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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동아일보 대해부 2권 -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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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2.0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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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로 대통령 당선을 노리던 이승만은 1959년 3월부터 자유당을 중심으로 정부통령선거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5개 부 장관을 경질하면서 선거 주무장관인 내무부장관에 최인규를 임명했다. 이승만은 최인규를 중심으로 한 ‘6인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외무·재무·법무·교통·체신부 장관이 포함되었다.


최인규 중심의 부정선거 사전 준비

1958년 5월 민의원선거에서 당선된 최인규는 국회 예산결산위원장, 교통부
장관을 지낸 뒤 몇 달 만에 내무부장관으로 기용되었다.
 
  (···) 자유당 내에서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최후로 써먹을 총알’이라는 말이 오갈 만큼 최인규는 3·15 정부통령선거에서의 역할이 기대되던 인물이었다. 또 동아일보가 “자유당 내의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다만 경무대와 이기붕 의장에게만 충성을 바쳤다”라고 입각 평을 할 만큼 이승만에게는 더 없는 충복이었다.
  최인규는 이승만의 기대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행동했다. 그는 취임사에서부터 “공무원은 누구나 국가원수인 이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며, 차기 선거에서는 이 박사, 이 의장을 정부통령으로 꼭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라고 말함으로써 공무원의 선거 개입을 공개적으로 독려하였다. 곧이어 그는 35세의 서울시경 국장 이강학을 치안국장에 임명하고, 각 도 경찰국장도 바꾸었으며, 이어서 총경급 대규모 인사를 대폭적으로 단행했다. 5월에는 7개 도지사를 바꾸어 선거체제에 돌입했다.
  1959년 6월에 최인규는 일종의 3·15 부정선거 예행연습이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대법원 판결로 6월 5일 경북 영덕과 강원 인제에서, 6월 23일 경남 울산을구와 경북 월성군에서 재선거 또는 일부 재선거가 있었는데, 특히 울산을구와 월성군에서는 경찰이 공공연하게 선거를 지휘했다. 어느 지역에서나 자유당이 압승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97~98쪽).


이승만과 이기붕은 일찌감치 선거체제를 갖추려고 최인규 등을 통해 자유당 전당대회를 1959년 6월 29일에 열도록 했다. 1960년 5월로 예정된 선거를 9개월이나 앞둔 시점이었다. 전당대회는 당연히 이승만을 대통령후보, 이기붕을 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을 지지하는 구파와 현직 부통령 장면을 미는 신파 간의 심각한 갈등과 대립 때문에 정부통령 선거를 위한 전열을 정비할 수 없었다. ‘당분규수습 10인위원회’를 만들어  구파와 신파의 갈등을 조정한 민주당은 1959년 11월 26일에야 후보지명대회를 열 수 있었다. 966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구파와 신파의 경쟁에서 조병옥은 484표를 얻어 481표를 받은 장면을 제치고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다. 장면은 이번에도 부통령후보 지명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심상치 않은 병을 앓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인지 이승만은 1959년 12월 11일 기자회견을 열고, “내년의 정부통령선거는 농번기를 피해서 해야 할 것”이라면서 “어느 달에 하는 것이 좋겠다고는 말 안 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의 이런 ‘지시’에 따라 정부는 1960년 2월 1일, 선거일을 3월 15일로 결정했다고 발표한 뒤 3일 그 사실을 공고했다. 그때는 조병옥이 위장 수술을 받으러 1월 29일 미국 월터리드육군병원으로 떠난 직후였다. 입원한 상태의 조병옥은 “3월 조기선거는 등 뒤에서 총을 쏘는 격”이라고 비난하면서 반대했고, 민주당은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두 차례나 ‘조기선거반대집회’를 열고 자유당의 ‘부정선거 음모’를 규탄했다.

병상의 조병옥과 장면은 2월 7일 정부통령후보로 등록했다. 그에 앞서 2월 2일 재야세력은 ‘반독재민주수호연맹’을 결성하고 2월 8일 대통령후보에 장택상, 부통령후보에 박기출을 지명했다.

