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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정판사 위폐 사건’, 광복절, ‘10월 항쟁’동아일보 대해부 2권 -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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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8.04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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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1일은 조선인들이 해방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3·1절’이었다. 이날을 하루 앞둔 2월 28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격정적인 내용의 사설이 실렸다.


‘만대에 빛날 최고의 국경일’

  해방 후 처음 맞는 자유의 ‘국경일’ / 명일이 3월 1일 / 만대에 빛날 최고의 국경일

  명일이 3월 1일이다. 국혼(國魂)의 불멸을 자증(自證)하여 우리가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날이다. 민족의 건재를 자인(自認)하여 우리가 자주민임을 자손만대에 선유(宣諭)한 날이다. 유구 5천년 역사의 권위를 배경으로 삼아 숙적의 아성을 향하여 진군하던 날이다. 이리하여 3천리 방방곡곡에 청혈(淸血)이 흐르고 생육(生肉)이 찢어지던 날이다.
  인류평등의 대의를 천하에 극명(克明)하고 민족자존의 정권(正權)을 영겁에 향유하는 ‘그 길’이 오직 ‘이 길’임이 있을 뿐임을 믿어 의심치 않던 날이다. 세계 개조의 대운(大運)과 병진하자고 주장하던 날이 즉 이날이며 인류 공존의 특권을 전취하자고 결의하던 날이 바로 이날이다. 그리하여 완전히 자주독립을 확보하기까지 ‘최의의 일인 최후의 일각’을 맹서하여 20유 (有)8년을 역과(歷過)한 현재에 이르고, 다시금 내두(來頭)에 걸쳐 여력의 축적과 발양을 예료(豫料)한 그날이 즉 명일의 3월 1일이다.
  이날은 수욕(受辱)의 통한 중에서 빚어진 날이매 그 결심이 비장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날은 거의(擧義)의 결의 중에 우러난 날이매 그 기개가 장엄치 않을 수 없었다. 금년 금일에 이르러 이날을 기념하고 이날을 동경(同慶)하려는 이 순간을 당하여 우리는 만감이 일시에 쏟아짐을 금할 수 없다. 희비의 감회가 한데로 얽히고 고락의 정경이 그대로 설키매 도리어 담담한 양, 명경지수의 심경에 허실생백(虛失生白)의 섬광을 보게 되니 감(感)이 극하고 정이 절(切)한 소이인가? (·····)
  기미운동이 원래 순일무잡(純一無雜)한 전 민족적 단일전선이었으므로 이를 기념한다 할진대 그 이념 그 지표를 전적으로 포괄한 민족적 단일적 기념일이어야 할 것이다. 대립을 능사로 하는 이른바 좌파가 이 ‘기념’을 계기로 합일의 아량을 보이고 동족의 양심을 가진다 할진대 방가(邦家)를 위하여 얼마나 행심(幸甚)할 것인가? 그러나 3·1운동의 구현 망명정권의 무시로써 출발한 ‘인공(人共)’ 졸작(卒作)의 수단과, 독립을 상조(尙早)라 하여 타력의 관리를 자원(自願) 지지한다는 방침을 고집한다 할진대 합일도 물과 기름일지니 무의미한 합일이요 불순한 합일이다. 반탁의 중론을 이용하여 반반탁(反反託)을 강행한 수법 그대로, 민주와 민족의 명목 하에서 공산과 계급의 내연(內燃)을 의도하는 권모(權謀) 그대로, 만약 ‘3·1 기념’의 명분 하에서 또다시 ‘3·1’을 욕되게 하는 방자를 감행하여서는 첫째 3·1에 희생된 열사의 충혼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동아일보 대해부 1>에서 상세히 살펴보았듯이, 동아일보는 ‘3·1 독립운동’의 열기와 조선민중의 뜨거운 저항에 놀란 일제가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꾸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태어난 것이었다. 나중에 사주가 된 김성수를 비롯해서 동아일보를 이끌던 핵심 인물들 가운데는 3·1운동에 열심히 참여한 사람도 극소수가 있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모조리 친일파로 변신했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대일본제국’의 ‘반도 기관지’나 다름없었다.

