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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외치면서 ‘분단’으로동아일보 대해부 2권 -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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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8.11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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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6월 초 한반도에서는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전염이 하도 심해서 여러 곳에서 교통이 끊어질 정도였다. 그 무렵 이승만은 지방으로 유세를 다니면서 공산주의를 콜레라에 비유하는 투로 공격을 했다.

6월 3일 이승만은 전북 정읍에서 열린 연설회에서 남한에 먼저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의미의 주장을 했다. ‘단독정부’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공개적 발언이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노선을 지지하던 한민당의 기관지나 다름없던 동아일보에서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에 관한 기사를 볼 수 없고, 조선일보가 6월 5일자 1면에 그것을 보도했다.

  공위가 재개 안 되면 /  통일기관 즉시 설립 /  정읍서 이승만 박사 강연 요지

  (···)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共委)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이승만은 정읍에 이어 6월 4일 전주, 5일 이리, 6일 군산에서 열린 ‘환영회’에서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좌우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정치세력이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을 비판했다.

  이승만이 군산을 방문하기 위해 전북 지경리~군산 간 약 여덟 개 마을을 지날 때 모든 마을 주민들이 이승만을 환영하기 위해 길을 덮었고, 이리에서는 8천명의 군중이 빗속에서 이승만의 도착을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지방 순회를 통해 이승만의 개인적 인기는 귀국 이래 최고조에 도달해 있었다(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 역사비평사, 2005, 559쪽).


이승만, ‘민족통일총본부’를 단정 수립에 이용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가장 먼저 지지하고 나선 정파는 한민당이었다. 한민당은 장덕수를 중심으로 ‘선거대책’을 마련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어떤 형태로든 선거가 치러지면 240명의 후보자를 내세워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조직을 강화해서 전국의 각 동과 이(里)에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공산당의 침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6월 11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 전국지부장대회가 서울 정동교회에서이틀째 행사에 들어갔다. 참석자 1천5백여 명은 이승만을 총재로, 김구와 김규식을 부총재로 추대했다.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사항은 아래와 같다.

  1) 본 대회는 순수한 국민운동단체로서 완전 자주독립을 전취할 것을 결의함.
  2) 우리는 전 국민의 총의로 우리의 정권을 급속히 수립하기를 원하며 최단기간 내에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를 요구함.
  3) 미소공동위원회가 최단기간 내에 속개되지 않고 이대로 천연(遷延)될 시는 3천만의 총의로 통일정권 수립을 촉진할 것을 결의함(동아일보 1946년 6월 12일자 1면).

그런데 총회의 이런 결의와 달리 총재로 추대된 이승만은 연설을 통해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 땅에 발 못 붙이게 하자”고 주장하면서 “최고사령부라 할까,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할 것‘을 맹세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해체를 강요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통일을 위해 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하는 ‘총본부’를 두겠다고 밝힌 이승만은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민총)’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민총의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 민총은 그 이후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강력하게 펴나갔다. ‘단정’을 반대하던 김구가 그때 이승만의 독선적 운동에 왜 동조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1946년 7월 9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이승만의 요령부득인 ‘통일론’이 크게 실렸다.

  통일은 독립    의 제1보 / 오래간만에 이 박사 시사 종횡담

  이승만 박사는 8일 오전 11시 돈암장에서 비서처를 통하여 출입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은 담화 발표와 문답이 있었다. (·····)
  이번에 설치된 민족통일총본부는 일반 민중의 요구를 따라서 한 것이니 민족통일이 독립 완성의 초보임을 각오하는 모든 남녀는 크게 환영하는 터이다. 처음에 조용히 시작하여 특별한 권위를 표시치 아니하나 전 민족의 공심(公心)과 애국 성의를 합하여 세운 기관이므로 차차 발표되는 대로 그 필요와 책임을 사람마다 깨달을 터이니 사소한 장애나 오해가 없을 줄 믿는다.
  문: 합작 문제에 대한 이 박사의 의향은?
  답: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미 설명한 바 있으니 이제 더 말할 것도 없다.
  문: 4상회의에서 조선 문제가 토론되리라는데 이에 대한 박사의 견해는?
  답: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모스크바협정이 아직 실행되지 못하였으므로 한국에 대한 중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였는데 우리가 갈망하고 있는 바를 연합국 간에서 잘 알 것이므로 4상회의에서 무슨 발표가 있을 줄 믿는다.

