 아량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독자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없게 된 행정부는 9월 7일 내무부장관 홍익표, 국방부장관 현석호, 상공부장관 이태용, 국무처장 오위영을 사임시키고 나머지 각료 전원의 진퇴 또는 재배치 문제를 총리에게 일임하기로 결정했다.  1차 내각이 구성된 지 보름 만에 실질적으로 해체하기로 한 셈이었다.  구파를 상대로 내각 참여 교섭에 나선 신파의 수장 장면은 9월 12일 대폭 개편된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구파에서 국방부장관에 권중돈, 부흥부장관에 김우평, 보사부장관에 나용균, 교통부장관에 박해정이 기용되었다. 나중에 체신부장관으로 입각한 조한백을 포함해서 구파는 각료 15명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
동아일보는 9월 13일자 석간 1면 사설(「정국 안정에의 제1보」)을 통해 구파의 입각을 높이 평가하면서 신파의 ‘페어플레이’를 당부했다.

  장 내각의 개각은 구파 측 협조를 얻어 겨우 성공을 거두었다. 즉 구파 측에 국방·부흥·보사·교통·체신 등 5개 의자를 준 데 대하여 구파 측은 ‘적재적소’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개각 공작이 너무 지루하게 끌 때에 생길 정치적 공백을 두려워한 소치라고 볼 수 있으니 구파가 이번에 개각에 표시한 태도는 높이 평가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과연 앞으로 안정세력을 이룩할 수 있는 신·구파의 악수가 이루어질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일말의 불안이 없을 것 같지 않다. 구파 측이 내심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은 내무나 법무 중에서 하나와 재무나 상공 중에서 하나를 받으려고 하였던 노릇이 실지로 뚜껑을 열고서 보니 반식(伴食)이 아니더라도 반식에 가까운 장관들만으로써 다섯 자리를 채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파가 제시한 10명의 입각후보들 명단 중에서도 맹장들은 제외되었고 온건한 인사들이 뽑혔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구파 측의 불만을 살 수 있는 요소들이 없지 않을 줄로 알거니와, 그런데도 구파가 개각에 협조할 것을 결정한 것은 페어플레이로서 존경받을 만한 조치로 보아야 할 것이고 구파의 이러한 페어플레이는 정국 안정을 위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장 총리를 중심으로 한 신파 측 역시 그러한 페어플레이가 없고서는 정국 안정을 기필(期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 않을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장 총리가 총리 인준을 받은 뒤에 조각·개각을 통해서 내려온 정치적 흐름은 식언·권모로써 일관해 왔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언페어플레이로써 가득 차 있었던 것을 반성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일일이 거례(擧例)함을 피하거니와, 앞으로도 장 총리가 그의 본의건 그의 참모들의 압력에 의한 것이건, 과거와 같은 불신·식언·권모를 내동댕이치지 못하고 있는 한 구파에 5개 의자를 주었더라도 안정세력을 구축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없을 것을 예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 사설은 언론이 정파들 간의 세력 다툼을 평가하는 데서 얼마나 편파적일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왜 그런가?

국회에서 국무총리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구파의 김도연은 2표가 모자라 부결되었고, 장면은 가까스로 가결되었다. 4월 혁명의 정신과 이념을 존중하는 신문이라면, 조각권을 가진 국무총리 장면의 정치적 선택이나 반대파와의 타협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천박한 정치적 기준을 바탕으로 장면의 개각을 폄하하고 있다. 개각에서 구파에 할당된 국방·부흥·보사·교통·체신부 장관이라는 ‘5개 의자’가 ‘반식(반찬)’에 가까운 하찮은 자리라는 것이다. 당시의 사회적 통념으로 볼 때 국방부장관과 부흥부장관을 어떻게 ‘한직’으로 여길 수 있을까? 그리고 구파의 입각후보 10명 가운데 ‘맹장’은 누구이며 ‘졸장’은 누구인가? 구파가 진정으로 혁명과업 수행을 위해 개각에 응한다면 자리다툼을 하지는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속물적인 저울로 장관직의 무게를 따지면서 장면이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았다고 몰아붙이고 있다.

