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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가 보도한 ‘여순사건’동아일보 대해부 2권 -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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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23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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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22일자 동아일보 2면 머리에는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공산계열의 군부대’가 반란을 일으켜서 전남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다는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여순 사건’ 첫 보도

기사의 제목은 「‘일부 군부대 반란 소요 / 공산계열과 극우분자도 책동 / 반군이 여수·순천 점령 / 양민과 경관을 학살 / 21일 이후 점차로 진정 / 광주남원선 이남에 / 반도를 포위 소탕 / 이 국방부장관 전투경과 발표 / 가증(可憎), 14연대장 등 흉모(凶謀)」이다.

  공산계열과 일부 극우분자들의 책동으로 국방부 일부 육군부대가 주동이 되어 전남지방에 정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수많은 경관과 양민을 살상한 천인공노할 일대 불상사가 일어나 전남의 여수·순천 일대는 수라장으로 화하였는데 정부의 신속한 조치로 21일 현재는 거의 반군은 피동적으로 세력이 분열되어 치안은 착착 수습되어 가고 있다 한다.
  이 사건 전모에 관하여 지난 21일 국방장관 이범석 씨는 기자단과의 회견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전남 여수에는 국군 제14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20일 새벽 2시경 공산주의 계열의 오랫동안 책동과 음모로써 반란이 발생하였다. 처음에 약 40명에 가까운 사병이 무기고를 점령하고 교묘한 선동과 위협으로 동 연대의 일부 병사를 출동시켜 심야를 이용하여 동 연대 장교들 대부분을 살해하고 그곳 여수에 있는 치안기관인 철도경찰서와 그 지방의 공산주의 청년들을 모아 무기를 배급하고 또 민중을 유혹하여 일대 세력을 만들어 양민을 학살하는 등 갖은 죄상을 쥐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부분은 철도시설을 점령하고 순천으로 가는 학생 통학열차 6량에 탑승하고 순천으로 돌진하였는데 순천역에서 철도경찰과 충돌한 다음  지방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이것이 지난 20일 하루 동안의 경과이다. (·····)
  (···) 폭도들은 갖은 행패를 하여 학살 약탈 방화 등을 감행하였는데 군으로서는 우선 광주로부터 3개 중대를 순천에 증원시켰는데 시간적 거리와 또 열차 관계로 지체가 되어 순천 역시 지난 20일 밤 10시 10분경 현재로 반군에게 점령당하고 접전 중에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 보고에 의하면 순천을 대부분 점령한 반도들은 공산청년도배들을 규합하여 약 2천여 명이 되는데 그 병력을 두 길로 나누어 하나는 전북 남원으로, 또 하나는 광주로 향하였다고 하는데 군에서는 지난 20일 하오 1시 비행기로 전방 지휘군 즉 참모진을 광주에 수송하여 형세를 판단하여 시간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사태진압에 극력 힘을 쓰고 있다.

나중에 드러난 ‘여수·순천 사건’의 진상은 국무총리 이범석의 발표 내용과는 크게 달랐다.

10월 15일 육군사령부는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에 대해 “폭동이 계속되고 있는 제주도로 1개 대대를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그 무렵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는 모병제를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원조회가 허술해서 이승만 정권의 탄압이나 감시를 받던 청장년들이 입대해서 ‘신분 보호처’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여순사건을 일으킨 주동자인 제14연대의 중위 김지회와 상사 지창수 등은 남로당 전남도당 소속이었다. 그들은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러 가라는 명령이 단순한 ‘좌익세력’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고한 양민들까지도 살상하라는 뜻으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김지회와 지창수를 중심으로 한 좌익 계열의 장병들은 결국 ‘제주 진압군’으로 가는 대신 ‘봉기’ 또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10월 20일 약 3만여 명의 여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민대회가 열렸고, 인민의용군과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반란군은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이고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들은 제주도의 애국인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로 출동시키려는 명령에 대해서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총궐기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고 나서 이들은 인민위원회의 여수 행정기구 접수, 반동적 이승만 종속정권 타도투쟁, 이승만 정권의 모든 법령 무효 선포, 친일파 경찰과 민족반역자 처벌,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실시 등의 내용이 담긴 삐라를 살포했다.
  여순사건은 그 배경에 있어서 좌익 군인들이 ‘숙군(肅軍) 작업’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경찰과 경비대가 평소 견원지간이었다는 점도 자리하고 있었다(1948년 9월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국군에 편입됐고, 9월 6일에 각기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됐지만, 9월 5일 이전의 육군은 경비대였다). 14연대 군인들은 한 달 전인 9월 14일에도 구례에서 경찰과 충돌한 적이 있었다. (·····)
  미군정의 차별대우도 갈등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미군정은 경찰에게는 창설 때부터 새 제복과 미제 카빈 소총을 지급한 반면 경비대에게는 일본 군복과 소총을 지급했다. 장택상 등 경찰 간부들이 경비대를 경시하였고 경찰관들도 경비대를 경찰예비대로 간주하여 깔보곤 했던 것도 갈등을 키웠다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174~175쪽).


