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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당 기관지’ 동아일보동아일보 대해부 2권 -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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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7.28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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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28일 미국, 소련, 영국의 외상(외무부장관)들이 소련 수도 모스크바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결정’을 발표하기 직전인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가 한국 신탁통치에 관해 내릴 것으로 예상되는 ‘결정’에 관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동아일보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왜곡 보도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 독립문제

  [워싱턴 25일 발 합동 지급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의를 계기로 조선 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하여 가고 있다.
  즉 반즈 미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련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1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불가능하다 하고 있다.
  카이로회의에서 장개석 씨와 서구 연합국은 당연한 조선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38도선의 분할 점령은 테헤란·얄타·포츠담 각 회담에 있어서 아무도 승인한 것은 아니다. 조선의 각 정당은 누가 38도선을 결정하였는가를 알고자 하며 또한 조선의 급속한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연한 요구이다. 조선의 독립은 미국과 중국이 약속한 것이다.


  한국의 합동통신이 워싱턴에서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 이 기사에는 그 뉴스를 제공한 외국 통신사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동아일보의 기사 제목만 읽은 사람들은 “소련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주장”하면서 38선 분할 점령을 했고,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기사는 3상회의 당시 미·소 양측 입장 및 주장이나 역사적 사실과는 정반대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 내용’과 전혀 다른 왜곡 보도였다.
무엇보다도 미국 모 통신사로 되어 있는 기사의 출처가 의문시되었다. 당 시 외신을 취급하던 주요 통신사로는 합동통신과 조선통신이 있었는데, 합동통신은 우익 성향이 강했고, 외신 제휴사는 AP통신이었다. 조선통신의 외신 제휴사는 UP통신이었는데, 조선통신은 삼상회의 결정을 빨리 보도하지 않았다 하여 좌경사(左傾社)라는 낙인이 찍혔다. 삼상회의 결정이 국내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 왜곡 보도에 대해서는 그 당시부터 국제적 모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후 일부 연구자들은 배후가 있었거나 최소한 당시 언론기관을 통제했던 미국의 고의적인 ‘방조’가 동아·조선 친 일파 신문의 엉뚱한 ‘아국의 비분강개’를 추동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지동, <한국언론실증사 1>, 도서출판 아침, 2008, 327쪽)

그런데 그보다 두 달 남짓 전인 10월 20일자 일본 아사히신문 1면 머리기사에는 미 국무부 극동국장 카터 빈센트가 연설을 통해 밝힌 아시아 정책 가운데 ‘조선의 지위’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었다.

  (···) 조선이 현재 2개의 점령지역으로 분할되어 있는 것은 명백하게 경우에 맞지 않으니 이 상황의 타개를 위하여 미국은 소련과 긴밀히 연락하여 (···) 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작정이다. 그래서 나는 조선민족에게 독립할 때까지 준비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제안한다. (···) 나는 소련이 미국도 아직 이 지역에 중대한 이해가 있음을 인정해 줄 것으로 믿는다(유일상, 「미 선전전 동원된 신탁통치 보도-동아는 고해성사부터 하라」, 한겨레, 2004년 1월 6일자).

언론학자 유일상은 미국과 소련의 흥정 결과인 신탁통치 결정을 “소련 측의 식민통치 연장 야욕으로만 몰아붙여 단순화한 동아의 보도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상세히 파악하지 않았거나 기존의 엄연한 자치기구인 건국준비위원회를 무력화하려는 미국의 선전심리전에 동원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해석했다.

  모스크바 결정서는 먼저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되어 있었고 신탁통치의 방안은 결정하지 않았다. 신탁통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작성하게 되어 있었던 바, 임시정부가 신탁통치를 강력히 반대한다면 신탁통치를 받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저지른 일련의 오보는 그런 이성적인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모스크바 결정이 국내에 정확히 알려지기 이전인 12월 24일 동아일보엔 소련이 청진과 원산에 특별이권을 요구한다는 반소(反蘇) 기사가 실렸다. 또 그 다음날엔 24일자의 보도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채 그것을 비난하는 반소 기사와 더불어 소련이 대일참전의 대가로 한반도를 차지하려 한다는 근거 없는 기사가 실렸다(<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 145~146쪽).

