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언론역사 조선동아 대해부
좌우합작 좌절과 유엔의 단독선거 확정동아일보 대해부 2권 - 7장
  • 관리자
  • 승인 2021.08.18 10:45
  • 댓글 0

1947년 1월 20일 입법의원에서 이승만 추종자들과 한민당 의원들은 중도파 의원들이 기권한 가운데 ‘반탁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입법의원 회의장에는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 진입해 김성수, 장덕수, 장택상의 지휘 아래 반대파에 야유를 보내는 등 공포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다. 이 반탁결의안의 통과로 입법의원 의장 김규식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다. 김규식은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이 지배하는 입법의원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며 시골로 내려가 버렸다(<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13~14쪽).

‘민족사에 빛날 반탁 결의’

동아일보는 1월 22일자 1면 머리에 「입의(立議)에서 반탁을 결의 / 전 민족의 총의를 표시 / 신탁반대안을 상정 / 44 대 1로 가결 / 민족사에 영원히 빛날 대사실」이라는 기사를 올린 데 이어 그 바로 옆에 「김준연 씨의 방청기」를 실었다.

입의에서 반탁의 봉화! / 청사에 빛날 44 의원의 분투 / 입의의 결의를 보고

지난 13일 41명의 연서(連署)로 입법의원에 제출되었던 신탁통치반대결의안은 재작 20일 오후 7시 15분경 드디어 입법의원을 통과하였다. 지난 11일 공보부를 통하여 미·소 양군 사령관의 미소공동위원회에 관한 교환서한이 발표되자 3천만 동포는 악연(愕然)히 대경실색하였던 것이다. 그는 남조선미주둔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결국 소련대표 스티코프 중장이 작년 3월 20일 미소공위 개회 벽두에 행한 연설 중에서 주장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하는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아니면 한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시키지 않겠다!”는 것에 동의하였기 때문이다.

이 하지 중장의 성명이 발표되자,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대충격을 받게 되어 한국독립당, 한국민주당, 대한독립촉성회,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조선민주당, 여자국민당 등 각 정당, 단체에서는 즉시 그를 단호 배격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또 애국단체 35개 단체가 16일 오후 3시부터 한국민생당 회의실에서 김구 선생 영도 하에 회의를 개최하여 공동성명서를 결정하여 하지 장군의 성명을 단호 반대하여 신탁 반대의 태도를 또다시 명백히 한 바 있었다. 그런데 남조선 2천만 민중의 의사를 대표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도 도저히 이 문제를 간과할 수 없어, 이남규, 하상훈, 양제박, 최명환, 송종옥, 백관수, 홍성하, 김도연, 박현숙, 황신덕, 박승호, 엄우용 등 41 대의원의 연서로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제출하였었다.

1)모스크바 3상회의의 조선에 관한 결정 중 신탁통치에 관한 조항은 전민족이 절대 반대하는 바임에도 불구하고 하지 중장이 공동위원회 성명서 제5호에 서명한 것을 모스크바 결정의 전면적 지지로 인정하는 것은 민족의 총의를 왜곡하는 것으로서 이에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단호 반대함.

2)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하기 위하여 초청된 개인, 정당 및 사회단체에 대하여 모스크바 결정 외 실행에 관한 의사 표시의 자유를 구속 내지 금지함은 신탁통치를 조선민족에게 강요하는 것으로서 대서양헌장에 보장된 언론자유의 원칙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작년 6월 중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당시에 발표된 하지 중장의 성명에도 배치됨을 지적하고 이에 단호 반대함.

미군정 산하의 입법의원이 ‘반탁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남조선주둔군사령관이자 군정 최고책임자인 하지에 대한 정면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이승만 추종자들과 한민당이 그것을 주도했기 때문에 하지는 매우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 뒤에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월 24일에 발족한 반탁독립투쟁위원회(위원장 김구, 부위원장 조성환·조소앙·김성수)는 좌우합작위원회가 군정 하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려고 한다고 비난하면서 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매도하였다. 반탁독립투쟁위원회는 가가호호에 입춘축(立春祝)처럼 “절대반탁 자주독립” “반탁대길(反託大吉) 자주독립” 등의 표어를 붙일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즈음 한민당은 반탁투쟁에서 발을 빼고 있었다. 김성수, 장덕수, 김도연 등 한민당 대표들은 수 차례 미군정을 찾아가 입법의원에서의 반탁결의가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라며 이를 사죄했고, 미군정에 대한 계속적인 지지와 대중시위 형태의 반탁운동에 불참할 것을 약속했다(같은 책, 14쪽).