만약 동아일보가 1945년 12월 복간하면서 김성수를 우두머리로 하는 친일파들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야말로 자주독립의 대의에 충실한 참신한 인물들로 진용을 개편했다면 위와 같은 사설을 내보냈다 해서 나무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성수는 여전히 사주이자 사장으로서 보수정당인 한민당의 수석총무를 겸한 채 신문 제작을 지휘·감독하고 있었다.

위의 사설에서 동아일보는 좌파를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대립을 능사’로 하는 좌파가 “반탁의 중론을 이용하여 반반탁을 강행”하는 것은 “민주와 민족의 명목 하에서 공산과 계급의 내연을 의도하는 권모”로서 “‘3·1’을 욕되게 하는 방자”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당시 우파는 모스크바 3상회의가 내린 결정 가운데 유독 ‘신탁통치’만을 문제 삼아 결사 반대했고, 좌파는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에 찬성하고 있었다. 좌파가 애초의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서는 과정에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 민족적 단일전선’을 위해서는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의 치욕스런 친일 행적은 까맣게 잊은 듯이, 항일 독립투쟁에서는 오히려 적극성과 치열함을 보였던 좌파를 통틀어 반민족분자로 몰아붙이고 있다. 그야말로 극우 반공을 최선의 이데올로기라고 광신하는 집단의 독선적인 행태이다.


‘정판사 위폐 사건’에 대한 동아일보의 맹공

미군정청은 초기에는 조선인들에게 언론자유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찬탁과 반탁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몰아치던 1946년 5월부터 좌파 언론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탄압은 이른바 ‘정판사 위폐 사건’을 빌미로 한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에 대한 발행정지 처분이었다. 
동아일보는 5월 16일자 2면 머리에 미군정청 공보부의 발표문을 그대로 실었다.

  지폐위조사건 진상 전모 / 공보부서 정식 발표 / 위조 일당은 16명 / 전부가 공산당원 / 이관술, 권오직은 피신

  시내 장곡천정 정판사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의 위조지폐 사건은 그간 중앙경찰서와 제1관구경찰청(수도경찰청-인용자)에서 엄중 취조 중 그 관계자 전부가 조선공산당원들이라는 것을 15일 공보부에서 다음과 같이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공보부 특별발표 전문: 9백만 원 이상의 위조지폐로써 남조선 일대를 교란하던 지폐위조단 일단이 일망타진되었다고 조선경찰 제1관구 경찰청장 택상 씨가 발표하였다.
  경찰 보고에 의하면 이 지폐위조단에는 16명의 인물이 관계되었는데 그중 조선공산당 간부 2명, 조선정판사에 근무하는 조선공산당원 14명이라고 한다.
  이 지폐위조단은 해방일보를 인쇄하는 조선정판사 소재지인 근택빌딩에서 지폐 위조를 하였는데 이 근택빌딩은 조선공산당 본부이다. 이상 공산당 간부 2명은 아직 체포되지 않았으나 이미 체포장이 발포되어 있는 중이며 그들은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인 이관술(46)과 조선공산당 집행위원 겸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45)이다. 
  공산당은 성명을 통해 “사건 관련자 14명이 모두 조선공산당 당원이라고 했으나 사실과 다르며, 위폐를 근택빌딩 지하실에서 인쇄했다고 하나 그곳에는 인쇄기를 설치한 사실이 없다”고 항의했다.

5월 18일 미군정은 수백 명의 미군 장병을 동원해서 조선공산당 본부와 해방일보사를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한 뒤 해방일보를 정간시켰다. 그 신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간당했다. 해방일보는 하루 2만여 부를 발간하던 신문으로 10만 부 이상을 인쇄하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보다는 규모가 작았으나 공산당의 노선을 대변하는 대표적 언론이었다.

