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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사법살인’과 동아일보동아일보 대해부 2권 -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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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1.24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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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사법살인’의 신호탄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갑자기 사망한 상황에서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총 유효표의 23.8%인 216만여 표를 얻은 조봉암은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로 떠올랐다. 조봉암은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5개월 뒤인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창당을 주도했다. 진보당은 수탈없는 계획경제체제 확립과 책임 있는 혁신정치 단행을 내걸고 한국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표방했다.

진보당은 12월 초순부터 1957년 11월 말까지 전국 여러 지역에서 지부당결성대회를 열었는데, 사복경찰과 우익단체들의 방해 또는 테러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야만적인 탄압과 테러에 대해 진보당이 항의하였지만 민주당과 당 시 일간신문은 이를 묵살했다. 신문들은 연이은 진보당에 대한 테러를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짧게 다루었고, 이는 진보당의 김달호 의원의 발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김달호 의원이 국회에서 ‘진보당 도당 결성대회’에 대한 테러사건을 보고하자, 김준연 등 민주당 의원들과 자유당 의원들은 그것을 무시한 채 김 의원의 평화통일 발언이 대한민국 국시를 도끼로 찍는 것과 같다는 등 평화통일론을 공격했고, 오히려 김 의원을 조치해 줄 것을 의장에게 요구할 정도였다. 국회 내무위원회는 테러사건을 조사한다고 했으나 그해 12월까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
  (···) 진보당의 약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이승만과 자유당의 행보는 더욱 바빠졌다. 민주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당은 이념적으로 조봉암보다는 이승만에 가까웠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진보당의 평화통일 주장이 현실 정치에서 공공연히 제기되고 상당수의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확대해가는 것을 ‘무력통일’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체제 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더구나 이승만으로서는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다시 조봉암의 도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매우 불안스러웠다. 이러한 위기감은 조병옥과 민주당도 가지고 있었다. (·····)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하여 이승만과 자유당 그리고 민주당은 1958년 5월에 실시될 예정인 제4대 민의원선거에 진보당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어떤 조치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는 결국 ‘진보당 사건’으로 이어졌다. 진보당이 제도정치권 안에서 별 저항 없이 제거된 이유는 바로 ‘반공분단정치’에 동조하는 민주당의 묵시적인 동의와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67~69쪽).

1957년 9월 검찰은 “조총련계 간첩 정우갑과 관련된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조봉암을 소환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혁신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박정호, 김경태 등이 간첩 혐의로 긴급체포되었는데(‘남반부 정치변혁공작대 사건’ 일명 ‘간첩 박정호 사건’) 그때도 조봉암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제4대 민의원선거(5월 2일로 예정)를 앞둔 1958년 1월 12일 서울지검 부장검사 조인구는 갑자기 기자회견을 요청하고 박정호 등 10여 명에 대한 공소 내용을 설명했다. 조인구는 “평화통일이란 구호는 남한의 적화통일을 위한 방편으로서 대한민국의 존립을 부인하는 것이다. ‘북진 없는 정강정책을 갖는 정당을 조직하라’는 김일성의 지령 내용은 바로 진보당의 확대 공작에 귀착된다”라고 발표했다.

  서울시경은 1958년 1월 11일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조봉암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월 12일 박기출, 윤길중, 조규희, 조규택, 이동화를, 1월 13일 조봉암, 김달호를 각각 구속하였다. (···) 같은 날 검찰총장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진보당은 불법 결사단체”라고 발표했고, 서정학 치안국장은 진보당 간부 구속에 대해 “이들 구속된 진보당 간부는 이미 송청한 박정호·정우갑·허봉희 등 간첩사건 수사 중 진보당 간부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뚜렷해져 구속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문들은 이러한 수사 당국의 성명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매일같이 조봉암이  북괴 지령문을 보고 불태웠다느니, 아무개 간첩과 접선했다느니, 조봉암 집에서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다느니 하고 대서특필했다(같은 책, 71쪽).