신탁통치 반대투쟁에서 같은 길을 걷던 한민당이 대열에서 이탈하자 김구가 배신감과 함께 곤혹스러움을 느꼈을 것은 분명하다.

김구는 2월 14~17일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족통일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한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반탁운동을 수단으로 해서 국민의회로 하여금 과도정부를 수립케 하려는 것이었다. 원래 김구는 만약 이승만이 조속히 미국 측으로부터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로 하여 이승만의 도미(渡美)에 찬성하였기 때문에 이젠 자기 길을 걷겠다고 나선 셈이었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이 이승만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3·1절을 전후하여 정부 수립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은 널리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조차 ‘아이들 장난’으로 조소하였으며, 이승만과 한국민주당도 “국제정세를 모르는 미숙한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 미군정은 3월 5일과 6일 김구,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을 주한미군 사령관실로 불러들여 잡아넣겠다고 협박했고, 이들은 이에 굴복하여 그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같은 책, 14~15쪽).

이승만 추종자들과 한민당이 미군정을 비판하거나 하지에 맞서는 듯하다가도 재빨리 변신해서 자파의 이득을 챙기던 것과 정반대로 김구는 ‘절대 반탁’과 ‘좌우합작’이라는 외길로 걸어갔다. 그러나 국민회의를 통해 과도정부를 세우려던 계획은 김구와 한독당의 정치적 미숙을 드러낸 과오였음이 명백하다. 결국 그런 정치적 판단 착오는 이승만 세력과 한민당의 정치적 입지를 굳혀 주는 기능을 한 셈이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공동위원회가 속개되자 국내 각 정치세력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좌익계와 중간파는 당연히 공동위원회에 적극 참여하였고, 우익계에서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공동위원회 참가는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신탁 문제는 임정 수립 뒤 민족 총의로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공위 참가를 결정하였다. 단정 운동을 벌이고 있던 한민당이 이승만의 지시를 거부하고 공위 참가를 표명하였다.

반탁을 주도하던 김구의 한독당에서도 일부가 이탈하여 공동위원회 참가를 표명하여, 이승만과 김구의 추종세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공위 참가 청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미소공동위원회’ 항목에서).

동아일보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던 5월 27일자 1면 머리에 「공위와 민족진영」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이제 인류는 화전(和戰)의 관두에 서 있고 민족은 흥망의 기로에 서 있다. 처참한 전쟁이 끝난 지 3개 성상(星霜), 인류는 그 평화 수립을 위하여 전쟁 이상으로 쓰라린 도탄 속에서 노력을 계속하여 왔건만 아직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미·소의 협조 없이 인류평화는 기할 수 없으니 이 인류의 요청에 의하여 미·소 양 우방은 이미 누차의 국제회의를 거듭하였고 이제 그 최후의 계선(界線)에 다다른 감이 없지 않으니 공위 성공 여부는 곧 미·소 협조의 관건인 동시에 인류평화의 관건인 것이다. (···)

이제 민족진영이 공위에 대하여 신탁통치 내용 여하, 민주주의 해석 여하에 의념(疑念)을 포회(抱懷)하는 것은 결코 공위의 중대성을 몰각하거나 조선의 세계사적 임무 수행에 등한하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알고 이 임무에 충실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38선을 철폐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할 조선사람이 어디 있으리요만 36년 동안이나 일제의 철쇄에 신음한 만치 자주독립은 이 민족의 지상명령인지라 이제 또다시 5년 동안이나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바이며 이것은 또한 우리의 세계사적 사명을 수행 불가능케 하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조선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조선에 열강의 세력을 부식(扶植)하게 되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민족을 분열시키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분열 하에서는 도저히 그 세계사적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존재를 보장할 길도 없기 때문이다. (···) 조선이 소련의 위성국이 된다면 미국이 불안할 것이요 미국의 식민지가 된다면 소련이 불안할 것이니 양 우방은 모름지기 조선에 있어서의 각축을 단념하고 오직 조선의 자주독립만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각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라 할 것이다. (·····)