“2월 15일 밤 조병옥이 수술 끝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1956년 5월 정부통령선거 직전에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돌연사한 것과 똑같은 일이 되풀이된 것이었다. 이승만의 종신집권과 자유당 1당 독재를 끝내줄 위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바라던 국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悲報)였을 것이다.

법정 등록기한이 지나서 민주당은 새로운 대통령후보를 낼 수가 없었다.


대구의 고둥학생들이 일으킨 ‘2·28 데모’

1960년 2월 29일자 동아일보 조간 3면 머리에는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는 내용이 기사가 나왔다.

  1200명 학생들이 시위 / 학원을 정치도구화 말라고 / 경찰과 충돌로 20여 명이 부상 / 200여 명 연행됐다 거의 귀가

  [대구에서 이만섭 특파원 발] 민주당의 부통령후보 장면 씨의 선거연설이 열릴 무렵인 28일 하오 1시 20분경 경북고등학교, 대구고교, 경북여고(3시반 남대구서 앞) 학생 1천2백여 명은 열을 지어 도청으로 몰려들어 “신선한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 학생들은 일요일인 데도 불구하고 전원을 등교케 한 학교 당국의 지시가 장면 씨의 강연을 못 듣게 할 목적 하에 정치적인 영향을 받은 처사라고 지적하고 있다.
  학생들은 급히 출동한 정사복경관 2백여 명의 제지로 일시 경찰관과 충돌하여 경찰관의 구타로 인하여 20여 명의 중경상자를 내는 불상사를 빚어내었고 데모 중이던 학생 2백여 명은 경찰에 연행되어 데모 사건에 관하여 문초를 받았었는데(5시 30분 현재) 그 중 30명만 남기고 귀가시켰다.
  한편 경북 도지사는 이 사건 수습에 대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학원 당국에 맡기겠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민주화운동사 1>에는 대구 ‘2·28 데모’에 관한 내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경북고는 3월 3일에 치르게 되어 있는 학기말시험을, 대구고는 토끼사냥을, 경북대사대부고는 임시수업을, 대구상고와 대구여고는 졸업생 송별회를 한다는 것이 일요일 등교의 이유였다. 그런데 다른 학교들은 대부분 27일에 일요 등교 지시가 내려졌지만, 경북고만 25일에 지시가 내려져 ‘3일’ 간의 작은 ‘소요’가 조성되었다. 학생들은 일요 등교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금방 눈치 챘다. 26일 아침 대부분의 학생들이 불평하기 시작했다. 각 학년 학생위원을 중심으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일요일에 등교할 이유가 뭐냐?” “무엇 때문에 우리들이 정치적 이용물이 되어야 하느냐?” “아니다. 학교의 지시에 따르자” 등 의견 대립이 발생하여 시끄러웠다. 2월 27일 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의 학도호국단 간부 10명이 회합을 갖고, 일요 등교에 항의하는 데모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2월 28일 낮 12시50분, 경북고 학생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가 운동장 조회단에서 결의문을 읽은 뒤, 등교 조치에 항거한 경북고생 8백여 명이 교사의 제지를 박차고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구시내 중심가로 쏟아져 나갔다. 뒤이어 대구고·경북여고·경북대사대부고 학생들이 데모를 감행했다. 대구시내 1천2백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불법선거에 항거하는 봉화를 든 것이다. 이들은 경찰과 충돌해가며 경북도청에 이르렀고, 여기에서 선언문을 낭독했다. 바로 이 순간 정사복 경찰이 출동했고 학생들은 일시적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학생들은 다시 대열을 지어 3시경까지 데모를 벌였으며 120여 명이 연행되었다. 경찰은 민심이 자극될 것을 우려하여 중앙의 지시에 따라 이날 밤으로 학생들을 모두 석방조치했다. 그러나 주모자들에 대해서는 미행을 붙이고 교사들로 하여금 매일 가정방문을 하게 하는 등 감시의 손길을 늦추지 않았다. (·····)
  1960년 2월 28일 대구시내의 남녀 고등학생들이 벌인 시위는 역사적으로 의의가 큰 사건이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와 같이 동원되는 강제시위가 아니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독재에 맞서 벌인 최초의 반정부시위였다. 이후 한국의 학생들은 30여 년 동안 불의와 부정, 독재에 맞서 시위 등을 통해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
  3월 2일 이강학 치안국장이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라고 주장하며, 학생들의 저항을 무마하려고 했으나, 그것으로는 학생들의 투쟁을 잠재우지 못하였다. 이미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외침은 전국적으로 메아리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4월 혁명의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다(104~106쪽).