  동아 사설, 진보당 간부들을 ‘간첩’으로 단정

동아일보는 1958년 1월 13일자 석간 3면 머리에 ‘진보당 사건’에 관한 ‘사찰진’의 발표를 크게 보도했다.

  일요일의 사찰진 돌연 긴장 / 진보당 간부급에 검거 선풍 / 윤길중 등 5씨에 구속영장, 3명은 이미 집행 / 12일 정오 현재

  11일 하오부터 돌연 비밀활동을 개시한 사찰진에서는 진보당 간부 5명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영장을 법원 당국에서 정식 발부받고 즉시 집행에 착수, 12일 정오 현재 그 중 3명에 대해서는 이미 집행을 완료하였다고 한다.
  이번 사건 수사에 대해서는 경찰 검찰을 막론하고 사찰진 전체가 전에 없던 ‘극비 함구령’ 속에서 일체 윤곽 언급조차 회피하고 있는데 이번의 검거 대상자는 진보당 간사장 윤길중 씨를 비롯한 간부급이라고 하며 그 중 전기윤 씨 외 2명은 12일 정오까지에 이미 구속되었고 나머지 수 명의 체포도 시간문제로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사건의 수사는 과거 오는 민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진보당에 대한 침투공작을 전개해오던 수 건의 괴뢰 ‘간첩 사건’과 또한 현재 수사 계속 중인 간첩 사건 수사에서 괴뢰들이 부르짖는 소위 ‘평화통일운동’과 직접 호응한 움직임과 나아가서는 ‘남북협상’까지 획책하려던 구체적인 일부 인사들의 비밀 언동이 드러남으로써 마침내 ‘국헌’에 위배되는 국가보안법 저촉 행위로 단정코 정식 입건 착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이 기사는 ‘사찰진’ 가운데 누가 발표한 수사 내용인지를 밝히지 않은 채, 진보당 간부급 여러 명이 ‘괴뢰들’과 연관된 행위를 함으로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거나 입건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무죄추정 원칙’을 무시했음은 물론이고, 진보당의 정치적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문제에 대해 심층취재도 하지 않고 사찰진에서 ‘전해 들은’ 내용을 ‘공표’한 것이다.

그 기사 옆에는 「침투 대상은 진보당 / 최근 괴뢰 간첩 사건 집계」라는 기사가 3단으로 실려 있다.