(···)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민주개혁은 민족 대다수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봉건적 소유관계와 착취관계와 신분관계를 청소하는 것이요 이 조선적 현실을 떠나서 민주개혁이란 생각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을 미국식 민주주의니 소련식 민주주의니 하는 것은 한 개인의 추상론에 불과한 것이다. 또 한 번 강조하나니 미·소의 협조 없이 인류의 평화는 기할 수 없고 자주독립 없이 조선 문제 해결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공위와 조선민족의 주류를 대표하는 민족진영과의 상호관계가 촉진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동시에 지난 21일 공위 재개 이래 양 우방 대표가 절충의 분위기 속에서 부단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데 대하여 심심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이 사설은 ‘자주독립’이 ‘민족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5년 동안이나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미국과 영국이 그 결정을 뒤집지 않는 한, ‘한국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전제로 5년 동안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원칙이었다. 민족진영의 ‘신탁통치 절대 반대’는 좌익진영이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데 대한 입장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긴 안목으로 자주독립과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전략으로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사설에서 주장한 바와 달리 한민당은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6월 19일 74개 정당·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한독당의 혁신파와 민주파는 미소공위 참가를 주장하면서 각각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했다.

우익진영에서 고립된 이승만과 김구는 미소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 날인 6월 23일 전국 각지에서 반탁시위를 벌이도록 은밀히 지시했다.

7월 10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다시 결렬되었다. 반탁 문제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2천만 대 1천만’이라는 남북 간 인구의 불균형 문제가 타협을 어렵게 만들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됨에 따라 좌우합작운동은 더 이상 추진될 수 없었다. 게다가 1947년 8월 11일 미군정이 남조선노동당 당수(남로당) 허헌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 것이 좌익과 우익의 합작운동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좌익세력은 7월 27일 미소공위 진전을 요구하기 위해 ‘공위촉진대회’를 대대적으로 연 바 있었다. 그 이후 좌익이 8·15 기념대회에서 같은 취지의 대중집회를 개최하려고 준비하자 미군정은 8월 11일 ‘행정명령 제5호’를 발동해서 그 대회를 금지한 뒤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 검거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남로당은 공개적으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947년 9월 9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조선 문제 유엔 상정 / 마샬 장관 총회에 정식 요구」라는 기사가 크게 실렸다.

[플러싱 18일 발 UP 조선] 마샬 미 국무장관은 17일 사무총장 트리그브리 씨에 대하여 ‘조선’ 독립 문제를 총회의 의정(議程)에 첨가하기를 요구하였다.

마샬 미 국무장관은 17일의 유엔 총회에서 요지 다음과 같은 미국의 유엔총회에 대한 전 계획안을 천명하는 연설을 행하였다.

“1)조선 독립이 지연된 책임은 소련에 있다. 조선 문제에 관하여서는 소련과 합의에 도달하기 불가능하다. 총회가 신탁통치 기한 없이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는 수단을 강구하기를 나는 희망한다. 나는 추후로 조선에 관한 구체적 제안을 행할 예정이나 전 문제를 모든 국가의 공정한 판단에 제시하는 바이다.

2)미국은 안전보장이사회에 있어서의 5대국의 거부권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것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

3)55개국 유엔 총회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계속적으로 회의를 개최하라(이는 전 유엔가입국으로 감시위원회를 설치하고 연중무휴로 속개하여 세계를 감시하고 안보이사회가 실패하는 때에는 하시라도 건의를 행하여 문제 해결에 관여하려는 것이다).

동아일보, ‘조선 문제 유엔 상정’을 적극 지지

미국이 조선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기로 한 것은 모스크바 3상회의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조선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한 것을 무효화한 방침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유엔 총회에 조선 문제가 상정되면 미국이 의도하는 대로 결론이 내려질 것은 명백했다.

동아일보는 9월 21일자 1면 머리에 미국의 ‘조선 문제 유엔 상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설(「해결의 필연적 단계 / 조선 문제 상정과 유엔」)을 내보냈다.

세계의 환시(環視) 하에 개막된 유엔 총회는 우리의 불행한 예언이 적중한 듯이 벽두부터 풍진파용(風震波俑)의 사태를 전개하고 있다. 제2차 대전이 종언된 지 이미 2년을 경과하였으되 모든 전후 처리에 있어서 두 개의 세계는 평화를 지향하기보다도 새로운 투쟁에 개입(開入)하고 있음을 의식하게 될 때에 전 인류는 한갓 의혹과 불안에 잠겨 있거늘, 이러한 현실적 배경 하에서 열린 유엔 총회인지라 과연 그것이 그 본래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계 평화 수립에 있어서 거대한 일보를 내밟게 될는지, 그러지 못하고 역시 전후의 모든 국제적 회합과 방불하여 일개의 토론회에 그치고 말는지 우리는 전 인류와 더불어 절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의 사활 문제가 여기서 좌우될 것이매 심절(深切)한 심정으로 피안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우리는 그저 흥미를 만끽하려는 관중이 될 수 없다. (···)