민주당, 이승만 정권의 ‘선거방법 지령’ 폭로

3월 3일 민주당은 비밀리에 입수한 이승만 정권의 ‘선거방법 지령’ 내용을 폭로했다. 유령선거인명부를 작성하고 자연기권, 권유기권으로 총 유권자의 4할을 사전 투표시키고, 나머지 6할은 3인조, 9인조 등으로 상호 감시투표를 강행함으로써 자유당 정부통령후보가 적어도 85%의 득표율을 올리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이 정부 기관들을 통해 전국의  고위 공무원들에게 몰래 전달되었다.

동아일보는 3월 5일자 석간 1면에 「선거법 지령의 진가(眞假)를 밝히라」라는 사설을 실었다.

  민주당이 ‘정부의 선거방법 지령’의 내막을 폭로하게 되자 정계에는 커다란 파문이 일어나고 있다. 자유당과 정부는 3일 이 문제에 대한 법적 조치를 선거가 끝날 때까지 보류하기로 한 바 있었으나 민주당 측이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게 되자, 당초의 방침을 변경, 금명간 최 내무장관으로 하여금 민주당에 구체적 증거 제시를 요구하는 공한을 발송케 하는 동시, 선거 전에라도 이 문제를 규명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다. 이에 대하여 민주당 측은 우선 유권자명부의 재열람 실시를 촉구하고 비밀지령에 관한 증거는 밝힐 단계가 되면 제시하겠다고 언명하였다. 민주당이 폭로한 ‘정부의 선거방법 지령’은 이미 널리 보도된 바이지만, 만약에 그 내용이 사실이고 또 그 내용대로 실천된다고 하면 우리사회에서는 공명선거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자유·비밀선거의 제반 원칙을 파괴하고 들어간 것이다.
  이 ‘비밀지령’의 진가에 대해 여당은 그것이 가공적인 조작이라 하고, 최 내무는 “민주당의 경찰에서 부정선거를 지시하였다는 발설을 앞으로 선거전의 패배가 자명하여지면 이번 선거를 포기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허위공작한 것”이라고 언명하였지만 이 ‘지령’의 내용을 폭로한 민주당 측에서는 그것이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니 자유당은 그 이상 자기 기만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응수하고 있다. 워낙 이 문제는 고도의 정치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객관적으로 해명되기 어려운 것이요 민주당이 그러한 정보를 얻은 것은 상급 관청이 하급 관청에 극비리에 지시한 문서자료에 의한 것으로 추측되는 바 그러한 증거란 사후에도 충분히 인멸할 수 있는 것이고 보니, 법적으로 수사를 단행한다 하더라도 시비곡직을 가리기 어렵다.
  그러나 제3자의 입장으로 볼 적에 이 비밀지령의 내용이 가공적인 조작이요 민주당이 창작한 것으로 보기에는 그 구상이 너무도 치밀하고 그 내용이 너무도 박진(迫眞)하다 할 것이니 우리는 민주당에 그만한 정도로 다재 유능한 각본제작가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다가 여당이나 정부 당국이 제 아무리 자가 변명에 급급한다 하더라도 과거 10여 차에 걸쳐서 실시한 재선거, 그 중에서도 특히 보성, 양산, 영일, 영주 등 4개구에서 실시한 재선거에 있어서 이번 ‘선거방법 지령’에 나타난 수법이 많이 사용되어 왔다는 것은 천하가 공지(共知)하고 있는 사실이고 보니 정부는 그런 지령을 발했으리라는 혐의를 우선 받게 된다고 해서 조금도 나무랄 바 아닐 것이다. (·····)
  이 사건에 대한 법적 조치가 언제 어떻게 취해지며 또 어떻게 낙착이 이루어진다는 문제와 별도로, 우리는 폭로된 부정선거에 관한 방법의 ‘지령’이 하나도 실천되지 않기를 요구한다. 만약에 이 지령의 내용이 다소라도 실천된다고 하면 자유당과 정부는 전적으로 그런 지령을 발했다는 의심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이제 자유당과 정부는 그 자신이 범인인가 아닌가를 행동으로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이르렀다. 중앙선거위원회의 김 위원장은 그 지령이 사실이라면 대단히 유감된 일이라고 말하고 “중앙선위로서는 공명선거가 되도록 최대한 노력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 언즉시야(言則是也)이지만 우리는 중앙선위가 과거에 취해온 편파적인 태도에 비추어 그 공명선거 언명을 어느 정도까지 믿어야 할는지 커다란 의문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부정선거의 방법이 ‘지령’되었다고 옥신각신하고 있는 차제, 중앙선 위로서는 경각심을 바짝 높여 만의 일이라도 그런 지령이 시행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음을 지적한다.

