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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수도 부산의 동아일보동아일보 대해부 2권 -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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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0.13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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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으로 피란을 한 동아일보 사원들은 속간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부산에서 속간

  (···) 빠른 시일 내에 속간을 보게 된 데는 미리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 다. 잔류한 김삼규는 먼저 떠나는 김상흠에게 민주신보사에 찾아가서 “동아일보가 부산에 가게 되면 귀사에 인쇄를 부탁할까 하는 것이니 타사의 인쇄를 받지 말아 달라”는 전언(傳言)을 해두고 하부(下釜) 즉시 전부터 친분이 있는 당시의 민주신보 주간 이만용과 교섭하여 동사의 인쇄시설을 이용하는 데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
  민주신보사는 평판인쇄기 2대뿐이어서 3만부를 발행하는 민주신보와 동시에 인쇄할 수 없었고, 더구나 문선 등 식자(植字) 등의 시설에 이르러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오후 5시에 민주신보의 인쇄가 끝난 연후에 본보의 제작에 착수하니 여태까지 석간으로 발간되던 본보는 부산에서 타블로이드 2면 조간으로 속간하게 되었다. (·····)
  전시에 피란지에서 내는 신문인지라 판매망이 있을 리 없고, 가두판매를 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또 좁은 지면에 달리 방도가 없어 1면은 외신, 2면은 국내보도로 채우고 전쟁기사가 태반을 차지하였으며 30년래의 고정란 <휴지통>도 전시를 반영해서 <십자군>으로 개칭되었다(<동아일보사사 권 2>, 116~118쪽).

동아일보는 1951년 1월 10일자로 속간호를 냈다. 한국전쟁이 터진 뒤 두 번째 속간호였다. 1면 머리에는 「중공 단죄 각국 찬성 / 영·인은 행동 전에 재일고를 요청」’이라는 기사가 올랐고, 그 옆에 「속간사」가 자리 잡고 있다. 속간사는 다음과 같다.

  정부 환도 이후 작년 10월 3일부터 금년 1월 3일까지 만 3개월간 폐허 위에서 분투노력한 보람도 없이 적색제국주의의 주구 중공군의 불법 침략에 의하여 우리 사원 일동은 정부와 같이 이제 이곳 부산에 와서 본지를 계속 간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로지 사원 일동의 불타는 정열과 동업지 민주신보사의 막대한 호의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기업적인 계산을 초월하여 연약한 붓대 한 자루로 시작하는 일이라 전도에는 허다한 형극이 충조(充潮)해 있으리라.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에게 형극이 문제겠는가.
이 민족 자체의 운명이 그러하거늘 이 민족과 희로애락을 같이해 왔고 금후에도 그 운명을 같이할 ‘동아’만이 별개의 조건 위에 설 수는 없지 않은가. 오직 우리의 가슴 가운데 불타는 일편단심과 이 마음을 알아주는 만천하 독자의 애호를 기대할 뿐이다. 이 붓대가 부러지는 날까지 우리 다 같이 한데 뭉쳐서 침략자를 물리치고 조국의 민주통일과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미력을 다할 것을 결의하고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우리가 쓸 수 있는 모든 지탄(紙彈)으로 저 무도하고 야만한 침략자의 무리에 필주(筆誅)를 가하는 동시에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전 세계의 민주여론에 호소하고자 한다.
  지금 전황은 반드시 우리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 국무장관 애치슨 씨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실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국련군의 신속한 후퇴가 한국을 포기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신경과민에 걸릴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한국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트루먼 대통령이 이미 언명한 바요 애치슨 장관도 성명한 바다. (·····)
  그러면 현하의 후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국련군이 전의(戰意)가 부족해서 후퇴하는 것인가. 아니다, 천만 번 아니다. 국련군은 여하한 무력침략도 용인할 수 없다는 유엔의 기본방침을 실현하기 위한 정의의 십자군인 동시에 유엔의 명령 없이는 절대로 동(動)하지 않는 규율 있는 군대다. (·····)
  (···) 우리는 유엔이 낙동강 방어선에 후퇴하기 직전까지에는 반드시 중공 응징에 대한 추상같은 결의가 채택될 것을 굳게 믿는 바이며 이 결의가 채택된 이상 유엔군은 사력을 다하여 낙동강 교두보를 유지할 것이며 중공군 격멸에 대한 비책(秘策)이 전개되고야 말 것이다. 겨레여! 우리는 유엔과 미국과 유엔군을 신뢰하자. 최후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자. 그리하여 우리는 다 같이 굳게 뭉쳐서 추호의 동요도 없이 각자의 직책 완수에 골몰하고 분발하여 성전(聖戰) 완수에 일로 매진하기를 촉구하고자 한다.