게다가 동아일보 사설은 “장 총리가 총리 인준을 받은 뒤에 조각·개각을 통해서 내려온 정치적 흐름은 식언·권모로써 일관해 왔다”고 단정한다. 공정한 언론이라면 명백한 증거들을 들어 장면을 공격해야 할 텐데, 동아일보는 “구체적으로 일일이 거례함을 피”한다는 말로 무책임하게 비켜가고 있다. 동아일보가 구파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신파를 고의적으로 공격하는 성향은 갈수록 더욱 강해지게  된다.

  (···) 구파의 불만은 여전했다. 윤보선은 구파에 준 자리가 빈탕이라고 비아냥댔으며, 김도연은 “어느 부 장관에 누구를 배정해 달라고 시사했는데도 무시했으니 참다운 협조정신으로 보기 어렵다”고 공식적으로 평했다.
  구파는 내각 참여 나흘 만에 분당작업에 착수해 민의원 65명, 참의원 17명에게서 서명을 받았다. 이에 원내교섭단체 등록을 미루던 신파도 민주당 명의로 교섭단체를 공식화했다. 9월 23일 현재 민의원의 교섭단체별 의원 수는 민주당 신파 95, 구파동지회 86, 무소속 모임인 민정구락부 41,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의원 9명 등이었다.
  9월 30일 민의원 의장 곽상훈은 다음과 같이 민주당 정권의 몰락을 경고하였다.
  “우리는 국민을 배반했고 기만했습니다. 국민 앞에 공약한 우리의 경륜을 일보도 실천함이 없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서 힘찬 제2공화국의 건설이란 민족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했습니다. (···) 제2공화국이 당신들의 파쟁으로 멸망할 수도 있고 (···) 정권을 잡는 게 목적이 아니라 정권을 잡아 정책을 구현하는 게 목적이라는 근대 정치인의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권>, 85~86쪽).

4월 혁명의 주체는 아니면서도 그 혁명 덕분에 권력을 장악한 장면 정권에 대해 다수 국민이 바란 것은 3·15 부정선거 ‘원흉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것은 이승만 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정부를 세우기 위한 최우선 과업이었다.


부정선거 원흉 단죄를 망설인 장면 정권

허정 과도정부 시기인 1960년 6월 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한 뒤 부정선거 원흉으로 구속된 사람들의 담당 변호사들은 그들에 대한 처벌 법규인 정부통령선거법 등이 개헌으로 효력을 잃었기 때문에 법원은 면소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살인, 횡령 등의 범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이와 함께 형벌불소급원칙이 부정선거 원흉에게도 타당한가 하는 문 제가 제기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는 하루 속히 특별법을 제정함으로써 혁명과업을 완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미 죽은 법으로는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
  이승만을 옹호하는 등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변호사들이 무죄를 주장하는 가운데, 9월 26일 검찰은 내무부와 경찰 책임자인 최인규·이성우·이강학·최 병학 등에게 사형을, 자유당 기획위원들에게는 4년 6개월에서 15년을, 국무 위원이었던 송인상·신현확 등에게는 12년 등을 구형했다. 언뜻 보면 검사가 중형을 구형한 것 같았지만, 내무부 관련자를 제외하고는 언론에서 주장한 국가변란죄, 국가보안법 등을 적용하지 않고 허위공문서 작성, 직무유기 등을 적용하였는데, 그것은 이 사건의 결말을 시사했다. 장면은 9월 21일 부정선거 원흉 처단 문제는 현행법으로 되는 것을 보고서 결정하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 관계자들과 성향이 비슷했기 때문인데, 정국의 불안은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더 커지고 있다는 점을 그는 간과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187~188쪽).

10월 8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6대 사건’ 판결 공판은 대다수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다. 서울지법 형사1부는 4·19 때의 발포 명령자, 3·15 부정선거 관련자, 정치깡패 등 4월 혁명의 근본적 원인이었던 피고인들에게 1심 형량을 선고했는데, 언론과 대중이 예측한 바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발포 사건에 관해서는 서울시경국장이었던 유충렬에게만 검찰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을 뿐, 사형이 구형된 전 내무부장관 홍진기에게는 징역 9월, 전 대통령 경호관 곽영주에게는 징역 3년을,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는 무죄 또는 징역 8월부터 5년까지를 선고했다.