‘반란군의 살상’에 초점 맞춘 동아일보

대통령 이승만은 10월 22일 오전 기자단과 회견을 갖고 여순사건에 관해 질의응답을 했다. 동아일보는 23일자 1면 머리에 그 내용을 보도했다.

  파괴분자 단호 숙청 / 좌익 계열의 반란에 동요치 말라 / 대통령 당면 사태 언급

  문: 북한정부의 남한에 대한 공세가 혹심한데 구체적 대책 여하?
  답: 북한에서 현재 여러 가지로 활동 중이라 하며 또 소련 사람들이 라디오를 통하여 소련군의 철퇴니 인민공화국 승인이니 또는 다른 나라의 승인을 받았다는 등 각방으로 선전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무슨 계획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의혹을 가지게 되나 우리는 조금도 이에 동념(動念)할 필요가 없는 줄로 안다. 파괴분자들이 지하공작으로 살인 방화를 준비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이미 그것이 시작되어 선동으로 난도(亂圖)를 만들려는 계획도 발로되고 있는 중이나 우리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악질적 의도를 간파하고 있으므로 어떤 충돌이 있다 할지라도 정부와 국민은 일심협력하여 조직적으로 이를 진압할 것이니까 별로 우려할 바 없을 것이나 이에 대하여 한 가지 경고할 것은 정부를 파괴하려는 분자들은 개인이나 단체를 막론하고 중법(重法)에 처하여 내화란(內禍亂)의 길을 막을 터이니 군정 하와 같이 범법하고서도 후대를 받으리라고는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는 10월 24일자 신문부터 여순사건에 관한 기사들을 2면에 대대적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보성·광양에 반군 6백 / 여수·순천은 완전 탈회(奪回) / 항공대, 함정도 긴밀 행동 중」, 「반군은 지리멸렬 / 포로 6백 / 계속 투항 중 / 총참모장 담」, 「반란군에 고함 / 국방장관이 투항 엄명」은 국방부 발표를 그대로 인용한 기사였다.

동아일보는 10월 28일자 1면에 여순사건에 관한 사설(「전남 사태의 비극」)을 처음으로 올렸는데, 그 초점은 ‘반란군의 양민 학살’이다.

