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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복간동아일보 대해부 2권 -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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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7.1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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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으로 일제의 억압과 군국주의 통치에서 벗어난 조선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는 언론의 ‘백화제방’이었다.


좌익언론의 압도적 우세

<동아일보사사 권 2>에는 당시 언론계 상황과 동아일보의 복간 경위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해방되는 시각부터 우선 거리는 전단, 포스터, 벽신문 등으로 뒤덮였다. 이것은 뉴스에 굶주린 민중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혼란한 시기라 아직 신문은 나타나지 않았다. 8월 16일 건준의 신문위원 최익한·이여성·양재하·김광수 등이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를 접수하여 해방일보를 창간하려 하였으나 다음날 출동한 일본군에 쫓겨나고 17일부터 종전 같이 매일신보가 계속 발간되었을 뿐이었다.
  그후 건준이 좌익세력의 압도적인 집결체가 되면서 언론계에도 맹렬한 기세로 진출을 보았다. 그 선봉으로 나타난 것이 김정도의 조선인민보(1945년 9월)였다. 이는 8·15 해방 후 제일 먼저 서울에서 나온 신문이다. 이어서 김영희·이묘묵 등의 코리아타임즈(1945년 9월)와 민원식·남정린의 서울타임즈(1945년 9월)를 비롯하여 장도빈의 민중일보(1945년 9월), 김영욱·임규수 등의 동신일보(1945년 10월), 정인익·정진석·이원영·이정순·배은주 등의 자유신문(1945년 10월), 양재하·남상국·김제영 등의 신조선보(1945년 10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 해방일보(1945년 10월), 고태만의  조선문예신보(1945년 10월), 김형수·황대관·이상호·박종수 등의 중앙신문(1945년 11월), 손태주·신경순 등의 대공일보(1945년 11월), 이종영의 대동신문(1945년 11월) 등이 속속 발간되었다.
  이 신문들 중 코리아타임즈, 민중일보, 동신일보, 대공일보, 대동신문을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좌경적 신문이었고, 그 중에서도 해방일보는 상기한 바와 같이 공산당의 기관지요, 조선인민보는 소위 조선인민공화국의 기관지였다. (·····)
  이 무렵까지도 전통 있는 양대 민간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복간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일제가 이 신문들을 폐간시킬 때 다시는 복간을 못하도록 인쇄시설 일체를 강제로 매도케 하여 자체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폐간 후 명칭도 ‘동본사’로 바꾸고 겨우 사옥을 보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누구보다도 신문의 긴요성을 잘 아는 김성수·송진우 등은 국사에 분망하여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는 못했으나 일찍부터 설의식·고재욱 등 옛날의 사원들로 하여금 복간을 추진케 하였었다. 그러나 서울시내에서 신문을 인쇄할 만한 시설들은 좌익계열에서 접수하여 동아일보의 인쇄를 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 방해하고 나섰다. 그렇다고 혼란한 시기에 시설을 도입할 길도 없었으니 동아일보의 복간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생각 끝에 구 총독부의 일어기관지 경성일보의 시설을 이용코자 당시 미군정으로부터 관리인으로 지명된 이상철에게 교섭하였으나 그도 동사를 장악하고 있는 좌익분자들의 압력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군정청에 직접 교섭하여 양해를 얻게 되자 11월 중순경부터 활자 주조에 착수하였다(33~34쪽).


한민당사가 된 사옥에서 동아일보 복간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1일자로 복간호를 냈다. 11월 23일 복간된 조선일보다 8일이 늦은 것이었다. 1940년 8월 11일 폐간당한 지 5년 4개월만의 일이었다.

동아일보사는 사장 송진우, 주간 설의식, 편집국장 고재욱, 총무국장 김동섭, 영업국장 김승문, 공장장 이언진 등 폐간 전에 일하던 사람들로 다시 신문을 펴내기 시작했다. 발행인은 김승문, 편집인은 설의식, 인쇄인은 이언진으로 등록되었다.

동아일보의 ‘사사(社史)’는 동아일보 본사 사옥에 사장 송진우의 사무실이 있었지만 ‘사장실’이 아니라 ‘당수실 격’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공정하고 독립된 언론으로서 정론(正論)을 펼쳐야 할 신문이 특정 정당 당수의 사유물처럼 되어 버렸음을 의미한다. 친일파를 단죄하라는 소리가 높던 당시에 ‘친일보국언론’을 대표하던 송진우라는 사람이 보수적인 한민당의 수석총무가 되어 당무를 총괄하면서 동아일보 제작을 감독하고 지휘했다는 사실은 ‘정론지’를 포기했다는 것과 다름없다.