부산에서 속간된 동아일보의 지면은 마치 국방부가 펴내는 것 같았다. 속간 이튿날인 9월 11일자 1면을 보면 그런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다. 1면 머리에는 「국련군 반격 개시 / 적군 3개 사단 격퇴 / 원주 지구의 국련군 3마일 북상」이라는 머리기사 옆에 사설이 실려 있는데 제목(「일어서라! 대한 남
아야」)부터 ‘격문’ 같은 인상을 준다.

  악과 불법과 야만과 침략의 상징인 적 중공이 인해전술로 이 나라에 침입하여 이 민족의 살육을 일삼고 있는 이 판국에 적을 물리치고 우리가 사느냐 적에게 밀려서 바닷속으로 들어가느냐는 이 판국에, 자유를 누리느냐 노예가 되느냐는 이 민족 흥망의 관두에 서서 우리가 취할 바 태도는 너무도 명확하지 않은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죽음을 각오하고 전진하면 살고 겁을 내서 이리저리 흩어져 숨으려고 하면 모조리 죽어버릴 것이다. 뭉쳐서 적을 물리칠 것이냐 흩어져서 적의 노예가 될 것이냐? 노예가 된다고 사는 것도 아니다.
  노예 같이 부려먹고 나중에는 다 죽여 버리지 않던가. (···) 적에게 아첨한 자 혹은 총살당하고 혹은 타살당하고 혹은 강제노동에 종사하다가 다 죽지 않았는가? 국가가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민일 중공이 강토를 모조리 유린해 버렸을 때 이 민족적 생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티끌만치도 도의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공산주의자들은 이 나라 백성을 흉탄의 방패막이로 쓰지 않으면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의 강제수용소로 이송해 버리고 소련 상전들에게 기후 좋고 생산이 풍부한 이 나라 옥토를 바치고 말 것이다. 이래도 이 민족적 생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가? 구구한 소아(小我)의 이해에 구애하지 말지어다. 티끌 같은 생명에 미련을 가지지 말지어다. 국가와 민족과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정정하고 당당하게 싸우다가 죽는 것은 남아의 본망(本望)이요 화랑의 기상이 아닌가. 을지문덕은 백만의 오랑캐를 물리쳤다.
  정의의 칼을 높이 든 8백만의 대한 남아가 불법 침략자 2백만 중공군을 물리치지 못할 하등의 이유도 없지 않은가. 대한의 남아야! 모조리 무장하고 일어서자. 죽창을 들고 수류탄을 들어라. 그것도 없으면 식도를 들고 부지깽이라도 들어라. 그것도 할 수 없으면 산천초목이 진동하도록 고함을 질러라. 침략자의 간담이 서늘해질 때까지 고함을 지르자. 정의는 우리에게 있고 최후의 승리 또한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이렇게 일어서기만 하면 전세계 민주우방은 우리를 도울 것이다. 비상사태 선포령에 의하여 미국에서 현재 생산되고 있는 무기는 전 세계를 무장하고도 남을 것이다. 어찌 우리에게 주지 않겠는가. 무기를 즉시로 그리고 다량으로 주지 않는 것을 원망치 말라. 우리가 총궐기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전진한다면 미국은 자진해서 무기를 제공할 것이다.
  우리의 부족한 점, 미흡한 점을 반성하고 개선하는 데 전력을 다할지며 만리 타향에서 고귀한 희생을 바치고 있는 정의의 유엔군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고 전력을 다하여 협력하자. 그들의 무운을 빌고 그들의 무훈을 찬양하자. 공은 그들에게 돌리고 부족한 점은 우리가 가로맡자. 항상 겸허한 태도로 서로서로 얽히고 설켜서 악독한 중공군을 물리치기에 전력을 다하자. 화랑의 후예여. 대한의 남아여. 정의의 칼을 높이 들어라. 조선(祖先)의 가호 제군의 용기에 빛나리.


9만여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국민방위군 사건’

1950년 10월 19일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참여한 뒤 전세가 역전되자 대한민국 정부는 11월 20일 6·25 이후 조직된 청년방위대를 국민방위군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 법안의 주요 내용은 1)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들을 제2국민병에 편입시킨다. 2)제2국민병 가운데 학생을 제외한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시킨다. 3)육군참모총장은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받아 국민방위군을 지휘 감독한다 등이었다.
  19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돼 소집된 국민방위군 중 서울에서 모여든 방위군 숫자만 50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을 기막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조차 이 사건을 “9만 명 가량의 군인이 동사·아사·병사 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할 것인가? 놀랍게도 이들은 걸어서 혹한의 천리길을 돌파해야 했다.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되지 않았다. 징집된 사람들은 군복을 줄 줄 알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으로 나섰는데, 아무것도 주질 않았으니 얼어 죽으라는 소리나 다를 바 없었다. 잠잘 때는 2명 당 가마니 1장이 전부였다. 행군이 계속되면서 동사·아사·병사·낙오자들이 속출하는 데도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 이들을 가리켜 나온 ‘죽음의 행렬’ 또는 ‘해골의 행렬’이란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들 중 일부는 경상남도와 북도의 교육대에 수용되었고, 일부는 제주도로 옮겨졌지만, 수용되지 못한 장정들은 노상의 거지 신세가 돼 해골 모습을 하면서 계속 죽어갔다. (·····)
  이 ‘해골의 행렬’을 목격한 야당 의원들에 의해 국회에서 1월 15일 ‘제2국민병 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령관인 김윤근은 1월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백만 국민병은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일부 불순 세력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음은 실로 유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제2국민병의 참상에 대한 비난을 불순분자의 선동이라고 몰아붙였다. 국회에 출석한 국방부장관 신성모도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여러분은 제5열의 책동에 동요하지 말기 바란다”고 훈시하였다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 200~204쪽).