  정부군이 순천, 여수에 진격하여 반란의 세력을 격파하였으므로 전략적으로는 전남 사태가 다소 개선된 점도 없지 않으나 이 분산된 반도(叛徒)세력이 구례, 보성, 장흥, 하동 등지로 방향을 돌려 인접 군으로 비화하게 되니 사태 수습에는 아직도 낙관을 불허한다. 현지 실정을 보고 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 참상이야말로 동족동포로서 눈물 없이는 차마 볼 수 없는 글자 그대로의 생지옥을 이루고 있다 한다. 우선 순천만 하더라도 민간 측 피해가 3백명을 넘으리라고 하며 인민재판이라 칭하여 무고한 동포를 살해능욕하는 등 적어도 나라에 법과 정의가 있다면 그 잔인무도한 비행이야말로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니 우리는 민족의 이름으로 피해자의 명복을 빌며 그 유가족에 심심한 조의를 표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정부 측 발표에 의하면 이번 반란사건은 현 정부를 반대하는 좌익분자와 극우분자의 합작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권을 획득하는 데 이 나라 헌법이 규정한 평화적 수단이 아니고 폭력으로 나올진대 그 동기 여하, 그 소속 여하를 막론하고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며 민족이 이를 용납하지 않으리라. 확실히 이번 전남 사태가 일어나게 된 책임은 국련 결의를 거부하는 피방(彼方) 좌익에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러나 이 사태 수습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저버릴 수 없을 것이다. 순천, 여수도 아직 완전히 평정되지 못하고 국부적으로는 산발전이 벌어지고 있다 하니 그 소탕 섬멸에 대한 국군의 책임도 중대하려니와 그렇다 하여 전남 사태를 국사적인 해결에만 방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게 되어 전남 사태가 만성화화지 않을 것만은 확신하는 바이나 우선 제주도 사태만 보더라도 군사력만을 가지고는 도저히 완전한 해결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진압된 지방에 있어서 피해자의 가족 또 이에 배경이 되는 사회적 집단과 가해자의 가족 또 이에 배경이 되는 사회적 집단들 사이에는 감정의 대립이 첨예화할 대로 할 것이다. 또 이런 때일수록 지방민의 사감(私感)이 정치적인 형태를 가지고 표면화하는 것이며 가장 피해가 많은 경찰로서는 치안 확보를 떠나서 복수로 나오기 쉬운 것이요 목숨을 걸고 토벌에 당하고 있는 국군 역시 이에 가세하기 쉬운 것이니 그렇게 되면 지방민은 그 대부분이 반동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전남 사태는 일차적으로는 군사력이 해결지어 줄 문제라고는 하나 이 사태를 근본적으로 수습하는 길은 역시 정치적인 해결에 있는 것이니 이 점에 대하여 특별 주의를 환기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여순 사건의 발단은 좌익계열 군인들의 ‘무장봉기’ 또는 ‘폭동’이었지만 여수와 순천의 많은 민간인들은 미군정 이래 쌓여온 경찰과 관료들의 민중 탄압과 이승만 정권의 폭압정치를 규탄하며 폭발적인 대중운동을 펼쳤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사설은 그런 현상은 아예 외면한 채 ‘반도들의 인명 살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사설은 여순 사건을 군사력으로만 해결하지 말고 정치적인 수습책을 찾으라고 권고하고 있는데, 당시 무자비한 진압에 몰두하던 이승만 정권이 그런 소리를 귀담아 들을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동아일보의 첫 현지 취재

여순 사건이 터진 지 열흘이 가까워지도록 국방부를 비롯한 ‘당국’의 발표만을 받아쓰던 동아일보는 10월 29일자 2면 머리에 처음으로 현지에 파견된 기자가 보낸 기사를 실었다.

  대중 그 속에 적이 있다 / 명기(銘記)하라 참화의 결과 / 시산(屍山)의 순천, 반군 행패 전모 / 순천에서 본사 특파원 백광하 발 지급보

  지난 20일 상오 2시 여수, 순천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동족 상육(相戮)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자 현지에 파견된 기자는 우리 동족의 핏줄기 속에 이와 같은 악랄한 죄악의 씨가 숨어 있었던가를 몸서리치면서 아직도 눈동자에 어리어 있는 처참한 광경과 직접 일선에서 적과 싸우다가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보존한 용사들의 실전담을 소개하여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이번 사건의 편모나마 독자 여러분에게 알리고자 한다.
  지난 24일 기자는 광주에서 간신히 당국의 허가를 얻어 광주에서 270리를 상격한 순천 현지에 자동차를 달리게 되었다. 동승한 무장경관들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도로 양안에 잠복한 적의 도전을 경계하고 있었으나 순천시에 접근한 때는 우리를 향하여 군데군데서 총탄이 날아들었다. 이윽고 차는 격전의 현장 순천 가두에 도착하였다.
  전율! 처참!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 거리거리에는 몸을 묶어 불에 그슬려 죽인 시체, 손과 발을 묶어 놓고 총으로 쏘아 죽인 시체, 도끼로 머리를 쪼개 죽인 시체, 전선대에 붙잡아 매어 놓고 수백발의 기관총 소사를 하여 살과 뼈가 흩어져 있는 참혹한 시체가 산재하여 있고 반군의 점령 당시 소위 인민재판소로 되어 있던 경찰서에는 수백의 경찰관과 양민의 시체가 산재하여 있다. 최초의 격전지였던 철도역전 등천 냇가 방죽에는 팔다리를 동여 매인 채 총살을 당하여 입으로 코로 피를 뿜고 죽은 경찰관의 시체가 난잡하게 넘어져 있다.
  아! 이것이 이민족의 소행도 아니고 한 줄기의 피를 받은 우리 동포, 그보다도 한 집안 식구와 같이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주고받던 순천읍민 서로 사이에서 행하여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사지가 떨리고 눈앞이 캄캄하여졌다.

