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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9 총선과 장면 정부 출범동아일보 대해부 2권 -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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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2.29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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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5월 2일 민의원의 결의에 따라 구성된 ‘국회의원선거법안 기초위원회’는 6월 7일 법안을 상정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대한 동아일보 사설

동아일보는 개헌안이 국회에서 표결되기 전인  6월 15일자 석간 1면에 실은 사설(「대망의 책임내각제 개헌안이 표결되는 날」)을 통해 대통령책임제의 폐단을 극복하는 ‘역사적 개헌안’을 국회가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달라고 촉구했다.

  (···) 4월 혁명 직후에 있어서는 집권자였던 이승만 씨가 인책 하야하고 국회의장 이기붕 씨가 자결하고 사법부의 장이었던 조 대법원장이 인책 사퇴한 이 마당에서 홀로 현 국회의원들만이 염연(恬然)히 남아서 개헌을 행할 명분이 서지 아니했으므로 동 국회의원들도 마땅히 부책(負責) 해산해야 하며 책임내각제로의 개헌은 새로 뽑힌 국회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여론이었고 본란도 또한 그러한 국민의 여론을 대변하여 ‘선 선거·후 개헌’의 원칙론을 주장했던 터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혁명 이후의 우리 사회의 소연(騷然)한 물정과 정국의 불안은 그러한 원칙론에만 구애될 수 없는 실정에 빠졌고 또 현 국회도 자신들의 과거의 그릇된 행장(行狀)을 뉘우치고 국민 앞에 속죄한다는 의미에서 순정(純正)한 책임내각제의 개헌을 단행하고 물러나겠다는 결의를 직접, 간접 표명한 바 있었으므로 우리들은 그들의 의사를 관대히 양해 내지 묵인했던 것이다.
  이번의 책임내각제 개헌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역사적이요,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첫째로 이 개헌안의 통과·시행은, 우리나라의 헌정사상 제1공화정과 제2공화정과를 분획(分劃)하는 현저한 사실(史實)이 된다는 의미에서 ‘히스토리컬’하고 ‘에포크 메이킹’이라는 것이다. 과거 12년간에 걸친, 국민주권 하의 ‘이(李)’ 1인 독재정치는  ‘민주공화국’이란 허울 좋은 간판 밑에 시행된 사실상의 무책임한 ‘개명전제정치’였다. 개정헌법의 통과·시행은 그러한 독재 내지 전제정치에 ‘피리어드’를 찍고 책임 있는 민주내각정치에로의 이행을 약속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
  둘째로 이번의 개헌이 각별히 의미 깊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개헌안에 전 국민의 여론이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과거 두 차례의 개헌을 겪은 바 있었거니와, 그 어느 하나도 국민의 여론을 존중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여론을 존중하기는커녕 도리어 이와 정반대의 방향으로의 민주 역행 개헌이었다.
  이에 대하여 금차의 개헌은 거의 각계각층의 의견을 들었고 또 공청회까지 열어 법안에 대한 전문학자 내지 법률가의 비판을 들었으므로 가위 민주적 방식의 개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전 국민의 이목은 물론이고 자유세계의 관심이 또한 오늘의 개헌안 표결에 집중될 것이다. 이 개헌안이 평화리에 통과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의 정정(政情) 내지 정국에는 심대한 차이가 생긴다 할 수 있다.
  우리들 국민은 지금 이때, 조속한 시국 수습과 정부 수립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본란은 현 국회에 대하여 고도의 지성과 애국심으로써 개헌안의 표결에 임해 줄 것을 거듭 촉구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일부 불순한 개헌 반대 세력이 설령 준동한다 할지라도 의원 제공은 그 최초의 결심을 굽히지 말고 의연히 개헌안 표결에 참가하여 만장일치로써 통과시켜 줄 것을 기대한다. 오늘날 우리들이 처해 있는 객관적 정세는 수유(須臾)의 회의(懷疑)와 주저도 절대로 허치 않기 때문이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개헌안은 6월 15일 국회 표결 결과 출석의원 211명 가운데 찬성 208표, 반대 3표로 가결되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이 확정, 실시되면 헌법 제52조에 따라 민의원 의장인 곽상훈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곽상훈은 이를 거부하고 의장직을 사임하는 바람에 대통령 권한은 계속 국무총리인 허정에게 위임되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에 따라 4대 국회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6월 24일 폐회되었으며, 폐회 직전 각종 국가보안법과 선거법 등의 독소 조항 개정 작업이 이루어졌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권>, 61쪽).