  당시 분단된 한반도에서 남과 북의 통일은 ‘좌우합작’ 또는 ‘연합’ 형식 말고는 달리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6월 11일 독촉 전국지부장대회에서 총재로 추대된 이승만은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 땅에 발 못 붙이게 하자”고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런데 7월 9일 기자단에 대한 담화와 문답에서는 “민족통일이 독립 완성의 초보”라고 아리송한 말을 했다. 그리고 합작 문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의견을 내지 않았다. 나중에 드러났듯이 이승만은 오직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무력통일’ ‘북진통일’ 말고는 아무런 생산적 정책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좌우합작운동 ‘7원칙’과 한민당의 반대

이승만이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단독정부론’을 주장하자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위한 접촉이 시작되었다. 6월 14일 우익 측의 한민당 총무 원세훈, 좌익 측의 민전 의장단 허헌 등이 참여한 ‘좌우합작 4자회담’이 성립되었다.

  (···) 뒤이어 우익 쪽 대표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김봉준과 좌익 쪽 대표 여운형·성주식·정노식·이강국 등으로 구성된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하여 덕수궁에서 제1차 회담이 열렸다(1946.7.25.)
  이에 따라 좌익 쪽에서 먼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 지지와 미소공동위원회 속개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 무상몰수·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 주요 산업 국유화, 친일파·민족반역자 제거, 남한 정권의 인민위원회에의 이양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좌우합작 5원칙’을 내놓았다(7.26).
  우익 쪽에서도 신탁통치 문제는 임시정부 수립 후에 해결할 것, 정치·경제·교육과 모든 제도·법령은 균등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임시정부 수립 후에 구성될 국민대표회의에서 결정할 것,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징치하되 임시정부 수립 후 즉시 특별법정을 구성하여 처리하게 할 것 등을 중요 내용으로 하는 ‘좌우합작 8원칙’을 제시했다.
  좌우 양측이 내어놓은 합작원칙 가운데 차이가 두드러진 것은 역시 신탁통치 문제와 토지 및 중요 산업의 처리 등 경제정책 문제, 그리고 친일파에 대한 처리 문제 등이었다. 이 문제들이 바로 좌우합작운동 앞에 가로놓인 큰 장애요인이기도 했다(<고쳐 쓴 한국현대사>, 340~341쪽).

좌우합작위원회는 여러 차례 모임을 가졌으나 합작원칙에 차이가 있는 것만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회담을 열지는 못했다. 9월 5일 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합당을 발표하자 미군정청은 9월 6일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을 비롯해서 이강국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좌우합작운동에 공개적으로 참여할 수 없게 된 박헌영은 10월 11일 영구차 안의 관 속에 숨어 월북한 뒤 38선에서 가까운 해주의 사무실에서 남한의 좌익세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좌익의 주역인 박헌영이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양 측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도록 종용했다. 그러자 좌우합작위원회는 10월 4일 좌익의 5개 항 및 우익의 8개 항을 절충한 ‘좌우합작 7 원칙’에 합의하고 10월 7일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10월 8일자 1면 머리에 그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합작의 7 원칙 발표 / 민주역량을 총집결 / 입법기관에 대한 건의도 결정 / 7일 오후 좌우 대표 정식 회담

  조선의 좌우합작은 민주독립의 1단계요 남북통일의 관건인 점에 있어서 3천만 민족의 지상명령이며 국제민주화의 필연적 요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간의 복잡다단한 내외정세로 오랫동안 파란곡절을 거듭해 오던 바 드디어 지난 4일 김규식 박사 댁에서 좌우 대표가 회담한 결과 과반(過般) 발표한 좌익의 5원칙과 우익의 8대책을 절충하여 다음과 같은 7원칙을 결정하였는데 다시 7일 오전 중에 우익 대표 5 씨와 좌익 대표 장건상 씨, 박건웅 씨가 김 박사 댁에 회합하고 이를 최후 결정한 후 당국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
  본위원회의 목적: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조국의 완전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본원칙을 아래와 같이 결정함.
  1)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할 3상회의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遞減)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유상으로 분여(分與)며 시가지의 기지와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여 사회·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 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 하에서 검거된 정치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표들이 합의해서 결정한 ‘7원칙’이 실시된다면 먼저 남쪽에서 북쪽에 대해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의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남과 북의 인구 차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장벽이 높겠지만,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이 최선의 시도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표를 보내서 ‘7원칙’에 합의하도록 한 한민당은 “모호한 점들이 많다”는 이유로 즉각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10월 9일자 1면에 실은 기사(「7원칙과 각계의 반향 / 탁치 반대를 재천명 / 한민당」)에서 한민당의 입장을 맨 앞에 내세웠다. 