동아일보는 ‘정판사 위폐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을 맹렬히 공격하는 기사를 잇달아 실었다.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 「위조지폐와 경제계 / 각 지방에 감정차 은행원을 급파」(5월 17일자 1면)
  · 「백일 하에 폭로된 공산당원 지폐 위조 사건의 죄상 / 경제 교란과 배후의 마수」(5월 17일자 2면)
  · 「공산당원 지폐 위조 사건과 / 각계의 반향과 대책 / 민심 불안이 확대- 경기도 재무부장 담 / 공산당 해체로 / 천하에 사과하라-한민당 선전부장 담」(5월 18일자 1면)
  · 「위조지폐와 우는 사람들! / 지폐 교환객이 쇄도 / 감정해 위조이면 전부 몰수」(5월 18일자 2면)
  · 「조선공산당원 지폐 위조 사건 속보 / 사건은 제2단계 / 범인을 은닉하면 당수에도 책임 / 관계당국과의 일문일답」(5월 19일자 2면)
  · 「위조지폐를 인쇄한 근택빌딩을 폐쇄/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는 폐간」(5월 20일자 2면)
  · 「위폐는 국가의 대죄 / 러치 장관의 중대 언명 / 최극형으로 처단! / 공산당원 위폐 사건 어디까지든 추궁」(5월 22일자 2면)
  · 「위폐 9백만 원 어디 갔나? / 먼저 신문사에 비화 / 00, 해방, 경리부장 취조」(5월 24일자 2면)
  · 「위폐 최후 처단의 서막! / 범행 배후와 용도 판명 / 경무부장실에서 극적 취조 / 해방일보에 50만 원 / 현대일보에 28만 원 제공」(5월 26일자 2면)
  · 「공산당원 위폐 사건 실지로 인쇄 시험」(5월 29일자 2면)
  · 「진폐 못잖은 위폐 / 공산당원 위폐 감정 결과/ 위폐 시험 의운(疑雲) 일소」(5월 30일자 2면)
  · 「공산당원 위폐 사건에 또 새로운 괴사(怪事) / 경기도 경찰부장 발표 / 담당 취조형사 주택에 / 야반 괴한 5명이 돌현(突現)」(5월 31일자 2면)

‘정판사 위폐 사건’에 대한 동아일보의 보도는 참으로 집요했는데, 시종일관 초점은 공산당의 ‘조직적 범죄’라는 데 맞춰졌다. 물론 모든 기사의 내용은 미군정청이나 경찰의 발표를 전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미군정청은 5월 30일 조선공산당을 근택빌딩에서 퇴거시킨 뒤 공산당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주서울 소련영사관에 철수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6월 24일 소련영사관은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정판사 사건’ 피고인들(수사를 받고 있던 이관술은 제외)에 대한 재판은 1946년 7월 29일에 시작되었다. 기소된 지 불과 열흘만이었다. 서울재판소 주변에는 60여 명의 무장경관이 배치되었으나 군중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모략공판을 분쇄하라!”, “피고는 무죄다!”, “일제시대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등 구호와 함께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로 시작되는 「해방의 노래」와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비겁한 자는 가려면 가라”가 첫 소절인 「적기가」가 울려 퍼졌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지시로 무장경관이 수백 명으로 증원되어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했다. 군중은 남대문을 지나 시청 앞까지 시위를 벌였다.(안재성, <이관술 1902~1950>, 사회평론, 2006, 235~238쪽).

‘정판사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을 궤멸시키려던 미군정과 우파 세력의 시도는 좌파를 지지하는 대중뿐 아니라 진보적 인사들의 격렬한 저항과 비판에 부닥쳤지만, 검찰은 10월 21일 열린 제21회 공판에서 이관술, 박락종 등 4명에게 무기징역을, 신광범 등 6명에게는 징역 10~15년을 구형했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라고는 피고인들이 고문을 못 견뎌 했다는 자백과 1만원 권 위조지폐 2장뿐이었다. 그러나 판사 양원일은 11월 28일 공판에서 검찰의 구형대로 형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1947년 4월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한 가지 유의미한 사실은 조재천과 함께 이 사건의 검사를 맡았던 김홍섭의 거취다. 김홍섭은 기독교 신앙이 깊은 데다 대단히 양심적이고 원칙적인 인물로 알려져 동료 법조인들로부터 ‘사도법관’이라는 칭송을 듣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판사 사건의 선고공판을 얼마 앞둔 시점에 돌연 자진 사퇴를 해버린다. 불의에 대해 엄격하기로 이름난 그가 왜 마지막 선고를 앞두고 사퇴를 해버렸을까? 그는 이후로는 거의 종교인처럼 살다가 사망한다. (같은 책, 278쪽)

‘정판사 사건’은 미군정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이 총력을 기울여 좌파를 향해 펼친 공세의 한 방편이었다.
 