동아일보,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분당을 강력히 주장

6월 22일에 새로 제정된 국회의원선거법은 이승만 정권이 악용해온 ‘입후보 등록 방해’를 막기 위해 주민 추천 없는 신고제를 채택하는 한편 처음으로 부재자 투표제를 도입하고 릴레이식 부정투표 방지 조항을 신설했다.
허정 과도정부는 6월 27일, 제5대 민의원 선거와 초대 참의원 선거를 7월 29일에 함께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후보 등록은 7월 2일 마감되었다. 233명을 선출하는 민의원 선거에는 민주당 305명, 사회대중당 129명, 자유당 55명, 무소속 1,009명이 등록했다. 참의원선거에는 무소속 129명, 민주당 61명, 자유당 13명, 사회대중당 6명이 등록했다.

  민주당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거의 분당되다시피 했다. 신파와 구파 양파는 따로 선거센터를 차렸다. 신파는 구파가 자유당과 야합해 정국을 이끌어가 려 한다고 비난했고, 구파는 신파에 친일행위자가 많은 것을 들추어냈다. 또 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자파 낙천자 후보들을 은밀히 후원했다. 나아가 신파의 유력자나 구파의 유력자가 나오는 지역에 낙천한 자파 후보자를 나오게 한 것은 더욱 비열한 짓이었다. 장면의 용산갑구, 윤보선의 종로갑구, 김도연의 서대문갑구가 그러했다. 이들의 타 지역 선거 지원을 막기 위해서였다. 7월 5일 민주당은 당 공천을 받지 않은 입후보자 115명을 제명했지만, 신·구파의 이전투구는 약화되지 않았다. (·····)
  민주당 신·구파는 7·29 총선을 치를 때 분당 상태나 다름없었다. 이미 1957~1958년경부터 갈등이 심했고, 1959년 정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한층 심했었다. 지주·부르주아 세력을 대변한 한민당-민국당의 후신인 구파는 체질적으로나 인간관계로나 이재학 등 자유당 온건파와 가까운 사이였고, 그들과 제휴 내지 합당도 몇 차례 모색한 바 있었다. 신파는 일제 말에 군수 등을 지낸 자들과 1950년 5·30 선거에서 의원이 되어 (원내) 자유당을 만든 세력이 주축이었으며, 흥사단 등 서북세력과 이철승 등 소장파가 가담하였다. 신파는 경제에 밝았고, 상대적으로 진취적이었으며, 이승만 정권에 대해 공격적이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173~178).

‘한 지붕 두 가족’인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가 치열하게 선거전을 펼치고 있던 7월 12일자 동아일보 석간 1면에는 신파와 구파의 분당(分黨)을 강력히 권유하는 사설(「보수 양당체제 확립의 호기[好機]」)이 올랐다.