동아일보 1월 15일자 조간 1면 머리에는 법에 따라 진보당 등록을 취소할 수 있다고 ‘공보실 당국’이 ‘시사’한 내용이 보도되었다. 같은 면에 자리 잡은 사설(「진보당 총검거와 / 명확한 국시 파악」)은 진보당 사건을 “간첩 사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 이하 중견간부들이 검찰 당국에 의하여 총검거되었다는 사건은 통속적 의미의 뉴스 가치가 큰 것으로서 국내외 각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한국의 정치적 세력 분포의 비중으로 보아서 실질상으로는 하나의 작은 사건, 예(例)하면 최근 연속 검거된 간첩 사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석함이 정당할 것이다. 즉 진보당의 세력이라는 것이 국회 내에서 203석 중 근근 1석을 차지함에 불과한 것임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혹은 원외에 있어서의 잠재적 세력이 적지 않다는 관측도 있으나, 동당 창설 이래의 표면적인 활동상황이라든가, 자금적 곤란의 정도 등을 종합 검토한다면 그 존재가 미미하다고 평정(評定)함이 타당한 것으로, 금번의 총검거가 한국의 정치적 발전에 대한 영향을 과대평가할 이유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
  (···) 조 씨와 그 일파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반공통일을 국시(國是)로 하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국민의 성찰을 요하는 일임은 틀림없다. (·····)
  대체로 두 가지 견해가 전문(傳聞)되고 있는데 하나는 “화평통일이 국시에 위반된다”는 설이요, 또 하나는 “간첩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견해다. 우리의 본의는 사소한 자구를 가지고 흠을 잡자는 것도 아니요, 또는 두 가지의 견해가 결국적으로 동일한 관점을 약간 정도를 달리하여 표현됨에 불과하다고 봄이 타당할는지 모르거니와 이 점에 관하여 당국의 좀 더 명확한 해명이 필요한 것을 주의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간첩 사건과 관련성을 가진 화평통일론은 국가보안법 위반의 혐의를 갖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정곡(正鵠)을 얻은 견해라고 볼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 소위 ‘정치성 개재 여부’ 문제는, 바꾸어 말하면 2, 3개월을 앞에 둔 민의원 총선거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검찰 당국은 전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신임하고자 한다. 민주주의정치 하에서 범죄 수사는 사건 자체의 평가에서 행하여질 것이요 결코 어떠한 정치적 책략에 수사·검찰이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화평통일’이라는 구호 자체만으로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은 당국자도 언명하고 있는 만큼 국민여론도 이를 명백히 규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공산괴뢰들이 수 년 래로 소위 ‘화평통일’을 선전구호로 내세우고 있으며 소위 ‘화평통일촉진위원회’라는 인형적 기관을 조직하여 맹렬한 모략 공세를 취하여 온 것은 세간 주지의 사실이요, 이러한 선전 공세는 모스크바의 세계전략의 일부분이며 그 지령에 의하여 북한괴뢰가 움직이고 있음도 불문가지의 일이다. (·····)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화평통일’ 선전이 이면에서 북한괴뢰집단과의 묵계 하에 조출(造出)된 것이었다든지, 간첩과의 접선 또는 자금 후원 하에 된 것이라면 이는 명백히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사설은 위험천만한 가정법을 바탕으로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과 중견간부들을 ‘북한괴뢰의 간첩’이라고 전제한 뒤 “간첩 사건과 관련을 가진 화평통일론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갖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설이 나오기까지 조봉암과 진보당 중견간부들이 북한의 간첩이라는 증거를 검찰이나 경찰이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발표된 바 없었다.

동아일보의 공식 견해인 이 사설이 더욱 위험한 까닭은 진보당이 국회에서 겨우 의석 하나를 가진 군소정당이므로 ‘총검거’가 ‘작은 사건’에 불과하며, “간첩 사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수가 적은 정당의 구성원들은 사법부의 최종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언론에서 ‘간첩’이라는 ‘유죄 판결’을 받아도 좋다는 뜻인가?

동아일보는 위의 사설이 나간 지 다섯 달 뒤인 1958년 여름에 이승만 정권의 국가보안법 개정에 강력히 반대하는 사설을 여러 번 내보냈다. 6월 11일자 사설(「국가보안법 개정법안을 보고」)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 국가보안법 개정안은 그 고유의 영역과 헌법의 원칙을 일탈한 위헌·부당한 입법이요, 이런 법률이 만일에 제정·시행된다고 가정한다면, 더구나 이것이 정치적으로 악용된다면, 그 결과는 가공할 것이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민주공화국의 기초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보당 간부들이 ‘간첩’ 혐의로 구속된 것은 국가보안법이 개정되기 이전이었고, 나중에는 개정된 보안법, 곧 더 악법이라는 평가를 받던 법에 따라 재판을 받았다.


조봉암을 ‘간첩’으로 조작

검찰은 1958년 2월 8일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관계자들을 기소했다. 동아일보는 2월 9일자 조간 3면에 그 사실을 2단으로 짤막하게 보도했다.

  ‘진보당 사건’의 제1차 구속피의자 10명은 8일 서울지방검찰청 조인구 부장검사에 의하여 기소되었다.
  2일간의 구속만기를 마친 이들 중 1명만이 불구속으로, 나머지 9명은 모두 구속기소되었다.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 씨는 ‘간첩’ ‘간첩 방조’ ‘국가보안법 위반’ 등 3 죄과로, 기타는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2월 21일자 동아일보 조간 3면에는 조봉암과 ‘접선’한 ‘간첩 양명산’이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3단으로 나왔다.