‘친일매국’에 대한 반성도 사죄도 없는 ‘중간사’

1945년 12월 12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중간사(重刊辭) / 주지(主旨)를 천명함」이 실렸다.

천도(天道) 무심치 않아 이 강토에 해방의 서기(瑞氣)를 베푸시고 성조(聖祖)의 신의(神意), 무궁하시어 이 천민(天民)에게 자유와 활력을 주시니, 이는 오로지 국사(國事)에 순절(殉節)한 선열의 공덕을 갸륵타 하심이요, 동아에 빛난 십자군의 무훈을 거룩타 하심이라 세계사적 난국의 필연적 일면이라 한들 이 하등(何等)의 감격이며 이 하등의 홍복(鴻福)인가?
  일장기 말살사건에 트집을 잡은 침략자 일본 위정(僞政)의 최후 발악으로 폐간의 극형을 당하였던 동아일보는 이제 이날을 기하여 부활의 광영을 피력하며 이날을 기하여 주지의 요강(要綱)을 다시금 선명함으로써 3천만 형제와 더불어 동우동경(同憂同慶)의 혈맹을 맺으려 하는 바이다.
  창간 이래로 20여년 간 압수 삭제의 난장(亂杖)이 천도(千度)를 넘었으며 발행정지의 악형(惡刑)이 4차에 이르러 만신(滿身)이 혈흔(血痕)이었으나 그러나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였던 동아일보는 갖은 모욕과 갖은 박해를 받아가면서도 오히려 민족의 면목을 고수하기에 최후의 고절(苦節)을 다하였던 것이다.
  적은 집병자(執柄者)라, 1940년 8월 10일 필경 살해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니, 시일(是日)에 민족은 감각을 잃었고, 지성을 잃었고, 정조를 잃어 이 땅의 일월은 빛이 있는 듯 없었으며 탐정(貪政)의 행패는 그 극에 달하여 이른바 공출은 걸레와 잡초에 이르고, 약탈은 성명과 언어에 이르렀으며 겸하여 망량(魍魎)의 조악(助惡)이 날로 더하매 천지는 진실로 암흑한 바 있었으나 8월도 15일, 벽력이 일순(一巡)하자 창천은 한 고비 높아졌으며 대지는 그대로 넓어졌으니 이 하등의 장관(壯觀)이며 이 하등의 성사(盛事)였던가? 동아일보는 창간 벽두에 “1)민족의 표현기관을 자임하노라. 2)민족주의를 지지하노라. 3)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의 3대 주지를 선명하여 언론 보족 (報族)의 대강(大綱)을 삼은 바 있었거니와 이 주지를 통하여 흐르는 일관한 정신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다. 시세(時勢)의 제약을 따라 용어에 한계가 있음은 세고불피(勢固不避)라 하는 수 없거니와 경경(耿耿) 일념이 오직 민권의 창달을 주장하고 민생의 안도를 희구함으로써 민족 전체의 영원한 번영을 위하여 필정(筆政)의 전능(全能)을 경주하려는 단성(丹誠)은 금석(今昔)의 별(別)이 있을 리 없다.
  이제 중간에 임하여 우리는 창간 당초의 3대 주지를 그대로 계승함에 하등의 미흡을 느끼지 않거니와 현국(現局)에 처한 우리의 주지를 구체적으로 부연한다고 하면 대개 아래와 같다.
  첫째로 우리는 시간 공간이 자별(自別)한 우리의 독자성을 고조한다. 5천년 동안 시간의 집적으로 육성된 우리의 전통과 긍지, 아시아적 영역의 퐁토로 순화(馴化)된 우리의 이념과 향기로써 민족의 완성, 민족문화의 완성을 부익(扶翼)코자 한다.
  둘째로 우리는 민주주의에 의한 여론정치를 지지한다. 그리하여 민의에 의한, 민의를 위한, 인민의 정체(政體)를 대성(大成)함으로써 국권의 존엄과 국운의 발양을 위한 모든 건설을 협찬코자 한다.
  셋째로 우리는 근로대중의 행복을 보장하는 사회정의의 구현을 기약한다. 그리하여 기회균등의 공도(公道)에 의한 이상사회의 실현을 추진코자 한다.
  넷째로 우리는 철두철미한 자주호혜의 정신이 교린(交隣)의 원칙 됨을 신봉한다. 그리하여 영토의 대소, 국력의 강약 등 차별을 초월한 국제민주주의의 확립에 기여코자 한다.
  난(欄)을 달리하고 붓을 다시금 다듬어 축조적(逐條的)으로 해명할 기회가 있음을 약속하거니와 우리는 이상과 같은 주지로써 우리의 행동, 신문도(新聞道)의 고유한 직능과 사명이 사상(事象)의 충실한 보도에 있음은 물론이려니와 그렇다 하여서 단순한 전달기관에 구안(苟安)하기에는 우리의 요청이 너무도 거대하며 불편부당의 언론이라 하여 시비의 병렬(並列)과 곡직의 혼잡을 그대로 용인하기는 우리의 지표가 너무도 확연하며 우리의 정열이 너무도 강렬한 바 있다.
  우리는 이미 붓을 들었다. 이 붓이 꺾일지언정 이 붓에 연결된 우리의 혈관에는 맥맥(脈脈)한 생혈(生血)이 그대로 격류를 지으리니, 시(矢) 바야흐로 현(弦)을 떠난지라, 회의준순(懷疑逡巡)이 있을 수 없으며 좌고우면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우리는 인도와 정의에 칙(則)하고 대의와 명분에 순(殉)하는 강철 같은 의지로써 춘추의 정필(正筆)을 잡으려 할 뿐이니, 이리하여 우리의 이 붓이 왕사(王師)의 전위 되기를 자면(自勉)하며, 파사(破邪)의 검(劍)되기를 자기(自期)한다.
  만천하의 동지여! 형제여! 자매여! 우리의 염원을 바르다 하시고 우리의 단성(丹誠)을 미쁘다 하시어 엄혹한 편달을 아끼지 말지며 절대(絶大)한 성원을 늦추지 말아 광복의 홍업을 대성함으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미래 영겁에 빛나게 하라.
  단기는 4278년 12월 1일(서기 1945년), 동아일보 동인 일동은 삼가 이 일문(一文)을 초(草)함으로써 해방전선에 의혈을 뿌린 재천(在天)의 영령께 봉고(奉告)의 예를 삼가 갖추며 아울러 3천만 동포의 심금에 격(檄)한다.