선거전이 중반전으로 백열화하여 감에 따라서 민주당 내 신·구파 싸움은 233 선거구마다 싸워지고 있다. 입후보자를 공천할 적에 낙천된 자가 많이 출마한다고 하는 것은 예상되었던 일이요 더욱이 공천 당시의 당의 불합리한 처사는 낙천자들의 출마를 재촉한 경향도 없지 않으나, 민주당의 창당당시부터 싹트기 시작한 신·구파의 싸움이 당세의 확장에 비례하여 성장하여 왔다는 사실에 착목(着目)한다면 각 선거구마다 신·구파의 입후보자들 간의 싸움이 다른 정당이나 무소속 후보자들과의 싸움보다 더 큰 불을 뿜고 있다고 해서 이상히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민주당의 내전은 형식상으로는 내전이지만 실질적으로 민주당은 완전히 둘로 뻐그러진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니 형식상으로라도 신·구 양파는 이 7·29 선거를 계기로 하여 몌별(袂別)하는 것이 국민들 앞에 명분을 떳떳이 세우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의 신·구 양파가 서로 남이 된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거니와, 그러나 이승만의 악독한 폭정에 항거하기 위하여는 이미 남이 된 내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부호조 하라는 국민의 여망에 답응(答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독재정권이 물러난 오늘에 있어서까지 그 신·구 양파가 구태의 연 형식상으로나마 단결을 가장할 이유는 없으며 그 양파가 명실공히 갈라섰다고 하는 것을 행동으로써 표시하는 것이 국민의 공당으로서 마땅히 택하여야 할 명분이 서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신·구파가 완전히 갈라서야 할 이유의 그 첫째다.
  물론, 혁신세력의 진출이 미지수인 지금, 보수세력의 양분은 위험한 일이라고 하는 견해도 성립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설사 혁신세력의 진출이 의외로 많을 것이라고 치더라도, 신·구 양파가 같은 울안에서 피로 피를 씻는 싸움을 안 할 수 없는 사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집 그것까지라도 따로 차지하고서 보수적인 선린 우호적 동맹을 맺어서 혁신세력을 부수는 편이 현책이라고 본다. 이것이 민주당이 둘로 갈라져야 한다는 그 이유의 둘째다.
  233 선거구에서 혁신계 입후보자들의 인기를 보더라도 알 일이려니와, 우리나라에서 혁신세력을 지지하는 숫자란 극히 미미한 것이 판명되었으니 무소속으로 당선될 자도 많이 있을 것이기는 하나 거의 다가 보수에 속한 것을 의심할 수는 없을 듯싶다. 그런고로 7·29 선거의 결과로 신파가 여당이 되건, 혹은 구파가 여당이 되건, 또 혹은 보수적 무소속의 어느 누구가 집권을 하건, 이에 관하여는 수모(誰某)도 정확한 예언을 불허하겠지만, 집권세력에 대한 여러 가지 불평불만을 품는 자들이 신파나 혹은 구파라는 기성세력을 모체로 해서 보수야당을 형성할 것이라는 것은 필연적 세리(勢利)에 속할 것 같다.
  이와 같은 정세는 보수 양당이 정권을 교체하여 나갈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할 수 있는 천부의 기회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천부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할진대 차제에 보수 양당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신·구 양파가 절연(截然)히 갈라지는 것이야말로 이 천부의 호기를 선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신·구파가 갈라서야 할 이유의 그 셋째다. (·····)
  물론, 신·구 양파가 서로 갈라서는 것이 국가의 명운의 현재와 장래를 통하여 해롭다고 한다면 갈라서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갈라서는 것이 현재나 장래를 통하여 국민의 이익에 기여한다는 것이 그처럼 소연(昭然)하다면 촌시를 주저 말고 갈라서야만 할 것이다.

7·29 총선거 국면을 맞아 집권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민주당 안에서는 양대 파벌인 신파와 구파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하려고 사생결단 하듯이 경쟁을 하고 있었다. 동아일보의 사설은 같은 정당 안에서 그런 과열 경쟁이 빚어낼 수 있는 역효과를 정확히 짚고 있다. 그러나 후보들이 이미 등록을 마친 상태에서 한 정당을 둘로 나누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을는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이 사설은 혁신세력의 대중적 인기가 낮은 점을 들어 한국의 정치 구도를 보수 양당체제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소수라 하더라도 진보적 정치세력이 보수정당들을 비판하거나 견제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국무총리 선출 둘러싼 신·구파의 사생결단