  육군 특무부대에서는 수일 전 서울시내 모처에서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 씨와 접선한 거물급 대남괴뢰간첩 양명산(변명[變名]) 김동섭·52)을 검거하였다고 21일 발표하였다. 양의 검거는 진행 중인 ‘진보당 사건’ 수사에 새로운 방증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주목을 끌게 하고 있는데 이날 발표된 바 취조 결과에 의하면 양은 휴전 전후를 통해 북한을 10여 회 왕래하면서 괴뢰중앙당 연락부처 박길룡(현 괴뢰 동독대사)과 접선, 동 지령 하에 공작을 전개하면서 88년(서기 1955년-인용자) 초에 6·25 당시 납치된 전 남전 사장 박승철 씨 부인이 경영하는 시내 남산 소재 무허가 음식점에서 조봉암 씨와 3,4차에 걸쳐 밀회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하며 조 씨가 검거 송치된 후 조 씨의 조카와 상면하여 택시 속에서 현금 거래한 사실도 있어 그것이 북한괴뢰의 ‘공작금’을 조 씨의 석방운동비로서 교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방금 추궁 중에 있다고 한다.

육군 특무부대는 1958년 2월 8일 대북첩보기관인 HID 공작요원 으로 남북교역을 하던 양이섭(일명 양명산)을 연행하여 여관 등에 불법 감금한 상태에서 북한의 지령 및 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하였다는 혐의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조봉암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였음에도 특무부대는 양이섭으로부터 자백을 받아 양이섭과 조봉암을 간첩죄로 검찰에 송치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은 갑자기 수사권도 없는 특무대가 담당하고 나섰다는 것에서부터 이승만 정권의 조작 의도가 짙게 깔린 것이었다. (<한국민주화운동사 1>, 72쪽).

2월 25일 공보실은 진보당의 등록을 공식으로 취소했다. 공보실장 오재경은 “진보당이 유엔 결의에 위반되는 통일방안을 주장했고, 진보당 간부들이 북의 간첩·밀사·파괴공작조들과 항상 접선했다는 것을 이유로 진보당 등록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3월 13일 첫 공판에 이어 3월 27일 제2회 공판이 열렸다. 검찰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에 대해 이런 주장을 펼쳤다. “평화통일이라는 용어는 북한괴뢰가 사용하고 있는 문구인데 진보당에서 이 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봉암의 <평화통일에의 길>에서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현 대한민국의 해체·해산을 전제로 하며 그것은 대한민국 헌법의 파괴 내지 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대한민국을 부인하고 국헌을 위배하며 정부를 참칭(僭稱)하는 것이 되므로 진보당의 통일론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3권>, 190~191쪽).

공판에서 진보당 측은 “북한이 평화통일론을 들고 나온다면 우리는 수세에 몰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 능동적으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면서 “진보당의 통일론은 결코 공산당의 전술에 넘어간 것도, 그들의 주장에 동조한 것도 아니다”라고 검찰을 반박했다.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단정하기가 어려워진 데다 조봉암과 진보당 관계자들이 박정호 등 간첩과 접선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게 되자 검찰이 조봉암을 확실한 간첩으로 몰기 위해 새로운 ‘간첩’으로 등장시킨 것이 양명산이었다. 


조봉암 1심 무죄, 2·3심 사형 선고

‘진보당 사건’ 1심을 맡은 서울형사지방법원은 1958년 7월 2일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의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는 한편 조봉암과 양이섭의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간첩죄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제3조를 적용해서 각각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김일성과 내통해서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운 사건이 단순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판결이 나온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7월 4일자 조간 3면에 「진보당 사건 판결공판 스냅」 상자기사로 내보냈다.