찬탁 사건에 이은 위폐 사건은 우익을 급속히 활성화시켰다. 우익은 5월 18일 종로기독청년회관에서 반탁학생총연맹 주최로 성토대회를 열고 ‘험악한 살인적 간계’, ‘적귀(赤鬼) 조선공산당 타도’, ‘천인공노할 민족적 죄악’ 등의 살벌한 용어를 써가며 “조선공산당 타도전에 총력을 개시하자!”라고 선언했다. 이후 우익의 공산당 공격은 심각한 상태로 발전해 공산당원에 대한 테러, 반공집회가 계속되었다.(같은 책, 255쪽)


미군정의 무자비한 좌익언론 탄압

조선정판사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의 노골적인 지원과 옹호를 받게 된 우파 세력은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자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소련의 지지를 받아 북조선의 체제를 정비한 김일성은 남의 조선공산당이 존립에 위협을 받게 되자 자신이 주도하는 조선노동당 창당 작업에 들어갔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던 그는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공산당 조직의 수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5월 29일 군정법령 제88호(‘신문 기타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건’)를 공포했다. 이 법령의 뼈대는 ‘발행 허가제’로서 일제강점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법령의 공포 이후 좌익 계열의 새로운 정기간행물 신청은 허가되지 않았다. 그래서 좌익 계열은 기존 간행물의 판권을 새로 사서 제호만을 고쳐 발행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반면 우익지는 더욱 기세등등했다. 특히 극우지인 대동신문은 폭력 선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1946년 5월 16일 이 신문은 여운형 피습 사건을 기린 「민족혼을 가진 청년에게! 청년지사 박임호 군의 뒤를 이어라」라는 장문의 기고를 게재했다. 이는 공공연하게 지상(紙上)으로 살인을 교사(敎唆)한 것이었다. 이 신문은 무기정간 처분을 당했지만, 정간 처분은 3주 만에 풀려 6월 6일에 복간되었다. 대동신문의 경우처럼, 신문이 노골적으로 폭력행위를 교사할 정도였으니 당시 상황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 246쪽).

미군정은 콜레라 기사를 잘못 다루었다는 이유로 7월 7일 자유신문의 정인  익과 정진석, 조선인민보의 임화와 김경록, 대한독립신문의 고영환과 오장환을 구속했다(송건호, <한국현대언론사>, 삼민사, 1990, 53쪽).
미군정은 9월 7일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등 조선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남조선의 사회주의 세력을 뿌리 뽑으려고 군정청장 하지가 직접 내린 명령이었다.

그 무렵 미군정은 ‘미국 축출’을 선동한 혐의로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을 정간시키고 기자 여러 명을 검거해서 군사재판에 넘겼다. 그 뒤 조선인민보는 정간이 풀리지 않은 채 폐간되었다. 현대일보는 우파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의 서상천에게 발행권이 넘어갔고, 중앙신문은 1947년 4월 우파 세력이 인수했다.

좌파 세력이 정기간행물 허가제를 피해 가려고, 판권이 취소되면 새로 판권을 사서 제호를 바꾸는 방식으로 언론 활동을 계속하자 미군정은 공산당이 쓰고 있던 정판사 사옥과 시설 일체를 압수해서 천주교 재단에 넘겨주었다. 천주교는 구한말에 발행하던 경향신문 제호를 되살려서 10월 6일에 복간 제1호를 냈다.

미군정의 좌파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자 조선공산당은 9월 24일 ‘철도종사원 대우개선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남조선 철도 총파업’을 일으켰다. 미군정에 대한 요구조건은 ‘일급제 반대’, ‘임금 인상’, ‘해고와 감원 반대’, ‘민주적 노동법령 즉각 실시’ 등이었다. 철도노동자 4만여 명이 총파업에 가담하자 남한의 철도가 사실상 기능 마비 상태에 빠져버렸다.

출판노조 산하의 서울 시내 신문사 종업원들도 26일부터 동조파업에 들어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총파업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쌀을 노동자 4홉, 가족 3홉씩 배급하라”, “세 신문(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을 즉각 복간하라”, “무조건 해고 절대 반대한다”는 요구조건을 내걸었다(같은 책, 58쪽).
미군정은 철도노조와 출판노조의 총파업에 아랑곳하지 않고 파업 주동자들을 검거한 뒤 우파인 대한노총 산하 철도국원들에게 철도 운영을 맡겼다. 신문 파업도 중단되어 10월 2일부터 발행이 재개되었다.