전시체제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동아일보는 이 끔찍한 사건의 실상을 보도하지 않았고, 1월 15일 국회에서 ‘제2국민병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된 사실도 지면에 올리지 않았다. 1월 21일자 2면에 「백만 국민병 편성 / 인적 자원은 기(旣) 확보」라는 제목으로 김윤근이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다.

  (···) 우리는 조상의 유업인 반만년 역사와 국토를 수호하기 위하여 침략자 중공 오랑캐를 최후의 1명까지 무찌르고 말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의지와 기상을 세계에 표명하여서 우리는 앞으로 백만 국민병을 편성할 것이요 또한 현재 훈련 중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불순분자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낭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은 조국이 백척간두에 선 오늘 실로 유감사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국민방위부에서는 여간한 곤란과 희생이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금번 국민방위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남하시켜 철저히 확보하였다는 것은 큰 성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국은 전고(前古)에 없는 일대 위기에 직면해서 3천만 국민에게 구국(救國)을 호소하며 백만 장정을 부르고 있다. 이제 한국은 40년 독립전을 총결산하는 마당에 있고 세계가 좌냐 우냐 하는 분수령이 되고 있다.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동아일보의 보도 태만

동아일보는 1951년 1월 27일자 2면에 ‘모종 중대 사건’이라는 표현으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암시하는 기사(「모종 중대 사건 발생? / 3부 합동조사반 맹활동」)를 처음으로 실었다. 

  국방·내무·법무 등 3부 장관은 이 대통령의 엄중한 특명에 의하여 모종 공무집행 관계를 조사하기 위하여 각각 국장 또는 고급관리를 조사원으로 임명하여 진상 조사에 착수케 하였는데 조사 결과는 이미 판명되어 전기 3부 합동조사반은 지금 동 보고서를 작성할 단계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특명한 조사 사항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여사한 특명사건의 전례로 보아 그것이 혹은 극히 중대한 모종의 공무집행 태만 또는 공무집행상 과오 사건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국방·내무·법무 등 3부 중 어느 일부에 관련된 사항인지 또는 기타 부처에 관련된 사항인지도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유력한 소식통들의 추측에 의하면 그것이 국방부에 관련된 사항이라는 점에 일치하고 있으며 또 전기 3부합동조사반의 구성으로 볼 때 이 특명조사 사항이 범죄수사 또는 재판에 관련되는 사항이라는 점에도 일치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사건은 당연히 객년(客年) 크리스마스 전에 발포된 이 대통령의 특사령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아니한가 추측할 수 있는데 아직 공식 발표가 없으므로 사건의 진상과 경중에 대하여 억측할 수는 없다. 그리고 전기 3부합동조사반의 조사보고가 앞으로 발표될 것인지 비밀리에 처리될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대통령 측근자 모 씨는 지난 26일 이 사건에 대하여 극력 언명을 회피하고 있다.