(···) 총회는 열리자마자 마샬 미국 대표의 연설과 이에 대한 비신스키 소련 대표의 응수로써 그 전도는 암담을 예상케 한다. 통신에 의하여 쌍방의 소설(所說)을 대조하여 볼 때에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 바 있는가? 일괄적으로 우리는 마샬 씨의 연설에서 세계 평화 추구에의 노력을 간취할 수 있는 반면에 비신스키 씨의 연설에서는 그에 대한 하등의 성의도 발견할 수 없다. 세계 적화를 획책하는 그들의 거오(倨傲)와 사욕을 견제하는 것이라면 예의 부인권(否認權)을 행사하여 모조리 거부하겠다는 것만을 뚜렷이 표명하였다. 제2차 대전 후 오랫동안 은폐해 오던 적색 침략의 표피를 벗고 그 본연한 자태를 발로시키는 그 용기만은 훌륭하다. 그러나 건설적이고 우호적인 점은 어느 한 모퉁이에서나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 소련은 이미 각오하였을는지도 모른다. 그의 위성국가를 인솔하여 ‘제4인터내셔널’을 몽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민주주의적 기반 위에서 세계 평화를 애호하는 국가나 국민은 소련의 진의를 지실(知悉)한 바에는 그 방해공작에 구애(拘碍)할 것이 아니라 ‘세계의 선량’의 집단으로서 어디까지든지 그 공정한 판단 밑에서 평화 수립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더욱 더 유엔의 사명을 고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사태에 봉착하여 유엔은 전반 문제에 있어서 오직 그 신념에 의하여 매진할 줄로 확신하는 바이거니와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인 조선 문제에 있어서도 미국이 사리를 다하여서 한 유엔 상정에 대하여 소련의 부인권 행사가 분명함은 ‘독설의 연결’의 일절에서 지규(知窺)한 바이나 이에 대하여 미국은 그 확호(確乎)부동한 태도로써 나아가리라는 것을 우리는 충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모스크바협정에 의하여 조선 문제의 조속 해결의 방안을 작성하도록 위촉받은 미소공위가 합의에 도달치 못하여 정돈상태에 빠져 있으매 지도국가로서 당연히 도의적 책임을 느끼는 것이 국제적 양심이라 하겠거늘 그 양심의 소유자가 되기는커녕 공위를 아직도 이용하여 우리의 자주독립을 의식적으로 지연시킴으로써 그 야망 달성의 기회를 포착하자는 것은 민족적 분노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찌 그뿐인가? 이러한 사태를 무기한으로 계속시킬 수 없음을 감지한 미국이 조선 문제를 4국회담으로 전이(轉移)하자 함을 거부한 소련이매 탁치 기한이 없는 조선 독립을 달성하는 구체안의 유엔 상정을 반대할 것은 소련의 일관된 수법으로서 이미 예상되었던 바이니 별로 경악하는 바는 아니로되 최후까지 공정한 심리에 의한 해결을 기피하는 소련에 국토의 일부를 점령당하였다는 민족적 비극을 새삼스레 침통치 않을 수 없다. 오히려 국제적 양심에 위구(危懼)를 포회(抱懷)케 하는 소련을 제외하고서 국제정의의 성실한 판단에 의하여 해결의 방도가 바로 잡히기를 요망하는 바이니 우리는 조선 문제가 이제 당연하고 가능한 단계에 도달하였음을 다행히 여기는 바이다. 물론 유엔의 결정이 곧 조선 문제를 완전히 해결시킨 것은 아니다. 북조선은 의연 소련 및 그 괴뢰가 유린하고 있는 사실이 엄연히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유엔의 결정은 아무리 둔중한 소련일망정 정문일침(頂門一鍼)이 아니 될 수 없으니 우리는 세계 여론이 소련의 그 비정의성과 그 비양심적임에 공격이 집중될 것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며 또한 국내적으로 대비 체세(體勢)를 정비함으로써 소련 및 괴뢰로 하여금 그 과오를 후회케 할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음을 명기(銘記)하여야 할 것이다.