동아일보의 첫 ‘광복절’ 사설

1945년 12월 1일에 복간된 동아일보는 1946년 8월 15일 첫 번째 ‘광복절’을 맞았다. 이 날자 1면 머리에는 「새나라의 첫 날 / 8·15 기념일의 주지와 기치」라는 ‘거창한’ 내용의 사설이 올랐다.

  일·독·이 3국을 주축으로 한 영웅주의의 독재와 파쇼주의의 침략으로 빚어진 2차 대전. 1차전의 참담한 기억도 잊은 듯이 또 한 번 시작한 유사 이래의 잔혹한 싸움은 작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을 최후로 일단 끝을 보았던 것이다. 그 시발로부터 종국에 이르는 파란중첩한 전경과는 사가(史家)의 기록에 맡기려니와 고가(高價)의 희생으로써 얻어진 귀중한 소득은 무엇인가? 단구(單句)로 결론짓는다 할진대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인류적 양심의 승리며 자주와 협조 질서를 지향하는 세계적 이념의 승리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승리의 날인 8월 15일은 인류 전체의 경일(慶日)이요 세계 공통의 가일(佳日)이다. 그러므로 이날을 기념하여 그 의의를 다시금 새롭게 하고, 이날을 기념함으로써 앞날의 항구적 평화가 약속된다고 할진대 이 얼마나 위대한 기념일인가?
  (···) 장안은 ‘해방 1주년 기념일’ 일색으로 장식되었으니, 위대한 승리의 날이요 통쾌한 해방의 날임을 기념하기에 행사로서의 유감은 없다. 다만 위대한 이날을 축복하기에 흡족한 감흥을 가질 수 없는 우리의 현하 환경이 너무도 암담한 것이 한이다. 작년 이날에 폭발되었던 그 감흥, 그 의기를 회상하면 회상할수록 금년 이날에 이르는 1년간 우리의 자취는 너무도 비참하다. 문자 그대로 만감이 교지(交至)다. (·····)
  우리는 ‘명일의 희망’에 살았다. 8·15 이전도 그러하였거니와 8·15 이후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기에 군정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던 것이다. 참을 수 없음을 참았고 견딜 수 없음을 견디어 365일의 오늘에 이른 것이니, 우리가 군정을 용인하고 신뢰하고 협력하였음은 ‘명일의 희망’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유의 여하를 불구하고 이 ‘희망’의 토대도 서지 못한 채 맞은 오늘 이 8·15 기념일에 격양(擊壤)의 노래가 어떻게 나올 것이랴?
  “희망에 살자!” 그리고 “자력(自力)을 믿자!” 8·15 첫 돌을 맞이하는 우리의 신호는 이것이다. (···) 쓸개의 전부를 털어 고하노니, 동포여, 작년 이날이 감흥을 그대로 뭉치어 소신에 직진하는 새날의 첫 날을 삼으라. 작년 이날의 의기를 그대로 다듬어 새나라의 첫 날을 삼으라. 이리하여야 비로소 ‘이날을 기념’하는 주지(主旨)와 기치가 소명(昭明)하리니, 이는 5천년 역사의 권위를 장(杖)하여 그러하고 3천만 국민의 총의에 거(據)하여 그러하다. 3천리 강산, 전토에 깔린 들과 나무와 비금(飛禽)과 주수(走獸)의 일체를 포괄한 ‘조선’의 자존 자활을 위하여 그렇다.

이 사설은 동아일보가 복간된 뒤 처음으로 내보낸 ‘3·1절 사설’처럼 후안무치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일제가 중국 침략을 시작으로 일으킨 ‘대동아전쟁’은 나중에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어, 일본군은 독일·이탈리아 군대와 함께 연합국을 상대로 싸웠는데, 당시 동아일보가 미국과 영국을 ‘귀축(鬼畜)’ 또는 멸망시켜야 할 인류의 적이라고 공격한 사실은 당시 지면에 명확히 드러난 바 있다. 그런데 그때의 사주 김성수가 사장 겸 한민당 수석총무로서 친일행위에 대해 단 한마디의 사죄나 반성을 한 적이 없는 터에 동아일보는 “일·독·이 3국을 주축으로 한 영웅주의와 독재와 파쇼주의의 침략으로 빚어진 2차 대전”이라고 태연히 쓰고 있다.