‘모종 중대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뜬 구름 잡는’ 식의 기사를 내보낸 동아일보는 그 이후 3부합동조사반이 어떤 조사결과를 냈는지에 관해 전혀 보도를 하지 않았다.
동아일보가 ‘국민방위군 사건’을 활자화한 것은 1951년 3월 30일자 지면이처음이었다. 언론이 그 사건에 관해 침묵하는 가운데 정치권 일각에서 정부에 대해 계속 진상 발표를 요구하던 중 3월 29일 국회에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자 그 내용을 보도한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29일 국회 54차 회의에서는 경찰원호법을 완전 통과하였다. 이에 앞서 국회는 개회와 동시에  비공개회의로 들어갔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비공개회의에서는 경남 거창군 주민 살해 사건에 관하여 신중목 의원의 진상 보고가 있었다 한다. (···) 국회는 이어 공개회의로 들어가 엄상섭 의원 의 긴급동의로 국민방위군 의옥(疑獄) 사건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국회 각파에서 3인씩의 조사원을 호선하여 직접 조사에 착수할 것을 재석 102인 중 94 대 0으로 가결하였는데 제안자 엄상섭 의원은 그 제안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국민방위군에 관한 부정사건은 세인의 주지하고 있는 사실로서 최근 모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하고 있던 바 수일 전에 구속 문초 중이던 피의자 3인을 석방하였다 한다. 이 석방은 국민의 의혹을 더욱 조장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중대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부정처분 액수가 15억 원에 달한다는 것, 둘째는 국회에서 가장 말썽 많았고 그보다도 전 국민이 가장 비분을 느끼고 있는 국민방위군에 관한 비용을 잘라먹었다는 것, 셋째로 관기(官紀) 숙청에 대한 민성(民聲) 고조에 도달하고 있는 이때에 이런 부정사건이 감행되었다는 것 등으로 볼 때 이번 의옥 사건은 최중대한 사건으로서 만일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 못한다면 이 나라 관기 숙정은 공염불로 돌아갈 것이다.
  또 이 사건이 어떠한 압력에 눌리어 유야무야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이 일반 민중의 공통된 여론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국회는 이를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만일에 국회가 이를 규명하여 그 진상을 밝히지 못한다면 국회 자체의 책임 문제가 될 것이므로 하루 이틀 시일을 천연하면 또 어떠한 결과가 올지 모르니 즉각 이를 조사하여야 한다.”


동아일보, 사설로 ‘국민방위군 사건’ 첫 거론

동아일보는 3월 31일자 1면에 올린 사설(「국민 앞에 공개하라」)을 통해 처음으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포함한 3대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지난 29일 국회에서는 인권 옹호와 군기 확립에 중대한 의혹을 품게 하는 3대 사건에 대하여 그 진상을 규명키로 결의하고 이미 그 조사위원까지도 결정하였다. 우리는 이들 조사위원들이 진지하고 공명정대하게 조사한 결과를 국민 앞에 공개할 것을 기다릴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진상이 방해되지 않고 공개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는 지금 공산진영과의 2대 결전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며 이 대결에 있어서 기어히 승리함으로써 민주주의적 자유와 세계평화의 확립을 맹서하고 민족적인 희생과 수난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
  (···) 우수한 외국 정보기관은 이미 이러한 사건을 숙지하고 있으므로 국가의 대외적인 체면 운운은 허울 좋은 이유에 불과하고 그 실은 국민의 눈을 가리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국민 전체의 눈을 가릴 수는 없기 때문에 쑥덕공론이 일어나게 되고 불안과 의혹에 싸인 국민들은 의심하는 눈초리로 권력기관을 바라보게 되니 결국 이러한 엄폐는 관민을 이간시키는 결과가 되어 총력전 수행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고관들은 큰 죄가 있어도 쉬쉬 해버리고 권력 없는 평민들은 필요 이상으로 인권이 유린당한다고 해서야 국민은 어떻게 정부를 믿고 살 것인가. (·····)
  (···) 우리는 금반 3대 사건을 계기로 하여 유죄필벌의 법의 위신이 확립되기를 희망하는 동시에 국회에서 공표되기 전에 정부가 자진하여 사건의 진상을 공명정대하게 국민 앞에 공개하는 것이 정부의 위신을 위하여 또 인권을 옹호하고 관기를 진작하려는 정부의 노력에 부합됨을 강조하고자 한다.

국회가 국민방위군 사건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 신성모는 “국방부장관의 책임 아래 있는 본 사건의 책임자 김윤근을 국회에서 조사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 최종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기 때문에 신성모가 방패막이를 자임하고 나섰을 것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민방위군 부대의 운영을 이승만의 친위조직인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청년방위대에 맡겼기 때문에 저질러진 것이었다.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은 민간인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별을 달았고 윤익현 등 청년단 간부들도 대령,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
  신성모는 수사를 방해하다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의 사위인 김윤근은 빼돌리고 부사령관 윤익헌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래서 군사법정을 구성하면서 자신의 친구인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을 재판장에 임명하였다. 이선근은 신성모의 뜻을 받들어 재판 개시 3일만에 서둘러 김윤근에게 무죄, 윤익헌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
  (국회 진상조사위원) 서민호의 보고에 따르면, 1950년 12월 17일부터 1951년 3월 30일까지 105일 동안 연 병력 7천58만2천940명의 유령 병력을 조작해서 모두 23억5천100여만 원의 현금이 부정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방위군 사령부에서 제시한 통계를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식료품비의 조달 액수와 실제로 집행된 액수의 차이가 무려 20억 원에 달함으로써 결국 3개월 동안 55억 원을 방위군 고위층들이 착복했다. 부사령관에 대한 기밀비용이 105일 동안에 무려 3억1천755만 원이나 지출되었고, 국회 내의 관련된 정파에 1억 원이나 흘러간 것 등 거대하고 복잡한 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규명하려면 앞으로 최소한 6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같은 책, 204~206쪽).