동아일보는 이 사설이 나간 이튿날(3월 6일자)에도 「비밀지령 안 했다는 입증은 정부·여당이 하라」는 사설을 다시 실었다.

(·····) 정부와 자유당에서는 (···) “우리가 부정선거의 비밀비령을 내렸다는 구체적 증거가 어디 있느냐, 대라”고 민주당에 요구할 것 같은 태도로 나오고자 하는 모양 같지만, 그것은 실은 사물의 선후와 본말을 전도(顚倒) 한 처사가 아닐까 한다. 민주당에 의한 정부·여당의 부정선거 비밀지령 폭로 내막의 진부가 장차 소송상에서 문제가 될 때에 입증 책임을 지게 될 자는 소송법의 원칙상 민주당이라 함은 당연하지만, 그러한 소송을 통한 사안의 진부 규명은 장시일을 요하는 만큼 선거를 불과 8, 9일 앞둔 지금 당장에 유효적절한 방법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정부와 여당은 민주당이 폭로한 바와 같은 그러한 비밀지령을 한 일이 없다”는 정치적 입증뿐이라고 우리는 본다. (·····)
  (···) 정부와 여당에서는 우리가 알기에는, 1952년 여름의 정부통령선거  이래 오늘날까지 8년 동안을 각종 선거에서 선거 간섭과 반대파 탄압을 계획적, 조직적으로 자행해 온 실적과 습성을 지니고 있다. (···) 이와 같은  과거의 경력을 지닌 집권층이 이번의 비밀지령 폭로에 접하여 “무슨 증거가 있느냐, 대라”고 상대편에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상식에 위반된다.
  (···) 이번 3·15 선거가 공고된 날부터 오늘 현지까지 우리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온갖 사태는 민주당이 폭로한 문제의 ‘부정 비밀지령’의 내용과 마치 부절(符節)을 합친 듯이 들어맞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장택상 씨 등에 대한 등록 방해, 영등포구청 앞에서의 폭행 사건, 대구·전주·부산·광주 등지에서의 장면 후보에 대한 선거연설의 방해 내지 관권간섭, 대구에서의 학생 데모 사건, 각계 공무원과 교원들의 선거운동 투입 사실, 한강백사장의 사용 거절 등등은 모두 동 ‘비밀지령’의 프로그램 그대로 연출된 것이 아니냐 하는 느낌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현실 하에서 정부와 여당은 과연 정치적인 입증 책임을 폭로자인 민주당에만 지울 수 있겠는가? (·····)
  정부와 여당의 그런 부정비밀지령을 내린 바 없다 하는 해명과 입증은 말로만은 될 수가 없다. 그들의 유일한 입증은 오직 ‘실천’뿐이다. 즉, 민주당이 폭로한 그와 같은 ‘부정비밀지령’이 허위라 하는 사실 증명은 동 지령의 ‘내용’과 정반대되는 행위를 정부와 여당이 이제부터라도 실천하는 길뿐이라 함이다. 그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선거법의 제 규정을 성실히 준수함으로써 이번 선거를 자유·공명선거로 이끄는 데 있는 것이다.