동아일보의 「중간사」는 거짓과 후안무치로 가득 찬 ‘말장난의 극치’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글에는 동아일보가 1920년 창간 이래 1940년 폐간 때까지 저지른 친일·반민족 행위들에 관해 한 마디 반성이나 사죄도 없다. 조선민족은 독립을 할 능력이 없으니 일제에 ‘자치를 청원’해서 영원히 식민지로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설, 1930년대 일제의 중국침략전쟁 시기에 무수한 사설과 기사로 ‘대일본제국 황군의 성전’을 찬양하면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는 허황한 구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던 지면에 대해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이 「중간사」의 첫 대목은 조선민중에 대한 기만과 사술(詐術)의 표본이다. “천도(天道) 무심치 않아 이 강토에 해방의 서기를 베푸”신 성조(聖祖)는 단군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는 일본 신화 속의 인물 천조대신을 ‘성조’라고 불렀다. 친일매국을 하던 때에 즐겨 쓰던 말이 해방공간에서 ‘단군 할아버지’ 쪽으로 임자를 바꾼 셈이다.

‘황군의 연전연승’에 열광하던 동아일보는 일제가 패망하자 ‘동아에 빛난 십자군의 무훈’을 찬양하고 있다. ‘대일본제국의 철천지 원수’라던 미국, 영국, 중국 등 연합국이 조선에 해방을 가져다주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위의 글은 ‘일장기 말소’로 무기정간을 당하게 되자 동아일보 경영진이 조선총독부에 갖은 로비를 하면서 구구도생하려고 했던 사실은 숨긴 채 ‘폐간의 극형’을 당했다고 과장하고 있다. 그리고 동아일보가 일제의 ‘갖은 모욕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민족의 면목을 고수’하려고 ‘최후의 고절’을 다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중간사」가 드러내는 역사 왜곡의 절정은 19408년 8월 10일 동아일보가 ‘살해’를 당하자 “민족은 감각을 잃었고, 지성을 잃었고, 정조를 잃어” “천지가 암흑”에 덮였다는 부분이다. 일제와 그 ‘천황’을 향해 ‘진충보국’ ‘언론보국’을 외치던 동아일보가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은 독립과 해방을 열망하는 조선민중에게는 차라리 ‘자축’할 사건이었을 수도 있다.

동아일보가 진정으로 민족공동체를 위한 정론지로 태어나려면 일제강점기에 오욕으로 얼룩진 지면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하고나서 ‘신생독립국’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언론이 되겠다고 다짐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동아일보 동인 일동’은 알맹이도 없는 미사여구로 독자들을 현혹시키는 「중간사」를 통해 그 신문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지를 예측할 수 있게 했을 뿐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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