이 기사에서 동아일보는 순천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이 좌익과 우익 사이뿐 아니라 읍민 상호 간에 벌어졌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러나 이 기사를 보낸 기자는 현지의 대동청년단장, 순천군수, 순천읍장 등의 목격담을 바탕으로 순천에서 벌어진 격전의 ‘실상’을 전함으로써 취재가 편향적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여순 사건’ 이래 60년이 넘게 많은 전문가들이 조사하고 연구해서 발표한 자료들이나 외국인 기자의 보도를 보면 반란군과 동조자들의 살육이나 ‘인민재판’에 비해 진압군의 ‘학살’과 인권유린이 훨씬 더 가혹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에 그에 관한 자료들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주요한 부분을 요약하겠다.

  순천에서부터 잔인한 보복극이 시작되었다. 경찰은 순천의 모든 성인 남자들을 순천북초등학교 교정에 감금해 놓고 엉터리 선별 심사를 통해 가려낸 사람들을 각목과 쇠사슬, 그리고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악질적’이라고 판단된 10여 명을 교정에서 총살했다. (·····)
  (···) 진압군은 여수 서국민학교에 4만 명을 집결시켜 놓고 보복 대상자를 골라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여수여중 운동장 등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현장을 목격한 한 미국 기자는 <라이프>지 1948년 12월 6일자에 쓴 기사에서 “이곳에서 폭동을 진압했던 정부의 군대가 반란자들의 잔학행위와 같은 짓의 야수성과 정의를 무시한 태도로 오히려 그들보다 더한 보복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라고 썼다.
  “한쪽에서는 그 광경을 여자들과 아이들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무섭고 두려운 징벌의 장면을 말하라고 한다면, 보고 있는 아녀자들의 숨 막힐 것 같은 침묵과 자신들을 잡아온 사람들 앞에 너무나도 조신하게 엎드려 있는 모습과 그들의 피부가 옥죄어 비틀어진 것 같은 그 표정 그리고 총살되기 위해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한 마디 항변도 없이 침묵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살려 달라는 울부짖음도 없고 슬프고 애처로운 애원의 소리도 없었다. 신의 구원을 비는 어떤 중얼거림도 다음 생을 바라는 한 마디의 호소조차 없었다. 수세기가 그들에게 주어진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울 수조차 있었겠는가.” (·····)
  엄격하게 통제된 신문들에 의한 여론조작은, 학살은 은폐하고 ‘미담’ 수준의 이야기만 양산했다. 임종명이 이 시기 신문기사들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처음에는 ‘민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작전’ 대신 ‘소극적인 작전’도 마다하지 않았던 ‘관군’이 시내에 돌입해서는 ‘먼저 식량창고를 탈취하여 시민의 식량을 확보’하고 ‘서국민학교나 여수국민학교에 수용’된 ‘피난민에게는 주먹밥을 나누어 주’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국군’의 모습을 재현했으며, ‘국군’은 ‘인명을 보호’하는 수호천사로 묘사되었다. (·····)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여순사건으로 인해 토벌군은 141명이 사망, 263명이 실종, 391명이 반란군 측에 합류했으며, 반란군은 821명이 사망했고 2천860명이 체포되었다. 1948년 11월 말 미군 소식통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약 1만7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반란에 참가했다는 혐의를 받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그들 중 866명이 사형 언도를 받았다(177~184쪽).