대중의 기대와 상식을 한참 벗어난 판결이 나오자 10월 8일 마산에서는 1천여 명이 철야데모에 들어갔다. 판결을 내린 부장판사 장준택, 서울지방법원장 나향연, 판결에 관여한 판사들, 그리고 무죄로 석방된 피고인들은 피신했다.

동아일보는 10월 9일자 석간 1면 사설(「공정성이 의문시되는 혁명재판」)을 통해 재판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 발포명령 사건에 대한 판결로 말하면, 홍진기, 조인기 및 곽영주 등 당시의 고급 지휘자들은 경벌하고 유충렬과 백남규 등 일선경관만을 엄벌에 처하는 판결을 내렸다는 것은 정의의 원칙과 책임의 원칙을 무시한 부당한 재판이라고 본다. 행정조직과 공무원 직계(職階)의 명령 복종 관계를 시인한다면 상급 지휘관의 명령이 없이 하급 집행기관인 시경 관리 가 자기의 책임으로 총포를 난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한다. 더구나 3·15와 4·18 및 4·19 사태와 같은 비상사태 하에서 일개 말단 경관이 상급 책임자의 양해 없이 군중에 대하여 함부로 발포했다는 것은 보통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에 관하여 법원은 좀 더 ‘실체적인 진실’을 발견하는 데 노력하고, 고위 책임자에 대한 형사책임의 유무를 정사(精査)하여 공정한 판결을 내렸으면 하는 느낌을 우리들은 품지 아니할 수 없다. (·····)
  무릇 혁명재판은 혁명의 주체세력이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 타당성과 일반 시민이 수긍할 수 있는 구체적 공정성을 지닌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증거의 불충분’을 이유로 하는 무죄의 언도는 검찰과 법원이 최선을 다하여 증거를 수집한 경우에 한하여 정당시될 것이고, 판결의 공정성은 모든 피고인에 대한 범죄사실이 국민 앞에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공범관계에 관한 죄상의 주종(主從)이 명시된 경우에 한하여 타당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소위 6대 사건에 대한 작일의 서울지법 판결에 대하여 우리는 그 공정성을 우선 의문시하지 아니할 수 없으며, 그러한 공정성의 결여가 상급 법원에서 시정될 것을 기대하지 아니할 수 없다.


동아일보, ‘장면 내각 총사퇴’를 요구

10월 8일에 나온 서울지법의 6대 사건 판결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여러 곳에서 폭발했다.

  10월 11일 민의원 앞에선 ‘4월혁명유족회’ 회원을 비롯한 시민, 학생 수천 명이 “살인 원흉이 무죄라면 차라리 우리를 투옥하고 사형시켜라!” “특별법을 제정하여 원흉을 처단하라!”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였다.
  시위의 격렬함은 급기야 시위대가 민의원에 난입하는 사태마저 초래했다. (···)
  환자복에 목발을 짚은 4·19 부상자 50여 명이 앞장선 가운데 의사당에 난입한 시위대는 의원들을 향해 “하루빨리 혁명입법을 완성하라”고 요구했다. 그건 매우 온건한 요구였다. “너희들은 다 나가라! 우리가 정치를 하겠다!” “정쟁 국회는 해산하라!” 등과 같은 구호도 외쳐졌다. 시위대는 민주당 의원들에게 “신구파가 싸우지 말고 화합하라”는 요구도 했다. (·····)
  그들의 항의방법은 졸렬했을망정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는 ‘개헌’으로 치닫고 있었다. 헌법을 개정하고 그에 따를 특별법을 제정하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8일에 석방된 사람들을 다시 체포했으며, 다른 피고인들에 대한 재판을 무기 연기하는 등 잠정적인 변칙 수단이 강구되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권>, 153~155쪽).