  소위 합작 7원칙 중 중대한 몇 가지 정책에 대하여 모호한 점이 있는 것은 유감이다.
  1)제1조에 있어서 “3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을 기 함” 운운한 것은 한민족의 치명상인 신탁통치 문제에 대하여 하등 언급한 바 없으므로 본당은 이에 전 민족적 총의를 대표하여 신탁통치 반대의 태도를 재천명하는 바이다.
  2)제3조에 있어서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경작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은 본당이 원래부터 주장하는 바이나 유상매수한 토지를 무상분여한다는 것은 국가의 재정적 파탄을 초래하게 될 것이요 재정적 파탄을 면하려면 부득이 농민에게 중세(重稅)를 부과하게 될 것이며 또 무상분여한 토지는 결국 경작권만을 인정하고 농민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고 말지니 이는 농민에 대한 일시 기만정책이 됨을 불면(不免)할 것이다. 이에 본당은 단호히 반대하는 것이다.
  3)당초 민주의원과 비상국민회의 상임위원과 연석회의에서 결정한 8 기본 대책과 상위(相違)된 점이 많음을 차(此)에 지적해 둔다.
  4)합작위원회의 합작원칙은 동 위원회 자체 내의 약정이요 장래 설치될 입법기관이나 기타 정당 및 사회단체에 대한 구속력이 없는 것을 차제에 부기(附記)하여 둔다.

집행부는 물론이고 핵심적 당원들 가운데서도 지주계급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민당은 토지개혁에 대한 정책으로 ‘유상매수, 유상분배’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좌우합작 7원칙에 따라 유상매수, 무상분여가 이루어진다면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가 헐값으로 정부에 넘어가 무상으로 농민들에게 분배될 것이 분명했으므로 ‘국가의 재정적 파탄’과 ‘농민의 소유권 부정’을 구실로 7원칙 자체를 거부했던 것이다.

한민당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7원칙의 제4항에 명시된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처리’는 그 당의 수석총무를 맡고 있는 김성수를 포함해서 악명 높은 친일행적을 보인 다수 간부들의 운명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조치였다. 한민당이 7원칙에 대해 서둘러 반대의사를 밝힌 이유 가운데는 친일파 문제가 가장 우선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한민당 지도부의 그런 결정과 성명 발표는 당장 반발을 일으켰다. 좌우합작위원회에 당 대표로 참가했던 총무 원세훈이 즉각 탈당을 했던 것이다. 동아일보 10월 10일자 1면에 실린 기사는 아래와 같다.

  한민당 원세훈 씨 탈당 / 합작 7원칙에 이념 상이(相異)로

  합작위원의 1인이며 한민당의 총무로 있는 원세훈 씨는 합작 7원칙 발표를 계기로 하여 정치적 이념과 토지정책에 대한 견해의 상위(相違)로 한민당을 탈당한다는 성명을 9일 오전 11시에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7일에 발표된 좌우합작 원칙 중에서 민주독립을 보장한 3상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명백한 문구에 대하여 회의적 태도를 취함은 이해키 곤란하다.
  2)토지의 체감매상과 무상분여 등에 대하여 국가재정의 부담이 과중할까 우려함은 애국적 견지에서 그럴 듯도 하다.
  입법기관에서 토지 문제를 신중히 토의할 것이지만 조선에서 사유재산제를 채용할 것은 확정적인즉 모든 소작인에게 응분의 토지를 분여하고 소유권을 허여하고 일반적 세제에 의하여 징세한다면 그 무엇이 과중 부담일 것이며 기만될 것인가?