  그뿐 아니라 “8·15 이전도 그러하였거니와 8·15 이후로는 더욱” ‘명일의 희망’에 살았다는데, 그 희망은 바로 일제가 침략전쟁에서 이겨서 동남아시아 전체를 식민지로 만드는 것 아니었던가? 동아일보는 그 부끄러운 친일 행적을 모른 척한 채 “쓸개의 전부를 털어 고하노니” 1945년 8·15의 “감흥을 그대로 뭉치어 소신에 직진하는 새날의 첫 날을 삼으”라고 독자들에게 외치고 있다.


‘10월 항쟁’을 ‘소동’으로 보도

1946년 10월 2일 대구에서 끔찍한 사건이 터졌다. <한국근현대사사전>(한국사사전편찬위원회 편, 가람기획 출판, 2005) ‘10월 항쟁’ 항목에는 그 경위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0월 1일 파업에 대한 군·경 테러단의 폭행에 항의하는 군중집회에 경찰이 발포, 사망자가 발생하자, 다음날 노동자·시민·학생이 합세하여 경찰관서를 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에 대구지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나, 미군정과 경찰에 대항하는 격렬한 시위는 성주·고령·영천·경산 등지로 번져나갔으며, 경남·전남·전북·강원 등 전국으로 퍼졌다. 초기의 총파업은 전평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으나, 이후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민중의 항쟁은 이미 공산당의 통제를 떠나 민중의 쌓인 불만이 격렬하게 터져 나온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각지의 경찰서·파출소·면사무소가 파괴되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9월  파업과 10월 항쟁의 결과, 공산당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잔존하던 지방의 인민위원회도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명박 정권 시기인 2010년 3월,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대구 10월 항쟁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유족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을 지원하라”고 정부에 권고하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동아일보가 ‘10월 항쟁’을 어떤 시각으로 보도했는지를 살펴보자.
동아일보 10월 3일자 2면 머리에는 「대구 중심으로 파업단 소동 / 경찰서를 습격 점거 / 경북 일대에 삼엄한 계엄령」’이라는 제목 아래 ‘사건 경위’가 보도되었다.

1만여 군중과 경관이 충돌되어 경찰서를 점거한 소동이 대구를 비롯하여 경북 일대 각지에서 발생되었다. 9월 25일 이후 대구에서는 40여 공장에서 파업을 단행하여 생산 각 부문에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던 바 1일 밤중에서 2일 아침에 걸쳐 파업 중에 있던 노동자들과 전문·중등학교 학생 및 일부 시민들이 합류된 1만여 명의 군중이 대구경찰서를 습격 포위하여 장시간 경찰대와 대치, 격투를 한 후 드디어 2일 상오 10시에는 경찰서를 점령하고 말았다.

‘10월 항쟁’의 원인과 확산 과정은 동아일보의 보도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의 기록을 보기로 하자.