서민호는 4월 25일 국회에서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그런데 동아일보에는 그 보고에 대한 기사가 없고 4월 27일자 1면에 「국회에 질문」이라는 사설만 실렸다. 그 사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민주주의적 자유와 정의를 이 나라에 확립하기 위한 국회의원 제씨의 용기와 노력은 인권옹호를 위한 거창사건의 규명과 제2국민병을 위한 국가예산을 부정하게 유용한 국민방위군 사건을 척결함으로써 구체화시킨 데 대하여 국민은 다 같이 심심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사설의 초점은 “국민방위군 사건이 국회에 보고된 바로 그날” 국방위원장 김종회 외 의원 42명이 “한국군 10개 사단 증설을 미국 요로에 건의”함으로써 그 보고를 희석시키려 한 것을 비판하는 데 맞추어져 있었다.


‘대역자들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극형을’

1951년 7월 19일 국민방위군 사령부가 있던 대구 동인초등학교 강당에서 고등군법회의가 열려 김윤근 등 국민방위군 사건 관련자 5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사건에 대해 시종일관 미온적 보도를 해오던 동아일보는 선고공판 당일인 7월 19일자 1면에 실은 「대구 군재를 주시함」이라는 사설을 통해 피고인들에게 극형을 선고하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주의가 개성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대구에서는 지난 5일부터 민족의 운명을 건 또 하나의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일찍이 전 국민을 격분시키고 전율시킨 국민방위군 사건의 군법재판이다. 우리는 감히 이 군법재판을 가리켜 민족의 운명을 건 대사건이라고 지적한다. 왜? 이 군법재판은 과연 이 민족의 정기를 바로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
  (···)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사실심리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양미(糧米)를 얼마나 횡령해 먹었고 교제비로 얼마를 사용했고 누구에게 돈을 얼마나 주었다는 등등의 사실은 이 신성한 법정에서 심리되기 이전에 우리의 귀여운 자제들이 걸인군(乞人群)과 같이 시가를 행진하고 행진할 기력조차 없어서 빵 한 개를 청하고 물 한 모금을 청하는 것을 볼 때에 이미 그러한 부정사실이 있을 것을 직감하였고 가지가지의 부정사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
  사람이란 누구든지 먹을 것을 먹지 못하면 영양 부족이 되고 병이 들고 사망한다는 것은 누구다 다 아는 사실이요, 둘에 둘을 보태면 넷이 되는 산술적 진리와도 같은 이 사실을 국민방위군 책임자들이 몰랐다고는 말할 수 없을진대 그들은 의식적으로 우리의 귀중한 수십만 청년을 아사시키고 동사시키려고 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고 사실 허다한 아사자와 동사자를 냈다. 이것은 명명백백한 살인죄다. 
  단순한 살인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간성이 될 국민병을 살해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방력을 약화시켰고 수십만 청년의 애국심을 저해하고 정부에 대한 신뢰심을 말살함으로써 최대의 이적행위를 감행하였다. 그들의 범죄는 살인죄와 이적행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인이 공노할 그들의 대역죄를 권도(權道)로 엄폐하기 위하여 국회의원과 명사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함으로써 이 나라의 부패를 조장하였고 군의 정치 관여에의 선례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들의 범죄의 악질성을 더 명백히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역자들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극형을 언도한다. 그러지 않고는 이 민족의 정기가 바로잡힐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전 국민은 대구 군법재판의 결과를 주시하고 있다.

김윤근, 윤익헌 등 5명은 사형 선고를 받은 날인 7월 19일 대구 교외의 야산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관련된 동아일보 ‘필화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의 주범들인 김윤근, 윤익헌 등 5명이 총살형을 당한 1951년 7월 19일로부터 한 달 남짓이 지난 9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 머리에 「김대운 조서 발표 사건 / 중대한 국제문제 제기」라는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지난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홍범희 내무부차관이 보고한 소위 7천만 원 사 건에 관한 김대운(일명 김대현)의 진술 내용은 경찰조서 발표 사건으로서 한 국제문제화하고 있다. 즉 국회의 결의에 의하여 발표하였다고 하지만 국민방위군 사건을 수사 중에 있는 서울지검의 수사활동을 방해하려는 기도 밑에 암약하고 있는 일련의 의원들이 국민방위군 사건에서 파생된 한 사기 사건의 경찰 조사 내용을 공개하려고 책동한 이면 의도는 이미 김대운이 일건 서류와 함께 구속송청되어 부산지금이 예의(銳意) 수사 중에 있는 때에 발표된 점으로 보아 검찰청의 수사를 견제하려는 동기임을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검찰 측에서는 당혹하여 불쾌히 생각하였을 따름 본시 아무런 견제도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소정대로 엄중한 수사를 완료하여 17일에 이르러 김대운을 기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내무부가 그 책임 하에 성급히 발표한 김대운 진술 내용에 김의 진술로서 김이 윤익헌을 구출하기 위하여 운동하되 주한미대사 무초, 미 제8군 콜러, 미군 군법회원 2명, 미 제8군의 크린 대령 등 5명을 움직여 그들로 하여금 이 대통령에게 윤익헌의 구명운동을 의뢰할 생각으로 윤익헌의 처로부터 받은 금패물을 방매(放賣)한 미불화(달러화-인용자) 6070불 중 5900불을 크린 대령에게 수교하였다는 김대운의 일방적 진술이 드디어 거대한 국제적 파문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미국은 한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원칙으로 견지해 오던 것이므로 주한대사 무초 씨가 한국의 내정에 속하는 사형수의 구명운동에 인용되었다는 사실은 법원이 그 진부를 심리하지 아니하여 김대운의 진술 자체를 확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무부가 그 책임 밑에 발표하였다는 것은 크린 대령이 5900불의 운동비를 받았다는 진술 자체의 진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처럼 결과에 있어서 김대운 진술 내용 발표는 명예를 생명으로 하는 외교관인 주한미대사 무초 씨와 한국동란을 통하여 거대한 공로 있는 미 제8군 부사령관 콜러 중장의 명예를 심대히 훼손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무초 씨는 한국정부에 대하여 엄중히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어 온 바 그 처리 여하가 극히 주목되고 있다.