  재판부서 거리낌 없이 말하라고 부탁 / 방청석선 박수와 환성 / 검찰, 모여든 ‘사찰진’에 쓴 웃음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켜 오던 ‘진보당 사건’의 피고 23명에 대한 1심 판결이 선고되는 2일 하오 2시 재판장이 엄숙한 표정으로 “지금부터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 양명산 피고인 들 23명에 대한 국가보안법, 간첩, 간첩방조 혐의 등 사건의 판결을 언도한다”는 선언이 있자 공판정 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고 카메라맨들이 수없이 터뜨리는 플래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수감번호 ‘231’이라고 앞가슴에다 써 붙인 조봉암 피고를 위시해 거의 피고 전원이 하얀 옥양목으로 만든 아래위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도 산뜻하게 깎고 있어 비교적 윤기(?)가 흐르는 건강한 모습들이었다.
  “피고인 조봉암, 동 양명산을 각 징역 5년에, 동 김정학과 이동현을 각 징역 1년에···” 이렇게 선고되는 순간 조봉암 피고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 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방청객들과 다른 피고들은 그저 서로가 옆 사람들을 마주 쳐다볼 뿐 묵묵한 자세로 계속 선고되는 다음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 결과에 귀를 기울였다.
  12시 4분 이윽고 윤길중, 박기출, 김달호 등 피고 17명에 대한 판결이 언도되었다.
  “피고인들은 각각 무죄.”
  이때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법정엔 난데없이 박수 소리와 “우와” 하는 환성이 터져나왔다.
  조봉암 피고의 얼굴엔 비로소 안도감에 넘친 웃음이 깃들었고 윤길중, 박기출, 김달호 등 피고인들은 “휴” 한숨짓는 소리와 함께 “안심했다”고 저마다 동료들을 쳐다보며 눈짓.
  3시 5분경 유 재판장은 판결문을 다 설명한 뒤 “재판소로서 피고인들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고 전제하고 “피고인들은 형사책임이 없기 때문에 무죄가 선고되었는데 만약 석방된 뒤에라도 개인, 국가, 단체 등에 의심을 받을 만한 일은 절대로 피해야 된다. 무죄 된 이상 충량한 국민이라는 것을 자부하면서 굳세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라”고 한 토막 설교. (·····)
  조인구 부장검사는 쓴웃음만 짓고 있다가 마침 시경 사찰과장과 분실장이 들어오자 “미안하게 되었다”는 인사로써 사건 담당검사로서의 난처한 입장을 겸손(?)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한편 무죄 언도를 내린 서울지법 유병진 부장판사는 기자들이 판결 내용을 묻는데 일일이 답변해 주느라고 땀도 흘리며 “평화통일론은 문제가 안되거든” 하면서 연상 웃는 얼굴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 판결이 나온 지 사흘 뒤인 7월 5일 반공청년단원 수백 명이 법원 청사에 몰려가 “친공(親共)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단하자”라고 외치며 난동을 부렸다.

  그건 곧 이승만의 뜻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1심 판결이 내려지자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라고 분노했다. 그는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말도 안 된다. 책임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하여서 중지하였다”는 말까지 했다.(같은 책, 195쪽).

검찰이 ‘진보당 사건’에 관한 ‘정보’를 흘리던 초기부터 동아일보는 조봉암을 비롯한 그 당의 중견간부들을 ‘간첩’으로 몰아붙이는가 하면 ‘화평통일론’은 명백히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재판부가 1심 선고공판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리고 “평화통일론은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니라”고 밝혔는데도 사설을 통해 견해를 발표하지 않았다. 다만 반공청년단 등 극우단체 구성원들이 법원에 쳐들어가서 난동을 부린 사건에 대해서 7월 8일자 조간 1면에 「판결 데모 주모자를 엄단하라」는 사설을 내보냈을 뿐이다. 
조봉암의 ‘간첩죄’를 성립시키는 데 열쇠를 쥐고 있던 양이섭은 1심에서 자백한 내용은 특무대의 강요에 의한 허위진술이라고 2심에서 밝혔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1958년 10월 25일  조봉암과 양이섭의 유죄를 인정하고 각각 사형을 선고했다. 동아일보는 10월 26일자 조간 3면 머리에 선고공판에 관한 기사를 올렸다.