동아일보는 10월 12일자 석간 1면 사설(「비상사태를 수습하는 길」)에서 장면 정부가 특별법 제정에 소극적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지난 8일 부정선거 원흉들에 대한 제1심 판결은 제2공화국을 초비상한 국면에 몰아넣고 말았다. (·····)
  지난 11일의 국회 앞 데모는 데모대가 국회의사당까지 점령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러한 사태가 앞으로 장기간 더 계속될 적에 제2공화국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 과연 무엇인지는 환히 내다볼 수 있는 것일 것이다. (···)
  장 내각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다루려고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 판결은 4월 혁명의 거룩한 피를 비웃고 얕잡아 보는 자의 소행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책임은 단지 사법부만이 질 수 없는 것인 것이다. 행정부는 그 책임의 소재를 모두 사법부에만 씌우려고 하나 그 원흉 처단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지금까지 소일해 왔다는 사실은 장 내각이 4월 혁명의 영령과 국민에게 속죄될 수 없는 대죄를 지은 것이 안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혁명과업의 수행은 집행기관인 행정부가 누구보다도 주도권을 잡고서 솔선해서 하여야 할 책무라는 데 다툴 여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판결과 그 판결로 인해 벌어진 이 사태의 장본은 바로 장 내각에 있다고 규정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저 순의(殉義)학생들의 피 값을 정당히 찾으려는 국민적 궐기는 불가피한 것이거니와, 그러기에 장 내각은 국민적 궐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경관을 재무장 않고서는 그 자체를 지킬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장 내각의 임무는 다 끝났다고 단정할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도대체 4·19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경찰을 다시 무장시킨다는 것이 용인될 수 있는 추호의 여지도 없는 까닭이다. 대공투쟁 이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장경관을 남용하는 이승만적 작풍을 근절한다는 데 4월 혁명의 대의가 깃들어 있을진대 그대의를 거역한 장 내각은 그가 존립하여야 할 여지의 극한점마저 넘어섰다고 규정 않을 수가 없는 까닭이다.
  데모대원들 중에는, 혁명과업 완수에의 열성을 3개 권부의 그 어디서도 찾아보지 못한 것에 실망한 나머지, “정권을 우리한테 넘기라”고 구호를 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하거니와, 이는 제2공화국 그 자체까지 부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 제2공화국을 보전하는 한계 안에서 이 사태를 수습하자면 장 내각은 자퇴하고 국회에 적을 두고 있는 인사들 중에서 가장 인망 있는 인사로 하여금 조각을 시키는 방도밖에 없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만약에 앞으로도 총을 국민에게 겨누는 것만이 장 내각의 정권 유지책이 된다고 하면 이는 장 내각의 파쇼화를 뜻할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무력화한 ‘인민의 지팡이’가 장 내각의 연명책의 일구(一具)가 될 수 없는 것도 명백하다. 민주정치의 생명이 대의(代議)와 사리에 있는 것을 모를 자는 없으려니와, 그러기에 대의(大義)에 궁하였고 사리에 진(盡)한 장 내각이 택할 길은 총사직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제2공화국의 유일한 활로인 것이다. 장 내각이 만일에 총칼로써 권운장구(權運長久)를 기필(期必)하려 한다면 이는 장 내각보다 더 소중한 것에 비수를 찌르는 것이 안될 수 없는 것이다.
  장 내각의 명찰(明察)과 영단을 갈구하는 바이다.

동아일보의 이 사설은 하나의 가정법을 바탕으로 장면 내각의 총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그 가정법의 전개과정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0월 11일 데모대가 국회의사당까지 점령한 것 같은 사태가 앞으로 장기간 계속된다면 제2공화국의 운명은 뻔한 것이므로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순의한 학생들의 피 값을 정당히 찾으려는 국민적 궐기는 불가피하므로 장 내각은 경관을 재무장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가정법이다. 그런데 동아일보 사설은 그 가정법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아래와 같이 비약한다.

  “대공투쟁 이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장경관을 남용하는 이승만적 작풍을 근절한다는 데 4월 혁명의 대의가 깃들어 있을진대 그 대의를 거역한 장 내각은 그가 존립하여야 할 여지의 극한점마저 넘어섰다고 규정 않을 수가 없는 까닭이다.”