폭포처럼 쏟아진 부정선거 고발 기사와 사설

동아일보는 기자 이강현을 영호남과 충남 일대에 보내 은밀히 진행되는 부정선거 준비작업을 취재하도록 했다. 그가 보낸 기사는 3월 6일자부터 선거 전날까지 날마다 연재되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 자유당 후보에 찍어야 한다는 유령편지 보내기, 공무원마다 번호표 10매씩 확보하는 운동, 3인조 9인조 조직, 민주당 선거위원의 협박에 의한 사퇴, 공개투표의 연습, 야당 집회에 가는 자의 졸업 취소, 낡은 사건 들춰 협박하기, 탈당 강요, 야당원 셋집에서 쫓아내기, 멋대로 노는 괴한이 미관을 이유로 야당 벽보 떼어 버리기, 대리투표 및 무더기표 조짐, 심지어 ‘이 대통령’이라는 제목으로 초등학교 아동들에게 작문을 쓰게 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기기묘묘한 것들을 파헤쳤다.
  선거일이 다가옴에 따라 야당 탄압은 갈수록 노골화하여 운동원을 구타, 연행하고 유세장에서 공공연히 마이크 선을 절단하는 것쯤은 예사였고 아예 유세를 못하게 방해하기 일쑤였다. ‘괴한’으로 불리는 자유당 폭력배들은 전국을 배회하면서 주민들을 협박하고, 위에 말한 갖가지 부정선거 준비를 표면에 노출시켜 나갔다(<동아일보사사 권 2>, 285쪽).

정부통령선거 열흘 전부터 동아일보 지면은 정부와 자유당이 자행하는 부정선거 음모와 책동,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의 유세장에 몰려든 청중, 그리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면서 시위에 나선 학생과 시민에 대한 기사로 뒤덮였다. 그런 기사들 가운데 핵심적인 것을 요약한 내용은 이렇다.

(···) 투표일을 10일 앞둔 1960년 3월 5일 처음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공명선거를 요구하는 집단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오후 서울운동장에서 장면 부통령후보의 정견발표회에 참가하였던 시민 중 고교생을 주축으로 하는 1천여 명은 오후 5시 30분경 인사동에서 화신을 지나 광화문의 본사(동아일보사-인용자) 앞까지 시위행진하면서 “부정선거를 배격하자” “장 박사를 다시 부통령으로 뽑자” “썩은 정치 갈아보자”는 등 구호를 외치고 만세와 애국가를 부르고, 시민들도 이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이날 가랑비 속에서도 서울운동장에는 20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장면의 연설을 듣는 도중 45분간이나 정전으로 마이크가 꺼지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에 10여 명의 청년들이 혈서를 쓰는 등 여당의 선거 방해를 규탄하자 노한 청중들의 흥분에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강연회가 끝난 후 귀가하는 장면의 뒤를 따라오던 시민들은 종로4가에서 혜화동으로 가는 장면을 보내고 도 흩어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지프차를 타고 가두 선전하는 엄상섭 의원을 따라 왔는데 인사동 어귀에 이르자 경찰이 제지하면서 해산을 명령하였다. 여기서 학생과 경찰이 충돌하자 학생들은 다수의 위력으로 경찰을 물리치고 시위행진으로 들어가서 광화문까지 전진했으나 여기서 증원된 정사복과 기마경찰에 제압되어 대부분은 피신하고, 엄상섭 등 민주당원 4명과 학생 20여 명이 종로서에 연행되었다. 동서에는 수백 명의 무장경관이 몰려드는 등 한때 삼엄한 분위기였으나 선거를 고려하였음인지 밤 11시 반에 전원 석방되었다.
  대구의 학생데모가 전주곡이었다면 이 데모는 직접적인 촉매의 구실을 하였다. 서울의 동정(動靜)은 전국적이니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3일 후인 8일 대전에서는 1천여 명의 고교생이 시내 여러 곳에 분산 집결하여 장면의 유세장인 공설운동장으로 전진하면서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고 외쳤다. 경찰은 수많은 인원과 백차, 소방차까지 동원하여 이들을 제지, 교사 1명과 학생들을 대전고교 교실에 강제 수용하였다. 이날 부산에서는 데모를 모의하던 고교생 16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훈계 방면된 사건도 일어났다.
  10일에는 충주와 수원에서도 각각 3백여 명의 고교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같은 날 대전에서는 상업고교생 약 3백명이 이날 새에 동료 학생들이 연행된 데 항의하여 대전경찰서로 향하다가 제지되었다.
  이 같은 민중의 항변을 마이동풍으로 흘려버린 자유당 정권은 각종 불법 무법을 전국적으로 자행하여 투표용지를 조작하고 3인조 조직을 강화하는가 하면 테러를 다반사로 하였고 심지어 야당원을 살해하는 만행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본보는 총력을 다하여 그들의 흉행(兇行)을 낱낱이 폭로하는 한편 이를 과감히 규탄하여 뭇 사람들의 공명을 샀다(같은 책, 285~287쪽).