7·29 총선거는 이승만 정권 시기인 1954년과 1958년에 치러진 민의원선거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이 덜했지만 막걸리와 고무신이 오가는 등 혼탁한 면도 있었다.
유권자의 연령이 21세에서 20세로 낮추어진 7·29 선거에는 민의원의 경우 1천1백59만여 명의 선거권자 가운데 84.3%인 977만여 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민주당은 다수 언론의 예상과는 달리 유효투표의 41.7%를 얻어 전체 의석 233석 가운데 75%가 넘는 175석이나 차지했다. 무소속은 득표율 46.8%를 기록했으나 당선자는 49명뿐이었다. 혁신계는 사회대중당 4석, 한국사회당 1석에 그쳤다. 자유당은 2명의 당선자를 냈고,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한 이재학을 포함해 구 자유당계 10여 명이 당선되었다.
참의원선거에서 민주당은 득표율 39.0%로 58석 가운데 31석(53%)만을 차지했다. 무소속이 20석(득표율 49.3%)이나 가져갔다. 자유당 후보는 4명이 당선되었지만 구 자유당계를 포함하면 20여명이나 되었다. 상원 격인 참의원의 의석 분포 때문에 민주당 정권은 부정선거 원흉이나 부정축재자 처벌 등 당면 문제를 처리하는 데 애로에 부닥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민주당이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자 신파와 구파 간에 집권을 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아일보는 8월 2일자 석간 1면에 「정계의 재편성과 민주당의 책임」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 제4대 국회를 ‘자유당 국회’라고 일컬을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의 제5대 국회를 우리는 ‘민주당 국회’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국민 일반의 (···) 민주당 지지는 우리나라의 짧은 정치사상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이례(異例)의 현상이요, 현대국가의 통례에서도 후진·독재국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그 선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파격의 사상(事象)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국민대중은 그와 같이 열광적,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거의 맹목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기에 이르렀던가? 문제는, 보는 사람에 따라 그 견해가 각각 다르겠지만 우리의 소견으로는, 1)민주당 이외에는 현재 신뢰할 만한 정당이 없다는 것이 첫째의 이유이겠고, 2)민주당이 다년간 이 독재정권과 자유당 부패세력에 대항하여 민권투쟁을 행한 공로가 적지 않다는 것이 그 둘째의 이유이겠고, 3)의원내각정치제도로 헌법이 개정된 지금, 여하한 정당·정부든지 잘못하면 국민은 언제든지 갈아낼 수 있는 만큼, 우선 동당에게 정권을 맡겨보는 것이 정치상식이라 하는 생각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
  민주당의 압도적 승리와 군소 정당 정파 및 무소속의 전면적인 패배는 (···) 민주당의 정치적 책임을 그만큼 가중케 했다 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객관적으로는 우리나라 ‘정당 재편성의 기운’이 이미 충분히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란(本欄)은 앞서, 민주당의 신·구파가 그 생리상 또는 호흡상으로는 이미 갈라진지 오랬다고 간취됨에도 불구하고 국민 앞에서는 억지로 ‘비분당(非分黨)’을 허식·가장하고 있는 사태에 대하여 일언의 비판을 가하고 양파 공동의 적인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이 붕괴·타도된 오늘날 어색·부자연한 동서(同棲)생활을 억지로 계속함보다도 뚜렷한 명분을 세워 각각 별개의 정당으로 분리·발전함이 이 나라 민주정치와 정당정치 발전에의 정도라 함을 시사한 바 있었다. (·····)
  유권자대중이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 양파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이유가, 양파의 분립·몌별을 통한 보수 양대 정당 간의 정책 경쟁이 시행되어야만 이 나라의 책임·민주정치가 창달될 수 있을 것이라 하는 정치의식에 연유한 것이었는지의 여부는 논자의 판단에 매였다 하겠지만, 적어도 오늘의 현실을 기초로 하여 우리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면, 민주당에 대항하여 그 시정(施政)을 감시하고 그 가능한 실정을 문책할 수 있는 유력한 재야정당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제2공화정 하에서 민주당 양파가 그 부자연한, 형식상 표면상의 연계를 여전히 계속한다는 것은 시정의 개선과 책임·민주정치의 발전상 백해무일리(百害無一利)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물론 민주당 양파에 대하여 그 분립·몌별을 적극적으로 권장할 하등의 권한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책임·민주정치를 규정한 헌법의 규정과 정신을 민주당의 각파가 십분 음미하고 이 나라 민주정치의 발전에 다소라도 기여코자 한다면, 양파의 분립 여부와 그 가부에 관하여 동당의 간부들은 대승적 견지에서 좀 더 진지한 연구와 검토가 있어야 할 줄 안다.