마치 장면 내각이 이승만처럼 경관을 무장시켜 4월 혁명의 대의를 어겼다는 듯이 단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사설은 의사당에 난입한 데모대원들 가운데 일부가 “정권을 우리한테 넘기라”고 외친 것을 근거로 “이는 제2공화국 그 자체까지 부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 제2공화국을 보전하는 한계 안에서 이 사태를 수습하자면 장 내각은 자퇴”하라고 요구한다. 데모대 가운에 몇 사람이 그런 요구를 했다고 해서 민주적으로 세워진 행정부에 총사퇴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인가?

동아일보의 가정법은 여기서 훨씬 더 비약한다. “만약에 앞으로도 총을 국민에게 겨누는 것만이 장 내각의 정권 유지책이 된다고 하면 장 내각의 파쇼화를 뜻할 것이다. (···) 민주정치의 생명이 대의와 사리에 있는 것을 모를 자는 없으려니와, 그러기에 대의에 궁하였고 사리에 진한 장 내각이 택할 길은 총사직밖에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의 이 사설은 그야말로 한국언론사에 길이 남을 ‘가상(假想) 논설의 대표작’이 될 것이다. 차라리 장면 내각으로는 불안하니 민주당 구파에 정권을 넘기라고 주장하는 것이 당당하지 않았을까?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소가 거둔 미미한 성과

10월 17일 민의원에서 발의된 헌법개정안은 헌법 부칙에 관한 것이었다.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행위를 한 자, 부정행위 항의에 살상 등의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고, 1969년 4월 26일 이전에 부정축재를 한 자에 대한 행정상 또는 형사상 처리를 하기 위한 특별법을 둘 수 있으며, 이 형사사건들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조항을 부칙에 삽입했다.
민의원은 11월 23일 재석 200명 가운데 191명의 찬성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참의원은 11월 28일 재석 52명 가운데 44명의 찬성으로 개정안을 무수정 통과시켰고, 정부는 이튿날 개정헌법을 공포했다.
그에 앞서 민의원은 11월 5일 ‘4대 특별법안(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안,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안, 부정축재처리 특별법안,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안)’을 마련한 바 있었다.
민의원과 참의원을 제일 먼저 통과한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안은 12월 23일자로 공포되었다.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안은 12월 29일 민·참의원을 통과해 12월 31일 공포되었다.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안은 대상자 문제 때문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민의원에서도 논란이 있었지만, 참의원에는 의장인 백낙준을 위시해 대상자가 많았다. 연세대 총장으로 ‘자유당 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 지도위원이었던 백낙준은 10월 8일 판결 전날에 국회내 자유당계를 반혁명세력으로 규정하려고 하는 것에 “7·29 선거에서 당선된 자유당 인사는 당당히 국민의 신임을 받은 것으로 안다”고 말한 바 있었다. 11월 1일 민의원 법사위원회에서 채택한 이 법안으로 최소한 1200~1300명이 공직에서 추방되는데, 이 가운데에는 백낙준과 민정구락부 핵심인물인 이재형 등 민·참의원 약 20명이 해당되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공민권 제한 대상자로 의원들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었다. 제1공화국 정부 수립 직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시행되었을 때에도 군인만은 예외 취급을 받았는데, 공민권 제한 대상자에서도 군인은 제외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군부 내에 오열이 침투했다고 하면서, 군부 지도자를 포함한 전직 고관들의 공민권을 박탈하려는 조치는 대공투쟁을 비난하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리까지 동원되었다. 그런가 하면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 지도위원으로 대학 총·학장 대부분이 들어갔는데도 물러난 총·학장이 1명밖에 안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190~192쪽).   

국무총리 장면과 민주당은 공민권 제한 대상자를 축소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1960년 11월 15일 부정선거 원흉의 한 사람으로 꼽히던 장경근(자유당 강경파, 전 내무부차관)이 일본으로 도주하는 사건이 터졌다. 구속되었다가 보석 허가를 받고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그가 아내와 함께 비밀리에 달아난 것이었다. 그 사건은 혁명입법에 소극적이던 장면 정권과 민주당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부정선거 원흉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여론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장경근 도주 사건을 호재로 삼아 11월 25일자 석간 1면 사설(「책임 있는 정부의 책임의 본질」)을 통해 장면 정권을 호되게 공격했다.