이 기사가 큰 파문을 일으키자 공보처는 동아일보사에 항의공문을 보냈다. “이 기사는 허위이므로 동일한 위치에 동일한 크기로 취소기사를 게재하라”는 것이었다. 동아일보가 그 요구를 묵살하자 검찰은 10월 4일과 8일에 걸쳐 편집인 고재욱과 기자 최흥조를 소환했다.

  그러나 미대사관 참사관이 내무부장관을 방문, 항의한 사실이 명백해지자 검찰은 최 기자에게 누설한 정부 관리의 성명을 밝히라고 나왔다. 최 기자는 이를 거부하였고, 그후 다시 소환장이 없어 일단락된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31일부터 다시 양인을 소환하여 수차 신문 끝에 11월 9일 광무신문지법 및 형법 제105항을 적용하여 양인 다 같이 불구속 기소하였다. (·····)
  이 기사가 나가자 세론이 분분한 가운데 정부당국자들은 허위기사로 몰아붙이는가 하면 내무부장관 이순용은 말썽이 난 조서를 참고자료로 극비리에 국회로 보냈을 뿐 발표한 일도 없고 외국대사관의 항의를 받은 바도 없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국회의 공개회의 석상에서 내무차관이 사건 내용을 공개하였고, 추후에 조서도 제출한 것이었다(<동아일보사사 권2>, 140~141쪽).

이승만 정권이 대한제국 시기에 제정된 ‘광무신문지법’까지 동원해서 탄압을 가하자 동아일보는 11월 15일부터 사흘에 걸쳐 사설로 정부를 비판했다. 「무관심의 위험[상] / 본보 기사 사건에 제[際]하여」, 「폭압의 상징[중] / 본보 기사 사건에 제하여」, 「수난의 자약[自若] [하] / 본보 기사 사건에 제하여」가 바로 그것이었다.
연속사설의 마지막인 「수난의 자약」은 아래와 같이 끝을 맺는다.

  설령 백보를 양보하여 광무 11년 신문지법과 형법 105조 2항, 3항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손 치자. 그렇다 할지라도 본보는 보도 임무에 성실치 못하였다는 책임을 스스로 느끼지 않는다.
  1)항의한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점은 본보가 출처를 밝히지 않더라도 각  관계자의 유력한 입증으로 드러난 것으로 생각되며 2)규탄서한과 구두의 차이, 항의·조회의 차이에 대한 견해의 다름이 있을지 모르나 본보는 그것을 엄연한 한 개의 항의사실로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며 3)본보는 사실을 사실대로 발표함으로써 당국의 반성을 촉구하는 이외에 아무런 의도도 없었던 것이며 4)이미 그 조서 내용의 경솔한 발표로 말미암아 민심이 의혹되었고 국교에 악영향이 미치려던 것을 그 기사는 오히려 민심의 의혹을 풀어주었고 양 국민의 감정을 부드럽게 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서는 사직(司直)의 냉엄한 조리(條理)가 판정하리라고 굳게 믿는 바이지만 본보는 이 수난을 당하여 다음의 명언(銘言)으로써 위정자의 정문(頂門)에 일침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나라의 민중이 얼마나 위정자에 전율하고 있는가를 위정자는 알아야 한다.

동아일보 필화 사건을 계기로 다수 언론사들은 광무신문지법과 형법 105조 3항의 반민주성과 위헌성을 지적했다. 광무신문지법 폐기안은 1952년 3월 19일 국회에서 85 대 0으로 가결되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보이지 않는 동아일보

1951년 2월 10일부터 13일까지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11사단 9연대 3대대가 민간인 719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4세 이하가 전체 사망자의 절반인 359명이었고, 60세 이상의 노인이 10%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40%의 사망자 가운데 3분의 2는 부녀자였다.