동아일보가 7·29 총선 기간에 이어 그 직후에 다시 ‘민주당 분당론’을 제기한 것은 대중의 공감을 살 수 있는 현실적 논리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는 보수 양당으로 갈라서서 생산적 경쟁을 할 수 있는 인적 기반이나 정치적 이념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이 점은 신파의 장면이 국무총리가 된 뒤에 새삼스럽게 심각한 문제로 드러났다. 형식적인 연립정부에 참여한 구파는 인사 문제와 정책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신파와 대립하다가 결국 분당해서 야당이 된 뒤에도 장면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전력을 다하는 쪽으로 치닫게 된다. 거기에는 보수 양당의 건전한 경쟁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은 명목상 국가원수일 뿐 국정에 대한 실질적 권한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부여된 가장 강력한 힘은 국무총리 지명권이었다. 7·29 총선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윤보선, 김병로, 허정 등이 대통령 물망에 올랐다. 선거가 끝나자 민주당 신파는 대통령직은 구파에게 주고 국무총리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뜻을 명백히 밝혔다. 그에 비해 구파 쪽에서는 윤보선과 김도연이 총리가 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구파 내부에서 표 대결을 벌인 끝에 대통령에 윤보선, 총리에 김도연을 내세우기로 결정이 되었다.

8월 5일자 동아일보 석간 1면 머리에는 「민주당 구파 분당을 선언 / 양당제로 책임정치를 구현 / 대통령·총리를 겸점(兼占) / 두 파 안분(按分)내각은 국가에 유해」라는 기사가 크게 나왔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동아일보가 강력히 주장해온 민주당 분당론을 구파가 먼저 외치고 나온 것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상식으로 여기고 있듯이, 동아일보가 민주당 구파의 ‘대변지’라는 사실이 여기서 입증되었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그 사실은 신파가 집권하고 구파가 야당이 된 뒤에야 비로소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8월 12일 오전에 열린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 선출을 위한 무기명 비밀투표가 실시되었다. 민주당 최고위원이며 민의원인 윤보선이 재석의원의 3분의 2가 넘는 208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위는 29표를 얻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김창숙이었다. 윤보선은 “당선된 이상 편파적인 입장을 떠나 총리 지명을 공정히 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 윤보선은 8월 16일 자신과 같은 구파 소속의 김도연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하면서 헌법 제16조에 따라 민의원에 동의를 요청했다.

8월 17일 오후 열린 민의원 제6차 본회의에서 국무총리 인준 표결을 한 결과, 김도연은 재석 224표 가운데 찬성 111표, 반대 112표를 받았다. 재적(227석) 과반수인 114표에서 3표가 모자라서 인준은 부결되었다.
8월 17일 대통령 윤보선은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하고 국회에 동의를 요청했다. 19일 오후에 열린 민의원 제8차 본회의에서 장면은 재석 225표 가운데 찬성 117표, 반대 107표, 무효 1표로 재적 과반수보다 3표가 많은 찬성으로 국회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집권 경쟁에서 신파가 천신만고 끝에 승리한 것이었다.