  ‘진보당 사건’ 공소심 판결 공판은 25일 오전 10시 반부터 김용진 부장판사 주심, 최보현 , 조규대 판사 배석, 방재기·조인구 양 검사 관여로 대법정에서 개정, 약 1시간 반에 걸친 판결문 낭독이 있은 다음 정오경 피고 21명 전원에 유죄 판결이 언도되었다. (·····)
  그런데 이날 판결에서 조봉암 및 양명산 피고는 ‘간첩’으로 인정되는 동시 ‘평화통일론’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인정되고 또한 진보당 자체도 ‘불법결사’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동아일보 사설은 1심을 완전히 뒤엎은 2심 판결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다. 
3심인 대법원은 1959년 2월 27일 조봉암의 간첩 및 국가변란 혐의, 양이섭의 간첩 혐의를 인정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 석간 2면 머리기사 제목은 「평화통일론 등에 무죄 / 조봉암·양명산에 사형 / 간첩 및 동 방조죄를 적용」이다.

조봉암은 재심을 청구했으나 대법원은 7월 30일 기각했다.

  조봉암은 고문을 많이 당했다. 그래도 안 되니까 이승만 정권은 양명산이라는 ‘간첩’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신창균에 따르면, 양명산은 ‘이승만 정권의 공작원’이었다. 법원은 1심에선 양명산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양명산은 “아! 내가 속았구나. 나를 무사하게 해준다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나한테 1심에서 5년을 선고하다니 내가 속았구나”라고 탄식했다. 2심에서 양명산은 속았다며 이전의 증언을 뒤집었다. 그러나 양명산에게 가해진 보복은 사형선고였다(같은 책, 259쪽).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형 집행을 당했다. 동아일보는 그 날자 석간 3면에 「조봉암 사형 집행」이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3단 기사를 실었다.

간첩피고 사건으로 사형 언도가 확정된 조봉암에 대한 사형은 31일 상오 11시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 공범 양이섭(명산)은 이보다 이틀 전인 29일 하오 3시 반 역시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진보당 사건 수사관이었던 한승격은 훗날 “당시 경무대로부터 조봉암을 잡아 넣지 않으면 이 대통령의 재당선이 불가능하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잡아 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당시 상부로 부터 ‘진보당은 없애고 죽산(조봉암-인용자)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사건을 엮지 않으면 네가 죽을 것’이라는 협박도 받았다”고 말했다. (·····)
  우선 민주당이 문제였다. 민주당은 미 대사관 못지않게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잘 되었다는 반응이었다. 58년 2월 이승만 정권이 재판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진보당 등록 취소를 공표을 때에도 역시 민주당은 정략적인 주판알을 튕기면서 긍정적인 표정이었다.
  언론, 특히 야당지들은 어떠했던가? 이들 역시 민주당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집단이었다. 이승만의 ‘반공 히스테리’를 이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은 조봉암 사형에 아무런 사회적 저항이 없는 것에 대해 득의양양해 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3·15 부정선거’를 위한 준비작업에 돌입하기 시작했다(같은 책, 259~262쪽).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조봉암의 유족이 청구한 재심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한 단체 결성과 간첩 혐의’에 대해 대법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2012년 7월 26일, 서울민사고법 민사14부(부장판사 이강원)는 조봉암의 유족 4명이 낸 국가배상 청구소송 공판에서 “국가는 모두 29억7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을 기본적 책무로 삼아야 할 국가기관이 중대한 불법행위를 저질러 위법성이 크다”며 “유족은 조 선생이 억울한 혐의를 받고 사형 집행을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로도 오랜 기간 사회적 냉대와 신분상 불이익을 겪었다”고 밝혔다.

대법원의 무죄 판결과 서울민사고법의 민사배상 판결은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을 ‘사법살인’했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진보당 사건’ 당시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대는 권력의 주장과 보도 자료를 앵무새처럼 전달함으로써 그의 억울한 희생에 ‘일조’를 한 언론은 사후 52년 만에 나온 무죄 판결을 보고서도 고인에 대해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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