  11사단 9연대(연대장 오익경)는 1951년 2월 초, 거창을 포함해 함양·산청등 지리산 남부 지역에서 공비 소탕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이에 따라 거창의 제3대대를 중심으로 경찰과 청년의용대 등이 2월 7일 신원면에 진주하게 되었다.
  빨치산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산으로 퇴각하자, 제3대대는 경찰과 청년의용대 병력을 남기고 작전계획에 따라 신창 방면으로 이동했다. 군대가 신원면을 떠나자 빨치산은 그날 밤 습격을 해 경찰과 교전하게 되었고, 경찰과 청년의용대 병력만으로는 방어가 어렵게 되자, 제3대대는 다시 신원면으로 진주하였다.
  제3대대장 소령 한동석은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 1천여 명을 신원국민학교로 소집했다. 성인 남자들은 이미 피신을 한 뒤였기 때문에 모인 주민 대부분은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들이었다. 한동석은 지서주임, 사찰계 형사, 신원면장 등으로 하여금 군인, 경찰, 공무원 및 지방유지 가족을 골라 내게 한 뒤 남은 사람들을 박산 골짜기로 끌고 가서 기관총으로 집단 학살한 후 휘발유를 뿌려 불태웠다. 시체더미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기도 했다. 2월 10일부터 13일까지 저질러진 일이었다. (·····)
  이 사건은 2월 말경 피란수도인 부산까지 소문으로 퍼졌고 민심이 흉흉해 지자 사건 한 달 후인 3월 12일 제11사단 자체가 육군과 국방부에 진상 보고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보고서는 “학살 주민의 대부분이 양민이어서 군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이 밖에도 부녀자 강간·물품 강요·재산 약탈 등으로 주민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밝혔다. (·····)
  이미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이 같은 군의 비행이 외국에 알려진다면 전쟁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군의 사기를 해친다”고 하며 사건을 은폐할 것을 지시했다(같은 책, 213~215쪽).

육군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 관한 진상 보고서를 국방부에 올렸는데도 동아일보는 그 ‘정보’를 알지 못했는지, 아니면 고의적으로 묵살했는지 관련 기사를  내보내지 않았다. 국회에서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학살 사건, 벽보 사건이 크게 논란이 되자 3월 31일자 사설(「국민 앞에 공개하라」)을 통해 거창 사건을 간접적으로 전했을 뿐이다.

  이 참혹한 사건은 (발생) 한 달 보름이 지난 3월 29일에 거창 출신의 국회의원 신중목 씨의 입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온 나라가 벌집 쑤셔놓은 듯이 들끓었지만 정부에서는 아무런 공식 발표도 하지 않았다. 거창 양민학살 사건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자 영국의 신문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논평했고, 유엔도 발칵 뒤집혔다.
  국회에서는 마침내 조사단을 구성하여 4월 7일에 현지로 보냈다. 그러나 조사단이 신원면에 채 닿기도 전에 ‘공비’의 습격을 받았는데, 나중에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이 사건은 당시 헌병사령관이며 경남지구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이던 김종원 대령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감추려고 꾸민 가짜 공비 사건임이 밝혀져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하였다. 소대 병력의 국군이 공비 복장을 하고 숨어 있다가 국회의원들에게 총을 쏘았던 것이다(「거창양민 학살 사건」,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네이버 지식백과>에 수록).

  나라 안팎에 널리 알려진 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러 국회 조사단이 현장에 갔다가 ‘공비’를 가장한 국군의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동아일보 담당 기자가 몰랐을 리 없다. 만약 몰랐다면 직무 유기나 태만을 저지른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동아일보 지면에는 국회 조사단 피습에 관한 기사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거창 사건의 중대성’을 처음으로 거론

5월 9일 오후 부통령 이시영이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국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직접적인 동기는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학살 사건 등에 대처하는 이승만 정권의 독선적이고 불법적인 태도에 대한 항의였지만, 그는 10일 오후 국회에 나와 사임 이유를 에둘러 표현했다. 5월 11일자 동아일보 2면 기사(「이 부통령 사표 제출 / 국회서 심경을 토로 / 강력한 내각 조직 / 민의 부합한 정치 요망」)에는 그의 발언 내용이 아래와 같이 소개되어 있다.