여순 사건은 10월 27일 완전히 진압되었다. 군대와 경찰의 포위망을 벗어난 반란군의 일부는 나중에 지리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빨치산’에 합류하게 된다.

동아일보는 11월 3일자 1면에 여순사건을 ‘마무리’하는 사설(「강력정치에의 길」)을 올렸다.

  국군의 일부를 선봉으로 한 여수·순천 반란도당의 잔인무도한 동포 살해 상황은 도하(都下) 각 신문의 보도에 의하여 그 대략을 알게 되었거니와 그 수법에 있어서 그 계획성에 있어서 그 규모에 있어서 실로 천인이 공노하고 전율하고 격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산적(山積)된 시체 앞에 그 유가족과 더불어 통곡하고 또 통곡하되 오히려 한이 깊어질 뿐이다. 오호라! 반도의 총검에 억울하게 쓰러진 선남선녀여! 반동의 누명을 쓰고 ‘인민재판’의 이슬이 된 형제자매여! 반도와의 전투에서 용감히 전사한 용사들이여! 잔인무도한 반도는 거의 포착 섬멸되어 남천(南天)을 휘덮었던 요운(妖雲)은 걷히었으니 명목(暝目)할 지어다.
  유사 이래 미증유한 금반 비극의 원인을 살피건대 남북을 통한 공산분자가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음모와 책동이 주류를 형성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도 명백한 바 있으니 정부의 발표를 통하여 볼지라도 극우 정치 불평분자의 가담은 운운한 바 있고 정부의 처사에 있어서도 또한 우리가 수긍할 수 없는 점이 있으니 그것은 금반 반란의 선봉이 된 제14연대 내 불순분자는 오동기 연대장의 휘하로서 사전에 그 불순성을 알고 있었다 하면 이러한 불순분자를 적색 반란의 중심지 제주로 파견하려고 여수에 집결시킨 그 불가사의한 조치다. 이러한 조치는 공산주의자의 활동과 역량을 너무나 과소평가한 데서 초래된 실수라 하겠지만 해방 후 반탁투쟁에서 5·10 선거에 이르기까지의 민족진영의 반공혈전을 몸소 체험한 국토라면 이러한 실수는 있을 수 없는 일로서 실로 장탄식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수유(須臾)라도 반공투쟁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할 때에 정부 수립 후 3개월간의 이 진공 상태를 정권 이양에 수반되는 단순한 준비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지지(遲遲)하고 그간에 착잡한 제반 사태는 정치의 빈곤만을 노출할 뿐 민심의 해이는 날로 우심하여 일모도원(日暮途遠)의 감만 짙어가니 앞서는 한심(寒心)을 억제하고 민심 수습에 용기를 진작(振作)하여야 할 것이매 회상하라! 5·10 선거 그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탄생을 위하여 93%의 전 국민이 궐기한 사실을! 민족존망의 이 가을 어찌 궐기하지 않으랴! 다만 그 책(責)에 있는 당로자(當路者)가 구(求)하지 않음을 유감으로 생각할 뿐이다.
  (···) 대한민국 정부의 적색 괴뢰정권에 대한 승리는 민주주의의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요 국제민주주의의 적색 전체주의에 대한 승리인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세계 각 민주국가를 동원하는 것이요 국내적으로는 자아중심세력을 부식(扶植)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이름으로 철통 같이 단결하는 것이다. (···) 정부는 민족적 역량을 총집결하는 강력적 정치세력을 갖춤으로써 금반 반란에 희생된 겨레의 명복을 축원할 생각은 없는가? 이것이 겨레가 다 같이 일각천추와 같이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설은 여순사건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모두가 ‘반란도당의 잔인무도한 동포 살해’의 희생자들이라고 단정하면서 그런 비극을 사전에 막지 못한 이승만 정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 ‘민족적 역량을 총집결하는 강력적 정치세력’을 갖추라고 촉구하고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한민당을 포함한 연립정부를 세우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는 대목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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