  장면 국무총리는 어제 24일 상오 10시부터 중앙청에서 열린 기자회견 석상에서 원흉 장경근의 일본 도피사건에 대한 정부의 인책 문제에 관하여 언명하기를,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은 현 내무장관의 인책 사직으로 끝난 것”이라 하고, “검찰은 애당초부터 장경근의 보석을 반대했던 터이므로 신민당 측에서 주장하는 조 법무와 이 검찰총장까지 인책하라는 요구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부언했다고 한다.
  (···) 우리가 후일을 위하여 이 기회에 다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책임 있는 정부’의 수반인 장면 씨는 ‘책임내각제 하의 국무원의 책임’의 본질을 정당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첫째로 장면 씨는, 장경근 도피사건 같은 정도의 사건이라면 경찰행정의 책임자인 내무장관만 인책케 하면 족하지 않느냐 하는 유의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보인다. 이것은 장면 씨가 ‘국무원의 연대책임’을 규정한 헌법의 규정과 정신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려 하는 태도가 아닌가 한다. 장경근의 일본 도주사건 자체는 어느 의미에서는 하나의 돌발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병보석 중에 있던 자가 서울서 부산을 거쳐 일본까지 당국의 감시망을 비웃는 듯이 유유히 탈주할 수 있을 정도로 전국의 사찰·수사진이 무능, 태만했고 해안 경비가 소홀했다는 사실은 결코 경경(輕輕)히 간과될 수 없는 중대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무능, 태만하고 기강이 서 있지 않은 정부에 우리들은 어떻게 우리의 생명·재산의 보호와 공산당의 국내 침투 방어를 맡기고 안심하고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의 발생이 적어도 장면 씨의 정치력을 의심케 하며 따라서 장면 내각 전체에 대한 국민의 평가를 떨어뜨리게 하는 중대 사건이라고 우리가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는 진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장면 씨 자신의 실책이요 따라서 국무원 자체의 연대책임 감이라 할 수 있다. 한두 장관의 중대한 실책이 경우에 따라서는 국무총리 내지 국무원 전체의 책임이 된다 하는 데에 책임내각제 하 정부 책임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
  (···) 장면 씨는 현 내무의 해임을 그 자신의 인책방법의 하나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 씨 자신이 책임감을 느낀 나머지, 그가 신임하는 각료 1명을 희생으로 바친다 하는 유의 인책방식을 취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자신의 인책방식’도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장면 씨는 전일 장경근 사건에 대하여 “국민에게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하거니와, 그것은 과거의 실책을 자인한 데 불과한 것이다. 정부 책임의 중요 부분은 그러한 형식적인 사과가 아니고 “그러한 중재 사건을 앞으로는 재발하지 않겠다” 하는 확고한 보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 총리는 그 자신의 책임 문제를 아직도 해결하지 않고 있다고 우리는 지적해 두는 바이다.

이 사설은 장경근 일본 도피사건에 대한 ‘국무총리 장면’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몇 군데를 빼면, 그에 대한 호칭은 한결같이 ‘장면 씨’로 되어 있다. 마치 그를 국무총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인 것일까?

혁명과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반민주행위자 처벌을 위해 수사와 기소를 맡을 특별검찰부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특검부장 물망에 오른 사람들이 몸을 사리면서 사양했기 때문이다. 민의원은 1961년 1월 12일에야 특검부장을 가까스로 선출할 수 있었다. 그 자리를 맡게 된 대구고검 검사장 김용식은 이승만 정권 시기에 대구고법원장이었는데 이승만의 연임 거부로 물러났다가 4월 혁명 이후에 검사장으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30명의 검찰관과 각 도마다 15명씩으로 구성된 조사위원을 중심으로 한 특검은 1월 17일 서울 용산의 육군 헌병감실에서 정식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정부에서 예산이 제때 집행되지 않아 엿새 동안 수사는커녕 운영방침도 세우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하다가 1월 25일경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날부터 공소시효 만료일인 2월 28일까지는 겨우 35일밖에 남지 않았다. 