동아일보가 ‘단독 보도’한 문제의 기사는 조선 사회를 들끓게 만들었다. ‘신탁통치 반대(반탁)’에 가장 먼저 앞장선 정치세력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 임정은 동아일보 12월 27일자 기사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28일 “5천년의 주권과 3천만의 자유를 전취하기 위하여는 자기의 정치활동을 옹호하고 외래의 탁치 세력을 배격함에 있다. 우리의 혁혁한 혁명을 완성하자면 민족이 일치로써 최후까지 분투할 뿐이다. 일어나자, 동포여!”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소련의 ‘신탁 주장’을 기정사실화한 동아일보 사설

동아일보 12월 28일자 1면 머리에는 「소련의 조선 신탁 주장과 각 방면의 반대 봉화」라는 기사가 올랐고, 그 왼쪽에는 「민족적 모독 / 신탁 운운에 대하여 소련에 경고」라는 사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방금 모스크바에서 개최 중인 미·소·영 3국 외상회의의 의제와 결론에 대하여 아직 그 전부를 알 수 없거니와 극동문제가 중요한 의제의 하나일 것이며 따라서 조선 문제도 당연히 토의될 것을 예상하였던 터이매 우리는 회의의 진행과 성과에 대하여 다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작보(昨報)와 같이 외전(外電)은 조선에 대한 미·소 양국의 견해가 다름을 지적하여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은 신탁관리를 주장한다고 전한다. 회의로부터 발표된 정식 공보(公報)가 아니매 그 진부는 속단키 어려우며 따라서 비판의 정확도 기하기 어려운 터이나 이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어찌 할 것인가? 전문(電文)이 간단하여 그 주장의 근거에 대한 설명도 모호한 감이 없지 않으나 대체로 미국은 카이로선언을 준수하여 국민투표에 의한 즉시 독립을 승인하자는 것이며 소련은 38선의 존속으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니 1국의 신탁관리로 하자는 것이라 한다. 미국의 주장과 논거는 명명백백한 지라 그 우호적 태도를 신뢰하는 바이나 소련의 일기(日氣)는 이 하등의 궤변이며 하등의 폭언인가? (·····)
  도대체 신탁관리란 비상한 모욕이다. 카이로선언 등 국제조약의 배신일 뿐만 아니라, 조선 독립의 후원자요 추진자로 자기(自期)한 자신의 자기 부인만이 아니라, 조선민족의 자립을 무시하고 존엄을 모독하는 무모한 광언(狂言)이다. 아직 진상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이후의 진전을 주시하는 동시에 이 이상의 비판을 보류하거니와 불의의 부정에 대하여는 ‘피로써 항쟁한다’는 단연한 결의를 일언(一言)하여 우선 소련의 맹성을 경고하여 두려는 것이다.

  이 사설은 “모스크바에서 개최 중인 미·소·영 3국의 의제와 결론에 대하여 아직 그 전부를 알 수 없”다고 전제해 놓고서도 “미국의 주장과 논거는 명명백백한 지라 그 우호적 태도를 신뢰하는 바이나 소련의 일기는 이 하등의 궤변이며 이 하등의 폭언인가?”라고 단언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 그리고 “아직 진상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이후의 진전을 주시하는 동시에 이 이상의 비판을 보류”한다면서 “불의와 부정에 대하여는 ‘피로써 항쟁한다’는 단연한 결의를 일언하여 우선 소련의 맹성을 경고하여 두려는 것”이라고 겁박하고 있다.


임시정부의 성급한 ‘쿠데타 기도’

1945년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소련, 영국의 3상회의는 12월 28일 「한국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정서」라는 이름으로 합의문을 채택했다. 이 결의서의 앞머리에 나오는 ‘신탁통치안’은 다음과 같다.

  1)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한다.
  2)한국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미·영·소·중의 4개국이 공동 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가 내린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에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점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신탁통치 5년 후 친미·친소 및 중립적 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이 모두 열려 있는 조건 아래서 미·소 양국이 각각 한반도에서 자국의 영향권에 드는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시간적 여유를 얻으려 타협한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 지역을 독립시키기 위한 수단이요 과정이었지, 신탁통치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38도선이 획정된 조건 아래서 민족분단을 저지할 수 있는, 남북을 통한 통일임시정부 수립 문제보다 신탁통치 문제가 더 크게 부각되었다.
  3상회의 결정이 국내에 전해지자 처음에는 좌우익 정치세력이 모두 반대했으나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진영은 곧 “3상회의 결정의 총체적 지지”를 통해 찬탁 노선으로 바뀌었다. 귀국한 중경임시정부의 여당 격이었던 한국독립당과 국내 지주세력을 바탕으로 결성된 한국민주당 등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진영은 반탁운동을 통해 정치적 약세를 만회하고 진영의 결속을 강화하려 했다(<고쳐 쓴 한국현대사>, 267~268쪽).