원세훈과 함께 한민당을 탈당한 중앙위원 15명은 이병헌, 박명환, 송남헌, 이순탁 등이었다. 이어서 김병로, 김약수 등 원로와 중진급 당원 270여명이 당 지도부가 지주제 유지를 고집한다고 비판하면서 한민당을 떠났다.


이승만의 단독정부론과 김구의 반대

좌우합작운동은 처음부터 미군정의 지원을 받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한반도 문제 해결을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던 미국은 반탁운동을 강력히 펼치고 있던 이승만과 김구 계열의 우파세력을 일방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으므로 좌우파와 중도파가 참여하는 합작운동을 정책과 재정 양면으로 도왔던 것이다.

  미군정은 중도세력의 집권기반을 굳히고 미군정에 대한 지지를 넓히기 위해 좌익 쪽의 반대 속에서도 김규식을 의장으로 하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고(1946.12.12.). 안재홍을 장관으로 하는 ‘남조선과도정부’를 발족시켰다(1947. 2.5). 간접선거로 당선된 ‘입법의원’의 민선의원 45명에는 부정선거 말썽을 빚으면서 이승만계와 한민당계가 대부분 당선되었고, 관선 의원 45명은 좌우합작위원회계를 비롯한 중도노선의 각계 인사가 임명되었다(같은 책, 343쪽).

1947년 새해가 되자 동아일보는 1월 1일자 1면 머리에 올린 사설(「3·1적 3대 계명[戒銘] / 대포용, 대희생, 대용맹」)을 통해 극좌와 극우의 독선을 비판하며 대승적 단합을 촉구했다.

  (···) 공식에 사로잡히고 종파에 굳어진 대로 음성의 지하적 수법과 고의의 파괴적 공작을 위주(爲主)하는 세칭 극좌는 출발점이 다른지라 동도(同度)하기 어려운 방향이 자타 간에 있으리라. 구각에 파묻히고 독선에 치우친 채 고루한 정와적(井蛙的) 소견과 저열한 목전적(目前的) 영욕에 급급하는 세칭 극우는 반려되기 어려운 국면이 피아 간에 있으리라. 그러나 캐고 따지면 모두 다 조선의 조선인이며 조선인으로의 조선일 것이매, 조선의 독자성과 조선의 특수상을 양심적으로 이해하고 조선의 전체성과 조선의 순치상(脣齒相)을 양심적으로 자각한다 할진대 대승적으로 ‘약진’의 합일점이 없지 않을 것이며 대국적으로 ‘권존(倦存)’의 공통률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는 가능 불가능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 불가위라는 당위적 요청 하에서 불가능의 가능도 서기(庶幾)하려는 이 단계의 거족적 염원인 까닭이다. 상용키 어렵다는 세남(世柟) 양극의 좌우라도 이 같기를 희구하려든 하물며 척촌(尺寸)의 거리와 초록의 색차(色差)밖에 안 되는 ‘너’ ‘나’의 존재랴? (·····)
  신지(信地)를 향하여 그대로 직진하자. 자주의 단일 목표를 향하여 자력의 단일전선으로 일로 통진(通進)하자. (···) 거듭 부르짖거니와 심상(尋常)한 포용과 심상한 희생과 심상한 용맹이 아니라 대포용이요 대희생이요 대용맹이다. 정해(丁亥) 1년의 민족적 계명은 이것이며 거족적 운동은 이 계명의 실천일 뿐이다.

동아일보의 이 ‘새해 사설’은 분단된 민족의 처지에서 본다면 나무랄 데 없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구체적 표현들을 분석해보면 공허한 ‘민족대단결론’이라는 것이 금세 드러난다.

이 글에서 “공식에 사로잡히고 종파에 굳어진 대로 음성의 지하적 수법과 고의의 파괴적 공작을 위주하는 세칭 극좌”는 남조선노동당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구각에 파묻히고 독선에 치우친 채 고루한 정와적 소견과 저열한 목전적 영욕에 급급하는 세칭 극우”는 어떤 세력일까? 이승만을 추종하는 극우·반공주의자들, 김성수가 대표하는 한민당의 친일·매판적 세력 말고 따로 누가 그런 지칭을 받아야 할까?