  나는 강력한 내각을 조직하여 민의에 부합한 정치를 할 것을 요망하였던 것이다. 헌법에서 견제된 부통령의 힘으로는 달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2차에 긍(亘)하는 유리남하(流離南下)로써 민생고는 날로 격화하여 가는데 국민의 요망과는 반비례로 남부끄럽고 사람 같지 않은 부정사건이 연발하고 있으니 부통령으로서 무위 무능한 가운데 그저 그 자리에만 앉아 있을 수 없어 좀 더 현명하고 유능한 부통령이 들어와 대통령을 보좌할 것을 믿고 이 자리를 물러나려는 것이니 이것은 감정에 끌린 일시적인 일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생각한 일이며 이대로 더 하려야 할 수 없는 실정이니 국회에서 정부를 잘 편달하여 백성을 살리도록 하여주기 바란다.

국회에서는 재석 131명 가운데 115명이 이시영의 사임에 반대하면서 사표를 반려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5월 12일자 1면에 「부통령의 사표」라는 사설을 실었는데, 거창 학살 사건에 관한 직접 언급은 없이, “우리 정치가 민의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헌법을 뜯어고치거나” “개헌이나 다름없는 정치운동을 필요로 하는 헌법 운용 조치를 새로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월 16일 국회는 동아일보 사주이자 고문 김성수(민주국민당 창당 직후 최고위원)를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는 2차 결선투표에서 이갑성을 78 대 73, 간발의 차로 눌렀다.
8월 6일 열린 군법회의 제5회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종원은 “국회 합동조사단이 거창에 진상 조사차 갔을 때에 도중 산중에서 습격을 받았다는 것은 공비로부터가 아니고 국군으로부터 동 조사를 방해하기 위하여 독자적인 행동으로 한 것”이라고 증언했다(동아일보 8월 8일자 2면).
동아일보는 1951년 8월 9일자 사설(「거창 사건의 중대성」)을 통해 2월 상순에 사건이 일어난 이래 처음으로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했다.

  거창군 신원면 주민 수백명을 국군이 총살 처분한 소위 거창 사건은 국민방위군 사건과 더불어 전 국민을 전율케 하였고 인류의 정의심을 절감케 하였다. 이 양대 사건은 국군의 위신을 실추시켰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가적 체면을 세계적으로 오손(汚損)시켰다. 대한민국에 생을 향유하는 국민의 불행이 이에 더할 바 없다. 이러한 불행은 그러나 그것을 보도하고 비판하는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제거될 수는 없고 그 불행한 사실을 철저히 규명하여 의법(依法) 척결함으로써 반복의 불행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대한민국에는 그 민주 국기(國基)를 규정한 헌법이 엄존하고 있다. “정의 인도의 동포애에 입각하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한 이 헌법은 지위 여하를 불구하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위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국민 된 자는 누구나 이 헌법을 수호하여야 할 당연한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다. 거창 사건은 헌법 제9조에서 보장된 국민의 권리를 공비 아닌 우리의 국군 자신이 위반하였고 유린하였다. 아무리 비상사태라고 해서 국군은 제 마음대로 국민을 죽이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계엄 비상사태라 경찰만 가지고는 부족하니 군대까지 동원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계엄 하라고 해서 국군이 국민의 생명을 초개시(草芥視))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국군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 것인가. 이와 같이 국군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일선장병의 혁혁한 무훈을 모독하고 군민 간을 이간시키고 적대시하게 만든 일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건은 국민방위군 사건 못지않은 최대의 불상사요 최대의 이적행위인 것이다.
  자기의 독단으로 습격하였다는 것은 김종원 대령이 대한민국 국군을 그의 사병(私兵)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교가 그 지위를 이용하여 국군을 그의 사병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이 같이 가공(可恐)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국군 사병화가 가능하다면 야심 많은 군인정치가는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중앙청을 포위하고 기관총을 들이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김종원 대령은 이러한 군부독재의 일단이었다. 이러한 독단을 용인한 전 국방부장관 신성모 씨는 이러한 군부독재를 의도한 총본영이 아니면 아닐 것이다. 그동안 우리 국군의 허다한 불상사는 실로 이 지휘자 밑에서 행해진 군부독재의 과정이었다. 이 지휘자 밑에서 거창 사건과 동 사건 조사단 습격 사건이 일어났다. 총지휘자 총책임자 신성모 씨는 남자답게 당장에 재판정에 출두할지어다.

이 사설의 앞부분에 나오는 “보도하고 비판하는 자유를 억압”했다는 말은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이 거창 학살과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을 전혀 보도하지 못한 이유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회에서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된 사실에 대해서조차 기사와 논설을 내보내지 못한 사실까지 ‘면책’받을 수 있을까?
신성모를 총애하던 이승만은 그를 사법처리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1951년 12월 군법회의는 거창 사건의 책임을 물어 연대장 오익경에게 무기징역, 대대장 한동석에게 징역 10년, 그리고 김종원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그들은 사면을 받고 복권되었다. 이승만은 명백한 양민 학살자들과 국회조사단 습격 지휘자에게 면죄부를 주고 현역으로 복귀시킴으로써 국군이 어떤 위법행위나 만행을 저질러도 대통령의 총애만 받으면 무사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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