12월 30일 임시정부는 내무부장 신익희 이름으로 ‘임시정부 포고 제1호 및 제2호’를 발표했다. “미군정청 산하의 모든 한인 직원들은 임정의 지휘를 받을 것” “모든 국민은 임정의 지휘 아래 반탁운동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 그 포고는 점령군으로서 38선 이남을 통치하고 있던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포고문이 나가자 서울시내 경찰서장 7명이 임시정부가 들어 있는 경교장을 방문해서 충성 선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쿠데타 기도’는 미군정청장 하지가 김구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 “다시 나를 거역하면 죽이겠다”고 말한 뒤 차츰 기세를 잃고 말았다.(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288~289쪽).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된 뒤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은 반탁에 참여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1946년 1월 3일 민족통일자주독립촉성 서울시민대회를 열기로 하자 당원들이 ‘신탁통치 결사반대’라는 문구를 쓴 플래카드를 들고 대회장으로 몰려들었다. 바로 그때 38도선 이북에서 온 연락원이 신탁통치를 지지하라는 내용의 밀서를 가지고 도착했다. 그러자 시민대회는 갑자기 ‘찬탁’으로 주제가 바뀐 채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늦게 도착한 명령이 공산당 조직 말단에까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원들이 반탁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가 간부들에게 빼앗기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심지연, <이강국 연구>, 백산서당, 2006, 108쪽)

이런 현상을 목격한 우익진영은 공산당이 찬탁으로 돌아선 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비난했다.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1월 4일 좌익진영은 ‘임시정부 수립’을 지지하면서 신탁통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한 ‘후견제(後見制)’라고 주장했다. 그 무렵부터 남한은 찬탁과 반탁 세력의 살벌한 싸움터가 되었다.

  그 며칠 전인 1945년 12월 29일 김구의 사저인 죽첨정에서 열린 재경 각당 대표자 회의에 참석한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는 3상회의 결정의 원문을 보기도 전에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발언했다. 그 말이 빌미가 되었는지 그는 그날 밤 괴한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동아일보 사장 겸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김성수

1945년 12월 31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암살당한 송진우를 추모하는 사설(「일주[一柱]를 잃다 / 민족의 금일을 일곡[一哭]」)이 실렸다.

  단기 4278년 조조 고하 송진우 선생은 화동 자택에서 흉탄을 받고 홀연히 작고하였다. 해방의 서광이 요운(妖雲)에 싸인 채 저물어가는 이 해의 마지막 날이 망국의 통한을 풀지 못한 채 탁치(托治)의 비보를 듣게 된 다음의 다음날 독립전선에 뿌려질 허다한 생혈(生血)의 선두를 가로맡아 엄연히 순국하였다.
  희(噫)라! 이 하등의 비보인가? 이 하등의 통사(痛事)인가? 그러나 비보라 하여서, 통사라 하여서 곡지통지(哭之痛之)만 하기에는 이 거인의 최후가 빚어놓은 국가적 민족적 표정이 너무나 장엄하고 너무나 존귀한 바 있음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수자(下手者)가 누구임을 사색(査索)할 필요가 없으리라. 암해(暗害)의 목적이 그 어디에 있음을 추궁할 필요도 없으리라. 다만 민족의 갱생을 위하여 진군하는 우리의 수도(首途)에 피를 보았다 함으로 족할 것이다. 광복의 거역(巨役)을 위하여 고투하려는 우리의 건설에 한 개의 기둥[一柱]을 잃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응시하고 투시하고 그리고 이로써 민족적 정기를 다시금 다듬어 권토중래의 진운을 그대로 계속한다고 하면 선생의 일사(一死)는 단순한 비보가 아니라 경보(警報)다. 우국의 경보요 애국의 신호다. 선생의 본회(本懷) 실로 여기에 있었거니 생생한 이 혈사(血史)의 일행을 읽는 자 다같이 일점에 응집되어 자주의 독립을 완성한다면 선생의 낙이 오히려 무궁할 것이다. (·····)
  때도 때인 이때 조국은 광복 미년(未年)에 선생을 중도에 잃게 되니 동지의 한은 얼마나 깊은 것이며 민족의 손(損)은 얼마나 클 것인가? 선생을 위하여 이 겨레의 명일을 위하여 우리는 일곡을 금할 수 없으니 3천만 형제여 이 거인의 흉변을 기연(機緣) 삼아 다 같이 시일(是日)에 방성대곡하 자! 그리고 명일부터 다 같이 방성대호(放聲大呼)하자! “각 길로 한 신지(信地) 완전한 자주독립!”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또는 주필로서 송진우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를 익히 아는 사람들은 이 ‘조사’에 나오는 “이 거인의 최후가 빚어놓은 국가적 표정이 너무나 장엄하고 너무나 존귀”하다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로서는 김성수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 정치적 암살의 희생이 된 사실에 ‘방성대곡’ 하는 것이 당연했다.