  장면의 인준을 위해 신파는 구파 의원들을 신파로 끌어들이느라 만만치  않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아슬아슬한 결과엔  무소속 의원들의 표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총리에 대한 대통령의 지명이 발표되기 전인 13일 공동행동을 추구하던  20여 명의 무소속 의원들은 신 내각의 구성에 관해 장면과 김도연에게 정책질문서를 보냈다. 두 후보 모두 ‘거국 내각’을 강조하긴 했지만 무소속의 내각 영입에 대해선 장면이 ‘무소속 포함’을 말한 반면, 김도연은 ‘정당정부’를 강조함으로써 무소속 포함 가능성을 배제했다.
  김도연 측은 무소속은 행동 통일이 안 될 것이라고 보고 가볍게 대응한 반면, 장면 측은 매우 성의있게 대응한 것이 그런 차이를 낳았다. 무소속 그룹은 16일 밤 참석 인원 20명 중 12 대 6으로 김도연 총리 인준 거부를 결의하였다. 이를 알게 된 김도연 측은 17일 투표 직전 무소속을 우대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권>, 75~76쪽).


동아일보는 8월 20일자 석간 1면에 「장 총리의 중책」이라는 사설을 싣고 아래와 같이 당부했다.

  어제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장면 씨는 제2공화국의 초대 국무총리로서 민 의원의 인준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씨가, 그 영광을 얻기까지의 우여곡절은 여하튼 간에, 제2공화국의 출범을 담당할 첫 뱃사공으로서 등장하게 된 것은 온 국민이 다 같이 경하해서 마지않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만큼, 의원내각제에 의한 첫 정부를 조직·운영하여야 할 그의 책임은 중차 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 민국을 창건하고서 어언간 12년, 국정의 악순환은 이승만이라는 그 사람에 못지않게 대통령임기제헌법에도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고 함이 국민의 거의 일치된 견해이지만, 앞으로 만일에 이 의원내각제헌법 하에서도 그러한 악순환이 그냥 반복된다고 하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다시 또 하나의 위경(危境)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장 총리의 영관(榮冠) 위에는 대단히 무거운 책임이 걸려 있다고 하는 이유는 그러한 데 있는 것이다. (·····)
  (···) 우리가 장 총리에게 하고 싶은 부탁은, 지금까지의 모든 감정이나 인연으로부터 벗어나서 글자 그대로 ‘명경지수’의 심경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헌 집을 허물고서 새 집을 지으려는 마당에 좋거나 나쁘거나 헌 집에의 미련이 가시지 않을 것은 인지상정에 속할 것이나, 과거의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데 실패한다고 하면 새 술을 새 포대에 넣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부정선거 원흉을 처단하는 데 있어서나, 부정축재를 환원하는 데 있어서나, 신·구파를 다루는 데 있어서나, 어느 때 무엇을 하든지, ‘나는 대한민국 의원내각헌법 하의 초대 정부의 국무총리’라고 하는 일념에만 확고히 입각해 있을진대, 종래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수 있는 새 정치에의 새 구상을 짜낼 수 있지만, 만일에 그러지 못하고 종래의 감정과 인연의 포로로 생활을 여전히 계속한다고 하면, 종래의 국정의 악순환은 가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악화될는지도 모른다. (·····)
  물론 이번 총리 인준 공작에 있어서는 의자에 관한 밀약이 없지 않았으리라고 짐작되거니와, 그러나 사적인 약속을 충실히 지키려고 하다가 국민에의 공약을 실천할 수 없는 조각이 만에 일이라도 된다고 한다면 이는 적은 범죄를 피하기 위하여 큰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 될 것이니 일국의 총리로서 택할 일이 아니다. 사사로운 약속도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의 공약이 더 중대하기 때문이다. (·····)
  장 총리는 제2공화국에서의 정쟁이 반드시 여·야 간의 국민복지 향상 경쟁이 되도록 하는 데 있어서도 성공할 것을 희망하고 또 믿어서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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