이 사설은 흑백논리와 편견의 극치를 보여준다. 미국은 ‘선’이고 소련은 ‘악’이라는 것이다. 미국 국무장관 마셜이 유엔 총회 연설에서 ‘조선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겠다고 밝힌 것은 소련과 사전 협의 없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파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그런 사실은 지적하지 않은 채, 소련 대표 비신스키의 연설이 “오랫동안 은폐해 오던 적색 침략의 표피를 벗고 그 표피를 발로시키는 용기”라고 비난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조선 문제가 아직 유엔 총회에서 논의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세계 여론이 소련의 그 비정의성과 비양심적임에 공격이 집중될 것”이라고 예단하고 있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위의 사설에서 ‘소련 및 괴뢰’라는 말을 통해 북한 체제를 소련의 ‘꼭두각시’라고 표현함으로써 극단적 증오심을 드러냈다. 그동안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주장하던 논조가 갑자기 살벌하게 변해버린 것이었다.

유엔, 남한 단독선거 결정

1947년 9월 23일 유엔 총회는 조선 문제를 상정하기로 의결했다. 소련 대표 비신스키는 “조선 문제에 대해 소련 측이 두 차례나 건설적 제안을 했는데 미국 측이 수락하지 않았다”면서 “유엔 총회는 합법적으로 조선 문제를 심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 문제를 유엔에 상정한 미국 측 행동은 미국이 자발적으로 가담한 유엔의 합의를 존중할 능력이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공격했으나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에서 더 이상 상정안 의결을 막을 수 없었다(동아일보 9월 25일자 1면).

미국이 조선 문제를 유엔에 상정함에 따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백지화할 수밖에 없게 되자 소련은 9월 26일 양군이 조선에서 동시에 철수하자고 제안했으나 미국은 바로 이튿날 “소련이 미소공동위원회 협의 대상 문제에 관해 미국 측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공위 재개나 소련의 양군 철수 제안을 거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10월 1일자 1면 머리에 올린 사설(「동시철병안과 우리의 주장」)을 통해 미국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면서 소련의 동시 철군 제안을 ‘비현실적 관념론’이라고 공격했다.

지난 9월 26일 61차 공위 본회담에서 소련 측 대표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조선 문제 해결에 있어서 공위의 불성공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해결책을 조선 사람에게 일임하기 위하여 1948년 초에 미·소 양 주둔군의 동시 철퇴를 주장하였다. 미·소 양 주둔군의 철퇴 문제는 미 국무차관 로베르 씨의 4국회의 제안 중에도 포함되어 있고 금반 유엔 총회에 마샬 씨에 의하여 제출된 신탁 없는 조선독립안에도 당연히 포함된 것으로 이제 새삼스럽게 우리를 놀라게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다만 명년 초라는 기한부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 공위를 더 계속하자는 의사 표시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런데 공위를 더 계속하자는 것이라면 거기에 해결의 서광이 있어야 할 터인데 의연히 비현실적인 신탁을 고집하고 있다. 환언하면 그 성명은 조선 문제 해결에 있어서 조선 사람의 자주성을 인정하자고 하면서 의연히 그 자주성을 무시하는 후견(後見)을 고집하고 공위가 난관에 봉착하였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 원인을 제거함이 없이 더 계속하자는 2차의 자가당착을 여실히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중의 모순당착을 통하여 우리가 간취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모순으로 생각되는 것도 그들에게는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 우리가 요구하는 자주성은 주권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요 단순한 자치가 아니다. 그러나 소련은 그러한 자주성은 한 개의 관념론이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백보를 논하여 이러한 생각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불타는 현실적 갈망을 만족시켜주지 않는 이 비현실성은 그러기에 한 개의 주관적 관념론에 불과한 것이다. (·····)

이상 고찰한 바와 같이 금반 소련 제안은 일견 조선 사람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실은 신탁을 고집하는 종래의 태도를 추호도 변경한 것이 아니며 이 태도를 변치 않는 이상 공위 타개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문서답 격으로 군대 철퇴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은 본말을 전도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 우리가 희망하여 마지않는 것은 소련이 진심으로 조선 문제 해결에 기여할 생각이 있다면 그 비현실적 신탁 고집을 일척(一擲)하고 세계의 여론으로써 신탁 없는 조선독립안을 결정하여 그 결정에 따라 철병해 달라는 것이다. 인류평화를 위한 협조적 태도로 유엔 총회에서 조선 문제를 진지하게 토의 결정해 주는 것이 동시 철병의 선행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동아일보는 이 사설에서 미국의 ‘조선 문제 유엔 총회 상정’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완전히 파기하고 조선민족의 분단을 기정사실화 할 수도 있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고 소련이 오로지 신탁통치만을 고집하고 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런데 그 이후 유엔 총회가 남조선 단독선거를 결정함으로써 분단이 항구화한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 바 있다.