송진우의 장례식이 치러지기 나흘 전인 1946년 1월 1일 김성수가 그의 뒤를 이어 동아일보 사장 겸 한민당 수석총무로 취임했다. 언론사의 사주인 인물이 사장 역할을 하면서 가장 강력한 보수정당의 실질적 당수가 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송진우의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김성수가 그런 겸직을 했다는 사실은 동아일보가 전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한민당 기관지’ 구실을 하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반탁의 최일선에 나선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1946년 1월 1일자 1면에 실은 「신정(新正) 일언(一言)」을 통해 ‘반탁’은 무조건 옳다고 주장했다.

  오늘이 새해의 첫날이다. 이른바 해방 후의 첫 새해다. 이 강토를 수호하는 백두의 영봉에는 새로운 새해의 새로운 아침볕이 비쳤으리라.
  을유(乙酉)의 후반은 해방의 해였다. 그리고 동시에 수모의 해였다. 백년의 파란을 겪은 해요 만대의 치욕을 받은 해였다. 이 얄궂은 을유의 제야를 밝히면서 밝아오는 신정의 초서(初曙)를 상상할 때 진실로 형언키 어려운 만감에 소조(所措)를 모를 지경이다.
  ‘탁치’의 이유가 자타의 어디에 있음을 구태여 따질 필요도 없다. ‘탁치’의 내용에 수정할 여지가 있고 없고를 구태여 일컬을 필요도 없다. 미성국(未成國), 미개족에나 해당한 이 국욕(國辱)을 그대로 짊어지고 우리의 심경에 새해다운 새해의 감흥이 생길 도리가 없다.
  타력(他力)의 환멸을 만끽한 우리는 자력의 고귀를 더욱 더 통감하였거니와 신정 벽두에 맹서할 3천만의 일관한 신호는 오직 “자력으로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이라는 정신에 있다. 그리고 “외모(外侮)의 극복은 내부의 단결”이라는 노력에 있다. 이 정신과 이 노력으로써 “각 길로 한 신지(信地), 완전한 자주독립”이라는 피안을 향하여 맹진할 뿐이겠다.
  병술(丙戌)의 새해여 복을 받으라. 이 겨레의 소원과 소기(所期)를 위하여 복을 받으라.

1946년 1월 초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한 뒤 1월 4일 좌익진영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방향을 바꾸자 동아일보는 1월 5일자 사설(「자아 모독을 격(擊)함 / 신탁 수락은 노예근성」)을 통해 찬탁을 격렬하게 공격했다.

  탁치 반대는 3천만의 총의이다. 카이로회담과 포츠담회담 선언을 논거로 하여 국제협약의 완전 이행을 요구하는 법리적 주장만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튼 국제적 신의의 존엄을 유지하여 세계평화의 실현을 요망할 뿐더러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은 기위(旣爲) 1919년에 당당히 독립국가로서의 독립선언을 세계에 선포한 이래 파시스트 일본과 피의 항쟁을 계속하였고 파쇼 타도의 금차 대전은 결국 일본의 패전으로 종국하게 되었으니 우리의 자주 독립은 자문(自問)할 절차인 것으로 우리에게 대한 저간의 해방선언은 이 자주독립의 순차적 서곡임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요 또 그럼으로 해서 우리 3천만은 열광도 하였다.
  조선문제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가 탁치라는 결론이었다는 것은 그 내용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로서는 의외의 모욕이 아닐 수 없다. 탁치의 논제를 미·소 중의 그 누가 선창하였고 또 찬성하였든가 하는 것은 원래부터 문제가 안 된다. 우리의 자주성을 무시하고 노예로의 국제적 철쇄(鐵鎖)가 우리를 다시금 결박하려는 이 탁치의 모욕에 그래도 이것을 인종(忍從)해야 옳은 것인가? 만일 이에 대한 시인이 있다면 이는 실로 노예근성의 비굴인 것으로 자아 모독도 한계가 있을 일이니 3상회의를 절대로 지지하다는 표명은 이 하등의 망언이며 3상회의의 탁치 내용을 진보적 민주국가 육성을 목표로 한 것이라 하여 자아의 자주성을 부인함으로 자민족의 노예화를 긍정한다고 하면 이는 정권 쟁탈에 근안(近眼)이 되어 민족 생존의 목적성을 무시한 망동이 아니고 무엇이랴.
  (···) 우리는 3천만의 총의로 탁치 철수를 관철하여야 할 무렵이다. 우리는 기위 임정의 영도 하에 반탁운동을 전개하고 있거니와 우리는 당당히 자주독립으로써 독립하여야 할 것이며 우리의 주권을 우리 한민족이 가져야 할 것은 물론 제1차 대전에서 2차전의 발전을 내포시킨 약소민족의 위임통치신탁 운운을 일소시키도록 우리민족의 총의를 천명함으로써 즉시 독립을  승인토록 하자는 임정의 군호(軍號)는 명시되었다. 노예냐 자유냐, 다만 총의의 항쟁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박헌영, 조선을 소련 속국으로’