  특검은 중요 사건 중심으로 수사를 하겠다고 천명했지만, 수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무대 앞 발포명령사건의 경우 홍진기, 조인구, 곽영주 등이 상호 모의를 했는가가 핵심이었는데,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김정렬이 입을 열지 않아 수사는 겉돌았다. 2월 1일 군부의 부정선거 수사에 들어갔으나 장면 정권과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이 반대해 3일째밖에 안 된 2월 4일 벌써 수사 보류 결정을 내렸다. 정치자금 조달 관계의 경우 이기붕 친척인 이기호 제일은행장을 구속했을 뿐, 담당 검찰관을 교체하고 ‘산업 위축’이라는 이유로 자금조달 재벌들에 대해 일절 손을 대지 않기로 결정해 4월 혁명 관련 단체들의 항의를 받았다. 이승만 측근으로 동국대 총장이었던 백성욱도 부정선거 관련 혐의로 구속영장까지 발부했다가 영장 집행을 보류하고, 담당 검찰관을 교체시킨 다음 무혐의 불기소 처분을 해 특검 자체 내에서 심각한 분란이 일어났다.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과 관련한 수사도 비난을 받았다. 윤보선 대통령이 2월 초 이들에 대해서 범위를 좁히라고 말하는 등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권력층의 압력이 들어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공민권 조사위원회’에서 공민권 제한 여부를 심사하는 심사위원회에 회부한 케이스가 너무 적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특검은 2월 13일부터 공민권제한 조사위원들이 심사 대상자들과 금품거래를 했다고 해서 특검관 10명을 각지로 파견해 내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같은 책, 194~195쪽).

3월 1일자 조선일보 석간 2면 머리에는 「특검백서 / 공소시효 완성 /기소율 2.5%」라는 기사가 올랐다. 2월 28일 오후 12시 현재 입건 886건, 기소 31명, 도망 185명이라는 내용이다.

그들 가운데 구속기소된 사람은 전 법무부차관 신언한, 전 민의원 김철안, 전 성균관대 총장 이선근, 전 서울시장 임흥순, 전 자유당 기획위원 이중재 등 26명으로 특검 검찰관 수보다도 적었다. 부정선거 원흉으로 꼽히던 한희석(당시 참의원) 등 13명은 불구속기소되었다.

  거물급의 다수는 이미 일반 검찰청에서 일반 법원에 기소했다고 하지만, 특검은 송사리만 잡고 용두사미 격으로 끝내고 말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공소시효 기간이 너무 짧았고, 정부·국회·법원이 비협조적인 데다가 정치적인 압력이 적지 않았으며, 부정선거를 저지르는 데 앞장섰던 일반 경찰이 태업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와 함께 특검의 내부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특검이 검사와 변호사로 구성되는 바람에 양자의 성격 차이로 혼선을 일으켰다(같은 책, 195~196쪽).

전주지방법원장을 지낸 변호사 문기선을 소장으로 한 특별재판소는 1961년 1월 25일 5개 재판부로 구성되었다. 2월 4일부터 본격적으로 재판을 시작한 특별재판소는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에 일반 법원이 맡았던 부정선거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까지 겸했다.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동한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날까지 특별재판소가 접수한 사건은 103건, 관련자는 263명이었다. 그 가운데 특별재판소가 처리한 것은 4월 17일 내무부사건에 대해 최인규에게 사형을, 이강학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한 경우 등에 불과했다. 내무부사건조차 연합심판부의 확정판결까지 가지 않았으므로 특별재판소가 제대로 처리한 것은 단 한 건도 없는 셈이었다.

동아일보는 1961년 3월 1일자 석간 1면 사설(「용두사미의 특검 업무」)에서 ‘송사리들’만 잡은 특별검찰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검이 이번에 새로 적발·입건한 것은 우리들 국민의 안목으로는 대부분이 속된 말로 ‘송사리’떼에 불과한 자들이고 거물급들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놓치고 말았다. (···) 경무대 앞과 시내 일원에 대한 4·19 당시의 발포 최고 명령자를 특검은 마침내 밝혀내지 못하고 말았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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