  1946년 4월 영남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 그대로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세상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5월에는 콜레라마저 발생하여 대구시민 1천2백여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빚어진 데다 그로 인해 외부에서의 쌀 반입도 끊기게 되었고, 6월에는 수해가 발생하여 쌀 대체작물 이 큰 피해를 입은 데다 교통마저 두절되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나 몰라라 했다. 굶어 죽게 된 시민들이 군정에 식량 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자, 미군정 관리는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조선에 빵, 고기, 과일 등이 많은데 왜 쌀만 요구하느냐”고 질책하였다.
  대구의 정치적 사정도 다른 지역과는 달랐다. 대구의 좌익세력은 일제 하에서 어느 세력보다 치열하게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 왔기 때문에 시민들의 강한 신뢰를 얻어 해방 후에도 각 부문별 대중조직을 결성하여 폭넓은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반면에 우익세력엔 친일파가 많아 대중적 기반이 매우 취약하였다.
  10월 1일 정오 대구시청 앞에서는 약 1천 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모여 쌀을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오후 2시 30분에는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에 들어간 노동자 5백여 명이 경찰과 충돌하였는데, 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가운데 1명이 사망했다.
  이 사망으로 인해 다음날인 10월 2일 시위대의 숫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날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사람의 주검을 메고 시위에 참여할 만큼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는 대구경찰서를 점령해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꾸리고 시내 대부분의 파출소까지 점령해 버렸다.
  한 국제통신사는 “24시간에 걸친 피의 폭동이 일어나 38명의 경찰관이 죽고 확인할 수 없는 많은 수의 시민들이 사상당했다. 이 도시는 마치 전쟁터 같았다”고 보도했다.
  대구 항쟁은 직접적으로는 식량 문제와 더불어 친일 경찰에 대한 불만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친일파 중에서도 친일 경찰이 가장 심한 증오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해방 직후 거의 다 자취를 감추었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의 부름을 받아 전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리면서 횡포를 일삼는 것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던 것이다.
  미군정은 10월 2일 오후 6시쯤에 대구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채 전차를 앞세워 시위를 진압했다. 진압 후 대구에 도착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폭동에 가담했던 폭도들은 모조리 체포·구속하고 주모자는 즉결처분해 버리라”고 지시했고, 이후 피바람이 불었다. 경무부 고문인 대령 매글린이 “민주경찰이 국민의 생명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장택상에게 항의할 정도였다.
  대구 봉기는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곧 진압되었으나 그 여파는 경남북 지방의 농촌을 거쳐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대되면서 전국적인 농민봉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1월 상순까지 전국 90개 군 이상에서 항쟁이 연속적 으로 일어났다(297~299쪽).

동아일보는 대구의 민중이 봉기한 원인이 식량난과 미군정의 무책임한 대응, 시위 군중에 대한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과 발포, 특히 친일 경찰에 대한 민중의 증오였다는 사실은 전혀 보도하지 않은 채 미군정의 명령에 따르는 경찰의 강경한 진압과 공직자의 피해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10월 5일자 2면에 실린 기사가 바로 그랬다.

경관 사망자 53명 / 폭민(暴民) 중 피검은 202명 / 통영, 마산 등지에도 또 소동

  경북 일대의 소동은 3일 하오 현재 충남경찰부의 응원으로 대부분 진압되었으나 계엄령은 계속 중이고 아직도 왜관, 성주, 군위, 영천의 4개 경찰서는 소동군중에 점거된 채 있다.
  이어 3일  상오 3시 영천군수 김영기 씨가 피살되는 등 사태는 곳에 따라 험악하며 이날 현재로 경관직 사망자는 무려 53명이나 되고 폭민 중 피검자는 2백여 명이나 된다. 이밖에 3일 하오 경남 통영읍에서는 식량 소동이 일어나 5천여 군중이 경찰서를 포위하고 무기를 빼앗아 가는 중 경·민 간에 일대 충돌이 생기어 마침내 마산에서 출동한 군대들의 힘으로 진정되었는데 이 때문에 박 군수와 경찰서장은 중태에 빠져 있다 한다.
  이에 경무부에서는 방금 대구에 한 공안국장을 파견하여 사태 수습과 경찰 재조직에 만전을 다하는 한편 4일 중으로 경기도경찰부에서 정예경관 4백여 명을 응원 파송하기로 되었다.

동아일보 10월 6일자 2면 머리에 실린 기사 역시 철저히 미군정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전율할 영남소동의 그 후 소식 / 영동경찰서를 습격 / 대구에서는 탈옥자 1백여 명 / 소살(燒殺) 직전에 경관 구출 / 봉기된 영남 일대의 소동 경위

  대구를 중심으로 한 일대 소동은 의외로 그 범위가 크고 경·민 사이에 사상자와 피검자가 많은 점으로 보아 심상히 보아 넘기지 못할 사건이다.
  더구나 5일 현재로 경무부에 들어온 현지 보고에 의하면 대구에서는 약 1백명 가량의 죄수들이 형무소를 탈옥 도주하였고, 소동은 경남 통영에서 다시 4일은 충북 영동 지방으로 파급되어 3, 4백명이 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이 있었다.
  이리하여 4일은 서울에서 4백명, 전남에서 약간의 응원경관대가 추가 파송되어 영남 각지의 치안 확보는 순조로워 습격 점령된 경찰서는 대개 도로 찾았으나 곳에 따라서는 주재소 몇 곳은 태워 버린 곳도 있고, 아직 치안 회복이 안 된 듯하나 대체로 보아 치안은 평상화되고 있는 중에 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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