1946년 1월 16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 조선을 소련의 속국으로 만들기를 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조선을 소련 속국으로 / 샌프란시스코방송이 전하는 조공(朝共) 박헌영 씨 희망」)가 올랐다.

  지난 8일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은 UP, 뉴욕타임스 등 외국기자단에 대하여 조선에 대한 소련의 일국신탁통치를 절대 지지하며 5년 후 조선은 소련의 1 연방으로서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언명하였는데 이 통신이 미국에 전하여지자 금 15일 오전 7시 5분 샌프란시스코에는 이 뉴스를 전하는 동시에 과연 조선인은 소연방의 1 연방이 될 것을 희망하는가 하는 격월(激越)한 언사의 힐문(詰問)이 있었다.

동아일보의 이 기사는 미국의 한 방송 보도 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고 인용한 ‘오보(誤報)’로 드러났다.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에 그 경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월 5일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내용을 지지하며 조선은 현재 민주주의 변혁 과정에 있다고 말했는데, 이 내용은 다음날 조선인민보 등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평소 박헌영의 발언 수준에 그쳤기에 별다른 파장을 낳지 않았다.
  그러나 이로부터 10일 후인 1월 15일, <미국의 소리> 샌프란시스코방송이 박헌영이 뉴욕타임스 특파원 리처드 존스턴에게 “자신은 소련 일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장래에 조선이 소연방의 하나가 되기를 희망했다고 발언했다”고 주장하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동아일보는 그 내용을 (···) 크게 보도했다. 한민당은 1월 15일 간부회의를 소집해 박헌영의 발언은 “조선의 독립을 말살하고 소련의 노예화를 감수하는 매국적 행위”라고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박헌영을 타도하라”는 전단을 유포시켰다.
  더 나아가 한민당 등 51개 우익단체들은 ‘박헌영 타도’ 국민대회와 성토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박헌영의 목에 30만 엔의 현상금까지 걸었다. 또 우익단체들은 미군정에 박헌영의 언동은 매국적 행위이므로 그 일파와의 면회, 방송성명 등 일체 정치활동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각 신문·통신에 대해 박헌영 일파의 선전에 대한 취급을 불허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즉 이들은 박헌영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해명을 하더라도 그것을 보도해서는 안 된다고 신문과 통신에 압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 서울신문 1월 17일자는 같은 회견에 참석한 미군 기관지의 기자인 현역 군인 로버트 콘월의 증언을 보도하였는데, 콘월은 박헌영이 “조선인이 조선인을 위해 다스리는 조선”을 원한다고 말했을 뿐 소련 일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나 조선의 소련연방 편입 등의 발언은 듣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1월 18일 그 회견에 참석했던 국내의 12개 신문 및 통신사 기자 일동은 박헌영이 소련의 한 연방으로 조선이 참가하기를 희망한다는 발언을 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195~196쪽).

이렇게 명확한 증언들이 나왔는데도 동아일보는 박헌영이 “조선을 소련의 속국으로 만들기를 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미국 방송을 인용해 보도한 사실에 대해 ‘오보’라고 해명하지 않고 박헌영에 대해 사과를 하지도 않았다. “이 사건은 ‘미군정의 여론공작’이었다. 미군정은 박헌영·존스턴 회견을 ‘여론공작 차원에서 적극 활용함으로써 국내의 반탁운동을 반소·반공운동으로 각인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같은 책, 197쪽). 어쨌든 동아일보는 고의든 미필적 고의든 좌익진영의 지도자인 박헌영에게 한때나마 치명적 타격을 가하는 보도에 앞장선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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