1947년 10월 17일 미국은 미·소 점령군 관할구역에서 유엔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각각 선거를 치르자고 제안하는 결의안을 유엔 총회에 제출했다. 10월 30일 유엔 정치위원회는 그 결의안을 41 대 0(기권 7)으로 가결했다. 그러나 소련 대표 안드레 그로미코는 “소련은 즉시로 여하한 위원회라도 보이콧할 것”이라고 밝혔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는 사회주의국가들이 불참한 가운데 미국의 결의안을 43대 0으로 가결했다. 소련이 제안한 미·소 양군 철병안은 34대 7로 부결되었다.

동아일보는 한민당 계열의 단체들이 주최한 ‘유엔 결정 감사 총선거 촉진대회’에 관해 자못 흥분한 필치의 기사를 11월 16일자 2면에 실었다.

한배겸 성조(聖祖)께서 동방에 내리시고 또 3천 단부를 거느려 배달나라를 창건하신 4280주년의 거룩한 개천절 봉축식을 장엄하게 끝마치고 계속하여 지난 15일 상오 11시 반 때마침 유엔 총회에서 조선위원단 수립안이 43 대 0으로 가결된 외전(外電)이 반가움을 전하는 때를 같이하여 서울운동장에서는 비분감격에 싸인 10수만 서울시민과 청년단체 등이 마당과 인원을 함께하여 열린 유엔 결정 감사와 총선거 촉진 국민대회는 멀지 않아 자주독립을 약속받은 조선국민에게 새로운 희망과 굳은 결의를 가지게 하였다.

먼저 최규설 씨의 사회로 별항과 같은 김준연 씨의 유엔 결정 감사문을 낭독 통과, 남송학 씨의 딘 소장에 대한 환영문 낭독 통과, 남조선과도정부의 시국대책요강에 대한 양우정 씨의 결의문 낭독 통과가 있은 다음 대회 군중의 열의와 요망으로 대회장을 장식한 소련 국기를 내리고 이어 중간파와 좌익 등 12 정당 행동대책에 대한 결의문을 유진산 씨가 낭독하여 통과하고 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박순천 씨의 총선거 촉진 결의문을 낭독 통과하였다.

그리고 역시 대회의 총체적 환영으로 이종현 씨의 만장을 감격 흥분케 하는 강연이 있은 다음 하오 0시 함상훈 씨의 선창으로 태평양 저쪽까지 울릴 듯한 우렁찬 만세 3창을 남기고 원만 성대히 감격의 국민대회를 마치었다.

유엔 결정 감사 결의문

“우리는 오늘 유엔 결정 감사와 총선거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미 국무장관 마샬 씨가 견실한 정책으로 한국 문제를 유엔에 제출한 것과 또 유엔에서 반한(反韓) 대표를 제한 몇몇 회원국 외에도 한국 절대 독립을 위하여 무한 노력하신 것을 우리 3천만 민족은 감격을 마지아니하며 따라서 국제상 불공평한 대우로 말미암아 한국이 40년 동안 왜적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가 진주만 사건 이후에도 불공평한 대우는 해소되지 못하고 전망국(戰亡國)들보다 더 심한 경우에 처하여 지금까지 총선거도 못하고 정부도 없이 지낸 우리에게 마침내 공정한 처결을 주장한 유엔의 목적을 하루라도 빨리 성공하기 바라며 우리는 미국 정부와 군정장관이 1년 전부터 언약한 바 남한 총선거를 급속 진행하여 우리 국회를 세워서 유엔의 노력을 합의 협조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이에 대하여 오해가 없기를 바라며 절대 합작을 도모하는 우리의 성심을 양해하기 바라는 동시에 다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위의 전문을 유엔에 발송하기를 결의함.

유엔의 결정에 감사하는 한민당 세력이 미국과 유엔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발표한 ‘결의문’은 비문(卑文)과 악문(惡文)의 표본으로서 당시 그 정치세력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에 따라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개국으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위원단)이 1948년 1월 7일 입국했다. 남한 단독총선거를 향한 준비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