동아일보가 보도한 데모 기사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3월 11일자 석간 1면 머리에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실린 「전국에 번지는 학생 데모」였다. 부제목은 「학원 자유 외치며 수원·충주에서도 / 각지의 테러·방해 사건 보고 접종(接踵) / 전율 속의 선거 분위기 / 야, 민주구국 위해 끝까지 투쟁 방침 천명」이다.

  3·15 정부통령선거는 투표일을 만 4일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야당 선거운동원에 대한 테러와 무자비한 선거운동 방해로 완전히 공포 분위기 속에 빠지고 말았으며 특히 민주당 여수시당 재정부장의 피살 사건은 전국 유권자를 전율 속에 떨게 하고 말았다. 민주당 각 도당에서는 테러때문에 선거운동이 마비 상태에 빠졌고 선거 참관인이 모 측의 공갈 때문에 사퇴하고 있어 중앙당부에서 참관인을 급파해 줄 것을 요구하는 전보가 쇄도되고 있다. 야당은 다만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에 대항하여 도시에서 연달아 일어나는 학생들의 데모 사건에만 용기를 얻어 선거를 끝까지 끌고 나가고 있다는 형편이며 앞으로도 끌고 나갈 작정이라고 한다. (·····)
  ‘학원의 자유’를 주장하며 ‘부정선거 배격’을 부르짖는 학생들의 데모는 지난 2월 28일의 대구 학생 데모 사건을 시발점으로 하여 전국 각 중요 도시에 불길처럼 퍼져 가고 있다. 상식을 벗어나 기형성(奇形性)을 여지없이 노정(露呈)하고 만 3·15 정부통령선거전은 드디어 감수성이 빠르고 정의감에 불타는 청소년학생들의 순결무구한 가슴 속의 피를 끓게야 하고 만 것이다.
  경찰의 제지를 무릅쓰고 물불 가리지 않으며 일어선 학생들의 용지(勇志)는 총 개머리판에 의한 구타에도 쉽게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들의 반발은 투표일이 가까워 옴에 따라 더욱 치열화해지고 있으며 갖가지의 선거부정 발생에 울분을 참지 못하는 일반 유권자들의 분개심과 정비례하여 한층 백열화하여 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3·15 투표일에는 대도시의 교통정리를 헌병에게 맡기고 순경들을 모두 투표장 경비에 돌려쓰겠다는 정부의 계획도 일반에게는 명백한 납득이 가지 않으려니와 이와 같은 일련의 ‘비정상적’인 처사가 아마도 어린 가슴의 고동을 한층 격화 자극시키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아일보는 3월 7일자부터 선거 당일인 15일까지 부정선거에 관한 사설을 거의 날마다 내보냈다. 3월 11일자 석간 1면에 실린 사설(「천인이 공노할 만행」)은 특히 논조가 강렬하다.