특히 한민당은 좌우합작위원회의 합작 7원칙조차 거부한 바 있는데 어떻게 극좌세력과 ‘대포용, 대희생, 대용맹’의 길로 직진할 수 있겠는가? 한민당의 기관지나 다름없는 동아일보는 새해 첫날부터 탁상공론을 넘어, 벌판에서 허공을 향해 구두선을 외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동아일보가 그런 사설을 내보내기 한참 전인 1946년 11월부터 극우세력의 대표 격인 이승만은 미국에 가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로비를 할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12월 1일, 이승만은 미국행 배를 타기 위하여 인천으로 가고 있었다. 이승만은 성대한 환송식을 받으면서 인천으로 향하였지만, 그날로 은밀히 서울로 돌아와 12월 4일 미군정에서 제공한 비행기로 출국하였다. 그는 도쿄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맥아더를 만난 뒤 12월 오후 늦게 도쿄를 떠났다. (·····)
  12월 7일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자신이 측근인 임병직, 임영신, 김동성, 굿펠로우, 스태거스, 올리버 등을 가동시켰다. 이승만은 한국이 통일국가를 건설할 때까지 전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방안을 미 국무성에 제출하는 등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외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방미 기간 동안 이승만은 미 국무성 내 일부 분자가 “미국의 대한 정책을 방해”하고 있으며, “하지 중장은 공산분자를 도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구 구실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그는 “하지 중장이 남조선입법의원의 상당한 수의 관선의원직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배정, 임명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천하의 반공주의자 하지를 용공으로 모는 이승만의 반공은 이후 더욱 치열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 319~320쪽).

이승만이 미국에서 남한에 단독정부를 먼저 세우려고 전방위 로비를 펼치고 있던 1947년 2월 10일, 한국독립당의 김구가 「3천만 동포에게 경고(敬告)」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론과는 달리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주장한 것이었다. 조선일보 2월 12일자 1면에 실린 성명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합작위원회: 우리는 전민족통일을 수요(需要)하는 것이다. 전민족통일을 수요하므로 좌우합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합작공작을 위하여 진심으로 노력한 몇 분에 대한 우리의 경의는 감(減)할 바이 아니거늘 일시 감정상 충동으로써 그들에게 모욕을 가하려는 것은 천만부당한 것이다. 더구나 해회(該會)를 영도하는 김규식 박사는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하였고 탁치반대자로는 누구보다 철저한 터인데 그를 찬탁자로 몰아넣으려는 것은 일종의 공심(公心)을 떠난 모략으로밖에 인정할 수 없다. 중앙노선은 정치이상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을 이상으로 하는 중간당도 있는 것이다. (·····)
  국제관계: 한국도 국제의 일환인 만큼 국제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국제도 이 환절(環節)을 무시하고는 평화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상호 우인(友人) 되는 요결은 역(力)의 강약, 물(物)의 빈부 또는 색(色)의 여하에 구애됨이 없이 절대 평등한 지위에서 상호 동정 협력 양해함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불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은 절대 거절할 것이다. 우리는 국제적 평등을 얻을 때까지 투쟁을 계속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절망하지 않을 때까지는 우리 투쟁은 평화적이며 이지적이며 거족적이어야 할 것이다. 평화적임에서 동정을 획득할 수 있으며 이지적임에서 주밀(周密)한 계획을 가질 수 있으며 거족적임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전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유리한 국제적 관계는 이에 순응하여서 완전히 파악할 것이며 불리한 국제적 관계는 진리로써 투쟁하며 화기롭게 유도하여서 호전시켜야 할 것이다.

김구가 이 성명에서 특히 강조한 것은 좌우합작을 반대하면서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하려는 이승만과 한민당의 노선이 통일의 길을 가로막는다는 것, 그리고 조선공산당이 급진적인 전략만을 고집하는 것 역시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깨어지더라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워 미국의 ‘우산’ 아래 들어가서 소련을 적대국으로 만들려는 이승만 일파의 행태가 국제적 평화를 깨뜨리고 조선의 통일에 지장을 주리라고 경고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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