  3·15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유당과 그 정부 산하 각종 대소 공무원의 위법행위와 폭행은 날로 심하여 양심 있고 선량한 국민들은 눈 뜨고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요새 며칠 동안 도하(都下) 제 신문에 보도된 사실만 보더라도, 전국 각지에서 민주당의 선거운동용 벽보와 현수막 등을 밤중에 찢어버리고 그 운동원에게 폭행을 가하며, 유권자에게 투표권의 양보 내지 기권을 강요하며, 훈련용 모의투표용지란 구실을 붙여 대량의 투표용지를 위조하고 부락민을 강제 동원하여 투표 훈련을 시킨다는 등, 법에 없는 온갖 장난을 자행하고 있다.
  요새에 일어난 테러 사건만 하더라도, 지난 6일 하오 5시에는 민주당 전북 김제갑을당부 사무실에 형사들이 뛰어들어 조 모 의원의 비서 유 씨를 무수히 난타했다고 하며, 재작 9일 상오 11시에는 폭한 30여 명이 돌을 들고 달려들어 민주당의 이동선전반이 천안으로부터 온양으로 가는 길을 막고 위협했다고 보도되고 있다. 경남 사천에서는 자유당 선전용 지프차를 타고 나타난 괴한 3명에게 민주당 선거운동원이 구타당하여 중상을 입었음에 도 불구하고 의사란 의사는 모두 치료를 거절하고 있다고 전하며, 경북 상주에서는 동읍 국회의원이요 동군 당부위원장인 김 모 씨기 지난 8일 시골로 다니면서 선거유세를 하다가 밤 10시경 귀가하던 도중 괴한 수명으로부터 단도로 옆구리를 찔려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되고 있다. 이와 같은 위법 불상사건은 보도된 제 사실 중의 일부에 불과하며, 또 보도된 제 사건으로 말하더라도 그것은 실제로 발생한 대소 제 사건의 극히 적은 일부분에 지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
  묻노니, 현 정부와 그의 여당은 유수한 선량한 국민을 괴롭히고 반대파를 탄압·구타하며 심지어는 타살까지 해가면서 그의 정부통령후보를 강제로 당선시킬 떳떳한 공익상의 이유가 있는가. 그들은 어찌하여 유권자를 설득시키거나 훌륭한 정치로써 국민의 자발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오직 폭력으로써 반대파를 짓누르고 위협과 강제로써 투표를 모으려 하고 있는가. 그와 같은 폭력선거도 ‘선거’라고 할 수가 있으며, 그러한 폭력에 의한 당선도 ‘당선’이라고 볼 수가 있겠는가? (·····)
  불법행위를 감행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코자 하는 단체는 그 명칭이 무엇이건 ‘불법단체’라 아니할 수 없고, 범죄를 사주하거나 묵인함으로써 그 사욕을 채우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단체는 그 표방하는 주의가 무엇이건, 사회에서는 이것을 ‘범죄단체’라고 보는 데에 주저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고 위에 지적한 여러 가지의 불상사건이 우리의 현행 국법상 분명히 불법행위 또는 범죄행위에 속한다 함을 현 정부와 자유당 간부들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줄 안다. 자유당은 최근의 ‘선거공약’(신문광고)에서 국민도의를 앙양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하겠다는 주장을 내걸고 있지 않은가.
  자유당과 현 정부는 십상팔구, 국민대중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때리면 맞고 차면 쓰러져도 할 말이 없고 저항할 하등의 기력조차 없는 중생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선량한 시민에 대한 위와 같은 인간 이하의 학대가 이를 무엇보다도 잘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 국민은, “법이 올바로 시행되는 사회라면 형무소에 들어갈 사람들”에 의하여 지배받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들에 의한 정치 지배를 되도록 조속한 시일 내에 벗어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투쟁을 전국민의 이름으로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 우리는 또한 이와 같은 사람들이 멀지 않아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게 될 것을 확신하여 마지않는다. 자유와 행복은 오직 용감한 국민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3·15 선거 당시 자유당 대통령후보 이승만은 85세의 ‘극노인’이었다. 21세기 현재보다 한국 남성의 평균수명이 훨씬 낮던 시절, 그 나이에 그가 국정을 바르게 운영할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후계자로 정한 부통령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지 마다하지 않았다. 1948년 8월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폭력과 테러, 심지어 조봉암에 대한 ‘사법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1960년 3·15 부정선거 국면에서 정신적으로 파탄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멸뿐이었다. 동아일보의 사설은 그것을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다. 이승만은 이 사설이 나간 지 46일 만인 4월 26일 민중혁명의 거센 파도에 밀려 경무대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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